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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이 있는 세상(마 2:1-6 ) / 이수영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0.

<소망이 있는 세상> 마2:1-6

새문안교회 주일예배

 

설교 이수영 목사

 

아기 예수의 탄생, 즉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은 많은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그 많은 의미들 가운데 오늘은 이 세상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 세상으로 하여금 소망이 있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관점에서 그의 탄생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어려서부터 성탄절 때마다 빠짐없이 들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오늘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해봅니다.

 

 

 

첫째는, 1-2절에서 읽는 대로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그의 별을 보고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 누워계신 곳까지 찾아왔다는 사실입니다. 먼 동쪽 이방나라로부터 현자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아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지난 주의 설교본문 중에서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2:30-32).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시라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만을 위해 예비되셨고 유대인만을 비추는 빛이셨다면 우리에게는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가리키는 별이 동방의 박사들에게 그 빛을 비추고 그들을 아기 예수에게 인도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밖에 있던 모든 사람들도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예고하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뭐라고 썼습니까?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2:12, 19)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를,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소망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둘째 사실은 아기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이 어떤 마을입니까? 본문 6절에 보면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했습니다. 이것은 베들레헴이 작지 않은 마을이라는 말이 아니라 비록 작지만 위대한 마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마을에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 즉 메시아가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미가서 5장 2절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이렇게 작은 마을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신 곳은 베들레헴이었지만 거기서 살며 자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들은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안전하게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선지자의 예언대로 갈릴리 나사렛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7:50-52에서 우리는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대답하기를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요1:45-46에 보면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 말하기를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하자 나다나엘에게서 곧바로 나온 말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멸시하거나 천대하는 곳에도 주님은 오시며 주님께서 계시는 모든 곳은 소망이 있는 세상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오늘날 베들레헴과 나사렛은 모두 얼마나 큰 도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큰 도시, 큰 나라가 아니면 안 오시는 분이셨다면 시골에 살고 작은 나라에 사는 사람들에게 무슨 소망이 되시겠습니까? 비록 산골 벽촌에서 태어났더라도 주님을 바로 만나기만 하면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도 비록 열강에 둘러싸인 작은 나라이지만 예수님을 바르게 영접하기만 하면 소망이 있는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이 말씀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큰 위로와 용기와 희망의 메시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그린 거의 모든 그림에서 예수님은 아주 얼굴도 잘 생기고 풍채도 좋게 그려져 있는데 얼마전 고고인류학자 같은 과학자들이 예수님에 관한 모든 정보와 자료들을 종합해서 실제 예수님과 가장 흡사하리라고 작성한 초상은 꼭 산도둑놈 같이 되어있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과 실망과 불쾌감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예수님은 어떤 모습을 하셨겠습니까? 이사야 53장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고난받는 종,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유명한 예언입니다. 그 가운데 특히 4-6절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런데 이에 앞서는 2-3절에는 그 메시아의 용모와 풍채에 대한 다소 충격적인 묘사가 들어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께서 이런 볼품없는 용모를 지니셨다는 것은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용모에 자신 없어 하는 모든 분들은 다시 오시는 주님에게서 큰 기쁨과 자부심을 되찾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앞서는 1장의 앞부분 ⅔는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면 흥미있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거룩하신 예수님의 족보에 그다지 자랑스럽지 못하거나 아주 부끄러운 인물들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거기 등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여인들이 있는데 그 중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제외하고는 신분과 행실에 다들 문제가 있습니다. 이방여자들이거나 불륜의 관계를 가졌던 여자들입니다. 여인들만 문제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의 모두가 문제 있지만 특히 9-10절에 나오는 요람이나 아하스나 아몬은 아주 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세 사람에 관한 성경의 기록만 몇 구절 보면 이렇습니다.

 

 

 

먼저 대하21:6, 11에 있는 요람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가 ...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음이라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는 것이고 "또 유다 여러 산에 산당을 세워 예루살렘 주민으로 음행하게 하고 또 유다를 미혹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아하스에 대한 대하28장의 기록 중 1-4절을 먼저 보면 "아하스가 ...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아니하고 /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의 자녀들을 불사르고/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니라" 했으며, 16절 이하를 보면 에돔 사람들이 다시 와서 유다를 치고 그의 백성을 사로잡으며, 블레셋 사람들도 침노하여 마을들을 점령하고 거기에 사는가 하면, 도움을 청하여 온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은 돕기는커녕 도리어 그를 공격하였고, 아하스가 여호와의 전과 왕궁과 방백들의 집에서 재물을 가져다가 앗수르 왕에게 주었으나 그에게 유익이 없는 등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여 이르되 아람 왕들의 신들이 그들을 도왔으니 나도 그 신에게 제사하여 나를 돕게 하리라 하였으나 그 신이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더라/ 아하스가 하나님의 전의 기구들을 모아 하나님의 전의 기구들을 부수고 또 여호와의 전 문들을 닫고 예루살렘 구석마다 제단을 쌓고/ 유다 각 성읍에 산당을 세워 다른 신에게 분향하여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였더라"(대하28:22-25) 했습니다.

 

 

 

또 아몬에 관한 대하33:22-25의 기록은 이렇습니다: "그의 아버지 므낫세의 행함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아몬이 그의 아버지 므낫세가 만든 아로새긴 모든 우상에게 제사하여 섬겼으며/ 이 아몬이 그의 아버지 므낫세가 스스로 겸손함 같이 여호와 앞에서 스스로 겸손하지 아니하고 더욱 범죄하더니/ 그의 신하가 반역하여 왕을 궁중에서 죽이매/ 백성들이 아몬 왕을 반역한 사람들을 다 죽이고 그의 아들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으니라".

 

 

 

이렇게 이들은 하나님을 버렸고 또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부끄러움 많은 조상들의 가문에서 예수님은 태어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한편으로는 충격적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크나큰 위로와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순수한 혈통과 아무 흠도 없는 성자나 위인들로만 이룩된 명문대가에서 태어나셨다면 잘난 조상도 하나 없거나 국제결혼으로 피도 많이 섞였거나 옥살이를 한 조상이 있는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얼마나 주눅들겠습니까? 예수님은 영욕이 교차한 혈통의 평범한 목수의 가정에서 태어나심으로써 혈통과 신분에의 차이 없이 모든 사람에게 소망이 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자신의 복중에 생긴 아이에 대해 감사하며 그 유명한 소위 마리아 찬가를 불렀습니다. 거기서 그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눅1:48).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이렇게 비천함을 행복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아무리 비천한 세상이라도 소망이 있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찬가는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 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50-53). 이처럼 두려워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며, 권세 있는 자를 내리치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며,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기도 하시는 주님이시기에 그의 오심은 우리 모두에게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야 교만한 자들의 세도와 부패한 권력과 가진 자들의 횡포로 말미암아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눌림과 설움을 받아야만 하는 소망 없는 이 세상이 소망 있는 세상으로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예수님의 탄생 소식은 동방 먼 나라의 박사들에게만 알려진 것이 아닙니다. 보다 직접적으로는 밤에 밖에서 양 떼를 지키던 베들레헴 지역의 목자들에게 천사가 전해주었습니다. 엤날 다윗 왕도 양치는 목동이었지만 신약시대에 와서는 목자들은 종교적으로 주도권을 쥐고 있던 집단으로부터 세리와 마찬가지로 천대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천대받는 사람들에게 메시아의 탄생이라는 크고 놀라운 기쁜 소식이 제일 먼저 전해진 것입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눅2:11-12). 이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한 일입니까?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왕이나 고관대작이나 재벌들이나 석학들에게만 알려지는 것이라면 나머지 모든 사람들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주님의 오심은 그 어떤 사회적 계층의 차별 없이 이루어지며, 그래서 그의 오심은 이 세상을 소망 있는 세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메시아의 탄생소식을 전하자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했습니까?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며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했습니다(눅2:113-14). 이것이야말로 역사상 최초의 "메시아" 공연이었습니다. 사람이 부른 헨델의 "메시아"가 아니라 천군천사가 밤하늘에서 부른 최초의 야외 "메시아" 공연이었습니다. 이 음악회에 초대받은 영광을 누린 이들이 누구였습니까? 천대받는 목자들이었습니다. 여기에 위대한 성탄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또 메시아 합동 대연주회 얘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이래서 성탄절에 우리 주위의 소외된 이웃형제자매들을 초청하여 함께 메시아 공연을 갖는 것은 너무나 의미있는 일인 것입니다. 이런 메시아공연은 이 세상 모든 이에게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메시아의 오심을 전하는 것은 거짓되고 부패하고 각박하고 황량한 이 세상을 소망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춥고 어두운 오늘의 상황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 맞이함으로써 소망 속에 살아가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소망이 있는 세상으로 바꾸는 이번 성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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