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개혁주의 교육학-코넬리우스 반틸

by 【고동엽】 2014. 7. 15.

개혁주의 교육학-코넬리우스 반틸

 

1. 교육의 상반성(Antitheses in Education)

코넬리우스 반틸

신자가 사는 원리는 불신자가 사는 원리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것은 교회 뿐만 아니라 교육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우리는 교육에 대하여 말할 때도 세상과 상반(相反)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상반성은 교육전반에 걸쳐있다. 첫째는 교육철학 분야로서 근본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흔히 무시되고 있다. 둘째는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하는 커리큘럼 분야에서 나타나며, 마지막으로는 교육의 대상자인 어린이나 청소년들을 고려할 때 나타난다. 이 세가지 요소를 염두에 두고 교육철학의 상반성을 이끌어내고자 한다.

비그리스도인은 우주가 하나님을 창조해냈다고 믿기에, 그들의 신은 유한한 존재일 수 밖에 없는 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해냈다고 믿음으로 그들에게는 우주가 유한한 것이다. 그러므로 비그리스도인들은 어린이가 하나님과 대면(對面)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으며, 어린이로 우주를 대면토록 하길 원한다. 비그리스도인의 교육은 하나님이 없이는 교육으로,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절대적인 필수불가결의 요소가 전적으로 방치되어 있다.

하나님 없는 교육은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책임있는 존재로 창조된 점을 무시하거나 부정한다. 이는 죄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며, 그러기에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실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없는 혹은 무신론적 교육운 비(非)기독교적인 동시에 반(反)기독교적인 교육이다. 하나님 없는 비기독교적인 교육운 자연적으로 인본주의적이거나 인간 중심으로 된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을 위하여 살 필요가 없다면, 자신을 위하여 살 수 있는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 중심적인 진정한 기독교 교육을 원한다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교육철학으로부터 완전히 도망쳐 나와야 할 것이다.

비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이 전혀 미지의 세계에 둘러 싸여 있다고 믿으며, 인간은 안개 속에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 같은 정도의 적은 지식밖에 전혀 아는 것이 없다고 한다. 크리스천은 원래 인간은 과거에 하나님의 계시의 빛과, 사실 계시로서의 그리스도와, 말씀계시로서의 성경 안에서 살았으며, 현재 인간은 원리적으로 그리한 하나님의 참된 빛을 회복했다고 믿는다.

따라서 비그리스도인의 교육은 한 쪽 방향으로 질주해 들어가 보고는, 그것이 무지를 극복해 냈다는 착각 아래 다시 다른 쪽으로 질주해가든지, 아니면 완전한 절망 속에서 전적으로 멈추어 버리든지 한다. 흔히 비크리스천 교육가들은 교육의 목표나 목적에 대한 이념을 전혀 폐기해 버린다. 그들은 인간의 환경에 대한 “기능적 조정”을 말한다. 그러나 만약 사람이 길의 향방(向方)을 알지 못하고 안개 속을 헤매인다면, 어떻게 “속도를 낼 수 있겠는가?”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교육의 목적을 알며 교육의 내용 역시 알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독교적으로 정의된 방식은, 내용적으로도 기독교적인 교훈 속에서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비그리스도적인들은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는 한 하나님과는 동떨어진 지식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사람의 마음은 빛을 밝히기 위하여 가동울 필요로 하는 전구가 아니라, 오히려 직접 공급을 받아 밝히는 오일랩프와 같다.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계시가 유입되지 않는 한 모든 것이 깜깜하다고 믿는다. 우리는 이러한 조명없이는 어떤 “사실들”을 알 수 조차 없다.

따라서 비크리스천 교사들은 종종 그들이 실제로 “사실들”을 소유하고, 알고 있으며,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어린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다고 믿지만, 그들은 곧 그 “사실들”이 실로 어둠 속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 완전히 자포자기한 절망의 상태에 빠지고 만다. 크리스천 교사들은 어떤 단순한 사실도 하나님의 계시의 조명을 받지 않고는, 참되게 알려지거나 가르침 받을 수 없음을 안다. 수학의 법칙까지도 달리는 알려질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기본적 특성들에 대하여 자각해야 한다. 그러한 자각 없이는 결코 순수한 크리스천 학습을 가질 수 없다. 그렇다고 이러한 특성들을 자각하는 것이 다른 과목을 가르치는 것보다 직접적인 종교교육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만약 우리가 간접적으로 어디서든지 항상 종교를 가르치려고 한다면, 종교를 직접적으로 가르치는 데는시간을 덜 들일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이러한 특성들을 자각하는 것은 커리큘럼의 계혁이 하나님 중심적이 되는 다른 것들은 인간을 위하여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커리큘럼은 인간중심이 돼야 한다. 이렇게 될 때만 그것이 하나님 중심이 된다.

비그리스도인들은 어린이의 인격이 하나님을 대면하지 않는 위치에 있을 때만 최상으로 발달할 수 있다고 믿지만, 크리스천들은 어린이의 인격이 하나님과 대면하는 위치에 놓이지 않는 한, 전혀 발달을 가져 올 수 없다고 믿는다. 비크리스천 교육은 어린이를 진공상태에 두며, 이러한 진공상태에서 어린이가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그 결과 어린이는 질식 해 죽고 만다. 크리스천 교육만이 실로 인격을 양육할 수 있음은, 그것만이 어린이에게 물과 공기를 공급해 주기 때문이다.

비크리스천들은 권위가 어린이의 성장을 저해한다고 믿지만, 크리스천은 권위 없이는 어린이가 전혀 살아 갈 수 없다고 믿는다. 비그리스도인들은 “전문가”의 권위를 말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권위가 못된다. 크리스천은 인간 창조주로서의 하나님과 구속주로서의 그리스도의 개념에 기초한 권위를 필요로 한다.

이같이 우리는 교육전반에 걸쳐 교육 원리의 상반성이 존재함을 보게 된다. 한편에서 상반되는 개념을 강화하기 위하여 다른 한편에서 상반되는 개념을 무시하는 것은 정력과 자산을 낭비하는 일이 된다. 우리는 이것을 정당화할 수 없다.


I. 교육철학 분야의 상반성

전체 기독교 교회는 상반된 개념 위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상반성(antitheses)의 개념 위에 근거한 것이 있다면, 일반적인 기독교에서보다 기독교 교육에 있어서 특별히 더 극명한 사실이 되고 있다. 아, 그렇다. 나는 사방에서 우리는 건설적인 것을 강조해야 한다고 말하는 목소리들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들은 그러한 것이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준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긍정적이고 건설적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 죄많은 세상에서 크리스천 개인이나 조직은 그들이 부정적이거나 파괴적이 될 때 까지는, 진정한 의미로 긍정적이거나 건설적이 될 수 없다. 이 사실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죄에 대한 사실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과 같다. 악마의 영도력 아래서 인간에 대하여 하나님을 모욕하는 미성숙한 성경적 암시를 가지고 죄의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상반성은 전형적으로 통합의 기초가 된다. 좋은 소식을 가져다 주고 평화를 공표하기를 원하는 사람, 축제를 벌이고 맹세를 하기 위하여 유다를 방문하는 사람은 그의 낙천적의에 대한 근거로서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라는 확신을 보여주지 않는 한 그는 거짓 선지자에 불과하다.


하나님에 대한 비크리스천의 개념
교육의 상반성에 대한 어떤 것을 도출해 내려고 할 때, 우리는 무엇보다도 진정한 상반성은 단 한가지 밖에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는 교육 이론의 모든 차이는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문제, 이 한 잇슈로 압축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기만 한다면, 상반성의 복합성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모든 교육 프로그램은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교육 된, 성장하는 인격을 낳는 데 맞추어져 있다. 그렇지만 환경이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색깔이 없다. 만약 우리가 교육이 “환경에 대한 성장하는 인격의 조정”이라고 말할 것 같으면, 그러한 정의(定意)는 성장하는 인격이 조정받게 되는 환경이 무엇인지를 규명하지 않고는 전혀 의미가 없게 된다. “환경이 무엇을 뜻하느냐는 질문을 제기하게 될 때 실재에 대한 기독교적 유신론과 무신론적 학설이 서로 정반대되는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이 즉시 발견 될 것이다. 전자(前者)는 인간 인격이 조정(調整)되는 환경은 궁극적으로 인격적이라는 것을 확고히 해주는 반면 후자(後者)는 그것을 부정한다.

초인간적(超人間的) 인격 혹은 인격들에 관하여 말하는 실제에 대한 무신론적 학설이 많이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그들의 견해를 궁극적인 인격으로 되게하지 못한다. 실재 이론은 완전한 인격으로서의 하나님을 상상하지 않는 한, “인격적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가능하며 흔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를 절대적인 존재로 생각지는 않는다. 그러한 일신론은 노골적인 다신론과 다를 바 없는, 엄밀한 의미에서 유신론이 아니다. 어린이가 조정받는 신(god) 혹은 제신 스스로가, 그들과는 멀리 떨어져 있거나 독립된 운명, 혹은 우주 혹은 실재에 조정되어져야 한다면, 그러한 경우에 우리는 그만큼의 중간지대에 대한 안목을 가질 수 없으며, 어린이는 우리가 가장 궁극적인 것으로 알컫기 위하여 선택하는, 운명 또는 우주, 실재, 또는 그 외의 어떤 것에 조정받아야 함이 분명하다.

오늘날의 교육철학이 어린이가 조정받아야 하는 궁극적으로 비인격적이며 상반된 환경을 전제하고 있음은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현대의 사변사상의 흐름을 추적해 나가다 보면 여기 저기서 완전한 진리, 절대적 진실의 믿음 같은 진술들을 발견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흔히 사람들이 완전한 존재로 지칭하기까지 하는 “하나님”이란 단어와 동일시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와 같이 말할 때는 그것이 온유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현대철학의 “하나님”은 기껏해야 그들 스스로가 설정하고, 그들 스스로가 궁극적인 판단을 가하는, 어떤 이상의 구현에 불과하다. 따라서 은유적인 하나님이란, 모든 현실적인 목적을 위한 유한된 하나님에 지나지 않는다.

유행하는 교육철학에 의하면, 어린이가 조정받아야 하는 것은 이러한 우주, 실재에 대해서이다: 그가 받을 교육내용은 이러한 조정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인격적인 환경과 비인격적인 환경 사이에 존재하는, 아주 결정적인 상반성으로까지 그들을 추적해 올라가지 않는 한, 교육의 상반성의 깊이를 파악 할 수 없다는 귀결이 따르게 된다. 이 보다 더 근본적인 차이는 생각할 수 없다. 전반적으로 비인격적인 바탕 위에 설립된 교육 프로그램은, 인격적인 바탕 위에 설정된 교육 프로그램과는 전적으로 배치된다. 우리는 이러한 점을 아래에서 다루게 될 것이지만, 여기서는 단지 모든 크리스천 교육가들은 싫던 좋던 이러한 점을 명심해야 한다는 사실에 주의를 촉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누구든지 이러한 인식에 전적으로 붙잡히기만 하면, 크리스천 교육은 세속적인 교육이 소홀하고 있는 어떤 요소들을 참가하거나 강조하는 차이에 지나지 않는 정도의, 소위 다른 교육이 말하는 식으로, 90, 60, 30, 10퍼센트 정도의 기독교 교육 따위 같은 말은 상상할 수도 없게 될 것이다. 기독교 교육을 전적으로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공립교육이 지향하는 이념 같은 것을 위하여는 1퍼센트의 여지도 남겨주지 않게 된다. 두 가지 교육학설을 뒷 받침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서로 다른 개념들은 전반적으로 전면에 나타난 모든 점들과 전(前) 후(後) 안 밖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내가 이와 같이 완전한 상반성을 강조할 때, 한 순간도 일반은혜의 교리를 부정하거나 망각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그 교리는 절대적인 상반성의 교리에 역효과를 내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뿐만 아니라 그 어디에서나 그것을 더 공고히 해준다. 일반은혜가 궁극적인 차이를 간과하지 않으며 정확하게 이해되기만 하면, 그것은 어떤 면으로도 그러한 궁극적 차이를 약화(弱化)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일반은혜는 비슷해 보이면서도 전혀 다른 어떤 것들을 지적해 내는 데 도움을 준다.

일반은혜는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과 이 세상 사람들 사이에는 다만 근접한 유사점들이 있으며, 이러한 근접한 유사성은 궁극적인 차이의 배경하에서만 연출된다. 사람들이 일반은혜를 믿지 않거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할 때, 근접한 유사성을 궁극적인 유사성으로 승격시키거나 근접한 차이를 궁극적 차이로 승격시킴으로 말이암아, 궁극적인 차이를 약화될 결과를 낳기 쉽다. 이러한 현상은 비개혁주의 교회에서 흔히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종교란 삶의 중성적인 영역에 참가 될 수 있는 조미료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부터 비롯되어졌다. 그들은 일반은혜의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 교회들은 크리스천들이 2×2=4라고 하는 것이나, 비기독교인들이 2×2=4라고 하는 것에는, 그 배경에 있어서 궁극적인 차이가 없음을 당연시하고 있다.

2×2=4라는 사실은 당신과 같이 신자에게 있어서와 다른 불신자에게 있어서 동일한 것이아니다. 당신이 2×2=4라고 생각할 때, 당신이 이 사실을 수의 법칙과 연관지운다. 그리고 당신이 이 사실을 수의 법칙과 연관지우려면, 수의 법칙을 모든 법칙과 연관지어야 한다. 그런데 당신이 직면한 문제는 그 법칙이 그 자체의 정당성에 기인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의지와 속성의 표현인가 하는 점이다. 이렇게 2×2=4라는 사실이, 당신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하나님의 속성과 의지 속으로 깊이 얽혀지도록 해 줄 수 있는 반면, 불신자가 2×2=4라고 말할 때는 그 역시 이 사실을 온통 수의 법칙에 대한 것으로만 연관짓도록 인도받을 것이며, 그는 이러한 법칙을 하나님과 무관한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이같이 2×2=4라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으며, 그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일반은혜의 교리가 우리에게 깨닫도록 도와 준 것은 “2×2=4”가 신자에게 의미하는 바와 불신자에게 의미하는 바 사이에 놓여 있는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어떤 사실들에 불공정하게 대처하고 있다는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우리의 시선을 상반성에 맞출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상반성에 보다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서, 그것이 교육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점을 주시하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첫 번째 일로, 어린이가 조정(調整)받아야 할 우주가 비인격적인 것이라면, 어린이와 우주 사이에는 상반됨이 없다는 극단적인 한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크리스천 유신론자로서의, 삶의 상반성이 좌시(坐視)되지 않는 삶과 세계관을 가질 수 있는 반면, 무신론자들은 삶의 상반성이 좌시된 삶과 세계관을 갖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가 먼저 깨뜨릴 때까지는 건설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반면, 모든 비그스도인은 깨뜨리는 일이 선행되지 않고도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없는 교육. 이 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점들 중의 하나는, 아마도 우리 반대자들의 비인격성 이론의 근거 위에서는, 사람과 그의 환경 사이에는 변증적인 관계가 없다는 점일 것이다. 누가 비인격적인 법칙과 관계 속에 서 있을 수 있겠는가? 당신은 그와 같은 법에 책임을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어떤 개념도 획득할 수 없다. 이제 크리스천 윤리 혹은 도덕의 전체적인 구조는 이러한 합법적인 관계를 전제한다. 성경은 죄를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으로 정의한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법적인 관계의 가능성과 실현을 전제하지 않고는 건전한 죄의 교리는 파선하고 만다. 죄의 교리가 파선될 때 이 세상의 악을 다루는 유일한 길은, 악을 우주의 구조적 실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고대와 현대철학을 막론하고, 부정은 긍정과 같이 근원적이고, 악마는 하나님과 같이 오랜 기원을 갖고 있다는 견해를 고수해 왔다.

이와 같이 모든 윤리적인 특성들이 형이상학적인 특성들로 저급화되고 있다.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 것이 존재함으로, 존재하는 것은 마땅히 존재해야 한다” 이것은 단지 어떤 철학 학습이론이 아니라 바로 비중생적 철학사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기독교가 불가능하다는 귀결을 도출한다. 죄가 없기에 죄를 없이 할 일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없이해야 할 죄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없이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은, 역사의 과정 안에 있는 어떤 한 지점에서 나타나는 사람은 그가 누구든지 간에, 기독교가 그리스도에게 부여하는 것과 같은 절대적인 독특한 위치를 점(占)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어떤 윤리나 도덕이 이러한 비인격적인 철학 위에 기초한 학풍 속에서 가르쳐 질 때, 그것은 이교적인 윤리나 도덕이 되고만다는 자연스러운 귀결아 나온다. 그렇게되면 참된 모든 기독교적인 것은 사실 배제되고 만다.
둘째로 어린이와 환경 사이에 놓여진 모든 상반성을 철저히 제거해 버릴 때, 우주에 대한 비인격적인 개념이 필연적으로 모든 것을 절대적 상대주의로 이끌어 갔다는 사실 속에서 보다 분명히 나타난다. 플라톤의 “영원한 이데아”는 영원할 정도로 그렇게 오래 존속하지 못했다. 플라톤 자신이 악의 궁극성을 주장했을 때, 그는 그들 속에 현세주의를 주입시켰다. 이와 같이 그는 이상세계를 덧없는 세상 위에 세웠다. 시간은 움직이는 영원의 형상이 되었다.

오늘날에 있어서 이러한 모티프는 실용주의가 공개적으로 배타적인 현세주의를 공언(公言)하고 나설 때 까지는 충분히 성취되어 왔었다. 반면에 이상주의는 시간과 영원을 “구체적인 일반개념”과 상호연관지었다. 그것은 달리 어찌할 수 없었다. 비인격적인 것이란 본래 그것이 인격적인 것과 연관되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만약 비인격적인 것이 완전하신 하나님의 인격과 연관되지 못하고, 그 하나님으로부터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인격에 복종하게 마련이다.

진화론(進化論)은 이러한 보편적 경향의 한 특별한 현현(manifestation)에 불과하다. 공립학교에서 진화론과 싸우고, 또 그렇게 함으로 당신이 문제를 최소화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진화론의 배경에는 상대주의와 비인격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한 상대주의적인 기반 위에서는 사람과 환경 사이에 상반성이 있을 수 없음이 즉시 간파될 것이다. 그러한 바탕 위에서는 하나님과 사람은 서로에게 상대적으로 의존되어 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바로 이러한 상대주의가 상반성의 무한성을 준비한다고 말한다면, 일리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그러한 경우에 상반성을 마련해 줄 수 있는 존재가 없기에 그것들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사람이 하나님보다 높지 못하고, 하나님도 사람보다 높지 못하다면 누가 어느 한 쪽을 판단할 수 있겠는가?
인본주의적인 교육. 이제 크리스천은 이러한 철학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사단의 인류에게 행한 첫번째 일은 이브에게 그녀가 하나님의 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무시한다고 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준 일이다. 사단은 우주는 중성적이며 그 안에는 상반되는 것이 없다는 암시를 그녀의 마음속에 주입시켰다. 악마는 이브에게 자신이 하나님만큼 오랜 기원을 가졌다고 말했으며 악마는 이브에게 하나님과 자신을 모두 지배하는, 한 비인격적인 법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하나님의 인격을 공개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완전한 인격을 넌지시 부인하였다. 사단은 인격철학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는 때때로 거짓크리스천들이 스스로를 참된 크리스천으로 믿게 할려고 할 때, 노골적인 비인격철학보다 인격철학을 더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교육학습 커리큘럼이 그러한 상대적 교육철학 위에 기초할 때, 어린이는 실제로 자신이 행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는 것을 확고히 터득하게 된다. 아, 그렇다 그것은 현세를 헤쳐 나가는 것과 연관되는 한에서만 문제시 삼는디. 정직이 여전히 최선책이 되고 있다. 만약 당신이 정직하지 못하다 해도, 그것 역시 당신이 “그것과 결별”할 수 있는 한 문제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온 우주는 “결별을 위한” 장소가 된다.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 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 하시며” 여호와는 단지 비인격적인 자연법의 상징적 표현에 지나지 않게 된다.
선지자 스바냐가 여호와의 언약 백성의 삶 속에서 이러한 태도가 침투해 오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가능한 가장 높은 톤으로 상반성을 설교했다. 그는 분노와 환난의 날로서의 심판날을 설교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교육정책에서, 하나님이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어떤 연대를 갖는 것 보다 더 이상 그들의 창조주와 구속주를 혐오스럽게 모욕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하나님이 더 이상 그의 약속과 경고 속에서 인식되지 않을 때 이미 악마가 바랄 수 있는 최고의 목표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은 그렇게 큰 소란 없이 파멸로 나아가는 일이 된다.
하나님 중심의 교육. 말할 나위 없이 기독교 교육자로서 우리의 첫째되는 임무는 상반성 없이 이러한 교육(하나님 중심)을 대면해야 하고 또 그것을 향하여 철저히 상반된 태도를 취해야 하는 일이다. 현대 교육철학은 우리 하나님과 구주를 혐오스럽게 모욕한다. 당신은 어떻게 기독교와 유신론을 부인하는 바탕 위에서 적극적으로 기독교적 혹은 유신론적인 어떤 것을 건설하기를 기대하겠는가?
여기에 우리가 긍정적 일 수 있기 전에 먼저 부정적이 되어야만 할 명제가 나타난다. 우리가 이후에 진실로 건설적이 되기 위하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교육철학 속에 내재된 부정적안 것들을 먼저 부인해야만 한다. 현대철학의 이러한 부정적인 것들을 부인하기에 실패한 당신의 어떠한 건설적아며 통합적인 것도, 그 자체가 부정적이며 파괴적인 것이 된다. 여기에 교육의 상반성이 놓여 있다.

신비의 대한 비기독교적 개념
이제 실제의 견지에서보다 오히려 지식의 견지에서 동일한 상반성을 보기 위하여, 현대 교육철학에 근거하여 사람은 전적으로 자생적 존재라는 주장을 주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다만 비인격적인 실재이론의 자연스러운 부가물이 아니다. 비인격적인 우주에서의 하나님이 기껏해야 지식의 분야에서 사람의 조력자의 위치에 불과하다. 공허함이 하나님과 사람 모두를 둘러싸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을 진리의 표준으로 삼는다. 그가 실재의 성격에 대하여 자르게 생각하지 못하면 그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되며, 그가 실재의 성격에 대하여 일체 생각하기를 선택하지 않을 때는 그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머신토쉬는 이렇게 말했다. “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정말 관심을 갖지 않는 일에 대하여 그의 시간을 쓰도록 강요 할 수 있는 어떠한 인간적인, 신적인 법은 없다; 흥미로운 일에라야 발동되는 인간의 능력은 제한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그것은 기껏해야 자신의 특별한 기호와 일치되는 일들에 자신을 묶어 두는 일이나 다를바 없다.” 톨스토이의 안나 까레리나(Anna Karenina)에서 주연급 배우 중의 하나가 극(劇) 중에서 신들(gods)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만 한다면, 그 일에 약간의 실수가 있다고 해도 우리에게서 트집을 잡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는 자신의 견해를 나타낸다. 이제 그러한 표현태도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과 어떤 접촉도 가진 적이 없었으며, 실재의 진리 즉 자신과 그를 둘러싼 우주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는 어떤 정보도 가진 적이 없다는 것임을 전제한다.


인간은 그가 하나님에 대한 어떤 문의도 없이 현실을 해석하는 그 일을 수세기 동안 스스로 시도해 왔다는 것을 이제 어떻게 느끼는가? 인간은 자신의 최선을 다 해 왔다. 그는 모든 신비(all mystery)를 정복하기 위하여, 혹은 당신에게 있어서라면 어떤 특정한 신비의 정복을 위하여, 스스로의 지성의 지렛대를 가지고 그 분야로 용감히 뛰어 들었었다. 그리고 그의 지성(知性)이 그를 실패케 했을 때, 주위가 온통 신비로 가득차 있다는 느낌을 받도하기 위하여 자신의 존재 수준을 낮게 이끌어 내리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 마저 실패했을 때는, 현실이란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이라는 결론으로 내몰아 간다.
이러한 것이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견해이다. 우리는 어떤 특별한 사실에 대하여 얼마나 주의 깊고 철저하게 연구할 수 있는가에 상관없이 무리수는 남게 마련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실재를 전부 다 알 수 있다고 하는 말에 대해서 그것은 자만에 근거한 말로 치부된다.
오늘날의 철학자들은 온전한 실재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해 버렸다.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총체적 실재(total reality)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한 것으로서의 앎의 관념, 즉 총체적 실재에 대한 통찰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총체적 실재의 존재는 본래 불가해적이다.” 그러나 철학자는 모든 사물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역시 자각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전체를 모르고서는 그러한 전체에 속한 어떤 일부분도 전적으로 알 수 없음을 알고 있다. 하나(one)와 다수(many)에 대한 의문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난해하다. 총체적인 실재는 미지에 속한 것이고, 그 결과로 무리수가 모든 특별한 사실들을 둘러싸고 있다.


이런 모든 것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결과는 현대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정박지 없는 바다 위에 버려진 표류자로 느끼게 한다. 그는 자신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라는 느낌에 압도당하고 있다. 아니 그 이상으로 전율을 느끼게 까지 한다. 그는 “레벤쌍스트”(Lebensangst-삶의 염려)에 대하여 많이 말한다. 염려란 모든 인간 관계가 단지 일시적 가치만 갖게 됨으로 인하여, 상실점(lost point)이 빈 공간 속으로 삼켜질 정도까지 상승하게 될 때, 의식의 수면으로(to theconsciousness) 올라 온다. 인간은 그가 알 수 없고 조정(contrl)할 수 없는 그러한 궁극적인 비합리적 존재에, 아무튼 의미심장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느낀다.

이러한 현대의 비합리주의를 볼 때, 우리는 그것을 전적으로 거절 할 것 외에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완전한 자의식적인 인격자로서의 정당한 지위를 내어 드린다면, 우리는 비합리주의에 대하여 정반대 입장을 견지할 수 있다. 그러한 경우에 우리는 우리의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의 유추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지식이 진리임을 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 속에서 살고 거동하며, 우리의 존재를 갖는다. 그리고 성경에 관해서는 오직 성경만이 인간이 창조된 원래의 계시된 분위기 속으로 사람을 복귀시키는 수단이 된다.

우리는 성경을 과학철학의 교과서로 간주하려는 구실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존재와 죄의 존재를 당연시한다면, 구속계시의 불가피성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실패하지 않는 한 따라오게 되어 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 이시다. 유신론이 기독교의 전제인 것 같이, 기독교 역시 유신론을 함유한다. 우리는 어느 한 쪽에도 의심을 제기하지 않는다. 공허함에 대한 두려움은 불신자의 삶을 조정하는 동기가 되며,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신자의 삶을 조정하는 동기가 된다. 당신은 두려움의 기반 위에서는 적극적이 될 수 없고, 공허함 속에서는 건설적일 수 없으며, 특별히 당신이 공허한 데 처하고서 건설적일 수 있음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다시 우리는 우리가 하는 어떤 일 속에서 정말로 건설적이 될 수 있기 위하여, 현대 교육 속에 내재된 부정적인 것들을 먼저 부인해야 한다.

불확실성과 두려움. 이제 우리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교육적인 현실로 눈을 돌린다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지금껏 논의해 온 교육철학과 정확하게 일치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우리는 교육 문제에 얼마나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가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교육분야의 책들이 부지기수이다. 사람들은 다음 세대의 교육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으며, 자기들의 세대는 소망이 없는 상태에 있음을 자각하고 있다. “스스로에 대해 신뢰를 갖지 못하는 세대는 자신을 교육에 몰입시킨다. 마치 여기에서라면 다시 뭔가 무에서 유로 나타날 것 같이 말이다.
둘째로 당대의 교육정책 속에는 구심점(Centrality)이 없다. 인간 삶의 중심이 무엇인지를 모르고서야 어떻게 존재해 나갈 수가 있겠는가? 우리는 인간 삶이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명확한 확신위에 기초된 정책을 따르는 대신에, 조급하고 신경질적인 일련의 미지에로의 실험들이 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선동가들은 차례로 일어나 외친다; 자 여기 그리스도가 있다; 자 저기 그리스도가 있다. 사람은 기껏해야 그가 이 세상에서 성취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때때로 어렴풋한 지식 외는 실재의 지식을 갖지 못한다고 생각함으로, 그의 교육정책들은 목표와 내용과 방식에 대한 것으로 분열되어 있다. 교육이론가들은 숨쉴 겨를이 없다. 그들은 개가 아무렇게나 던져지는 공을 쫓아 가듯이 이것 저것 막 질주해 들어 간다. 그렇게 볼 때 우리는 이러한 교육의 목표와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부정적인 요소를 부정하는 것 외에 달리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교육의 목적에 관해서는 그것은 설정 가능한 환경에 대한 조정(調整) 방식을 성장하는 인격에게 가르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교육목적은 교육의 목적에 대한 전통적 개념 즉 어린이에게 어떤 정보지식을 주기 위한 것이다는 견해와 상반된다. 기능적(functional) 교육이 개념적(conceptual) 교육을 대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소위 이러한 교육의 기능이론에 대하여 잠시만 주의를 기울여 보면 그것은 기능적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공허함 속에서는 아무런 기능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를 포함하여 그 누구도 그러한 환경이 진정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하여 전혀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다면, 교육의 목적이 사람들에게 환경에 대한 조정(調整)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한 자가당착이다. 공허함을 위한(for the void) 준비란 있을 수 없다. 현대교육은 공허함에 대한 준비를 시도함으로 모든 방향감각을 잃어버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기독교 교육 개념만이 진실로 기능적 교육개념일 수 있음을 즉시 알게 된다. 기독교적 바탕 위에서 성장하는 인격은 그것이 접촉하게 되는 환경 가운데서 만나게 될 보증 된 확신이 있으므로 따라서 기능적 조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 기능교육의 현대적 개념에 매혹당한 어떤 교사가 그러한 교육개념이 자신이 고백하는 기독교와 일치되고 있는가에 대하여 스스로 반문해 보는 일이 얼마나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지가 분명해진다. 트로이안(trojan) 기병대가 크리스천 캠프로 진입하는 일은 너무도 흔한 일이다.


지식과 신뢰. 이 경우는 크리스천 교육의 내용과 관련하여 전형적인 유사성이 있다. 역시 여기서도 우리는 기독교 유신론적 인생관 및 세계관에 대한 주도적 개념이 커라큘럼의 중심을 결정하게 함으로서 염려를 감소시키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러 저러한 주제들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소비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하녀 끊임없이 담장을 쳐다보는 일을 계속한다면 그렇게 큰 진척을 보지 못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항상 반대 편의 비판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직도 혼자 설 수 있는 법을 터득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다시금 이것은 우리의 반대자로부터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이 절대 아니다.
세계대전 중 독일인들은 연합국들로부터 배우고, 연합국들은 독일인들로부터 배웠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독일인들은 연합군들로부터 배운 것을 연합군을 대적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데 실패하지 않았고, 연합군 역시 독일군으로부터 배운 것을 독일군을 대적하기 위하여 사용하는데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와 같이 우리 역시 언약인격(a covenant personality)을 구성하는 우리 자신의 프로그램 속으로 적용 할 수 있는 것 만을 반대자로부터 넘겨 받을 수 있다. 명확한 기독교 유신론적 패턴 속에 설정될 수 없고, 언약인격의 발달로 이끌 수 없는 교육내용은 우리가 학풍 속에 나타날 어떤 권리도 갖고 있지 못하다.


끝으로 이것은 교육방법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도 역시 우리는 주위에서 사용되고 있는 방법들을 주시하는 데 매우 예민해야 한다는 유혹이 우리를 압도한다. 이것 역시 본래 명령적이면서 필수적이다. 모든 우수한 군인들은 적의 계교를 알아야하기 때문에 그것은 명령적이다. 적이 사용하는 어떤 방식들은 어쩌면 우리에 의해 변형되어 사용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것은 역기 명령적이다. 그러나 항상 변형되어진 것이 그것들임이 분명하다. 형식(form)이란 원래 중성적(neutral)이기에 우리사 학생들 앞에 구별된 내용(content)을 두기만 한다면 형식에 관해서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유리잔의 재질(材質)에 석탄산이 함유되어 있다면, 당신은 물로 한번 잔을 씻어냈다고, 거기에 물을 담아 자녀에게 마시게 하지 않는다. 분명한 기독교 유신론적 내용을 담기 위하여 먼저 비기독교적 정신을 담아 쓴 내용을 취해서 쏟아버린다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형식(form)과 내용(content)의 관계는 피부와 살의 관계와 같아서 어느 한 쪽을 손상하지 않고는 쉽게 분리할 수 없다. 우리 반대자들의 교육방법과 관련하여 우리를 지키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그들의 방법을 사용할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의 것과 유사해 보이는 방법들을 사용할 수 있으나, 결코 그들의 것들과 동일한 방법들을 사용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역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교육철학과 교육정책에 관한 우리의 결론은, 우리가 집중적이며 포괄적으로 부정적이 돼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적 유신론이라는 말이 뜻하는 만큼 결코 집중적이며 포괄적으로 적극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근간으로 삼는 상반성의 근본원리는 바로 그러한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우리의 교육정책에서 대담하게, 보다 더 일관성 있게 특별해지면 세상의 눈에는 확실히 “특별하게” 비칠 것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하나도 “특별”하지 않다. 만약 우리가 특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가 “특별하게” 비칠 것이고, 세상의 눈에는 배나 “특별하게” 보일 것이다.


II. 커리큘럼의 상반성

자 이제 당신이 나와 함께 조금만 심사숙고 해준다면, 나는 기독교 학교의 커이큘럼인것으로 나타나고, 항상 그렇게 특정지워져야 하는 몇 가지 외양들을 조망해 보고 싶다. 나는 다만 의도덕으로 결코 놓쳐서는 안될 몇 가지 외양만을 조망하고 싶다는 말을 덧붙히며, 프로그램을 설정하는 것을 가정하지는 않는다.
대략의 아우트라인 정도에서 커리큘럼을 고려하고, 정신이 혼란할 정도로는 세분화하지 않기 위하여, 특성과 역사를 다루는 정도로 언급하는 것이 좋을성 싶다. 그것은 공간의 “사실들”과 시간의 “사실들”을 다루며, 그것은 당신이 가르치는 주제(과목)가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것이 수학이든 바느질이든, 요리이든 음악이든 당신은 시-공간적 “사실들”을 다루고 있다.

나는 문제들을 보다 단순화하고 집중화하기 위하여 시간과 공간의 “사실들”보다는 오히려 시-공간적 “사실들”(spacetime facts)에 대해서 말한다. 모든 “사실들”은 시간과 공간과 함께 뒤엉켜 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그것들을 생각하지 않고는 “사실들”에 대하여 지적(知的)으로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형태나 내용이 역시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만, “사실들”의 형태로서의 공간과 시간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 빈 공간과 빈 시간은 무의미한 개념이다. 그러므로 커리큘럼은 “시-공간적 사실들”을 다룬다고 말해도 좋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한가지 더 서론적인 점들을 거론하고자 한다. “사실들”과 “법칙들” 사이에는 언제나 날카로운 구분이 있다. 만약 당신이 어떤 것들을 사물들이 따라 행하는 “법칙들”(laws)로 간주하였다면, 당신은 “사실들”(facts)을 설명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이것은 오도(誤導)하는 것이다. 법칙이란 단순히 “시-공간의 사실들”이 행하는 방법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법칙들이란 “사실들”에 대하여 배우려고 하는, 보다 큰 “사실들”의 부분 자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역사적인 “사실들”과 공조된 관계로 나타나지 않는 한, 혹은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의 실행의 법칙에 따라 나타내지 않는 한 전적으로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역시 “사실들”이란 말 아래 “법칙”이란 말을 포함시키는 것이 우리의 의도하는 바에 더 합당하다. 그러므로 “시-공간적 사실들”이라는 귀절은 그들의 구체적인 관계 속에 있는 모든 “사실들”과 “법칙들”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제 이러한 서론적 내용의 고려와 함께 역시 우리는 이제까지 어떤 기독교 학교 커리큘럼의 중요한 특징이 되는 문제에 직접적으로 진입하기 위한 길을 준비해 왔다. 이러한 중요한 특징은 이제 나타나겠지만 전체 “시-공간적 사실들”이 완전한 하나님의 인격개념의 패턴 속에 설치되어져야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비크리스천의 자족(self-sufficiency)
우리는 이미 공간과 관련을 맺지 못하는 “사실들”이란 우리에게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비이성적이고 추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전혀 생각할 수조차 없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것은 전혀 가르칠 수도 없다. 이와 유사하게 시간 없는 공간적 “사실”은 단지 추상에 지나지 않으며, 가르칠 수 없다. 당신은 그것이 당신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에, 그것과 관련하여 어떤 것도, 누구에게도 말해 줄 수 없다. 그리고 가르치려고 시도하는 사람은 적어도 그것이 배경하고 있는 환경이 있다는(what it is all about) 몇몇 희미한 암시라도 가져야 함이 여전히 요구되는 것 같다.


하나님이 언급되지 않는 교육. 이제 이렇게만 해서 전체 “시-공간적 사실들”이 그것의 전제로서의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관찰되지 않는 한, 크리스천에게는 단지 추상적인 것이 되고, 전적으로 비 지성적이 됨으로, 전혀 가르칠 수 없다. 우리는 사실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관찰되지 않는 한 “사실”은 실제적으로 관찰되지 못한다고 말함으로써 같은 개념을 표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시-공간적인 사실들을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그것들의 관계가 당연히 그것들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사실들”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이 하나님과 그 사실들의 관계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사실의 의미를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히 않다. 당신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공간적 사실들”을 보았다면,당신은 먼저 “사실들”에 관한 사실을 본 것이다; 즉 당신은 피상적인 사실들과는 구별된 사실들을 먼저 보았었다. 따라서 배경 앞에서, 혹은 완전한 하나님의 인격의 패턴 속에서 시-공간적 사실들을 보지 못하는 어떤 사람도, 그가 다만 본다고 생각할 뿐이지 어떤 사실도 보지 못한다.

모든 사람이 출발점이 되는 사실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반대로 기독교적 유신론자 만이 출발점이 되는 사실들을 소유하고 있는 이유로 유신론적 사실들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모든 사람이 사실들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서 살고 있고, 하나님의 일반계시 속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은 어떤 사실을 해석하는 데, 홀로 바른 표준이신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신론자들은 “피상적인 사실들” 즉 의미를 갖지 못하는 추상적인 것들을 다룬다.


우리는 여타의 어떤 분야보다 교육 방면에서 더욱 현저하게 나타나는 심각하게 오도된 혼란, 즉 사실(fact)이란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사실이다라는 그런 가르침에서 돌아서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그 주제를 이러한 돌이킬 수 없는 차원으로까지 이끌어오고 있다. 그러한 가르침은 자명한 이치이든지, 아니면 사탄적인 기만이다. 우리가 기독교란 진리이든지 아니면 거짓이다라는 명제(命題)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것이 진리라면 이러한 진리는 사실상 신, 불신자 모두를 위하여 존재한다. 그러나 불신자는 부자와 나사로서 비유에서 가르치는대로 실상에 대하여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때가 늦게 된다. 그러나 흔히 하는대로 만약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알?뮐測? 시-공간적 영역이 있다는 것이 받아 들여진다면, 사실은 모두에게 동일한 사실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사단적인 기만이다.


실재의 유신론적 해석과 무신론적 해석 사이의 전체적인 논쟁점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집약된다. 즉 유신론적이 아닌 사실들이 “사실들”이 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더 이상의 어떠한 언급도 없이 사실들은 사실들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시작도 하기 전에 전투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나 다를바 없는, 당신 스스로가 영혼과 몸을 적에게 내어맡기는 꼴이 된다.
유신론자로서 우리의 주장은 유신론적 사실들 외는 사실들이 없다는 것이고, 반면에 우리 반대자들의 주장은 그들이 표현을 하던 안하던, 하나님이 존재하던 안하든지에 상관없이 사실들은 사실들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시작부터 용납하는 것은 완전한 패배의 자인이 될 것이며, 기독교 교육을 쓸모 없게 만들 뿐만 아니라 완전히 망치도록 내 몰아 갈 것이다.


하나님이 언급되는 교육. 당신이 시-공간적 사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관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언급되고 가르쳐질 수 없다는 근본적인 확신이 없는 한, 소위 중립적인 학교가 아닌 기독교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데 돈을 투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와 같이 우리 학교들의 교육정책의 기초가 되는 완전한 상반성에 관하여 말하면서, 오떤 과목(科目)이 기독교 학교가 아니라도 어디서든지 가르쳐질 수 있다면, 기독교 학교를 운영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렇게 지나친 말이 아니다.

우리가 극단적인 진술 혹은 지나친 비난이라고 말하지 않길 바란다. 플라톤(plato)은 그것을 그런 것으로 알렸고 또 그렇게 말했다. 그는 누가 두 마리의 말과 두 마리의 황소를 보았다면, 2×2=4가 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게 다룰 필요가 없다고 이해했다. 그는 어쨌든 이상세계(ideal world)에 대한 언급을 해야 하며, 말들과 황소들로부터 이끌어 낸 이중성과 모든 구체적인 것들에 관하여 말해야 한다고 알았다. 그렇다면 이중성,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플라톤은 그가 몰랐다는 것을 인식했으며, 이상세계는 그가 미칠 수 없는 곳에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그것 없이는 소망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그가 이 세상에서 보았던 모든 것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수학 뿐만 아니라 윤리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덕은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글쎄 어떤 것을 가르치려면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 속해있는 덕을 관찰하는 것으로 덕을 알수 있는가? 없다. 악에 오염되지 않은 덕은 여기에는 없다. 극단으로 치닫는 어떠한 덕도 악이 된다. 그러므로 진실한 덕의 개념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다시 이상세계를 바라 보아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서 조차 우리가 저절로 총체적인 덕(virtue totally)을 발견할 수 없음은, 선한 것들에 대한 개념들 중에도 진흙과 머리카락과 오염으로 점철된 그러한 두려운 이념들이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이상세계 역시 부정 없는 긍정이 존재하지 않으며 악마도 하나님 만큼 오랜 기원을 가졌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플라톤이 본 덕의 개념 역시 궁극적인 신비로 남아 있었다. 플라톤은 그가 궁극적인 사유의 딜렘마에 봉착하고 있었음을 자인하였다. 그는 그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그러므로 그는 아무것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현대철학에 있어서도 그것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플라톤보다 더 잘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플라톤이 어떤 것도 가르칠 수 없음을 기꺼히 용인한 만큼 현대철학은 그렇게 잘 용인할려고 하지 않는다. 버나드 보장케(B.Bosanquet)는 5+7=12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 그는 그것을 영원한 진기함이라고 부르고 그는 또 그것을 영원한 진기함이라고도 했다. 그것을 통하여 그는 수학의 법칙과 같은 그러한 법칙은 완전한 진리의 몸체와 연계되지 않는 한 누구에게도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한다. 그의 논거는 2×2=4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이중성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고 한 플라톤의 말과 일치한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학교의 불가피성에 대하여 충분히 용인할 수 있다. 기독교 학교의 필요에 대한 근거는 바로 이러한 점, 즉 사실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알려지지 않는 한 어떤 사실도 알려 질 수 없다는 바탕 속에 놓여진다. 일단 이러한 점이 분명해지기만 하면 기독교 학교에 수학을 가르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 같은 것은 사라지고 만다. 당연히 기독교 학교에서 수학이 가르쳐져야 하며 그것은 여타의 어떤 곳에서도 가르쳐 질 수 없다.

상반성에 대한 자각
우리가 의도적으로 2×2=4라는 이러한 문제를 채택했던 것은, 그것이 기독교 가르침에 있어거 흉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와 기독교 윤리 같은 것들이 기독교 학교에서 교수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주 이상적인 것으로 기꺼히 용납하나, 교육의 주변에 놓여지는 그런 과목들이 기독교 학교에서 교수되는 데 대해서는 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기껏 받아 들이려고 하는 것은, 의당 기독교 학교는 시종 기독교 분위기 속에 어린이들을 두기에 좋고, 그러한 기독교 분위기는 오직 크리스천 교사들에 의해서만 공급 될 수 있다는 정도이다.

종종 어떤 사람들은 냉소적으로 아니면 최소한 회의적인 태도로 말한다. “당신이 2×2=4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칠 때 특별히 기독교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글쎄 우리의 답변은 만약 당신이 수학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가르칠 수 없다면 달리는 그것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수학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어떤 다른 방법으로는 가르쳐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당신이 학과를 시작하기 전에 두 시간 기도를 했다는 점에서 수학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분위기를 호흡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 분위기란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가져오지 않고는 어떤 사실도 가르쳐질 수 없다는 교사 편에서의 깊은 확신이다. 교사가 이러한 확신을 갖기 전에는 어떠한 윤리적 기독교는 지적 이교주의의 딱딱한 진흙 바닥 위에서는 활발히 꽃 피우지 못한다.
물론 나는 이것을 이론적으로 정립하기는 쉬우나 현실화 하기에는 무척 어렵다는 것을 잘안다. 아, 언약의 자녀들의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가! 그러나 우리는 종종 그 일이 전적으로 우리 능력의 한계 밖에 있음을 너무 쉽게 놓치지 않는가? 우리는 수학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가르쳐져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어린이가 2×2=4가 되는 것이, 하나님이 어떤 법칙에 따라 시-공간적 세계를 만들었기 때문이며, 이러한 법칙은 바로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어떤 것을 표현하고 있다는 모든 충분한 암시를 즉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1학년생이 이러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실망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러나 8 혹은 10학년이 그러한 암시를 전혀 얻지 못하고 있다면 낙심할만 하다. 이 또래의 아이들은 이러한 것들을 보기 시작해야 하며 그들이 그렇게 될 때, 후에 그것들에 대하여 보다 많은 것을 배워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역시 수학과목은 기독교 학교 커리큘럼의 주변적 위치에 놓여 있다고 하는 데는 일리가 있다. 수학이 다른 과목들 보다 결코 시간을 덜 들여야 하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어떤 과목은 비교적 유용한 시간대 가운데서 많은 시간 할당을 받으면서도, 커리큘럼에 있어서는 주변의 위치에 놓여야 하는 일이 전적으로 가능하다. 시-공간 세계의 공간적 요소를 강조하는 수학과 여타의 모든 다른 과목들은 하나님의 전체적인 창조의 영역 가운데서 주변에 처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배열에서 기인된다. 즉 사람이 중싱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의식적이고 능동적인 존재이므로, 그의 가장 독특한 인간 자취는 부동의 공간적 영역에서 보다, 역사 속에 있는 시간의 움직임 속에서 자신을 더욱 완전히 나타낸다. 따라서 자연을 가르칠 때, 보다 역사를 가르칠 때 인간과 실재에 대하여 보다 독특하게 기독교적 해석을 이끌어내기가 더 쉽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역사에 대한 기독교 가르침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정도로 수학에 대한 기독교 가르침에서도 동일한 정서적인 열정으로 반응해 주기를 기대 할 수 없다. 그러한 이유로 역시 우리는 공간의 사실들과 시간의 사실들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재삼 인식해야 한다. 시간적인 사실들이 보다 분명하게 하나님의 영광의 중심에 더 근접해 놓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공간적인 사실들을 시간적인 사실들과 연결하여, 후자를 공간적 사실들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전송수단으로 사용해야 한다.

교향악단에서는 모든 개개의 악기가 개별적으로 튀어나서는 안된다. 좋은 그림은 별로 눈에 띄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수불가결한 많은 배경들을 깔고 있다. 기독교 학교의 커리큘럼은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으면서도 빠뜨릴 수 없는 과목들을 포함한 하나의 유기체(a organism)가 되어야 한다. 내가 기독교 학교 외에는 교육이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주장 할 때, 일반은총의 교리를 잊지 않았다는 점을 재삼 명시해 두고자 한다. 물론 당신에게 있어서,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 불신자들에게 있어서와 같이 일시적인 실용적 편이성을 충족시켜 주는 정도를 의미한다면, 비기독교적 수학 교과서(그리고 종교와 기독교를 포함하여 여타의 내용에 대해서도)로 가르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고, 특별히 기독교 가르침과 절대적인 궁극적 내용들에 관해서만 말하고 있다.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앞 섬
커리큘럼에 관하여 말하면서 우리는 모든 시-공간적 사실은 하나님의 완전한 인격 앞에 놓여야 한다는 아주 중요한 요점을 강조해 왔다. 그것은 우리가 이러한 요점이 분명해지기만 하면, 모든 다른 문제들도 그 빛 가운데서 해결될 수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에 관하여 많은 말을 할 수가 없지만, 우리가 이미 손댄 이러한 커리큘럼의 중심에 대한 문제를 잠시 고찰해 보자.


우리 크리스천의 삶과 세계관에 중심이 있다면, 우리의 교육 커리큘럼에도 반드시 구심점이 있다는 것은 말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교육 정책들 속에 중심이 없다는 것을 말해 왔고, 그러한 중심의 결핍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교육 철학 속에 중심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 주위의 학교 커리큘럼에도 역시 중심이 없는데 그것은 달리 있을 수 없다. 만약 그가 자신의 삶과 세계관(life-and-world views)을 위한 중심을 갖고 있지 않다면, 중심을 가진 커리큘럼을 만들 수 없다.

사람들은 오래된 고전들(the classics)과 인문학들(humanities)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연을 탐구하려고 무분별하게 돌진해 나가는 데 아주 익숙해 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문제의 구체적인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의 구체적인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우리를 다만 이러한 경향이 인간 자신을 희생시킴으로 인간의 환경에 대한 강조를 주지시키고 있다는 점만 지적해 두고 싶다.


이제 만약 우리가 현대 교육 철학이 주장하는대로, 사람은 결국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떠올린다면, 현대 교육 커리큘럼은 사람이 무엇인지, 그의 환경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침묵의 용인 위에 건설되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사람은 전적으로 표류하게 됨으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멀리서 자신이 보기에 흥미있어 보이는 어떤 것을 향하여 할 수 있는대로 빨리 돌이키는 것이다.
기독교 학교의 커리큘럼은 당연히 이 모든 것들과 정반대 입장을 고수한다. 우리는 사람이 무엇이며 그의 환경이 어떤 것인지를 안다. 더욱이 우리는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커리큘럼의 중심이 인간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기독교 학교를 위한 커이큘럼의 입안자인 우리는, 무모하게 앞 뒤로 돌진해 들어가서 이 쪽 한번, 저 쪽 한번 찔러보는 식으로 일하지는 아니한다.


우리는 항상 사람을 커리큘럼의 중앙에 놓는다. 하나님은 사람이 환경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 사람에게 복종하도록 만드셨다. 역사가 배경으로 격하될 수 없다는 귀결이 따라 나온다. 사람의 역할이 가장 돋보이게 나타나는 것은 역사 안에서이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과목들을 가르치는 데 필요한 시간의 양(量)에 대하여 우선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자연 탐구는 그것이 역사의 연구와 분리되지 않는 조건하에서만 유익하고 유용하다.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이 커리큘럼의 중심에 위치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의 인간의 커리큘럼의 중심에 서야 한다는 것을 덧붙여야 한다. 그러므로 구속(救贖)의 프로그램에 초점을 맞추는 신성한 역사는 모든 역사의 가르침의 중심에 놓인다. 나는 근본적으로 시간의 양(量)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 않음을 다시 밝힌다. 신성한 역사가 커리큘럼의 중심에 위치해야 한다는 것은, 신성한 역사가 아닌 다른 과목들에 대하여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과 불일치하지 않는다.


자연인 역사와 관련되어질 때만 구속받은 자로서의 인간이 커리큘럼의 중시에 위치하게 되고, 그렇게함으로서만 시-공간 세계의 어떠한, 모든 사실도 완전한 하나님의 인격과 관계를 맺게 된다. 이렇게 될 때만, 교육의 내용으로부터 교육의 형식을 추상적으로 분리시키는 일이 없게 되며, 이와같을 때만 교육은 실로 구체적일 수 있게 되고, 이와같을 때만 마땅히 강조되어야 할 위치를 선정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로 뭇솔리니(Mussolini)보다 오히려 모세(Moses)에 관하여 너무 많은 시간을 들이게 될 것을 줄곧 염려하는 일 없이, 인류의 역사와 인류의 구속역사 속에 있는 실로 중요한 상징들을 밝혀낼 수 있게 한다. 이와같을 때만, 자연(自然)은 하나님의 그림책, 즉 하나님의 움직이는 그림책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이와같을 때만 우리는 기독교 교육이 이름에 걸맞는 것이 되는데 너무도 필수불가결한 분위기를 공급할 수 있다.



III. 어린이와 관계된 상반성

우리는 교육을 받는 어린이에 대하여 생각해야 할 단계에 왔기 때문에 매우 단촐해 질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인간에 대한 현대 교육철학의 생각이 어떤 것인가를 논의하였는데, 그것은 어린이에 대하여 생각할 때도 당연히 마찬가지이다. 공허한 미로(迷路)와 끝없는 비합리성의 심연으로부터, 이 세상 위에 우리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합리성의 작은 결함들이 생겨 나왔다. 그리고 각 인간 존재는 합리성의 작은 결함들이 생겨 나왔다. 그리고 각 인간 존재는 전체로서의 종족 변천의 발달단계를 반복한다. 발전하는 합리성의 작은 결함들이 발달단계를 반복한다. 발전하는 합리성의 작은 결함들이 배워서 다루어야 하는 조정들이 전혀 일시적인 일들을 다루는 것 같으나, 그의 주위에는 희미한 가능성들의 개연성이 있다.
따라서 어린이는 열려진 가능성의 무한한 연속성 앞에 놓여야 함이 분명하다. 이러한 가정된 조정의 과정을 위하여 가장 흔히 사용되는 단어는 환경 지향적인 “인격의 통합”이라는 어귀이다. 인격의 개념이 누누히 반복되어 사용되며 인격발달이 교육의 전부라고 한다. 교육은 단지 중세적(中世的)인 정신, 즉 커리큘럼이 어린이에게 예속되기 보다는 어린이가 커리큘럼에 예속되는 그러한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때만, 인격은 어떤 진정한 발전의 기회를 갖게 된다고 한다.


인격에 대한 비기독교적 개념
인격과 그것의 발달 가능성에 관한 이러한 문제는 우리의 반대자와 우리 자신들 사이에 논쟁의 정점이 되고 있다. 우리와 같은 커리큘럼의 타입을 갖고서는 인격발달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그들의 비난에 대하여 우리는 뭐라고 답변해야 하는가? 우리는 한번 더 궁극적인 선택을 직면해야 함이 확실해 진다.
빈 젖꼭지를 빠는 아기들. 교육철학을 논의 할 때 우리는 우리의 반대자들이 사실 우리의 입장을 완전히 지지할 수 없는 입장으로 생각하며, 또 우리는 우리의 반대자들의 입장이 혼란을 불러일으킬 만한 내용만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살펴 보았다. 커리큘럼의 논의에서, 우리는 무신론적 기반 위에서 도대체 어떠한 것이 가르쳐 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진정한 잇슈였다. 그리고 우리가 커리큘럼의 구성에 있어서 편협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가르칠 수 없다고 반대자들의 비난에 대한 답변이다.


우리의 교육체계 하에서는 인격의 발달이 충분히 이루어질 수 없다는 비난에 대한 우리의 답변은, 바로 그와같이 주장하는 그들의 교육체계 하에서는 전혀 인격발달을 꾀할 수 없다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전면(全面)에 내세워 온대로, 우리는 전적으로 긍정적이며 건설적이 되기 위하여 먼저 철저한 부정으로 시작하여야 한다.
순수한 양육. 우리가 우리 반대자들의 교육체계 하에서는 인격이 발달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본대로 그들의 주장하는대로라면, 유한한 인격이 완전히 비인격적 분위기 가운데 놓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장은 유한한 인격은 그것이 절대적인 인격과 대면하는 위치에 놓이지 않는 한 발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시-공간적 사실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놓이지 않고는,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 그리고 인격은 시-공간적 사실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특이하게, 이 우주 속에 있는 어떤 것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놓이지 않고는 알려질 수 없다는 사실이, 인간 인격의 경우에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
당신은 합리성에 대한 생각 없이는 인격에 대하여 생각할 수 없다. 그렇지만 유한된 합리성은 그 자체를 생각할 수도 없고, 의미도 없다. 유한된 인격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공허한 의미를 생각하는 것과 같다.


비인격이 인격에 대한 장식이 될 수 없다. 인격이 완전한 의미에서 파악되었다면, 그 인격은 전적으로 자족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인격이 유한된 의미로 파악되었다면, 인격은 비인격을 그것의 장식으로 가질 수도 있는데, 그것은 이러한 비인격 장식의 배후에 완전하신 하나님의 인격이 존재한다는 가정(假定)하에서이다.
모든 상반성을 없애버리고, 우주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중립적인 우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비기독교적 교육철학의 비인격주의였다. 이제 다시 유한된 인격을 무(無)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역시 이와 같은 궁극적인 비인격주의이다. 그렇게 될 때 어떠한 인격의 발달진행도 일어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만약 유한된 인격이 하나님과 대면하는 위치에 있지 않으므로, 유한된 인격이 배워야 하는 “사실들” 혹은 유한된 인격이 조정받아야 하는 환경이 하나님과 대면하지 않는 위치에 두어진다면, 지식의 주체와 객체 사이에 어떤 결실 있는 접촉도 가능할 수 없다. 정말 지식을 가지려 한다면, 아는 자와 알려진 것 모두가 하나님과 접촉해야 한다. 하나님을 통해서만 이 둘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다.



권위에 대한 비기독교적 부정
이것은 교육에 있어서의 권위의 문제에 대하여 최종적으로 말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가르치는 관계는, 그가 그의 해석을 완전한 진리로서 나타낼 어떤 권위를 갖도 있는가 하는 의문을 곧바로 낳는다. 정말 권위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권위를 행사할 때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범하는 일이 되지 않는가? 우리의 반대자들은 엄밀하게 말하여 권위와 자유는 상호 배타적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그들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하여 조금 더 안다고 전문가로서의 권위를 인정한다; 그러나 궁극적인 의미의 권위 즉 법적 권위에 대해서는 전문가적 권위만큼 용납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전문가적 권위. 이제 우리는 법적 권위를 전문가적 권위의 대용물로 변호하려고 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우리 반대자들의 바탕 위에서라면 권위란 전혀 없는 것이고, 권위가 없기에 교육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 반대자들의 바탕에 권위가 없다는 것은, 그들의 바탕 위에는 지식이 전혀 없다는 사실에서 분명해 진다. 그리고 만약 지식이 존재할 수 없다면 전문가적 지식 역시 불가능하다.


진정한 권위. 권위란 유한한 인간의 인격 앞에 완전한 하나님의 인격을 두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르쳐지지 않는 한 아무것도 가르쳐 질 수 없으며, 권위를 가지고 가르쳐지지 않는 것은 가르쳐질 수 없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바로 이것이 교사의 위치를 그토록 한없이 어렵게 만드는 동시에, 그토록 무한히 값있게 해주는 점이다. 우리 반대자들의 바탕 위에서라면 교사의 위치란 전혀 소망적이지 못하다.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권위 없이는 가르칠 수 없다는 것과 그가 호소할 수 있는 권위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어린이를 무한한 가능성의 연속선 앞에 두어야 하고, 그러한 가능성들과 관련하여 취해야 할 가장 현명한 태도에 대하여 무언가 말해 줄 수 있는척 해야 하는 동시에, 그는 그러한 가능성들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결과, 어린이는 그가 살 수 있고, 성장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제공받지 못하게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크리스천 교사는 자신을 알고 과목들을 알고 있으며, 그리고 어린이를 안다. 그는 자신의 사역에 대한 완전한 결실이 있을 것을 충분히 확신하고 있다. 그는 영원한 보상에 대한 여명 속에서 수고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