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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 1

by 【고동엽】 2014. 11. 25.

성령의 열매 1 (존 낙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갈라디아서 5:22은 성령의 열매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열매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자신을 온전히 포기하고 내어드릴 때 맺으시는 열매로서 여러분과 제가 아무리 애쓰고, 노력하고, 힘쓰고,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할지라도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예배에 참석하고, 모든 기도회에 참석하고, 온갖 열심을 다해도, 성령께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지 않는 한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여러분과 저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성령께서 여러분을 통제하고 계십니까? 당신의 삶은 환경과 상관없이 기쁨이 넘칩니까? 아니면 환경이 여러분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지속적인 평안을 지니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에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을 주시던 상관없이 오래참고 있습니까? ‘선함‘에 대해서는 어떠합니까? 혹시 상황에 따라 여러분의 행동이 바뀌지는 않는지요? 믿음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항상 주님을 신뢰하는가요? 아니면 종교적 열심만 내고 있는가요? 온유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주님께 공손히 복종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당신을 어떤 위치에 두시던지 수용합니까? 또한 스스로 자신을 잘 통제, 곧 절제하고 있습니까?

 

아마 이 9가지를 열거하는 동안 여러분과 저는 우리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성령의 열매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면서 여러분과 제가 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이것을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해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집회의 목적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뭔가 더 해 보겠다는 결심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바를 하시도록 우리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형성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주님을 향한 우리의 열심과 수고에 대한 말씀은 많이 들었고, 또 그것들은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뭔가를 해보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서 성령의 열매를 맺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요즘 수적(數的)인 성장을 이루고 있습니다. 고무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인간적인 노력으로도 가능합니다. 이 일이 우리의 노력이나 열심이 아닌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라는 증거는 새로 늘어난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잘 정착하느냐 아니냐에 달려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수적으로만 성장하고 영적으로 성장치 못한다면, 그 결과는 끔찍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 이는 죄인이 구원받게 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영적 소경을 영적으로 눈뜨게 할 수 없고, 교만한 자를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만 죄인을 거듭나게 하셔서 하나님 자녀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듭난 성도는 그 다음에 어떤 단계로 넘어갑니까? 갈라디아서 3장 3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 안에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완전해지고자 하느냐?

 

이 말씀에 따르면 구원받은 성도가 어리석은 자처럼 될 수도 있는데, 그것은 마치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이 곧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쩌면 이 말은 듣고 오해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구원받은 사람들 중에는 그리스도인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놀라지 마시고 들어보십시오,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 중에 거짓말하는 자도 있습니다. 눈 깜짝 안하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해댑니다. 놀라실지 모르겠지만 구원받은 사람이 아내를 학대하기도 합니다. 구원받은 여자 중에 하나님께서 남편에 대해 하신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허다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말입니다. 구원받은 사람 중에 담배와 술에 중독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왜 일어납니까? 이는 그들이 구원받은 것이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구원받은 후 그저 휴거만 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구원과 휴거사이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최대 관심이 구원과 휴거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이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로 그저 하늘나라에 가도록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까? 자, 이제 그 이유를 말씀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입니다. 구원을 받으면 영생을 얻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의 목적은 아닙니다. 구원받은 결과 중 하나일 뿐입니다. 하늘나라에 가는 것도 구원의 일부일 뿐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 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사람들은 종종 이 말씀 중 일부만 뽑아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들 하지만, 그것은 왜곡된 인용입니다. 본문은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옥으로 갑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 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 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29절을 보시면 “이는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음이니 이것은 그분으로 하여금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 나신분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구원받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사 우리로 그분의 아들처럼 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그 시점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도록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바로 그 목적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따르면 구원받은 것이 성령님의 역사요. 작품이듯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게 하는 것도 역시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우리 스스로 주님과 같은 모습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구원받은 후,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고,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고 자신의 상황에 자족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신 목적을 잊고 있는 자요, 성령님의 역사에 저항하고 있는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현재에 만족하며 더 이상 설교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는 성령을 억누르고 있는 셈입니다. 만약 주변의 형제, 자매들이 사랑으로 권면하거나 책망할 때 그것을 거부한다면, 그 역시 성령을 억누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그리스도처럼 만들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법들인데, 이런 것들을 거절한 채 “나도 구원받았다구. 나도 성경을 읽고 교회도 다니고 주님을 섬긴다니까!” 라고 자신을 내세우기만 한다면 어떤 결과가 되겠습니까?

 

이것들은 모두 좋은 일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신을 동원해서 이룬 것들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성령의 열매는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그러나(BUT) 성령의 열매는....” 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어째서 “그러나(BUT)”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19절에 답이 있습니다.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곧 간음과...” 간음이 무엇입니까? 간음은 결혼생활의 실패입니다. 모든 간음 행위는 실패한 결혼의 증거가 됩니다. 육신의 행위의 첫 번째가 간음이라면(19절) 성령의 열매의 첫 번째는 사랑입니다(22절). 왜 남편 있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같이 눕는 것입니까? 이것은 그들이 성령 안에서 걷지 아니하고 육신 가운데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았든 안받았든 동일합니다. 19절을 계속 보십시다.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육신의 행위는 숨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명백히 드러나기(manifest) 때문입니다. 그 다음을 보면 음행과 부정과 색욕이 등장 합니다. 이 세 가지 모두 성적 부도덕에 관한 것입니다. 창녀 짓이든, 자위행위든, 동성애든, 음란물이든, 비디오이든, 잡지이든 간에 어쨌든 다 성적으로 타락한 것들이요, 육신의 행위인 것입니다. 반면 성령의 열매를 보면 이와 대조적으로 기쁨이 등장합니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성적(性的)인 쾌락을 찾아다니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들의 삶에 참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기쁨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돈이나 좋은 자동차나 그 어떠한 것들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기쁨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이 육신적 욕망을 육신적 노력으로 끊어보려고 애쓰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런 육신적 욕망은 오직 성령께 우리 자신을 굴복하여 내어드릴 때 성령께서 제어하실 수 있을 뿐입니다. 곧 성령께 우리자신을 내어 드리면 성령께서 성령의 열매를 맺으심으로 육신으로 일할 기회를 차단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동안은 담배를 끊을 수도 있고, 욕지거리를 중단 할 수도 있고, 성질을 참을 수도 있고, 우울증을 이겨낼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이처럼 육신의 행위들을 육신적 노력으로 이겨내려는 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육은 무익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육신적, 성적 부도덕은 오직 성령의 열매인 기쁨이 우리 안에 가득할 때 극복될 수 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우상숭배와 마법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emulation)과...” 여기서 경쟁이란 말의 원래 의미는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이 너무도 비참하고 너무 형편없다고 실망해서 다른 사람처럼 되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 사람들이 다른 사람처럼 옷 입고, 먹고, 행동하려고 합니까? 자신이 너무 한심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파당 등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세 번째 열매인 “화평”과 너무도 대조됩니다. 참 화평을 누리면, 이런 것들과는 결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 중에는 이 화평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이 모든 것들이 다 육신에서 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오래 참음, 부드러움, 선함. 믿음, 온유, 절제입니다. 이것들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올 수 있습니다. 이런 열매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고,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오지 않습니다.

 

이 열매는 오직 우리 자신을 부정하고 성령께 복종시켜 우리자신을 성령의 통제 하에 맡길 때 맺힙니다. 문제는 이것을 오늘날 아무도 안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열심히 성경 읽고, 기도하고, 복음전하고,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더 열심히 합니다. 몰몬교도 그렇습니다. 여러분도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 없이 혼자서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 많은 사람이 이 일을 해 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니까 혹은 내가 보기에 옳다고 생각되니까.... 이러한 동기로 한다면 우리는 이 모든 일을 하나님과 상관없이 우리 힘으로 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나오는 열매는 우리가 그 어떤 수를 써도 우리 힘으로는 만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열매가 우리 삶에 맺히려면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열매는 가지의 영광입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영광도 없고, 존재의 의미도 없습니다. 열매는 가지가 맺는 것이지만, 자기를 위해 맺는 것이 아니고 자기 주인을 위해 맺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 그것은 실은 나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전 세계를 돌며 복음을 전해서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고 합시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그 사람의 목표를 달성한 것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잃어버린 혼을 진정으로 사랑해서 복음을 전파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한 것입니다.

 

열매는 가지에 달리기는 하지만, 따서 다른 사람들이 먹고 즐기기 위한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가지는 열매를 맺지만 그 열매가 가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열매 맺기를 원치 않습니까? 열매는 자기에게 전혀 이익이 안 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아이, 오늘 교회 안 갈란다.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말아야” 라고 한다면, 명심하십시오. 당신은 육신적인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가봐야 뭐 별로 재미없고 얻을 것도 없는데 뭐,” 라고 한다면 여전히 육신적인 상태입니다. “아이, 뭐, 내가 거리설교 안한다고 달라질게 있겠나.” 이렇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육신 가운데서 행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얼마 만큼하고, 혹은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정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육신의 행위입니다. 사과나무가 사과를 맺으면 그 열매 맺은 가지가 먹는 것이 아니고 그 주인이 그 열매를 따서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이치입니다. 그것이 바로 열매입니다. 기계도 일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살아있는 것만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행위를 강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만이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게 합니다. 열매란 조용히, 차분하게, 자연스럽게 맺혀지는 것으로서, 우리의 내적생명이 바깥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나무가 열매 맺으려고 애쓰거나, 수고하거나, 땀 흘리는 것을 보셨습니까? 나무는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일하시도록 자신을 내어드려서 자연스럽게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정원사는 나무에 거름도 주고, 가지도 치고, 온갖 정성을 다해 나무를 가꿀 수는 있지만 열매를 맺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열매는 나무 자체가 맺습니다. 정원사가 나무가 건강하도록 도울 수는 있지만, 열매를 맺는 것은 나무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을 다시 유의해서 살펴보십시다. “성령의 열매”라는 표현에 유의하십시오. 누구의 열매입니까?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은 누구십니까?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신 하나님 이십니다.

 

로마서 5장과 누가복음 6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주제에 대해 분명한 뭔가를 보여줄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절부터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도다. 또 우리가 그분을 통해 지금 서 있는 이 은혜 안에 믿음으로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하느니라. 그리할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끝부분을 주목하십시오.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정말입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는 환난을 통과해 본적이 있고, 그 결과 뭔가를 많이 배운 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환난을 기뻐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앞의 두 구절을 보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은혜 안에 믿음으로 들어가고,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좋은 것들에 대해 우리는 기뻐합니다. 문제는 구원이후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그것들을 우리가 기뻐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휴거 때까지 여전히 우리 자신을 통제하고 싶어 합니다

 

자, “하나님의 사랑”을 주목하십시오. 누구의 사랑이라구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같은 죄인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 이 구절을 보면 “아직”이라는 말이 눈에 뜁니다. 곧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께 반역하고, 원수 노릇을 하고 있던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이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같은 자를 위해 죽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반역하고, 죄짓고 있는 모습을 보고 계시면서,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이 사실이 실로 놀랍지 않습니까? 할렐루야, 실로 엄청난 사랑이 아닙니까?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바로 그 사랑을 우리에게 넓게 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동일한 사랑이 네 안에서 역사하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죄짓고 반역하고 있는 그 순간에 우리를 대신해 피 흘려 죽어주신 바로 그 사랑이 우리 안에서 넘쳐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행실과 언어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가로 막는다면, 우리는 영 안에서 걷고 있지 않고, 오히려 육신적으로 행하고 있는 셈입니다. 얼마나 자주 우리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지는 저와 여러분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는 이런 고귀한 사랑이 우리 마음 안에 부어졌으니, 그 사랑이 성령님에 의해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요) 사방으로 넓게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을 원치 않으며, 심지어 그런 기도를 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이 이루어지려면 내 육신은 “환난”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통 없는 사랑을 보셨나요? 그 사랑이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라면, 누군가가 나에게 죄를 짓는 상황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사랑을 보여 줄 수 있겠습니까? 누가복음 6장을 보십시오. 이 시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천연적으로, 곧 본성에 따라 저절로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드리려는 것입니다. 곧 우리 안에서 초자연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6장 31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그들에게 그와 같이 하라.”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행한 것을 그대로 되받아서 돌려준다면, 곧 다른 사람이 여러분을 욕했을 때 여러분의 첫 번째 반응이 욕하는 것이거나, 다른 사람이 여러분을 때릴 때, 여러분의 첫 번째 반응이 동일하게 그 사람을 때리는 것이라면, 여러분은 육신 가운데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때론 어떤 사람이 여러분을 잘 대해주면 여러분도 잘 대해 줄 것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육신적인행동입니다. 반대로 누가 내게 어떤 식으로 대하든 간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주신 대로, 혹은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대하도록 원하시는 대로 행동 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육신적 모습에서 영적인 모습, 곧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형성되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나의 행동 원칙은 인간이 나에게 어떤 식으로 대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대해 주셨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의롭지 못하던 때에도 햇빛과 비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고 의롭게 된 지금도 여전히 햇빛과 비를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일관성 있게, 꾸준히, 변함없이 저를 선하게 대하지 못하신다면, 그것은 내가 영적이지 못한 상태 곧 육신적인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 누가복음 6장 3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감사를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사랑하느니라.”

 

이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만약 나에게 올바르게 대해주는 그 사람에게 잘 대해 준다면, 그것은 내가 거듭나기 전 하나님이 없을 때에도 할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신사적으로 대하는 사람을 내가 신사적으로 대한다면 ,그것은 나의 거듭난 생명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그처럼 힘듭니까?

 

그것은 내가 그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친절하지 않고 호의를 베풀지 않는 자들에게 친절히 대하거나 호의를 베풀지 못하고, 그처럼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내가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육신입니다. 거듭나기 전, 곧 주님을 알기 전에 가지고 있던 본성 그대로를 표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나아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고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께서 우리의 자아로 인해 이 육신을 처리하지 못하신 채 우리의 육신이 불쑥 튀어나오니 이처럼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위대하신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계신대도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33, 3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만일 너희에게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면 무슨 감사를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와 같이 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려주면 무슨 감사의 말을 듣겠느냐? 죄인들도 준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들에게 빌려주느니라.”

 

누가복음 6장 32, 33, 34절은 모두 자아에 근거해서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아는 이런 식으로 반응합니다. “네가 나에게 잘해주니, 좋아, 나도 잘해주어야지. 네가 나를 사랑하니, 좋아, 나도 너를 사랑해주어야지. 네가 나에게 밥을 사니, 좋아, 나도 밥 한 끼 살께.” 이런 방식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세상적인 유치한 원리입니다.

 

그러나 35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는 원수들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주라. 그리하면 너희 보상이 클 것이요, 또 너희가 가장 높으신 이의 자녀가 되리니, 이는 그분께서 감사하지 아니하는 자와 악한 자에게 인자하시기 때문이라.”

 

로마서 8장 9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하고자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나신 분이 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에 보니 우리가 가장 높으신 이의 자녀가 되는 때가 있는데, 다름 아닌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선을 행할 때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기 시작했다는 증거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그들이 행한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대해주신 방식대로 그들을 대하기 시작할 때라는 것입니다. 너무도 간단합니다. 문제는 아무도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기적인 생명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35절 끝 부분과 36절을 보십시다. “이는 그분께서 감사하지 아니하는 자와 악한 자에게 인자하시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너희아버지께서 긍휼을 베푸시는 것같이 너희도 긍휼을 베풀라.”

 

이 말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만약 죄를 저질렀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해 주시기를 바라나요? 당연히 긍휼을 베푸시기를 바라겠지요. 당연합니다. 그런데 어떤 형제가 나에게 잘못을 저지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형제를 벌주시고, 징계하시고, 바로잡아주시기를 바라는 때가 많지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로 하여금 육신에 있을 때 할 수 있는 그 차원을 넘어 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온전한 통제 하에 놓이도록 이끄십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교회에 다닌다고 해 보십시다. 그런데 그 교회는 설교도 뛰어나고 성경공부도 뛰어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많은 것들을 배워나가고 있습니다. 주일 낮, 저녁 수요일, 토요일을 빠지지 않고 나갑니다. 놀라운 지식도 배우고, 난해 구절들에 대한 해석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시다. 곧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얻었다고 합시다. 그러나 얼마 후 점점 지겹고 지루한 순간들이 닥쳐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이 모든 과정동안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드리지 않은 채 온갖 지식만 채웠기 때문입니다. 많이 배우고 보니 교회 안에 여러 가지 부족한 것들이 눈에 띄고, 결국 비판을 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예배와 기도회와 거리 설교와 기타 모든 모임에 참석할 때와 섬김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셔서 좋은 열매를 맺도록 했다면 결코 지루함이나 지겨운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열매를 맺고 더 많은 형제자매들에게 유익이 되기를 바라며,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들은 무궁무진합니다. 이 모든 일에 지루하게 느끼셨다면, 여러분은 육신적인 것입니다. 지겹습니까? 못마땅한 것만 자꾸 눈에 들어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육신적인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일하시도록 도무지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실은 내 교회형제 자매도 그렇게 사랑하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지요), 우리는 아직도 더 많은 설교, 더 많은 성경공부, 더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 뿐 아니라 더 많은 오해, 더 많은 비방, 더 많은 박해 등도 여전히 필요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사랑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하니까요.

 

전도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하는 일이 힘들고 지칠 때는 우리는 육신적인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전도지를 나누어 주다보면 받는 사람이 별로 없을뿐더러, 흘깃 쳐다보거나, 무시해 버리거나, 비켜가거나, 심지어는 뭐라고 한마디 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 어떤 반응을 얻든 간에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다주는 그 일이 내 마음을 흥분시키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한번 읽어보시겠습니까?” 라고 말할 때 너무도 기쁘고 감사하다면, 그때 당신은 영적인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 순간 당신은 “자아”를 위해 전도하거나, 실적을 쌓거나, 의무감에서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고자 당신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드렸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 8장 10절입니다.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기름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아무 것도 예비하지 못한 자들에게 이를 보낼지니, 그 까닭은 이 날이 우리 주께서 거룩한 날이기 때문이니라. 너희는 또한 근심하지 말지니, 이는 주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 힘이기 때문 이니라.”

 

끝부분을 주목하십시오. “주의 기쁨 (the joy of the LORD)”이 너희의 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앞서 로마서 5장 5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Love of the God)이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여기에서는 '주의기쁨'이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절에서는 ‘성령의 열매(Fruit of the Spirit)’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육신적인 노력으로 기뻐하려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이런 것들은 상황만 바뀌면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제가 어떤 상황에서도, 곧 슬플 때도, 원수들의 조롱 가운데에서도, 좋은 환경이든 나쁜 환경이든,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시고, 그리해주시고자 합니다. 우리의 감정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육신 가운데 있다는 증거입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기쁘고, 나쁜 일이 있으면 슬프고, 대접 잘 받으면 기쁘고, 누가 나를 악하게 대하면 화나고, 이런 것은 육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쁨이 나를 통해 표현되면,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괴롭고 힘들 때, 우리는 기도할 수 있고, 사역이 힘들 때 간구할 수 있고, 병들 때 주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는 구원을 기뻐하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기뻐하고, 그분의 은혜를 기뻐하고, 사랑으로 돌보심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육신이 해낼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의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기쁨이 아닙니다. 시편 18편을 보십시오. 34, 35절을 보세요. 다윗의 고백을 주목하십시오. 사실 다윗은 용맹스러운 사람으로 사자를 죽이고, 적장(敵將)을 죽이고, 전쟁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발과 아비가일 사건을 잘 알고 계시지요? 나발이 자기 부하들의 요청을 거절한 것을 듣고 다윗은 즉시 칼을 차고, 나발과 그에게 속한 자들을 죽이려고 떠납니다. 이것이 다윗의 모습이었습니다. 육신 가운데 있는 다윗이지요. 반면 오히려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영적으로 올바른 상태에 있었습니다. 아비가일은 자기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반면 다윗은 자기에게 악하게 대한 자에게 그대로 갚아주려고 했었습니다. 아비가일이 영 안에 있었다면, 다윗은 이때 육신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성질이 그대로 표출되고 있었으니까요. 자, 그러면 시편 18편을 보십시오. 34, 35절입니다. “내 손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니 내 팔이 쇠로 된 활도 부수는도다. 또 주께서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gentleness)이 나를 크게 만들었사오며”

 

전쟁을 배우고, 활도 부수고 ....사자도 죽이고, 곰도 찢어죽이고, 골리앗도 죽이고....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윗을 크게(위대하게) 만든 것은 이러한 용맹이 아니었습니다. 35절 끝부분은 “주의 온유함(thy gentleness)”이 다윗을 위대하게 만들었다고 말씀합니다. 누구의 온유함인가요? 다윗의 온유함입니까? 아닙니다.

 

“주의 온유함”은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굉장한 용맹을 보이며 힘을 과시할 때 위대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우리를 통제하셔서 역사하실 그때에 위대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의 사랑, 주의 기쁨, 주의 온유함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품을 성령을 통해 내 안에서 재생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드려서 그분께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 보이시는 가운데 여러분과 저는 그분처럼 되어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끼치나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나의 평안” 곧 예수님의 평안을 주목하십시오. 성령의 열매 중 하나가 “화평” 곧 “평안” 아닙니까? 여기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냥 화평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평안” 곧 주님의 화평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자식의 죽음을 통보 받는 순간, 혹은 건강 검진 후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몹시 힘든 상황이 발생되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움과 불안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통제하고 있는 사람은 그분의 화평으로 인해 평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주어질 때,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서 평정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오직 그분이 우리를 장악하고 계실 때, 그분께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길 때, 그분께서 평정을 유지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5, 26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으며 이 일들을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위로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님 그분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하였든지 기억나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신 성령, 그분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랑할지도 모르고, 어떻게 평안을 가져야 할지도 모르고,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부드럽고 온유하게 대할지도 모르지만, 그분께서 이 모든 것을 가르치시겠다고 하십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육신의 요구사항을 다 들어주신다고 착각합니다. 교회숫자도 늘어나고, 헌금도 늘어나고, 구령도 잘되고 ,한마디로 만사형통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 하나님을 기대하고 계신다면 당신은 육신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분의 성품 곧 성령의 열매를 우리를 통해 재생산하셔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못되게 구는 사람도 사랑하고, 괴로운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거칠게 구는 자도 부드럽게 대해주고, 슬픈 경우에도 화평을 유지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부탁합니다. 이번 주제에 대해 공부하는 동안, 여러분은 하나님을 위해 뭔가 해보겠다든지, 죄를 끊어보겠다든지, 새롭게 변화를 시도해 보겠다든지 하는 결심이나 기도를 하지 마십시오. 단 한 가지, 오직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장악하시고 통제해 주시도록 기도 하십시다. 그것이 이루어지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이것저것 다 내려놓고, 오직 한 가지만 기도하십시다. “주님 저를 장악 하셔서 주님의 통제 하에 두시고, 저를 통해 주님께서 이루고자 하는 바 그것을 이루소서.” 오직 이 한 가지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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