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죤 낙스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by 【고동엽】 2014. 12. 5.

죤 낙스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1. 역사적 배경

 

스코틀랜드는 문명이 없는 나라는 아니었다. 예술은 놀라울 정도로 진전되었다. 그러나 제국의 중심지와 비교할 때 백성들은 야만적(barbarous) 이었고, 땅은 개척되지 못했다. 여러 세기 동안 민족(nation)이라고 불려질 수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1) 로마 제국은 어떤 시기에도 스코틀랜드를 차지하지 못했다.

사람들의 종교는 조잡했고 미신적이었다. 그 결과 그들은 기독교 신앙(the Christian faith)의 명백한 우위성 앞에 굴복하였다. 즉 스코틀랜드는 본래 외국의 선교적 노력에 의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 국가였다.

스코틀랜드 교회사에서 나타나는 첫번째 이름은 성니니안(St. Ninian)의 이름이다.2) 그는 4세기 중엽에 태어났고 솔웨이(the Solway) 지역의 족장의 아들이었다. 니니안은 로마에서 정확하게 기독교 진리를 배웠다. 당시에 사람들이 로마에 가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이탈리아에 있는 동안에 니니안은 교회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3)) 주후 381년부터 385년까지 성경 연구에 있어 가장 유명한 학자의 한 사람인 제롬(약 348-420년)4) 이 로마에 있었는데, 모든 사람이 그를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성 암브로우스(St. Ambrose)5)는 374년에서 387년까지 밀란(Milan)의 감독이었다. 성 어거스틴은 주후 387년에 세례를 받았다. 그는 얼마동안 이탈리아에 있었다.

그러나 니니안에게 영향력을 끼친 주요한 인물은 뚜르의 마르땡(St.Martin of Tours)이었을 것이다6) 니니안은 마르땡과 함께 프랑스에서 얼마동안 살면서 활동하였다. 니니안은 그의 일생의 과업(his life-work)을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를 마르땡에게서 배웠다. 니니안은 지도자로서의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조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최남단에 있는 휘돈(Whithorn)에서 정착했다. 니니안은 교회와 수도원을 세웠다. 니니안의 활동은 약30년 동안 꾸준히 계속되었다(니니안은 432년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북쪽 아일랜드로부터 학생들이 니니안이 세운 수도원으로 왔으며, 그들은 돌아가서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스코틀랜드에 대한 아일랜드의 영향은 성 콜럼바의 이야기로부터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유명한 대수도원장과 선교사가 된 콜롬바(Columba, 521-597)는 스코트족의 땅인 아일랜드의 도네갈(Donegal)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적법한 절차를 거쳐서 성직자가 된 후, 그는 여러 지역에서 설교하였고, 데리(Derry)와 더로우(Durrow)같은 지역에 교회와 수도원을 세우는 일에 협력하였다.7)

563년 그는 아일랜드를 떠나 ’그리스도를 위해‘ 순례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8) 12명의 동반자들과 함께 콜럼바는 스코틀랜드 서해안에 있는  이오나(Iona)섬으로 항해하였다. 그가 이오나에 세운 수도원은 스코틀랜드와 북부 잉글랜드에 기독교와 켈트 수도원을 전파하는 중심지가 되었다.9) 그는 켈트 교회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콜럼바의 주요한 초기 생애(Life of Colomba)는 이오나 수도원의 제9대 수도원장 아담난(Adamnan)에 의해 688-692년 경에 저술되었다10)

현재는 콜럼바가 세운 수도원에 대한 아무런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사람들이 오늘날 방문할 수 있는 대성당과 파편물들은 후기 시대에 속한다. 수도사들은 분리된 방을 가지고 있었으나, 모두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 손님들을 위해서는 접견실이 있었다. 수도사들의 의복은 모직으로 된 속옷과 겉옷 등이 있었다.

콜럼바는 일생동안 종교적 실천(religious practice)에 헌신한 깊은 경건의 사람이었고, 그리스도에 대한 봉사에 있어서 지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낭랑하고 힘있는(sweet and powerful)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스코틀랜드에 기독교를 수립하였다. 따라서 그는 스코틀랜드의 사도(the Apostle of Scotland)라고 불리우기에 부족함이 없다.11)

597년 콜럼바는 이오나섬에서 ”얼굴에 기쁨이 충만하여, 거룩한 천사들이 그를 맞으러 오는 것을 보면서 “세상을 떠났다. 이오나는 6세기 스코틀랜드 복음화 운동에 가장 깊은 영향을 끼쳤다.12) 라토렛 교수에 의하면, 잉글랜드를 위한 선교운동이 로마의 선교운동보다 한 세대 후에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민 개종에 더 중요한 영향를 미쳤다.13)

콜럼바에 의해 대표되는 켈트 교회(the Celtic Church)는 약 150년 동안 고립되어 있었다. 야만인들의 침입의 물결은 로마로부터 브리튼(Britain, 영국, 즉 잉글랜드, 웨일즈 및 스코틀랜드)과 아일랜드의 기독교를 거의 완전히 단절시킬 정도로 대륙을 가로질러 휩쓸었다.14)

교황 그레고리 대제(590-604)는 안드레아 수도원의 원장 어거스틴(약 604년에 죽음)을 파견하여, 영국에 정착한 이방인들을 개종시키려고 했다. 캔테베리의 최초의 대주교가 된 어거스틴은 ‘영국의 사도’(Apostle of the English)로 알려졌다. 그는 597년 켄트(Kent)에 도착했다. 어거스틴은 켈트 교회(Celtic Church)에 관심을 가졌다. 즉 그는 로마의 선교 방식이나 교회 관습과 다른 켈트 교회의 선교 자세 및 관습에 대해 관심이 있었다.

역사가 베더(Bede)는 로마 교회와 켈트 교회를 연합시키고자 했던 어거스틴의 시도가 다음의 세 가지 기본적 문제때문에 실패했다고 보았다.15)

① 켈트 교회로 하여금 로마 교회가 부활절을 맞이하는 방법을 채택하도록 요구한 점.16)

② 켈트 교회로 하여금 세례의 로마 교회적 전통을 채택하게 한 점.

③ 앵글로-색슨족을 개종시키는 로마 교회의 선교에 켈트 교회가 참여하도록 요구한 점.

 

어거스틴은 그 시대의 전형적인 로마교회 성직자였다. 매우 양심적이고 경건했으나 그는 외교적 수완과 상상력이 부족했다.17) 어거스틴은 교황에게 많은 문제들을 보고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지역의 풍습이 잉글랜드의 교회에 채택될 수 있다는 교황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 대신, 켄터베리(Canterbury)는 작은 로마가 되었고, 대성당과 수도원과 학교를 거스렸다. 그의 모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잉글랜드에 조직 교회를 위한 견고한 기초를 놓았다.

남 아일랜드는 주후 630년경에 로마의 권위를 인정하였고, 잉글랜드는 664년 휘트비 종교회의에서, 북 아일랜드는 703년에, 그리고 스코틀랜드는 718년경에 로마의 권위를 인정하였다.18)

스코틀랜드 교회가 세계의 나머지 교회들과 완전한 일치를 가져온 것은 마가레트 왕비(Queen Margaret, 약 1045-1093)19)와 그의 가족이 통치하던 때였다.

 마가레트는 노르만족의 침입때문에 스코틀랜드 왕실에 피난했고, 거기서 말콤3세(Malcolm Ⅲ, 1057-93)의 부인이 되었다. 말콤은 그 유명한 찬탈자 멕베드(Macbeth)를 격파하면서 1057년에 왕이 되었다. 그가 통치하던 지역은 북쪽과 동쪽에 있는 섬들을 제외한 오늘날의 스코틀랜드이다. 말콤은 노련한 군인이었으나, 그의 인격은 아내보다 나은 점이 없었다.

마가레트는 스코트랜드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만하고 기억할만한 인물로 남아있다. 그녀는 강한 종교적 열정과 의무에 대한 충성된 헌신 그리고 특별한 인격의 힘을 가진 여인이었다. 그녀는 라틴어로 된 교부들의 글을 읽을 수 있었고, 성경과 교회 그리고 신자들의 복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20)  그녀는 기도와 금식과 구제에 있어서 헌신적이었다.

당시에 스코틀랜드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마가레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무슨 말인가! 죄인이 그 거룩한 신비(Holy Mystery, 즉 성찬)를 맛볼 수 없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떤 사람도 죄에서 깨끗하지 못하니( no one is Pure From sin) 아무도 성찬을 받을 수 없다는 결론이 따라온다... 만일 그 누구도 성찬을 받을 수 없다면 주께서 왜 복음서에서 이 선포를 하셨는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

마가레트는 1093년 에딘버러 성(Edinburgh Castle)에서 죽었다.21) 그녀의 남편과 장남도 같은 해에 잉글랜드 사람과의 전투에서 죽었다.

그녀의 아들들(알렉산더 1세, 데이비드1세)은 스코틀랜드 교회를 외국의 교회와 근접시키려는 어머니의 노력을 계속했다.

때로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교황의 부당한 간섭에 대하여 강력하게 반대하였다.22)  1320년에 4명의 스코틀랜드 주교들이 교황 앞으로 출두하도록 소환되었으나, 스코틀랜드 교회는 조용하게 무시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대륙과 계속하여 접촉을 했다. 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이 외국에서의 생활을 통하여 그들의 경험을 넓혔다. 15세기에는 좋은 학교들도 서립되었다. 성 앤드류 대학은 1411년에, 글래스고우 대학은 1451년에, 애버딘 대학은 1494년에 파리 대학과 볼로냐 대학의 노선을 따라서 설립되었다.23)

중세 후기에 사람들은 교회 내의 타락에 대하여 좀 더 민감해져 가고 있었다. 교육과 학문 그리고 개인적인 사상들도 진전되었다. 고전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고 성경의 원어(히브리어,헬라어)도 다시 한번 검토되었다. 인쇄술의 발견은 역사적으로 의미심장한 신기원을 이루었다. 사람들은 더 실제적이고 내적이며 개인적인 종교에 대해 갈망하게 되었다. 자국어로 된 성경의 출현은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24)

 

2. 죤 낙스의 활동(사역)

 

스코틀랜드에서 종교개혁의 첫번째 순교자는 패트릭 해밀톤(Patrick Hamilton, 1503-1528)이었다. 그는 유명한 가문 출신의 재능있는 젊은이(a talented youth)였다. 그는 파리와 루뱅(Louvain)에서 공부했고, 후에는 독일의 개혁된 대학인 마르부르크(Marburg)대학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종교개혁 사상에 접하게 되었다. 그는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1527년 그는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의도적으로 복음의 선포를 시작했다. 1528년 2월 29일 그는 심문을 받고 이단으로 정죄되었으며, 성 샐베이터 대학 앞에서 화형을 당했다. 스코틀란드에서 그는 종교개혁의 루터적 단계(the Lutheran stage of the Reformation)의 대표자였다.

16세기 초의 스코틀랜드는 가난한 후진국이었다.25) 왕권이 약한 반면에 귀족들의 세력이 거세었다. 교회는 국토의 반을 차지하여 비교적 부유하였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교회 재산은 평신도 귀족들의 소유였다. 여러 대학들이 있었으나, 교육 수준은 대륙에 비하면 뒤떨어져 있었다.

1543년 국회는 성경 읽기와 번역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1544년에 이르러 비이튼(David Beaton, c. 1494-1546)26)과 친불파는 강한 억압책을 적용하였다.

이 때에 가장 영향력있는 설교가 위샤트(George Wishart, 1513-1546)가 활동하고 있었다.27) 위샤트는 애버딘 대학에서 문학석사(M.A.) 학위를 취득한 후, 고향에 돌아와서 교장으로 일했다. 종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그는 이단의 혐의가 있는 자로 소환되기도 했다(아마 그 이유는 그가 신약성경을 헬라어로 가르쳤기 때문이었을것이다). 그는 피신했으나 1년 안에 브리스톨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이 무렵(1540년 경) 그는 독일과 스위스에 갔으며, 그 지역에서의 종교개혁의 진전을 세밀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그는 소코틀랜드로 귀국한 후 던디(Dundee)와 그밖의 지역에서 설교했다. 그는 키가 크고 머리가 검으며 긴 수염을 가졌다. 태도는 정중했으며 생활방식은 단순했다. 그는 매우 진지한 교사였다. 그는 추기경 비이튼의 명령에 의하여 체포되었고, 1546년 3월 1일 화형을 당했다.28) 비이튼 자신은 그후 3개월 후에 성 앤드류스 성에서 매복 기습을 받아 살해당했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주인공은 죤 낙스(John Knox, 1513-1572)였다. 토마스 카알라일(Thomas Carlyle)은 그를 “그의 조국과 세계가 빚을 지고 있는 스코틀랜드인”(the one Scotchman to whom his country and the world owe a debt)이라고 불렀다.29)

죤 낙스는 제임스 5세의 초기인 1513년(혹은 1515년)경에 해딩톤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는 빈농계급 출신으로서 강건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위샤트가 설교할 때 검을 들고 그를 호위하기도 했다.

위샤트가 화형을 당한 후, 낙스는 성 앤드류 성으로 갔다. 그는 그 곳에서 설교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했다.30) 그의 설교의 효과는 놀랄 정도였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다른 사람들은 교황제의 가지들을 쳤으나 그는 뿌리를 쳤다”(Others cut the branches of the Papacy, but he strikes at the roots.)라고 했다.

그후 프랑스의 공격으로 성 앤드류 성은 함락 당하고 낙스는 체포되어, 프랑스 노예선(죄수나 노예들이 노를 젓게 한 돛배)에서 19개월 동안 죄수로 지냈다. 그 배에서 복역하고 있던 어느날 그는 그 배 위에서 자기가 처음으로 설교했던 성 앤드류 성에 있는 성 삼위일체 교회의 뾰족탑을 바라보았으며, 그 때에 그는 자신이 다시 한 번 더 나은 시기에(in better times) 그 곳에서 설교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표명하였다.31)

석방된 후, 낙스는 잉글랜드의 버위크(Berwich)에서 여러 해 동안 성공적인 목회활동을 했다. 당시에 영국 왕은 에드워드 6세(1537-1553)였으며,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 1489-1556)의 지도아래 종교개혁이 급속도로 진전되고 있엇다.32)

낙스는 5년 동안(1549-54) 비위크에서는 목회를 통해, 런던에서는 설교를 통해, 그리고 대주교 크랜머와의 접촉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버위크에서 목회할 때 그는 성찬 참석자들로 하여금 성탄 식당에 둘러앉게 했는데 그는 그것이 성경적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떡과 잔을 받을 때 꿇어앉는 것에 대한 낙스의 반대 때문에 크랜머는 제2차 기도집(the Second Prayer Book)에서 꿇어 앉는 것에 관해 극히 개신교적 설명을 가했다. 즉, 성찬식이 시행될 때 무릎 꿇는 것은 시행되지만, 이것은 경배의 의미는 없으며, 결과적으로 로마교회의 화체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설명을 삽입하였다(이것은 낙스의 공헌으로 인정된다).33) 비록 낙스가 <제2차 기도집>을 전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일치와 평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리고 행정 장관(magistrate)의 명령때문에 버위크의 옛 회중에게 그 기도집의 사용을 추천하였다.34)

1553년 메리(Mary Tudor, 1516-1558)는 그녀의 이복 동생 에드워드 6세를 계승하여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35) 메리 여왕은 완고하고 편협한 카톨릭교도였다. 메리의 통치가 시작된 몇달 뒤 낙스는 도망을 쳤고 그후 곧 프랑크푸르트의 영국 유랑민들 사이에 나타났다. 1554년 낙스는 영국 피난민 교회의 목사직을 수락했다.

후에 낙스는 제네바에 있는 영국 유랑민들의 교회에서 목사가 되었다. 1555년 낙스는 스코틀랜드를 방문했고, 그는 여러 지역에서 표출되는 종교개혁에 대한 관심때문에 대단히 놀랐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9개월 동안 아주 담대히 설교했다.36)

1559년 5월, 낙스는 고국의 에딘버러에 도착했다. 이 시기까지 그는 폭넓은 경험을 하였다. 그는 영국과 독일과 스위스와 프랑스의 개혁자들과 유익한 접촉을 하였다. 본래 낙스의 입장은 - 위샤트와 같이 - 쯔빙글리적이었다. 그러나 제네바에서 칼빈과의 접촉을 통해 대부분의 면에서 칼빈주의적이 되었다. 낙스에게는 <제네바> 도시야말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학교’로 보였다.

고국에 돌아온 낙스는 성 앤드류스 성당에서 설교함으로써(1559년 6월 11일) 자기가 프랑스 노예선에서 품었던 소망을 성취시켰다. 낙스는 복음적인 기독교신앙의 확립을 위해 개혁세력의 선두에 섰다.

1560년 체결된 버위크 조약(the Treaty of Berwick, 1560년 2월)에서 개혁가들은 스코틀랜드에 진주해 있었던 프랑스 군대를 몰아내기 위해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보호하에 두게 되었다.37)

당시 스코틀랜드에서 섭정 역할을 했던 귀즈의 메리(Mary of Guise)38)는 관점과 야심에 있어서 철저하게 프랑스적이었다. 섭정은 총명했으나 신중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개신교도들이 거의 그녀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귀족들은 섭정에게 신앙의 자유를 회복시켜 주고 프랑스 군대를 돌려보낼 것을 요구했다. 그녀는 병이 들었고 개혁파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부르면서 이제 프랑스와 영국의 군대 양편이 다 퇴각할 것을 요구했다. 1560년 6월 11일 그녀가 죽을 때 곁에 있었던 사람은 개신교 목사 죤 윌록(John Willock)이었다.

속수무책의 프랑스는 스코틀랜드의 지원도 없고 군대의 증강 가능성도 없이 항복하고 말았다. 1560년 7월 6일 에딘버러 조약(the Treaty of Edinburgh)에 따라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모두 퇴각하게 되었다. 7월 15일에 프랑스가 자기 나라로 출항했고 영국군도 도보로 출발했다. 19일에 낙스는 많은 교인들과 함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39)

승리한 스코틀랜드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자기네 나라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만족할 만한 문제해결이 이루어지기는 힘들었다. 왜나하면 스코틀랜드에는 모든 일을 처리할 중앙집권적 권력체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8월에 자체적으로 모인 스코틀랜드 의회는 종교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스코틀랜드 신앙고백>(Scots Confession)40)이 스코틀랜드의 정식 신앙 규범으로 채택되었다. 이 신앙문서는 그 색조가 온건한 칼빈주의였다(a document moderately Calvinistic in tone).41) 또한 이 문서는 칼빈이 주장한 것보다 훨씬 더 성례전에 대해 강조를 하고 있었다.42)

개혁교회의 조직과 그 치리체제를 정립하는 문제는 계속 남았다. 낙스는 뛰어난 자질을 갖춘 교회인사들로 구성된 한 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제 1 치리서>(First Book of Discipline)을 스코틀랜드 의회에 제출하였다(1560년). 거기에는 개혁교회의 조직과 재정문제에 대한 제안들이 담겨 있었다.43)

그리고 개혁교회의 예배는 <낙스의 전례서>(Book of Common Order)44)에 의해 규제를 받게 되었다. 이것은 낙스가 제네바에서 사용하는 예배의식을 개정한 것이었다. 이 <전례서>에 의하면, 교회 회중은 그들이 매년 선출하는 장로들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또 이 장로들은 회중들 가운데에서 확고한 도덕적 규율(firm moral discipline)을 유지하는 데에 목사를 돕게 되어 있었다. 목사는 회중들에 의해 선출되지만 목사들은 다른 동역자들에 의해 그 신앙과 생활을 엄격하게 심사받고 통과된 후에야만(after rigorous examination of life and doctrine by their ministerial brethren) 임명될 수 있었다. 그 중에서 유능한 목사가 있으면 그는 어떤 한 지역(주로 과거의 카톨릭 교구와 일치함)을 담당하는 <감독자>(superintendents)로 임명될 수 있었다. 이러한 개혁교회의 최종적인 권위(final authority)는 장로들과 목사들로 구성된 전체교회의 총회(general assembly)에 속하였다.45)

스코틀랜드의 시편 찬송은 다른 곳에서와 같이 개혁교회의 표지였다. 제네바에 있던 낙스의 교회에서는 51개의 시편 모음이 사용되고 있었다. 총회는 1564년에 전 시편의 완성과 출판을 제시했다. 제네바의 곡조가 평이 좋았으나 스코틀랜드인들은 자주 그 노래에 화음을 붙여 찬송했다. 그리하여 곧 4부로 된 찬송이 편집되었다. 가사들은 시적인 감각(poetic quality)이 결여되어 있었다.46) 그 후의 다양한 번역들 가운데서 가장 탁월한 제2차 스코틀랜드 시편집(the second Scottish Psalter)이 1650년에 출판되었다.

낙스의 저술과 그가 끼친 영향력은 사람들에 의해 종교적인 면에서 또 정치적인 면에서 여러 갈래로 평가되고 있다. 그렇지만 종교개혁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요, 반드시 승리를 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낙스가 가졌던 것은 확실한 일이다. 이 신념 위에 스코틀랜드 교회는 세워졌다.

낙스는 <하나님의 나팔>이었으나, 후대에 남아있는 설교는 단 두 편 밖에 없다.47) 하나는 “그리스도의 첫번째 시험”(마 4:1)이요, 다른 하나는 “왕권의 근원과 한계”(사 26:13-16)이다.

 

3. 스코틀랜드에서의 종교개혁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은 1561년 8월 스코틀랜드에 도착하였다. 도착 당시 이미 그녀는 낙스(Knox)가 자기 최대의 적이며 또 스코틀랜드가 이 양편을 함께 수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낙스는 처음엔 이 메리 여왕이 프로테스탄트 손에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랐었고 곧 그와 비슷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낙스가 메리 여왕을 세번째까지 알현할 때는 정중한 만남 속에서 작은 논쟁만을 벌였었다. 그러나 네번째 알현에서 험악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조가 보였다. 메리 여왕이 스페인의 돈 카를로스(Don Carlos)와 결혼을 할까 생각중이라는 얘기를 들은 낙스는 자기의 명령을 발하여 프로테스탄트측에서 강렬한 반대의 경보를 울리게 하였다. 메리 여왕은 국사에 한 이단적인 설교자(낙스)와 일반 평민들이 개입을 한다고 격분하여 낙스를 소환하였다. 그녀는 신경질적인 어조로 그를 꾸짖고 또 낙스를 반역죄인이라고 고발하였다.48)

그러나 메리 여왕의 세력은 기울었고, 1567년 메리 여왕은 몰락, 퇴위하게 되었다. 그리고 낙스의 오랜 친구인 모레이(Moray)의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가 스코틀랜드의 섭정이 되었다.49) 그러나 섭정 제임스는 살해되었고, 스코틀랜드는 메리 여왕파와 섭정 지지파 사이의 투쟁 속에 빠져들어 갔다. 낙스는 이 소용돌이 속에 걱정과 근심을 하며 개입하였다. 그러나 낙스의 힘은 기진한 상태에 있었다. 낙스는 임종의 자리에서 교회 직분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외치는 그 순간에도 내 마음 속에 그 비판받는 인간들을 미워하는 마음은 없었음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신다. 단지 그 인간들이 범하고 있는 죄악을 참으로 증오하고 혐오한 것인 사실이다... 그러나 나를 부르시고, 기꺼이 은혜를 베푸시사 그의 신비스런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과연 그가 맡기신 사명을 어떻게 감당했는가에 대해 보고해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있었다. 이러한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이 너무도 컸기에 전혀 인간들의 눈치를 살핌이 없이 주께서 내게 명하시는 대로 너무도 담대하게 외칠 수 있었다.”50)

계속해서 낙스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천사들 앞에서 감히 고백하나니,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개인적인 이익을 취한 점이 없으며, 인간을 기쁘게 하고자 노력한 점도 없으며, 나 개인의 정욕 혹은 다른 이들의 정욕을 만족시킨 일도 없으며, 단지 내게 허락하신 은사를 성실하게 사용하여 내가 감독한 교회의 덕을 세우기를 노력하였을 뿐이다.”

또한 낙스는 자기자신에 대해 말하기를, 그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해석하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유언에 기록하였다 :

“하나님께서 나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원하시거니와, 나는 사람들에게 명백하고 순수하게 그의 진리를 보여주는데 조금도 비겁하지 않았다.”51)

<대영백과 사전>에서는 죤 낙스에 대해 상세하게 소개한 후, 다음과 같이 그를 평가하고 있다 :

“낙스가 설교자로서 강력한 힘을 가졌던 것은 그가 이성과 감정을 잘 혼용하는 능력(his capacity to fuse reason with emotion)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또 그가 강단에서 열정적인 논리를 구사하여 지성과 감정에 똑같이 강력한 호소를 하였다는 데에 근거하고 있다. 물론 그는 비관용적인(intolerant) 면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누구 나 비슷하였다. 그리고 오히려 낙스의 칼빈주의는 후대의 칼빈주의보다는 훨씬 온건한 것이었다... 자기가 믿는 바에 대해서 오직 한마음을 가지고 일생내내 꿋꿋하게 헌신한 것을 보면, 그 시대에는 이러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참으로 드물었는데, 그는 참으로 존경을 받아 마땅한 인물이었다. 낙스의 도덕적 생활이 그의 엄격한 시조(rigorous creed)와 어긋남이 없었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는 풍부한 역사적 증거들이 있다. 낙스의 저술 중 가장 중요한 문헌으로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사>(History of the Reformation in Scotland)가 있다.”52)

죤 낙스는 1572년 11월 24일에 죽었다. 제임스 멜빌(James Melville)은 낙스를 “우리 민족의 가장 고귀한 선지자이자 사도”(that most notable prophet and apostle of our nation)라고 불렀다. 섭정 모튼(Morto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 그의 일생동안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이 누워 있다”(Here lieth a man who in his life never feared the face of man).53)

낙스가 사망한 후, 곧 앤드류 멜빌이 지도자가 되었다.54) 멜빌은 스코틀랜드의 몬트로즈(Montrose) 부근의 밸도비에서 1545년 8월 1일 출생하였다. 몬트로즈에서 라틴어, 헬라어, 프랑스어에 대한 예비교육을 받고, 1559년 성 앤드류 대학교의 성 메리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1564년 가을에 파리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성 앤드류 대학교를 떠날 당시, 그는 “영국의 젊은 학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철학자이며 시인인 동시에 헬라어 학자”라는 칭찬을 받고 있었다. 멜빌은 파리에서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철학 등을 공부했다. 후에 그는 제네바를 여행하였으며 그곳에서 곧 인문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멜빌은 베자의 문하에서 주로 신학을 공부하였다.

1574년 7월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멜빌은 글래스고우 대학교의 총장이 되었다. 그의 노력과 열으로 각지에서 학생들이 모여들게 되어 강의실들이 꽉 들어차게 되었다. 1575년 8월의 총회에서 멜빌은 고위 성직제도가 성경적 근거를 갖고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1578년 4월부터 그는 <제 2 치리서> 작성을 주도하였으며, 이것은 1581년 총회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제 2 치리서>는 멜빌의 주요한 노력의 결과였다.55)

백여년 이상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의 운명은 스튜어트가(家)의 왕들이 교회를 성공회 제도로 만들려는 결의 때문에 성쇠를 거듭하였다. 왕권이 지배적일 때는 성공회 제도를 지지하는 법령이 통과되었으며(1584년), 다시 교회가 권력을 잡으면 장로제가 실시되었다(1592년).

왕정복고(Restoration, 1660-1688)56) 이후 성공회 제도가 재수립 되었으며, 스코틀랜드이 성공회파와 장로회파 간에는 보다 더 치열한 분쟁이 발생하였다. 혁명에 의해 스코틀랜드 교회는 다시 장로제로 환원되어 그 이후로 계속 장로제가 실시되었다.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한 나라로 병합되었고, 따라서 <대영제국>(Great Britain)이 탄생하였다. 18세기 초반의 장로제 주장자들(the Presbyterians)은 17세기 후반의 주장자들보다 더 청교도적(Puritan)이었다.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의 예배를 감독주의자들(the Episcopalians)의 예배와 명백하게 구별하기를 원했다.57)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떠한 형식이나 의식에 대해서도 혐오감을 표현하였다. 그들은 인쇄된 의식서(printed liturgy)의 사용을 멀리하였다.

 

4. 죤 낙스의 신학 사상

 

낙스는 위대한 설교자요 개신교 신앙의 변호자였다. 그러나 칼빈과는 달리 그의 신학을 조직적으로 진술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낙스가 신학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58) 우리는 그가 남긴 글들을 통해서 그의 신학을 엿볼 수 있다(소책자, 소논문, 개인적인 편지들). 유감스럽게도, 낙스의 신학에 대한 철저한 연구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여기서는 제한된 주제 안에서 그의 신학 사상을 다루고자 한다.

 

(1) 낙스의 신학에서의 언약(covenant)

비록 낙스가 언약신학을 충분히 전개시키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언약 사상은 낙스의 사상에 있어서 주도적인 개념이다.59) 낙스의 언약 개념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이해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모든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처럼, 낙스는 ‘말씀의 사람’(man of the Word)이었다.

낙스에 의하면, 우리는 말씀으로부터 생명과 힘과 영구적인 위로를 받는다. 낙스는 하나님의 말슴이 우리의 어머니요 유모라고 했다.60)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 거하는 것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다. 낙스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죽은 자(we are all dead in the presence of God)61)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인 고기와 음료이다. 이러한 양식을 통해서 우리의 영적 생명이 보존된다. 따라서 낙스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연구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다.62)

낙스는 구약성경이 모든 면에서 그의 시대에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구약의 선지자들이 타락한 왕들과 우상숭배에 대적한 것은 낙스에게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영생의 선물을 구하는 자는 우상숭배로부터 등을 돌려야 한다고 했다. 낙스는 로마교회의 미사(the Roman Mass)를 우상숭배적 관점에서 이해하였다.

낙스에 의하면 고위 공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우상숭배자들을 제거해야 한다. 심지어 우상을 숭배하는 관리와 왕들에게도 이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63)

낙스는 종교개혁의 원리인 ‘이신칭의’의 원리를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낙스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혜 언약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스코틀랜드를 거룩한 나라로 만드는 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로마교회의 우상숭배로부터 벗어나야만 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언약보다는 거룩한 나라가 되도록 우리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일(our covenanting with God to be a holy nation)을 강력하게 되었다.64)

 

(2) 믿음과 확신(Faith and assurance)65)

칼빈처럼, 낙스는 성경 가운데 포함된 하나님의 약속과 그리스도에게로 우리의 믿음의 눈을 향하게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무가치함으로부터 눈을 돌려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낙스는 그의 장모(Bowes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안에는 죄사함을 원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확실한 죄 씻음(cleansing of sin)이 있다고 했다.66)

사탄은 우리의 믿음을 공격하고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한다. 심지어 우리로하여금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리에까지 내려가게 만들고자 한다. 그래도 우리는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들도 한때 그리스도를 부인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부인하지 않으셨다. 이러한 시련들이 사실상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시련들은 우리로하여금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않도록 인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련을 겪음으로써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에만 의지하게 된다.67)

낙스에 의하면, 사탄이 우리를 시험하고 공격하는 것은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는 표식이다. 즉 그리스도인에게 영적 전투가 있다는 것은 그의 믿음의 표식(sign)이다. 따라서 자신의 믿음에 관하여 양심 가운데 고민과 갈등이 있다는 것은 그가 선택받은 표식이라는 것이다. 물론 낙스의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구원의 확신을 위해 ‘주관적 근거’를 제공하는 오류를 보여준다.68) 이와같이 우리의 확신을 우리 자신 안에서 분별할 수 있는 어떤 것에 의존시킬 때 우리는 사실상 확신을 상실하고 우리의 느낌의 횡포에 종속되게 된다.

 

(3) 성례전

낙스가 교회관과 성례관에 있어서 칼빈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칼빈은 참된 교회의 표식에 있어서 두 가지를 지적했다(the preaching of the Word, the proper administration of the sacraments). 낙스는 세번째 표식, 즉 권징(church discipline)을 추가시켰다.69)

칼빈처럼, 낙스는 성찬에 참여하려는 자가 자기자신을 살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낙스가 권징을 교회의 표식의 수준으로 높였기 때문에, 장로들과 목사는 신자들이 그들 자신을 살피는 일을 지도해 줄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목사와 장로들 앞으로 와서 그들의 신앙을 고백하고 또한 목사의 요구에 따라 교리적 요점에 대해서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이다. 목사는 신자들이 성찬에 함부로 참여하지 않도록 권면해야 한다. 사실상, 주기도문과 신앙의 신조들 그리고 율법의 요약을 진술하지 못하는 자는 성찬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70)

권징과 성찬을 이와같이 연결시키면 위험이 따르게 된다. 즉, 성찬에 참여해야 하는 자가 ‘자기를 살피는 일’(self-examination)을 적절하지 않게 사용하게 된다는 점이다. 심지어 성찬이 회개한 자의 상징이 되버린다는 위험이 있다.71) 물론 낙스는 이러한 가르침에 있어서 성례전이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낙스에 의하면 성찬에 참여하는 자는 주님과의 영적인 연합 안에서 주님을 인식하고 주님의 복들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4) 선택과 확신

예정론을 논의하면서 낙스는 호기심을 경게하고 있다. 오히려 우리는 전지하게 우리의 구속의 측량할 수 없는 신비를 묵상하고 주목해야 한다. 낙스가 여기에서 말하는 신비(Mystery)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헤의 신비이다. 예정을 다룬 글에서 낙스는 명백히 그리고 사려깊게 우리의 선택과 확신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두고 있다. 낙스는 말하기를,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선택도 구원도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며, 이 선택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하고 있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부르심을 받으며, 신실해지고, 순종하게 되며, 거룩하게 된다는 것이다. 낙스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택자(God's Elect one)라고 말하기도 했다.72) 즉 우리는 주님과의 연합 안에서 하나님의 이러한 선택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낙스의 신학에 있어서 선택과 확신 사이의 관계는 중요한 문제이다. 처음부터 그는 구원의 확신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확신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것은 선택의 교리이다.

비록 우리의 구원은 복음의 약속들 안에서 견고하게 서지만, 선택의 교리는 우리에게 이러한 약속들로부터 얻는 위로를 능가하는 기쁨을 주는 것이다.73) 선택의 교리는 우리의 구원이 우리 자신의 어떤 것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연약함이나 부족함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낙스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택한 자를 구원하시는 능력은 모든 자를 저주 아래 가두는 아담의 능력보다 훨씬 뛰어나시다. 그러므로 선택의 교리는 확신의 선포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우리로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도록 정하셨으므로 우리의 구원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위로가 흔들릴 수 없는 그 기초 위에 있지 않다면, 그 위로는 불완전한 것이다.74)

그러면 어떤 사람이 그가 택자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낙스는 하나님의 사랑이 택자에게만 제한되어 있다고 말한다.75) 즉 하나님의 뜻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분명히 그리스도의 죽음은 세상을 구속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예외없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헤의 제한성에 대한 이러한 언급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보편성에 대한 언급(그리스도는 세상의 구주이시다)과 긴장을 일으킨다.76) 낙스는 사실상 선택과 유기라는 이중 예정을 반아들이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선택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낙스는 결국 우리의 선택에 관해 우리에게 확신을 주는 방편으로 우리의 성화(sanctification)를 언급한다. 낙스는 - 베드로의 말씀대로 - 택자가 그들 자신의 택하심을 굳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참고. 벧후 1: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이것은 그들의 삶에서 의의 열매들을 찾아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믿음으로부터 선한 일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반대의 표식을 통해서 유기된 자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낙스는 선행을 ‘신앙에 대한 외적 증거’로 본다.77)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의 삶 가운데 열매를 맺지 않고, 우리를 통하여 선행을 생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의 선택을 확신할 수 없고 또한 우리의 양심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78)

낙스는 무의식적으로 인간의 성화를 언급함으로써 구원의 확신을 약화시켰다. 특히, 일시적 믿음에 관한 그의 가르침을 살펴볼 때 그러한 점이 뚜렷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때때로 낙스는 주장하기를, 택자와 유기된 자가 동일한 상태(the same state)에 놓여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일시적으로는 유기된 자가 사람들이 보기에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택자가 성령으로부터 받는 믿음과 성화와 다른 일시적 믿음이요 불완전한 성화이다.79)

이러한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낳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믿음이 유기된 자의 일시적 믿음인지 아니면 택자의 구원하는 믿음(saving faith of the elect)인지 알 수 있는가? 만일 선행이 우리의 확신의 근거이고 유기된 자도 일시적으로 선한 일을 행하기도 한다면, 궁극적으로 구원의 확신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5) 요약

낙스의 가르침과 칼빈의 가르침의 가장 큰 유사성은 아마 그들의 <그리스도 중심성>이다. 두 사람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신앙의 대상이요, 언약과 성례전의 본질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그들의 선택 이해에 있어서 열쇠와 같다.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실현된다.

더우기, 칼빈과 낙스는 구원의 확신이 신앙의 본질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이와같이 주장하면서 두 사람은 모두 믿음의 시선을 그리스도에게 돌리게 한다.

또한 두 사람은 일시적 믿음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을 배경으로하여 확신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이 안고 있는 문제점에 직면하고 있다. 일시적 믿음에 관해 논하면서, 낙스는 칼빈보다 더 나아가고 있다. 즉 낙스는 우리의 확신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과 열매에 여지를 제공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스는 우리가 구원과 확신 그리고 성화를 위해서 우리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그의 가르침에서 강조하고 있다.80)

그러나 낙스는 두가지 면에서 칼빈을 넘어서고 있다(이것은 그에게 일종의 손실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로, 그는 권징을 참된 교회의 표식의 수준으로 올려놓고 있다. 그는 권징을 말씀과 성례에 관련시킴으로써 은혜의 본질에 대한 혼란을 일으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따라서 이에 뒤따르는 자기성찰과 목사와 장로들에 의한 ‘살펴보는 일’(examination)은 스코틀랜드 신학 안에 ‘율법적 경향’(legal strain)을 초래하였다. 결국 여기에서 율법적 회개가 나타나게 되었다. 즉, 하나님의 구원 서정(God's order of salvation)에 있어서 회개가 은혜에 앞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가르침이 나타난 것이다.

둘째로, 낙스는 하나님의 언약을 민족적 맹약(national league)으로 이해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즉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결속(동맹)으로 보고 있으며, 그 결속의 유지를 위해 인간이 우상숭배로부터 등을 돌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낙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for us in Christ) 하나님께서 맺으신 새언약을 덜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거룩한 민족이 되기 위해 ‘우리’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것에 강조를 두고 있는 것이다.81) 따라서 이러한 경향은 우리의 영적인 시선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위치로부터 돌려서, 대신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성찬에 참여할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82)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적 설교와 가르침이 율법적 경향을 배경으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즉 복음보다 율법이 더 강조되거나, 믿음보다 회개가 - 우선수위에 있어서 - 먼저 강조되는 것이다.

율법적 경향의 설교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조건적인 것으로 만든다. 논리적으로 믿음이 홰개보다 우선한다는 것이 칼빈의 가르침이다.

교회는 언제나 인간중심적 관심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the finished work of Christ)을 지속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제자도>에 관한 복음주의자들의 생각에도 함정이 있을 수 있다. 거의 예외없이 제자도에 관한 가르침은 ‘우리가 하는 것’(what we do)에 제한되어 있다(성경공부, 성경암송, 기도, 전도 등).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계속 행하고 계시는 일에 대해 이해하여야 한다!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 나 개인을 바라볼 때, 거기에는 언제나 펠라기우스적 요소들(Pelagian elements)이 침투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속저인 제사장직(Christ's continuing priesthood)에 관한 성경적 교리를 회복해야 한다.83)


1) G. D. Henderson, The Church of Scotland, 1939, p.10

본서는 애버딘 대학의 교회사 교수였던 저자가 청년들을 위해 쓴 책이며, 우리말로 변역 출간되었다(홍치모, 이은선 공역, 한국로고스연구원). 모두 2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2) 니니안(c.360 - c. 432)은 투르의 마틴으로부터 수도원제도에 관하여 배웠다. 그는 397년에 고향으로 돌아왔고, 수도원(Candida Casa, '하얀집‘이라는 뜻)을 세웠다. 니니안과 그의 수도사들은 그 곳을 켈트족과 픽트족에 대한 선교와 아일랜드 선교를 위한 기지로 사용하였다.(참고. 웨스트민스터 교회사 사전).

 

3) G.D.Henderson, op. cit., p.11.

 

4) 서방교회에서 그의 시대에 지도적 성경학자였던 제롬은 이탈리아 북동부의 작은 마을(Stridon)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전학문을 연구하였고, 로마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탁월한 어학 실력에 기초하여 성경본문 연구와 성경 주석에 있어서 독특한 업적을 성취하였다. 벌게이트(Vulgate)역으로 알려진 그의 라틴어 성경은 결국 서방교회의 공인되 역본으로 받아들여졌다(교회사 핸드북, 188-189쪽 참고).

 

5) 로마 귀족 출신의 암브로우스(339-397)는 폭넓게 독서를 했다. 특히 헬라 신학자들의 글을 읽었다. 그는 설교자와 교회 행정가로 유명했다. 그는 아리우스주의를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387년 밀라노(밀란)에서 어거스틴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의 저작들은 주로 그리스도인의 실천의 문제들에 관한 것이다.(교회사 핸드북, 140쪽)

 

6) J.H.S Burleigh, A Church History of Scotland, 1960, p.6.

7) Ibid., 아일랜드에서의 초기 생에에 관하여 pp.14-15참고, 선교적 활동에 관해서 pp.19-22참고.

8) Ibid., p.13.

9) cf. The Westminster Dictionary of Church History, p.220 "He left Ireland in 563 to establish the monastery on Iona which became a center of missionary activity in Scotland and England. For two centuries it was the headquarters of the Celtic Scottish Church, presided over by its abbots."

 

10) G. D. Henderson, op. cit., p.16. 아담난은 주후 704년에 죽었다.

11) Ibid., p.19.

12) cf. F.F. Bruce, The Spreading Flame, 1958, p.390 김명혁, ”켈틱 선교운동’ , 신학지남, 제 175호 (1976. 겨울호). 40쪽에서 재인용.

 

13) K.S. Latourette, The Thousand Years of Uncertainty(A History of the Expansion of Christianity, 1938, vol. Ⅱ), p.56. 

14) G.D. Henderson, op.cit., p.19.

15) 교회사 핸드북, 221쪽 ; 베데(Bede, 672?-753)는 영국 민족의 교회사를 썼다.

16) 664년의 휘트비 종교회의(Synod of Whitby)가 다룬 주요 문제는 부활절 계산 방법이었다. 체발(tonsure)의 방식 등의 문제들도 논의되었다.

17) cf. The Westminster Dictionary of Church History, pp.74-75.

18) Williston Walker, 세계기독교회사, 대한기독교서회, 141쪽.

 

19) G. D. Henderson, 스코틀랜드 교회사, 한국로고스연구원, 39쪽;WDCH, P.525. 마가레트는 잉글랜드의 왕 에드문드 아이론사이드의 손녀이며, 본래 헝가리에서 태어났고, 후에 잉글랜드로 왔다. 노르만족 침입(the Norman invasion) 후에 마가레트는 스코틀랜드로 피신했고, 거기서 왕 말콤3세(Malcolm Ⅲ)와 결혼했다. 그녀는 스코틀랜드 교회의 은인(후원자)이었다.

 

20) G. D. Henderson,40쪽 참고. 마가레트는 교회 개혁에 깊이 참여했다.

21) 마가레트가 개혁하려고 시도했던 다른 악은 사람들이 교회에 가지 않는 것 (non-churchgoing)이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수도원을 세웠다. 그녀는 남편이 전투에서 살해된 지 4일만에 죽었다(WDCH, P.525).

 

22) 알렉산더 3세(1249-1286)는 때때로 스코틀랜드 성직자들이 로마로 부터 오는 지시 사항을 무시하도록 격려했다.

23) 참고. 차하순,서양사 총론, 탐구당, 231-236쪽. 파리 대학은 노틀 담(Noter Dame)교회의 부속학교로 출발하였다. 파리 대학은 고급강의로서 신학, 의학, 법학에 관한 과목들과 하급강의로서 7교양학과(Liberal Arts)를 개설하였다. 대학입학의 최소연령은 13세였다. 볼로냐(Bologna)대학은 남 유럽형 대학의 기초가 되었다. 파리대학과 볼로냐 대학은 각지역의 대학 창설에 영향을 끼쳤다.

 

24) 윌리암 틴데일(William Tyndale)은 신약성경의 영역판 번역에 공헌하였다. 위클리프 성경은 라틴어역(벌게이트)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정확하지 못했다. 그래서 틴데일은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을 근거로 번역에 착수하였다. 그는 ‘영어 성경의 아버지’이다. 그가 쓴 단어 중 90 퍼센트가 흠정역(KJV)에서 사용되었다.

 

25) W. Walker, op.cit., 310쪽 ; 교회사 핸드북, 391쪽. 16세기 초에 스코틀랜드는 여전히 타락한 교회를 가진 봉건국가였다. 스코틀랜드는 해밀톤에 의해 루터의 사상에 눈을 떴다.

 

26) 비이튼은 종교개혁을 반대한 스코틀랜드의 고위 성직자요 정치인이었다. 성 앤드루, 글래스고우 그리고 파리의 대학에서 배웠고, 스코틀랜드에서 성직자로서 빠르게 성장했다. 1538년에 교황 바울 3세는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다음 해에 그는 성 앤드류의 대주교로서 스코틀랜드 교회의 대주교(primate)가 되었다(WDCH, p.95).

27) cf. WDCH, p.871.

28) G.D. Henderson, op.cit., 67쪽. 위샤트는 그가 체포되던 날 밤, 희미한 예감과 함께 “희생은 한 사람으로 족하다”라고 말하면서 죤 낙스를 자기 곁에서 떠나 보냈다. 위샤트는 스위스 최초의 신앙고백(The First Helvetic Confession)을 영어로 번역했고, 종교개혁에 관한 개념에 있어서는 쯔빙글리파였다.

 

29) G.D. Henderson, op.cit., p.46. 낙스는 1514년을 전후해서 태어났다.

30) J.H.S. Burleigh, A Church History of Scotland, p.130.

31) G.D. Henderson, op.cit., p.47.

 

32) 참고. 교회사 핸드북, 390-391쪽. 토마스 크랜머는 영국의 개신교회를 형성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는 에드워드 6세의 재위 기간 동안 종교개혁을 추진하였고, 후에 메리 여왕에 의해 면직 당했다. 그는 1556년 옥스포드에서 이단이라는 죄명으로 화형을 당했다. 크랜머는 신학적으로 루터파에 속했으며 교부들의 책을 탐독하였다. 그는 힘보다는 부드러운 설득을 통한 개혁을 더 좋아했다 ; cf. WDCH, pp.244-245.

 

33) J.H.S. Burleigh, op.cit., p.162. “...to kneel when receiving the communion did not imply worshipping the elements.”

34) Ibid., p.162.

35) cf. WDCH, p.534.

36) 제네바로 돌아간 낙스는 칼빈의 <기도의 형식>에 근거해 예전서를 출판했다. 이 <제네바 예전서>는 후에 스코틀랜드 및 잉글랜드의 청교도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37) 죤 T. 맥닐, 칼빈주의 역사와 성격,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0, 339쪽.

 

38) 귀즈의 메리는 그녀의 어린 딸(Mary Stuart, 1542-1587 ; 스코틀랜드 여왕, 1561-1568)을 위한 섭정 역할을 했다. 메리 스튜어트는 프랑스로 보내졌으며, 1558년 프랑스와 2세(1544-1560)와 결혼하였다(프랑스와 2세는 1559년 프랑스 국왕이 되지만, 연소하여 왕비의 백부인 귀즈 공이 실권을 잡았다). 메리 스튜어트는 1561년 귀국하여 직접 통치하였고, 카톨릭 신앙문제로 엘리자베드 여왕과 대립하였다. 1567년 그녀는 남편을 살해하고 보드웰(Bothwell) 백작과 결혼했기 때문에, 국내 제후의 반항을 받아, 1568년 왕위를 아들 제임스 6세(잉글랜드 왕으로서는 1세)에게 양위하고, 잉글랜드로 달아나서 엘리자베드에게 보호를 요청했으나 감금되었다. 후에 엘리자베드를 살해하려고 한 배빙턴(Babington)음모 사건으로 인해 1587년 처형되었다(J.H.S. Burleigh, op.cit., p.189 ‘the Babington Plot’).

 

39) 죤 T. 맥닐, op.cit., 339쪽.

40) 낙스와 그 밖의 세 사람이 서둘러 작성하였음.

41) cf. Encyclopaedia Britannica(대영백과 사전), John Knox 항목(중요한 자료임).

42) 이 신앙문서는 100년 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채택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43) cf. WDCH, p.269 ; J.H.S. Burleigh, A CHURCH HISTOR OF SCOTLAND, pp.163-76, 177-179.

44) <공동 의식서>라고도 한다.

45) 평신도에게 높은 위치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낙스의 이 제도는 후대의 장로교제도(later Presbyterianism)의 가장 본질적인 면을 내포하고 있다.

46) John T. McNeill, op.cit., p.303

 

47) 정 장복, 인물로 본 설교의 역사(상), 장로회 신학대학 출판부, 1986, 227쪽 ; cf. E.C.Dargan, A History of Preaching, vol.Ⅰ, pp.512ff.

48) 그러나 추밀원(the Privy Council)은 낙스가 반역죄인임을 시인하기를 거부했다.

49) 모레이 백작은 제임스 6세(1566-1625)의 섭정 자리에 있었다.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 왕으로는 제임스 1세이다. 그는 1567년 제임스 6세로 스코틀랜드 왕위에 오르고, 1603년 엘리자베드 여왕 사후 헨리 7세의 자손인데서 영국 왕위를 겸하여 스튜어드가(家)의 시조가 되었다. 그는 영국 국교 제도에 힘을 들여, 카톨릭교도나 비국교도를 박해하였다.

 

50) 죤 낙스의 생아와 사상, 344-345쪽 참고 ; Works, Ⅵ, 654f.

51) Ibid., 349쪽.

 

52) 죤 낙스 연구를 위한 주요한 참고도서는 다음과 같다.

● J.G. Ridley, John Knox(1968). 매우 훌륭한 전기이며, 자료가 풍부하고, 최근의 연구 결과 반영되어 있는 책이다.

● E. Percy L John Knox(1937). 낙스와 그의 시대에 대한 깊은 연구의 결과로 나온 책이다. 단, 증거 문서 조사가 다소 부족하다.

● E. Whitley, Plain Mr. Knox(1960). 일반 독자를 위한 대중적인 저서이다.

● J. S. McEwen, The Faith of John Knox(1962). 낙스의 종교적 견해 및 다른 개혁자들과의 관계를 다룬 저서이다.

● J.H.S. Burleigh, A Church History of Scotland(1960).

 

53) G.D. Henderson, op.cit., p.57.

54)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은 제네바에 5년간 머물면서, 베자의 문하에서 주로 신학공부에 전념하였다. 멜빌의 사촌이었던 제임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스코틀랜드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받은 은총 가운데 멜빌보다 더 위대한 것을 받은 적이 없다.” 멜빌은 다방면에 걸친 출부한 학식을 지녔으나 대중적인 웅변가라기 보다는 학자였었다. 그의 주된 활약은 교회 강단에서 보다는 대학과 교회재판소에서 이루어졌다 ; cf. WDCH, pp.541-542.

55) G.D Henderson, op.cit., p.59 ; J.H.S. Burleigh, op.cit., pp.198-201.

56) 청교도 혁명에 의해서 공화제가 끝나고 차알스 2세가 의회의 지지를 얻어 왕위에 올라 군주제를 부활시킨 일을 가리킨다. 또 그 이후 명예혁명(1688)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를 가리킬 때도 있다.

 

57) G.D. Henderson, p.97. ‘Presbyterian’은 장로교파의 사람을 가리킨다.

58) M. Charles Bell, Calvin and Scottish Theology, 1985, p41. 본서는 ‘구원의 확신’교리를 다루고 있는 중요한 책이다.

59) Ibid., p.41.

60) Ibid., p.42.

61) Ibid., p.42 ; Works, 4.133.

62) cf. Works, 4.136f.

63) M. Charles Bell, op.cit., p.42.

64) Ibid., p.43.

65) Ibid., pp.43-45

66) Ibid., p43 ; Works, 3.138.

67) Ibid., p.44.

68) Ibid., p.45.

69) Confession of 1560, Art.18,25.

70) Book of Discipline, Art. 7,9.

71) M.C. Bell, op.cit., p.45. “...that thesacraments are merely badges of one's repentance.”

72) Ibid., p.46.

73) cf. Works, 5.26.

74) cf. Works, 5.27, 210.

75) Works, 5.61.

76) Works, 4.356.

77) Works, 3.20.

78) Works, 5.210.

79) Works, 5.255.

80) M.C. Bell, op.cit., p.47.

81) Ibid., p.48.

 

82) For the tendency is to take our eyes off what we are in christ, who is our sanctification, and to dwell instead on what we must do to keep covencant with God, and to be worthy to partake of the sacrament.

83)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교리는 칼빈과 낙스의 신학에 있어서 그 심장부에 서 있었다 ; cf. M.C. Bell, op.cit., p.202.

 

출처 :gace의주님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 grace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