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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성문과정 이해

by 【고동엽】 2013. 5. 8.
 
 

 

 성경 성문과정 이해

                                                                    

 

크리스챤이라면 누구나 성경의 가치를 사랑하고 존중하고 사랑한다.  허지만 그들의 성경은 모두 한결같이  거의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있다.  성경 번역을 전문적으로 하는 번역사들에 의하면 성경은 거의 5,000여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번역들은 조금씩은 내용과 의미가 다 다르다. 그 이유는  번역한 언어가 다를뿐만 아니라,  번역자들이 다르고,  시대와 환경과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보다  가장 더 큰 원인은 번역 대본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영어 성경 대본이 다르고 라틴어 불어, 독일어  성경을 대본으로 한 번역이  많은 차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원어 성경 대본도  종류도 너무 많다 보니까   다를 수밖에 없다.

 

 모든 성경사본들이 모두 필사본으로 전하여졌다.  필사본을 다시 필사하고, 그 필사본을 다시 필사하고, 또 다시 그 필사본을 또 다시 필사하고... 이렇게 하는 과정에서 기록들은 조금씩의 차이를 가져오게 되게 마련이다.

 

지금도 수많은 전문가와 학자들이 이 수많은 성경의 사본을 서로 연구 조사하고 비교하여, 보다 원본에 가까운 성경을 찾으려는 시도가 오랫동안 계속되었으며, 현재까지도 그 작업은 계속되고 있다.


초기의 신약성경 사본은 파피루스에 기록되었는데, 재질적으로 보존상태가 좋지 못하여 현재는 부분적인 단편과 조각으로만 발견되고 있다.

 

그후 AD 300년대가 되어서 비로소 가죽 위에 깨끗하게 성경사본이 책으로 묶여 만들어졌는데,

이를 ‘언셜체 사본’이라고 하며 ‘대문자 사본’이라고도 합니다.

후기의 헬라어는 약 9세기 이후로 ‘초서체’(흘림체)로 바뀌게 되는데 이것을 ‘소문자사본’이라고 부릅니다.

***

 

세계 최고 학자들이 말하는 구약 원문 성경이 바로 '비블리아 헤브라이카 슈투트가르텐시아(Biblia Hebraica Stuttgartencia 제4판 1990)'이다.   

 

신약 원문 성경이 네슬레-알란트(Nestle-Aland)의 신약성경 그리스어'(NOVUM TESTAMENTUM GRAECE' 27판, 1993.)와 독일성서공회(Deutsche Bibelgesellschaft)와 연합성서공회(United Bible Societies. 이하 UBS로)가 출간한 그리스어 신약성경(제4판, 1993. 이하 GNT로)이다. .

 

이들 성경가운데에도  활자인쇄술이 발명(A.D. 1450)되기 이전의 필사본 시대와 그 이후의 인쇄본 시대로 구분된다

 

신약 성경 원본은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으며(구약의 경우도 같다). 사본만 해도 5,500여 개가 있다.

그런데 그것들이 하나도 같지를 않다것이다.  인쇄 출판한 것들이 수십 종류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 후에 여러 곳에서 사본들을 발견하여  많은 비평판 신약 성경을 내놓기도 했다. 

 

17세기 초의 인쇄업자였던 엘제비어(Elzevir) 형제가 신약 원어 성경 초판을 1624년에 내었고, 이어 제2판을 1633년에 내었다.

 

1982년에 [새흠정역성서](The New King James Version)와 (The Greek New Testament according to the Majority Text)가 트리니티 성서공회(Trinitarian Bible Society)에 의해서 출판되었다.

 

그후 또 스크라이브너(F. H. A. Scrivener)의 The New Testament in the Original Greek according to the text followed in the Authorized Version(Cambridge, 1881)이 새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게 됐됐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 성경은 여러 사람의 글이 모인 것이다.  그 여러 글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  각기 교양과 신앙 경력과 배경이 다른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영감을 통하여 각기 성경을 쓸 때, 특정 장소와 시간에, 자기들이 얻을 수 있는 종이(파피루스 papyrus)와 붓과 잉크를 가지고 썼다.  

 

 하나님의 말씀이 코이네(koine) 헬라어라는 평범한  말로 기록되었다. 그 시대의  파피루스라는 종이에 기록됐는데 이 파피루스는 이른바 초지(草紙)여서,  한국의 한지(韓紙)와 같이 견고하고 지구성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쉽게 끊어지고 꺽어지고 부스러지기가 쉬웠다.

 

예를들어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냈을  그 편지는 매 주일마다 그 교회인들에게 읽혀졌기 때문에 따라서 오래지 않아 그 편지는 때가 묻거나, 부러지거나, 끊어지거나 돼서, 그것을 새 용지에 옮겨썼을때 원본과 차이가 없는 것을 만들려고 최선을 다 했을 것이다.

 

그 시대에는 헬라어 문자가 대문자들만 있었고, 띄어쓰기라는 제도가 없었다. 그리고 활자판이 아니고 손으로 쓰는 것이어서 같은 글자라도 모양이 다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옮겨 쓰는 사람이 원본을 100% 그대로 옮겨 쓴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사도 바울의 편지가 왔다는 소문을 들은 빌립보 교회는 데살로니가에 온 바울의 편지를 읽고 싶어서 사람을 보내어 그 편지를 베껴오도록도 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원본과 데살로니가 교회의 필사본이 다르고, 빌립보 교회가 만든 필사본이 또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신약 성경 27권의 글이 우선은 파피루스에 기록되었고, 오래지 않아 그것들의 필사본이 만들어져야만 했고, 원본들은 얼마 안 가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필사본 중 가장 낡은 것이 2세기 상반기(A.D. 125년)의 것이 있고, 오늘까지 발견된 98개의 파피루스 사본들 중에는, 제2세기의 것이 한두 개 더 있고, 나머지는 제3세기로부터 제8세기 어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많은 교회가 이렇게 파피루스 사본을 성경으로 읽으면서 자랐다. 그러나 파피루스는 수명이 길지 않기 때문에 계속 필사본이 만들어지면서 낡은 것은 자연히 사라져갔다.

 

현존하는 100여 개의 신약 성경 파피루스 사본들이 내용에 있어서 꼭 같은 것이 하나도 없는 이유는  필사자들의  실수와 때로는 고의적 다르게 고침으로 인해서 성경은 초창기부터 원본과는 조금 다른 모양으로 전달되어 왔다.
 

 

성경의 귀중성을 깨달아 제4세기부터는 가죽으로 된 용지로 필사하여  몇 배의 지구성과 편리함을 가질 수 있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가죽대문자 사본의 수가 300개가  파피루스 신약 사본 100여개보다 훨씬 지구성이 있다.

 

두  종류의 사본이  제 7세기 ~ 제8세기까지 계속되었다.  그후 교회의 수도 늘어, 필기체가 고안되어 가죽 종이를 사용하는 필사하는 방식으로 그 시대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1450년에 활자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 즉 제9세기 이래 15세기 중엽까지, 많은 소문자 사본이 만들어졌고,  특이 교회가 많은 지방에서는 많은 소문자 사본들이 필사되어 사용됨에 따라  비슷한 종류의 사본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 2,800여 개의 소문자 사본들은 제9세기 이후의 것들로서, 서로 상당한 차이가 있고, 고대 사본들과 비교해보면 많은 변개(變改)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성경이 처음에는 원어로만 유포되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신자들의 모국어 로 번역되었다. 

기원전 6세기부터 구약 성경이 아람어로 옮겨져 타르굼(Targum)이 생겼고,

그리고 구약 성경이 기원전 3세기부터 애굽 알렉잔드리아의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에 의해서,

코이네 헬라어로 번역되었다.

 

기독교가 로마 사회 전역에 퍼져 나가면서, 자연히 성경이 각 지방의 언어와  복음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코이네 헬라어보다도, 더 친숙하고, 더 알아듣기 쉬운 지방말로 성경을 번역해 사용했다.

 

우선 예루살렘에서 가장 가까운 시리아(Syria)에서 시리아어 번역이 시도되었고,

다음은 라틴어,

그리고 이집트의 콥틱어로,  

이어 고트(Gothic)역,

아르메니아역(Armenian),

죠지아역(Georgian),

에티오피아역(Ethiopic),

고대 슬라브역(The Old Slavonic),

아라비아역(Arabic) 등이 나타나기 시작됐다.

 

 

 교회가 왕성하여 기독교인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성경의 수요(需要)도 늘었고, 따라서 사본을 만드는 일도 활발했다. 기독교 발전사(發展史)를 개관할 때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북 아프리카(칼테지), 로마, 마게도니아(콘스탄티노플), 소아시아(에베소) 등을 중심으로 뚜렷한 특색을 가지고 발전한 것이다. 그러기에 그 지방에서 만들어져 사용되던 사본들도 자연히 그 지방에 어울리는 성격을 지니게 됐다고 보인다.

 

5,500개의 신약성경 사본은 필사자들의 각별한 주의에도 불구하고 원본으로부터 다소간의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초기의 히브리성경
 구약성경은 BC 1450년에서 BC 400년까지 무려 1000년에 이르는 기간에 걸쳐 기록되었다. 보수주의 신학자들에 의하면, 모세는 최초로 영감을 받은 성경 기록자로서 대략 BC 1450-1400년경에 모세오경을 기록했다고 한다. 구약의 마지막 기록자인 말라기는 BC 400년경에 성경을 기록했다.
 
 
구약의 본문
 구약성경의 첫 부분은 갈퀴모양의 문자인 고대 히브리어로 가죽이나 파피루스에 기록되었다. 이 고대 문자는 점차로 발전되어 BC 400년 이후에는 둥근 종 모양의 문자로 되었다. 이 종 모양의 문자는 사해 사본과 마소라 사본과 1477년 이후 인쇄된 히브리성경에서 발견되었다
 
 
구약의 정경화
 성경의 정경이라 함은 권위있고 성스러운 문서의 목록으로 지정되었다는 말이다. 헬라어에 이러한 표현으로 '카논'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말은 원래 갈대나 자(尺)를 뜻한다. 실제로 이것은 "측정하는 것", 즉 표준.규범.규칙을 나타내며, 특히 표준이나 규범으로서 "측정 되어지는 것"을 의미했다. 하나님의 영감과 권위의 표준이나 조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정되었던 책들은 "정경"으로 편집되었다.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영감된 성경이 공식적인 수집이나 단순한 인준에 의하지 않고 성령을 통한 영감의 중요성 때문에 정경으로서의 권위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성경비평학적 견지에서 볼 때, 정경화의 과정은 오랜 세월을 필요로 했다.

 
이러한 논법에 따르면 BC 444년에 율법서가 제일 먼저 정경이 되었고 예언서는 BC 400-200년이 되어서야 정경화되었으며, 성문서가 대략 BC 165-100년경에 이루어졌다. 그래서 성경비평학에서는 히브리정경이 세 부분으로 나뉘어지는 것은 본래 연대적인 문제에 기인한다고 본다.
 
 예언서는 BC 300년이 지나서야 대중화되어 그 결과 그 다음 세기에 수집되어 정경화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소위 제2이사야와 제3이사야(대체로 40∼66장)는 그 기록자들을 전혀 찾아낼 수 없으므로, 이사야서의 뒤에 부착시켰다고 한다.
 
다니엘서는 BC 167년이 지나서야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며, 나머지 에스더와 역대상.하 그리고 에스라.느헤미야도 너무 늦게 작성되어 역사서 부분에 포함시킬 수 없어 성문서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보수주의 신학에서는 히브리 정경의 삼분화를 기록자의 신분이나 예배의식의 편의상의 배열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구약의 완전성이 유지되는 초기 연대를 고수하고 있다. 또한 유대 정경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가 항상 신교의 입장이 되어왔다.

 
 

마소라 학자들의 활동

 AD 500년 이전의 히브리 사본에는 장모음을 표시하는 일부 자음을 제외하고는 모음체계가 없었다. AD 600-950년에 이르러 마소라(Masoretes)라고 일컬어지는 유대인 학자들이 본문을 보다 정확하게 발음하기 위해서 완전한 모음체계와 악센트를 보안해냈다.

 

그들은 또한 케리(Keri)라고 명명되는 난외(marginal readings)와 케티브(kethiv)라고 명명되는 본문과 상이한 것(textual variants)을 수록하여 본문을 표준화시키기도 하였다. 마소라 학자들의 히브리 성경 연구는 5세기 후에 성경을 인쇄하는데 있어서 기틀을 마련했다.


 

히브리성경의 인쇄

 인쇄된 히브리성경의 제일 첫 부분은 시편이었다. 이것은 1477년의 일이었으며, 1488년에는 모음부호와 악센트가 첨가된 히브리 구약성경 전체가 첫 출판을 보게 되었다.


 

최초의 기독교 성경

 우리 주님이 승천하신 후 거의 20년 동안은 주로 헬라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이 유일한 성경이었다. 최초의 신약성경은 일찍이 AD 45년에 기록된 것으로 추측되는 야고보서가 분명하다. 요한계시록은 일반적으로 95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장 뒤늦은 책이다.

 

초대교회에서는 구약만을 성경으로 사용하였다. 베드로는 스데반(행 7:2-53), 빌립(행 8:32-35), 바울이 그러하였듯이 구약(행 2:14-16)을 가지고 설교하였다. 신약의 모든 기록자들은 구약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그들의 영감적 기록은 구약에서 영감을 받는 계시에 근거하였다

 

 

신약의 기원

 복음(고전 15:3, 4)은 초기에 구전을 통하여 전파되고 구약 역사와 예언에 비추어 해석되었다.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에 대한 구전은 글로 기록되어 마침내 AD 70년경에 영감적인 공관복음을 형성하게 되었다. 율법주의나 비도덕주의와 같은 오류에 반하여 기독교를 정의할 필요가 강조되어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대한 교리적인 설명을 요하게 되었다. 바울서신과 그 외 일부 서신들이 이를 위해 기록되었다. 교회의 발전에 대한 역사적인 개괄적 설명은 사도행전에 나타나 있다. 요한계시록은 시간과 영원에 대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해 기록되었다.

 

 

 

 바티칸 사본(Codex Vaticanus, B사본)

17세기 이후에는 킹제임스 성경의 독주 시대였다. 그렇다면 왜 권위있는 킹제임스 성경외에 또 다른 성경번역이 필요하게 되었을까? 15세기(1475년) 바티칸 학자들은 바티칸도서관에서 오래된 도서들을 정리하고 분류하다가 한 사본을 발견하게 된다.

 

 이 사본이 양피지에 기록된 대문자체 중에 가장 오래된 사본으로 판명되는데, 이 연대는 4세기 경, 즉 AD 325-350년경으로 밝혀진다. 이 사본을 ‘바티칸사본’이라고 부르는데, 이 사본은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으로 대부분의 구약과 신약, 일부 외경까지 거의 완벽한 책의 형태를 포함하고 있었다.

70인역(LXX)이라는 것을 간략하게 설명드리자면, 유대인들이 나라를 잃고 디아스포라를 겪으면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 다른 언어인 헬라어를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 기원전 250년경 이집트의 왕인 프톨레미 2세의 명령에 따라 히브리어로 기록된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을 말한다. 즉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을 가르킨다.

이 바티칸 사본은 거의 완벽한 칠십인역으로서, 거의 대부분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신약에서는 마가복음 16:9-20과 요한복음 7:58-8:11이 누락되어 있었는데, 그 외에는 거의 완벽한 보존을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이 사본이 그 당시에 발견된 가장 오래된 대문자 사본으로, 일명 B사본(Codex B)이라고 불리워지며, 전 세계의 성경학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게 된다.

 

시나이 사본(Codex Ainaiticus, Aleph)

또 그후 19세기 중엽에 성경사본의 역사 중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독일의 성경학자인 티센도르프가 1844년에 시내산에 있는 성캐더린 수도원에 묵고 있을 때에, 그 방에서 난로의 불을 붙이는데 사용되는 불쏘시개 중에서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의 일부분인 역대상, 예레미야, 느헤미야, 에스더등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을 어디에서 구하였는가”라고 묻는 티센토르프에게 성캐더린 수도원의 수도사는 “이미 많이 태워 버렸다”고 말하였다.

티센도르프는 이 사본을 독일로 가져와 번역하여 이 사본에 관한 책을 출간하게 된다. 그 후 1859년, 그는 다시 수도원을 방문하여 거의 완전히 보관된 300년대에 필사본 되어진 성경사본을 발견하는 금세기 최대의 쾌거를 이루게 된다.

 

물론 티센도르프로를 통하여 그 양피지가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된 수도사들은 더 이상 그에게 양피지를 내놓지 않았는데, 티센도르프가 자신이 발간한 사본의 책을 어느 한 수도사에게 선물하자, 그 수도사도 자신이 갖고 있는 한 권의 완벽한 성경 필사본을 티센도르프에게 보여준다.

 

티센도르프는 그날 밤을 새워 그 성경 필사본을 읽는데, 훗날 그는 “잠을 자는 것은 신성을 모독하는 것 같았다”라고 고백할 정도였다고 훗날 증언한다. 다음날 티센도르프는 그 사본을 돈을 주고 사려고 했으나, 그 수도원은 완강히 그것을 거부하였고, 결국 티센도르프는 수도원에서 차용증의 각서를 써주고 그것을 잠시 빌려오게 된다. (훗날 수도원측은 티센도르프가 성경을 잠시 빌려간다고 서명날인한 문서를 제시하며, 차용한 것이므로 돌려 주어야만 한다고 하며 대영박물관에 주장하게 된다)

이 사본이 ‘시나이사본’이라고 불리우는데, 마가복음 16:9-20, 요한복음 7:58-8:11을 제외한 신약성경 전체와 일부 구약 외경과 구약의 절반 이상이 기록되어 있었다. 티센도르프는 이것을 갖고 와서 러시아 황제에게 선물하였고, 그 대가로 성캐더린 수도원은 러시아 황제로부터 훈장과 약간의 돈을 받았을 뿐이었다.


훗날 러시아는 혁명 후 재정이 궁핍하여지자 돈이 필요하였고 성경에는 관심이 없었으므로, 이것을 영국에 팔기로 작정하였고, 영국정부는 1933년 크리스마스 전날에 러시아로부터 십만루블(US$ 500,000)에 그 사본을 사들여 현재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중립 본문에 입각한 성경 발간의 필요성

이 시나이 사본은 많은 성경학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게 되는데, 앞서 언급한 바티칸 사본(B사본)과 매우 유사한 내용을 갖고 있으며, 그 뒤에 발견된 알렉산드리아 사본(A사본, 대영박물관 보관)과 에브라임 사본(C사본, 파리국립박물관 보관)등과 함께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사본’ 혹은 ‘중립사본’이라고 불리워지는데, 이러한 사본들과 킹제임스성경에 차이점이 발견됨에 따라, 다른 성경번역본을 발간하여야 할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헬라어 성경사본은 우리가 지금 보는 개역성경과 NIV 영어성경의 근본이 되며, 그 신약성경의 본문비평은 성경학자인 티센도르프, 웨스트코트, 호르트등이 이루어 놓은 작업으로, 그 외에도 많은 자료들을 총괄하여 검토한 결과, 알렉산드리아계열의 본문이 가장 원문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최근에는 이집트 땅속에서 파피루스 더미가 발견되었는데, 체스터비티 파피루스(P)라고 불리는 신약의 많은 부분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연대는 놀랍게도 AD 200년대로 보며, AD 125년경으로 추정되는 라일란드 파피루스는 비록 작지만 신약본문에 대한 아주 가치있는 증거자료가 된다. 이것도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본문과 일치하며, 보드머 파피루스라고 불리는 요한복음 본문들도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본문을 증거하여 주고 있었다.

이러한 사본들의 발견이 킹제임스외에 또 다른 성경의 발간을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킹제임스 성경과 이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사본들이 차이점을 갖고 있다는 것이 성경학자들의 본문비평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최근에 발견된 사본들로부터 원문에 더욱 접근하려는 본문비평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만일 최근에 발견된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사본보다 다 연대가 오래 되고, 더 보존상태가 좋으며, 더 많은 중립적인 성경사본들과 증거자료들이 발견된다면, 당연히 또 다른 성경의 발간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성경원본이 있다고 할지라도, 지금의 번역 성경과 거의 차이점이 많지는 않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1881년 본문비평작업에 직접 참여한 웨스트코트와 호르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비교적 사소한 것들을 제쳐 둔다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여전히 의심을 받고 있는 표현들은 전체 신약성경의 0.1%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레어드 해리스, 성경이란 무엇인가, 84쪽)

그러나 세계 최고의 신약성경사본을 티센도로프에게 빌려주었다가 그만 빼앗긴 성캐더린수도원은 얼마나 억울하였을까?

그런데 그 후 1975년 9월, 수도원 측은 보수공사를 하기 위하여 한쪽 벽을 허물고 공사를 하던 중에, 벽과 벽 사이의 작은 틈에서 거의 완전하게 보존된 성경을 무려 수십 상자를 발견하게 되는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수도원 측은 이것을 외부세계에 극비로써 엄격히 통제하였으나, 1977년 독일의 한 신문이 이 사건을 알게 되어 기사화한 후로부터 외부로 알려졌으며, 그로부터 수도원측은 이 성경사본들을 철저히 경계하며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구약성경의 사본

신약성경에 비하여 연대가 오래된 구약성경의 사본은 사실 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유대인들이 성경을 필사할 때에 거의 실수나 오류가 없도록 극도의 주의를 기울이며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기에, 필사본에 의한 오류가 극히 적다는 것이다.

신약과 달리, 이 구약성경사본을 필경하는 전문 필경사가 있었다는 것도 오류가 적다는 이유를 입증하여 준다. 성경필경사는 성경을 필사하고 있는 도중에 왕이 들어와도 그것을 중단하지 않았다고 전하여 진다.

유대인들에게 구약성경 자체가 곧 거룩한 유일신 여호와의 말씀이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였으며 낡아지고 파괴되어진 성경은 그 자체가 모독적이었으므로, 그들은 그 성경을 필사하였을 때에 낡고 상한 성경을 폐기처분시켜 나갔기에, 사본의 발견이 용이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장 권위가 있는 구약의 맛소라사본이 AD 10세기 이전의 것이 단지 몇 편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권위를 갖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에 있다. 또한 이 맛소라 사본의 완전성을 지지하여 주는 다른 이유는, 주전 3세기와 2세기 사이에 제작된 70인역과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70인역은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구약성경이며, 예수님과 사도들이 직접 사용한 성경이라는 점이며(기원전 250년경부터 번역되어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널리 사용되었으므로), 또 실제로 예수님과 사도들이 신약성경에서 인용한 많은 구약의 헬라어 구절은 이 70인역의 본문과 일치하고 있다.

그런데 히브리 구약성경사본은 10세기 이전의 것이 거의 발견되어있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한 바티칸사본이나 시나이사본은 AD 4세기의 연대를 가지므로서, 신약뿐 아니라 구약에서도 아주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구약성경은 히브리어(일부는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신구약 중간 시대에는 헬라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고, 또 각지에 흩어진 유대인들과 유대 경전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헬라어 구약 성경의 필요가 절실하게 요청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히브리어로 된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 바로 70인역(LXX)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알렉산드리아 지역에서 번역이 되었는데, 전승에 의하면 프톨레미 필라델푸스 왕(주전 285-246)의 요구로 70인의 장로들이 번역에 참여했다고 전해지기도 하고, 또 12지파에서 6명씩의 장로들이 대표로 선택되어 72명이 모여 70일 만에 번역을 마쳤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히브리어 구약성서가 모두 그리스어로 번역되기까지는 그 후 한 세기 이상이 걸렸다고 본다. 적어도 기원전 1세기까지는 구약성경의 번역이 완료되었으리라고 보며, 기독교의 전파에 큰 비중을 차지하였을 것이다.

그 후 기독교가 칠십인역을 자기들의 성경으로 받아들이면서, 반대로 유대교에서는 칠십인역을 배척하고 자기들의 히브리어 본문 성서에 관심을 보이게 되는 일이 나타났다. 제 2성전 파괴 이후, 새로운 히브리어 본문이 편집되면서, 히브리어 본문과 칠십인역 사이의 차이점들이 점점 많이 나타나게 되자, 헬라어로 구약을 읽던 이들 쪽에서는 최신 히브리어 본문을 대본으로 하는 새로운 번역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오리겐의 헥사플라(Hexapla)

오리겐은 주후 2세기에 태어났으며, 그는 젊어서부터 히브리어 연구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오리겐은 히브리어 성서를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칠십인역에 히브리어 표준 성서와 다른 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는 교회에 올바른 성서 문서와 그 원래의 뜻을 확인시켜 주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 결과로 생긴 것이 헥사플라이다.

기원후 230-240년 경에 가이사랴에서 활동을 하던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오리겐(Origen)이 ‘여섯 본문 대조 성서’를 편집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헥사플라’(Hexapla)라고 불리는 것이다. 즉 (1) 히브리어 본문 (2) 히브리어 본문의 헬라어 음역 (3) 아퀼라역 (4) 심마쿠스역 (5) 칠십인역 (6) 테오도션의 개정역 등 그당시 사용되었던 여섯가지 성경역본을 서로 대조하고 비교한 것을 말한다.

오리겐은 이 여섯권의 성경을 서로 평행으로 편집하여 동시에 비교해 볼 수 있게 기록하였던 것이다. 물론 오리겐의 주요 관심은 다섯째 난의 칠십인역이었다. 그는 칠십인역 본문을 히브리어 본문과 비교하여, 히브리어 본문에는 없는데 칠십인역에만 있는 첨가된 본문에는 앞과 뒤에 의구 표식을 달았고, 히브리어 본문에는 있는데 칠십인역에 그 본문이 번역되어 있지 않는 곳에서는, 다른 그리스어 번역에서 그 부분을 가져와서 칠십인역에 삽입시키고 앞뒤에 의구 표식을 붙여 놓았다.

이러한 시도 자체가 성경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한 믿음의 선배들의 노력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역사적 문헌의 기록으로 보면, 아쉽게도 헥사플라의 원본은 600년 경까지는 존속되었던 것 같으나, 오늘날에는 단편만 남아 있다. 만약 그 헥사플라가 지금 발견된다면 그 가치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헥사플라는 주후 240년에서 245년경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헥사플라의 칠십인역은 주후 300년 경 팜필루스(주후 310년에 순교)와 가이사랴 감독 유세비우스(주후 338년 사망)에 의하여 가이사랴에서 필사되어 사용되었다고 한다. 현재 바티칸사본과 시내사본은 이 유세비우스가 필사한 칠십인역 100권 중에 하나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1947년 3월, 모하메드 아디브란 아랍의 양치기 소년이 여리고 남쪽 사해서편에서 잃어버린 염소를 찾다가 여태껏 발견되지 않았던 수직동굴을 발견하게 되고, 혹시 그 구멍에 염소가 빠지지 않았는가 생각이 들어 돌을 던져보게 되는데 항아리가 깨지는 소리를 듣게 된다.

 

호기심이 들어서 그 동굴 입구를 찾게되고, 그곳에서 고대 히브리어가 기록된 몇 개의 가죽 두루마기를 찾게 된다. 그 양치기 소년은 몇푼의 돈을 받고 그 가죽 두루마리를 한 아랍의 골동품 상인에게 팔았고, 1947년 11월23일, 아랍상인은 그것을 귀한 가치의 성경사본임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팔기 위하여 성경학자를 찾던 중, 히브리대학의 수케닉이라는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그와 접촉하게 된다.

그 당시는 전쟁이 있었던 시기였으므로, 수케닉교수는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그 아랍상인을 만나서 그 두루마기를 흥정하게 되며, 그 두루마리를 구입한 후에, 수케닉교수는 훗날 누군가에게 4개의 두루마기가 더 있다는 전화를 받게 된다. 그 후에 그 4개의 두루마리가 시리아정교회의 사무엘 대주교에게 전하여지고, 그에 의하여 수백만 달러를 홋가하며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지만 너무 비싼 가격으로 소문만 무성하게 된다.

수케닉교수는 1953년 죽고, 마침 수케닉교수의 아들, 야딘이 아버지의 뒤를 받아 고고학자가 되어 1954년 미국에 건너가게 되었다가, 아버지의 염원이며 꿈이었던 그 4개의 두루마리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것을 25만 달러에 흥정하여 구입을 눈앞에 두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거액의 돈이 없었던 그는 이스라엘 정부에 급히 전보를 치게 되며, 이스라엘 수상으로부터 “이스라엘 정부에서 지불을 보증할 것”이라는 전보문을 받음으로, 마침내 그것을 구입하게 된다. 야딘이 구입한 이 사본들은 현재 사해사본 박물관의 ‘책의 전당’에 보관되어 있다. 수케닉과 그의 아들 야딘의 성경에 대한 성경말씀에 대한 열정과 집착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감히 본 받을만 하다.

그로부터 학자들은 1956년까지 11개의 동굴을 정밀하게 탐사하여 수천 개의 필사본 단편을 포함하여 대략 600부의 성경필사본을 발견하게 되며, 구약성경사에 한 획을 긋는 엄청난 발견이 시작되어 진다.

 

그 동굴은 유대인의 한 종파인 엣세네파의 도서실로 판명되어지는데, 그들은 서기전 1세기부터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던 소위 종말론자들이었다. 이들은 결국 AD68년 로마에게 멸망 당하는데, 이들은 로마가 쳐들어오자 대대로 보관하던 구약성경과 문헌들을 질그릇항아리에 넣어 동굴 속에 감추어 놓은 것이다.

현재 히브리어 구약성경 사본은 서기 10세기의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인데, 이 사해사본은 구약의 역사를 약 1천년을 앞당긴 희대의 발견이 된 것이다. 이 사해사본에는 BC 4세기경의 것으로 보이는 사무엘서 단편도 발견되어지며, 주후 1세기의 연대의 것이다.

이 사해문서가 발견된 직후, 많은 기독교와 유대교의 학자들은 현재의 성경이 ‘혹시 조작되고 변질될 수도 있는 가능성’ 때문에 상당히 두려운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사해문서의 조사에 참여한 아셔라는 학자는 “제1동굴에서 찾은 이사야서는 지금의 성경과 95%가 동일하며 그 5%의 다른 점도 대부분 약 일천 년간에 걸쳐 변화되어진 철자법의 차이로 야기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밀러 부로우스는 그의 저서 ‘사해두루마리(The Dead Sea Scrolls)’에서 “거의 일천년이나 되는 기간에서 변경된 것이라고는 거의 미미할 정도”라고 감탄하고 있다.

많은 안티기독교와 이단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이 성경이 조작되었고 편집되었다고 주장을 하여 왔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보존되어 왔던 것이다.


유기적 영감에 의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당연히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의 영감(Inspiration)에 대한 정의는 “선택된 사람들을 감동시켜 하나님의 말씀을 오류없이 각자의 언어적 표현으로 기록하도록 하신 성령의 역사”를 뜻한다.

하지(Hodge)라는 학자는 “계시의 목적과 전달은 지식의 전달에 있다. 영감의 목적과 의도는 가르침에 있어서 무오성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학자는 “성경의 저작권은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하였다.

종교개혁 이전의 가톨릭은 축자영감설을 따르고 있었지만, 지금의 가톨릭은 오히려 자유주의에 가깝다. 또 합리주의가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때에, 어떤 학자들은 성경의 오류를 인정하기도 하였고, 어느 학자들은 부분적인 영감설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간혹 정통신학에서 말하는 성경의 영감에 대한 주장을 ‘축자영감설’(하나님의 말씀을 성경 기자가 그대로 받아쓰기 했다는 설)로 착각하고 있는 분들이 많은데, 그렇지 않다. 성경의 기자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성경을 기록하였다는 것은, 기록자의 인성이나 문체, 나름대로의 습관, 판단을 갖고 기록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며, 때로는 어떤 문헌과 전승을 조사하고 탐구하기도 하며, 자료와 문헌을 참고하고 인용하였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모두 포괄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라는 개념은 하나님께서 성경기자들을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의미이다. 그 과정에서 ‘영감(Inspiration)의 감동’이라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지만, 하나님이 직접 불러 주신 것을 그대로 받아쓰기로 기록하게 하였다는 방법이 아니다.

 

그렇다면 인위적인 점이 50%, 하나님의 것이 50%라는 것을 의미할까? 그러한 것은 더욱 아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수많은 오류가 발견되어질 것이다. 즉 하나님은 성경기자들을 도구로서 이용하시되, 인간의 요소를 전혀 배제한 것이 아니라, 그들 성경기자들의 완전하고 독자적인 영감 그대로 사용하면서, 성령께서 감동과 조명으로 역사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유기적영감설(Organic Inspiration)이라고 부른다.

성경은 모두 기록한 사람들과 시간적, 환경적, 사건적인 상황이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성경은 오직 한 가지 주제, ‘하나님의 구속사’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서로 다른 성경의 기자들이 똑같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1:21)

본문에서 ‘성령의 감동하심’은 “Moved by Holy Spirit (KJV) / Carried along by Holy Spirit (NIV)”라고 번역되며, 마치 물 위에 떠있는 배가 물에 따라 함께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인규님의 글).

 

다음은 성경 장, 절에 대한 역사에 대하여

 

구약은 39권- 929장 -23214절- 592439단어- 2738100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신약은 27권- 270장 -7967절  - 132253단어-   933380글자로 이루어졌다.

신구약66권- 1199장- 31181절- 724692단어-  3471480글자가 있다.

 

성경은 각편의 제목이 있고, 세부적으로 나누어 장, 절로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을 처음 기록할때 제목을 달아서 기록했거나 장, 절을 구분하여 기록하지는 않았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제목과 장, 절로 나누어 찾아보기 좋도록 한것이다.

성경 본문이 처음 기록될 당시에는 문장을 구분하는 아무런 체계가 없었다. 장을 구분한 최초의 성경은 신약의 경우, 약4세기 경의 바티칸 사본(codex vaticanus :B)의 가장 자리에 표시되었다.

여기에는 마태복음이 170구분, 마가복음이 62구분, 누가복음이 152구분, 요한복음이 50구분으로 되어있다.

또 다른 구분체계는 제5세기의 알렉산드리아 사본(codex alandinus :A)에서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마태복음 68,

마가복음 48, 누가복음 83, 요한복음 18구분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도 첫장이 책 서두에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아마 서기관들이 책의 시작부분을 머리말로 생각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사도행전도 사본에 따라 36, 69, 40, 83 등 여러 장으로 구분되고, 서신들도 여러 부분으로 구분되며, 계시록은 24장로를 따라 24강화로 나누고, 다시 그 각각을 인간의 세 요소를 반영하여 72장으로 구분하기도 했다.

구약의 경우는 라틴어역 Valgata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1204-5년에 캔터베리대 주교인 스테판 랑톤(Stephan Langton) 이 시도했으며, 그 후 1330년에 나온 솔로몬 벤 이스마엘(Solomon Ben Ishmael)의 히브리어 성경의 일부 필사본(筆寫本)이에 랑톤의 장 표시를 난외(欄外)에 기록하고 있다.

인쇄본으로 장 표시를 했던 최초의 히브리어 성경은 1517년 7월 10일에 나온 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 70인역 등의 대역 성경 Complutension Polyglot 이다. 그러나  장 표시는 본문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난 외에 표기되었다.

그 후로 1569-1572년에 베니토 아리아스 몬타노(Benito Arias Montano)가 편집한ntwerp Polyglot 에는 인쇄판 성경으로서는 처음으로 본문에 장 구분이 표시되었고, 또한 구약의 장 구분에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구약성경의 경우 절 구분은 장 구분보다 앞서서 시행되었다. 절 구분의 시직은 히브리어 본문을 회중들 앞에서 낭독하고 그것을 아람어로 통역하던 때부터 비롯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낭독자는 일정량의 히브리어 본문을 끊어서 낭독했고, 통역관은 그것을 듣고서 아람어로 통역하는 방법이 계속되어 오다가 어느 단계에서 부터 절구분이 확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낭독과 통역의 분위기를 느 8:1-8에서 볼 수 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일상생활에서는 아람어를 썼으나, 율법은 히브리어로 쓰여 있었기 때문에 통역관들이 통역을 해야 했다. 그리고 매 절 끝에 그침표(:)를 붙인 것은 주후 500년경 부터라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절구분이 MT에 확립된 것은 10세기에 아론 벤 모세 벤 아세르(Aron Ben Moshe Ben Asher)가 편집한 역본 부터라고 하며, 총 절수는 5,845절로 되어 있다.

신약성경의 절 구분은 1551년 프랑스의 인쇄업자 로버트 스테파누스(Robert Stephanus)에 의해 표기 되기 시작했으며 현재 까지도 통용되고 있다. 우리말 개역성경의 장 절 구분은 MT나 LXX이 아닌 Latin Vulgata를 많이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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