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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기독교 박해의 역사

by 【고동엽】 2013. 5. 7.
 
 

 

기독교 박해의 역사 1

 

 사도시대교회는 기독교의 세계화를 위하여 준비되어진 하나님의 교회 역사이지만 참으로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사도시대에 이르러 수많은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들이 인간으로서는 참아내기 어려운 지경의 각종 박해를 받았으며 때로는 십자가에서, 때로는 단두대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속절없이 죽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그 모진 박해를 기쁨으로 받아들였고 타오르는 화염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사나운 맹수들에게 찢기어 삼키 우면서도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림으로서 박해자들을 전율하게 만들었다. 기독교에 대한 무서운 박해는 기독교 역사가 본격적으로 진군하기 시작하였던 로마교회를 통하여 시작되어 졌다.

 

우리는 사도시대의 기독교박해를 고찰하면서 그 박해가 발생하게 된 이유와 배경을 신학적으로 분석하며 또한 그 박해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신학적으로 정립한다.

 

 제1장.유대인들에 의한 박해.

 

 사도시대 기독교교회에 대한 박해는 유대교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때에 유대인들은 같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유대교와 기독교로 갈라져 서로 대립하는 형편이었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대립은 이스라엘 본토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세계 전역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전체에 확산 되었다.

  

1.유대교와 기독교의 대립.

 

초기 기독교 당시 유대인들은 매우매우 혼란스러운 입장에 처해 있었다. 유대인들은 수세기 동안 외세의 침략과 정복에 의하여 국가 없는 조국을 마음 속에 지키고 그리며 살았다. 그러 그들에게는 조상대대로 전승되어 온 메시야사상에 의한 시온니즘적 대망이 있었고 그 대망이 이루어지는 날을 기다리며 살았다. 그러한 유대인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출현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가난한 일개 목수의 아들이 메시야를 자처한 것도 민족적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는데 그 목수의 아들이 점점 오만방자해 지더니 이제는 아예 하나님과의 내선일체를 주장하고 나섰다.

 

유대인들은 심히 분노하였고 그를 로마법정에 세워 처단해 버렸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난줄 알았던 예수그리스도의 잔영<殘靈>이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되살아 났다.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점점 늘어가면서 상대적으로 유대교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미 국가의 멸망으로 민족 전체가 전 세계에 뿔뿔이 흩어졌고 본토에 남은자 마져 교리적 문제로 사분오열되었으며 밀려들어오는 헬라니즘, 그레꼬로만니즘 등등의 이방문화로 인하여 전통적인 시온니즘이 와해되고 있는 상황 하에서 가볍게 보았던 신흥종파가 유대인 사회 전체를 위협했다. 이러한 상황은 본토 예루살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로마, 그리스, 이집트, 팔레스틴 등등의 지역에 흩어져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 사회 전체에 만연되었다. 특히 디아스포라 유대인 사회는 본토 유대인 사회보다 더욱 심각한 상황이었다.

 

여러 가지 사연으로 인하여 조국을 떠나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조상대대로 계승되어 온 시온니즘 하에서 회당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적 삶을 살았다. 그러한 유대인들에게 어느 날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드디어 고대하던 메시야가 탄생하였다는 희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전해들은 소식들은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경우에는 진실보다 많이 오류 되어 있거나 무시되어 있어서 신경 쓸 것 없는 가벼운 이야기였고 어떤 때는 너무 과장되어 놀라운 소식일 때도 있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처음 전해들은 이야가는 참으로 놀라우면서도 실망스러운 이야기였다.

 

*베들레헴의 어느 마구간에서 목수의 아내가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해서 동방의 박사들이 경배했다. 이에 헤롯이 놀라 당시에 태어난 사내아이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이러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유대인들은 한편으로는 놀라움과 기대감을 가졌고 한편으로는 실망하였다. 그들은 조상대대로 전해 내려온 구세주가 드디어 왔는가? 하는 점에서 놀라움과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러나 구세주가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사실에 의문과 실망을 하였다. 그들은 구세주가 헤롯왕조의 후예로 태어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헤롯은 유대인이 아닌 이두메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상식대로라면 구세주는 목수의 아들이 아닌 다윗가문 중에 명망 있는 어느 집안에서 태어나게 되어 있었다. 때문에 그 후로 30여년이 흐르도록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가 더 이상 전해지지 않음에 따라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잊어버렸다. 그러나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목수의 아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들려왔다.

 

그가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은 후 광야에서 시험받은 이야기를 비롯하여 각종 이적과 기적을 행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그들은 크게 놀랐고 흥분하였으며 메시야에 의한 조국과 민족의 영광이 재현될 것을 열망하게 되었다. 특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했다는 대목에서 그들은 크게 고무되었고 새로운 시온니즘에 대한 정열이 불타올랐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다시 실망스러운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이었다. 비록 그가 약속한 대로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함께 전해졌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소식은 믿을 수 없는 낭설로 받아 들여졌다.

 

그러나 계속하여 전해지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으로 인하여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종교적 집단으로 나누어 졌다. 그들에게 전달되는 예수그리스도는 전해주는 자의 성향에 따라 크게 달랐고 경우에 따라서는 심히 대조적이었다. 민족적 시온니즘 자들이 전하는 예수그리스도는 십자가에 허무하게 죽어간 허약하고 나약한 가난뱅이였으며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위선자이며 사기꾼이었고 매국노였다. 반면에 평화주의자들이 전하는 예수그리스도는 각종 기적과 이적을 일으키는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죽는 순간까지 모든 죄인을 용서하는 사랑의 메시야였으며 사망권세를 물리치고 부활 승천한 왕중의 왕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오시어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주였다. 때문에 유대인들은 전해주는 자들의 성향과 전해 받는 자들의 성향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되었다. 전달하는 자나 전달받는 자가 모두 민족적 시온니즘자들인 경우에 그들은 유대교에 머물면서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후예들을 증오하고 적대하였다. 반면에 전달하는 자와 전달받는 자가 다 함께 평화주의자일 경우에 그들은 새로운 평화주의적 시온니즘을 형성하면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런데 또 다시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오순절 성령임재 사건이 전달된 것이다. 성경은 그 때에<천하 각국으로부터 온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 사건에 동참했다-행2:5>고 증거 한다. 그때에 천하 각 국으로부터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통하여 성령임재 사건을 전해들은 유대인들은 민족적 시온니즘에서 탈피하여 평화주의적 시온니즘으로 돌아섰고 그리하여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러나 수 십 세기 동안 계승되어진 시온니즘 주의자들은 여전히 그 소식을 낭설로 받아들였다. 때문에 그들은 기독교로 개종하는 유대인들을 반역자로 몰아 증오하고 적대하였다.

 

 기독교 박해의 역사 2

 

2.민족적 개념에 의한 대립.

 

  당시에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야훼하나님이 세계의 하나님으로 전파되는 것에 분노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선택된 백성은 오직 히브리민족 이스라엘 뿐 이었다.

 

수천 년 간 조상대대로 계승되어온 선민사상과 자신들만의 하나님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로 살아온 그들에게 세계적인 하나님을 주장하는 기독교 유대인들은 이제 더 이상 동족이 아니라 매국노였고 역적이었다. 특히 같은 유대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와 기독교사이에는 조국과 민족의 멸망과 비극에 대한 역사관에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기독교인들은 조국과 민족의 비극적 멸망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처형한 유대교인들에게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책임을 다윗과 솔로몬에게까지 소급하였다. 이러한 개념은 일반인들에게서는 별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성경에 밝은 지도자 계열에서는 단호하게 나타났다.

 

저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중심의 신정 국가적 정치체제를 세우지 아니하고 인간주의적 정치체제를 이루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받았으며 특히 다윗이 밧세바를 왕비로 취하기 위하여 우리야를 살해한 것과 밧세바가 낳은 솔로몬을 왕위에 앉힘으로서 이스라엘이 남북왕조로 분단되었고 솔로몬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 하는 이방여인들과 통혼함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국가와 민족이 멸망했다고 주장하였다.

유대교인들은 기독교인들의 그러한 주장에 크게 진노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다윗과 솔로몬은 이스라엘국가를 부국강병의 국가로 발전시킨 위대한 성군이었다. 따라서 그러한 주장을 국가와 민족에 대한 배신행위로 간주하였고 기독교인들을 증오하고 저주하였다. 한편 유대교인들은 자신들의 조국과 민족적 패망이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아니한 이단적 유대교 분파들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기독교라는 새로운 이단분파로 인하여 유대민족에게 하나님의 더 큰 진노가 있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유대교인들은 기독교가 조상대대로 전수되어 온 자신들의 신앙적 구심이었던 율법을 소홀히 여기고 함부로 간과하는 것에 크게 분노하였다. 그들은 이미 안식일 문제를 비롯한 율법문제로 예수그리스도를 공격하였다가 번번이 참패당한 상처와 감정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바울이 아예 율법을<기독교를 안내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폄하 하였다. 유대교인들은 크게 경악하였고 무너진 자존심과 극심한 상처에 심히 분노하였다.

 

그들은 기독교를 그대로 방치하면 유대교 자체가 송두리째 와해 될 것이라는 위기감과 불안감에 전전긍긍 하였다. 이때의 유대교는 로마당국으로부터 공인받은 종교<religio licita>였던 반면에 기독교는 아직 신흥종교로서 그러한 지위를 확보하지 못했다. 때문에 유대교는 기독교를 사정없이 몰아 세워 로마정부에 고소하였고 기독교는 오히려 로마정부의 보호를 요청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한편 로마정부는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은 기독교를 본격적으로 탄압하지 않았다. 로마정부는 처음에는 기독교와 유대교의 갈등을 유대인들 사이의 종교적 갈등 정도로만 이해하였다. 따라서 로마정부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갈등에 관여 하려 하지 않았다.

 

 <행18:12-17>에는 그와같은 당시의 상황이 증거되고 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세웠을 때에 유대인들이 기독교를 핍박하기 위하여 아가야의 총독 갈리오<마르쿠스 안네우스 노바투스-Marcus Annaeus Novatus>에게 바울을 고소하였으나 갈리오총독은<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무슨 부정한 일이나 괴악한 일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주는 것이 가하거니와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하고 그들을 재판정에서 ?아내었다.<행18:12-17>

 

로마정부는 폭동이나 난동이 생길 때에는 치안유지를 위하여 군대를 동원하고 주모자를 색출하여 체포했지만 종교적, 민족적 갈등에는 되도록이면 간섭하지 않았다. 당시의 기독교는 오직 복음전파에 주력하였으며 따라서 로마정부의 심기를 거슬리는 일이 복음전파에 지장을 준다는 차원에서 로마정부를 자극하는 어떤 행동을 삼갔다. 반면에 유대교도들은 여전히 로마에 대하여 적대적이었다. 그들은 로마로부터의 정치적 자유를 쟁취하려 했으며 기회만 있으면 로마에 저항했다. 때문에 기독교가 유대교와는 다르다는 사실이 점점 들어나게 됨에 따라 로마정부는 기독교에는 어느정도 호의적인 반면에 유대교는 우려의 눈길로 예의 주시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독교에 대한 유대교의 감정은 더욱 나빠지게 되었다.

 

로마의 역사학자 수에토니우스<Suetonius>의 저서<클라우디의생애-Life of Claudius>에 의하면 A.D.50년경에 로마에서 유대교와 기독교사이에 폭력이 동원되는 마찰이 있었다. <행18:2>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글라우디오의 명령에 의하여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이주한 것을 증거 한다. 이때의 글라우디오는 로마제국의 제4대 황제였는데 그는 이때에 기독교와 유대교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유대인들을 로마로부터 추방시켰다. 수에토니우스는 글라우디오황제가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시킨 것은 크레스투스<Chrestus>라는 사람의 선동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이 계속하여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증언한다. 학자들 중에는 크레스투스가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여 기독교인들이 유대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유대교인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으로 이해한다.

 

이토록 오랫동안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던 기독교와 유대교는 <A.D.70년>에 일어난 예루살렘 붕괴와 성전의 파괴를 계기로 하여 더욱 심화되었다. 기독인들은 그러한 민족적, 국가적 비극의 종말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불순종 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한 유대교에게로 돌렸다. 때문에 유대교인들은 더욱 분노하였고 그리하여 <A.D.85>년에 이르러 드디어 엄청난 사태가 일어났다. 유대교도들은 회당예배 의식을 통하여 기독교인들의 파문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그들이 선포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자렛인들(Nazarenes-기독교인들을 가리킴)과 다른 모든 이단들은 순식간에 멸망을 받고 생명의 책(Book of Life)으로부터 지워질지어다.>

 

이로서 기독교 유대인들과 유대교 유대인들은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결별을 이루었으며 로마에 의한 기독교 탄압의 와중에서 기독교인들에 대한 유대교인들의 박해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기독교 박해의 역사 3

 

로마를 제외한 지역들에서는 기독교가 다양한 종교들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로마제국의 종교정책 하에서 다신론 종교사상이 만연되었고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비록 기독교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특별성을 고집함으로서 다소 이상하기는 했지만 이미 디아스포라 유대교인들을 통하여 그들의 하나님 유일신앙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오히려 하나의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족끼리 서로 대립하고 마찰하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로마의 상황은 달랐다. 다른 지역의 기독교와 달리 로마의 기독교는 각종 이방민족들에 의한 박해에 시달려야 했다.

로마제국 정부는 두 가지 차원에서 다신론적 종교정책을 시행하였다. 첫째는 주변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다신론적 종교사상이다. 로마의 정복자들은 자신들 앞에 패배한 자들이 섬기는 신들이 매우 연약한 신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강한 능력을 소유한 신들의 후원이 절대 필요하며, 하나 또는 소수의 신들에게 의존하는 것보다는 많은 신들의 후원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또 하나는 정복지를 관리함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정복지 주민들의 종교를 탄압하지 않고 오히려 장려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두 가지 차원에서 로마제국 정부는 정복지의 종교와 신들을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였으며 로마시에 만신전<모든 신들의 신전-Pantheon>을 설립하여 정복지에서 유입한 모든 이방민족들이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의 형상을 만들어 세우게 했다. 만신전에 세워진 신들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하나님과는 성격이 달랐다. 그 신들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만을 고집하지 않고 모든 신들과 어울려 사이좋게 지냈다. 로마의 종교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섬기던 신만을 고집하지 않고 마음에 드는 신들을 골라 섬기는 다신숭배적 신앙생활을 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대교와 기독교를 증오하게 되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신의형상이 없었기 때문에 만신전에 그들의 하나님 신상을 세우지 않았고 신을 세우라는 종교행정 당국의 지시에도 절대 불응했다. 종교행정 당국은 유대교와 기독교에게 신의 형상이 없음으로 신을 세울 수 없다는 저들의 변명을 이해했지만 이교도들은 그것을 자신들에 대한 종교적 모독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유일신을 고집하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다신론적인 자신들의 신들과 자신들을 동시에 무시한 것으로 생각하여 유대교와 기독교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된 것이다.

 

그들은 특히 기독교를 이상하게 보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대교는 이미 어느정도 알고 있었던 종교였다. 그러나 기독교는 동족인 유대교로부터도 배척되어진 종교로서 여러 가지 차원에서 생소했고 이해할 수 없는 요소들이 많았다. 당시에 로마에는 기독교에 대한 오류 된 소문들이 많았다. 기독교에 대한 소문들은 주로 그들의 신앙적 생활에 대한 오해로 인한 것이었다.

 

기독교 신자들은 매일 같이 애찬<love feast>을 위한 모임을 가졌다. 그것은 성도들의 특별한 모임이었는데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 세례를 받은 자들만의 모임이기도 했다. 모임에 참예한 기독교 성도들은 서로를 형제, 또는 자매라고 불렀으며 자신의 배우자들에게도 이러한 호칭이 사용되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모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신들 마음대로 상상하여 이야기하였고 그것들이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는 가운데 이상한 소문으로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기독교인들의 예배는 비밀리에 한데 모여 먹고 마시며 방탕을 즐기며 나중에는 불을 끈 다음 남녀노소가 어울려 혼음<club sex>을 하며 심지어는 근친상간까지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기독교에 대한 또 다른 나쁜 소문은 성찬식 때문에 생겨났다.

 

기독교신자들은 성찬식을 거행할 때에 예수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취한다고 했으며 또한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 새신자의 입교식 때에 유아를 커다란 빵 속에 감추어 두고 입교자에게 그 빵을 자르게 한 후 아직도 따뜻한 유아의 살을 함께 먹는다는 소문을 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먹은 자들은 자신의 범죄가 탄로날까봐 침묵을 하게 되고 어쩔 수 없이 기독교에 머무르게 된 다는 소문이 추가되었다.

 

 이때에 로마에는 실제로 그러한 종교집단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도 그러한 의심을 받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온 인류를 증오하고 저주한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것은 유대교인들과의 갈등 때문에 생겨난 소문이었다. 사람들은 같은 유대인이면서도 유대교적 유대인들을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그들이 동족까지도 미워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온 인류들을 증오하고 저주할 것이라고 소문낸 것이다. 이러한 헛소문들에는 유대인들도 관여되어 있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처형한 유대인들을 경멸하자 그것을 기독교인들이 전 인류를 증오하고 저주하는 것으로 오류 시켜 확산했다. 때문에 네로 통치시대에 로마에 화재가 나고 그것이 기독교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퍼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을 고발하거나 또는 직접 위해를 가하는 일이 도처에서 발생했다. 또 어떤 자들은 아기 예수께서 마구간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와전시켜서 기독교인들이 당나귀 또는 송아지에게 예배한다고 소문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형편없이 무자비하고 무식한 종교집단이라고 믿었으며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탄압받아 마땅한 자들이라고 비웃고 증오했다.

 

기독교에 대한 비난과 비판은 지식층, 또는 학자들에게서도 나왔다. 그들은 기독교에 대한 것을 다각도로 연구조사 했다.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소문과 같이 패역하고 부도덕한 종교 단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독교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구세주로 오셨는데 그가 목수의 아들로서 마구간 말구유에 태어났고 십자가에 죽은 후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갔으며 나중에 세상을 심판하러 온다는 이야기는 그들에게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이야기들이었다.

 

로마인들은 본래 지극히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힘을 강조하는 군사문화 속에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헬라문화를 받아들여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개념을 그들의 합리적인 라틴니즘과 연합시켰다. 때문에 그들은 신을 인식함에 있어서 강하고 능력 있는 신만이 최고의 신이라고 믿었다.

 

그러한 로마인들에게 최고의 능력을 가졌다는 유일한 신의 아들이 마구간 말구유에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이미 상식 밖의 일이었고 더구나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다는 이야기는 도저히 말이 않되는 이야기였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그렇게 변변치 못한 구세주란 용납되지 않는 것이며 그가 살아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과 나중에 세상을 심판하러 온다는 이야기들은 모두가 허황된 거짓말 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기독교를 유대교에서 갈라져 나온 종파들 중에서 가장 저급한 종파로 보았다. 로마인들은 원래 유대교와 기독교의 주장을 어불성설<語不成說>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유대교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이외의 모든 신들을 만들어 세운 가짜라고 무시하는 것을 종교적인 논리로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만약에 로마의 만신전에 있는 신들이 모두가 가짜라면 유대인들은 그 가짜를 무시하지 못하고 왜 두려워하여 그들 곁에도 가지 않는가? 그리고 또한 그토록 강하고 최고의 능력을 가진 신의 아들이 어찌하여 십자가에 죽었으며 그토록 전능하신 신께서 어째서 자신을 추종하는 자들을 망하게 하고 돌아보지 않는가?>

 

로마의 지식인들은 기독교를 어리석고 무식한 자들의 종교적 집단으로 규정하고 조롱했다. 그들 중에 가장 기독교를 무시하고 조롱한 자는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의 치세 기간 중에 명성을 날린 지식인 들 중 하나였던 켈수스<Celsus>였다. 그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마리아와 로마병사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라고까지 하면서 기독교를 조롱했다. 그는<진정한 말씀-The True Word>이라는 저서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기독교를 조롱했다.

 

<개인들의 가정에서도 우리들은 옷감과 자갈을 가지고 일하는 자들, 즉 가장 무식하고 교양 없는 자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집안의 가장 앞에서는 이들은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침묵을 지킨다. 그러나 기회만 있으면 어린아이들과 혹은 무지한 여인들을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이야기로 꼬이기 시작한다.....따라서 내가 진정 진리를 알기 원한다면 스승들과 아버지를 떠나 여인들과 아이들을 쫓아 목공소나 철공소, 혹은 여인들의 사랑방으로 가라. 거기서 완전한 생활의 지혜를 배울 수 있으리라. 이것이 곧 소위 기독교인들이 자기들을 쫓는 자들을 기만하는 방법이다.>

 

<도대체 하나님이 이와같은 방법으로 지구를 방문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과연 인간들 가운데 일어나는 사건을 알아보기 위해서였을까? 그렇다면 그가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지 못한단 말인가? 그렇지도 않다면 그가 아시기는 하지만 직접 내려오시기 전에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악행을 처리하실 수 없기 때문이었을까?>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죽은 후에 다시 부활할 것을 믿으며 가르친다. 이러한 신앙의 기반 위에서 다른 이들이 믿을 수 없는 완강한 고집으로 죽음을 맞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공정하게 보아도 그 존재가 불확실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내세를 위하여 그 존재가 분명한 현세를 포기하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더욱이 최후의 부활이야말로 기독교가 갖는 웃음거리 중 대표적인 것이다. 인간이 부활한다면 불에 탔거나 혹은 짐승이나 물고기 등에 의해 먹혀버린 시체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시체의 흩어진 부분을 찾아 세상을 헤매야 하실 것인가? 이를 다 찾아 꿰매지 못하는 경우에는 부활한 육체에 부족한 것이 생길 것인가?>

 

로마지식인들의 이러한 반박들은 기독교의 신학원리를 깨닫지 못함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그것은 현대 종교학에서도 때때로 제기되는 질문들이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분명하게 해주어야한다. 그것이 신학자들에게 주어진 변증의 책임이며 의무이다. 그러나 현대 목회자들 중에는 이러한 질문에 해답을 주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더 많은 불신을 당하는 논리를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기독교인들은 부활해야 하기 때문에 사망했을 때 화장해서는 않되고 반드시 매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저들의 주장대로라면 전쟁이나 화재 등등을 당하여 시신 자체가 완전히 훼손되어 버린 성도들은 결코 부활 할 수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수백 년 전에 사망한자들은 비록 매장했다 할지라도 완전히 사라져 흔적조차 없으며 비록 그들이 흙으로 남아 있다 할지라도 개발, 건축 등등을 통하여 이미 흩어져 버린 상태이므로 부활할 수 없다. 인간의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죽은 자의 상태는 아무의미가 없다. 기독교성도의 죽음을 매장으로 고집하는 자들은 이러한 원리를 모르는 무식한자들이다. 저들은 초기 기독교시대의 로마인들과 같은 어리석은 자들인 것이다

 

 기독교 박해의 역사 4

제3장.로마정부에 의한 박해.

기독교에 대한 행정적, 법적 구속력이 없는 유대교나 일반 종교들의 박해는 지엽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보다 확실한 박해는 로마정부 당국에 의한 박해였다. 로마정부 당국은 기독교에 대하여 수세기 동안 그리고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박해하였다. 로마정부 당국의 박해는 로마 통치 하의 전 지역에서 시행되었으며 그 유형과 사례도 매우 복잡하고 다양했다. 따라서 그것을 일일이 다 소개할 수 없기에 그 중에 대표적인 사례들을 선별하여 정리한다.

 

1.박해의 원인.

1)정치적 원인.

이스라엘 남북왕조 멸망 후 세계 각지로 계속하여 흩어져 이주해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로마에도 상당수가 거주하고 있었다. 기원 후 1세기경의 로마정부 기록을 보면 로마시내에 12개정도의 유대교회당들이 있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로마통치 하의 전 지역에서 매우 뜨거운 감자였다. 유대인들은 유일신앙을 고수하여 로마의 종교정책에 정면으로 항거했다.

 

그들은 특히 자신들의 예루살렘 성전을 시온성전이라고 불렀고 자신들의 종교적 사상을 시오니즘이라고 주장했으며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거나 성전 보수에 사용될 헌금을 보냈는데 그 헌금 액수가 과다 하여 때로는 한 지방의 경제사정을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때문에 로마통치 하에 있는 각 지방의 통치자들은 유대인들을 미워했고 때때로 그와같은 사정을 로마정부에 보고하여 어떤 특별조치를 내려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로마정부로서는 유대인들을 함부로 홀대할 수가 없었다.

 

유대인들은 탁월한 상술을 통하여 각 지방의 경제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그들을 함부로 대했다가는 경제가 악화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황제숭배라던가 만신전 봉례행사 같은 종교적 행사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러한 행사에 소용되는 막대한 비용들을 헌금하는 것은 거절하지 않았으며 각종 빈민구제와 병자 치료 및 장례에 부조하는 등등의 사회적 봉사를 많이 했다. 때문에 로마정부로서는 그들을 탄압하기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로마정부는 그들이 특별한 반란적 행위를 하지 않는 한 그들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이 오히려 그들을 다스리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유대인들의 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해 주었다. 따라서 기독교도 유대교의 그늘 아래에서 어느정도의 편의가 제공되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로마에 들어간 초창기에 로마는 기독교와 유대교를 같은 종교의 분파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교와 기독교에 대한 구분이 이루어지고 특히 유대교와 기독교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첨예화되면서 심지어는 폭력이 수반된 충돌이 계속되자 유대교와 기독교 모두를 탄압하게 되었다. 특히 유대 본토의 마카비우스가<家>에 의한 폭동에 영향을 받은 유대인들이 독립자금을 보내거나 반란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게 됨에 따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2)종교적 원인.

로마제국 정부는 로마의 정치적 안정을 위하여 종교를 이용했다. 로마정부는 식민통치 하에 있는 여러 지방에서 유입되어지는 민족들의 종교들을 모두 인정하고 연합시키는 정책을 펴 나갔다. 로마정부가 종교 다원화 정책을 세운 것은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로마의 종교적 자존심의 발로이기도 했다. 로마는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했다. 로마는 그 어 떤 신도 배타하지 않고 섬기는 다신론적 종교 국가였다. 원래 로마는 전통적으로<쥬피터><마르스><퀴리노스><다이아나><넵튠><쥬노><플라멘다알리스>등등의 신을 최고의 신으로 받들어 섬겼다.

 

로마정부는 정부 산하에 승원이라는 종교기관을 신설하고 승려제도를 만들어 종교를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로마가 세계정복에 나섰을 때 그들은 대부분의 국가들이 일정한 소수의 신들만을 구별하여 섬겼기 때문에 전쟁에서 패한 반면에 자신들은 신들을 구별하여 섬기지 않고 모든 신들을 다 함께 섬겼기 때문에 그 많은 신들이 자신들을 승리하게 도와주었다고 믿었다. 따라서 로마정부는 정복지 주민들이 로마에 이주해 살면서 들여온 그들의 신들을 배타하지 않고 모두 수용하였다. 로마정부는 모든 신들이 결국은 하나의 최고적 신들 밑에 존재하는 다양한 신들이라는 논리를 세웠다. 그리하여 만신 전을 만들어 모든 신들을 그곳에 모신 후 사람들이 자유롭게 신들을 선택하여 섬기게 했다. 그러나 이때에 유대교와 기독교는 그러한 로마정부의 종교정책에 순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었으며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았고 신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로마정부 당국은 유대교와 기독교를 다 함께 불순종하는 무리로 간주했다. 그러나 로마정부는 아직은 그것 때문에 기독교를 탄압하지 않았다. 앞장에서 이미 논증한바 있듯이 아직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분파로 인식하 고있 었던 반면에 유대교를 함부로 다스리는 것보다는 그들의 종교를 인정해 주는 것이 오히려 로마의 이익이 된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로마정부가 기독교를 탄압하게 된 것은 기독교와 유대교가 완전히 구분되어진 후에 발생 한기독교에 대한 부도덕한 소문들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이 기독교 유대인과 유대교 유대인으로 구분되어진 후에 기독교에 대한 아름답지 못한 소문이 로마에 퍼지기 시작했다.

 

로마의 탄압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로마정부의 눈길을 피하여 주로 새벽이나 깊은 밤에 지하 동굴이나 카타콤<Catacombs-지하묘지>등에서 집회를 가졌는데 그것이 새로운 박해의 원인이 되었다. 로마정부는 기독교의 비밀집회를 정치적 차원에서 우려했다. 유대인들이 비밀지하결사대를 만들어 폭동을 일으키려는 것으로 의심한 것이다.

 

3)사회적 원인.

 

  로마인들은 로마제국에 대한 특별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로마는 곧 자신이었으며 종교였다. 그들의 로마사랑은 애국차원을 넘어서 신앙이었다. 그러한 로마인들에게 오직 하나님만을 고집하며 군대복무를 거부하고 때로는 로마제국과 황제까지도 거부하는 기독교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로마인들은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기독교인들의 불충성에 대한 신의 노여움이라고 믿었다.

 

한편 로마인들이 기독교를 증오한 이유 중에는 기독교인들의 특별한 사생활도 포함되었다. 당시의 로마인들은 향락과 사치를 추구했으며 노예제도를 실시했고 특히 노예들을 검투사로 양성하여 검투사 시합을 즐겼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면서 노예제도에 반대했고 특히 노예들이 검투시합을 통하여 속절없이 죽어가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기독교인들은 또한 성적으로 부도덕한 로마인들의 삶을 거부했으며 절대적 가부장제도 하에서 실시되는 각종 부도덕한 악행<예를 들면 여자아이를 낳았을 때 가장이 그를 싫어하여 내다 버리는 관습이나 아내를 마음대로 버릴 수 있는 관습>들을 거부했다.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차원 높은 윤리적, 도덕적 삶은 로마인들의 자존심을 무너뜨렸고 그것이 기독교를 증오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4)황제들의 음모.

로마정부가 처음에 종교 다원화정책을 세운 것은 로마 거주민들이 종교적인 문제로 사회적 혼란을 일으키지 않게 하려는 정치적인 책략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정책이 나중에는 종교들을 하나로 묶는 정책으로 바뀌었다. 로마정부는 만신전의 신들 위에 로마황제를 좌정시켰다. 즉 로마황제가 신들 중의 신으로서 최고의 신이며 따라서 모든 신들은 로마황제의 통치 하에 있는 하급신이라는 종교체계를 세운 것이다. 로마가 이러한 종교적 체계를 세운 것은 대략 두 가지 이유로 전해진다.

 하나는 고대 애굽의 바로 왕조가 시행했던 정치체제를 모방한 것으로서 황제를 신격화 하여 신정치 체제의 제국을 건설하려한 것이고,

 

두 번째는 모든 신들 위에 황제를 좌정시킴으로서 로마제국의 종교적인 통합을 이루려 한 것이다.

 

그러나 로마정부의 종교정책은 로마집권자들의 정치적 계략에서 산출된 것이었다. 당시의 로마는 황제에 의한 군주정치를 옹호하는 정치세력과 원로원 위주의 공화정치를 옹호하는 정치세력간에 보이지 않는 암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원로원 위주의 공화정치 체제를 원하는 정치세력들은 황제의 군주정치가 독재적일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결국은 로마제국을 붕괴시키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황제에 의한 군주 정치체제를 막으려고 노력했다. 이에 반하여 사사건건 황제의 정책에 이의를 제기하는 원로원들에 대한 불만이 있는 황제와 황제의 측근들은 원로원의 힘을 약화시키거나 또는 아예 원로원 자체를 붕괴시키고 황제에 의한 군주정치 체제를 세우려고 했다.

 

 황제와 황제의 측근들은 이러한 계략 하에서 황제의 신격화를 주장했고 드디어는 황제의 신적 지위를 만신전 위에 둠으로서 로마 전역에 대한 황제숭배를 강요했다. 원로원은 처음에 황제의 신격화를 단호하게 반대했으나 황제의 강압적인 권위에 눌려 그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그 대신에 황제가 신으로 추대되는 것은 황제 생존시에는 불가하고 황제가 죽은 후 원로원의 결의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제는 그것을 받아들여 원로원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황제들은 계속하여 원로원을 몰아 부치어서 황제들이 생존시에 신으로 추대하게 하였고 황제들의 무력적 권위 앞에 원로원은 어쩔 수없이 굴복했다. 로마시내 전역은 물론이고 로마통치 하의 모든 지역에는 수많은 황제<신>들의 동상들이 건립되었으며 사람들은 그 앞에서 분향하고 경배해야 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러한 황제숭배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들은 차라리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결코 황제를 신으로 받들어 섬기거나 경배하지 않았다. 때문에 황제는 그러한 기독교도들에 대하여 크게 분노하였고 그것이 기독교를 탄압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이다.

기독교 박해의 역사 5

2.박해의 역사.<10대 박해>

 

로마제국의 기독교박해는 주로 황제들의 주도 하에 일어났는바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을 요약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네로<Lucius Domitius Ahenobar-37-68.>의 박해.

 

기독교에 대한 로마의 박해 서곡은 네로황제<54-68재위>에 의하여 울려 퍼졌다.

 

네로의 본명은 루키우스도미티우스아헤노바르부스<Lucius Domitius Ahenobar-37-68>로서 클라우디우스황제의 양자였다. 클라우디우스황제는 가이우스도미티우스아헤노바루스의 부인이었던 아그리피나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아 들였는데 네로는 가이우스도미티우스아헤노바루스와 아그리피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었다.

 

 네로의 어머니인 그리피나는 황제의 근위병들을 매수하여 남편인 클라우디우스황제를 독살하고 17세의 네로를 황제로 추대했다. 네로는 즉위 후 초기5년 동안은 근위대 장관이었던 브루루스와 철학자이며 스승이었던 세네카의 후원을 받아 훌륭하게 황제의 직무를 행사했다. 그는 해방된 노예들을 정부 기관에 등용했고 세금을 감면했으며 매관매직을 근절시키고 원로원의 의견을 존중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네로는 여자를 좋아하고 술과 가무를 즐겨하게 되면서 타락하기 시작했다. 네로는 점점 잔인하고 폭력적인 사람이 되어가면서 재위 5년째인 58년부터는 국정을 돌보지 않고 문란한 생활에 빠져들었다. 네로는 포페아사바나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하여 의붓 동생인 브리타니쿠스와 황후인 옥타비아와 어머니까지 살해했고 나중에는 포페아사바나마져 살해했다. 네로는 특히 근위대장관인 브루루스가 병사<病死>하고 세네카마저 은퇴하자 거의 반미치광이가 되어갔다. 네로는 헬라문화에 크게 심취하여 헬라의 체육, 예술을 로마에 도입했고 스스로 예술가를 자처하여 직접 무대에 섰다.

 

그는 그리스를 여행하면서 4대제전<四大祭典>을 개최하고 직접 경기에 출전했다. 네로는 당시의 로마시를 없애고 헬라니즘적인 예술적 로마시를 건축하겠다는 야심에 불타 64년에 로마시 전체에 불을 질렀다. 이때에 네로는 로마로부터 수마일 떨어진 안티움궁전의 옥상에서 시인의 복장을 하고 칠현금을 뜯으며<트로이의 파괴>를 노래했다. 로마의 화재는 무려7일간이나 계속되었고 불길이 잡힌 뒤에도 3일간이나 계속되었다. 이때에 로마시의 14구역 중 10구역이 화재로인 하여 소실되었다.

 

 로마의 화재가 진압되는 과정에서 네로가 헬라니즘적인 새로운 로마시를 건설하기 위하여 계획적으로 방화했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그가 시적 감흥을 얻기 위하여 방화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로마 시민들은 분노하였고 네로의 궁전으로 달려갔다. 범시민적 폭동이 일어나게 되자 네로는 당황하여 그것을 부인했으나 시민들은 납득하지 않았다. 이때에 네로의 측근들 중에 기독교인들을 증오하는 자들이 계책을 내 놓았다. 그것은 방화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씌우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네로는 로마의 화재가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각종 우상숭배를 증오하여 방화한 것이라고 선포하고 기독교인들에 대한 체포명령을 내렸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체포되었고 그들은 네로의 잔학한 방법들에 의하여 죽어갔다.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때로는 짐승들에게 찢기워 죽게 했고 때로는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거나 또는 화형에 처했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정원에 나무를 세워 그들을 묶어놓은 후 기름을 발라 화형에 처함으로서 그들이 인간봉화가 되게 하였다.

 

당시에 로마화재의 현장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역사가 타키투스는 당시의 상황들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황제의 거듭된 부인과 신들에게 바쳐진 희생제사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화재를 명령했다는 의심은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네로는 이 소문을 없애기 위하여 이미 배덕적 행위로 인하여 시민들의 증오를 받고 있던 기독교 신자들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이들을 잔혹하게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네로가 희생양으로 삼고자한 그리스도인들은 티베리우스<디베료>재위 기간 중에 폰티우스필라티우스<본디오빌라도>에 의해 처형된 인물을 추종하는 자들이다. 이 악한 미신은 한동안 주춤했으나 곧 유대뿐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사교들이 모여들었던 로마에 다시 출현하였다. 그리하여 우선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했던 자들이 체포되었고 이들의 증언에 의하여 더 많은 숫자가 정죄 받게 되었다. 그 이유는 화재 자체라기보다는 이들이 인류를 증오했기 때문이었다.>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죽이기 전에 시민들을 위한 오락에 이용했다. 신자들 중 일부는 털옷을 덮어씌워 개들이 찢어 죽이게 하였고 또 다른 자들은 십자가에 처형하였다. 또 다른 이들은 몸에 불을 질러서 밤에 등불처럼 밝히게 하였다. 네로는 자기의 정원을 열어 이러한 쇼를 연출하였고 그는 마치 전차경주자처럼 옷을 입고 전차를 타고 돌아다님으로서 원형경기장에서 비참한 광경을 연출하였다. 이 때문에 시민들은 벌을 받아 마땅한 이 사람들에게 자비심을 느끼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일반인들의 분노를 가라 않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인간의 잔인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죽어갔기 때문이다.>

 

타키투스는 친 로마적인 역사가였으나 대체적으로 공평한 역사가로 정평이 나 있다. 그는 비록 기독교인들에게 우호적인 입장은 아니었으나 네로에 의한 기독교의 박해가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만행이었음을 증언했다. 그러나 네로에 의한 기독교 박해는 로마시로 한정되었다. 로마시 외의 기독교인들은 네로의 박해로부터 면제되었다. 그러나 로마시 외의 기독교인들이 네로의 박해에서 면제되었던 것은 네로의 칙령이 로마시내로 한정되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네로의 칙령은 당연히 전 로마적인 칙령이었다.

 

그러나 화재가 로마 전역의 화재가 아니라 로마시 만의 화재였기 때문에 로마시 외의 기독교인들이 로마시의 화재에 대한 책임을 질 이유도 없었지만 네로의 통치권은 이미 로마시내를 벋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로마의 원로원을 비롯한 지식인들은 드디어 네로를 불신하였고 따라서 네로를 더 이상의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와중에서 68년에 갈리아에서 네로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고 그 반란 이전 로마지역으로 확산되어 갈 때에 히스파니아<스페인>총독이었던 갈바가 로마로 진격했다. 이때에 원로원을 비롯한 각계각층이 갈바를 지원했고 심지어는 황제의 근위병들까지도 이에 합세했다. 네로는 측근 몇 명의 도움을 받아 시골로 달아나 어느 지하실에 숨어 있다가 군대가 몰려오자<세상이 나 같은 예술가를 잃는 구나>하고 비통해 하면서 부하의 칼에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2)도미티아누스<Domitianus, 81-96 재위>의 박해.

 

  네로가 퇴위된 후 정치적인 불안이 계속되는 가운데 69년 한 해에 네 명의 황제가 교체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불안정은 베스파시안<Vespasian>황제에 의하여 종식되었고 로마는 안정을 되찾았다. 네로의 기독교탄압에 대한 칙령이 철회된 것은 아니었으나 베스파시안황제는 더 이상 기독교를 탄압하지 않았다.

 

기독교는 베스파시안황제 치하에서 평안을 누렸으며 이 평안은 그의 아들 티투스<Titus>의 치하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티투스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가 황제에 등극하였을 때 상황이 달라졌다. 도미티아누스는 처음에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무관심했다. 그러나 그가 로마의 종교적 전통을 고집하면서 자신을 신격화 했을 때부터 문제가 시작되었다.

도미티아누스는 로마의 전통적인 종교를 자신의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했다. 그리하여 로마 시민들에게 로마의 전통적 신들을 특별히 섬기게 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신으로 선포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다. 그는 우선적으로 로마의 시민들이 로마의 전통적 신들을 특별히 섬기게 한 후 황제가 신들의 신이라고 선포하여 황제숭배를 강요했다. 로마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각종 서약서들에는<황제의 천재성에 걸고>라는 문구가 관습적으로 사용되었는데 도미티아누스는 그 문구를 황제의 공문서에 의무적으로 적용했다. 역사가들 중에는 도미티아누스의<황제-신>발상이 유대교인들이 예루살렘에 보내던 헌금을 황제에게 드리게 하려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역사학자들은 고대 애굽왕 바로의 신격화를 모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유지를 위하여 매년 또는 수시로 예루살렘에 헌금을 보냈는데 기원70년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자 도미티아누스는 유대인들에게 그 헌금을 황제에게 바치라고 명령했다. 황제의 강압에 의하여 일부 유대인들이 황제에게 헌금했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것을 거절했다. 황제는 유대인들을 제압하기 위하여 자신을 신으로 선포하고 황제 즉 신에게 헌금을 바치지 않는 자들을 가차 없이 처형하겠다고 선포했다. 황제는 자신의 명령의 지엄함을 증명하기 위하여 자신의 인척 중에 기독교인이었던 플라비우스 클레멘스<Flavius Clemens>와 그의 아내 플라비아도미틸라<Flavis Domitilla>를 처형했다. 이때에 로마에 다시금 기독교 박해의 열풍이 불어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했는데 유대교도 황제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에 함께 탄압받았다. 기독교인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로마를 떠나거나 또는 지하로 은둔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도미티아누스의 박해를 통하여 또 하나의 특별한 역사를 이루시었다. 그것은 황제의 박해에 의하여 밧모섬에 유배된 요한을 통하여<요한계시록>을 집필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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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박해의 역사 6

2.박해의 역사.<10대 박해>

3)트라야누스<Trajanus-97-117.재위>의 박해.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트라야누스황제 때에 이르러 더욱 극심했다. 이때에 새로운 법령이 발표되었는데 기독교인만 아니면 아무리 극악무도한 흉악범이나 살인범이라 할지라도 극형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순교자 저스틴<Justin>은 자신의 저서인 변명론<apologia>에서<기독교인이라는 단어는 곧 죽음이라는 단어의 대명사가 되었다.>라고 증언했다.

 

기독교인들에게 가해진 박해는 점점 극심해져서 심지어는 그들을 산채로 소금에 절인 때도 있었고 길가의 높은 나무에 매달아 밤새도록 불로 태워 죽인 일도 있었다. 그러나 트라야누스황제의 기독교박해는 비시니아지방 총독의 기독교박해에 대한 사건으로 인하여 크게 완화되었다. 기원112년 소아시아의 비시니아<Bithynia-비두니아-현재의 터키북부지방의 해안도시>지방 총독이던 소<小>플리니<Pliny the Younger>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처벌을 시행하는 와중에서 로마의 법치주의와 종교적 현실이 대립하게 됨에 따라 갈등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트라야누스황제에게 기독인들에 대한 처벌문제를 문의하는 공문을 보냈다.

 

전승에 의하면 플리니는 전형적인 로마인으로서 로마의 법과 전통을 존중하였던 공의로운 귀족이었다. 그가 비시니아지방 총독으로 부임했을 때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비시니아 지역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었고 기독교 이외의 이교도들은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이교도들의 신전이 남아 있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가 부임했을 때 기독교를 증오하는 어떤 자가 새로운 총독에게 환심을 사기 위하여 기독교인들의 명단을 고발했다. 총독은 기독교가 불법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사에 들어갔다.

 

이때에 소환된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주장한 자들은 총독이 하라는 대로 한 후에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인임을 자처하는 자들은 목숨을 버릴지언정 배교행위를 하지 않았다. 총독은 그들에게 세 번의 구명 기회를 주었으나 그들은 끝까지 배교를 하지 않고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다. 총독은 그러한 자들을 처형했고 그 중에 로마시민권을 가진 자들은 로마법에 따라 처결하기 위하여 로마법정으로 이송했다. 당시에 로마시민은 오직 로마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되어있었다.

이때에 총독은 두 가지의 의문을 갖게 되었다. 하나는 과연 기독교인들의 범죄 한 내용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과 다른 또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자신들의 신앙을 고수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총독은 기독교인들의 신조와 신앙생활을 자세하게 추적했다. 그러나 총독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은 범죄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모범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들은 소문대로 인육을 먹거나 영아를 살해하여 제물로 바치거나 하지 않았으며 근친상간을 비롯한 부도덕한 성행위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동이트기 전에 함께 모여서 그리스도라는 사람을 찬양하고 그에게 기도하며 절도와 간음과 폭력 등등의 부도덕한 범죄들을 저지르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며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 것을 피차에 맹세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또한 과거에는 공동식사를 하기 위하여 함께 모였었으나 로마당국이 비밀집회를 금지한 후로는 그 모임도 중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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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은 조사결과에 만족할 수 없었다. 소문과 조사결과가 너무 대조적이었기 때문이다. 총독은 진실을 알아내기 위하여 두 명의 여신도들을 심하게 고문해 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총독은 매우 당황했다.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고 오히려 사회에 유익한 모범적 삶을 사는 자들을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처벌한다는 것은 로마의 법 정신에 위배되는 일이 거니와 로마의 정의로움에 크게 위배된다는 것이 그의 개념이었다. 총독은 기독인들에 대한 처벌문제를 일단 중지시킨 후 황제의 의견을 알아보기 위해 트라야누스황제에게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린 소년소녀들도 어른들처럼 가혹하게 처벌해야 합니까? 누구든지 기독교도가 되면 꼭 그렇게 처형되어야만 합니까? 그들은 실제로 무슨 나쁜 일을 한 것이 틀림없는 사실입니까? 만일 피고 스스로 기독교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를 놓아 주어도 되겠습니까?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시인하는 자들에 대해 저는 그들이 로마시민일 때에는 로마로 보내도록 하고 로마시민이 아닐 경우에는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허나 저는 그들은 고집이 너무 세기 때문에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바 입니다. 저는 그들이 폐하의 제단에 분향하고 그리스도를 욕하면 살려주려고 세 번이나 기회를 주었습니다.

 

저는 진짜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들어 왔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어떤 특정한날 동이트기 전에 서로 만나서 그리스도에게 찬송을 드리는 것 외에는 결코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남의 것을 훔치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제가 비밀집회를 금지한 후 그들이 그것을 포기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공동식사를 하기 위하여 계속 모입니다. 제게는 집사라고 불리 우는 여자 노예들이 몇 명 있는데 저는 그들을 고문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서 몇 가지 미친 생각들 이외에는 나쁜 것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어리석은 것에 감염되어 우리의 신전은 거의 텅 비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비시니아총독의 질의 공문에 대하여 트라야누스황제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황제의 답변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로마통치 영역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들은 로마의 법령에 따라야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처벌에 관해서는 별도로 규정한 법이 아직은 없다. 따라서 그들이 특별한 죄를 범하지 않는 한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색출해 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시간과 국력을 낭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고발된 자들은 로마법대로 처벌하라. 황제 신상에 분향하고 예를 올리는 자는 방면하되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은 처벌하라. 그러나 익명으로 고발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말라. 그것은 로마의 법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트라야누스황제의 칙령은 고도의 정치적인 방책이었다. 황제는 정치적 차원에서 로마의 법을 세워 로마제국과 황제의 위신과 자존심을 세우는 한편 불필요한 학정을 시행한다는 논란의 여지를 제거하였고 동시에 계속되는 기독교인들과의 마찰을 피했다. 황제신상에 예를 갖추지 않는 자들을 처벌해야 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절대 필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비록 그것이 황제들의 욕심에 의해서 세워진 비진리적인 법령이라 할지라도 일단 세워진 이상에는 지켜져야 로마제국의 권위가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황제는 로마제국과 황제의 권위를 위하여 그것을 여전히 고수하게 하는 반면에 특별한 죄를 범하지 않는 한 기독교인들을 고의적으로 색출하여 탄압하지 않게 함으로서 정치적인 안정을 도모하였다. 트라야누스황제의 칙령은 비시니아총독에게만 전달되었을 뿐이었고 다른 지역에는 전달되지 않았으나 그것은 비시니아에만 적용되지 않고 다른 지역으로도 확산 적용되었다.

 

이로서 로마사회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의 신앙이나 그들의 신앙적 삶이 국가나 사회에 어떤 위험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때문에 기독교를 적대시하던 자들이 오히려 기독교에 입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아울러 기독교에 대한 박해도 당분간은 주춤했다.

기독교 박해의 역사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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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하드리아누스<Hadrianus-117-138.재위>의 박해.

기독교에 대한 트라야누스의 칙령은 트라야누스의 양자인 하드리아누스가 황제에 등극했을 때에도 여전히 유효했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는 로마의 전통적인 다신론주의 자였고 특히 황제신격화에 주력했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고집하면서 하나님 이외의 어떤 신을 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는 기독교를 심히 증오했다. 그는 소아시아의 총독 미누키우스폰다누스<Minucius Fundanus>에게 칙령을 내려 기독교인으로 고발되는 자들을 반드시 처형하라고 할 정도로 기독교를 박해했다.

 

그는 로마통치 하의 전역에 황제 신상을 비롯한 신상들을 세우고 그것들에게 경배하라고 명령했으며 그것을 거절하는 자들을 가차 없이 처형했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의 기독교 박해는 황제가 직접적으로 주도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지방 총독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것은 비시니아총독의 질의를 받은 트라야누스황제 때부터 이미 시작된 현상이었는데 이때에 황제들은 명분 없이 무고하고 모범적인 기독교인들을 탄압하는 것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어렵게 한다는 판단 하에 기독교에 대한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지방의 총독들에게 일임했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지방총독들의 통치 개념과 방법에 따라 기독교탄압의 양상이 달랐다. 어떤 지방의 총독은 무조건 기독교를 증오하고 탄압하는가 하면 또 어떤 지방의 총독은 기독교도들에게 뇌물을 받으면서 적당히 그 문제를 조율하였고 어떤 지방의 총독들은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여 기독교도들을 자유롭게 해주었다. 이때에 심지어는 남몰래 기독교를 받아들인 총독도 있었으나 정치적인 이유에서 그것을 철저하게 은폐했다.

 

5)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161-180.재위>의박해

 

하드리아누스의 통치가 끝나고 안토니우스피우스<Antonius Pius-138-161.재위>통치시대에 이르러 기독교는 일시적이나마 자유를 누렸다. 안토니우스황제는 기독교에 대하여 관대한 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의 치세 하에서 기독교박해가 재현되었다.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는 오랜 전쟁을 종식시킨 후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하여 로마의 전통적인 종교적 관습을 회복했다. 이러한 그의 정책에 가장 걸림돌이 된 것은 역시 기독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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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황제에 의한 군주정치를 종식시키고 원로원에 의한 민주적, 공화적 정치체제를 구축했다. 그의 기독교 박해는 기독교인들이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로마의 전통적 종교관습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의 기독교박해는 처참할 정도로 잔인하고 공격적이었다. 그는 론<Rhone>계곡의 리용<Lyons>과 비엔나<Vienna>에 거주하던 기독교인들을 모두 고문하고 죽이라고 명령했으며 로마시민권을 가진 기독교인들은 목을 베어 죽였고 로마시민이 아닌 기독교도들은 짐승들의 밥이 되게 했다. 심지어는 감옥에서 죽은 기독교인들의 시체를 굶주린 개들에게 던져주어서 장례조차 지내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마르쿠스아울렐리우스 치세 때에는 역병이 극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흉년과 가뭄으로 인하여 기근이 극심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기독교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가중시켰다.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유일신 신앙인들로 보지 않고 신들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들로 보았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신들을 무시하고 섬기지 않음으로 신들이 진노하여 역병과 흉년 가믐 등등의 재난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기독교박해에는 유대교인들도 한 몫 거들었다. 유대교인들은 기독교와는 달리 로마당국과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기독교탄압에 일조했다. 유대교인들이 기독교탄압에 동조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기독교가 유대교의 모든 전통들과 특히 율법을 무시하고 모독하여 훼파했기 때문이었고, 다른 또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을 메시야 처형의 주범들로 몰아세우면서 유대인들의 국가적, 민족적, 종교적, 멸망과 붕괴의 비극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메시야를 처형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조치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6)셉티미우스세베루스<Septimius Serverus.191-211.재위>의 박해.

 

로마제국은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황제가 사망한 뒤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나약하고 변변치 못한 반면에 허황되고 욕심 많은 황제들이 연이어 등극하여 정치체계 질서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황제들이 무능하여 정치체계가 혼란하고 무질서하자 각 지역 원주민들의 반란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로마제국은 그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전쟁을 계속했으나 황제들은 환락과 사치에 빠져 쾌락추구에 여념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기독교에 대한 관심은 격감되었고 기독교인들은 한동안 자유와 평안을 누렸다. 이 무렵에 기독교는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고 확장되어 로마 전역이 기독교의 물결로 출렁대었다. 그러나 셉티미우스세베루스가 황제에 올랐을 때 기독교박해가 다시 시작되었다. 셉티미우스황제는 아프리카의 군인 출신으로서 종교에 대하여 무관심하였으므로 기독교에 대해서도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셉티미우스황제가 기독교를 탄압하게 된 동기는 당시의 로마제국 정세와 그의 왕비 돔나<Domna>때문이다. 셉티미우스황제는 황제에 등극한 후 그동안의 군인적 경륜을 살려 지역들의 반란들을 제압했다.

그러나 황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역적 반란들이 완전히 평정되지 않았다. 특히 라인강과 다뉴브강 건너에 살고 있던 민족들이 계속하여 로마제국에 저항했다. 반란세력은 제국의 내부에도 존재했다. 특히 기존의 군부세력은 아프리카출신의 황제를 불신했다. 언제 군부가 반란을 일으켜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고 자신을 축출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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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때에 왕후가 황제에게 방법을 제시했다. 왕후 돔나는 에메사<Emesa>출신으로서 태양신을 섬기는 엘가발<El Gabal>사원의 대제사장 딸이었다. 그녀는 황제에게 로마의 전통적 종교들을 부활시켜 로마의 정치체제를 종교적, 정치적 통일체제로 만들어 반란세력을 와해시키라고 했다. 황제는 왕후의 조언을 받아들여 우선적으로 로마의 전통 종교들을 부활시켰다.

 

 그는 로마 전지역에<솔인빅투스-Sol inbictus-정복되지 않은 태양>을 예배하도록 명령했다. 황제는 태양신을 지존의 신으로 세운 후에 다른 모든 신들을 그 아래 두어 섬기게 함으로서 종교적 통일을 이루었다. 그것은 친정에서부터 태양신을 섬겨온 왕후의 계략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명령은 기존의 종교인들로부터 불신을 받았고 특히 유대교와 기독교로부터 거부되었다.

 

황제는 종교인들을 힘으로 제압했고 그 중에 가장 강력한 반대 세력인 유대교와 기독교를 혹독하게 탄압했다. 황제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말살시키기 위하여 두 종교들이 더 이상의 신자를 받아들일 수 없는 법령을 공포했다. 누구든지 유대교와 기독교에 가입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공포한 것이다. 이 법령은 트라야누스황제의 칙령과 병행하여 적용되었기 때문에 유대교와 기독교는 다함께 무차별적 탄압을 감수해야 했다. 이때에 로마통치 하의 전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기독교 탄압이 시작되었는데 특히 애굽과 북아프리카에서 극심한 탄압이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위대한 신학자였던 오리겐의 부친 레오니다스가 참수되었으며, 카르타고에서는 귀부인이었던 퍼폐튜아가 충직한 몸종 펠리시타스를 비롯한 5명의 시종들과 함께 짐승에게 던져져 순교했다.

기독교 박해의 역사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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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박해의 역사.<10대 박해>

  

 

7)막시미누스<Maximinus.235-238.재위>의 박해.

  셉티미우스세베루스의 치세 말년에 이르러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중단되었다. 이때에 왜 박해가 중단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기록이 없다. 그러나 전설에 의하면 황제가 기독교를 박해한 것을 몹시 후회했다는 이야기와 왕후인 돔나에게 어떤 불행한 일이 발생하여 그것이 기독교박해 때문인 것으로 여겨져서 박해를 중단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로마에서의 박해는 중단되었으나 유럽일대에서는 산발적인 박해가 계속되었다. 셉티미우스세베루스가 사망한 후 카라칼라<Caracalla-211-218.재위>가 황제로 등극했다.

 이때에도 박해는 중단되었으나 북아프리카지역에서는 산발적인 박해가 계속되었다. 그 뒤에 엘라가바루스<Elagabalus.218-222.재위>황제와 알렉산더세베루스<Alexander Severus.222-235.재위>황제는 셉티미우스세베루스황제의 정책을 답습하여 종교 혼합정책을 추구했으나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았음으로 기독교박해는 거의 중단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알렉산더 세베루스황제는 자신의 개인적인 신전에 수많은 신들과 함께 그리스도와 아브라함의 신상들을 만들어 세웠다고 한다. 실제로 황제의 모친인 줄리아맘메아<Julia Mammea>는 오리겐의 강의를 듣기 위하여 알렉산드리아까지 갔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후 막시미누스<Maximinus>황제 치하에서 다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있었다. 당시에 로마교회는 두 사람의 감독들-폰티아누스<Pontianus>와 히폴리투스<Hippolytus>에 의하여 분열되어 있었는데 황제는 그들을 모두 사르디니아<Sardinia>의 금광광산으로 유배시켰다. 그러나 막시미누스황제 치하의 박해는 간헐적이었으며 기독교인들을 처형하지 않고 유배형에 처했기 때문에 순교역사는 거의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기독교에 대한 오해들이 거의 풀렸고 기독교가 참 진리의 종교라는 인식이 퍼져 나가면서 오히려 많은 귀족들이 기독교에 입문했다.

  

8)디키우스<Dicius.249-251.재위>의 박해.

   

막시미누스황제 치하에서 안정을 누렸던 기독교에 다시 무서운 폭풍이 불어 닥쳤다. 기원 249년에 데시우스가 황제에 올랐을 때에 로마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은 매우 심각했다. 국경 넘어 사는 민족들은 호심탐탐 제국을 넘보고 있었고 수시로 국경을 침범하여 제국을 위협했다. 로마 식민통치 하의 각 지방에서도 독립을 원하는 반란과 폭동들이 수시로 일어났고 이러한 혼란 속에서 경제도 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황제는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하여 고심했다. 황제는 로마가 영광을 상실하게 된 동기를 종교적 차원에서 찾았다. 그는 로마가 전통적인 신들을 배신했기 때문에 신들 또한 로마를 버렸다고 생각했다. 국민들이 신들을 극진하게 섬길 때에는 신들이 로마를 절대적으로 보호하고 도와주었기 때문에 로마가 번영과 영광을 누렸던 반면에 국민들이 신들을 배반하고 섬기지 않게 되자 신들이 진노하여 로마를 돌보지 않음으로 로마에 위기가 닥쳐왔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따라서 황제는 로마가 전통적인 신들을 다시 극진하게 섬기면 신들이 마음을 돌려 로마를 보호하고 지켜줌으로서 로마의 영광이 재현될 것으로 믿었다. 그리하여 신들의 형상들을 다시 정비하여 세우고 황제의 신상도 재정비하여 세웠다. 데키우스황제의 의지는 매우 단호하고 결연했다. 신들 앞에 제물을 드리지 않거나 황제의 신상 앞에 분향하지 않는 자들은 체포되었다. 황제는 신들 앞에 제물을 바치고 황제의 신상에게 분향하는 자들에게는 증명서를 발급했다. 증명서가 없는 자들은 황제의 칙령을 거부한 죄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황제는 죄인들을 처형하지 않고 그들을 회유하는데 주력했다.

황제는 불순종하는 자들을 체포한 후 무서운 고문과 회유정책을 통하여 그들을 개종시켰다. 당시에 많은 자들이 체포되었으나 황제의 회유정책에 의하여 마음을 바꾸어 풀려나는 자들이 속출했다. 이때의 양상은 다양했다. 어떤 자들은 아예 일찌감치 마음을 바꾸어 황제의 명령에 따르는가 하면 어떤 자들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어 보다가 체포되면 할 수 없이 명령에 순종했고 또 어떤 자들은 관리들을 매수하여 돈을 주고 증명서를 구입하여 순종을 위장했다. 때문에 순교자들은 별로 많지 않았으나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킨 자들도 많았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두 가지의 신조어가 생겼다. 하나는 끝까지 신앙을 지킨 자들로서<고백자>라는 칭호를 얻었고 황제의 명령에 복종하여 신앙을 버린 자들은<배교자-Apostat>라고 호칭되었다.

  

9)발레리아누스<Varerianus.257-259.재위>의 박해.

  

디키우스의 뒤를 이어 갈루스<Gallus.251-257.재위>가 황제가 되었을 때 그는 기독교박해를 중지 시켰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발레리아누스황제에 의해서 다시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의 박해는 불과 3년 정도 밖에 안 되었지만 기독교에 많은 어려움을 주었다. 당시에 질병과 흉년이 발생하자 황제는 그 책임을 기독교에 돌렸다. 기독교가 로마의 전통적인 신들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에 신들이 노여워서 그러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황제는 기독교인들의 집회를 금지했고 그들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했으며 감독, 목사, 장로, 집사 등등의 지도자들을 처형하거나 유배시켰다.

 

기독교 박해의 역사 9

2.박해의 역사.<10대 박해>

 

10)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ctianus.284-305.재위>의 박해.

 

발레리아누스황제의 박해는 그가 페르시아인 들에게 포로 되었음으로 종료되었고 향후 40여년간 더 이상의 박해는 없었다. 그러나 4세기 초 마지막이 가장 조직적이고 가혹적인 박해가 발생했다. 기원284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에 등극하였는데 그는 로마제국을 재정비했다. 그는 로마제국에 새로운 황제제도를 수립했다. 그는 황제를 두 가지로 구분했다. 하나는 아우구스투스<Augutustus>황제이고 다른 또 하나는 시저<Caesar>황제이다. 아우구스투스황제는 로마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통치하는 최고의 황제이며 시저황제는 아우구스투스황제들의 휘하에서 그들의 명령을 받는 휘하 황제 이다.이때에 로마 전체에 대한 최고의 통치권은 동로마를 통치하는 황제에게 있었다. 아우구스투스황제는 오직 시저황제들이 계승하게 되며 시저황제들이 아우구스투스황제를 계승하여 황제 자리가 결원되면 새로운 시저황제를 선출하여 보강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가 이러한 정책을 시행한 것은 거대한 제국이 분열되지 않고 질서 있게 통치되게 하기 위함 이었다. 로마제국은 황제계승 문제로 인한 암투 때문에 끊임없는 내란과 부란을 겪어왔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는 이러한 황제 계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2중적인 황제제도를 세워 황제 계승을 법통대로 이어가는 동시에 황제계승을 둘러싼 암투와 내란을 종식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정책은 처음에는 잘 지켜졌으나 나중에는 권력 쟁취를 위한 황제들 간의 암투로 인하여 더욱 혼란이 가중되는 결과를 이루었다.

 

 이때에 아우구스투스<Augutustus>황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ctianus>와 막시미아누스<Maximianus>로 서디오클레티아누스는제국의 동방을 맡았고 막시미아누스는 제국의 서방을 맡았다. 시저황제<Caesar>는 갈레리우스<Galerius>와 콘스탄티우스클로우스<Constantius Chlorus>로 서갈레리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휘하의 황제였고 콘스탄티우스클로우스는 막시미아누스 휘하의 황제였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최고황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였고 나머지 세 명의 황제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 휘하의 황제들이었다. 세 명의 휘하 황제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의 탁월한 권위적 지도 하에 맡은 지역을 질서 있게 다스렸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가 건재 하는 동안에 로마제국은 권력문제로 인한 암투가 없었고 제국은 비교적 평안했다. 다만 갈레리우스가 다뉴브강 유역의 내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출정했고 페르시아 원정을 위해 또 한번 출정한 것 외에는 별다른 사건도 없었다. 4명의 황제 치하 초기에 기독교는 평안함을 누렸다.

 

황제들은 기독교에 대하여 별로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아내인 프리스카<Prisca>와 그의 딸인 발레리아<Valeria>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는 기독교에 대하여 매우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한 엄청난 박해가 군대 문제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에 기독교 성도들 중에는 자원하여 군대에 입대하는 자들이 많았는데 대부분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성도들의 군 입대를 반대했다. 때문에 군 입대한 성도들 중에 군에서 이탈하려는 움직임들이 있었다. A.D.296년경, 군대에서 병영을 이탈한 기독교 신자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처형당했다.

 

갈레리우스황제는 기독교인들의 병영 이탈 문제를 좌시하지 않았다. 그는 결정적인 시기에 기독교 신자들이 병영을 이탈하여 군대의 사기가 와해될 것을 크게 염려했다. 때문에 그는 군대에서 모든 기독교 신자들을 축출할 것을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건의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는 그 건의를 받아들여 모든 기독교 신자들을 군부로부터 축출하는 칙령을 내렸다. 이때에 다뉴브강 주둔군의 현지 지휘관들 중에서 황제의 칙령대로 행하지 않고 기독교 신자들에게 신앙을 거부하도록 강요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로인하여 기독교 신자들이 반발하자 다뉴브강 주둔군 사령관이 기독교신자들을 명령 불복종 죄로 처형하였다.

 

이 사건 이후로 갈레리우스는 기독교인들을 더욱 불신했다. 그는 303년에 이르러 로마제국내의 모든 관직에서 기독교인들을 축출하게 해달라는 건의서를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에게 올렸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는 그 건의를 받아 들였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자들을 모든 관직에서 파면할 것과 기독교 건물들을 모두 파괴하고 기독교에 관한 문서들도 모두 파괴하라는 칙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처음에는 황제의 칙령이 단호하게 시행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우호적이었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로마제국의 관직에 있었으며 그 중에는 고위관직에 있는 자들도 상당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이 성스러운 경전 문서들이 파기되는 것을 결사반대하여 정부의 탄압에 맞서자 상황이 악화되어 도처에서 고문과 처형이 자행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황궁에 두 차례에 걸친 화재가 발생했는데 갈레리우스는 그것이 기독교 신자들이 박해에 대하여 복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갈레리우스가 기독교를 탄압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화재를 일으켰다고 증언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는 크게 진노하여 황실에 근무하는 모든 기독교 신자들로 하여금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를 올리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때에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아내인 프리스카와 그의 딸인 발레리아는 황제의 명령에 순종하였으나 당시의 로마 수상이었던 도로테우스<Dorotheus>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순교의 길을 택했다. 로마제국 전체에 걸쳐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진행되었다. 수많은 교회들과 기독교 문서들이 파괴되고 불탔으며 기독교를 증오하던 관리들은 이때다 싶어 기독교인들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이러한 박해의 와중에서 제국 내에 내란이 일어나자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황제는 그것이 기독교 신자들에 의한 반란이라고 의심하여 더욱 혹독하게 기독교를 탄압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체포되어 고문 당하거나 처형되었다. 신앙을 거부하고 황제를 숭배하는 자는 방면하기로 되어 있었고 그것을 거부하는 자는 로마의 시민권과 모든 법적인 권리를 박탈하는 차원에서 방면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러한 법령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기독교를 증오하는 관리자들은 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기독교인들을 무조건 고문하고 처형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과 목숨을 지키기 위하여 다시 지하로 숨었고 일부는 국경을 넘어 페르시아로 탈출했다. 이에 황제는 더욱 분노했고 탄압은 더욱 극심하게 자행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갈레리우스의 권위는 최고에 올라 로마제국 전체를 장악하게 되었다. 304년에 이르러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중병에 걸려 허약해지자 그의 황제로서의 권위도 따라서 약화되었다. 갈레리우스는 기원305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를 협박과 회유로 설득하여 황제의 자리에서 퇴진시켰다. 이때에 아우구스투스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퇴위하고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클로우스가 아우구스투스황제자리에 올랐다. 갈레리우스가 동로마를 다스리는 황제로서 로마의 최고황제가 된 것은 당연하다. 시저황제의 자리에는 세베루스<Severus>와 막시미누스다이어<Maximinus Daia>가 등극했는데 그들은 실권이 전혀 없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갈레리우스의 계략적인 황제 등극에 대하여 군부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때에 로마군부의 차기 실세 자는 콘스탄티우스클로우스의 아들인 콘스탄틴<Constantine>과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인 막센티우스<Maxentius>였다. 그들 중에 특히 콘스탄틴을 지지하는 세력이 막강하였다. 이때에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틴을 황궁에 머물게 했다. 갈레리우스가 콘스탄틴을 황궁에 머물게 한 외적 명분은 황제의 정치적, 군사적 보좌였지만 내용은 콘스탄틴의 아버지인 콘스탄티우스클로우스와 콘스탄틴을 지지하는 군부세력의 반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콘스탄틴은 사실상 볼모로 연금된 것이다. 그러나 콘스탄틴은 지지 세력의 도움을 받아 황궁을 탈출하여 부친과 합류했다. 콘스탄틴을 지지하는 군부세력은 기원306년에 콘스탄티우스클로우스가 사망하자 갈레리우스를 거부하고 콘스탄틴을 아우구스투스황제로 추대했다.

 

한편 막센티우스는 자신의 지지 세력을 규합하여 로마로 진격해 세베루스황제를 폐위시켰다. 세베루스는 자살하였고 갈레리우스는 막센티우스를 제거하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휘하 장군들이 오히려 막센티우스편에 합류하므로 실패했다. 궁지에 몰린 갈레리우스는 이미 은퇴한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로마제국은 매우 혼란스러운 정치적 공백을 맞이했다. 로마 속령의 지방에서는 야심찬 군부세력들이 힘을 비축하며 틈을 노리고 있었고 서방지역에서는 콘스탄틴과 막센티우스 두 황제가 각각 황제를 자처하면서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도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계속 되었다. 갈레리우스와 막시미누스다이어는 계속하여 기독교 신자들을 박해했다.

 

특히 막시미누스다이어는 기독교 신자들의 신체를 절단하고 그들을 채석장에 보내어 강제노역을 시키는 악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이에 맞서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채석장의 강제노역 현장에 교회를 세우고 신앙적 삶을 고수했다. 진노한 막시미아누스는 그들을 가차 없이 처형했으나 기독교 신앙의 불길은 그럴수록 더욱 거세게 타 올랐다. 어쩌면 로마의 기독교가 완전히 종료될지도 모른다는 절망적인 우려 속에서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갈레리우스가 갑자기 급환으로 쓰러진 것이다.

 

황제는 외음부에서 화농증이 발발하여 점점 발진하면서 창자의 내부로 퍼져들어 갔기 때문에 치료가 불가능했다. 상처에는 벌레가 들끓었고 냄새가 지독하여 곁에 서 있기가 역겨울 정도였다. 고통 중에 신음하는 그에게 측근이 조언했다. 그의 조언은 황제의 급병이 기독교인들을 탄압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으로 빨리 기독교인들에 대한 탄압을 멈추어야 된다는 것이었다. 황제는 자신의 악행에 대하여 크게 후회했다. 황제는 서둘러서 기독교에 대한 관용령을 발표했다. A.D.311년4월30일의 일이었다. 다음은 갈레리우스가 발표한 라틴어 칙령의 헬라어 번역문을 요약한 것이다.

  

<우리들은 이제까지 제국과 백성들의 공익을 위해 여러 가지 조처를 강구했다. 먼저 우리는 모든 일들을 로마인들의 전통과 공적인 제도에 따라 질서를 복구하고자 하였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들은 특별히 자기 선조들의 종교와 신앙을 저버린 기독교 신자들이 진리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들은 각기 자신들의 뜻과 의지에 따라 법률을 만들어 ?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다른 의견들을 가진 여러 계열의 분파들이 생기게 되었다. 때문에 우리가 황제의 칙령을 통하여 그들에게 옛 조상들이 세워놓은 관습으로 되돌아가라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생명을 구하기 위해 이에 복종하였으나 많은 사람들이 위협을 받고 여러 가지 형태의 죽음을 택했다.

 

그러나 아직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자기들의 고집을 꺾지 않으며 이들은 불멸의 신들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도 않고 기독교인들의 하나님에게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우리는 저들이 여전히 우리가 만백성에게 용서를 베풀어 온 자비함과 변함없는 관습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고 있으나 우리는 이일에 있어서도 모든 죄를 묻지 않고 용서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만인들을 향한 자비의 눈으로 볼 때에 이들을 사면하고 이들이 공공질서를 해치지 않는 한 자기들끼리 집회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 옳을듯하다.

 

그럼으로 기독교인들은 다시 자신들의 모이는 장소를 재건하며 자신들의 신앙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아도 좋다. 우리는 또 다른 칙령을 통해 공직자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취급해야 할지를 지시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처럼 양보하였음으로 이러한 은혜에 보답하여 기독교 신자들은 제국이 번영을 누리고 자기들 스스로가 평안하게 그 생명을 보존할 수 있도록 우리들과 공공복리와 자기 자신들을 위해 자기들의 신에게 기도해야만 한다. 그리고 사방에서 공공의 복지가 보존되며 그들이 각기 자기 집에서 무사하게 살게 되기를 기원해야 한다.>

 

갈레리우스황제는 칙령을 발표한 후 5일 후에 사망했는데 그는 운명하기 전에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나는 참으로 미친 짓을 했다....물론 공포에 질린 수천 명의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신앙을 저버린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반면에 또 다른 수천 명의 기독교인들은 의연한 모습으로 그들의 신앙을 피로서 입증했다.>

  

갈레리우스의 칙령으로 인하여 로마 전역에서 시행되어 졌던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공식적으로 해제되었다. 모든 지역의 감옥 문이 열리고 감금되어 있던 모든 기독교인들이 석방되었으며 몰수 되었던 교회 및 개인들의 재산이 환수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기독교 박해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다른 황제들은 박해를 종식시킨 반면에 막시미누스다이어황제는 여전히 박해를 계속했다.

기독교 박해의 역사 10

3.박해의 종료.

  

 

1)기독교박해와 콘스탄틴의 전쟁역사.

 

갈레리우스가 사망한 후 로마제국은 리키니우스, 막시미누스다이어, 콘스탄틴, 막센티우스 등등에 의하여 4개로 분할 통치되었다. 이때에 리키니우스, 막시미누스다이어, 콘스탄틴 등등은 서로를 인정하면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막센티우스를 반역자로 규정하여 적대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완전하게 종료되어지는 역사적 순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콘스탄틴에 의해서 종료되었다. 그리고 콘스탄틴에 의하여 로마 기독교가 국교로 공식화 되며 로마교회를 통하여 기독교의 세계화가 추진된다. 따라서 우리는 콘스탄틴에 대한 역사를 정리한다.

  

콘스탄틴은 기원274년에 다뉴브강 남쪽의 나이수스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디오클레시우스의 서로마 부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클로루스였고 어머니는 헬레나였다. 장남인 그는 부친이 293년에 서로마의 부황제가 되자 디오클레시우스의 황궁에서 비잔틴식 군주정치를 수업했다. 그는 부왕이 사망하자 측근들에 의해 서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투스황제 자리에 등극했다. 콘스탄틴은 로마제국의 맹주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을 확장하면서 군부를 강화시켜 나갔다. 그는 특히 고울지방과 영국 일대에 튼튼한 기반을 조성했다. 그는 당시 만족<蠻族-오랑캐>로 알려진 민족들이 출몰하던 라인강유역의 방위를 강화하고 선정을 베풀어 그 지역 주민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는 원래 이상적이고 도덕적인 인격을 소유한 군주는 아니었으나 매우 현명하고 지혜로운 정치가였다. 그는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의 주민들을 최대한으로 보살피어 그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대신 치외권에 속하는 자들에게는 혹독하고 잔인한 정복자였다. 당시에는 각종 경기장에서 격투기를 비롯한 각종 경기들이 유행하였는데 그것은 당시의 사람들이 격렬한 경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콘스탄틴은 사람들의 흥미를 만족하게 채워주기 위하여 수시로 경기를 열었는데 이때에 격투기, 검투기, 또는 짐승들과의 싸움에는 주로 전쟁포로나 노예들이 사용되었고 특히 만족출신의 전쟁포로들이 동원되었다.

 

 역사가들이 전하는바에 의하면 이때에 죽어간 만족 출신의 전쟁포로들의 숫자가 엄청났다고 하며 심지어는 짐승들마저도 사람을 죽이는 일에 싫증을 냈다고 한다. 특히 그는 노련하고 치밀한 군사 전문가로서 전쟁을 할 때에 철저한 사전 준비와 전략을 세워서 속전 속결적인 전투로 아군의 피해를 최대한으로 줄이는 대신에 최대한의 전과를 올리는 승리의 귀재였다. 콘스탄틴은 오랫동안 준비를 갖춘 후에 자신의 통치지역을 먼저 철저하게 방비하여 내란이나 반란을 사전 차단하면서 군대를 고울<갈리아>지역에 집결시켰다. 그리고 순식간에 알프스산을 넘어 막센티우스가 다스리는 로마로 진격했다.

 

이때에 투입된 군대는 전체 병력의4/1이었다. 그는 로마 전투에서 패할지라도 본국에서의 내란으로 인하여 더욱 큰 실패를 하지 않으려는 계산을 철저하게 하였다. 콘스탄틴과 막센티우스의 한판 승부는 매우 불가사의 한 의문적 전쟁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전쟁 역사가들의 연구조사에 의하면 그 싸움은 처음부터 막센티우스가 절대적으로 승리하게 되어 있었다. 로마는 자체적으로 완벽한 수비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콘스탄틴의 군대는 험준한 알프스산을 넘어 오느라 이미 지쳐 있었다. 뿐만 아니라 콘스탄틴의 군대는 후방 보급로가 알프스산을 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할 한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약점이 있었다.

 

콘스탄틴이 예상치 못한 때에 갑자기 공격한 것과 속전속결로 전쟁을 마무리하려고 하는 것에는 이와같은 약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막센티우스가 철통같은 방어만 하고 기다리는 지구전으로 나갔으면 콘스탄틴은 스스로 무너지거나 후퇴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막센티우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막센티우스는 콘스탄틴이 진격해 오자 즉시 군사회의를 소집했는데 이때에 의견이 엇갈렸다. 대부분의 장군들은 콘스탄틴이 저절로 지칠 때 까지 아우렐리안의 성벽<Aurelian`s wall>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다급해진 콘스탄틴이 무리한 공격을 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방어 후 공격을 주장했다.

 

그러나 주술가들은 반대의 의견을 내 놓았다. 그들은 콘스탄틴군이 이미 지쳐있을 때 공격하여 그들을 패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들에게 휴식의 기회를 주면 피로가 회복되고 또한 후방에서 보급물자가 도착하면 저들의 사기가 올라 무찌를 수 없게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아울러 그들은 자신들의 주술로 콘스탄틴군을 이길 수 있다고 호언장담<好言壯談>했다. 그들은 전쟁의 장소를 구체적으로 지정하여 티베르강의 밀비안<Tiber`s Milvian Bridge>다리가 승리의 격전장이 될 것이라고 까지 했다.

 

막센티우스는 당연히 군사 전문가들인 장군들의 의견을 따랐어야 하는데도 비 군사 전문가들인 주술사들의 의견을 따랐다. 한편 콘스탄틴은 결전이 있기 전 날에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았다. 콘스탄틴이 하나님께 받은 계시는 여러 가지로 전승되어지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정확한지 알 수 없다. 소아시아의 니코메디아<Nicomedia>에서 웅변학을 가리키던 라틴계의 변증가이며 기독교 역사가였던 락탄티우스<Lactantius>의 증언에 의하면 콘스탄틴은 꿈속에서 기독교의 상징을 병사들의 방패에 부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에 콘스탄틴은 꿈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병사들의 방패와 군기에 승리를 보증하는 표식으로 헬라어 알파벳 중에“키”CHI<X>와“로”RHO<P>를 결합한 장식무늬를 그려 넣으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 문자는“그리스도”<CHRIST>의 처음 두 문자 임으로 그 표식은 기독교를 상징하는 것이 될 수 있다. 315년에 로마에서 발행된 동전 화폐에 이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4세기 후반의 역사가들은 이 무늬를 라바룸<Labarum>이라고 명칭 하였다. <이러한 전설에 영향을 받은 일부 교회들은 XP를 기독교 상징의 문자로 사용하였고 이러한 관행은 오늘 날에도 일부 교회들에 의하여 지켜진다.>

  

한편 유세비우스의 증언에 의하면<이것으로 정복하리라>하는 단어들과 함께 공중에 그 깃발의 환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또 어떤 전승은 십자가 깃발을 앞세우고 전투하라는 음성이 있었다고도 한다. 콘스탄틴이 계시를 받게 된 사연에 대한 증언들도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콘스탄틴이 하나님께<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주시면 기독교 핍박을 종식시키고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하겠다.>고 기도한 후에 계시를 받았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네가 승리하면 기독교인이 되겠느냐?>라고 하문하시어 콘스탄틴이<제게 승리를 주시면 반드시 하나님의 종이 되겠나이다.>라고 대답한 후 계시를 받았다는 등 여러 가지가 있어서 과연 어떤 것이 진실인지 알 수가 없다.

 

콘스탄틴이 하나님께 받은 계시의 진위성을 우리가 확인할 수는 없으나 결과는 한가지로 전해진다. 콘스탄틴과 막센티우스의 전투는 로마근교 북방의 작은 마을인 삭사루브라<Saxca Rubra>에서 벌어졌다. 그들은 티베르강의 밀비안<Milvian>에서 최후의 격전을 벌였는데 이때에 막센티우스가 밀비안다리 위에서 싸우다가 강물 속으로 떨어져 빠져 죽었다. 이로서 콘스탄틴이 로마제국의 서부를 완전히 장악하였고 제국의 동부지역은 리키니우스와 막시미누스다이어가 공동으로 통치했다. 콘스탄틴은 로마제국의 서부를 장악한 뒤 동부를 공격하려는 야심을 감추고 리키니우스와 평화 동맹조약을 체결하였다. 콘스탄틴과 리키니우스는 밀란<Milan>에서 동맹 협정을 체결했는데 이때의 협정서 중에 기독교에 대한 조항이 들어 있다. 그 협정서에는 기독교에 대한 모든 탄압을 즉시 중지할 것과 몰수 된 교회와 개인들의 재산들을 환원한다는 조항이 들어있다.

 

역사가들은 그 협정조약을<밀란칙령-Edict of Milan-A.D.313>이라고 명칭 하였다. 역사가들 중에는 이 칙령을 관용의 칙령<Edict of Toleration>이라고 명칭하기도 하였는데 이 칙령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한 것은 아니었고 종교적 양심에 의한 절대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 준 것으로서 기독교를 여타의 종교들과 대등한 위치에 올려놓은 것이었다.<밀라노 칙령은 분실되었음으로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으나 당시에 니코메디아 관리들에게 기독교에 관한 세부규정을 설명한 리키니우스황제의 포고문은 남아있다.>

 

그러나 막시미누스다이어는 갈레리우스의 칙령에 따른 기독교 박해를 계속했다. 콘스탄틴은 동부를 공격하고자 하는 야심을 철저하게 은폐하면서 리키니우스와 막시미누스다이어가 전쟁을 하도록 은밀하게 유도했다. 콘스탄틴은 리키니우스가 안심할 수 있도록 자신의 사촌 여동생 콘스탄스를 리키니우스와 결혼시켰다. 콘스탄틴은 마지막 결전에 대비하여 전력을 비축하면서 여러 경로를 통하여 그들이 전쟁을 하도록 계략을 꾸몄다. 콘스탄틴의 계략에 휘말린 그들은 드디어 전쟁에 돌입했다. 전쟁은 막시미누스다이어가 먼저 시작했다.

 

콘스탄틴과 리키니우스의 동맹에 불안을 느낀 막시미누스는리키니우스가 밀란에서 콘스탄틴과 함께 있을 때에 리키니우스의 영토에 침입하여 비잔티움을 함락시켰다. 그러자 리키니우스가 즉시 반격하여 막시미누스다이어를 패퇴시켰다. 막시미누스다이어는 도주했고 얼마 후 사망했다. 이로서 로마제국은 리키니우스와 콘스탄틴이 동서를 양분하여 통치하게 되었다. 리키니우스는 이탈리아 전체와 이집트를 통치했고 콘스탄틴은 서부유럽과 북아프리카를 통치했다.

 

사람들은 두 황제들이 사촌 매부 처남 관계였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의 전쟁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두 황제는 다 함께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고자 하는 야망을 불태우고 있었다. 두 황제는 전력을 정비하고 다듬으면서 호심탐탐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전쟁의 불꽃이 튀었다. 콘스탄틴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었는데 조사결과 배후에 리키니우스의 친척이 있었음이 드러났다. 그는 도망하여 리키니우스에게로 갔고 콘스탄틴은 리키니우스에게 그를 송환 할 것과 납득할 수 있는 해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리키니우스는 그것을 거부하고 전쟁을 선포했다. 이미 전쟁의 구실을 찾고 있었던 콘스탄틴은 즉시 군대를 동원하여 리키니우스를 공격했다.

 

두 차례의 격전 끝에 콘스탄틴이 비잔티움을 정복했다. 비잔티움을 빼앗기면 아시아와의 교통이 두절되어 보급로가 차단될 것을 두려워한 리키니우스는 비잔티움을 돌려받는 대신에 유럽영토 대부분을 콘스탄틴에게 양도하기로 하고 평화협정을 맺었다. A.D.314년의 일이었다. 그 후 두 황제 사이의 권력 투쟁은 한 동안 소강상태에 들어갔고 제국은 평안했다. 그러나 A.D.322년에 이르러 최후의 승부를 판가름하게 되는 전쟁이 일어났다. 콘스탄틴은 야만족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다뉴브강을 건너 리키니우스의 영토를 침략했다.

리키니우스는 이것을 고의적인 도발로 간주하고 즉시 대항했다. 이때에 콘스탄틴의 군대병력은 리키니우스 군대병력에 비해서 극히 소수였다. 그러나 전투는 콘스탄틴의 승리로 끝났다. 이때의 전투에서 리키니우스의 군대가 콘스탄틴의 군대보다 훨씬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패전한 것에 대하여 당시의 역사가들이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전해준다.

 

이때에 도콘스탄틴군은 기독교를 상징하는 깃발들을 앞세우고 전투에 임했는데 리키니우스의 군대가 그 깃발을 몹시 두려워하여 전의를 상실하게 되자 리키니우스는 병사들에게 그 깃발을 바라보지 말고 고개를 숙인 채 전투에 임하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리키니우스군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전투에 임했으므로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해 보고 패전하였다는 것이다.

 

또 어떤 역사가는 리키니우스군이 콘스탄틴군의 깃발을 보면 아예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림으로 전투가 매우 싱겁게 끝났다고도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역사가는 당시의 전투가 매우 치열했으나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리키니우스가 패했으며 패배 이유는 깃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략과 전술적 차이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리키니우스가 많은 병력으로 소수의 콘스탄틴군을 포위하여 활과 창으로 공격했으면 충분하게 이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일하게 맞대결 하여 칼로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정예군인 콘스탄틴군에게 패했다는 것이다.

  

리키니우스는 비잔티움으로 패주하였으나 콘스탄틴의 추격을 견디지 못하고 바다를 건너 소아시아 지방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콘스탄틴의 추격으로 연전연패 하면서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였다. 이때에 콘스탄스와 니코메디아<Nicomedia>의 감독 유세비우스<Eusebius>가 리키니우스의 구명을 탄원했다. 콘스탄틴은 리키니우스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조건으로 그의 목숨을 살려주었다. 이로서 드디어 전쟁은 끝났고 콘스탄틴은 전 로마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기독교 박해의 역사 11

 3.박해의 종료.

2)콘스탄틴에 대한 역사적 평가.

 

콘스탄틴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들의 역사적 평가 기준에 따라 각기 다르다. 그 중에 특히 기독교 역사학자들과 기독교를 거부하는 역사학자들 사이의 평가가 첨예한 대립을 이룬다. 콘스탄틴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평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기독교 역사학자들의 평가.

 

기독교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틴을 훌륭한 기독교인으로 추대한다. 그들은 심지어 콘스탄틴을 신앙적 영웅 황제로 추대한다. 그들이 콘스탄틴을 신앙적 영웅 황제로 추대하는 이유는 그를 통하여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가 사실상 종료되었고 기독교가 제국의 국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콘스탄틴이 밀비안전투 이전에 하나님께 계시를 받았을 때 회심하여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모든 전투에 하나님의 군대를 이끌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출전하였으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승리하였다고 주장한다. 저들은 특히 밀비안다리에서 막센티우스를 패퇴시킨 것과 아드리아노플에서 리키니우스를 패퇴시킨 것을 하나님의 군대의 승리라고 말하며 따라서 콘스탄틴을<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황제><하나님의 황제><기독교의 수호황제>라고 명칭했다.

  

(2)일반 역사학자들의 평가.

 

기독교 역사학자들이 콘스탄틴을 영웅시 하는 것과는 달리 일반적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틴을 종교인<특히 기독교인>으로 보지 않고 노련하고 출중한 정치적 역량을 가진 탁월한 정치가로 본다. 그들은 콘스탄틴이 치밀한 계산적 정치 책략에 의한 고도의 정치 기술을 발휘하여 제국을 통치했다고 본다. 저들이 그러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콘스탄틴이 추구한 종교적 정치 노선이다.

 

콘스탄틴은 기독교 박해를 종식시킴과 동시에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까지 추대했음에도 불구하고 퇴위하기 직전까지 여전히 로마의 전통적인 종교를 인정했고 그 중에<정복되지 않는 태양신>을 가문적 수호신으로 받들어 섬겼으며 심지어는 이방종교들의 제사장 역할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콘스탄틴은 비잔티움을 새로운 로마의 수도로 건설한 후에 그곳에 기독교적 유물들만 건설하거나 옮겨 놓은 것이 아니라 제국 전체에 산재해 있는 모든 종교들의 각종 종교적 유물들을 거의 다 옮겨놓았다. 때문에 일반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틴은 기독교인이나 종교인으로서가 아니라 다만 정치가로서 모든 종교를 공평하게 수용하고 적절하게 아우르는 정책을 수용한 정치가 였다고 보는 것이다.

  

(3)기독교에 적대적인 역사학자들의 평가.

 

기독교에 적대적인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틴을 기회주의자이며 교활한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고 평가한다. 저들은 콘스탄틴이 밀비안 전투에서 막센티우스에게 승리할 때와 아드리아노플에서 리키니우스를 패퇴시킨 것은 기독교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계산된 사기극에 의한 승리라고 주장한다. 즉 꿈속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 것과 환상 속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모두가 치밀하게 계산된 거짓말이고 사기라는 것이다.

 

저들의 주장에 의하면 콘스타틴은 당시에 이미 기독교인들에 대한 개념이 옛날과는 많이 달라져서 사람들 중에는 기독교의 하나님은 정말로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과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황제들의 말로가 하나같이 비참하였고 특히 전임 아우구스투스황제였던 디오클레시아와 갈레리우스가 비참한 종말을 고했다는 점에 착안하여 자신이 직접적으로 기독교의 하나님께 계시 받았다고 거짓 유포하고 기독교를 상징하는 깃발들을 만들어 전투대열의 선봉에 세움으로서 적군의 사기를 꺾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은 막센티우스와 리키니우스를 불운한 황제로 보았고 특히 리키니우스를 더욱 불운한 황제로 동정하였다. 저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사실상 막센티우스나 리키니우스는 특별히 기독교를 탄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크게 학정을 베풀지는 않았다. 리키니우스가 콘스탄틴과 대결하기 직전에 한때 기독교를 탄압하였지만 그것은 고의적인 탄압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그를 배척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리키니우스 통치 하의 기독교는 여러분파로 분열되어 있었고 그들의 분파적 갈등과 다툼은 사회적 질서를 파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리키니우스는 할 수 없이 친위대를 동원하여 기독교의 종교적 갈등을 진압했는데 이때에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들은 리키니우스를 배척하고 콘스탄틴을 지지했다. 이에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틴 지지자들을 색출하여 처벌했는데 이로 인하여 콘스탄틴 지지자들은 점점 늘어가는 반면에 군대의 사기는 점점 저하되었고 때문에 결국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4)객관적차원에서의 평가.

  

콘스탄틴에 대한 객관적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콘스탄틴은 개인의 권력에만 집착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로마제국의 영광을 복원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사람이었다. 그는 로마제국의 영광을 위하여 원로원과도 과감히 맞섰고 심지어는 자신의 아들조차도 제거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과거의 데키우스나 디오클레시안 황제들처럼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그들과 달랐다. 과거의 황제들은 로마의 전통적 종교 위에 로마의 영광을 세우려고 했지만 콘스탄틴은 기독교의 토대 위에 로마의 영광을 복원하려 하였다. 콘스탄틴의 이러한 정책은 원로원을 비롯한 귀족들의 결사적인 반대를 받았고 심지어는 콘스탄틴을 제거하고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려는 음모까지 있을 정도로 심각한 반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힘으로 원로원을 제압하였으며 황제퇴위 사건에 연루된 자신의 큰 아들 크리스푸스<Crispus-리키니우스와의 전쟁에서 함대 사령관이었다>까지도 과감히 처형하였다. 때문에 객관적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틴을 로마를 사랑한 아름다운 황제로 평가한다.

  

(5)우리의 평가.

 

역사란 보는 사람의 견해에 의하여 얼마던지 다르게 평가될 수 있다. 하나의 사건을 어떠한 개념에서 어떠한 눈으로 보는가? 하는 것에 따라서 반역이 혁명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혁명이 반란이 될 수도 있다. 충신이 역적이 될 수도 있고 역적이 충신이 될 수도 있으며 간적이 영웅이 될 수도 있고 영웅이 간적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전승들에 의하여 당시의 상황들 살펴보게 될 뿐이다. 때문에 과연 어떠한 견해가 바른 견해인지를 알 수 없으며 어떠한 상황이 사실적인 역사인지를 함부로 정립할 수도 없다. 따라서 콘스탄틴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참으로 조심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기독교역사에 많은 아름다운 역사를 제공한 콘스탄틴을 평가한다는 것은 자칫하면 편파적인 것이 될 수 있기에 더욱 조심스럽다. 따라서 그 점을 미리 밝히면서 기독교 박해역사를 종식시킨 콘스탄틴과 당시의 기독교와 당시의 로마의 상황을 역사적 차원에서 조명한다. 아울러 다음부터 기록하는 것들은 모두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추론일 뿐 그것이 정확한 실제적 역사는 아니라는 사실을 미리 밝혀둔다.

  

 

*우리는 당시의 상황들과 그의 정치적 결과들을 근거로 하여 콘스탄틴을 노련하고 탁월한 정치가로 인정한다. 그리고 그의 야심 찬 로마영광 재현의 꿈도 사실로 인정한다. 아울러 우리는 그가 막센티우스와의 전투전에 받았다는 계시도 인정한다. 역사가들의 전승들이 서로 약간씩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그 모든 것들을 다 함께 인정한다. 왜냐하면 계시의 내용이 똑같아야 한다는 이유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의 계시를 다양하게 내려주셨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그가 분명한 기독교인이었음을 확신한다. 그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밀비안 전투에서 였을 것이다.

 

그 이전의 콘스탄틴은 다만 로마제국의 맹주가 되어 로마제국을 과거의 화려하고 웅장하고 강하고 영광스러운 로마제국이 되게 하려는 야심 찬 정치가였다. 그가 야만족 포로들을 경기장에서 무참하게 죽도록 한 것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보면 분명 악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당시 로마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대로마제국의 황제로서 비난받을 수 없는 통치적 행위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콘스탄틴이 밀비안 전투를 통하여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부터 그에게는 새로운 삶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가 죽음에 임박할 때까지 세례를 받지 않은 점과 이방 신상들을 섬긴 것은 그가 기독교인이 아니기 때문이거나 또는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망서렸다거나 또는 계산된 정치적 계략에 의한 양다리 걸치기식의 비열한 태도는 아니었을 것으로 본다. 우리는 그가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그의 삶이 인격적인 기독교인의 삶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해서는 않된다. 그가 비록 회심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로마의 귀족으로서 수십 년간 생활해 온 그가 하루아침에 성경이 요구하는 차원의 기독교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며 뿐만 아니라 대로마제국의 황제인 그가 순식간에 전형적인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그의 신앙적 삶에 대하여 많은 욕심을 내서는 않된다.

 

또한 우리는 당시의 로마제국과 기독교의 상반된 입장을 역사학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로마제국은 세계를 호령하는 대제국이었던 반면에 기독교는 아직 로마제국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 분야들은 전통적인 로마의 귀족들에게 편중되어 있었고 따라서 황제는 그들을 무시할 수 없었으며 로마에는 또한 수많은 종교들이 산재해 있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배려도 당연히 요구되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황제가 기독교라는 어느 한편에 치중하는 정치적 노선을 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그가 말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세례를 받고 정식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사실과 그가 이방종교들과 계속하여 꾸준히 교류를 가졌다는 것을 당연히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오히려 그때에 콘스탄틴이 오직 기독교만을 주장하지 않고 보편적인 종교정책을 펼친 것에 대하여 그의 탁월한 지혜를 칭찬한다. 만약에 그가 오직 기독교만을 주장하여 기독교 이외의 종교들을 탄압했다거나 또는 비잔틴 건설을 오직 기독적인 도시로 건설하여 다른 종교들의 접근을 일제히 차단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은 분명 콘스탄틴의 몰락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며 더욱 극심한 기독교 탄압의 역사를 재현하는 결과를 만들었을 것이다. 콘스탄틴이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먼 장래를 내다보는 지혜로움으로 그러한 정책을 펼쳤는지 아니면 다만 정치적인 차원에서 그렇게 했는지를 우리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통치 방법은 분명히 기독교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콘스탄틴의 통치 하에서 기독교는 다방면에 걸친 발전을 이루었던 것이다.

4.로마제국의 박해와 하나님의 섭리역사.

  

많은 역사 학자들은 로마제국에 의한 기독교 박해를 보면서 많은 의혹을 품었다. 특히 기독교역사학자들은기독교에대한로마제국의박해를보면서참담한심정을토하였다.

 

저들의 공통적 의문은 참으로 하나님은 살아 계신가? 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어찌하여 저토록 오랜, 그리고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시고 하나님께서 여전히 침묵하시는가?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살아 계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이 저토록 오랫동안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았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거나 불신하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기독교인들이 불쌍하고 어리석어 보였다. 한편 사람들은 또 다른 차원에서 기독교에 대한 의문을 갖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박해를 전혀 돌아보지 않는 하나님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아니하고 여전히 섬기는 기독교인들을 이해 할 수 없었다. 특히 경기장에서 불에 타 죽거나 맹수들에게 찢기워 죽어가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밝고 평안하고 의연한 자세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독교인들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토록 길고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멸절되지 않고 오히려 더욱 확장되어 가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상 이러한 의문은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모두를 막론하고 박해를 받던 당시의 사람들이나 그것을 역사 속에서 보고 알게된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이 갖는 공통된 의문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신학자로서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시원하게 풀어 주어야할 책임과 의무를 갖는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립한다.

 

1)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기독교에 대한 로마제국의 박해는 기독교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증명한다. 로마제국의 박해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속하게 발전하는 기독교의 역사는 일반상식으로는 절대로 이해될 수 없는 상황이다. 일반적인 상식대로라면 박해가 극심하면 극심할수록 기독교는 움츠러들어야 하고 기독교 성도들의 숫자도 줄어 들어야한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가공할만한 박해를 보면서 기독교인이 되려는 사람이 있을 수도 없고 죽음과 고통을 이겨 내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며 따라서 기존의 기독교 성도들 가운데서도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하여 기독교를 포기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숫자가 자연적으로 줄어들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은 그토록 심한 박해 속에서도 기독교인의 숫자가 오히려 증가되며 뿐만 아니라 박해가 심하면 심할수록 기독교가 오히려 확산 되어갔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의 원리이다. 기독교의 발전이나 기독교인들의 증가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에 어떤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로 인하여 기독교의 발전이 영향을 받아 침체 되거나 또는 답보적 상태를 갖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박해에 대한 상대적인 자극을 받아 기독교 전체 또는 기독교 개인들의 신앙이 성장하거나 분투하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의 발전과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박해를 비롯한 외부적인 것들에 전혀 영향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하여 진군된다. 하나님께서 이미 선택한 자들은 박해와 전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정한 때가 되면 하나님께 나오게 되어있다.

 

때문에 로마제국의 그토록 극심한 박해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은 정해진 때에 하나님 앞에 나왔고 기독교는 유유히 그 역사를 진행해 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역사는 당시의 기독교역사를 통하여 증명 받는다. 그토록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복음의 특전사들은 로마 전 지역을 비롯한 세계 전 지역에 교회들을 설립해 나가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고 전파했다. 그리고 진리의 기록자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기록하였고 아울러 복음전파의 현장들에 있었던 크고 작은 사건들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기록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각종 철학 사상가들과 사이비이단들을 비롯한 비진리자들의 끊임없는 교리적 공격을 진리로 변증하는 가운데 기독교의 진리, 기독교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다듬어 정리해 나갔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정하신 섭리에 따라 훗날에 성경이 완성되고 정립되었으며 또한 조직신학이 완성되고 정립되었으며 하나님의 기독교역사가 기록으로 남겨져 후세에 전승되는 역사를 이룩해 나갔던 것이다.

  

어떤 역사가들은 하나님께서는 로마제국의 박해 없이도 주권적으로 기독교역사를 확장하고 진군 시킬 수 있었지 않느냐? 라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로마제국의 박해 없이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얼마든지 기독교역사를 발전시킬 수 있었을 것 아니냐?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적 특성과 또한 인류역사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함에서 비롯되어진 우문<愚問>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정립해야 할 것이 있다.

 먼저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대한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진행시키심에 있어서 주로 두 가지의 방법을 사용하신다. 하나는 의도적, 고의적 차원의 주권적 역사를 창출하시는 것이며 다른 또 하나는 허용적 차원에서 인간들의 역사를 주권적으로 적용하시는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기독교역사는 대부분 의도적, 고의적, 주권인 반면에 일반역사는 대부분 허용적 주권이다. 물론 기독교 역사에도 허용적 주권이 적용되며 일반 역사에도 고의적, 의도적, 주권이 적용된다. 그러나 특별한 역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경우 기독교 역사는 대부분 의도적, 고의적, 주권인 반면에 일반역사는 대부분 허용적 주권이다.

 

이와같은 차원에서 볼 때에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하나님께서 의도적, 고의적으로 그것을 창출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필요에 의하여 그것을 허용하신 것이다. 즉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로마제국 당국자들이 로마를 위하여 일으킨 사건들이었고 유대인들의 박해나 로마시민들 및 이방종교인들의 박해 역시 그들의 입장을 위하여 일으킨 사건들이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의 발전적 진군을 위한 차원에서 그것들을 허용하셨고 적용하셨다.

   

2)기독교의 발전.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기독교인 개인들에게는 참아내기 어려운 고통들을 주었지만 결국은 하나님기독교의 역사적 발전을 크게 도와주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기독교를 박해한 로마제국의 황제들은 물론 네로와 같은 정신병자도 있었지만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대부분 정상적인 황제들이었고 개중에는 훌륭한 현제<賢帝>들도 있었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 등등의 황제들은 로마제국의 입장에서는<5현제>들에 포함되는 훌륭하고 영민한 황제들이었다. 또한 황제들의 박해도 개인적인 유익을 위한 박해나 사적인 감정을 위한 박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로마제국의 영광과 평안을 위한 정치적, 종교적, 차원에 의한 박해들이었다. 로마제국을 통치하는 황제의 입장에서 볼 때에 기독교는 다양한 차원에서 암적 존재였기 때문에 그들은 로마제국을 위해서 기독교를 탄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로마의 기독교박해는 기독교를 멸절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전역과 나아가서는 세계 전역으로 확산시키는 결과를 만들어 주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로마를 떠나 로마제국의 각 지역과 세계의 전역으로 흩어지면서 가는 곳마다 기독교를 전파하고 교회들을 세워 나감으로서 기독교는 자연적으로 로마제국 전 지역화, 세계 전 지역화를 이루었던 것이다.

 

따라서 로마제국의 입장에 의한 기독교박해는 일반 역사적 차원에서는 로마제국을 위한 필연적인 것이었지만 그것이 바로 기독교역사의 진군을 크게 추진하고 후원하는 절대적인 요소가 되었다.

  

한편 로마의 기독교 박해가 로마제국 전체에서 행하여졌지만 로마시내의 박해는 극심했던 반면에 로마시외 각 지방의 박해는 그다지 심하지 않았으며 로마시로부터 멀어질수록 박해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약했다. 이러한 상황 역시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것이었다. 만약에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박해하지 않고 오히려 보호하고 장려하고 확장했더라면 어떠한 결과가 나왔을까? 물론 그러한 경우에도 기독교의 확장과 발전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하에서 당연히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을 때에 기독교가 확장되고 발전하는 속도와 범위는 박해로 인한 확장과 발전 속도와 범위보다 상대적으로 더디고 제한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인간들의 기본적인 특성은 대체적으로 어려움 속에서는 더욱 진취적이고 전투적인 반면에 평안할 때에는 오히려 누리고 즐기며 안주<安住>하려고 한다.

 

그리고 특히 인간의 종교적 특성은 위기적 일 때에는 진리를 위하여 투쟁하고 희생하는 반면에 평안할 때에는 오히려 비진리에 빠져 안주하고자한다. 따라서 만약에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보호하고 후원하는 입장이었다면 기독교의 세계화는 그 속도에 있어서 매우 완만하였을 뿐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비진리적인 것으로서의 확산이 되었을 것이다. 즉, 수많은 비진리적인 교리들의 난무 속에서 수많은 분파를 이루는 가운데 기독교 아닌 기독교들로 분산되어 졌을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역사의 현장들이 증명해준다.

기독교가 박해 하에 있을 때에도 물론 비진리적 교리들과 분파와 분당들이 난무하였지만 그것은 미약하고 지엽적인 것으로서 인간들이 사는 세상이라면 어떤 영역 어떤 사회에서도 언제나 있게 되는 흔하고 보편적인 현실들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기독교박해가 끝나고 신앙적 평안이 허용되었을 때를 기점으로 하여 전개되어진 기독교역사를 보면 참으로 안타까움과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참담한 신앙적 순교위에 세워진 기독교역사는 그때를 기점으로 하여 타락되고 변질되어져 갔으며 수많은 비진리적 교리들의 출현 속에서 수많은 분당과 분파로 갈라지고 흩어지는 역사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부끄럽고 안타까운 역사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3)박해받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께서 기독교의 확장과 발전을 위하여 로마제국의 박해를 허용하셨다. 라는 우리의 주장에 대하여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가혹하신 하나님이 아니신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제국의 박해 때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견뎌내기 힘든 고통과 수난을 당했으며 심지어는 비통하고 비참하게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선포한다.

 

로마제국의 박해로 인하여 고통 받은 것은 시간적으로 볼 때에 아무리 길어도 잠시의 일이며 최고의 고통은 고문이나 형벌 등등에 의한 육체적 고통과 죽음이라고 할 때에 그것을 상태적인 차원에서 말한다고 할지라도 역시 한시적인 것이지 영원한 것은 아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당시를 비롯한 기독교인들이<주를 위하여 받는 고통과 핍박>에 대하여 참으로 많고 영원하고 아름다운 최상의 상급과 면류관들을 선물로 하사 하신다. 성경은 도처에서<주를 위하여 받는 고통과 핍박>을 받은 자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상급들과 면류관들을 선포한다. 따라서 그들은 잠시의 고난과 고통에 대하여 계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보상 받았음으로 오히려 하나님께 무한하고 영원한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상급과 면류관의 선물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최소한 네 가지 기본적인 이유에서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의 찬양과 경배를 영원히 드려야한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하고 완전한 최상의 하나님나라 국민으로 세워 주셨으며

둘째는 창조주하나님, 통치주하나님, 섭리주하나님, 심판주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게 하셨으며

셋째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하나님의 종으로 불러 세워주셨으며

넷째는 이 모든 것들을 이루어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내려오시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그와 같은 고난을 겪으시었는데 우리의 고통과 고난이 무엇이 그리 대단하다고 단 한마디 말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말로나 글로서는 표현조차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다만 무한히 그리고 영원히 감사하고 찬송해야 할 것이다.

 

4)박해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로마제국의 박해에 동원된 황제를 비롯한 모든 자들은 당연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받았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거니와 기독교역사가 중의 한 사람이었던 락탄티우스<Lactantius>는 기독교를 박해한 황제들의 비참한 말로를 기록으로 남기면서 갈레리우스황제의 회개가<너무 늦었다>고 지적했다.

 

기독교를 박해한 황제들을 비롯한 모든 자들의 비참한 말로는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또 하나의 역사적 의미를 선포한다. 즉, 누구든지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자들은 그에 대한 댓가를 내생<來生>에서도 당연히 받게 될 것이지만 그전에 이미 금생<今生>에서도 필연적으로 받는다는 것이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네로,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 셉티미우스세베루스, 갈레리우스 등등의 최후이다. 네로는 신하의 칼에 엎어져 자살했고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는 아들에 의하여 암살되었으며 셉티미우스세베루스는 황후와 함께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였고 갈레리우스 역시 중병에 걸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 외의 황제들도 모두 한결같이 비참한 말로<末路>를 당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그와같은 불변의 진리를 보고 들어 알고 있는 자들<심지어는 기독교 지도자들>중에도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고 탄압하는 자들이 부지기수로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저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을 결코 핍박하고 탄압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며 따라서 그와같은 자신의 행위가 악한 것이 아니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저들은 오히려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의 종에게 감히 순종하지 않는 악한 자들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핍박과 탄압의 양상은 달라도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고 슬프게 하는 자들은 곧 하나님의 섭리를 거부하고 반대한 악한자들, 핍박자들, 탄압자들, 박해자들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은 회개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 할 것이며 내세의 심판뿐만 아니라 현세에서의 심판도 당연히 받게 될 것이다 

5)사단의 심정.

 

로마제국에 의한 기독교 박해의 역사를 마무리 지으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불쌍하고 가엾은 사단의 처지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지나간 역사적 이야기들이지만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가 완전히 종료된 순간 사단은 얼마나 처참한 심정이었을까? 초기 기독교에 무자비한 박해들이 진행되었던 배후에는 사단의 극성스러운 활약이 있었음을 우리는 안다.

 

사단은 아마도 박해의 극심한 상황을 일일이 점검하면서<이제 거의 끝나간다><조금만 더>를 연발했을 것이고 한편으로는<이번만은 절대로>라는 각오를 새롭게 하면서 고군분투 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나고 기독교승리의 팡파레가 온 천하에 울려 퍼질 때에 사단, 그는 어떠한 모습, 어떠한 심정이었을까?

 

목숨 걸고 고군분투한 3백여 년의 사투에 온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을 것이고 박해에 총 동원된 졸개들은<이번에도 또?>라는 한심한 눈으로 사단을 바라다보았을 것이 아니겠는가? 얼마나 참담한 심정이었을까? 연전연패, 단 한번도 이겨보지 못한 하나님과의 승부, 사단은 어쩌면 졸개들 앞에 부끄럽고 창피하여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숨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좌절감과 무력감에 젖어 차라리 자살이라도 해서 그 처참한 일생을 마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사단은 영적 존재라 하나님께서 조치하여 주시지 아니하면 죽을 수도 없는 존재인 것을.....아!(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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