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중심의 교회 개혁은 한계 있어
[주장] 목회자들의 '교회 주인 노릇' 종식시켜야 교회 온전해져
류상태 목사
한국교회 교우님들이여, 여러분은 교회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기는커녕, 사회의 존경을 받기는커녕, 조소와 멸시를 받는 현실에 문제가 있음을 자각하고 있다면, 평신도들인 교우님들이 개혁의 주체자로 나서야 합니다.
목회자가 주체 되는 교회 개혁에는 한계 있어
저는 목회자들이 주체가 되는 개혁은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진정한 개혁은 그 공동체의 보통 사람들, 즉 다수의 구성원들이 눈을 떴을 때 비로소 현실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민주화도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졌음을 역사가 증언하고 있습니다.
지난 세기 우리나라를 옥죄던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화를 이룬 과정을 보아도, 소수 선각자들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하기는 했지만, 다수의 구성원들이 깨이기 전까지는 개혁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1987년 전두환 정권이 두 손을 들고 직선제 개헌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상아탑을 뛰쳐나온 소수의 젊은 지성인들과 민주투사들에 의해 주도되던 민주화운동에 다수의 보통사람들, 즉 ‘넥타이 부대’를 비롯한 우리 사회의 보통 사람들이 대거 참여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옛날의 독재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국민들, 즉 다수의 사회 구성원들이 눈을 떴고, 분별력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 평신도들이 깨어 ‘한국교회, 무엇이 문제인지’ 분별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일부 목회자들의 독선과 전횡을 제어하고 대처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에서 일부 자격 미달의 담임목사들에 의해 교회가 유린당하고, 소수의 정치목사들에 의해 각 교단의 총회와 노회가 끌려가는 안타까운 현실을 타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제가 목회자들이 주체가 되는 교회 개혁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이 기득권자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밥통을 깨뜨릴 가능성을 향해 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그러므로 양심적인 목회자들이 개혁을 원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자기보존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으며, 그런 현실적인 제약 요인은 목회자들이 추구하는 개혁의 방향과 활력을 스스로 제한하게 만듭니다.
즉 자본주의 사회인 우리나라에서, 또한 가정을 갖고 있는 생활인으로서, 목회자들은 자기가 속한 구조 속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고 더 나은 상황으로 개선되기를 바란다 하더라도, 이미 형성된 구도 속에 안주하려는 자신의 본능적 욕구와 끊임없이 싸워야 하며, 자기 희생을 각오하고 순수하게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며 초심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소수의 깨어있는 목회자들이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 개혁을 외칠지라도 다수의 ‘동료들’에 의해 저항을 받게 됩니다. 피아가 확연히 구분된 전장에서 적과 싸우는 일은 오히려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자리를 함께 하는 ‘동료들’의 저항을 극복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치인들의 개혁이 대부분 실패로 돌아가는 이유도 바로 그런 점에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결국 목회자들이 주체가 되는 개혁은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구조로부터 자유로운 평신도들이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한국교회 평신도들은 주체적으로 개혁에 나설 수 없도록 철저하게 세뇌되어 있습니다. 직업 목회자들이 대대로, 자신의 기득권이 침해당하지 않도록 평신도들을 철저히 세뇌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복음의 수호’를 기치로 내걸고 있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기득권 수호’에 혈안이 된 자격 미달의 삯군들이 평신도를 세뇌시켜 자기 자리를 유지하는 대표적인 사례를 들면, “목사는 하느님께서 기름 부어주신 종이므로 평신도가 그 권위에 도전하면 하느님으로부터 징계를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개신교에 성직자란 없다
그러나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엄밀한 의미에서 개신교에서는 성직자가 없습니다.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 성직자입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도, 장사를 하는 사람도,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도, 그에게 그런 달란트(재능)를 주셔서 그 일을 하게 하시는 분이 하느님이기 때문에 ‘모든 직업은 소명(하느님의 부르심)’이며, ‘모든 사람이 성직자’라는 것이,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입니다. 이른바 ‘만인사제설’이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평신도와 분리된 성직자가 아니라 그냥 그 분야의 전문가일 뿐입니다. 신학이나 목회학을 전공하였고, 그 일에 필요한 전문지식을 습득하여 일하게 된 직업 목회자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직장을 제공해주고 구성원들의 복지를 위해 일하도록 불러준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교우 여러분들입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나라의 주권이 대통령이나 관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있듯이, 교회 운영의 모든 분야에 평신도인 여러분이 주체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그러나 개 교회에서, 담임목사는 당회장으로서 이미 제도적으로 상당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평신도의 대표격인 장로는 당회의 일원은 될 수 있지만 당회장이 될 수 없습니다. 노회나 총회도 거의 목사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습니다. 장로가 노회장이나 총회장이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 뿐 아니라, 된다 하더라도 자신은 평신도라는 자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목사님들을 섬기겠다”는 자세로 일관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반면에 나이가 젊고 경험이 적은 사람이라도 일단 목사 안수를 받고 한 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되면, ‘당회장’이라는 직임이 주어져 교회의 방향과 의사결정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게다가 위임목사가 되면, 은퇴할 때까지 평생직이 되어, 후에 문제가 발생하고 교우들이 원하더라도 사임을 촉구하기 어려워집니다.
지금 우리나라 교계에서는, 위임을 받은 담임목사가 사회 범죄에 해당하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도, 여전히 위세를 행사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일반 사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파렴치한 범죄 행위를 하고도 여전히 교회 내에서 위세를 부릴 뿐 아니라, “주의 종을 비난해서는 안된다”는 말도 안되는 논리가 통용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 재정과 행정 관여 없어야...위임제도 폐지돼야
이런 구조적 문제를 개선하지 않고는 교회 개혁은 불가능합니다. 성서적으로 보더라도, 목회자는 사도들을 본받아 말씀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6장 1~6절 참조) 교회 행정과 재정은 평신도들이 맡아야 하며, 목회자들이 간여할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한국교회 교우 여러분, 교우님들이 출석하는 교회에서, 목회자들이 목회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십시오. 목회자들이 재정에 관여하거나 교회 행정에 간여하게 되면, 목회에만 전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목회자에게 필요 이상으로 권력이 집중되어 목회자 개인은 물론, 교우 여러분의 신앙생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여러분의 교회에서, 담임목사 위임제를 폐지해 주십시오. 위임제는 목회자에게 독과 같습니다. 교우님들 중에는, 위임받기 전까지는 교우님들을 잘 섬기며 신중하게 목회하던 담임목사가 위임을 받은 후에 서서히 변해가는 모습을 목격한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악하거나 의도해서라기보다는, 자리가 안정되니 긴장감이 사라지고 타성에 젖게 되는 것입니다.
정치계이건 경제계이건, 책임자를 세우는 경우에는 일정 기간의 임기를 보장해 주고, 후에 한번이나 두번 재신임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상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위임받은 담임목사는 거의 종신직을 보장받게 되며, 설교나 행정에 능한 목사의 경우, 그에게 교회 권력이 집중되어 교회의 주인으로 행세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기도 합니다.
목사님들을 교회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앉게 해 주십시오. 그 자리는 담임목사의 자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는 오직 섬기는 종의 자세를 잃지 않을 때에만, 그의 권위를 인정해 주십시오. 언제든지 목회자들이 섬기는 종의 자세를 잃고 군림하려 할 때는, 그를 내보내어 교회를 지킬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 주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담임목사를 비롯하여 모든 직업 목회자들에게 계약제를 시행해야 합니다. 현재 부목사님들에게 시행되고 있는 1년 단위 계약제를 담임목사에게도 적용해 주십시오. 계약의 갱신은 당회나 재직회가 아니라, 매년 연말, 세례교인 전체가 참여하는 공동의회에서 회원(세례교인) 과반수 출석과 출석 2/3 이상의 득표를 통해 재신임받도록 하는 방안을 제도화해 주십시오.
목회를 제대로 하는 목회자라면 이 제도에 대해 부담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매년 교우들로부터 신임을 얻고 새로운 각오로 교회를 섬기는 일에 보람을 느끼며 더욱 겸손하고 진실된 목회자로 사역하게 될 것입니다.
단언하건대, 이 제도가 시행되면, 담임목회자에 의한 횡포나 사고가 많이 줄어들 뿐 아니라, 교회가 사회로부터 존경을 회복하는데 크게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목회자들이 주체가 되는 교회 개혁은 한계가 있습니다. 교회 개혁은 평신도들인 교우님들이 주체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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