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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철원-은혜의 수단 바른이해

by 【고동엽】 2009. 2. 16.
 

 


                                           은혜의 수단 바른이해
"은혜의 수단" 이라는 말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교회의 말씀 전파, 성례, 안식일의 기도 등 신자의 영적 향상을 도모해 주는 일체의 것을 지시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그러나 특수한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가 은혜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그중 말씀이 가장 중요한 은혜의 수단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말씀이 바로 은혜의 수단이며 생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가지고 설교할 때 말씀과 함께 성령이 역사하시고 우리에게는 은혜가 된다. 그러므로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 된다.

 

그렇게 되려면 바로 전파해야지 지엽적인 글자풀이나 하고 있으면 말씀은 했는데도 은혜가 되는 것이 아니다.  50년, 60년대 한국교회가 얼마나 말씀을 높이 받들고 열심히 성경을 가르쳤는가?  그래서 목사께서 하는 설교를 강도라해서 위에서 내려온 말씀으로 그렇게 받아들였으나 지금은 그렇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다.  생명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고 전부다 테크닉만, 기교만 남아있어서 그런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성령께서 말씀의 기록자이시고 주인이시기 때문에 말씀이 선포되면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그러면 어떤 말씀을 선포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선포해야 한다.  그러면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왜 성령께서 역사하시느냐?  성령은 예수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그러니까 말씀이 선포될 때 성령이 역사하신다.  따라서 구원의 도가 확증되면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보신다.

 

목사들이 기도하지 않으면 성령의 교통이 없으므로 그 말씀에 성령의 역사가 적은 것이다.  설교 준비할 때 그 말씀을 깊이 겸손히 연구해야 하며 잠을 못자며 고민하는 그 정도는 되야지 입만 벌리면 퐁퐁 나오고 남의 설교집 베껴다가 그대로하고 그러면 은혜가 안되고 문제가 생긴다.  그러니까 남의 설교 안베낄려면  공부 잘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대학 하고 왔어도 신학부 3년 과정의 기간이 너무 짧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교수진이 보강되면은 어학과정을 1년 더해 가지고 시험 합격하면 졸업시켜야 될 것이다.  그래서 바른 신학을 배워가지고 성경을 해석할 수 있어야지 그렇지 못하니까 헌금 보상을 늘 축복설교로 갚아 줄려고 한다.  생명의 말씀을 못 주었으니까 대신 복으로 갚으려 한다.

 

말씀이 바로 선포되면 교회가 발생하고 자라간다.  교회가 자라가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말씀 선포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병들고 이지러진 사람이 있으니까 안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여러분들이 대다수에게 말씀을 선포하면 교회가 자라간다.  그리고 말씀을 선포하면 기적이 생긴다.  사람들에게 기쁨이 생기고 그리고 평안이 온다.  죄에 대한 회개가 일어난다.  말씀의 권세 아니고 어떻게 딴 길로 할 수 있는가?  우리의 일은 보통 일이 아니어서 기술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지식에 관한 일이요, 인격을 다루는 문제요 영혼을 구원하는 일로서 인격에 관한 문제다.  그러니까 말씀을 바로 선포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회개하게 하고 평안을 주고 생명을 자라게 한다. 그러니까 말씀이 항상 회개를 동반하고 사죄를 함께 가져다 줄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인격자들을, 백성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목적이다. 무엇으로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 말씀을 표준으로 해서 한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신다.  말씀을 선포하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일이 진행되니까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이제는 교회부흥에 너무 힘쓰고 부흥회하고 박수치고 그렇게 하는 때가 이미 지났다.  참 그리스도인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교회도 망하고 나라도 망한다.  지금 보통 심각한 상태가 아니다.  전쟁 안나니까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지만 죄악의 도가 심각한 때다.

 

말씀 선포가 은혜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하나님께서 말씀과 함께 오신다. 그러니까 말씀이 선포될 때 심령의 평안이 있고 말씀이 바로 선포되면 성도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아무렇게나 할 수 있겠는가?  정치하고 돌아다니고 욕하고 다니면서 설교하면 어찌 되겠는가?  지금은 말씀을 잘 전해서 참 그리스도인을 만들어 내서 교회를 바로 만들어 내야 할 때다.  교회가 잘 안되면 여러분들의 설교에 문제점이 있다.  그러니 다시 전도하여 새사람으로 낳아야 한다.

 

말씀이 바로 선포되면 교회가 발생하고 자라간다.  여기서 선포해야 할 말씀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다.  그리고 설교할 때는 죄에 대한 책망과 위로가 함께 와야 한다.  즉 회개와 사죄가 함께 와야 한다.  설교를 들으면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도록 해야 한다.그렇게 할 때만 기쁨과 평안이 있게 된다.  

 

한편 우리는 말씀을 말할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파되는 그 말씀에 중점을 두지만 그러나 이 말씀은 다른 방법으로도 인간에게 전달될 수 있다.  즉 가정에서나 학교에서 또는 대화와 문학을 수단으로 하여 소개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설교 강단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매체를 통해서도 하나님 말씀이 전파되야 한다.  우리가 내 교회를 크게 해 가지고 나만 열심히 영웅시하는 것도 좋지만 그리스도의 일을, 하나님의 나라를 같이 합동해서 이루어 다 흥왕하도록 해야 한다. 

 

성령의 역사 방식에 대한 문제인데 성령이 말씀 없이도 역사한다는 주장과 말씀 없이는 역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그러면 성령이 지금 역사하시는데 말씀없이 성령이 역사한다고 강조하는 두 그룹이 재세례파하고 로마교회인데 로마교회도 말씀과 상관없이 성령의 역사를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과 칼빈은 재세례파와 로마교회를 같은 선에 놨었다.

 

그래 재세례파도 성령을 얼마나 강조했는지 모른다.  성령께서 직접 말씀하시고, 내적 조명하신다.  그리고 로마교회도 우리가 모교회인데, 어머니 교회가 평화가 있고 성령이 역사하시는데, 로마교회에서 살 때에 얼마나 평안하고 좋았느냐? 그런데 칼빈이 와 가지고 얼마나 제네바를 요란하게 했느냐?  어머니 품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칼빈이 가고 50년이 지났는데 거기는 아직도 권징이 진행되고 있었고, 칼빈이 죽은 후 100년이 지났는데 거기는 아직도 권징이 진행되고 있었다. 칼빈이 세운 교회는 지금도 철저히 법이 지켜지고, 칼빈은 가고 거의 40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제네바 대학은 칼빈이 가르친 대로 절도,규범,스케쥴이 잘 진행된다.

 

한국이 성령의 천국이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은혜란 말로 불법을 전부 다 덮으면 은혜를 욕되게 하고 성령을 욕되게 하는 교회요, 성령의 이름으로 돈버는 교회, 저주받을 교회지 종교개혁 교회가 아니다.  칼빈은 종교개혁자니까 넉넉하게 못살았다.  밀가루 두 말하고 돈 조금 교회에서 나오는 것으로는 생활이 안되었다. 그러니까 주석을 썼다.  추기경이 와가지고 금으로 된 권총을 하나 주었는데 그것을 받아 자기 것으로 하지않고 교회 연보궤에 넣었다. 

 

 칼빈이 죽을 때 로마교황이 말하기를 정말 "저 이단자 같은 종이 있었으면...  " 했다.  그런데 우리 개혁교회가, 장로교회가 그 전통을 받은 교회들이 어디있는가?  다 욕망만 전부로 한다.  그러니 욕망을 절제해야 한다.  우리 개혁교회의 방식은 절제하는 것이다. 돈 많이 벌어도 풍덩풍덩 쓰는 것 아니다.  그것은 내 돈이 아니라 위탁된 것이니 욕망을 절제해야 한다.  그리고 공것을 바라면 안된다.  이것이 부정의 시초다. 수고한 댓가만 받아야 한다.  수고한 댓가만 받고 수고한 댓가를 정당히 받도록 해야 한다.  돈은 수고한 댓가이다.  왜 남을 도울 때 불평이 있고 그렇게 짜증이 나고 하는가?  내가 번 돈을, 수고를 지불하지 않은 사람에게 주니까 불평이 난다. 욕망을 절제, 먹는 것도 절제, 잠자는 것도 절제, 부부생활도 절제, 옷입는 것도 절제, 마시는 것도 절제해야 한다.  그리고 자녀교육 시키는데 적게 먹고 절약하여 저금하라.

 

성령의 역사를 재세례파와 로마교회는 말씀을 배제하고 역사한다고 한다.  그들은 전통을 중시하니까, 이들에 의하면 교리, 교의, 신앙의 표준을 교회가 정했으니까 교회 전통이나 성경이나 다 똑같은 권위로 받는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고 교회하고 밀착되어 있으니까 말씀이 없어도 성령이 역사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은혜를 배분하는 은혜기관이니까 성례전을 통해서 은혜가, 구원이, 다 배분되어 온다.  그러니까 성령의 역사가 교회에 필수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러니까 말씀없이도 성령이 역사하신다고 했다.  재세례파에 의하면 성령께서 직접 역사하시니 외적인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기록된 말씀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없이 성령이 직접적으로 역사한다는 주장에 대해 종교개혁이 "말씀을 통하여" (per Verbum) 로 맞섰다.  즉 말씀없이는 성령의 역사도 없고,성경을 통해서만 성령이 역사한다고 맞섰다.  루터교회가 이렇게 주장했는데 말씀만 선포하면 다인가?  물론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성령이 역사한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성령의 주권을 강조하였다.  또 목회 현실을 참작하여 성령이 말씀의 저자이므로 주권적으로 역사한다고 주장하므로 칼빈과 그의 제자들은 "말씀과 함께" (cum Verbo) 역사하신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루터가 옳으냐 칼빈이 옳으냐 할 때 문제점은 다 있다.

 

 현실적으로 생각할 때 성령의 주권을 생각하면 말씀을 선포할 때마다 성령이 역사하여 다 구원에 이르고 신앙이 자라가야 할텐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다. 구라파에 가도 독일교회들이 보여주는 것을 보면 루터의 나라가 이렇게 될 수가 있느냐?  정말 참담하다.  그런데 어떤 교회는 가득 가득 모인다.  멧세지를 들어보면 다른 것을 느낀다.  아하!  저러니깐 많이 모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성으로는 도저히 못 받아들일 동정녀 탄생을 말하는데 젊은이들이 온다.  뿐만 아니라 독일의 그 높은 학위의 박사들, 교수들이 그런속에서도 기독교로 개종을 한다.  참 놀라운 일이다.  복음을 선포하니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지성으로는 안되는데 믿고 변화되어서 그리스도인이 된다.  통상 말씀이 선포될 때 성령이 역사하신다.  그러나 말씀이 선포될 때마다 성령이 자동적으로 필연적으로 종속적으로 역사한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설교를 끝까지 들어도 예수 안믿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말씀을 말씀되게 하신 이가 성령이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설교가 되도록 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통상의 경우 성령께서 말씀없이 역사하시지 않는다.

 

그런데 루터의 말처럼 말씀을 통해서 성령이 역사하면 불신자도 없어야 될 것이다. 그런데 예수를 선포해도 안믿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말씀이 읽혀질 때마다 성령이 종속적으로 필연적으로 일하시도록 되면 성령의 주권성이 무시된다.  성령이 성경의 저자이시기 때문에 말씀과 함께 일하셔도 종속적으로 필연적으로 그렇게 일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칼빈은 목회자의 현실을 참작해서 성령의 역사와 말씀과의 관계를 말씀과 함께로 바꾸었다.  그래도 문제점은 성령이 역사하지 않을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cum Verbo 나 혹은 per Verbum , 둘 다 문제점은 조금씩 있다. 우리의 원칙은 말씀과 함께 역사하신다.

 

그런데 말씀없이 역사하는 경우가 있느냐?  가령 갓난아이가 죽었을 경우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외의 경우 즉 성년의 경우엔 성령께서 말씀없이 역사하시지 않는다.  그래서 가령 시골 부인이 자연을 보고 하나님을 믿어야 하겠다고 각오해서 교회에 나왔다고 했을 때 이렇게 인도된 데는 성령의 역사가 있었지만 그 정도의 깨달음 가지고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구원에 이르려면 교회에 와서 구원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고넬료의 가정도 마찬가지였다. 구제도 많이 하고 하나님을 잘 섬겼어도 그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베드로의 설교 즉 복음선포를 들어야 했다.

 

그러니까 말씀의 선포가 중요한 것이다.  성령의 역사가 말씀을 떠나서 역사하는 경우가 없다.  그러는 경우엔 per Verbum "말씀을 통해서"라고 해야 맞다.  성령께서 말씀이 선포될 때마다 종속적으로 역사한다는 것과 그 말씀이 선포되어도 선별적으로 역사하신다는 것 둘 다 문제점이 있다.  그러나 성령은 주권적인 하나님이시니까 말씀과 함께 역사하신다.  말씀이 선포되면 성령은 역사하신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선포가 진행되면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그것이 성령의 사명이다.  그것이 목적이다.  그것때문에 오셨다.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서 성령께서 와서 일하신다. 그런데 말씀과 함께 (cum Verbo) 라는 것 때문에 말씀 없이도 성령이 역사한다고 생각하다 보면 자칫 오류에 빠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교할 때 반드시 그리스도의 설교가 되게 해야 하고, 하나님의 전경륜에 대한 이해가 있고 나서 설교해야 한다.(פרופסור  שְׂצְליוּ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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