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성령이해
교회는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발생했다. 그러면 그 전에는 교회가 없었느냐 하면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구약의 교회가 있었고 예수님 재세 당시의 교회는 잠재적인 교회라고 말한다. 좀 사변적이지만 잠재적 교회로 창출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정식으로 기독교 혹은 그리스도의 교회로 출발한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인한 것이다.
통상 벌코프의 재래 조직신학의 교회론에 의하면 교회란 용어의 정의부터 시작하는데 그래야 맞기는 하지만 교회란 말을 안 쓰다가 처음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꼭 그렇게 전개해야 맞다고 할 수 없다. 신학은 어느 한 골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이루어진다. 신학 활동은 교회의 한 활동이다. 그러니 처음에 교회가 무엇이냐고 어원을 찾고 정의해야 교회가 무엇인지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미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교회가 발생되도록 되어 있었는데 성령 강림으로 교회가 실제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조직신학은 성령론 아래 교회론을 포함시키거나 성령론과 연관해서 교회론을 연구해야 한다. 성령론을 많이 강조하기 때문에 교회론 다음에 성령론을 생각하지만 사실은 교회론을 성령론하고 분리해서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령강림으로 교회가 발생했기 때문에 성령론 안에 혹은 성령론과 함께 교회론을 논하는 것이 바르다. 오순절파에서는 성령이 그리스도와 별개로 오심 그러면 성령은 그리스도와 별개적인 존재로 오셨는가? 그렇게 말하면 우리도 오순절파처럼 오해한 것이 된다. 알미니안파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오순절파에 의하면 Dispensationalism (세대주의)로 생각한다. 그래서 처음 구약은 성부 시대이고 다음 신약은 성자 시대이고 그 다음엔 성령 시대라는 것이다.
그래서 제일 초보적인 신앙 단계가 성부 하나님을 믿는 고넬료와 같은 신앙 단계이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믿었으나 아직 그리스도인은 아니었다. 그는 이방인으로서 유대교 신앙을 가졌던 것이다. 그때는 성부 하나님 시대니까 그런 신앙 단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을 믿었는데 그래도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교인같은 사람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이 성령 시대로서 성령을 신앙하는 제일 높은 단계인데 이때가 가장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다. 성령세례를 받으면 완전해진다. 이것이 알미니안이 주장하는 제2의 특별은혜의 역사라는 교리이다. 알미니안파만 아니라 현재 오순절파도 이렇게 주장한다. 그러므로 오순절 신학의 배경, 뿌리, 근본이 어디냐 하면 완전주의를 부르짖는 알미니안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교회 부흥이 목표여서 그 신학이 어디서 왔든지 간에 성령 충만을 외치고 뜨거워져서 열정적으로 예수 믿어 축복도 받고 교회만 부흥되면 그만이다. 바로 알미니안에서 오순절파가 주장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이 나왔다. 그러므로 오순절파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아직 어린아이이고 장성한 그리스도인,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성령세례를 받아야 된다고 한다. 그래야 사랑에 있어서 완전해진다. 그것이 곧 오순절의 은혜이다. 성령 강림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영으로 오심임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성령께서 오시므로 교회가 발생했다고 하는데, 그러면 성령이 오시기만 하면 되느냐? 또 성령이 별개의 독자적 존재로 오시느냐? 그렇게 말하면 안된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오순절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분리된, 구분된 독자적인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연장이고 그 사건의 완성과 완결이다.
성령께서 오심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영으로 오심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영하고 바뀌어져서 없어져 버렸느냐 하면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어려운 문제다. 바울의 글 고린도전서 15:45에 보면 부활하심으로 그리스도가 마지막 아담으로서 살려주는 영, 생명을 주는 영이 되었다고 하였다. 또 고린도후서 3:17에는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하였다. 주는 영이시다는 문장을 주어와 술어를 반대로 바꾸어 해석하여 " 영이 곧 주이시다"고 하는 주석가도 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 이후에는 영이 그냥 오신다고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또 오시는 영이 독자적으로 오시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시는 영이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오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신다. 그 영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이 있기 전의 영과 다른 별개의 영이란 말이 그리스도와 같아진 영이다. 기독론적 성령이라고 말해야 옳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오신다 혹은 영 안에서 오신다고 할 것이다. 완전히 그리스도로 인각되어 그리스도의 특성을 지닌 영이 우리에게 오신다. 그 영이 와서 우리에게 나타나면 그리스도로 나타나게 된다. 이런 성령이 강림하셔서 우리에게 오심으로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백성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발생하게 하셨다. 성령이 오심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이 적용되게 하여 다 죄 아래서 하나님과 적대되어 있는 백성들을 새사람으로 만들어낸다.
세대론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구약에서 하나님을 믿었던 자들에게 성령이 오신 것같이 신약에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 오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섭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한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제2의 자아 그러면 성령이 어떤 분이시냐 할 때 성령을 그리스도와 떼어놓고 생각하면 안된다. 영이 그리스도와 별개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오신 영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나타나도록 자기의 얼굴을 그리스도로 나타내도록 하신 것이다. 지금 그리스도께서는 육체로는 계시지 않지만 성령께서 그리스도와 전혀 무관한 별개의 존재로 오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오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살려주는 영, 생명을 주는( zoopoioun ) 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을 가리켜 " 그리스도의 제2의 자아 " 라고 한다.
성령께서 오셔서 그냥 하나의 별개의 단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셔서 역사하니까 사람들로 그리스도의 몸을 만든다. 성령께서 오심으로 죄와 죽음 아래 있는 백성들을 새 백성으로 살려서 교회가 되게 했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니까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몸인 교회를 연결하고 결합하는 띠이고, 고리 혹은 끈이다. 그러므로 교회론도 성령론과 기독론과 함께 논의해야 바르게 이해된다. 현대 신학적 논의의 촛점은 그리스도와 영과의 관계임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논의해 왔던 주요 논의는 아버지와 그리스도의 관계가 주였다. 그러나 지금은 신학의 논의가 그리스도와 영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다. 곧 삼위일체론적인 논의이다. (פרופסור שְׂצְליוּ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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