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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신앙 이해

by 【고동엽】 2011. 8. 3.
 
 

 

한국인은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이지만, 가정과 직장에서는 비그리스도인이다. 교회 일은 열 일을 제쳐놓고 앞장 서지만, 가정과 직장에서는 조그만 일에도 짜증과 불만을 토해낸다. 한국인의 믿음은 교회에서는 뜨겁지만, 가정과 사회에서는 차갑고 죽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가정 생활이 세속적인 마음과 짜증과 불만으로 가득차 있다면, 믿음으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만일 남편이나 아내가 서로 거칠고 온유하지 않은 태도로 말을 주고 받는다면, 그들은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참된 믿음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생명으로 의롭게 된 의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만일 우리의“믿음”이 남편이나 아내에게 부드럽고 친절한 말과 음성을 들려주는 것과 같은“행함"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3:18. 살아있는 믿음이 없이는, 어떤 사람도 하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
 
만일 남편과 아내로서, 우리가 살아있는 믿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도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교회에서 인정받는 장로(권사) 입니다.
 
 나는 십일조와 각종 헌금을 빠지지 않고 냅니다.” 물론, 그런 모든 희생과 헌신이 좋은 것이긴 하지만, 하루 하루를 믿음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우리 모두는 다시 한번 바울의 영감적인 말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대부분의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은혜로 자신의 구원이 이미 확정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십계명과 성경의 진리대로 사는 삶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그리스도의 모본과 발자취를 따라가려고 마음과 생애를 바치는 대신에, 편히 앉아서 십자가의 은혜가 주는 위로와 용서를 즐기는 것이 한국인의 신앙이다.

그러나 은혜의 참된 가치를 아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생애하게 된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마 13:44. 죄의 용서를 위하여 우주의 왕이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면서 죽었다. 누가 감히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얼룩진 은혜를 헐 값으로 팔아넘기려고 하는가?

십자가에서 제공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산산히 깨어지고 그 영혼은 그리스도의 진리 앞에 납작히 엎드려지게 된다. 그리하여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늘 아버지의 계명과 뜻을 받드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한국 기독교인은 매우 감정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 신앙이 감정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보다는, 자신의 감정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진리에 의존하기 보다는 자신의 감정에 의존하게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진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진리를 아는 사람들은 진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려고 하지만, 진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은 감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애쓰게 된다.

감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애쓴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그것은 기도나 금식과 같은 종교적 의식을 할 때에 자신의 변화되는 감정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기도와 금식이 매우 좋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러한 것들에 몰두하게 될 때, 자칫 잘못하면 커다란 잘못을 범하게 된다.  기도나 금식도 진리에 대한 지식과 함께 가야 한다.

진리를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기도에 대한 응답이 빨리 오지 않을 때마다, 그리고 그들이 기다리는 기적이 원하는 방법으로 일어나지 않을 때마다 쉽게 실망하거나 불안해 한다.
 
그리고 기도나 기적에 의존해서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알려고 애쓰다보니까 자칫 잘못하면 기도하는 중에 그들 속에서 생기는 감정의 변화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에 마음 속에 생각을 주시고, 인상을 주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도할 때에 생기는 모든 감정과 인상과 아이디어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경우 커다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모든 생각과 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반드시 확인되어야 한다.

한국인들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기준으로 구원과 축복을 확인하려고 한다. 기분이 좋으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납하신다고 생각하고, 기분이 우울하고 낙담이 될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한다. 돈이 많이 벌리면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셨다고 믿고, 사업이 망하고 직장을 잃어버리면 하나님께서 저주하셨다고 믿는다.

한국 기독교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셨다는 증거를 감정 속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감정을 자극하고 흥분시키는 방법으로 예배드린다. 박수를 치면서 신나게 찬송을 부르며, 팔을 흔들고 마루바닥을 치면서 큰 소리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엄숙해야 할 교회 안에 전자 기타와 드럼과 요란한 조명이 생기게 되었고, 이러한 시설을 통하여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도록 만들어 주어야 교회가 가득차게 된다. 한국 기독교회 안에서 조용히 울먹거리면서 드리는 회개의 기도와 그 뜻을 깊이 음미하면서 부르는 찬송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마치 레슬링 선수가 상대편의 팔을 뒤로 꺽어서 항복을 받아내듯이, 한국 기독교인의 기도는 하나님의 팔을 꺽음으로써,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애쓰는 기도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내기 위해서 겸비한 마음으로 기도드리는 대신에 자신의 뜻과 소원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지극 정성으로 빈다. 정성을 다하여 열심히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도 별수 없이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새벽 기도회에 참석하는 그리스도인과, 아들의 장원급제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산신령에게 비는 시골 아낙네의 염불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나님은 귀먹지 않으셨다. 가장 작은 음성으로 드리는 가장 짧은 기도일지라도,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이 순결하고 그 내용이 하나님의 뜻과 병합된다면, 기도는 즉시로 응답된다.
 
한국인의 기도가 시끄럽고, 중언부언함으로써 불필요하게 길어지는 이유는, 큰 목소리로 길게 기도함으로써, 먼저 자신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얻어낸 다음, 그분의 뜻이 어떠하든지 간에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기도드리는 사람은 기도 내용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혹시, 자신의 기도가 이기적인 것은 아닌가? 자신의 영광을 위한 기도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인가를 깊이 조아려 보아야 한다.
 
인간적인 꾀에서 비롯된 기도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기도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기도는 자신의 뜻을 하나님께 알려드리기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전지 전능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를 드리기도 전에 이미 우리의 뜻과 목적과 동기를 아시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살피기 위하여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하늘로 들어 올리는 것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 기도이다.

한국 기독교인은 목사의 안수 기도를 통하여 방언과 치유의 은사를 받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인은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성령의 은사와 축복을 하나님께 요구하지만,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같은 성령이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니" 고전 12:11.

성령의 은사는 우리가 요구하여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공로를 쌓거나 많은 헌금을 드림으로써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은사란 하나님이 주는 영적 선물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성도들을 통하여 기적을 행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필요할 때마다 성령의 은사와 기적적인 치유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의 여러가지 은사들은 인간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어떤 것을 언제 받을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서 정하신 때에 필요되는 은사를 당신의 종들에게 나누어 주신다.
 
인간이 성령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인간을 부리신다. 은사와 기적이 나타나는 때와 장소와 방법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지혜에 속해 있다. 연약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기적이 행사되어야 할 최적의 시간과 환경을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인은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하여 진리를 포기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존재하는 가장 큰 문제는 목사의 불충성과 교인들의 세속적인 정신이다. 양심이 마비되지 않은 목사라면 누구나 두 가지 음성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다.
 
한쪽에서는 진리에 대한 충성과 영혼들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진리와 원칙을 낮추는 한이 있더라도 교회를 크게 성장시켜야 한다는 사단의 음성이 들려 온다.
 
한쪽에서는 교회를 진리로 인도해 달라는 소수의 진짜 그리스도인들의 요구가 들려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좀더 많은 사람들이 편한 마음으로 교회를 찾을 수 있도록 당분간 진리를 곧바르게 말하지 말아 달라는 대다수 교인들의 요구가 있다.

안타깝게도, 많은 목사들은 두 음성 사이에서 고뇌하다가 결국에는 돈많고 힘있는 장로나 권사들의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사단의 음성을 따르게 된다.
 
이렇게 해서, 일단 목사가 큰 교회를 세우기로 결정하게 되면, 그는 자신의 목적이 성취될 때까지 성경의 진리를 곧바르게 설교하지 않게 된다. 세속적인 교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는 곧 바른 설교 대신에, 부드럽고 재미있는 설교로 인기를 얻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목사의 설교 밑에서 교인들의 신앙과 삶은 죄와 부패로 썩어가게 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요일 2:15~16

진리 대신에 성장을 택한 목사가 인도하는 교회의 신자들은 교회를 부와 유행의 경쟁 장소로 만든다. 귀거리와 목거리와 짧은 치마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올 때에 입는 예복이 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에서 술과 담배의 냄새가 새어 나오게 된다.
 
영적으로 쓰러져 있는 목사는 교회의 어리석은 양들을 이용하여 교회를 성장시키는 일에 골몰한다. 이러한 목사는 교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대신에 목사 자신에게로 인도한다. 진리에 대한 지식이 없는 어리석은 신자들은 목사에게 충성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되고, 교회에 바치는 헌금으로 자신의 죄에 대한 정죄를 피하려고 한다.

성경 진리를 스스로 연구하지 않고, 진리와 오류를 스스로 구분할줄 모르는 어리석은 교인들이 많이 생기면 생길수록, 교회는 아무 문제없이 더 빨리 성장하게 된다. 진리와 원칙이 무시되는 교회에서 사단은 교인들을 쉽게 정복해 간다.
 
한국 기독교인은 축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교회에 나가지만, 하나님께서는 단 한번도 믿음의 댓가로 복을 약속하지 않으셨다.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잘 믿으면,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업체와 가정을 축복해주십니다" 라는 말은 거짓이다.
 
교회 안에 떠돌아 다니는 이러한 말 때문에 어리석은 교인들은 자신의 믿음과 하나님의 축복을 거래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용서가 교회에 드리는 헌금에 의해서 거래될 수 있다고 오해하게 되었다.

가난한 나라의 선교사가 빵과 밀가루를 나누어 줌으로써 사람들을 예배당 안으로 끌어들이듯이, 하나님께서도 물질과 건강의 축복을 미끼로 사람들의 경배를 유도하신다는 사단의 거짓을 믿는 사람들은 순결한 동기로 하나님을 경배할 수 없다. 기복 신앙은 한국 기독교회를 가라지들로 채워가고 있는 장본인이다.

신앙이 좋은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 있는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제외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 뿐 아니라, 악인들에게도 동일한 햇빛과 비를 주신다. 기독교 신앙은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죄와 이기심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한 유일한 능력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의 재물과 건강이 아니라, 영혼을 죄로부터 해방시켜서 구원받도록 이끄시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회의 치유 은사는 매우 독단적이고, 일방적이다. 환자의 믿음이나 하나님의 뜻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치유를 주장하는 것이 한국인의 치유 은사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병자를 위한 겸손한 기도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들어주신다. 인간은 그분의 긍휼하심을 받을 자격이 없지만, 환자가 마음 전체를 그분께 바치면서 믿음을 행사할 때, 그분께서는 당신께 나아오는 자들을 받아 주신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그분의 약속을 기다릴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의 약속은 당신의 말씀에 대한 환자의 순종을 통하여 성취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내 마음에 죄를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편 66:18.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죄를 그대로 품고 있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약속과 축복을 요구하고 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회개이다.

많은 사람들은 방종과 무절제로 인하여 질병을 가지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옷입고, 일하는 습관에 있어서 건강의 법칙을 무시하였다.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부도덕하고 죄된 생활이 영혼과 몸을 쇠약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람들의 기도를 응답하셔서 건강을 축복으로 회복시켜 주신다면, 그들은 전과 동일한 부절제와 방종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들의 회복을 위해서 기적을 행하신다면, 그분께서는 그들의 죄와 부절제를 조장하는 것이 된다.

병자들은 믿음으로 치료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림과 동시에, 자신들의 버려야 할 부절제와 잘못된 생활 습관을 결정적으로 포기해야 한다.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기 위해서, 병자들은 알고 있는 죄들을 버리는 진정한 회개를 해야 하며, 동시에 위생적이고 올바른 생활 습관을 가져야 한다. 병자들은 건강법칙과 영적법칙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철저하게 일치하는 마음과 생활을 소유해야 한다.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낫기를 간구하라.”야고보 5:16

우리가 병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우리는“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로마서 8:26).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축복이 최선의 것이 될 것인지, 그렇지 못할 것인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질병의 치료를 위한 기도에는 다음과 같은 사상이 담겨있어야 한다. “주님, 주님께서는 이 사람의 모든 비밀을 아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병자를 가장 잘 아십니다. 당신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이 병자를 위해서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병자를 사랑하는 것보다 당신께서 이 영혼을 사랑하는 크기와 깊이가 훨씬 위대하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이 병자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그러나 만일 이 병자가 회복되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라면, 주님의 은혜로 그를 위로해 주시고 고통 중에 있는 그에게 오셔서 그를 끝까지 지켜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진실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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