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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와 폴 틸리히의 비존재 신학 비교 연구

by 【고동엽】 2011.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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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바르트와    폴 틸리히의 비존재 신학 비교 연구


I. 들어가는 말
인간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인간 본성 중의 하나이다. 죽음은 인간들의 삶의 종말인가? 무(無;nothingness)라는 단어가 인간 삶의 종말을 적절하게 표현한 것일까? 비존재(non-being)는 죽음 후에 맞이하는 존재(being)의 한 형태인가? 과연 존재와 무는 어떤 관계일까? 하나님은 비존재로 표현될 수 있는가? 과거의 역사 동안 위대한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이러한 형이상학적 질문들을 통해 무(nothingness)와 비존재(non-being)에 대해 많은 호기심과 관심을 표명했다. 죠지 패티슨은 무(無)와의 만남은 현대 종교사상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주제라고 말한다. 확실한 것은 무(無)라는 개념이 이해하기에 가장 애매하고 난해한 철학의 개념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즉 무(無)의 개념이 역사적으로 매우 다양하고 복합적으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우리는 '무'의 개념을 그리 쉽게 정의할 수 없다.


어떤 철학자는 무(無)가 비존재의 존재의 양식(mode)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이는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적인 것으로 무(無)를 설명하려 한다. 또 다른 이는 '무(無)는 삶의 어두운 면(the dark side of life)이다'라고 말한다. 잉그램 서어는 무(無)는 삶, 가치, 의미의 부정(negation)이라고 주장한다. 잉그램 서어의 주장은 무(無)가 악(evil)이나 혼돈 그 자체(chaos itself)라는 주장과 연관이 있다. 플라톤주의적 형이상학자 플로티누스는 악은 본성적으로 비존재와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악은 비존재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無)는 하나님과 선(good)에 대항하는 악의 힘으로 이해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무(無)/비존재라는 용어는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어져 왔다. 많은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신앙과 사상을 드러내기 위해 무(無)의 개념을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이제 폴 틸리히와 칼 바르트의 무(無)/비존재 개념을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그들의 신학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알게 되며, 동시에 무(無)에 대한 신학적 이해의 깊이를 느끼게 될 것이다. 즉, 이 두 신학자의 비존재 개념을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신론, 기독론, 인간론, 구원론 및 악의 문제에 대한 그들의 입장에 좀 더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II. 폴 틸리히와 칼 바르트의 비존재 이해
틸리히는 비존재(non-being)라는 용어를 통해, 바르트는 무(nothingness)라는 용어를 통해 그들이 원하는 신학적 주장을 전개한다. 사실 이 두 용어는 하나님과 인간에 관계된 실체(reality)라는 면에서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논문 전체에서 무(無)와 비존재, 이 두 용어는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될 것이다. 그러나, 틸리히와 바르트에 의해 이 용어들이 사용될 때 우리는 그 두 용어들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느끼게 될 것이다.
틸리히와 바르트의 신학적인 차이를 좀 더 잘 이해하려면 이들의 실제적인 인간관계를 먼저 알아야 한다. 이들은 초기에 서로가 협력자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틸리히는 바르트의 로마서주석에 나타난 새로운 변증법적 신학을 자신의 신학에 연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같은 노선의 신학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에버하드 부쉬는 설명한다:


1923년 11월 초에, 바르트는 이미 틸리히와 정기적인 논쟁을 하고 있었다. 이들의 논쟁 점은 '역설'에 대한 개념의 문제점에 대한 것이었다. 본질적으로 역설은 신학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위치와 관련되어 있다. 바르트는 그리스도를 구원의 역사로 이해하는 한편 틸리히는 그리스도를 언제나 어디서나 인식되는 현존하는 계시의 상징 으로 이해한다. 틸리히의 이러한 상징적 계시의 이해는 바르트의 계시 이해 즉, 하나님 에 의해 계시된 특별한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계시 이해와는 다른 것이다.

 

틸리히는 존재는, 비존재로부터의 저항할 수 없는 힘과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비존재는 존재를 완전히 제압함으로 승리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비존재의 위협에 대한 존재의 반작용(reaction)은 절망이다. 존재는 비존재에 의해 제한되고 결정되는 운명에 처해 있다. 이것이 바로 틸리히가 말하는 존재의 유한(finitude of being)이다. 틸리히는 하나님만이 인간의 유한성을 공격하는 비존재의 위협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말한다. 틸리히의 하나님은 곧 존재의 힘, 존재의 근원, 그리고 존재 그 자체로서의 하나님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실제로 틸리히가 말하는 존재 그 자체로서의 하나님은 곧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틸리히는 인간의 실존의 상태를 소외(estrangement)로 본다. 모든 존재는 본질로부터 분리된 실존적 소외 가운데 있다. 모든 존재들이 소외 가운데 있으므로 그들은 소외로 인한 절망과 불안을 피할 수 없다. 틸리히는 예수 그리스도가 본질과 실존사이의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라고 주장한다. 즉 새로운 존재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소외상태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의 유일한 해결책이 되는 것이다.


바르트는 모든 피조물은 무(無)의 위협에 직면하여 속수무책이라고 말한다. 바르트의 무(無)는 틸리히의 비존재처럼 하나의 실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피조물은 단지 무(無)의 희생(prey)이 되거나 앞잡이(instrument)가 되고 만다. 무(無)는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성을 파괴시킨다. 바르트는 무(無)가 하나님을 화나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을 위협한다고 말한다. 단지 하나님만이 무(無)의 정복자가 된다.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무(無)의 위협을 극복하고 다스릴 수 있기에 무(無)의 정복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해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피조물들의 유일한 소망이 된다. 하나님께서 무(無)를 정복하는 방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이다. 즉 무(無)의 위협과 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극복되고 제거된다.


죠지 헨드리는 틸리히의 비존재의 이해는 비존재에 대한 충격을 틸리히 자신이 실존적으로 경험함으로 발생되었다고 말한다. 폴 리코르는 틸리히가 하나님의 악한 모습(the demonic aspect of the deity)을 주저하지 않고 말한다고 주장한다. 틸리히의 하나님은 절대적인 비존재이면서 악마적 속성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물론, 틸리히의 하나님은 그의 사랑의 표현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 표명(self-manifestation)을 함으로써 악마적 속성을 회복한다. 잉그램 서어는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이 죽음의 형태를 통해 위협적이고 파멸적인 무(無)를 설명하지만, 틸리히는 하이데거에 비해 비존재를 더욱 개인적이고도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존 랜달은 틸리히의 존재와 비존재의 관계성을 실존적 존재론으로 규정한다. 그는 틸리히의 존재론이 틸리히 자신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상황 속에서 나왔고 또한 그것들에 의해 제한된다는 면에서 가장 실존적이라고 주장한다.

 

바르트의 신학은 그의 목회적인 경험으로부터 나왔다. 로버트 샬라만은 바르트가 무(無)의 개념을 주제로 쓴 글은 개신교 목사로서 설교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바르트는 무(無)의 주제를 전개하면서 성서에 입각한 그의 정통주의적 신앙을 지키기 위해 매우 변증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존 캅은 바르트가 하나님의 개념에 쏠린 우리의 시선을 세상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실제적 사역으로 전환시켰다고 주장한다.


존 웹스터는 "죄는 무(無)이다"라는 바르트의 주장과 죄는 인간들이 하는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어리석은 주장을 혼돈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바르트의 무(無)는 무시해버리기에는 너무나 미묘한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진정한 무(無)는 하나님과 인간이 존재하는 것처럼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무(無)가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할 수도 없다. 무(無)는 인간의 자연적인 지식의 일부가 아니지만, 하나님이 결정적인 관계(critical relationship)에서 계시될 수 있는 것처럼 무(無)도 그 속성이 드러날 수 있다. 무(無)는 하나님의 왼손에 위치하며 하나님이 거부하는 곳, 즉 하나님이 원치 않는 의지에 그 근원을 둔다. 바르트의 무(無)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바르트의 변증법적 논증과, 그의 사상을 전개함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따르는 이중적인 심리(the ambivalence inherent)를 주지해야 한다.


틸리히와 바르트의 비존재 신학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비존재의 전체적인 구도를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절대적 비존재로서의 틸리히의 하나님은 존재와 비존재의 분리를 넘어서는, 초월하는 하나님이라는 면에 있어 헤겔의 하나님과 이어질 수 있다. 즉 헤겔과 틸리히의 하나님은 비존재의 위협을 수용할 뿐더러 초월한다. 즉 이들의 하나님은 그 자신 안에 악마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틸리히의 변증적 비존재는 인간에게 치명적인 위협을 준다는 면에서 바르트의 무(無)와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틸리히의 변증적 비존재는 절대적인 비존재로서의 하나님께 그 근거를 둔다는 면에서 바르트와 다르다. 왜냐하면 바르트의 무(無)는 전적으로 하나님과 구별될 뿐만 아니라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틸리히는 악의 기원을 비존재로서의 하나님께 두는 반면, 바르트는 악의 기원을 전적 타자로서의 하나님께 두지 않는다.


무(無)의 개념은 틸리히와 바르트의 존재론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우리는 무(無)의 개념을 통해 이 두 신학자의 존재론적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존재와 비존재, 유와 무, 인간과 하나님은 포괄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결국 이 두 신학자의 비존재 이해는 이들의 존재론, 신론, 기독론, 인간론, 구원론 그리고 악의 문제에 대한 이해로 이어진다.

III. 비존재에 관한 신학적 대화
이제 틸리히와 바르트가 비존재와 무(無)에 관하여 서로가 비평한 것들을 연결함 으로써 이들의 비존재의 신학을 신학적 대화로 정립하고자 한다. 이 두 신학자의 신학적 대화를 전개하면서 하나님, 존재, 비존재, 그리고 무에 대한 이들의 이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드러낼 것이다. 또한 이 두 신학자의 비존재 이해에 대한 생각의 발달 과정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 두 신학자의 비존재 이해를 헤겔의 무(無) 이해와 연관시키려 한다.


무(無)는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틸리히와 바르트는 무(無)를 부정적인 측면에서 이해한다. 틸리히는 존재에 대한 비존재의 위협과 공포를 주장한다. 바르트도 역시 피조물에 대한 무(無)의 위협과 하나님께 대한 무(無)의 저항(opposition)을 말한다. 바르트의 하나님은 무(無)의 정복자이며, 무(無)와는 전적으로 결별한 사이다. 그러나 틸리히의 하나님은 비존재와 긴밀하고 가까운 관계에 있으므로, 하나님은 존재에 대한 비존재의 위협을 해결하는 자가 된다.


틸리히는 비존재와 존재의 관계를 부정적으로 본다. 왜냐하면 존재에게 있어서 비존재는 전적인 위협과 공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존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배타적이지 않고 오히려 수용적인 관계다. 이런 측면에서 틸리히가, 비존재의 어두운 측면과 하나님의 거룩함 사이의 이원론적 구조를 넘어서려고 노력했음을 볼 수 있다. 포스트 모던 신학에 있어서 신학자가 이원론적 신학을 뛰어 넘는가 아니면 이원론적 신학에 머무는가는 최대의 관심사이다. 샐리 맥파그에 따르면, 포스트 모던 과학은 영혼과 육의 연합과 연속성을 가르친다. 맥파그는 주장한다:


포스트 모던 과학의 가장 중요한 발견중의 하나는 물질과 에너지의 사이의 연속성이다. 이는 삶과 죽음, 육과 영, 자연과 인간 등과 같은 전통적이고도 계급적인 이원론적 구조를 뒤집는 것이다. 뇌, 생각이나 혼과 같이 우리 자신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의 몸으로부터 파생된 것이고, 그것들은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일부인 마음이나 영혼을 좋아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이것의 기초이며 뿌리인 몸을 존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영혼과 육은 서로에게 속하여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몸과 영혼, 선과 악, 이 상반되는 양극을 하나로 묶음으로서 우리는 전통적인 이원론적 생각들을 제거할 수 있다. 몸과 영혼이 똑같은 뿌리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면 몸과 영혼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존재와 비존재가 같은 기원을 두고 있다면 이 둘은 결국 일치되는 것이다. 헤겔은, 존재와 비존재는 그 직접성(immediacy)에서 전적인 대조를 보이지만 결국 존재와 비존재는 하나라고 주장한다. 존재와 무(無)의 대조와 저항은 단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에 불과하다. 존재와 무(nothingness) 사이의 갈등은 변화과정(becoming)에 의해 해결된다. 존재와 무는 변화과정을 통해 과정 속으로 사라지면서 하나로 연합된다.


헤겔은 존재와 무가 변화과정을 통해 하나의 연합된 실체가 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존재와 무의 이원론적 구조를 넘어선다. 존재와 무의 상호 반작용은 구체적 실존체의 변화과정의 절차이다.
헤겔의 하나님은 스스로 결정짓고, 스스로 개별화하는 하나님이다. 이 점에 있어서 틸리히는, 헤겔이 비존재와 그 대립을 하나님의 자기 실현 과정 속으로 끌어들인다고 주장한다. 이 말은 비존재가 헤겔 철학의 중심에 서있음을 의미한다. 틸리히는 헤겔 철학의 전체 구조 속에서 비존재는 정복되고; 역사는 끝이 나고; 자유는 실제화되면서 그리스도의 역설은 그 역설적 특성을 잃게 된다고 주장한다. 헤겔의 철학 구조 안에서 비존재의 위협은 너무나 쉽게 정복되고 극복된다. 인간은 자신의 죄성이나 본질로부터의 소외로 인해 비존재로부터 위협이나 제한을 받지도 않는다. 이에 대해 틸리히는 비평한다:


실존은 논리적으로 필요한 본질의 실재(actuality)이다. 본질과 실존사이에 간격이나 급격한 변화는 없다. . . . 헤겔은 하나님은 본질과 실존을 넘어선다는 스콜라 철학을 우주에 적용하였기 때문에, 그는 고전적 본질주의자다. 본질과 실존사이의 간격은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극복될 뿐 아니라 인간 안에서도 역사적으로 극복된다. 세상은 하나님의 자기 실현의 과정이다. 본질이 실존을 통해 자기 실현을 할 때 본질과 실존 사이의 간격, 불안정, 모험성 그리고 본질의 자기 상실의 위험은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합리적이다'라는 헤겔의 유명한 진술은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어리석은 낙관론이 아니다. . . . 세계는 하나님 정신(the divine mind)의 자기 실현이고, 실존은 본질로부터의 타락이 아니라 본질의 표현이다.

 

사실, 이러한 헤겔의 비존재에 대한 긍정적 이해는 많은 실존주의자들로부터 반발을 일으켰다. 하나님 은총으로부터 타락한 인간이나 본질로부터 소외된 인간은 헤겔 철학 안에서 자주 간과되거나 무시되면서 인간의 존엄성은 그의 합리성을 통해 신적인 경지(a divine state)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논리는 모든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 강력한 도전이다. 왜냐하면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의 실존상황을 죄성의 상태(a state of sinfulness) 혹은 본질로부터의 소외(estrangement) 상태로 보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변증신학은 하나님의 정의(justice)와 신정론(theodicy)을 변호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선과 악의 이원론적 특성을 피할 수 없다. 바르트에 의하면, 무(nothingness)는 하나님과 피조물 모두에게 원수(the enemy)가 된다. 하나님만이 무를 알고 통제하며 극복하고 제압할 수 있기에 무의 정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관할 문제인 것이다. 피조물은 단지 무의 희생물(the prey)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무의 실재를 거부한다. 이러한 바르트의 이원론적 비존재 이해는 죄와 악을 거룩한 하나님과 분리하는 성서적 전통, 특별히 요한복음적 전통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헤겔에 의하면, 동일한 근원 속에서 나온 선과 악은 일치한다. 헤겔은 악을 그저 추상적으로, 즉 하나님의 반대편, 유한한 것, 부정적인 것으로 보면서 하나님을 악의 반대편, 선한 것, 긍정적인 것, 진실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헤겔은 악의 개념을 단지 추상적으로 받아들인다. 악은 단지 선과의 상반 관계에 있을 뿐이다. 악이 전적으로 선과 상반될지라도 사실 선과 악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을 악과는 전혀 관계없는 악의 반대편, 즉 선의 자리에 놓으려는 노력은 쓸데없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러한 헤겔의 선과 악의 개념은 인간 역사 속에서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주장하면서 헤겔의 선과 악의 개념을 강력히 거부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헤겔의 선과 악의 개념은 쉴라이에르마허의 견해와 일치한다. 바르트는 헤겔의 죄론과 쉴라이에르마허의 그것은 단지 그들의 상상력에 의한 창의적인 생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죄와 악을 부정하는 헤겔과 쉴라이에르마허의 사상은 정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와 악이 이 세상에 실존하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이러한 논리로 헤겔과 쉴라이에르마허의 인간의 죄에 대한 주장의 정당성과 진실성을 의심한다. 바르트는 주장한다:


브래트쉬나이더와 헤겔에게 있어서, 죄의 필연성은 성립된다. 죄의 모든 부정적인 특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죄는 긍정적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죄가 진정한 죄인가? 쉴라이에르마허의 주장처럼 제 위치가 없는 죄가 인간 실존 속에서 최종적 단계(a definite stage)에 속하게 되고 또한 최종적 단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으로부터 의도되고 파생되는 죄를 진정한 죄라고 말할 수 있는가? 반대로, 죄와 연관되어 언급되는 은총, 죄와의 대립을 통해 살아나는 은총을 진정한 은총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악과 함께 존재하는 선이 하나님의 선인가? 우리가 현실적인 역사, 현실적 충돌과 알력, 죄와 은총사이의 결단을 언급할 필요가 없는 곳에서 진정한 죄와 은총을 말할 수 있는가? 모든 신학적 지식의 근원으로서 쉴라이에르마허가 선택하고 단정을 내린 기독교의 의식(Christian consciousness)의 영역에는 진정한 죄와 진정한 은총이 있을 공간이 없다.

 

물론 헤겔이 역사를 과거, 현재, 미래 안에서 인간의 행복을 위한 장소로 인식하지 않았음을 틸리히는 인정한다. 그러나 왜곡된 세속사(distorted temporality)를 포함하는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 최종적이고 완전한 역사 해석을 주기 위한 헤겔의 시도는 실패라고 틸리히는 말한다.


헤겔은 현상(appearance)과 실존(existence)이 두 가지 다른 종류의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이 둘을 그들의 기원적인 관점에서 보게 되면 이 둘 사이의 대립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관점으로 선과 악을 구별짓는 것은 매우 어렵다. 사람의 시각에서 선하게 보이는 것이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악하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선과 악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고 이 둘 사이의 대립과 적대감이 영적인 세계(the supersensible world)에서 실제가 아니라면, 악은 무의미한 것이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즉 악은 텅 빈 무(a hollow nothingness)인 것이다. 여기에서 무로서의 악은 선과의 상이성(otherness)을 상실한다. 왜냐하면 악과 선의 충돌이 아무런 불안(anxiety)을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파괴성이 없는 무기력한 악은 선과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한다. 이러한 면에서 헤겔의 악의 개념은 무(nothingness)이며 비존재(non-being)이다. 일치와 조화의 하나님이 무한한 중재로서 다스리는 영적인 세계에서는 선과 악의 외형적이며 현상적인 충돌은 극복되고 제거된다. 악은 더 이상 의도적인 선과 충돌하거나 대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헤겔과는 달리, 바르트에게 있어서 무로서의 악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악은 하나님께서 섭리하는 대상들 중에 따돌림 받는 대상이다. 무로서의 악은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들과는 어떤 공통점도 갖고 있지 않다. 바르트에게 악은 어떠한 실재인 것이다. 악은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과의 관계를 파괴시킨다. 악은 피조물을 통하여 하나님께 공격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무를 원수로 다루시고 또한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게 발표한 전적인 부정(the No)으로 다루신다. 여기서 바르트의 하나님은 헤겔의 하나님과 전적으로 다름을 알 수 있다. 바르트는 헤겔의 하나님이 너무 관념적이고 환상적이라는 주장 아래 그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정한다. 바르트는 헤겔의 창조와 죄 사이에 깨어지지 않은 연속성이 결국 하나님을 악의 근원지나 원인 제공자로 만든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제 더 높은 수준에 올라가서 위대한 헤겔을 조사할 것이다. 헤겔은 1821년에 절대적 종교라는 제목아래 종교철학에 관한 강의들을 하였다. 그는 강의들 가운데 세 번째 부분에서 성부의 왕국, 성자의 왕국, 성령의 왕국이라는 표제들로 구성된 기독교 교리를 발전시켰다. 처음에는 성자의 왕국이라는 제목아래 창조, 인간과 죄, 다음에는 신-인인 사람(the God-man)과 속죄론을 다루었다. 성자의 왕국에서 다루어지는 죄론을 볼 때, 우리는 마치 그것에 주의를 집중해야 할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게 된다. 그의 죄론은 신-인론과 속죄론을 앞서기 때문에 죄론에서 신-인론과 속죄론이 나오지 않는다. 헤겔에게 있어, 하나님은 절대 관념, 절대 정신, 절대 진리와 일치하고 또한 절대 정신의 유한한 양식으로서 인간의 사고에서 생성되는 변증적 운동(dialectical movement)과도 일치한다. 성부는 영원하고도 포괄적이며 총체적인 보편성(generality)이다. 성자는 현상(phenomenon)의 영원한 특이성(particularity)이다. 성령은 대립의 조화(the unity of antithesis)인 순수 지식에로의 복귀, 즉 자기 자신에게로의 복귀이다. 다시 말하면, 성부는 직접성에서 객관성으로 움직이는 사고의 운동(the movement of thought)이다. 성자는 감상(reflection)과 표상(presentation)의 매개(mediacy)로의 사고의 전환이다. 성령은 사고의 순환(the circle of thought)이 처음부터 시작되고 또 다시 시작되는 순환을 가능케 하는 개체(individuality)이다.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창조, 죄, 속죄는 유한한 정신 순환의 역사 속에서 필요한 세 순간들(the three necessary moments)이다. 유한한 정신 순환의 역사 그 자체가 절대 정신의 과정 중 중추적 순간인데,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전환점을 발견하게 되고 바로 이때에 하나님은 그 자신 밖에서 최고의 존재에 도달하게 된다.(ed. Lasson, p.95). 첫 번째 경우에 유한한 정신으로서의 영은 자연의 정신이다. . . . 자연의 정신은 그 자체로는 좋지만, 단지 이름만으로 좋은 것이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p.114). 그러나 자연의 정신은 자신을 단순한 의지에서 사고로 끌어올리며, 자신의 악함 가운데서 무한한 부정(contradiction)과 대립(antithesis)함으로 자신 안에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그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는 자유의 영이다(p.112). 자연의 영은 자신을 악해서는 안 되는 존재로 간주하면서 그 자신을 악으로 가정한다(p.106). "악의 제거, 즉 정신의 자기 자신에로의 영원한 복귀, 정신의 자기 자신과의 화해가 시작된다." 악의 근원, 즉 인간이 들이키는 죽음과 파멸의 독이 들어있는 컵도, 화해와 건강의 근원도 똑같은 논리이다(p.96). 병도 주고 약도 주는 것은 하나의 똑같은 지식이다. 그래서 상처(병) 아니면 악 그 자체(헤겔이 보기에)는 필연적인 순간적 전환점이거나 좀 긴 전환점이다. 물론 파멸은 자명한 것이다(p.105) 요약하면 창조와 죄 그리고 죄와 속죄사이에 깨지지 않는 연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헤겔의 무개념과 바르트의 무개념이 커다란 차이점을 보이는 것은 이 두 사람의 신학적 배경이, 혹은 신학적 접근 방법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헤겔의 무개념은 합리적이고도 관념적인 형이상학에 기초하는 반면 바르트의 무개념은 고전적이고 성서적인 정통주의 신학에 기초한다. 틸리히는 헤겔의 철학이 변증적 방법과 비평적 요소사이에 균형을 잃었기 때문에 용납하기 어려운 형이상학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헤겔의 변증적 방법이 비평적 요소를 포함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철학이 의미적 실체(the meaning-reality)로부터 의미의 원리들을 발췌하는 한 이것은 비평적인 것이다. 철학이 의미의 원리들을 서로에게 조직적으로 연결시킨다면 이것은 변증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방법은 하나이다. 비평적 방법은 항상 변증적인 것이다. . . . 그리고 변증적인 방법은 필연적으로 비평적이다. 왜냐하면 의미의 필연적 상호연결(a necessary interconnection)은 의미적 실체 그 자체 안에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의미의 원리들의 조직 안에서만 보여지기 때문이다. . . . 변증적 방법이 비평적 요소를 잊어버릴 때 이러한 존재와 역사에 관한 형이상학은 용납될 수 없게 된다(예를 들어, 헤겔의 철학처럼). . . . 형이상학적이고 합리적인 방법(the metalogical method)은 비평적이고 변증적인 방법에 기초한다. . . . 이 방법은 형식과 의미 사이의 무한한 긴장을 알기 때문에 헤겔의 변증법이나 쉘링의 자연 체계의 방법으로 의미의 대상들을 이해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실제적인 모든 것의 무한성에 대한 인식은 이러한 시도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 틸리히는 헤겔의 철학이 너무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실존의 공포와 두려움의 경험을 보여주지 못함을 비판한다. 폴 리코르는 헤겔의 선과 악의 구조가 비탄(lamentation)으로서의 고난(suffering)을 포함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한다. 인간 진퇴양란의 실존적 상황(the human dilemma)을 뛰어 넘는 부정성(negativity)의 증가는 고난의 치욕스러움을 축소시키고 약화시킴으로써 고난의 굴욕적 측면을 무시하게 한다. 더 나아가 고난의 치욕스러움은 희생양인 인간들에게 배정된 도움의 구조(relief)를 위한 모순들의 조정(the reconciliation of contradictions)으로 대체되고 이로 인해 고난의 치욕스러움은 제거된다.


악은 선과 조화로운 관계에 있다는 헤겔의 주장은 성서의 원죄론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악의 기원이라는 논리로 이어져서 헤겔은 비난당함을 면치 못하게 된다. 인간의 고난, 파국, 자멸과 연결된 인간의 죄성과 타락이 당면한 문제점에 대해 헤겔은 답변해야 한다. 좀 더 나아가, 정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주의 깊게 다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성과 타락을 시인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실제적이기 때문이다.


바르트가 하나의 실체인 악이 하나님과 피조물에게 적대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리코르는 바르트의 신학을 깨어진 신학(broken theology)이라고 부른다. 역사 속의 인간 비극과 곤궁의 현상을 표현하는 데에 헤겔의 자신 만만한 변증법적 철학보다는 바르트의 깨어진 변증법적 신학이 더욱 현실적이고 진실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바르트는 기독교 신자의 믿음의 입장에서 보면 죄의 실체가 인류의 일상생활 속에서 드러나고, 또한 죄된 생활 속에서 스스로 변명하며 자위하는 개인의 삶 속에서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틸리히는 바르트의 배타적인 유일신론이 헤겔의 범신론의 문제점을 부분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틸리히는 배타적 유일신론의 하나님이 철학적 실재론(philosophical realism)이 다루는 실체와 분리되기 때문에 배타적 유일신론은 신론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신론의 하나님처럼 하나의 경계선상의 개념으로 단순히 실체의 구석에 밀려난다는 주장을 통해 바르트 신학의 한계성을 지적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르트가 하나님의 초월성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한 것이 하나님을 그의 창조물로부터 분리하게 된다는 사실을 틸리히가 지적한 것이다.


리코르에 따르면,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은 회복될 수 없도록 깨어진 자신의 상태를 인정해야 한다. 즉 리코르는 바르트가 무의 실체를 하나님의 왼손(바르트에 있어 하나님의 오른손은 선택, 왼손은 거절하는 손이다)에 두는 것을 깨어진 틈(breach)으로 보면서 바르트의 변증법의 모순을 지적한다.


헤겔의 선과 악의 이해는 바르트와는 달리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으면서 매우 논리적이고 우리의 이성에 쉽게 용납되는 것처럼 보인다. 헤겔에 있어 무(nothingness)인 죽음은 생명의 종말이 아니라 삶의 부분이다. 즉 삶과 죽음은 단일체이다. 죽음은 허무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성장과정에서 하나의 중요한 단계이다. 죽음을 통해 개체는 그의 원래적 존재로 돌아간다. 결과적으로 삶과 죽음을 통해 모든 생명은 온전한 삶을 이루게 된다. 더 나아가 삶과 죽음은 성령 안에서의 멈추지 않는 반복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결단코 쉬지 않고 항상 앞으로 전진하며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임 없이 반복되는 되풀이나 순환을 그 본성으로 삼는 헤겔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르트는 강력하게 부인한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진정한 하나님은 순환도 아니고 영원히 되풀이되는 코스(a way of eternal recurrence)도 아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길, 즉 진정한 하나님의 길은 그 끝이 계속해서 새롭게 시작되는 순환이 아니고, 영원한 반복의 길도 아니다. 긍정과 부정, 은총과 심판, 삶과 죽음사이에서 끊임없이 반복하거나 영원히 떠돌아다닐 것을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신화적인 방법이다.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길에 대한 복음을 신화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심지어 키에르케고르나 루터 자신의 이름으로도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순환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바르트의 죽음에 관한 이해는 헤겔의 이해와 전적으로 다르다. 바르트는 죽음을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발생된 고통으로 이해한다. 죽음은 생명의 자연스런 결말이 아니다. 더 나아가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인 것이다. 죄로 인해 죽음이 온 것이다. 타락 이후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 사이의 교제나 교통은 단절되었다. 무로서의 죽음은 하나님과 피조물이 서로 교제하는 것을 막는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큰 간격이다. 이러한 바르트의 죽음에 관한 이해는 성서적이고 복음주의적인 것이다. 바르트의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인간과는 다르며, 전적으로 초월적인 분이다. 이에 반해 헤겔의 하나님은 현저하게 인간 안에 내재한다. 이런 면에서 바르트의 하나님과 헤겔의 하나님은 양립할 수 없다.


절대적 비존재로서의 틸리히의 하나님은 악마적 속성을 지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사랑의 속성을 드러냄으로 악마적 속성을 중재한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를 인식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궁극적 멸망의 위협으로 느껴진다. 하나님의 얼굴은 악마적 속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하나님과 화해를 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분노의 경험이 진짜이지만, 이 경험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화해한 경험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경험은 오히려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도록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사랑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스스로 자멸하게 하며, 이들에 대항하여 선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항하는 사람들은 자멸하게 되는데, 이는 하나님이 멸망당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것만이 하나님의 사랑이 거절한 사람들 가운데 역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비록 이러한 자멸을 경험한 사람은 그 자신이 위협을 느끼게 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 스스로 멸망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은 그 자신의 속성에 따라 역사하게 된다. 자멸을 경험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분노의 하나님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것은 예비적인 조건으로는 바르게 인식한 것이지만 궁극적인 조건으로는 옳지 않게 인식한 것이다. 그러나 분노의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 경험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는 이론적 지식은 존재에게 위협으로 다가서는 하나님의 실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단지 위협을 없앤다. 단지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분노의 하나님으로서의 이미지를 궁극적으로 유효한 사랑의 하나님의 이미지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버어논 멜로는 "존재 그 자체의 깊이 속에서 존재와 비존재의 일치는 신적인 것(the divine)이다"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의미는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악조차 선한 목적으로 사용되어진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악과 연관된 모든 문제들의 해답은 하나님이 된다. 한시적이고 유한한 시간 속에서 악에 대한 문제는 의문스러운 난제이다. 그러나 악은 영원 속에서 하나님에 의해 극복되고 다스려진다. 결과적으로 틸리히의 악은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구현되고 또한 함께 결합된다.


악마는 단지 하나님의 신성(divinity) 앞에서 무너지고, 마귀에 사로잡힌 상태는 은총의 상태 앞에서, 파괴적인 것은 속죄적 운명 앞에서 무너진다. . . .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악은 영원 속에서 극복된다는 사실, 즉 영원 속에서 악은 하나님의 깊음 속에 있고 하나님의 청명(clarity)과 일치한다. 과거나 미래의 어떤 시각으로도 악을 극복할 수 없고, 단지 영원의 시각에서만 우리는 악의 극복을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틸리히는 악을 최상의 선을 위한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멜로우는 틸리히가 죄와 악에 대한 실제적 책임성을 인간보다는 하나님에게 돌리는 것 같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면에서 틸리히의 악의 개념은 바르트의 악의 개념과 완전히 다르다. 바르트의 악은 하나님과 피조물 모두와 성질이 전적으로 다르고 구별되는 실체인 것에 반하여, 틸리히의 악은 초월적이면서 동시에 내재적인 하나님과 내적으로 교통하는 상호 우호적이며 수용적인 관계에 있다. 로버트 카터는 틸리히의 존재 그 자체로서의 하나님은 존재와 비존재 모두를 포용하기 때문에 존재와 비존재의 이원론적 구조를 초월한다고 주장한다. 틸리히의 하나님은 창조물을 통해 자신을 구현하지만 그의 창조물과는 전적으로 구별되는 초월적 존재이다.

 

바르트는 절대적 비존재로서의 틸리히의 하나님을 강력히 부정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절대적 비존재로 인정해 버리게 되면 결국 하나님이 세상 속에 실재하는 악과 죄에 대해 원인 제공자로 간주되며 이 악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존 맥도웰은 악과 죄가 함께 작용하여 하나의 온전한 조직이 되고 이 조직 안에서 두 실체가 필연적이고 심지어는 선한 것으로 간주되는 현대적 신정론(modern theodicies)을 바르트가 거절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바르트가 틸리히의 신학을 비성서적이고도 이단적인 신학들 중의 하나로 생각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이다. 바르트는 주장한다:


우리가 성경으로 아리우스나 펠라기우스, 트렌트 공회나 Servetus, 쉴라이에르마허나 틸리히를 직접적으로 반박할 수 있었던 것이나, 반박할 수 있는 것에는 중요한 방식이 없다. 이것은 마치 이들의 오류들이 이미 거기(totodem syllabies et literis)에서 밝혀진 것과 같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각 시대들의 모든 독특한 관심을 거기에서 공언하였고 그것에 맞는 결단을 보여주었던 것과 같다. 각 시대의 독특한 관심들 속에서 교리적 결정을 위하여 우리의 원수가 인위적이고 비신학적으로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주장하고 있는 것을 각 시대마다 새롭게 발견되는 성경의 원리로부터 확증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

 

틸리히에 대한 바르트의 이러한 거친 처우에 대해 틸리히는 어떤 반응을 했을까? 틸리히가 "사람들이 수용하든지 말든지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사람들 머리에 돌을 던지듯 내던져진 진리로인 마귀적 절대주의"를 언급한 것은 바르트의 비타협적이고 배타적인 신학을 가리킨 것 같다. 틸리히는 바르트의 케리그마적 신학이 그 배타적 초월성을 포기하고 그 시대적 상황에 의해 발생한 문제점들을 답하기 위해 변증신학의 시도를 심각하게 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바르트의 신학을 비판한다.


샬라만은 틸리히와 바르트의 악에 관한 이해의 신학적 차이점을 적절하게 묘사한다:
만약 바르트에게 있어 하나님의 이름이 허무주의와 초자연주의 사이의 길로 이끄는 무에 대한 부정(the no to nothing)이라면 틸리히의 절대자에 대한 상징은 그 자체 속에 무를 포함한다. . . . 하나님은 상징으로서, 자기 부정이거나 마귀적이다. 또한 상징 안에서, 상징과 함께 나타나는 하나님이 가진 상징의 부정적 측면, 즉 마귀적인 역량을 알 때만 그것이 알려진다. 바르트의 신학은 이미 과거에 속해있는 부정(the negative)을 자유롭게 무시하는 한편 틸리히의 신학은 그렇지 않다라고 말할 수 있다.

 

틸리히의 하나님은 절대적 비존재이기 때문에 그 자신 안에 마귀적 속성을 지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사랑인 동시에 악이라는 주장은 모순되게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악의 속성을 품는 틸리히의 하나님에 대해 버르논 멜로우는 비평한다:
거룩한 사랑이 기독교 계시 안에서 특징지어지는 도덕적 내용을 간직하고 있다면 신성적인 것과 마귀적인 것은 상호간의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대항하는 마귀적 반란에 동참하지 않는다. 만약에 하나님이 마귀적 특성을 받아들인다면 이와 똑같은 마귀적 특성을 드러내는 인간들에게 책임을 추궁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틸리히의 견해의 주요한 결점이다. 즉 틸리히는 하나님과 악사이의 관계성이 상호 수용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 배타적 관계라는 사실을 보지 못했다. 모든 것을 수용하고 품는 하나님 안에 종속적인 요소로서 악을 포함시킴으로써 악의 문제를 해결 지으려는 것은 실제로 마귀에게 승리를 안겨주는 셈이 된다. 왜냐하면 이로 인해 하나님의 도덕적으로 완전한 거룩함이 깨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하나님과 악에 대한 바르트의 이원론적 사고구조는 악의 실재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을 설명하는데 있어 매우 필연적으로 보인다. 바르트의 하나님은 창조 안에 내재하지 않고 창조를 전적으로 초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무를 대할 때 배타적인 것은 당연하다. 사실 '존재 그 자체'라는 틸리히의 표현은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한 비유(metaphor)다. 존재 그 자체로서의 틸리히의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성부 하나님은 창조적인 힘으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하는 사랑으로, 성령은 무아지경의 변형(ecstatic transformation)으로 표현된다.

 

삼위일체의 상징들은 하나님의 삶, 즉 분리와 재결합의 순간들에 대한 변증적 논리-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하나님의 영원한 진행과정을 보여준다. 바르트의 하나님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성부 하나님은 창조자이며 존재와 무를 다스리는 최고의 신이다. 무와 맞서기 위해 하나님 자신이 피조물이 된다. 자신의 백성을 속죄하기 위해 피조물이 된 하나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행위로 인해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과의 관계는 더 이상 무로 인하여 붕괴되지 않는다. 틸리히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초월적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창조 안에 내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비존재로서의 하나님은 자신 안에 마귀적 속성을 지닌다. 이와는 달리 바르트의 하나님은 전적 타자로서 초월하신 하나님이기에 자신의 창조 안에 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바르트의 하나님은 무의 원수가 되며, 악의 속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게 된다.


샬라만은 틸리히 신학과 바르트의 신학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신성과 실존의 심판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명제들이라는 주장은 초기 바르트와 틸리히의 공통된 의견이다. 바르트는 계시된 하나님에 의해서 종교를 부정함으로 이 주장을 구체화하고, 틸리히는 실제적 종교 안에 있는 절대성의 원리에 따라 신학의 하나님을 부정함으로써 이 주장을 구체화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이들의 차이점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종교적 질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부정이고, 틸리히에게 있어서 구체적 종교들 속에 담겨져 있는 종교의 원리는 하나님에 관한 신학적 개념의 부정이다.

 

전에 언급한 것처럼, 틸리히와 바르트는 초기에 서로 협력자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틸리히는 바르트의 로마서주석에 나타난 새로운 변증법적 신학을 자신의 신학에 연결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같은 노선의 신학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서로간의 신학적 입장이 현저하게 차이가 남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바르트는 틸리히의 상징의 사용을 용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상징은 기독교의 믿음을 희석시킬 뿐만 아니라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부다, 이들 안에 무조건적으로 초월적인 것이 보여지는 한 이들은 상징이다"라고 말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Relig. Verwirkl., 1930, p.104)는 틸리히의 주장을 바르트가 용납할 리는 만무하다. 틸리히가 사용하는 상징들 중에 기독론적 상징은 바르트가 가장 꺼리는 것이다. 바르트는 틸리히가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너무 과도한 영향을 받았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틸리히는 더 이상 구제 받을 수 없는 사상의 역사학자이며 교회에 대항하는 불쾌한 자유주의 신학의 상속자다. (그리고 이것은 점차 더욱 심해질 것같이 보인다). 반면에 그는 나를 자극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나의 교리학에 나타난 변증법적 운동의 최종적 초자연적인 단계에 항의하기를 시도했다. 그러기 위해서 전쟁 후에 곧바로 뒤따르는 가짜 종말론적 상황을 이용해서 자신의 신학을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형성해 나갔다(Rel. Verwirkl., 1930, p. 20). 라가즈와 틸리히, 두 신학자는 그들의 신학적 활동을 역동적으로 생각하면서 나의 활동을 움직임이 없는 정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 . 이에 대해 내가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바르트는 그의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의 개념을 대부분 문자적 의미로 받아들인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르트의 '말씀하심(speaking)'은 틸리히가 사용하는 상징과는 다르다. 그가 말하는 '말씀하심(speaking)'은 무엇인가 성질이 다르거나 이색적인 것을 표현하기 위해 그것의 상징적인 의미를 파악해서 선택한 호칭이나 묘사와는 다른 것이다. 인간의 불완전함과 파괴된 관계성 때문에 인간의 진술이나 묘사는 하나님의 말씀의 속성과 일치할 수 없다.

 

이런 면에서 틸리히는 바르트의 신학을 기계적으로 성경을 오용한 전통, 즉 왜곡된 전통에 대항하여 성경과 전통 속에서 영원한 메시지를 재발견하고 또한 상황에 따른 변화무쌍한 요구에 대항하여 메시지의 변치 않는 진리를 강조하는 말씀선포의 신학이라 부른다. 또한 틸리히는 바르트의 말씀선포의 신학을 자기 도전적 신학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바르트의 말씀선포의 신학이 신학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의 확대된 교리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틸리히에 의하면 바르트는 신과 인간과의 어떤 종류의 상호관계도 용납치 않는다. 왜냐하면 이로 인해 하나님으로 하여금 부분적으로라도 인간을 의지하도록 만들게 되는 것을 바르트가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틸리히가 비판한다. 부쉬는 이 두 신학의 거장들의 신학적 차이점을 말한다.


이 두 신학자 사이의 논쟁은 외형상으로는 역설의 개념에 대한 문제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신학에 있어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것이다. . . . 틸리히에게 그리스도는 언제나 어디서나 현존하며 알려질 수 있는 계시의 상징이다. 그러나 바르트에게 있어서 계시는 하나의 특별한 사건으로서 단지 하나님에 의해서만 계시되고 우리는 우리에게 계시되는 만큼만 알 수 있다.

샬라만은 틸리히의 하나님은 종교적인 상징의 개념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하나의 상징으로서의 틸리히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기독교의 전통적이고 성서적인 하나님의 개념을 약화시킬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바르트는 하나님에 대한 틸리히의 상징적 표현을 거부한다. 즉 바르트는 전통적이고 성서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을 틸리히의 종교적 상징이 주는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려고 한다. 결과적으로 절대적 무로서의 틸리히의 하나님은 헤겔의 하나님과 상당히 흡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틸리히와 헤겔의 하나님은 본질과 실존을 품으며 초월하는 하나님이며, 자신의 속성 안에 비존재의 위협을 포함하면서 동시에 초월한다. 즉 이들의 하나님은 그 자신 안에 마귀적 속성을 갖는다.


반면에 틸리히의 변증적인 비존재는 바르트의 무의 개념과 매우 비슷하다. 왜냐하면 틸리히와 바르트, 이 두 신학자는 인간들에 대한 비존재의 위협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반면 틸리히의 변증적 비존재는 절대적 비존재인 하나님으로부터 파생되었고, 바르트의 무는 그의 하나님과 전적으로 구별되며 별개의 것이라는 사실이 이 두 신학자의 비존재 이해에 대한 차이점이다.

IV. 나가는 말
무/비존재의 개념은 틸리히와 바르트의 존재론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다시 말해서 이 두 신학자의 비존재 개념을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이들의 신론, 기독론, 인간론, 구원론 및 악의 문제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좀 더 쉽게 이해하게 된다. 논자는 틸리히의 비존재 개념을 연구함으로 그의 철학적 신학이 철학과 신학사이의 간격을 중재할 수 있는 중재자적 신학임을 제시하였다. 동시에 바르트의 성서적이고도 정통주의적인 비존재 이해가 기독교 신앙을 지키는데 매우 중요함을 밝혔다. 즉 바르트의 비존재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무시와 경시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지키려는 신학적 시도임을 보여주려 하였다.

 

더 나아가 이들의 비존재에 관한 신학적 대화에 헤겔의 무의 개념을 연관시키면서 틸리히와 바르트의 신학적인 유사점과 차이점을 분명하게 드러내려 하였다. 또한 헤겔의 철학이 틸리히와 바르트의 신학의 기초가 됨을, 그리고 틸리히의 종교철학적 신학이 헤겔과 바르트의 양극적 비존재 이해에 중재자로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밝히려 하였다. 결과적으로 바르트의 무의 신학은 피조물과 창조주에 대한 무의 위협을 가장 강력하게 부정하는 성서적인 신학이다. 헤겔의 무의 철학에 의해 암시되어지는 허무주의는 바르트의 성서적인 무의 신학에 의해 극복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바르트는 자신의 신학이 지닌 지나치게 이원론적인 면을 극복해야 한다는 과제를 가진다.

 

그래서 그의 변증법적인 신학이 포스트 마던 신학과 과학이 그의 신학에 대해 지적하는 이원론적인 비판을 다시 한번 새롭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틸리히의 철학적 신학이 이에 대한 대안이 될 수도 있다고 논자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틸리히에게 있어 선과 악은 그의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포함되어지면서 동시에 초월되어 지기 때문이다. 성부 하나님에 내재된 악은 성자 예수를 통해서 회복되어지며 영원히 극복되어진다. 그러나 틸리히의 하나님은 상징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바르트의 성서적이며 비상징적인 하나님에 비해 현대철학과 신학의 산물인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에는 역부족 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사실은 틸리히와 바르트의 비존재 신학 모두 다 비존재의 위협에 대해 틸리히는 새로운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가, 바르트는 화해자로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해답이라는 점에서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실존적으로 받아들이는 신학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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