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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회심

복음과 부흥과 참된 회심 세션 2 (P1, P2, P3) 엡4:1

by 【고동엽】 2024. 12. 31.

복음과 부흥과 참된 회심 세션 2    (P1, P2, P3)                  엡4:1                       출처

Truth of the Gospel Conference session 2  

 

로마서 12장을 펴주시기 바랍니다.

1-2절입니다. 바울은 기록하기를

 

"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1)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12:2)

 

이 본문에서는 여러분이 주목하셨으면 하는 점이 있습니다.

 

사탄은 거짓말쟁이입니다. 하지만 욥기에서

그가 하는 한 마디 말은 진리를 내포합니다.

 

            

예를 들면, 악당은 사람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그의 집, 그의 차, 모든 은행 계좌, 모든 그의 물건들과

그밖에 모든 것들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그 일들은 그에게 타격을 주겠지만, 그러나 그의 몸을

건드리는 것만큼의 타격은 아닙니다. (욥2:4-5 참고)

 

당신이 어떤 사람에게 그의 생명을 포기하라고 요구할 때,

당신은 그에게 그가 가진 귀한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소진되면 다시 대체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우리를 부르고 있는 바입니다.

그가 말씀하는 것을 보십시오,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롬12:1)

 

그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 전부를 그리스도께,

하나님께 하나님의 나라에 바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본문의 맨 첫 부분에서 이렇게

말하며 시작합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것은 아주아주 중요합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이 설교를 들을 때, 혹은 여러분이 설교자라면,

설교자에게서 비범한 열정 같은 것을 보게 된다면,

원래 그런 비범한 열정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우리가 사람들 앞에 설 때 우리는 사소한 주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소하거나 시시한 일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생명과 사망, 천국과 지옥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전30:19 참고)

 

우리가 당신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권면할 때,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당신에게 권면하고 있다면,

설교자는 당신의 이번 생애 뿐만 아니라 온 영원에

영향을 주는 무언가를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당신에게 회개하십시오.

천국이 가까이 욌습니다"라고 외칠 때,

순종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고, 거부하는 것은 지옥에

가서 온 영혼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노 아래 보내는 것입니다.

 

         

즉 바울이 당신에게 '당신의 삶을 그분께 드리십시오'

라고 할 때 어떤 친절한 제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것이 우리 삶의 새로운 실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모든 것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려면

당신의 삶을 스스로 쥐고 있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며,

당신의 삶을 당신을 위해 사는 것은 비합리적인 일입니다.

 

당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려야만 합니다.

당신이 가진 가장 귀중한 것을 그분께 드려야 합니다.

바로 (너희 몸) 그것을 그분께 드려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하라고 우리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하라고 우리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동기를 어디서 찾습니까?

 

         

▲바울이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제가 반복해서 얘기할 때

여러분 대부분은 진심으로 동의하실 겁니다.

           

따라서 이것이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그렇지만 제가 어디서 그 동기를 찾느냐는 겁니다.

           

제가 어디서 (그 목숨을 바칠) 원동력을 얻겠습니까?

우리가 롬12:1절을 순종한 능력을 과연 어디서 얻겠습니까?

(답을 미리 말씀드리면, 복음에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깊이 알면..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도록 자원하게 됩니다) 

           

제가 어디서

끝까지 견디며 계속적인

열정을 얻어 매일 제 삶을 내려놓고

매일 그분을 따르며, 매일 주님을 알기에 힘쓰고

더 유익한 그분의 종이 되기에 힘 쓸 수 있습니까?

    

▲'폴 형제님, 저는 우리가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데 동의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게 그렇게 할 능력과 동기, 의지력이 없음을 봅니다.

           

그런 분들께, 제 말을 간단히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이죠?

저는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저는 그래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것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설교자가 할 수 있는 끔찍한 말은 당신에게

'당신은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라고 말하고는

그리고 나서 하나님을 향한 더 큰 사랑을

어떻게 얻는지 말해주지 않는 겁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롬12:1)

 

우리가 할 일은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서두에 이것은 욥의 시련과 같은 혹독한 것이 될 수도 있다고 설명드렸습니다)

     

그것을 기꺼이 드리는 마음의 근본 동기는 어디에서 옵니까?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써" 입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당신이 더욱 깨닫고 이해할수록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의 깊이를 더욱 알게 될수록

그분께 당신의 삶을 산 제물로 드리도록

더욱 동기부여가 되며 힘을 얻을 것입니다.

    

당신이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에 계시된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더 이해할수록

 

그분께 대한 당신의 헌신과 당신의 삶을 그분을 위해 내려놓음에 있어

실제로 성장할 힘을 더욱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롬12:1),       

 

이 말씀을 이해할 때, 당신은 자신을 그리스도께 드리지 않을 수 없고

그분을  따를 수 밖에 없었던 사도 바울처럼 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아주 중요한 점을 보셨으면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반드시 해야 합니까?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기 위한 동기를 어디서 찾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드러난 하나님의 자비의

깊이를 알고 그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자라감으로써입니다.

 

       

이 단어, "그러므로", 이 짧은 접속사는 단연 필수적입니다.

이 본문에서 바울이 하고 있는 일이 이것이기 때문인데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롬12:1a)

 

여기서 말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여러분을 위해

로마서의 앞선 11장에서 정의되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11장에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해 여러분에게 나누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행하신 이 사역의 위대함에 기반하여,

이제 당신이 당신의 삶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기를 바랍니다.' 

  

▲이런 방식은 바울에게 아주 일반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에베소서 4장에서도 아주 똑같은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의  1~3장에서는

성경에서 가장 깊은 신학이 다뤄집니다.

 

구원 경륜의 심오함이 어디 있는지 알고 싶으시다면

에베소서 1장, 2장, 3장을 보십시오.

단연 아주 놀랍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서 1장을 어떻게 시작합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과

모든 것이 그분의 아들 안에서 임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는데요

"성자 예수님 밖에서 당신에겐 아무것도 없지만

성자 예수님 안에서 당신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이 아니면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예수님안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하나님이시고

당신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영원한 삶,

내내 다 발견할 수도 없을 그 모든 자비

하나님의 그 모든 자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에베소서 1~3장에서 말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4장에 이르러 바울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제, 그러므로 이렇게 사십시오.' (엡4:1)

로마서 12:1절의 맥락과 똑같습니다.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될수록,

 

과거의 지나간 자비 뿐만 아니라 현재의 자비 뿐만 아니라, 미래의 은혜끼지도,

온 영원동안 제게 주어질 미래의 자비까지도 말입니다.

 

제가 이 모든 것들을 이해할수록,

그리고 제가 이것을 어떻게  받았는지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라는 것을 알수록,

저는 지금 제 삶을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에서

그가 강권받고 있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 바울을) 강권하십니다." (고후 5:14)

        

그 사랑이 바울을 규정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으로부터

바울은 동기부여를 받았습니다.

 

▲이제 다른 식으로 생각해봅시다.

저는 당신이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십니까?

어떻게 당신 스스로가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할 수 있습니까?

 

물리학에 이런 게 있습니다.

만약 제가 땅에 누워 있다면,

허리에 벨트을 한 채 땅에 누워있다고 해봅시다.

 

저는 땅에 누워 있고, 누운 채로 제 벨트에 손을 얹습니다.

그리고 제 모든 힘과 능력을 다해 위로 잡아당기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저를 쳐다보고 '지금 뭐하려고 하시는 건가요?' 하시겠죠.

 

이렇게 말씀하시겠죠. '그렇게는 안 됩니다.

그런 식으로 힘을 줘서는 당신 스스로

땅에서 들어올려지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취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네 맞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하십니까?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23년 전에 페루 출신의 제 아름다운 아내,

차로 카사도 Charo Casado 와 결혼했습니다.

 

우리는 그 때보다 나이가 들었습니다.

결혼 생활을 한지 20여년이 훌쩍 지났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지금 제 아내를 처음 봤을 때보다

지금 훨씬 더 그녀를 사랑합니다.

 

제가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제 마음을 뒤흔들었고

저는 거의 기절할 뻔 했죠.

하지만 저는 그 때보다 지금 더 그녀를 사랑합니다. 왜 그럴까요?

 

미리 말씀드릴 건 그녀는 고결한 여인이지만,

다른 여느 사람들처럼 역시 불완전한 여인입니다.

그런데 왜 제가 지금 그녀를 더 사랑할까요?

 

그 이유는 제가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보다 지금

그녀의 덕목 virtue 들을 더 많이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덕목 virtue 들이 무슨 일을 합니까? 제 사랑을 이끌어냅니다.

 

즉 제가 그녀의 덕목을 더 많이 보면 볼수록,

그 덕목이 제 사랑을 더 이끌어냅니다.

           

제가 운동하다가 지친 선수처럼

끙끙거리고 신음하면서 지친 채로 억지로 사랑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아내를 사랑하려고 억지로 노력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는 되지 않습니다. 그건 누군가를 더 사랑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사랑은 자연스레 되는 것입니다.

 

아내를 예로 들었지만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본문 롬12:1절의 자기 몸을 드리는 헌신도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더 사랑하게 만드는 것은 당신의 의지나 결단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람 (상대방) 안에 있는 덕목이

당신에게서 사랑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냅니다.

 

따라서 제가 아내의 덕목을 더 많이 알수록,

그녀를 향한 제 애정이 더 흘러나오게 되고

저는 그녀를 높이 평가하고 존중하고

존경하게 됩니다. 이해하시지요?

 

기독교 신앙에서도 같은 방식입니다.

정말입니다. 너무 간단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덕목들을 더 볼수록, 롬12:1절이 가능하게 됩니다. 

만약 당신이 거듭났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말입니다.

 

반대로 만약 당신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당신이 하나님의 덕목들을 더 볼수록.

하나님을 더 싫어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면

당신의 마음이 새로워졌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재창조되었으며

의로운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이 하나님의 속성들, 사역등,

아름다움과 탁월함을 더 많이 볼수록

그것들이 당신의 사랑을 더 이끌어내고

당신이 더 하나님을 따르게 하는 동기부여가 될 겁니다.

   

▲좋습니다. 때로 저는 다소 무례한 말을 하는데요, 하지만 목적이 있습니다.

젊은 목회자들이 자기 학문과 학위에 또한 교회에서의 위치에

아주 의기양양해 있습니다.

 

저는 그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신학교에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의 속성을

연구하는 데 몇 년 동안이나 전념하셨습니까?

   

그는 대답합니다. '글쎄요 그런 주제는 그렇게 집중해서 연구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그저 성경을 읽었습니다.'

      

제가 '알겠습니다. 신학교에 있을 때는

몇 학기나 하나님의 속성(즉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을 연구하는데 전념하셨습니까?'

 

그는 '글쎄요, 한 학기, 두 학기 동안 조직신학 강의가 있었고

그 시간에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제가 '알겠습니다. 대학을 마치고 석사과정을 밟을 때는

그 과정 중에 몇 년동안이나 하나님의 속성을 연구하셨습니까?'

 

그는 '그건 (하나님의 속성 the attribute of God은) 

제가 석사학위 할 때 전공 분야가 아니라서요. 특별히 연구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러면 박사과정을 밟을 때는 과정 중에 얼마

동안이나 하나님의 속성을 연구하면서 보내셨습니까?'

 

그는 '다시 말슴드리지만, 저는

신학의 다른 전공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제가 '네 알게습니다. 당신은 이제껏 10년 동안 목회를 하셨는데요.

그 목회 기간 중에 몇 년 동안이나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연구하는데 전념하셨습니까?'

 

제가 발견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은 헬라어와 히브리어, 조직신학과 다른

모든 것들을 연구한 성경과 신학의 전문가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즉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들이 연구한 것에 관해 얘기해보면... 그들은 거의 피상적인 지식 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보이기 시작하십니까?

기독교 신앙과 성경의 모든 것은

하나님에 관한 것인데,

그 하나님의 속성(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

그가 하신 일, 그가 이루신 일, 그분의 성품 등)은 거의 가르쳐지고 있지 않습니다.

 

 

                    

각각의 하나님의 속성들의 깊이를 측량하거나,

그 탁월함과 아름다움,

 

그 하나님의 위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피상적으로, 지식으로 단 몇 줄 알 뿐입니다.

 

▲문제가 보이십니까?.

이것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이처럼 적은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이것이 롬12:1절의 삶을

성도들이 살아내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니.. 자기 몸을 드릴 동기부여가 안 되는 거죠.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성경의 모든 규범 rule 들을 배웠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지킬 힘이 없다면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열정이 없고 사랑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든 의무들과 지상대명령과

다른 모든 것들을 배웠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 많은 것들을 다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들을 행할) 능력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힘과 능력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부터 옵니다".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사랑할지니

곧 나를 아는 것과..." (렘 9:23~24)

 

"나를 아는 것과." (렘 9:24a)

 

설교자의 우선적인 일이 무엇입니까?

설교자는 당신에게 도덕적인 교훈을 주거나

별난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해석하는 것이 그의 일입니다."

그는 연구하고 거기에 삽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말씀 안에 있으며 해석하고 읽고 연구합니다.

 

하지만 단지 문자를 해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드러내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영광과

능력과 탁월함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저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흥분하며

예배당에서 떠나는 겁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이것이 곧 복음입니다. 

복음이란,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설교자로서 우리의 마땅히 할 말입니다.

 

그리고 설교자로서 우리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고

사람을 사람되게 해야 하지만 (윤리적으로 살게 해야 하지만)

 

그보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른 누구와보다

하나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제가 처음 사역으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저는 제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러 갔습니다.

그 분은 제가 알고 있는 그 누구보다도

가장 비범한 하나님의 사람이셨는데요.

 

그 후로 지금까지도, 저는 그 분 같은 분을 만나기 어려웠습니다.

저는 그 목사님의 사무실로 갔고 'Weaver 목사님,

저 설교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돌아서셨고 큰 키에 온통 은빛 머리를 가지신 분이었는데요, 

그 분은 저를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폴, 너는 혼자 있을 수 있겠니?'

 

저는 목사님의 말씀이 제가 진리를 설교하면 사람들이

저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뜻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분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다른 형제들은 함께 교회 스키 여행이나

미혼 형제 모임에 어울려 다니고

사소한 기독교 모임 같은 것들을 할 때,

너는 하나님과 혼자 있을 수 있겠니?

 

네가 나이가 들어서 네 아내가 생겼을 때

그녀가 네 마음을 가지긴 했지만

네 마음 가장 깊은 곳은 그녀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네가 혼자 주님과 은밀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아내는 그저 한 발짝 떨어져 있어야 할 시간이 필요한데,

너는 그렇게 하나님과만 독대 할 수 있겠니?

  

▲이 집회에 오신 여러분들 중에

목회자가 아니신 성도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네, 목회자는 아픈 사람들을 방문하고 다른 많은 일들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목회자들이 바로 여러분 때문에

마땅히 목회자로서 갈 길을 가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심방과 교회의 사소한 행정과 상담 일로 인해, 성경 연구와 기도에 시간을 못 냅니다.

            

당신은 목회자가 (성경) 연구를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구하는 사람이 되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주일과 수요일과 어느 때든 그가 설교단에 섰을 때

엠마오로 가는 길의 제자들처럼

당신의 마음을 뜨겁게 할 메시지를,

하나님에 관한 무언가를 말할 수 있도록,

여러분이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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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된 지 5년,

10년, 15년, 20년, 30년이 되셨을 겁니다.

 

하지만 얼마 동안이나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실제로 공부하셨나요?

얼마 동안이나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말로 고민하셨나요?

    

 

당신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위대한지.. 같은 것들을 배우기 시작할 때

그분의 아름다움을 한 번 힐끗 보기만 해도

당신의 마음은 완전히 녹아 내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너무나 위대해서 그분께서 당신을

견고하게 하시지 않으면, 그 아름다움이 당신을 죽일 겁니다.

      

그 아름다움, 위대하심의 가장 작은 단편을 보는 것도,

그 기쁨이 당신의 마음을 압도해서 터지게 만들 겁니다.

 

      

이런 것들이 남자와 여자들을 선교지로 나가게 이끄는 겁니다.

이런 것들이 순교자들을 찬양 부르게 하는 겁니다.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교회사 내내 놀라운 일을 행한 사람들은

그들이 놀라운 사람들이어서 그런 일을 행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 대부분이 보지 못한 것을, 그들은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더 많이, 그분의 아름다움을 더 많이,

그분의 은혜를 더 많이 보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얘기한,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의

그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는 동기부여를 어떻게 얻을 수 있다고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누구신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

더 많이 앎으로써 동기부여를 얻습니다.

 

당신이 그것에 대해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볼수록, 더 많이 감격하게 될 겁니다.

              

아무도 당신에게 불을 붙여줄 필요가 없습니다.

 

열정적이기 위해 컨퍼런스 같은 곳들을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이 당신의 열정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지식,

그것이 바로 당신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피상적인 시대에 살고 있는데,

목회자가 그러할 때 저는 진저리가 납니다.

 

목회자들과 그들의 사역이 너무 오랜 시간을 차지해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성경을 연구하는 시간을 줄여서

'일용할 양식 Our daily bread' (QT 교재) 을 보는 것으로 말씀연구를 끝내고,  

5분 기도 같은 것들로 기도시간을 축소시키려 합니다.

 

그런 것들은 진정으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저는 목회자들에게만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복음을 안다면, 당신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안다면,

아셔야 할 것이 있는데, 당신에게는 우선순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우선순위는 호세아서에서 말씀하듯이

"힘써 여호와를 아는"것입니다. (호6:3) 

 이것이 당신 삶의 최우선순위입니다.   

그렇게 할 때, 다른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겁니다.

       

이렇게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더 좋은 남편이 되어야 해서

더 좋은 남편이 되기 위한 방법에 대해 더 공부할 겁니다.'

     

당신은 이미 당신이 실천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저는 러시아에서 한 국제학교에서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결혼에 관해 약 26 편의 설교를 했어야 했습니다.

              

18번째 설교에 이르렀지만 저는 아직

결혼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었습니다.

 

학생들은 물었습니다. '지금 뭘 하고 계시는 겁니까? 집회의 주제가 결혼 아닙니까?'

    

저는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결혼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단지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을 행할 아무런 능력이 없는 거죠.'

 

              

그런데 제가 왜 여러분께 더 많은 원칙들을

드리기만 해서 더 부담을 지워야 하겠습니까?

        

그것보다는 어디서 그 힘이 오는지 보여드리는 겁니다.

그힘은 그분을 아는 데서 옵니다. 그분을 아는 데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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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롬 12:1)

 

바울이 여기서 <현재 시제>로 말하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그 시제는 매일 당신의 삶을 반복해서

드리고 다시 바치라 뜻도 되겠지만, 그보다는 일종의 선지자적 부름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이렇게 말했던 것과 같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만일 바알이 너희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왕상18:21)

 

이것이 이 본문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당신의 삶에 한 번 결단을 하고

평생 그 결단을 지키며 살아가는 겁니다.

 

당신은 평범하게 사실 겁니까?

평범하다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해진 일들에 비추어 볼 때

끝까지 그렇게 평범하게 산다면 얼마나 훨씬 더 끔찍한 일입니까?

당신은 계속해서 평범하게 사실 겁니까?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고

복음을 아는 데로 파고들어가기 시작해서

평범함은 쓸려가버리고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들에 대해 열심을 내게 되시겠습니까?

 

한 번에 최종적으로,

당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결단을 내리고

남은 평생 그 결단을 지키며 사는 겁니다.

 

 

당신은 그분께 속했다는 것입니다. 제물로 바쳤으니까요! 

당신은 그분께 속했습니다.

 

여기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을 보십시오,

"너희 몸을....드리라."

저는 항상 이 본문에서 이 단어(몸)가 왜 쓰였는지 궁금했습니다.

 

로마서 6:12에도 같은 단어가 있고,

로마서 7:24장에 가도 '몸'의 개념이 계속해서 있습니다,

 

저는 언제나 성령께서 우리를 아시기 때문에

사도 바울을 통해 이 단어를 기록하셨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모든 세대가 이 문제를 가지고 있었지만

특히 우리 세대에서 이 문제가 두드러지는 걸로 보입니다.

                      

당신이 교회 안의 누군가가 죄 가운데 살며,

하나님을 대적하여 반역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합시다.

        

'당신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당신에게 뭐라고 합니까?

'당신은 제마음을 모릅니다. 저를 판단하지 마세요.

당신은 제 마음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릅니다.

당신은 제 마음을 모르니까 그냥 몰러서세요.'

 

(제가 죄가운데 사는 것처럼 보여도, 제 마음엔 진실한 신앙이 있습니다..

라고 말씀하시는데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마음을 알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단지 당신의 몸을 보면 됩니다.'

     

만약 예수님이 당신의 마음을 가지셨다면,

그분은 당신의 귀와 눈과  손과 발도, 즉 몸도 가지고 계실 겁니다.

마음으로 진정 주님을 믿는 사람은

몸도 반드시 헌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어느 것도 대충 넘어가게 두지 않을 겁니다.

초(超)영성도 아니고 신비주의도 아니고

영지주의도 아닙니다. (이것들은 공통적으로 몸 없이 마음과 정신으로만 주님을 섬깁니다)

 

아닙니다.

바울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바울은 히브리식 사고, 성경적 사고,

인간의 전체성(全體性)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몸으로 표현될 겁니다.

 

"당신의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으로 말입니다." 마22:3   

               

미지근한 신자와 다른 방식으로 살면서

당신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칠 것입니다. 

 

▲"산 제물"이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2 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1) 한 가지 개념은 열정입니다. 열심을 내는 것, 열정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많은 것들에 열정을 가지게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열정적인 삶을 드리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우리는,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과 그분의 복음을

더 많이 앎으로써 그렇게 하게 됩니다.

하지만 초(超)영성 주의가 되지 맙시다.

 

우리는 또한 서로 의지하며 그렇게 합니다.

저는 아주 약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아주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항상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그들의 빛 안에서 때로 저의

열정 없음을 보고 회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열정적인 사람들이어야 하고

그래서 우리가 공동체로 부름받아 들어와서 성장할 때

다른 이들의 열정을 보고 회개하고 돌아서는 겁니다.

 

우리는 열정적인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단지 완전한 감성주의나 열정만으로 가득찬 사람들이 아니라,

진짜 열정, 진짜 불로 채워진 사람들이며

           

그들 안에 행하신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인해서 그렇게 된 사람들 말입니다.

 

2) 또 한 가지 '산 제물'의 개념은 생명입니다.

 

저는 오늘날 교회의 에너지와 열정의 아주 많은 부분을

기계적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

 

어떤 프로그램이나 어떤 혈기 왕성한 지도자나

사역에서의 어떤 새로운 방법론에 의해 돌연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기계적입니다.

 

진정한 생명은 기계적이지 않습니다. 진정한 생명은

주일학교에 조직된 프로그램으로부터 나오지 않습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일 중에 하나는

별로 활발하지 않은 교회에 가서

그저 당신 자신의 성격이나 미국의 일부 교회에서 사용하는

어떤 새로운 프로그램을 통해서

자신을 활발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 프로그램은 교회들을 150% 성장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이제 당신은 그 프로그램을 여기에서 시행하려고 하는 거죠.

                    

아니요! 진정한 생명은 영적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께로부터 나오며 말씀에 입각합니다.

                       

형제님들, 잘 들으십시오,

당신은 얼마나 많이 기도하십니까?

얼마나 많이 회중으로 모여 기도하십니까?

당신의 교회에서 회중으로 모여 기도하는 것에 대해 말해주십시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약 한시간 쯤 모이는데

첫 45분은 주민회의처럼 모여서 다른 사람들의 질병이나 문제들에 대해 나누고,

약 10분 간의 기도로 마치는 걸 애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제가 말하고 있는 기도회가 아닙니다.

 

저는 당신이 오직 간절히 주님을 구하는

회중 기도를 애기하고 있는 겁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영적 생명력에 대해 얘기합니다.

영적 생명력에 있어서 말씀강해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지만 말씀 강해만이 전부라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틀렸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행한 일을 보십시오.

  

그들은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

(행6:4)고 했습니다. 단지 말씀 사역만이 아닙니다.

또 단지 리더들의 기도뿐만 아니라 회중들의 기도이며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것 뿐만 아니라 회중으로서도 해당됩니다.

 

▲저희 교회의 장로님께서는, 장로직을 받으시면서 

'우리는 기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주일 아침 예배를 드리는데요.

주일 아침 예배에서 저희는 주일학교가 없습니다.

(저희가 주일학교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고 그저 주일학교가 없습니다.

 

저희는 주일 아침 예배는 오전 10시에 시작합니다.

그 주일 예배는 1시간의 합심기도로 시작합니다.

                     

예배 전에 기도모임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가 곧 예배입니다.

한 시간의 합심기도가 예배순서로 들어갑니다.

   

그 온 회중의 합심기도는 이런 내용입니다.

                        

"우리는 오늘 여기 모였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는 모두 공허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충만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해 우리에게 생기를 주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배 후 식사 교제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힘 주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움직여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약 1시간의 말씀 강해가 있는 예배가 이어집니다.

                      

기도, 기도를 통해

당신은 어리석고 하찮은 속임수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아내인

베다니 존스 사모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제 남편(마틴 로이드존스)의 강해 사역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제 남편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가 진정한 영적 생명력입니다.

진정한 영적 생명력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요한복음 15장은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 안에 거하는 것'만 말씀하지 않고

당신이 '구하라'고도 말씀합니다.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말씀과 아울러 기도를 둘 다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청교도들에게로 돌아가자 Return to the Puritan"는

이 모든 운동에 정말 겁이 납니다.

             

저는 청교도들을 사랑하지만 이 말씀은

여러분께 꼭 드리고 싶습니다.

 

청교도들의 신학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 쉽습니다.

어려운 것은 그들의 헌신적인 삶을 본받는 것입니다. 단순한 신학적 지식이 아니라요.

 

하나님의 역사를 보기 원하신다면 나가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가 기도했던 것처럼 기도하십시오!

 

▲이제 바울은 "거룩한 산 제물'이라고 말씀합니다.

거룩. 당신은 거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고 할 때,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만약 당신이 거룩, 우리의 거룩함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처음으로 생각나는 것이 도덕적 순결함으로서의 죄 없음이라면,

당신은 거룩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정의는 언제나 당신을 율법주의로 이끌어 갈 겁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정의함으로써 거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그 다음에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뜻은 이렇습니다.

'거룩'이라는 히브리 단어의 어원은 '잘라내다'입니다.

잘라내다, 무언가를 명확하게 분리하다. 잘라내 버리다,

그래서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구별하다 의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구별되어 분리되어 계십니다.

하나님 같은 존재는 없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R.C. 스프로울은 이렇게 훌륭한 방식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어느 것이 더 하나님과 닮았습니까?'

스랍, 하늘에 있으며 위대한 천군들, 천국에 있는 천군천사들입니까?

아니면 땅에 기어다니는 벌레입니까,

어느 것이 더 하나님과 닮았습니까?

                          

답은 둘 다 아닙니다.

 

"하나님과 같은 존재는 없습니다."

 

만약 제가 지금 여기 서서 저는 단상 위에 있기 때문에

여러분보다 태양과 더 가깝다고 자랑하고 허풍을 떤다면

얼마나 우습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우스꽝스러운 일일 겁니다.

 

그처럼 천사와

하나님 사이에는 훨씬 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않으시며, 천사와도 같지 않으십니다.

그저 더 크고 더 뛰어난 정도가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나 그들과 같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완전히 다른 범주에 계십니다. *본질, 재질이 다르십니다.

 

                

그 범주는 최고로 중요한 범주,

가장 위대한 가치이자 무한한 가치,

다른 모든 가치들을 다 합한 것보다

무한히 뛰어난 가치의 범주입니다.

 

그분은 구별되시고 독특하시며 가장 위대한 가치를 가지십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그런 방식으로 보기 시작할 때,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할 겁니다.

*즉, 하나님을 있는 모습 그대로, 지극히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많은 복음주의자 설교자가

이렇게 얘기할 때 문제를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당신을 위해 행하십니다'.

                  

그러면 모든 복음주의 회중들은

'오 놀랍다. 나를 위해 행하신다니. 그렇지,'라고 합니다.

 

하지만 존 파이퍼나, 저 폴 워셔 같은 설교자가 일어서서 이렇게 말한다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그분 자신을 위해, 우선적으로

그분 자신과 그분 자신의 영광을 위해 모든 일을 행하십니다.'

(먼저는, 우리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요, 먼저는 하나님 자신을 위해  행하십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면 회중들 모두가 화를 낼 것입니다.

 

잠시 이것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당신에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당신을 위해

행하십니다'라고 하면 당신은 아주 좋아하지만

 

하지만 제가 '하나님은 그분의 피조물들에게 자비로우시지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우선적으로

그분 자신을 위해 행하십니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이 말에 대해 낯설게 느끼실 겁니다.

 

*우리의 구원사역도 마찬가지로,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 자신의 스스로의 영광을 취하시기 위해서 하십니다

                  

'아, 하나님은 너무 자기중심적이시네요.' 가 아니라

하나님은 그만큼 거룩하시고, 크시고,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이든 행하실 때

가장 고상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게 당신이겠습니까?

당신이 가장 고상한 이유입니까?

당신이 가장 위대한 선(善)입니까?

 

벌레 같은 당신이

바로 하나님의 모든 일들이

당신을 위해 행해져야 할, 가장 가치 있는 이유입니까?

전혀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분이 행하시는 일(구원 사역)에 대한

가장 고상한 이유를 택하신다면,

그건 거룩하신 그분 자신입니다. 그 분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다.

그게 이유요,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신의 영광을 위해 스스로 행하십니다.

하나님보다 더 영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가 누구입니까?

        

이렇게 하나님이 스스로 영광을 취하시는 일이

하나님이 이기적이라서가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위해서 입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의 아버지를 생각할 때

여러분은 아버지로,

열국의 황제처럼 높은 아버지요 고결하신 분을 두기 원하십니까?

아니면 초라한, 누추한, 비도덕적인 아버지를 두기 원하십니까? 

 

아버지 입장에서도, 아버지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고결하고, 거룩하고, 도덕적인 아버지입니다.

그래야 아들은 자신의 아버지를 자랑스러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스스로 영광을 구하셔야 하고

스스로 거룩을 먼저 추구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 자신을 위한 것도 되지만, 그게 결국은 그 자녀를 위한 것입니다. (존 파이퍼 설교 중)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러하시기 때문에

그분께서 당신에게

그분의 사랑을 부어주실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스스로 영광과 거룩을 취하지 않으시고,

당신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신다면,

어쩌면 그것은 (가난하고 비도덕적인 아빠처럼) 형편 없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 거룩하시고, 스스로 영광을 취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의 영광과

그분 자신의 가치를 위해 행하시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그 위대한 가치를 당신에게 베풀어주시고

당신을 구원하시고 높여주시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범주 안에 계십니다.

가치 중의 가장 높은 가치, 가장 사랑받을 가치가 있으며,

가장 찬양 받을 가치가 있으며, 모든 것을 그분 자신의

영광을 위해 행할 가치가 있는 범주에 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당신이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당신이 진정한 하나님의 가치를 알게 될 때

             

당신은 당신의 삶을 그분을 위해 살며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을 그분을 위해 하기 시작합니다.

       

당신이 하는 일의 그 이유가, 그 동기가, 그 목적이 

'이렇게 크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되실 때'

당신도 거룩하게 되고, 당신이 하는 일도 거룩한 일입니다.

 

만약 거룩이 하나님께서 죄가 없으신 것에 불과하다면,

당신은 단지 계명을 지키는 것과

죄를 피하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하며 다닐 것이고

결국 바리새인과 율법주의자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아주 많이 보게 되어

그것이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고

그분을 자기 호흡의 가장 귀한 가치로 보게 되면,

그게 거룩한 삶 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이것이 신앙적으로 합리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크리스천들이 왜 세상에 'No!'라고 말합니까?'

단지 도덕적으로 나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어떤 것보다

하나님께서, 무한히 더 아름다우심을

우리가 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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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본문을 잠깐 두고 데살로니가전서로 가보겠습니다.   44:25~

                  

데살로니가전서 1장 9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살전 1:9)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살전1:10a)

           

저는 여러분들이 순서를 보셨으면 합니다.

 

"너희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 (살전1;9b)

               

신학자 Hibbert는, 이점을 분명하게 짚었습니다.

그는 데살로니가인들이 살다보니

그저 자신의 모든 우상들에 싫증나게 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아니요, 자초지종은 아렇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우상을 예배하고 있었습니다.

 

우상이 그들의 전부였습니다.

 

그들은 우상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우상으로 인해 행복했고 만족했으며 충분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바울이 그 도시에 와서

그들의 우상을 훨씬 뛰어넘는 위대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해 선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러한 아름다움과 위대함과 영광을 보고

이에 사로잡힙니다.

그리고 그들이 섬기던 우상들에서 돌아서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그들의 남은 크리스천의 삶의 전 생애동안 계속됩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이유입니다.

(벧후 3:18)

우리가 더 많이 알수록 더 자라갑니다.

 

▲저는 작년 2015 에 약 8개월 동안을

예루살렘의 겟세마네 동산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루에 몇 시간씩 겟세마네 동산을 연구하며

초대교회 교부들, 청교도들, 종교개혁자들에 대해

제 모든 시간과 관심을 쏟아부어 연구했습니다.

 

저 스스로 성경본문을 앞뒤로 읽어가며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렇게 생각하게 됐습니다.

             

'나는 절대 다시 죄를 짓고 싶지 않다!

저는 절대 다시 죄를 짓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절대 다시 제 자신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I never want to be about me again'

 

그분이 겟세마네에서 하신 일은

현대 설교자들이 감조차 잡을 수 없는 일들입니다.

거기서 그분께 일어난 일은 말입니다.

당신은 지옥을 거론하며 당신을 겁줄 누군가가 필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의 보좌를 두려워하게 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그저 겟세마네에서

구주의 아름다움과, 능력과, 영광을 보고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악(惡) 그 자체와 씨름하시며

헤아릴 수 없을만큼 고통당하실 때 말입니다.

         

그것을 깊이 알수록, 

당신은 '나는 절대 다시 죄를 짓고 싶지 않아!'라고 하게 될 겁니다.

 

한 찬송가 가사처럼

'주 사랑하는 마음 변찮게 하소서' ( '오 거룩하신 주님' 中 3절)

                 

'제 사람이 차갑게 식을 것을 아신다면

저를 죽여주십시오 주님, 저를 죽여주십시오.'

그저 그분을 바라보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다메섹 도상(道上)에서 바울이 본 것입니다.

그것을 본 겁니다.

            

▲회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메타노이아, 마음을 바꾸다,  *메타 Change, 노이아 : 마음, 생각 

  

 

여러분, 당신이 지금 이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는 건

당신의 마음이 이 건물이 불타고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고요,

 

하지만 만약 당신의 마음에서 이 건물이 불타고

있다고 믿는다면 당신의 모든 것이 달라질 겁니다.

*마음이 바뀐 것입니다. 그 예를 들은 것입니다.

                             

다메섹에서 사도 바울에게 일어난 일을 잠시 묵상해보신다면,

그 일은 실제로 사도 바울에게는 전적으로 뒤집힌 겁니다.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마치 40년간 매일 현관으로 신문을 가지러 갔던 한 남자가

어느 날 나가보니 인도(人道)가 바다처럼 되었고

하늘은 초록색이며 새들은 거꾸로 날고

개들은 야옹거리며 고양이가 멍멍 짖는 것처럼.

그가 현실이라고 알던 모든 것이 완전히 뒤바뀐 겁니다.

 

바울은 놀라서 말이 안나와습니다.

마치 트럭에 자기가 치인 것 같았습니다.

       

그가 어떻게 예루살렘을 떠나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올랐습니까?

 

그는 그의 마음에 나사렛 예수가 이 세상에 존재했던 그 누구보다

천하의 거짓선지자이자 신성모독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바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떠나 다메섹으로 가면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적이며

해충처럼 박멸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바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 한순간, 그는 자기의 현실 전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알고 있던 중요한 사실들에 대해 모두 틀렸던 겁니다.

 

모든 것에 말입니다. 이해하시나요?

        

그가 천하의 신성모독자이자 거짓선지자라고 생각했던 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다니엘 7장의 인자로 드러났습니다. (단7:13-14참고)

 

바울이 마치 쥐처럼 박멸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3일을 앉아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던 겁니다.(행9:9)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이것은 저와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아주 매력적인 15살짜리 한 소녀가 있습니다.

그녀는 온통 자기 자신에게 몰두해있습니다.

         

그녀는 거울 보는 것을 좋아하고 옷을 좋아합니다.

모델 잡지같은 것들을 좋아하고 쇼핑하러 다니는 것을 좋아하며

그저 자신의 외모와 남자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그리고 전부 자기 자신에 대한 것에만 신경을 씁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복음이 선포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생각했던

모든 것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왜곡되었고 악하며 어리석고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녀의 삶 전부가 적그리스도적이며 더러웠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녀는 변화되었습니다.

 

한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에 다니고

도덕적이며 아주 부자였습니다.

그의 부(富)를 자랑하기를 좋아하면서도, 더 많은 부를 원합니다.

그가 모든 사람 가운데 제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성공했습니다, 그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한 거리 설교자의 설교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그는 그 길가에 주저앉아 그의 머리를 자기 양 무릎 사이에 넣고

그가 모든 것에 대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보십시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여기서 얘기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롬12:1)

                  

이것은 그저 일부 교회에서 가르치는

긍정적인 삶 같은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다르지요!

 

천국과 지옥,

의미가 있는 삶과 헛되게 끝나는 삶 사이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요컨대 이 모든 것은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이후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1b)

 

본문의 '영적'이라는 단어는 '합리적인 reasonable'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헬, 로기코스  어근, 로고스

 

당신의 삶을 사람을 위해 바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사실 그것은 광신적입니다. 당신의 삶을

어떤 지도자에게 바치는 것은 광신적입니다.

 

그러나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을 위해 자기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께 당신의 삶을 바치는 것은 합리적입니다.

그것은 합리적입니다. 그래서 KJV는 reasonable 로 번역!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합리적인 사회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포스트모던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일은 당신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이것이 지역 교회가 그렇게나 중요한 이유입니다.

저는 제 삶으로 증언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사역을 저 혼자서는 하지 못합니다.

 

단지 개인적인 연구나 개인적인 기도만이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어 마찬가지로

그 길을 걷고 있는 형제 자매들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서로 경계하고 붙들어주며 말입니다.

            

때로 제가 교회를 거닐 때 집사님이나 다른 분이

주님을 위해 아주 열정적인 것을 보게 되는데

그리고 제가 거울로 제 자신을 볼 때면 마음이 찢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에,

그리고 성도들이 주님을 알기에 힘쓰도록

서로를 격려하고 권면하며 고무하는 교회에 속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바울은 계속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conform 말고"(롬 12:2a)

 

이 구절은 '틀에 부어 만든다 mold'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틀에 박히지 마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 여러분, 들어보십시오,

그의 상처는 오래되었고 그들은 시드니의 모든

의사에게 다녀봤지만 치료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시드니 집회

 

그러다 제가 나타났고 여러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폴 형제님, 우리는 세계 모든 의사에게

다녀봤지만 치료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의 이마는 항상 피투성이에 멍들어 있습니다.'

'기도를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마 하나님이

당신에게 뭔가 보여주실지도 모릅니다.'

 

저는 대답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를 좀 관찰하게 해주시죠,'

저는 그의 곁에 앉아 그를 지켜봤고 새벽 1시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의 침대 옆에 앉아있었고 1시에 시계가

댕 하고 울리자 그가 침대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는 벽돌 벽으로 가서 이마를 쿵 부딪친 후

다시 침대로 갔습니다. 저는 기록했지요,

2시가 되어 시계가 댕-댕 하고 울리자,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아까와 같은 벽으로 가서 이마를 쿵 쿵 부딪쳤습니다.

패턴이 보이는 것 같네요,

 

저는 24시간 내내 지켜보았고 12시가 되자

그는 벽에 머리를 12번 부딪쳤습니다.

다음날 여러분 모두가 제게 상담을 위해 찾아왔고 저는 말합니다.

'저는 의사는 아니지만 우리가 살펴보야할 점을 찾은 것 같습니다.'

 

그게 뭔가요?

'음 그는 이마를 벽돌 벽에 찧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제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 그리스도인의 삶은

위대한 신비같아요. 어떻게 당신은 성장하시나요?'

'성장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당신이 성장하도록, 또 다른 모든 것들을 해 줄

숨겨진 비결과 다른 방책이 적힌 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기 답이 있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롬12:2a) 이것이 방책입니다.

저는 역도를 정말 좋아합니다.

저는 이제 나이가 들었지만 역도를 정말 좋아합니다.

 

여러분께 역도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시죠?

누군가 전문 역도 선수라면 그는 매일, 아마도

일주일에 5-6일은 운동을 할 겁니다.그렇겠죠?

 

그의 연습은 아주 중요합니다. 또한 그는 하루에

6번 식사를 할 겁니다. 네, 하루에 6번이요.

맛있는 음식들이 아니라 대개 참치와 퀴노아.

그리고 브로콜리를 하루에 6번 먹습니다.

 

당신이 만약 그 역도선수에게 '한 가지 선택을 하셔야 합니다

연습을 하루 쉬던지 한 끼를 안 먹던지 말입니다.'라고 한다면.

그는 연습을 쉴 겁니다.

 

선수들은 모든 것 중에 가장 큰 부분이

식단이라는 걸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정말로 그래요.

 

대부분의 육체적 질병은, 전부 다는 아니지만 많은 부분이

현대 우리 사회에서 완전히 없어질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양실조를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과체중이지만 영양실조를 앓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쓰레기를 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영적인 무언가를 말해줍니다. 그렇지 않나요?

 

우리 대부분은 이 세상에서 하루에 16시간을 깨어 있습니다.

하루에 16시간동안 당신은 이 세상의 더러움으로 폭격을 맞는 겁니다.

당신은 하루에 16시간 동안 폭격을 맞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 중 일부는 필수적인 것도 아닙니다.

당신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읽지 말아야 할 것들을 읽습니다.

당신은 당신을 사로잡으면 안 될 것들에

사로잡히도록 스스로를 내어줍니다.

 

그리고 15분간 '나는 시편을 통독할 거야'라고 합니다.

형제님들, 당신이 먹는 것이 당신이 됩니다.

자매님들, 당신이 먹는 것이 당신이 됩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롬12:2a)

 

이 세상의 영향력들, 당신에게서

끊어낼 수 있는 것들은 끊어내십시오!

그것들을 끊어내십시오! 바울은 여기서 올림픽 선수들과

운동선수들에 대해 얘기하기 위해 상세히 들어갑니다.

 

누군가 6살 때 체육에 놀라운 소질을 가지고 있다는 게 밝혀진다면,

그 순간부터 그들은 체육의 노예가 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체육은 그들의 주인이 됩니다. 역도든 비슷한 무엇이든

그 운동이 그들의 주인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당신은 더 이상 다른 모든 아이들이 먹는 것처럼 먹지 않고

다른 모든 아이들이 이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보내지 않습니다.

당신은 더 이상 다른 모든 아이들이 자는 것처럼 자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한 가지에 맞게 돌아갑니다. 금도 아닌 도금된 금메달을 따는 것,

형제님들, 그러나 우리는 '썩지 않는 상급'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고전9:25)

 

당신의 훈련은 무엇입니까? 경건의 목적을 위해

스스로를 어떻게 훈련하고 계십니까?

생각해보십시오, 계획도 없고 엄격한 통제도 없습니다.

 

그리고 왜 우리가 성장하지 않는지 궁금해합니다,

       

우리는 하루에 16시간동안으로 세상의 더러움으로 폭격을 맞지만

말씀읽기, 기도, 성도의 교제에 대한 계획은 없습니다.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수치스럽게 하지 않고

이 세상의 삶을 마치는 것이 당신의 목표입니다.

 

다윗처럼 자기 세대를 잘 섬기다가

이 세상의 삶을 마치는 것,

그것이 당신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행13:36

당신에게 그 외 다른 어떤 목표도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설교자로서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리고 점점 더 설교자들이

무너지는 것들을 볼수록, 이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제 중요한 목표는 큰 오명 없이, 제 주님을 수치스럽게

하는 일 없이 여기(이 세상)의 삶을 마치는 것입니다.

훈련하십시오, 훈련하십시오, 훈련하십시오! discipline!

 

당신의 삶에서 당신에게 영향을 주는

것들을 끊어버리라고 권하겠습니다.

그것들을 끊어버리고 당신을 경건으로 감화되는 것들,

하나님의 말씀을 당신의 삶에 더하기 시작하십시오,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외우고 묵상하고

순종하고 나누십시오, 아시겠습니까?

(형제 자매들과) 서로 경계하고 붙들어 주십시오,

 

▲저는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자의 이야기를 나누기를 좋아합니다.

저는 그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도 모르지만, 유익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기의 삶의 끝자락에 이르러

마지막 콘서트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노인이었고 거장으로서 아름답게 연주를 했습니다.

 

그가 마쳤을 때 한 소년, 젊은 바이올린

연주자가 그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처럼 연주하기 위해 제 삶을 바치겠습니다.

그 노인이 소년을 보며 대답했습니다.

'젊은이, 나는 나처럼 연주하기 위해 내 삶을 바쳤다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는 저렇게 설교하기 위해 내 삶을 바치겠어,

나는 저렇게 성경을 알기 위해 내 삶을 바치겠어,' 라고 말합니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이들은 실제로 그들의 삶을 바쳤습니다,

그것이 당신이 해야할 일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변화를 받아" (롬 12:2a)

 

여기서 '변화' conform 는

단순한 훈련이나 의지의 강화가 아닙니다.

본질의 변화, 습관의 변화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하나님의 말씀은 강력하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만약 당신이 변화를 받기를 원하댜면 말씀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더 큰. 더 큰 시야를 보시고

하나님이 누구신지,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 당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큰 계시를 보십시오.

 

계발하십시오, cultivate 경작하시고 가꾸십시오.

이 단어야말로 여러분이 받아적으셔야

할 단어입니다. 계발하십시오, 가꾸십시오, cultivate

무엇을 계발하라는 말입니까?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꾸십시오,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꾸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함을 통해서입니다.

 

제가 젊을 적 알렉산더 매클라렌(1826-1910;역주)의

저서를 아주 많이 읽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예전 설교자인데요.

알렉산더 매클라렌, 저는 그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저는 제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제 사고방식이

그를 닮아가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는데 성경본문을

논리적으로 파고드는 방식이 그를 닮아있었습니다.

 

한 번은 저희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년 뒤.

제가 저희 어머니를 뵈러 집에 갔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서서 목장을 둘러보곤 하셨던 뒷 베란다에 서있었는데

저희 어머니가 나오시다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폴! 너를 좀 봐.'

저는 대답했습니다, '무슨 일이세요?'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좀 봐봐.'

 

저희 아버지는 거기 서서 무릎을 뒤로

고정하고 양손을 허리에 이렇게 올리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 채로 거기 앉아 목장을

바라보고 계시곤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어머니는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좀봐. 딱 너희 아버지처럼 서있구나.'           

 

 

 

     

진짜 똑같았습니다. 저는 한 번도 아버지를

따라하려고 의도한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사실 아버지가 평소에 그런 자세를 취하는 지도

저는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저 항상 저희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것 뿐입니다, 항상 그와 함께 했던 것 뿐이죠.

성경말씀에 있어서도 동일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딱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제 아내는 몇 년 전 루마니아에서 자매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한 여성이 약 이틀 후 제 아내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차로 자매님, 당신은 모든 사람에게 단순한 답을 주고 있군요,'

당신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에 더 시간을

써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잖아요. 좀 더 깊은 것 없나요?'

            

제 아내는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에 시간을 더 써야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롬12:2a)

어떻게 마음을 새롭게 합니까?

 

바울은 여기서 구체적으로 얘기해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새롭게 함은 대개 성령님과 연관이 있습니다.

저는 성령님께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제 삶에 가장 크게 역사하신다고 믿습니다,

   

 제가 얼마나 깨끗이 옷을 세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만약 곧바로 그 옷을 진흙탕에 던져버린다면 말입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뒤로 가는 것을 먼저 처리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알게 되면,

당신에게서 그것을 끊어내십시오, 당신에게서 끊어내십시오,

    

그러니까 그저 당신이 말씀을 읽기 때문에 계속해서

더러운 영화들을 보러 가도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무에게도 전혀 도움이 안됩니다.

당신이 듣고 보는 그 모든 것들 말입니다. 저는 제가

만나는 젊은 개혁주의 청년들로 인해 기가 막힙니다.

 

그 청년들은 저를 정말 놀라서 기가 막히게

만드는데요,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그들이 칼빈에 대해 얘기하고 청교도들과

그밖에 모든 것들에 대해 얘기하는 걸 듣습니다.

 

그리고나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야 끝나고 이 영화 보러 안 갈래?'

저는 기독교 평론에서 그 영화가 쓰레기라는 걸 읽었습니다.

                 

지금 당장 끊어내십시오!

 

사람들은 그들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복음을 사랑하고

믿음의 선배들의 책을 읽으면서

동시에 율법폐기론자로 더럽게 살아가는데

그게 가능하고 그게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어쨌든 신학지식적으로는 그 이상이라는 겁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들을 당신의 삶에서

끊어버리십시오! 끊어내고 멈추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성장하지 못할 겁니다.

 

어떻게 더 이상 명확하게 얘기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끊어야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계속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성령께서 마음을

새롭게 하실 때 우선적으로 사용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또한 성도의 교제도 있습니다. 진정한 성경적인 교제 말입니다.

언제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들끼리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또는 자매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연락해서

식사를 하러 가거나 커피를 마시러 가서 실제로

예수님에 대해 얘기한 적이 마지막으로 언제입니까?

                    

예배가 마친 후에

교회에 모여 앉아 들은 설교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실제로 얼마나 오래 나누십니까?

 

복음주의 교단 안의 대부분에서는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축구나 스포츠, 시사 문제나 자녀 교육,

그런 주제에 대해서는 모두가 참여하지요.

 

 

성도의 교제는 예수님께 기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기반해야 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12:2b)

 

▲잘 들으십시오. 제가 몇 년 전 맥아더목사님의

책 중에서 읽었던 부분을 가져온 겁니다.

 

누군가 하나님의 은혜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겠다고 결단하고 (마6:33)

정직하게 '제 모든 약함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이것이 제 결단입니다고,'라고 말한다면

 

먼저 그 나라를 구하고(마6:33),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며(롬12:2)

그리스도의 마음을 계발하면 (빌2:5 참고)

특정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고 일컬어지는 많은 부분을

"당신의 마음의 소원에 따라" 결정할 수 있게 됩니다.

 

저는 페루에 가서 선교사가 되기를 제가 원했기

때문에 페루에 가서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페루에서 돌아와서 미국에서 선교단체를 시작하기를

제가 원했기 때문에 페루에서 떠났습니다.

 

놀라운 정도의 자유함이 있습니다.

누군가 먼저 그 나라를 구하기로 결단하고

실제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삶을 실천해갈 때 말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계발할수록,

당신의 생각을 성경에 굴복할수록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생각하는 법을 배워갈수록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될 겁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될 겁니다.

 

대부분의 상황들에서 어떤 특별한 계시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될 겁니다.

이미 당신은 성경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당신의 마음과 뜻이 하나님의 뜻을 향해 갈 겁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설명되어 있습니까?

"선하시고"

만약 선하지 않다면 그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만약 당신의 영적 건강,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성장.

하나님을 경외함, 그의 나라를 확장함으로

이끌지 않는다면 그것은 선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무엇입니까?

'받으실 만한' 입니다.(개역개정은 "기뻐하시고"로 번역됨-역주)

당신의 문화에 받아들여질만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당신의 사회나 당신의 기독교인

친구들에게 받아들여질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만 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입증해줄 수 있습니까?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입증해줄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 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진짜 요점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것, 우리의

삶을 기뻐하시는 제물로 드리는 것.

      

▲저는 복음을 변화의 빛안에서 연구하고 싶습니다. 변화 말압니다.

저는 나이가 들어서 더 실제적으로 되었습니다.

       

때로 저는 몇몇 학생들과 함께 걷게 되는데 그들은

종말론과 다른 모든 것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가령, '타락 후 예정론' 대(對) '타락 전 예정론'

같은 것들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제게 이렇게 묻습니다.'폴 형제님 어떻게 생갹하시나요?'

 

그러면 저는 대답합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형제님들,

저는 단지 제 아내를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이 행동하는 방식을 변화시키도록 복음이 선포되기를 원합니다.

당신이 남자로서, 여자로서 행동하는 방식을 변화시키고

당신이 자녀로서 십대로서 행동하는 방식을 변화시키고,

당신이 아버지로서 행동하는 방식을 변화시키고,

당신이 어머니로서, 아들로서, 딸로서, 사역자로서, 회중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동하는 방식을 변화시킬 원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말씀을 주심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진리입니다. (요17:17)

아버지의 사람들의 유익과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그들의 마음에 역샤해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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