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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의 목적 마1:18~25, 사7:7~14

by 【고동엽】 2024. 11. 24.

임마누엘의 목적          마1:18~25, 사7:7~14        

 

소리 내어 천천히 두 번 읽으셔야 이해되는 설교문입니다.

김성수 목사님 설교 녹취

 

▲서론 및 주제 요약

즐거운 성탄절이다.

성탄절이 되면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서로 인사를 나눈다. 즐거운 성탄절이란 뜻이다.

 

그런데 여러분, 성탄절이 왜 즐거운 날인가?

아마도 산타클로스가 주는 선물이고,

헤어진 가족들이 만나는 명절이라서 ‘즐겁다’고 느끼겠지만..

 

성탄절(주님의 오심, 임마누엘)의 진정한 의미를 알면,

성탄절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다.

 

눅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이와 같이 성탄은 기쁨의 소식이 분명하지만,

그것은.. 결과를 말한 것이고,

그 결과로서 기쁨이 오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중간 과정이 있다.

그건 구원받은 자로서 세상 바벨론과 단절해야 하는 슬픔과 아픔이다.

 

예수님의 탄생은,

헤롯 같은 불신자에게는 심판의 무서운 소식이 분명하지만,

 

성도들에게도

임마누엘이 무조건 기쁨만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람들을 세상과 단절로 인해 애통하게 하고,

그 다음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성도라면,

예수님을 마치 산타클로스처럼,

선물(축복)꾸러미를 가득 등에 짊어지고

이 세상에 오신 구세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수님이 복 주러 세상에 오셨으니까, 나에게 복 주고 도와 달라..

그래서 우리가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며 즐거워한다면,

아직 우리는 성경을 더 열심히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 본 ‘임마누엘’

 

▲‘임마누엘’ 주님 탄생의 예언이 주어진 정황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의 탄생은 사실 그렇게 즐겁고 기쁜 일이 아니다.

결과로 보면, 죄인들이 구원 받아 기쁜 일이지만,

과정을 보면, 차라리 안 오시는 것이 낫다고 할 만큼, 오히려 슬픈 일이다.

 

아시다시피 마1:23절에 천사의 수태고지에 등장하는 임마누엘의 이야기는

이사야의 아하스 왕에 대한 예언에서 인용되었다. 이사야7:10~14

우리가 요절로 외우는 구절이 사7:14절인데,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위에서 ‘그러므로’ 라는 말을 풀어보면, 이런 의미다.

남유다가.. 북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에 의해서 침략의 위협을 받았을 때,

하나님은, 이사야를 아하스 왕에게 보내서, 두려워말라는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아람왕 르신과 르말리아의 아들을, 타다 남은 두 부지깽이에 비유하시면서,

두려워하지도 말고, 낙심하지도 말아라.. 라고 하셨다. 7:4

 

그런데 유다 왕 아하스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직접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셔서 그를 돕겠다고 말씀하셨음에도,

아하스는 믿지 않았다.

 

이사야가 그 예언을 이룰 징조를 구하라 했으나, 아하스는 징조도 구하지 않았다. 7:11

이미 애굽에 원군을 요청해서, 세상적 실제적 힘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도움 따위는 못 믿겠다는 태도였다.

 

대신에 보이는 애굽이 나를 도와줄 것이므로,

나는 그 애굽을 통하여 안심하겠다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진 예언이 바로 임마누엘이다.

그 예언이 ‘그러므로’로 시작한다. 그 뜻은 ‘네가 하나님의 도움은 믿지 않으므로이다.

‘그러므로 징조가 나리니, 처녀가 잉태하여..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예언이 주어졌다. 7:14

 

▲사7장의 임마누엘은.. 심판하려고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이다.

그런 인간의 패역한 상황에서 임하는 임마누엘이, 축복의 임마누엘이겠는가?

 

성탄절에 우리는 마1:23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구절을 잘 인용하는데,

 

그 구절의 구약출처를 찾아보니,

뭐 복 주시러 ‘우리와 함께 하심’이 아니라

심판하시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라는 것이다.      *임with-아누us-엘God

 

정리하면, ‘임마누엘’의 주님이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힘을 의지하여

이 세상 것으로 자신의 안위와 행복을 도모하며

이 세상의 힘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자들에게  (대표적으로 아하스 왕)

심판의 주로 오시는 하나님이 ‘임마누엘’이다. ‘하나님이 심판하러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봐도 사실이다.

그 임마누엘의 예언을 따라, 신약에 실제로 오신 하나님은,

그를 영접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주님’이셨지만,

실제로 훨씬 더 많은 사람들, 즉 거절한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주님’이셨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주님의 임하심’이 내게 무조건 다 복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순종하고, 경외할 때.. 임마누엘이.. 내게 복이 되는 것이지..

 

내가 불손종하고, 무시할 때, 임마누엘은..

내게 저주가 되고, 심판이 된다. (물론 다 깨져서 회개하고 돌이키면.. 복이 된다.)

 

▲이것은 사7장 아하스 상황, 마1장 상황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아담의 죄가 바로 그것이다.

모든 인류의 죄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아하스에게서 다시 한 번 폭로되는 것이고,

 

(내가 바로 아하스 왕이고, 헤롯 왕이고, 예수님을 거부한 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성이, 세상 힘을 의지하고 기대어서 살려고 그러고,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의 도우심 따위는.. 아하스처럼 징조도 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걸 심판하기 위해 임마누엘로 오신 것이다.

그래도 ‘메리 크리스마스(즐거운 성탄절)인가?’

 

심판을 염두에 두지 않는 현대 기독교인들

아하스가 징조도 구하지 않고,

다른 말로 하나님을 신뢰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고, 의뢰하지도 않으며,

세상의 다른 힘(애굽)에 자신의 안위를 맡긴 것이다.

 

그러한 유다에게 심판의 철장iron club으로 주어진 징조가 바로 ‘임마누엘’이다.

이렇게 임마누엘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일차적으로 심판을 목적으로 오신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자기에게 복이나 주시는 하나님,

자신의 문제를 기적적으로 도와서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

자신의 소원을 만사형통 이루어주시는 산타클로스 같은 분으로서의 임마누엘을 생각할 뿐,

하나님이 임하시는 것은(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심판하러 오신다는 것을 전혀 염두에 두지 못하고 있다.

 

교회조차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이유와 목적을

하나님 믿는 사람들을 복 주고, 세상의 삶을 도와주기 위함 정도로만 알고 있다.

 

우리가 말하는 ‘메리 즐거운 크리스마스’는 메리가 아니라 bloody였다.

실제로 첫 번째 크리스마스는 bloody Christmas였다.

 

▲임마누엘이 심판인 증거 - 영아들의 죽음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시자마자 제일 먼저 일어난 일은, 

베들레헴에 2살 이하의 아이들이 전부 몰살당한 사건이었다.

 

천사들은 ‘하늘에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는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노래했는데,

실제로 이 땅에 벌어진 일은, 평화가 아니었다. 엄청난 살육(심판)이었다.

 

2살 이하의 아이들은, 자의로 죄를 짓기 이전의 죄 없는 아이들이다.

그들이 무슨 의지를 발동하여 죄를 지은 것이 아닌데, 왜 그들이 심판받았나?

 

그 선한 아기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죄의 삯인 사망이 아기들에게 임한 것을 보여준다.

그 사건은,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자기 의지로 죄를 짓기 이전에

이미 나면서부터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원죄의 현실을, 그대로 폭로시킨 사건이다.

(영아들이 그렇다면, 하물며 어른들이야 더 어떠하랴!)

 

비록 어린아이들이 심판의 대표로 죽었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죽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전부 그렇게 죽어야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 세상이.. 임마누엘, 예수님의 태어나심(임하심)으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전멸적인 심판 가운데) 남은 자remnant가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도륙당해 죽어야할 모든 죄인들 가운데서

얼마를 남기셔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시기로 작정을 하셨다.

 

그러나 그냥 남기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작은 심판을 통과시키시며,

그들을 연단하신 후에 남기신다.

그게 이사야서에 나온다. 그래서 구약을 알지 못하면, 신약을 알지 못한다.

‘남은 자’는 이사야 6장 끝에도 이미 예언되어 있지만, 계속해서 오늘 본문 이사야7장에도 나오는데..

 

이사야가 아하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가서, 임마누엘의 징조를 알릴 때,

자기 첫 아들 스알야숩을 데리고 간다.  7:3

스알야숩은 ‘남은 자만 돌아오리라’ 라는 뜻이다.         성경의 각주에 나와 있다.

 

하나님이 이사야로 하여금 스알야숩을 동행하게 하신 것은,

지금 아하스에게 ‘임마누엘’의 심판이 떨어지고 있는데,

다 망하는 것은 아니고, 그 중에 ‘남은 자가 있다’는 것이다. 

 

 

◑예레미야의 예언을 통해 본 ‘임마누엘’

 

마2: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 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이 구절은 렘31장에서 인용된 것인데,

렘31장을 파악하면, 이 구절이 여기에 왜 인용되었는지 알 수 있다.

 

렘31:15~17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지경으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바벨론에서 빠져나오기를 주저한다.

이 말씀은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다가,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모두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남은 자만 돌아온다.

에스라, 느헤미야서 등을 보면, 바벨론에 끌려간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극소수만 유대 땅으로 되돌아왔다. 90%는 안 돌아왔다. 대부분은 바벨론에 남았다.

 

그 자리가 포로의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세상 권세 잡은 마귀의 포로로 이 땅에 태어나는데,

여기가 너무 좋아서 하늘나라에 가기 싫어한다.

 

그러니까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을 추앙하고, 모셔다 간증도 시킨다.

천국이 정말 좋은 곳이라면.. 거기 갔다가 되돌아온 사람은 불쌍한 사람인데...

 

어쨌든 사람은, 그 바벨론 자리가 포로의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세상에 익숙해져서 바벨론을 떠나지 않았다. 그게 우리의 모습이다.

이 바벨론(세상)에서 떠나야 되는데, 하나님 나라로 가야 되는데,

거기 가서 성전을 재건해야 되는데, 안 돌아간다.

 

성도로 이 세상을 사는 것이 너무 힘이 들고,

자기 부인, 십자가의 삶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도 선뜻 그런 삶을 살지 않으려고 한다.

바벨론에서 나오기를 주저하는 것이다.

 

▲임마누엘의 두 번째 이유 - 돌아오게 하시려고!    (첫 번째가 심판)

그래서 하나님이 임마누엘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셔서

철장을 들고 백마를 타게 만들어서 바벨론에서 쫓아내신다. 돌아오게 하신다.

그 무리가 성도이다. 또한 ‘남은 자’이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에서 한 발, 한 발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메리 크리스마스 인가? 메리 크리스마스이지만, 눈물 흘리고 나서 메리다.)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보다, 바벨론의 화려한 문명과 힘이 더 좋다.

그래서 그곳에서 계속 머물면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의 귀환을 거부한다.

그 중 아주 소수가 돌아와서 하나님의 성전 재건에 참여했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남은 자들인 것이다.

 

세상 바벨론에서 사는 것이.. 죽도록 고생이지만, 거기에 약간 달콤함도 있다.

거기서 빠져나와서 성도로 사는 것도.. 십자가 길의 고생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길이 그렇게 힘이 든다.

그 모든 것이 ‘임마누엘’(주님이 내 삶에 오심)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악전고투 속에서 성전을 재건하던 그들의 성전 재건이

바로 성전으로 지어져 가게 되는 것이.. 남은 자들의 신앙생활을 상징한다.

거기에 참여하는 자들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며, 그 삶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그 말은 이 세상이 주는 매력과 마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뿐임을 보여준다.

 

나머지는 여기가 너무 좋으니까 여기를 떠나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바벨론을 나온 자들은

이 세상에서 바벨론을 기각하고,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져가는 길에

고난과 수고와 눈물을 뿌리면서 동원이 된다.

 

바로 그 일을 위해 예수가 이 땅에 오셨고,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이 모두 죽은 것이고,

그 죽음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약속,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약속이 주어진다.

그게 마2:17~18절이 렘31장을 인용한 이유이다. - 돌아오게 하신다. (심판만 아니라!)

 

▲정리하면, 임마누엘의 목적은- 심판과 돌아오게 하심

따라서 여전히 이 세상의 힘을 자신의 힘으로 삼고 있고,

이 세상의 힘의 원리를 삶의 원리로 채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임마누엘, 성탄절은 무서운 칼바람의 예고가 되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구원 받은 성도 안에도

그 심판의 대상인 자아 숭배적 삶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임마누엘의 주님을 영접한 그날부터

회개를 위한 작은 심판의 삶으로 들어가게 되어,

 

물론 그 심판의 삶은 영원한 심판에서 건지시기 위한 교육용 심판이다.

이 작은 심판들을 우리가 이 인생 속에서 자기 부인의 삶을 통하여 경험하면서

영원한 심판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그 삶은 그리 쉽지 않다.

그러한 날에 이 세상과 교회가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고 있으니까

이 얼마나 코미디인가! 크게 오해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오심은, 심판받을 이 세상과 하나님의 남은 자들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날이다.

뿐만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새생명이신 예수와

내 육신인 이 죄의 잔존이 메스로 끊어지기 시작하는 날이다.

힘든 날의 시작이 된다.

세상이 심판 받는 날이고, 우리 안의 죄의 잔재들이 심판을 받는 날이다.

그게 원래 크리스마스이다.

 

그걸 알고 메리 크리스마스를 지내자.

우리가 죽는 날, 그러나 반드시 구해내지는 날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써 우리에게 평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가운데 평화로다)가 임했다는 것은,

자기 자신만을 숭배하고, 자신의 배만을 위해 살던 이들의 삶에

철장(쇠몽둥이)이 들이닥쳐서

 

그들이 하나님께만 순종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사는 자로

만드는 일(돌아오게 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칼바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죄가 죽는 것이다.

그 일이 여러분의 삶에 일어나는 것이, 임마누엘이다.

 

이런 복음의 진의를 올바로 알면, 마냥 성탄절을 즐거워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통과한 사람에게는, 정말 참된 즐거움이다.

정말 메리 크리스마스가 되는 것이다.

 

죄의 무서움, 이 세상의 덧없음, 하나님의 크심,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이해하고, 그 나라만을 소망하는 이들에게는,

심판의 성탄이 즐거움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는 성탄은 피 비린내나는 심판의 성탄일 수밖에 없다.

그들이 그것을 모르고 그냥 즐거워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임마누엘의 주님이 오신 성탄절은,

우리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며,

그러한 우리를 세상 속에서 세상에 대하여 죽이고 계신

예수님의 함께 하심의 사역을 순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 이외에 이 세상 것들에 우리 모든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이 죄악의 현실 속으로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를 ‘바벨론’이라는 세상에 대해 죽이고 계신 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예수님이 오셨는데, 내 팔자가 왜 이 모양이야, 내 현실은 왜 여전히 이 모양이야?

이래서는 안 된다.

여러분을 바벨론 이 세상에서 죽이기 위해 임마누엘 예수님이 오셨는데,

그 일이 여러분 현실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왜 원망이신가?

뭐가 중요한 것이지, 아직 오늘날 교회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의 두 아들 이름 : 심판, 남은 자의 돌아옴

 

하나님은, 스알야숩 이후에 태어난 이사야의 2째 아들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 라고 짓게 하심으로써   사8:1~4

세상의 심판과 교회의 탄생(돌아옴, 남은자)의 이야기를 예시하셨다.

 

앞서 스알야숩은 ‘남은 자만 돌아오리라’ 라는 뜻임을 살펴보았다. 7:3

 

‘마헬살랄하스바스’는 심판이 속히 임하리라는 뜻이다.

(그래서 심판이 먼저 북왕국과 아람에게 임했다.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세상에 임하신다.)

 

지금 이 설교문의 키워드는 임마누엘, 남은자, 돌아옴 등인데

하나님이 임하시는 목적은 .. 임마누엘

①심판 .. 마할살렐하스바스

②남은자의 돌아옴이다. .. 스알야숩

 

하나님께서는 당신만을 의지하지 않는

인간 세상의 패역함을 완전히 심판하여 쓸어버리시고,

당신이 택하신 자들만 남기시겠다는 당신의 뜻을

이사야의 두 아들의 이름 안에 넣어서 경고하신 것이다.

 

이것은 지나친 억측이 아니다.

사8:18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예표를 주셨는데, 두 아들의 이름으로 주셨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임마누엘은,

심판과 남겨짐(또는 돌아옴)이라는 복음의 현실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심판(마할살렐하스바스)과 남겨짐(스알야숩)의 현실이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에게 적용되고 있다. 이것이 중요하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 죄악된 세상 속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별하여 남기실 것이라는 것과 함께,

 

당신의 백성들 속에서도, 그 죄악된 모습을 심판하여 살라버리시고,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잔재를 심판하여 살라버리시고,

순결한 당신의 백성으로 제련과 연단을 하셔서

순결한 당신의 백성들만 남기실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까 교회에 떨어진 임마누엘은,

바로 우리 안에 남아있는 죄의 잔존을 철장으로 치는 임마누엘이다.

그것이 임마누엘이다.

그러나 심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은자를 돌아오게 하신다.

 

그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 여러분 안에 임마누엘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모두 다 심판하여 죽여 버리실 수 없다.

왜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타락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존하는 대신에,

이 세상의 힘과 이 세상의 쾌락을 탐닉하고 있었다.

공의의 하나님은 그들을 모두 심판하여 죽이셔야 하는데,

그 딜레마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그 하나님의 심판을 모두 받아내실 분으로,

임마누엘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리고는 하나님 백성들, 즉 남은 자들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시고 심판을 받아내신 것이다.

 

그렇게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이미 모두 받아 낸 이들을

‘남은 자’라고 부르는 것이고,

그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현실을 삶 속에서 경험해 내야 되는데,

그 삶을 자기부인 이라고 한다.

 

내가 내 인생의 왕이 되어서

하나님마저도 알라딘의 요술 램프처럼 여기는 우리는

하나님을 그렇게 여기고 있다.

 

그런 우리의 삶 속으로 임마누엘의 주님이 들어오셔서

이 세상의 무상함과 허무함을 깨닫게 해 주시고,

그런 것들을 의지하느라 하나님을 놓아버린 인생의 비참함도

아울러 경험하게 해 주신다.

 

그리하여 결국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애굽을 향한 마음을, 이 세상의 힘을 향한 마음을 놓아버리는 자로 만들어내시는 것이다.

 

그것이 임마누엘이다.

그것이 임마누엘의 주님이 오셔서 우리 삶속에서 하시는 일이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심판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로 살려내시기 위해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세상의 죄악상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던 그 아이들이 모두 죽은 것이고,

그 가운데서 당신의 백성들이 죄와는 무관한

새로운 백성들로 살아 올라올 것임이 약속된다.

 

예수가 바로 그 일을 하러 왔다는 것을 설명해 주기 위해서,

거기에 그렇게 많은 구약의 인용문들이 들어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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