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이 이가봇보다 강력합니다 마1:21~23
Immanuel Is Mightier Than Ichabod / Jentezen Franklin Transcript
※'선지자의 메시지'도 부정적이고, 아래에 나오는 '이가봇의 영'도 부정적인 말입니다.
둘을 어떻게 구분할까요?
'선지자의 메시지'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이가봇의 영'에서 나오는 말은.. 자기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편
▲먼저 사무엘상 4장에 한 여인이 아이를 낳고 있는 장면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날은 그녀 인생 최악의 날이였습니다.
성경은 이때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훔쳐갔다고 말합니다.
이 여인은 그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언약궤, 하나님의 은총이 사라져 버렸다고 말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곧바로 다른 사람이 들어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신의 시아버지인 대제사장 엘리가
백성을 대신해 하나님 앞에 서는 그분이, 의자에서 넘어져 목을 다쳐 돌아가셨습니다."
그녀의 시아버지도 죽은 것입니다.
그 후 곧 또 다른 사람이 와 이렇게 말합니다.
"최악의 소식입니다. 당신의 남편도 싸움 중에 죽었습니다."
그때 이 여인은 아이를 낳습니다.
그리고는 이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짓습니다.
여러분, 절대로 여러분의 현재 상황이, 여러분의 미래를 이름 짓지 못하게 하십시오.
좋지 않은 시기가 있지만
그러나 지금 일어나는 안 좋은 현재의 일들이, 여러분의 미래를 이름 짓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쨋든 이 여인은 아이를 이가봇이라고 이름 짓고 곧이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내 삶에서 떠났고, 내 결혼생활과 우리 가족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
이제 좋은 날은 다 끝났고 행복은 없다. 내 삶에 이제 기쁨은 없다.
그러니 이 아이를 내 현재 상황대로 이름 짓겠다. 이 아이는 이가봇이라고 불릴 것이다."
이가봇이란 "영광이 떠났다."는 뜻입니다.
▲이제 앞으로 시간을 돌려, 본문 구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옛 선지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 1:23)
이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입니다.
이렇듯 성경에서는 두 가지의 이름이 있습니다.
저는 이 이름에서 두 가지의 영을 봅니다.
여러분은 둘 중 어떠한 태도와 영을 취할지 선택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가봇의 영을 취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떠났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냥 포기하고, 믿지 않고 희망을 버리며 꿈을 갖지 않고
하나님께서 내 삶에 위대한 일을 행하실 것을 믿지 않는 태도입니다. 이가봇의 영입니다.
아니면 우리는 크리스마스의 메시지를 듣기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은 사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게하신다는 것입니다.
선택하는 주체는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하는 이가봇의 영이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영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가봇의 영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삶은 점점 더 나빠지기만 할 뿐이야. 내 삶은 온통 방해로만 가득했어."
만약 주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러한 부정적인 영과 이러한 태도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좋은 것은 없다고 믿으며 나쁜 일만 생각하게 됩니다.
이가봇의 영에 사로잡힌 겁니다.
이가봇의 영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의 영광도, 기쁨도, 희망도, 재미도, 행복도 모두 사라집니다.
슬퍼 보이고 항상 우울해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승리의 영에 사로잡히지 않은 크리스천은 매우 많습니다.
그들은 삶의 나쁜 일이 자신을 좌지우지하게 합니다.
우리는 모두 나쁜 일들을 겪곤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요점입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마스의 진짜 메시지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는 다른 사람처럼, 힘든 일이 없이 삶을 산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힘든 일을 겪게 되지만, 그들과 같은 영에 사로잡혀 살아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나쁜 소식이 들리고, 힘든 일이나 시련이 올 때
이가봇의 영에 사로잡힌 채, 나쁜 일이 일어났으니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태도로 그 시절을 넘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임마누엘의 태도로 그 시절을 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며 하나님은 우리 편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임마누엘이 이가봇보다 강력합니다.
믿으십니까?
우리도 조심하지 않으면 이가봇의 영에 사로잡혀, 자기 삶이 짐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삶은 끔찍하고 힘든 것이라고 말합니다. 삶이 힘들다고 말하며 이가봇의 영을 자취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와 사회는 이가봇의 영으로 가득합니다.
뉴스만 봐도 이가봇의 영이 가득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그러합니다. 이가봇, 이가봇.
워싱턴 D.C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것 같습니다.
경제적으로도 그러합니다. 이가봇, 이가봇.
미국의 위대한 경제력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것 같습니다.
교육 체계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것 같습니다.
공중파 방송도, 케이블 방송도 "슬프도다."라고 말하고 이가봇, 이가봇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의 메시지는 절대 아닙니다.
교회에서 선포할 메시지는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무슨 일이 있든 어떤 상황에 직면하든, 이 나라에 도덕적으로 어떠한 일이 일어나든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것을 믿으신다면 하나님께 큰 함성으로 찬양을 돌립시다. 임마누엘!
▲저는 교회가 이러한 이가봇의 영을 받아들이는 것이 걱정스럽습니다.
요즘은 교회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흥은 어디 있나?", "하나님은 어디서 역사하시는가?"."이가봇." 이라고 말하며
기분 나쁜 영에 사로잡힙니다.
"기적도 끝났고 부흥도 끝났어. 하나님의 역사하심도 끝났어."
심지어 어떤 목사님들은 컨퍼런스를 열어서
'성령님이 더는 역사하지 않으시고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크리스마스의 메시지가 바로 "임마누엘"이라고 여러분께 선포합니다.
사도행전의 그 하나님. 맹인을 낫게 하시고 눈을 뜨게 하신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모두 영광을 돌립시다. 그분은 아직 이곳에 계십니다.
그분은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멍청한 군대처럼 하나로 행진하며 이렇게 중얼거리라고 부름 받은 게 아닙니다.
"이가봇, 주님이 우리를 떠나버리셨어! 이가봇.",
"우리는 그저 예수님이 돌아오셔서 우리를 여기서 빼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야."
아닙니다. "임마누엘"이라고 선포하십시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저는 이곳에서 목회하기 전 어린이 사역을 했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 개스토니아에서 어린이 사역 담당자였습니다.
저는 항상 설교를 아주 쉽게 풀어서 전해야 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설교를 잘 못 들으셨다면, 아주 쉽게 풀어서 전해드리겠습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옛날 옛날에 아기 닭이 한 마리 살았습니다.
아기 닭은 마당에서 모이를 쪼며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무에서 도토리 하나가 아기 닭의 머리에 떨어졌습니다.
아기 닭은 너무나도 놀라 소란을 떨며 말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있어. 하늘이 무너진다고!"
아기 닭은 칠면조에게 가서 소식을 전했습니다.
칠면조도 소식을 듣자 놀라며 소리쳤습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있어!"
칠면조는 다음으로 오리에게 가서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오리도 놀라서 쏘다니며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있어, 이가봇! 영광이 떠나버렸어."
오리는 말에게 가서 같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말도 놀라서 히힝거리며 온 마당을 뛰어다녔습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있어. 하늘이 무너진다고!"
단순히 도토리 한 개라는 작은 문제가, 아기 닭의 삶에 떨어졌을 뿐인데
아기 닭은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이가봇!"이라고 소리쳤기 때문이죠.
말은 이어서 소에게 같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저는 우리가 그와 같이 소동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소는 주위를 돌아보며 상황을 파악한 뒤 말했습니다.
"네 머리 위에 떨어진 작은 도토리 하나 때문에 온 농장을 시끄럽게 했구나."
우리 또한 그러합니다. 우리도 조심하지 않는다면
작은 도토리가 우리 머리 위로 떨어질 때
하나님의 나라 전체가 무너져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이렇게 선포합니다.
작은 도토리 같은 문제가 여러분을 덮쳤을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버리셨다고 감히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8)
하나님의 메시지는 "이가봇"이 아닙니다. "임마누엘"입니다.
여러분, 이 박자에 맞추세요.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요셉이 한 여성과 교제할 때를 생각해 봅시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였습니다. 베들레헴의 점잖은 집안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그녀와 교제하기 시작했습니다.
둘은 곧이어 결혼하기로 하고 약혼을 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어서 하나님의 사자가 마리아에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요셉이 아니라 마리아에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그녀를 성령으로 덮었고, 그녀는 하나님의 씨앗으로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마리아가 3개월간 잠적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엘리사벳을 보러가서 3개월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자기 여자친구를 3개월간 못 보았습니다.
그리고 3개월 뒤 돌아온 그녀는 임신 3개월째였습니다.
아마도 아주 안 좋은 영이 요셉을 사로잡았을 것입니다.
"이가봇, 이 관계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
마리아는 돌아와서 자기 배를 보여주며 "우리 이야기 좀 해요."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대답했겠죠. "그런 것 같네요."
"그게 아니라 천사 덕분에 이렇게 됬어요."
"천사가 아니라 악마랑 함께한 거겠죠."
"아닙니다, 이는 이가봇이 아니라 임마누엘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요셉은, 이가봇을 선택하지 않고, 임마누엘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지금의 삶이 아주 혼란스러우신 분이 계십니까?
모든 것이 혼란스럽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주님과 함께하는 많은 날에서 저는 이러한 것을 배웠습니다.
제가 이가봇이라고 생각했던 상황들은, 사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일하셨던 상황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계획을 두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삶에는 하나님이 내신 길과 목적이 있습니다.
좌절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리 힘든 시간을 지나시더라도 임마누엘의 영에 사로잡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여러분의 결혼 생활에도 임마누엘의 영을 두십시오.
다음과 같은 상황에도 이가봇의 영을 거절하십시오.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않으니 이만 끝내." 영광이 이미 떠났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처음에 사랑에 빠질 때는 모든 것이 완벽합니다.
그러나 결혼한 지 몇 개월만 지나면 시련이 시작됩니다.
몇 개월이 더 지났는데 문제가 사라지지 않으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는 새로운 관계를 찾아 나서고 싶어 하죠.
"이가봇"이라고 말하는 건 너무나도 쉽습니다.
"하나님은 이곳에 없으셔."
아니오. 여러분이 하실 것은 "임마누엘"이라 선포하시는 겁니다.
"여보, 손을 잡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셔. 이런 폭풍도 둘이서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거야.
우리 둘이 그런 마음이라면 무엇도 우리를 이길 수 없어."
이것을 믿으시는 분은 하나님께 함성으로 찬양을 드리십시오.
이것이 바로 크리스마스 이야기입니다. *성탄절 설교입니다
함께 선포해 봅시다."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옆의 분에게 이렇게 이야기해 주십시오.
"지금 당신은 '이가봇'의 상태에 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삶 위에 '임마누엘'을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하나 더 해드리겠습니다. 비행기에서 일등석에 탄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은 일등석 맨 뒤에 타고 있었습니다.
비행기를 타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일등석 뒤에는 커튼이 쳐져 있습니다.
그 뒤엔 일반석이 있습니다.
커튼이 비행기를 지성소처럼 분리하고 있는 셈이죠.
어쨋든 이 남자는 일등석의 맨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항공사에서 착오가 있었는지 승무원이 다가와 말합니다.
"손님, 죄송합니다만 지금 손님 자리에서 나오셔서 커튼을 지나 일반석 맨 앞줄에 앉아주셔야 합니다."
여러분, 두 자리는 불과 1미터 떨어져 있을 뿐입니다.
두 자리는 1미터 떨어져 있고, 의자는 10센티미터 더 클 뿐입니다.
일등석과 일반석의 물리적 차이는 그뿐입니다.
이 남자는 그 이야기를 듣고 분노했습니다. 아주 뚜껑이 열려 버렸습니다.
그리고 승무원에게 욕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이제껏 탔던 항공사 중 이 항공사가 제일 최악이군.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리고 그는 자기 짐을 챙겨 1미터를 뒤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는 일등석에서 일반석으로 강등돼 커튼을 지나 1미터를 가야 했습니다.
그는 많은 승객 앞에서 수치를 당했습니다. 곧이어 그는 자리에 앉았습니다.
우리는 채 1미터도 강등되거나 수치를 당하기 싫어합니다. 무너져버립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은 예수님께서 본질상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에서 부회장도 아니고 부하 직원도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만큼 동일한 하나님이시고
성령 하나님만큼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가 생겨날 때 그곳에 함께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이때 예수님께서도 함께하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능력이 있으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아버지, 아들, 성령님 모두이십니다.
세 분은 같은 능력을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원하여 내려오셨습니다. "내가 강등되겠소."
"한 시간, 1분간이 아니라 33년간 그렇게 할 것이오."
"땅으로 내려가 마구간에서 태어나겠소."
성경에서 제 마음을 유난히 만지는 구절은 이것입니다.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눅 2:7)
강보라는 것은 천 조각을 의미하는데요. 문자 그대로는 쓰던 천 조각이라는 뜻입니다.
도대체 마구간에서 쓰던 천 조각이 무엇이였을까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마구간과 구유를 이상화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름답지도 사랑스럽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가축 냄새, 오줌 냄새, 더러운 냄새가 진동했겠죠.
떨고 있는 아기 예수님을 덮었던 천 조각은
어딘가에 이미 쓰여졌던 오래된 천 조각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충분하지 않았는지 예수님은 더 낮아지십니다.
예수님은 성인 남자가 되어서 자기 제자의 발을 씻기십니다.
이것이 충분하지 않았는지, 발을 씻긴 제자 중 하나는
그분을 배신하고 나머지는 그분을 두고 멀리 도망갑니다.
이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았는지, 자기가 구원하러 온 자기 백성들이
그분을 구타하고 주먹질하고, 때리고, 침을 뱉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낮아짐과 수치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단순히 하늘에서 커튼을 지나 땅으로 오셨을 뿐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왜입니까?
왜 이런 일을 당하셨을까요? 바로 당신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죽어 마땅한 죄로 가득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벗어나게 할 유일한 방법은 그분이 죄가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내 죄를 대신 입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죄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리고 여러분의 죄를 하나하나 가져가셔서, 그 끔찍하고 죽음으로 가득한 죄가 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수치입니다.
하나님과 동등했던 주님이, 죄 그 자체가 되셔서 십자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저를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계절을 그저 지나 보낼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어련히 하듯이 트리 구경이나 하면서 보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잠시 멈추고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 찬양합니다. 예수님, 당신께 영광 돌려 드립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찬양하시겠습니다.
나는 찬양하리라 주님 그 이름 찬양 예수. / 크신 주 이름 나 찬양하리라.
나는 찬양하리라 주님 그 이름 찬양 예수. / 크신 주 이름 나 찬양하리라.
나는 찬양하리라 주님 그 이름 찬양 예수. / 크신 주 이름 나 찬양하리라.
예수, 예수, 예수 / 그분의 이름은 놀랍고도 놀랍네.
주님, 구원자, 예수 / 비 온 뒤 날처럼 향기로우신 분.
예수, 예수, 예수 / 하늘과 땅 모두 찬양하라.
이 땅의 왕과 왕국은 모두 멸망해도 / 놀라우신 그분의 이름은 영원하리라.
함께 기도합시다.
주 되신 예수님. 주님께 제 삶을 드립니다. 주님께 온전히 굴복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백성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구원자이십니다.
저는 오늘 제 삶을 주님께 드립니다. 제 미래를 주님께 맡깁니다.
주님을 믿습니다. 저와 함께해주심에 감사합니다. 당신이 바로 제게 임마누엘이 되셨습니다.
오늘 당신을 제 주님과 구원자로 영접합니다. 주님, 이 크리스마스에 저의 중심이 되어 주십시오.
주님께서 우리 가족의 중심이 되어 주십시오.
주님께서 우리 집안과 제 미래의 중심이 되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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