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바라보는 두 시각 요3:14~16
▲고난주간을 맞이하는 무거운 마음?
오늘은 종려 주일이고 한 주간 고난 주간으로 지킵니다.
여러분, 고난 주간이 시작되었는데 마음이 어떻습니까?
주실 은혜가 기대되어 마음이 설레십니까?
아니면 왠지 마음이 무겁고 답답하십니까?
‘이번 한 주간은 웃지도 못하겠네.’ 생각하면서 괜히 마음이 무겁고 답답하십니까?
여러분 스스로가 한번 정직하게 마음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고난 주간이 시작된다는 말을 들으면 너무나 가슴이 설레고
‘이번 주간은 올 1년 동안에 가장 은혜로운 주간, 행복한 주간이 되겠구나!’
그렇게 느껴지는 분이 있으실 것이고,
정말 고난 주간이 부담스럽고 답답한 주간이 되겠구나.
영화도 못 보겠지, 즐기던 오락도 못하겠지...
못하는 것만 잔뜩 생각하는 그런 마음이십니까?
많은 성도들이 고난 주간이 마음이 부담스럽고 무겁게 생각되어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하는 마음이 이렇게 무거운 것은 십자가를 보는 눈 때문입니다.
오늘 십자가를 보는 눈이 새롭게 열리기를 축원합니다.
◑1. ‘고통의 십자가’로 바라보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 하면 말할 수 없는 고난과 희생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난 주간이 고통스러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나도 그 고난에 동참을 해야 될 텐데...’
그래서 ‘금식도 하고, 오락은 끊어야 되겠지...’ 하면서 아주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분명히 고난이 담겨 있지만
반대적 측면, ‘십자가의 영광’도 있습니다.
그 영광을 생각하면.. 고난주간이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닙니다.
여러분, 고난주간만이라도 금식하고 오락을 끊어보십시오.
평소보다 주님과 얼마나 더 가까워집니까?
그게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모두 다 <고통의 십자가>로만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다 그러했습니다. 고난의 십자가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로마 병사들,
-마침내 예수에게 복수했다고 회심의 미소를 짓던 대제사장들과 유대교 지도자들,
-예수님의 어머니, 예수님을 따르던 눈물 흘리며 안타까워했던 여인들,
-멀리서 바라보던 예수님의 제자들,
-예수님이 마지막 운명하실 때 나타난 표적을 보고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외쳤던 백부장,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시각은 달랐지만
한결같이 그들이 본 십자가는 고통스런 십자가였습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고통스런 사형도구인 십자가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들려 올려질 것이라고 하셨는데,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들려 올려질 때의 고통은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1)
누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고통과 고난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극심한 고난의 십자가로만 말하지 않습니다.
◑2. ‘영광의 십자가’로 바라보기
▲1.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확실한 <사랑의 보증>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입니다. 사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이 여기 있으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당신의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눈이 열려야 십자가를 제대로 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정말 사랑하시는가?’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에 질문만 하고 있지, 답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도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맞나?’
내 형편, 내 되어지는 일들을 돌아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 같은 자를 사랑하실까? 나를 알기나 하실까?’
‘나도 내가 사랑스럽지 않은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까?’
‘지금 내 모습, 내 삶이 이렇게 어렵고 답답한데, 이것도 하나님의 사랑인가?’
내가 어떤 사람이든지, 어떤 형편에 있든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단언할 수 있단 말입니까?”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명백하게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억울하게, 마지못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스스로 자원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요10:11,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10:15,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가 반드시 가져주기를 원하시는 믿음이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나를 지극히 사랑하신다. 아들 예수님을 내어주시기 까지!’를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십자가 신앙이고, 이 믿음이 있어야 우리가 살게 됩니다.
▲2. 십자가는 <용서>의 표식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을 민수기 21장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 뱀을 장대에 매달아 높이 든 것에 비유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르 산에서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 길이 멀고 험하다고 하여 불평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에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불뱀을 보내 물린 자마다 죽게 하셨습니다.
그제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나와서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하고 애걸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아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하셨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구리 뱀을 쳐다본 자는 살았습니다.
장대에 매단 이 구리 뱀이, 바로 자신의 십자가를 가리키는 예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대에 달린 구리 뱀은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고 원망한 죄를 용서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려서 죽어가는 무서운 징벌에서
구원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결코 버리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년 애급에서의 노예 생활에서 구원해 준 것도 원망하고
-불기둥/구름기둥으로 인도하고 계신데도 원망하고
-하나님께서 날마다 주시는 만나조차 원망합니다.
도무지 용서하고 사랑할 것이 없는 이들인데
하나님은 회개하니 다시 용서하고 구원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십니까?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어떤 고통을 당하셨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6
▲적용1. 십자가 사랑은.. 타락한 죄인을 변화시킵니다.
혹시 오늘 이 자리에 타락하신 분이 있습니까? 탕자처럼 사시는 분이 오셨습니까?
그런 분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되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시는 것 보다 나를 더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당연히 믿어지지 않을 일입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십자가가 그 증거입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라고 분명히 그랬습니다.
즉 우리가 완전히 타락자일 때 여전히 방탕한 삶을 살 때,
위선자도 그런 위선자가 없는 그런 삶을 내가 살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를 내어주셨고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로 그 사랑을 확실히 증명하셨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삶을 살든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고 믿으면
타락한 사람은 더 타락하지 않겠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 사람이 타락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정말 믿어지면
죄 지으라고 해도 지을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이 믿음이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는 능력입니다.
구세군을 창설한 윌리엄 부스는 청년 때에도 예수를 믿었지만
온전히 변화된 삶을 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가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갈보리 언덕 같은 산을 발견하여 가보니
그곳에 십자가가 서 있었고, 거기에 한 분이 달려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청년이 오더니 십자가에 사닥다리를 놓고 올라가
이미 못 박혀 있는 예수님의 손과 발에 다시 큰 못을 박는 것입니다.
윌리엄 부스는 견디지 못하고 달려가 소리쳤습니다.
“야, 이놈아! 왜 예수님께 또 못을 박는 것이야? 이 나쁜 놈아! 그만 두지 못해!
어서 내려 와!”
그 때 그 청년이 망치질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는데,
세상에!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너는 누구냐(Who are you)?”
“나는 너다(I am you).”
그리고 깨어났습니다. 기절할 일이었습니다.
그동안 자신의 삶으로 예수님을 두 번. 세 번 다시 못 박고 살았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날 윌리엄 부스는 삶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구세군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죄 된 생활을 청산하는 것이 결심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을 때만 우리는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적용2. 십자가 사랑이.. 죄를 끊게 만듭니다.
여러분, 죄가 아무리 싫고 밉고 끊어버려야 되겠다고 생각해도 그것이 끊어집디까?
죄짓는 생활 세상 짝하고 즐기는 생활이 결심한다고 해결됩니까?
그럴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눈뜨고 나니까
죄는 한 순간에 끊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고난만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3. 십자가에서 또 하나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광>입니다.
①마귀의 권세에서 승리한 십자가의 영광
성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두셨다고 증언합니다.
골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죄와 저주와 사단을 거꾸러뜨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예수님은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십자가에 들려 올리셨지만,
그것은 곧 영광의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거기서 바로 승리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②영적 자녀를 출산하는 영광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산고에 비유하였습니다.
요16: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않느니라
요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산고는.. 처음에 고통이 있으나, 출산한 후에 기쁨이 충만하듯
십자가도.. 처음에는 고통이었으나, 후에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신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③구원의 사역을 완성하신 영광, 부활의 영광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순간 “다 이루었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고난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영광이었습니다.
부활의 영광, 영원한 주님의 나라의 영광이 십자가에 함께 하였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이것을 보아야 합니다.
▲적용3. 십자가의 영광을 볼 때... 세상 욕심이 사라집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세상 욕심이 사라집니다.
91년도에 한국 목사님이 중국 선교를 갔다가 잠시 백화점에 들렀답니다.
많은 물건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고 싶은 물건은 거의 없었습니다.
많은 가전제품들과 의류들은 있었지만, 하나도 욕심나는 것이 없었답니다.
왜냐하면 그 부분에 관해서는 당시 한국이 훨씬 앞서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백화점에 있는 물건들 보다
훨씬 디자인과 성능이 좋은 것들을 한국의 자기 집에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백화점 물건을 거저 주어도, 집에 가지고 오고 싶지 않았을 정도였답니다.
그 때 목사님은 이렇게 생각했답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본 자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욕심 없이 깨끗한 삶을 살 수 있겠구나!’
여러분, 욕심 없어지는 것이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욕심을 버릴 수 있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욕심은 모든 죄의 뿌리입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욕심이 없다면 죄도 없습니다.
어떻게 욕심이 없어질 수 있습니까?
더 좋은 것을 소유한 사람은 그보다 덜 좋은 것에 대해서 욕심낼 일이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이 그렇게 됩니다.
영생을 얻은 자는 세상 욕심이 사라집니다. 주2)
여러분도 십자가의 예수를 믿어 욕심이 다 사라졌습니까?
변화산을 체험했던 베드로가, 다메섹에서 그 영광을 체험했던 바울이 그랬습니다.
정말 십자가의 영광을 바라보고 나면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구나. 영생의 하나님 나라가 있구나.’
그 영원한 복을 내가 소유하고 나면 욕심이 다 사라집니다.
세상에 욕심으로 시험될 일이 없습니다.
욕심 뿐 아니라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십자가의 영광을 보시고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신 예수님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12:2
예수님께서도 육신을 가지셨기 때문에
처음에는 십자가의 고난이 마음에 걸리셨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내 아버지여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영광을 아셨기에 이어서 기도하시기를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고난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속에는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이 있고
영원한 영광이 그 속에 담겨져 있음을 아셨기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영광을 보고 나면.. 두려움이 사라지고온전히 순종하게 됩니다.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는, 마음에 두려움도 시험도 다 사라집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후에 제자들도 한결같이 그 십자가의 길을, 예수님을 뒤따라 같습니다...
오늘 당신이 걸어가고 있는 길에 '영광'이 있습니까?
'영광'이 있는데도, 혹시 아직 못 보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고통의 십자가'만 보고 계신 것은 아닌지요? ▣ 십자가 사상
..............................................
주1)
캔자스대학 해부학 교수 매츠키 박사는 십자가형의 고통을 의학적으로 분석했습니다.
“십자가형은 온 몸의 체중이 두 손바닥에 박힌 못에 매달려지기 때문에
피부와 살이 찢겨 많은 피가 흐르고 통증이 심하다.
또한 가슴으로부터 팔에 이르는 근육들이 극도로 팽창하여 호흡 장애를 가져온다.
숨을 내쉴 수가 없어 근육에 산소 공급이 안 된다. 그래서 심한 경련을 일으킨다.
이런 증세를 조금이라도 참으려고 죄수는 몸을 위로 치켜 올리려고 하는데
이때마다 체중은 발등에 꽂힌 못에 의지하므로 그 고통은 가중된다.”
주2)
1900년대 초반 전라도 화순에 성자라 불리웠던 이세종 선생은 원래 큰 부자였습니다,
많은 머슴을 거느리고 살았지만, 부인이 아기를 잉태하지 못했습니다.
몸에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지만 오히려 그 약의 독으로 부인이 쓰러졌습니다.
그는 어릴 때 머슴살이를 하며 부자를 부러워했지만
막상 자기가 부자가 되어 보니, 부자도 별 것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아내가 아이도 낳지 못하고 병들어 죽게 되자.. 화병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가던 한 여자가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어야 삽니다!”
하는 말을 들었는데, 그 말이 그의 귀에서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성경을 구해 읽었습니다.
혼자서 성경을 읽다가 성령을 받고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서 껑충껑충 뛰며 “내 죄를 사함 받고 구원받았네.” 하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에게 전도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 길은 이 길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빚진 모든 사람들의 빚을 무조건 탕감해 주었습니다.
마을 주변에서 그에게 빚을 지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그 빚을 무조건 탕감해 주고, 창고를 열어
가난한 사람은 누구나 와서 쌀을 퍼가게 했습니다.
그 분은 전도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를 영접한 후 평생 예수로만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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