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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이 아브라함의 딸 :눅 13; 10 ~ 17

by 【고동엽】 2023.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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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이 아브라함의 딸
본 문 :누가복음 13장 10절 ~ 17절

무척이나 인형을 좋아하는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집에 한 분의 손님이 찾아왔는데, 이 소녀는 손님 앞에서 여러 인형을 꺼내서 자기의 인형을 설명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자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인형을 좋아하는 어린아이의 밝은 얼굴을 보다가 그 아저씨는 이렇게 묻게 되었습니다. “얘야, 너는 이것들 중에 어떤 인형을 가장 좋아하느냐? 가장 사랑하느냐?” 이렇게 물었습니다. 소녀는 깊은 침묵에 잠기었다가 한참 후에 방글방글 웃으면서 아저씨에게 다짐을 받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인형을 보여 드릴 테니까요 절대로 웃으시면 안됩니다. 약속할 수 있어요?” “아, 그러지” 아저씨는 약속을 했습니다. 이 아이는 저 뒤에 있는, 코는 주저앉고 팔다리는 떨어지고 옷은 다 헤진 가장 못난 인형 하나를 들고 나와서 “제가 이 인형을 제일 좋아합니다” 그랬습니다. “어째서냐?”하고 물었더니 이 아이는 대답합니다. “이 인형이 저와 제일 오랫동안 같이 있었거든요. 오랫동안 제가 사랑한 그런 인형이고요, 둘째는 제가 이 인형을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도 사랑할 사람이 없는 못난 인형이기 때문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어린아이의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꼭 같은 이 이야기가 있답니다. 남편을 여의고 아이 넷을 데리고 하숙을 치면서 그렇게 어렵게 살아가는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하숙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 어떤 손님이 아이들을 정성껏 돌보고 위하여 수고하는 것을 보고, 그 어머니에게 물었답니다. “네 아이 중 어느 아이를 가장 사랑합니까?” 이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그것은 맏아들, 우리 첫사랑의 열매이기 때문에 제가 제일 사랑합니다.” 그러더니 곧 부인합니다. “아니올시다. 제가 둘째를 제일 사랑합니다. 둘째는 우리집 4남매 중에 하나뿐인 고명딸이거든요. 그 딸이 예뻐서, 재롱을 떨고 그래서 제가 사랑합니다. 아, 아니올시다. 아니고 막내를 제일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유복자로서 아버지 얼굴도 못 보았거든요. 그래서 제가 막내를 제일 사랑합니다.” “아니오,” 다시 부인하고 한참을 생각한 후 이 어머니는 눈물을 머금고 대답합니다. “사실은 제가 셋째를 제일 사랑합니다. 셋째는 소아마비에 걸렸거든요.” 여러분, 그런 생각 아십니까? 병든 자식을 더 사랑한다고요. 오히려 약한 자식을 더 사랑합니다. 문제의 자식을 부모는 더 사랑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공부를 잘하느니 못하느니, 인물이 잘났느니 못났느니,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고 사랑의 이유는 사랑이 있을 뿐입니다. 왜 사랑하느냐고는 묻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성경에서 보십시다. 가장 비참한 한 인간상이 나타납니다. 그는 몸이 꼬부라졌다고 했습니다. 그는 척추장애자입니다. 허리를 펴지 못하는 꼬부라진 사람입니다. 18년 동안을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장기 병자입니다. 어쩌면 누구도 이 장애자에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병중에 있어서 고침 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쩌면 온 가족들도 다 버렸고 그 누구도 이것을 소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족과 식구들로부터도 완전히 소외되고 그런 버려진 존재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귀신이 들렸습니다. 다른 말로 정신적 지체요, 이것은 의식의 부자유라는 것입니다. 말할 수도 없고 말을 들을 수도 없고. 그러니까 사랑한다고 사랑을 압니까? 준다고 고맙다고 하겠습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찌 생각하면은 인간이라고 하기에도 참 민망할 정도입니다.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몸도 병들었고 정신도 병들었고 인격도 병들었습니다. 아무 쓸모가 없는, 우리 인간의 흔히 보는 보편적 가치로 볼 때에는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버려진, 완전히 소외당한 불쌍한 청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가치론의 대표자인 R. B. 페리(Ralph Barton Perry)라고 하는 분의 그 가치론을 간단히 요약해보면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물질적 가치 사람들은 물질적 가치를 소중히 여깁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돈이 많으면 대접받고 돈이 없으면 천대받지 않습니까? 또 한 가지는 얼마나 소비하느냐? 가졌더라도 구두쇠라면 소용이 없습니다. 얼마나 돈을 쓰면서 사느냐? 이것이 사람의 가치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물질로 인해서 우리 인간의 가치가 오르고 내리기도 합니다. 또 하나는 신체적 가치입니다. 건강하고 잘먹고 튼튼하고 그리고 늠름하게 보일 때에 가치가 있습니다. 요즘에는 흔히 말하는대로 키도 한 180되고, 그렇지 않습니까? 요즘 축구선수들이 아주 인기가 많습니다. 확실히 신체적 가치가 높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렇게 해서 평가가 됩니다. 또 하나는 정신적 가치입니다. 혹은 심리적 가치입니다. 얼마나 예술성이 있느냐? 아름다움을 갖추었느냐? 사람들의 마음에 얼마만큼 아름다운 마음을 줄 수 있느냐? 또 행복을 줄 수 있느냐? 이런 것입니다. 그러나 네번째 가치는 인격적 가치입니다. 의미의 추구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목적으로 사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목적을 지향하며 사느냐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의미의 생을 사느냐 그것이 그 사람이 가치입니다. 목적이 가치를 평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인 것에 대하여, 높은 것 그것을, 영원한 것을 지향하며 살 때에 그만큼 인생의 가치는 높아집니다. 그렇습니다.
자, 이런 가치론에 한 번 준해서 여기에 있는 이 여자를 생각해보십시오. 자, 물질적 가치가 있습니까? 신체적 가치가 있습니까? 정신적 가치가 있습니까? 인격적 가치가 있습니까? 이 원리의 기준에 의해서 생각해 볼 때에 완전히 제로입니다. 어쩌면 살아있다고 하는 그 자체가 많은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그러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는 대로 예수님께서는, 잘 보십시오, 이 여자를 만나서 말씀하십니다. “이 아브라함의 딸” 여기서 예수님의 인간가치론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어떻게 보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기준에 의해서 평가하고 어떤 기준에 의해서 사람의 사람됨을 보았느냐? 분명한 것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소유로 평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지식도 아닙니다. 심지어는 그의 건강과 젊음도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님께서 평가하는 기준은 내면적 존재입니다. 아브라함의 딸,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 것입니다. 내면적 세계를 보았습니다. 겉으로는 불쌍합니다. 사람 같지도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멸시를 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식이 있든지 없든지, 소유가 있든지 없든지,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데 그것은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말이 통하든 안통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그것을 보고 우리는 사람을 대해야 되고 사람의 가치를 평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면적인 인간을 보시면서 아브라함의 딸, 선민의 딸입니다.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이렇게 소중히 여겼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면에서 보아야 됩니다.
또 한가지는 그러면서 자유를 잃어버린 불쌍한 영혼을 보신 것입니다.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는 지금 건강을 잃어버리고 특별히 마귀에게 붙들렸습니다.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부자유한 그러한 억압된 생명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현재를 볼 것이 아닙니다. 또 외형만 볼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자유가 없습니다. 무엇에 붙들려 있다는 말입니다. 스페인의 철학자 조세 오르테가(Jose Ortega Y Gasset)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그분의 재미있는 책이 있습니다. “집단의 반란(The Revolt of the Masses)”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독특한 학술용어가 쓰여있습니다. 그것은 “전문화의 야만주의”라고 했습니다. The Barbarism of Specialization, 이것이 아주 재미있는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일단 단순 지식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많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반면에 단순 무식이 있습니다. 알아야 할 것들을 모릅니다. 그래서 멍청합니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둘이 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이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유식하게 무식한 것입니다. 알아들었습니까? 아는 것 같은데 아무 것도 모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Learned Ignorance 라고 했습니다. 공부 많이 한 무식한 사람, 그것이 왜 그런가 하면 전문화 때문입니다. 너무 한쪽으로만 공부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한 번 제가 어느 잡지를 보니까 의학도 이제는 부득불 일반의학을 많이 해야하겠다는 논문을 본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의사들이 너무 전문적으로 전문적으로 공부를 하서 환자가 하나 왔을 때에 그 사람 진찰을 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공부하지 않은 것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공부한 환자가 와야 알지 내가 공부하지 않은 환자는 아무리 보아도 진찰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의학을 많이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병도 얼마나 종류가 많습니까? 그런데 의사들은 딱 하나만 공부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는 알고 다른 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모든 지식이 그렇습니다. 전문적으로 한쪽으로만 공부를 했지 너무 많이 하는 동안에 다른 공부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니 무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혹 공부를 많이 못했더라도 절대 ‘나는 무식하다’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무식한 사람들 밖에 살지 않으니까. 다 무식하니까. 왜? 전체적인 것을 모릅니다. 또 하나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치관을 모르고 있습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모르고 있습니다. 열심히 연구만 했지 왜한다는 것을 모릅니다. 심지어는 어떤 분들은 연구에 연구를 하면서 건강까지 해치고 무엇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돈을 번다고. 아니 병들어서 돈을 벌면 무엇합니까?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그러니까 무엇을 안다고 하면서 실상은 모르고 무엇을 가진 것 같은데 아무 것도 없고. 여러분, 혹시 은행 빛이 없습니까? 당신은 재벌입니다. 요즘 빚이 없는 사람은 재벌입니다. 요즘 돈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전부 다 빚입니다. 자기 돈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면 있다고 하나 아무 것도 없고, 또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일 불쌍하고 무식한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알긴 무엇을 압니까? 아는 것처럼 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모를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비웃는 이런 학설이 나와있습니다. 유식한 무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다 무엇입니까? 자기 우상화의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무엇을 아는 줄 알았는데 안다고 하는 감옥 속에 갇힌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는 줄 알고 있습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들리는 것도 없고 보는 것도 없습니다. 이 얼마나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교만의 감옥에 있고 욕심의 감옥에 있고, 혹 어떤 사람은 열등의식의 감옥에 있고, 어떤 사람은 자기 고집이라고 하는 감옥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쌍한 것입니다. 불쌍한 영혼입니다. 정말 불쌍한 사람을 볼까요? 제가 북한에 갈 때마다 늘 수수께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 어려운 사회가 이 체제를 유지하고 나아갈 수 있을까? 아, 거기는 뭐 분명합니다. 강한 체제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거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언제 이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습니다. 지금 북한을 주도하고 있는 지도자들이 6.25때, 전쟁에 그 무자비하게 폭격할 때 부모가 다 죽고 고아로 살아남은 아이들입니다. 그들이 커서 지금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본인들이 말합니다. “저는 아버지 어머니 모릅니다. 아버지 어머니를 본 일이 없습니다. 미 제국주의자 놈들이 폭격을 해서 다 죽었대요. 수령님께서 우리를 거두어주셔서 탁아소, 고아원을 거쳐서 지금 이렇게 이 나라를 위해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진짜 수령이요 진짜 어버이입니다. 어버이 수령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가 가라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죽으라면 죽습니다.” 아, 무섭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 죽인 그 놈들, 제가 복수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원한, 이 복수심에 꽉 막힌 것입니다. 여기에 붙들렸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는 것입니다. 그 복수할 마음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래서 북한이 못사는 것입니다. 무기 준비하고 전쟁 준비하느라고 거기다가 온 정력을 다 쏟다보니까 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아, 참으로 불쌍합니다. 이 변증법적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가지고 헤어나지 못합니다. 여러분, 이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속 사람은 다 우리와 같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감옥에 갇혀있는 것입니다. 어떤 악한 마음, 잘못된 생각, 증오심, 원한, 섭섭한 마음, 분한 마음에 꽉 붙들리면은 아무 것도 안보입니다. 아무 생각도 안납니다.
자, 오늘 예수님 앞에 있는 이 불쌍한 여자, 18년 동안 귀신에게 붙들려 있었습니다. 들은 것도 없고 본 것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생명만 유지했습니다. 그는 자유가 없습니다. 들을 수 잇는 자유, 깨달을 수 있는 자유, 느낄 수 있는 자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지금 메어있습니다. 속박되어있습니다. 몸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신이 완전히 속박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나 이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이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가만히 보면, 어떤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는 것, 거기에 붙들려서 자유가 없습니다. 그 공항에 나가면서 보면은 한쪽 구석에 담배 피우는 사람들 모여 앉아서 이러고 빨고 있는 것을 보면, 저는 지나가면서 한 번씩 웃습니다. ‘이 불쌍한 사람들아,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나?’ 안 그렇습니까? 이거 보십시오. 무언가 보이지 않는 끈에 매여서 무엇엔가 노예가 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뿐입니까? 그 욕심, 그 명예심, 그 벌컥벌컥 화를 내는 것, 그리고 잘못된 습관에 매인 것, 다 매인 것입니다. 다 씌운 것입니다. 확실하게 씌운 것입니다. 제정신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이해하셨습니다. ‘저는 매였다, 매였기 때문에 불쌍한 것이다, 풀어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은총의 시각에서 보셨습니다. 은혜를 +로 부여하시고 은혜 속에서 이 여자를 보았습니다. 여러분, 미래가 보여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미래가 보입니다. 애들이 장난을 칩니다. 심한 장난을 칠 때에 부모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아이가 발명가가 되려고 하나보다’ 안 그렇습니까? 고집을 부리고 뒹굴고 할 때에도 사랑의 시각으로 보면은 “쟤가 의지가 있어. 개성이 있다고 쟤가.” 그렇지 않습니까? 왜요? 미래를 보잖아요 미래를. 사랑의 시각으로 보니까 미래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를 봅니다. 이 매여있는 불쌍한 여자를 보면서 이제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고 나면 이 여자가 멀쩡한 사람이 될 것이고 그 다음에 한평생 주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간증하며 살 것을 생각합니다. 그 아름다운 여자를 생각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미래와 소망을 환하게 보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육체적으로 부자유하십니까? 물질적으로 부자유하십니까?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죄의 노예가 된 것이요, 혈기의 노예가 되고, 욕심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잘못된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된 것, 참으로 불쌍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이 아브라함의 딸을 풀어주는 것이 마땅치 않느냐? 여러분, 온전한 자유인이 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매여있는 사람들을 자유케 하는 일, 그 불쌍한 곳에서부터 자유케 하는 일이 바로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인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님 앞에 감사드립니다. 이미 깊이 매여서 헤어나지 못하던 저희들을 자유케 하심을 감사합니다. 원컨대 우리의 영혼이 말씀과 성령 안에서 온전히 자유하게 하옵소서. 또한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형제들, 지금 불쌍한 처지에 있습니다. 저들을 깊은 고통에서, 속박에서 자유케 하는 이 귀중한 사역에 우리의 뜻과 정성을 다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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