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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베푸신 큰 일을 본 사람
본 문 :출애굽기 14장 26절∼31절
우리는 지난 6월에 역사적인 세계의 큰 축제행사, 월드컵 축구경기를 감격 속에 보았습니다. 이 축구경기는 국가 대항전이었습니다. FIFA라고 하는 것은 즉 이 국제 축구연맹은 여기에 가입된 회원수가 UN회원국보다 더 많다고 합니다. 그 말은 아직 UN에 회원국으로 가입되지 못한 작은 나라들도 축구 연맹에는 가입되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큰 기구입니다. 특별히 현대 축구는 대리전쟁적 성격, 대리전쟁적 의미가 있다는 것에 깊이 생각을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생결단하고 축구경기에 임하고 온 세계가 떠들썩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독일과 잉글랜드, 독일과 잉글랜드가 축구 경기를 벌이게 되면 잉글랜드 사람들은 말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독일은 이겨야 한다. 그런가 하면 독일 사람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잉글랜드는 이겨야 한다고 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오래 전에 독일과 영국은 싸웠습니다. 전쟁을 치렀기 때문입니다. 그런 과거가 있기 때문에 어쨌든 축구에서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보통 일입니까? 대리전쟁을 치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잘 아시는 대로 오만 불손했던 불란서 축구팀이 아프리카의 세네갈에게 패했습니다. 이것은 큰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미처 모르는 엄청난 의미가 있어서 온 세계가 감격 속에 만세를 불러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오래 전에 세네갈은 불란서의 식민지였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속국을 지낸 일이 있어도 축구는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작은 나라가 별로 신통치 않은 줄 알았더니 가장 유력한 우승후보였던 불란서를 꺾어 버렸습니다. 온 세계가 깜짝 놀랐습니다. 왜 이랬을 것 같습니까? 대리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자, 남의 얘기 할 것 있습니까? 우리 한국 역시 축구 경기가 시작되면서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다른 나라에게는 다 져도 좋지만 일본에게만은 이겨야 한다, 여러분은 그런 생각을 안 하셨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절대 안 된다고, 일본에게서는 패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좀 이상하기 때문입니다. 36년 동안 우리 나라가 고생을 했지만 축구만은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마음을 알만하지 않습니까? 전부가 이런 행사였습니다. 그래서 온 세계가 떠들썩했던 것입니다. 대리 전쟁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색다른 경험을 했습니다. 월드컵 본선에 다섯번을 출전했지만 한번도 이겨본 경험이 없습니다. 일승도 못하고 패했던 그런 한국이 첫 승은 물론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의 강호들을 다 차례로 꺾고 4강에 올라갔다는 것 아닙니까. 온 세계가 깜짝 놀랐고 뿐만 아니라 7백만 인구가 거리로 쏟아져 나와서 만세를 불렀습니다. 우리 꼬마들도 “대∼한민국!”을 불렀단 말입니다. 그 속에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큰 승리를 노래했고 승리를 만끽했습니다. 그런데 더욱 신기한 것은 하나님께서 일본을 싸우지 않고 이기도록 해주셨습니다. 죄송하지만 일본과 한국이 붙었더라면 저 곽목사가 죄 많이 지을 뻔했습니다. 왜요? 일본에게는 이겨야 한다고 그 소리를 했을 것이고 패했으면 제가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그러니 일본하고 비켜가게 해주신 것에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일본하고 싸우지 않고 이겼고 그뿐 아니라 일본 사람들까지도 우리를 위해서 목소리를 높여서 한국을 응원해주었다는 말입니다. 누구도 이런 시나리오를 쓸 수는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특별한 지혜와 경륜이 여기에 있었지 않았나?’ 하고 생각을 해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무려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430년이라는 것은 정말 대단합니다. 우리는 지금 36년 가지고도 민족이 없어질 뻔했는데 430년 동안을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그저 노예로 민족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구원의 역사는 첫째, 자유적 성격이 있습니다. 억압과 고통, 노예 생활로부터 자유로운 것입니다. 벗어나는 것입니다. 출애굽적인, 자유하게 하는 성격이 있고, 또 하나는 승리의 의미가 있습니다. 애굽을 물리치고 애굽나라를 망하게 하고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싸우지 않고 이겼습니다. 이 이기는 것, 승리라고 하는 것, 승리가 자유요 자유가 승리요. 승자에게만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가 하면 이것은 기적이었습니다. 앞 뒤 어디를 보아도 어느 내용을 보아도 이것은 온전한 기적입니다. 기적이 아니고는 이런 일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보십시오. 구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창조적이고 적극적 역사였습니다. 여러분 함께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아무 능력도 없습니다. 출애굽 같은 것은 상상도 못합니다. 노예 속에서 노예로 태어나서 노예근성이 있습니다. 그대로 노예로 살다가 죽어 없어질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그저 조상적부터 옛날 이야기처럼 전해지는 전설을 따라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우리는 애굽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한 선민이다, 그렇게 연연히 교육을 했겠지만 그것은 마음속에 있는 꿈과 같은 이야기이고, 이들이 자유할 수 있다, 이들에게 해방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합니다. 그런 운동을 했었다는 이야기도 없고 그렇게 부르짖었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전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전적으로 무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하나님께서 모세와 같은 지도자를 미리 준비하시고 모세를 보내시고 그와 함께 역사하셔서 위대한 출애굽, 해방의 역사를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이 한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믿음과 순종입니다. 오직 믿고 순종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철저한 믿음을 요구했습니다. 바로 이 믿음이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적이었습니다. 사람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열 가지 재앙도 그렇고 홍해를 갈라서 들어가게 하는 이야기도 그렇고 하나에서 열 가지가 다 기적인데 여러분, 이 기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 앞에 저들이 무엇을 생각했습니까?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신학자 루우엘 하우의 Men’s Need and God’s Action이라는 책에서 현대인들은 하나같이 마음 깊은 곳에 소외감이 있다. 이 소외감의 뿌리는 불신앙입니다. 소외감의 저쪽에는 교만이 있습니다. 어쨌든 소외감 때문에 문제인데 보십시오. 자신이 자신으로부터 소외를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하는 선을 행할 수 없고 원하지 않는 죄만 짓습니다. 하고 싶은 일은 못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합니다. 그 마음에 마치 두 사람이 있는 것 같이 한 사람 속에 두 사람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싸웁니다. 그리고 항상 실패합니다. 그래서 자기 적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Self-hostility 입니다. 자기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자신보고 하는 말입니다. “야, 이놈아! 너는 무엇을 하는 것이냐? 너는 그것도 모르느냐? 이 무능한 것…” 자꾸 자신을 미워하게 됩니다. 그 결과로 무절제한 자기 사랑에 빠져서 탕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그럽디다. “그 담배, 나쁜 걸 왜 피우냐” 그러니까 “나쁘니까 피우지” 그러더군요. “몸에 해로운 것을 왜 좋아하나?” 그러니까 “빨리 죽으려고 좋아하는 거지.” 보십시오. 살고싶은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에, 아는 사람이 위암 수술을 했습니다. 그 사람은 술을 마시면 안됩니다. 의사가 술을 다시 마시면 죽는다고 그랬답니다. 그 사람이 그 말을 하면서 술 담배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아, 의사가 그렇게 말했다면서?” “말했죠.” 그럼 왜 하느냐고 그러니까 죽으라고 먹는 거라고. 보십시오. 현대인의 생활의식이 자기 소외감에 빠져서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웃과의 관계에서 또 소외감을 느낍니다. 여러 이유로 해서 그리고는 친절한 것처럼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How are you, Fine thank you 이러지만 그것은 다 치례적인 이야기이고 속으로는 다 적으로 대합니다. 적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도 나를 돕는 자도 없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는 자도 없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전부가 내가 망하기만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며 주변사람들을 전부 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해의식에 빠져있고 피해망상에 있습니다. 그래서 건드리기만 하면 터집니다. 이 모두가 자기 소외감에 빠져있고 이웃과의 관계도 소외감을 가지고 대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은혜,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면 사랑할 리가 없다는 겁니다. 자신 같은 죄인을 사랑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하여 아들을 보내서 십자가를 지게 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옛날 이야기라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운 하나님으로 대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하나님은 아십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이 말이 안도감으로 행복으로 느껴지십니까, 아니면 두려움으로 느껴지십니까? 내가 심은 대로 거둘 것이라 하면 하나님 앞에 평안함이 있습니까? 아니면 두려움이 있습니까?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 그 기적, 이것을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그 능력을 능력으로 깨닫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은혜로 받지 못합니다. 이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이 기적을 보면서 그 기적 속에 내가 있고 그 기적 속에 사랑이 있고 기적 속에 은혜가 있음을 알고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바로 그것을 못하는 것이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의 역사 속에는 심판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구원, 애굽사람에게는 심판입니다. 동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같은 사건 속에서.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로의 강퍅한 마음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무조건 바로왕을 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심판을 받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열 가지 재앙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이 바로를 볼 때에 참 미련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재앙이 내려오는 것을 보면 알 터인데 시작할 때, 하나 둘 셋쯤 받아 놓고서 정신 차리면 되지 않습니까? 열 가지 재앙을 다 받아볼 필요가 있습니까? 참 미련한 사람입니다. 그런가 하면 열 가지 재앙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열 한가지입니다. 홍해까지 따라 들어갔다가 홍해에 빠져 죽지 않았습니까? 그렇게까지 할 것이 무엇 있습니까? 그 사람은 그렇게 철저하게 완악한 사람입니다. 회개할 기회가 열 번이나 주어졌는데,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셨는데,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바로이기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닙니다. 완악하기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능력 앞에 온유 겸손하여 믿고 순종한 사람은 구원을 받고, 그 누구든, 그 능력을 거절하고 완악하고 강퍅한 사람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이 출애굽 사건 아닙니까. 그래서 히브리서 3장 13절을 보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강퍅케 됨을 면하라. 마음 악하게 먹지 마십시오. 혹 잘못된 생각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질 때에 회개하십시오. 말씀을 거절하고 강퍅해지고 또 강퍅해지고 강퍅해지면 그대로 심판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어찌 할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의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못하시는 일이 있는데,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찌하겠습니까? 이 강퍅한 사람을. 그래서 홍해에 수장되게 된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승리하셨습니다. 강퍅한 자를, 바로의 군대를 수장시키시며 큰 승리를 이루었습니다. 그 승리에 이스라엘은 편승했습니다. 그 승리를 기뻐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14장을 읽었지만 15장을 읽어 가면 한 장 전부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의 노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구원하시고 애굽의 군대를 바다 속에 던졌도다. 하나님이여 할렐루야! 감사의 노래입니다. 그 노래가 계속 이어집니다. 자유의 노래, 바로 승리의 노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마지막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보십시오. 애굽사람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 하나님과 모세를 믿었더라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셨다는 것을 믿어야 했고, 또 특별히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독수리 날개로 인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약속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큰 권능을 보았으면 이제는 믿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모세를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를 믿게 되었습니다. 모세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원망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왜요? 하필이면 왜 모세인가? 할말이 많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불평하는 사람에게는 할말이 많습니다. 이스라엘은 말합니다. 모세는 우리 온 백성이 노예로 고생할 때에 이 사람은 바로의 궁전에서 40년 동안 왕자처럼 편하게 자란 사람입니다. 맞지 않습니까? 그런가 하면 애굽사람은 하나 때려죽이고 도망을 해서 광야에 나가서 처자식을 키우면서 목자로 지내며 편안하게 40년을 지낸 사람입니다. 이런 과거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우리의 지도자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지도자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실격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종 모세를 보내노라.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같이 하셨습니다. 그 양을 치던 막대기, 지팡이 하나 이것을 들고 이 지팡이로 내려 칠 때에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같이 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는 일은 내가 하는 일이요 내가 하는 일은 모세가 하는 일이요. 하나님을 믿느냐? 또 모세를 믿어라. 나를 믿느냐? 내가 모세를 보냈다는 것을 믿어라. 저의 말을 믿으라. 저의 말은 곧 내 말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모세와 함께 했습니다. 그 모든 생애 속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이 믿음으로 애굽을 나왔고 그리고 가나안으로 향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백범 김구 선생님의 ‘백범일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속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이 어렸을 때, 소년 시절에 꿈이 관상쟁이가 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과거를 보아야 출세를 하는데 옛날에 이런 상황이 좀 부패해서 돈 없이는 과거를 보아도 소용이 없어서 자신같이 가난한 사람은 아무리 공부해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어떻게 먹고살까 했는데, 어렸을 때에 아버지께서 농담처럼 하신 말씀이 관상쟁이가 되면 돈걱정은 안하고 살 수 있다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 생각이 나서 관상을 보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관상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합니다. 많이 읽고 훈련을 쌓았습니다. 이제 관상을 보아도 될 수준에 도달했을 때에 일차적으로 거울을 놓고 자신의 관상을 보았다고 합니다. 보았더니, 관상이 아주 불길하고 자신의 관상이 아주 흉했다고 합니다. 운명이 삐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관상도 잘 못 보는데 다른 사람의 관상을 어떻게 보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망할 때에 관상 책에서 본 하나의 구절이 마음속에 떠올랐다고 합니다. 관상보다 신상이 더 좋고, 관상은 신상만 못하고 신상은 심상만 못하다. 얼굴이 아무리 좋게 생겼더라도 몸 전체가 늠름하고 건강한 것만 못하고 아무리 몸이 건강하게 잘생겼다 하더라도 마음이 잘생긴 것만 못하다. 결국은 심상의 문제이다. 마음을 닦아야겠다. 마음의 문제다. 다시 그는 공부를 시작해서 독립열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분명히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큰 권능을 보고 그 속에서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 모세에 대한 믿음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그에게 구원이 있고 구원의 노래를 지켜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57년 전, 1945년,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입니다. 그 여름에 해방이 되었습니다. 해방되기 직전에 제가 교회에 나갈 때 찬송가에서 금지 찬송이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좀 전에 부른 36장입니다. 예수를 왕으로 추대하고 찬양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니, 천황이 있는데 어떻게 예수를 왕으로 높이느냐고 해서 못부르게 했습니다. 금지 찬송이었고, 그리고 교회에 들어갈 때에 보고 그 찬송 페이지를 찢었던지 아니면 흰 종이를 붙여야 합니다. 그것을 보여주고서야 교회에 들어가 예배를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방되자마자 교회에서는 하루종일 그 찬송만 불렀습니다. “예수의 이름 권세요” 얼마나 목이 터져라 불렀는지 모릅니다. 해방 직전에는 교회 모든 종까지 모두 공출해서 어디에 가져다 놓았었는데 해방 된 후에는 종을 찾아서 달아놓고 시도 때도 없이 종을 쳤습니다. 종을 치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종을 쳤습니다. 종소리를 들으면서 다 같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유의 노래, 해방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것은 기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 은혜 안에 우리가 있음을 알고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여러분, 잃어버린 자유의 노래, 영원한 자유의 노래를 다시 불러야 하겠습니다. 이사야 43장 21절에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나의 찬송, 자유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다시 새롭게 자유의 노래를 불러야 할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도탄과 무지와 억압과 속박에서 건져주심을 감사합니다. 잃어버린 자유의 노래를 다시 찾게 하시고, 잃어버린 자유의 감격을 다시 찾아 주여, 주의 그 큰 은혜를 찬양하며 믿음을 새롭게 하고 영원 영원히 자유의 노래를 부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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