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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예수께 잡힌바 된 사람
본 문 :빌립보서 3 : 7 ∼ 14
이번 달에 발간된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특집기사는 “희망의 마라톤”이었습니다. 이 기사의 주인공이 되는 사람은 테리 폭스라고 하는 분인데 캐나다의 청년입니다. 그가 이렇게 유명해진 이유는 18세에 암으로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른쪽 다리에 의족을 하고 캐나다, 넓은 땅, 대륙을 마라톤으로 횡단하였습니다. 무려 143일 동안 5,084㎞를 뛰어서 갔습니다. 그가 마라톤을 한 목적은 ‘의족을 한 장애자도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 그 무한한 가능성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또 하나의 목적은 ‘나와 같이 암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어떤 길로든지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그 결과로 이렇게 마라톤을 하는 동안에 온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성원을 했습니다. 2340만불을 모금하게 되었고 기네스북에 최고 기금 모금가로 기록될 만큼 그렇게 훌륭한 일을 해 내었고 이 돈을 암 연구센터에 기증했습니다. 그는 사실로 불행했습니다. 어쩌면 좌절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었으나 그 불행을 딛고 일어서서 이것을 새로운 기회를 삼았습니다. 좌절 없이 새로운 역사에 도전하는 그런 생을 살아서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인생이란, 그가 누리는 자유의 한계만큼 인생은 성공한 것입니다. 돈을 벌었다고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돈의 노예가 되면 그 사람은 비참한 사람입니다. 권력을 얻었다고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있는 권력을 보다 더 얼마나 자기가 자유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벌벌 떨고 산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한때에 천하를 호령하던 권력자들을 보니까 요새 검찰청에 다니느라 바쁜데 아주 불행입니다. 어쩌면 ‘어쩌다 나는 인생이 이렇게 망가졌나’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성공실패는 그가 누리는 자유에 있는 것이란 말씀이올시다. 유명한 톨스토이는 ‘독서의 바퀴’라는 옛날 책, 고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노예이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인가에 완전히 붙들려 사는 것이 좋다. 그런데 문제는 선택된 바의 노예여야 하고 또 누구의 노예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자기 정욕의 노예가 되면 인간의 노예요, 정신적으로 보는 그것의 노예가 되면 신의 노예다』라고 뜻깊은 말을 했습니다.
요새 재미있는 기사가 신문에 난 것을 여러분도 다 보셨을 것입니다. 그저 별 이야기 아닌 것 같으나 무엇인가 많은 것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미국의 예일대학 로니 타워 박사님이 이끄는 연구팀이 6년 동안을 면밀히 연구해 가지고 내놓은 결론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공처가나 애처가는 보통 사람보다 일찍 죽는다.’ 여러분, 동의하십니까? 그럼 왜 일찍 죽느냐 하면 남편에게 의존하지 않고 남편이 아내에게 의존해서 공처가가 된다고 할 때, 이 남편은 ‘아내가 죽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과 그 스트레스 때문에 일찍 죽는다고 합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부인이 남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그런 전통적 부부관계 아래서 살 때에 남편도 부인도 오래 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집에 가서 그러세요. ‘우리 집은 오래 살겠다.’ 어떻게 생각하면 부인이 자유롭고 무언가 한다고 ‘나는 자유다!’하고 뛰는 순간 그는 벌써 또 다른 것의 노예가 되고 있습니다. 남편에게 풀리면서 무언인가에 벌써 붙들리기 시작했는데 결국은 저도 죽고 남편도 죽습니다. 뭐 연구결과가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줄 압시다.
여러분, 무언가 말해주는 것입니다. 사람은 전적으로 매이는 것, 매일만한 사람에게 선택된 그런 분에게 완전히 매여서 사는 것이 자유요 그 자유가 오히려 인간의 수명까지도 더 연장해 준다 하는 그런 결론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의 노예입니다. 명예에 매인 사람, 비참합니다. 자기 지식과 편견에 매인 사람, 아무리 생각을 바꾸려고 노력해도 못 바꾸고 끌려가는 이 불쌍한 사람, 절망의 노예요 죄의 종이 된 사람, 나쁜 습관에 걸린 사람 얼마나 비참합니까? 얼마 전에 연예인 이주일 씨가 아직 60밖에 안된 사람이 폐암으로 세상을 가면서 “담배 피우지 마세요. 담배 피우지 마세요” 하니까 전국적으로 담배 매상고가 뚝 떨어졌습니다. 얼마나 가나 했더니 넉달 후에 또 올라갔습니다. 이 담배라고 하는 것 하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불쌍한 심령입니까.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시편 128편에 보면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 도다』라고 되어있습니다. 그 잠이 무엇입니까? 자유인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모든 근심 걱정 두려움 다 없이 맘이 다 평안할 때에 잠이 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저 오는 잠이 아니라 소중한 것입니다. 자유인에게 주시는 특권입니다. 제가 여러분과 같이 이렇게 주일에 5부 예배 설교를 하고 저녁 7:30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갈 때가 많습니다. 비행장에 나가서 부지런히 비행기를 타고 한시간 후에 식사가 나옵니다. 저녁식사를 하고 나서 눈을 감습니다. 흔들어 깨워서 일어나보면은 그 때가 언제냐, 가만히 계산해 보니까 여덟시간을 잤습니다. 제가 어떤 때에 거기에 있는 스튜어디스보고 물어봅니다. “이 비행기에서 영화 상영하지 않습니까?” 라고 물어보면 “둘 다 했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런 저런 생각을 해봅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 그래서 제가 늘 감사합니다. 여러분, 잠이라는 것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심령이 자유할 때, 온전히 자유할 때 그에게 주시는 귀한 축복입니다. 여러분, 얼마만큼 자유하십니까?
오늘 본문 성경에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포로된 존재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카타르넨스텐이라고 하는 말은 ‘붙잡혔다, 포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실로 사도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예수믿는 사람을 체포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께서 길을 막으셨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바울의 반응도 전혀 개의치 않고 “다메섹으로 가라. 네가 할 일을 일러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강제로 사도 바울의 선택 여지없이 그를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를 한평생 전하며 살지 않습니까? 완전히 예수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 뒤늦게 생각했습니다. 갈라디아 1장에 보면 ‘내가 다메섹에서 포로가 된 것이 아니고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함을 입었노라’ 깨달았습니다. ‘내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했고 도대체 이 모든 사실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애초부터 어머니의 태로부터 이방인의 사도를 위하여 택함과 정함을 입었다’ 라고 깊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 뿐 아니라 고린도전서 7장 23절에 보면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므로 나는 팔린 몸이다, 나는 노예다, 나는 자유가 없다라고 말합니다. 본 훼퍼라고 하는 독일의 신학자요 또 순교자인 그 분의 “옥중서신” 이라는 작은 책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제가 젊었을 때 이 책에서 본 말을 늘 기억합니다. “나는 어떤 자일까? 이 고독한 물음이 나를 비웃는다.” 얼마나 멋있는 이야기입니까? 내가 어떤 자일까? 하나님이여 당신은 아십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어떤 자냐 물을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자일까? 라고 묻는 것 자체가 웃음거리’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확실하니까. 여러분, 그만큼 주님께 붙들렸다고 하는 확신이 있습니까?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어떤 곳에서 큰 부흥회를 인도하셨습니다. 마치고 나서 숙소로 돌아갔을 때에 점잖은 손님이 하나 찾아와서 중요한 질문을 했습니다. “오늘 목사님께서는 장차 올 미래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재림과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역사의 끝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잘 들었습니다. 한가지만 물읍시다. 목사님 자신에 대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빌리그래함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제 자신의 미래는 전혀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나의 미래를 누군가가 꼭 붙들고 계시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과거를 붙들고 있듯이 현재를 붙들었듯이 그 분이 앞으로 남은 미래도 붙들고 계십니다. 그것만은 확실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바울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고 붙들렸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아주 논리적으로 말합니다. 먼저는 목적이 붙들렸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내가 누구를 위하여 사는가? 이 자체가 주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유명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To live is Christ to die is gain. 유명한 말입니다. 사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요. 내가 살아있다는 것만 아니라 앞으로의 생까지도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렇게 목적이 주님께로 붙들렸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5장에서 그는 말합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은 다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위하여. 예수 믿는 사람은 목적의 혁명이 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살던 사람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뀔 때에 그를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크리스티아누스’ 라는 말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나는 목적이 아닙니다. 그가 목적입니다. 목적 자체가 그리스도에게 붙들린 바 되어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또한 그는 지식과 가치관이 그리스도에게 붙들린 바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자세히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여러분, 성경을 읽고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아는 것이 너무너무 고상해서, 고상해서 그래서 그리스도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삽니까? 사도바울은 그랬습니다.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너무너무 만족해서 전일에 좋아하던 것, 믿기 전에 소중히 여기고 좋아하던 것 다 잃어버리고 그 다음에 분토와 같이 배설물로 여기고 더럽게 여기고 그리고 해로 여겼다고 말합니다.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너무 좋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 행복하기 때문에.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술도 좋아하고 좀 세상적으로 사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죽으면서도 걱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나는 틀림없이 지옥 갈텐데’하고. 그런데 정말 죽었는데 베드로 사도가 문 앞에 딱 서서 이 사람보고 하는 말이 “너 천당 갈래 지옥 갈래?”라고 묻더랍니다. ‘아,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나? 어떻게 이걸 나에게 물어본다는 말이요?’ 그래서 “그러면 한 번 더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뭔데?” “나 구경 좀 하게 해주세요.” “그러게나.” 먼저 천국을 갔습니다. 흰옷을 입은 성도들과 천사와 다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뒤에서 좀 앉아있으니 따분해서 못 견디겠어요. 이게 좀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옥에 가보니 지옥에는 카지노도 있고 술집도 있고 여자들도 많고 왁자지껄한데 그게 맘에 들어요. 베드로 앞에 가서 그랬답니다. “저는 아무래도 지옥체질입니다. 그러니까 지옥으로 보내주세요” 그랬답니다. 그랬더니 “그래라”하고 보냈습니다. 가보니까 탄광 굴 깊숙이 들어가서 뜨거운 불 속에서 일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안내자에게 “이거 좀 틀리지 않습니까? 지난번에 왔던 데가 여기가 아닌데요.” 그 때 안내자가 하는 말이 “그 때에는 관광비자로 왔고 이번에는 영주권으로 왔기 때문에 틀리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 생각했습니다. ‘천국은 아무나 가나? 천국 가서 행복할 사람이 천국을 가지 체질이 지옥인데 어떻게 천국을 가나?’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이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성경 공부하는 것이 너무 행복해야 하는데 어쩌다가 교회는 와서 항상 취미는 다른 곳에 가있는 것입니다. 시간만 있으면 다른 곳에 가려고 하고. 이 사람이 어떻게 천국을 간다는 것입니까? 갔다가도 지옥에 가야지. 안 그렇습니까?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 고상합니다. 너무 만족합니다. 전에 좋아하던 것을 싹 다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했다, 유명한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운명을 바꾸었습니다. 운명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했습니다. 저는 이 요절을 사랑합니다. 그는 어찌하든지 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부활에 이르려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어 잘 살고 복 받고 오래 살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그리스도를 본 받되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을 본 받아, 그의 죽으심을 본 받아.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 한평생을 살면서 보면 나이든 사람들이 자서전을 쓴다고 하지 않습니까? 혹은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는 사람들, 그게 누구입니까? 하나같이 남보다 고생을 많이 한 사람들입니다. 잘 산 것은 자랑거리가 못됩니다. 요한 계시록을 보면요 하늘 나라의 영광된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하늘 나라에서는 가만히 보면 그리스도를 위해서 많은 고생을 한 순교자만 높임을 받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잘 산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욕먹고 오해받고 핍박당하고 매를 맞고 고생하고 얼마나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으심을 본받아 고생했느냐, 그것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인정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깨달았기에 그의 죽으심을 본 받아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에 이르려고 했습니다. 한평생 주를 위하여 수많은 매를 맞고 고생을 당하고 오해받고 비난받고 그리고 로마에서 목 베임을 당해서 죽습니다. 왜 그러했겠습니까? 그는 그리스도의 운명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에리히 프롬이라고 하는 심리학자가 그의 유고로 남긴 글을 모아서 “인간에 대한 믿음”이라는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거기에서는 현대인에 대해서 말합니다. 현대인은 전부가 상품화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상품적 가치만 인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시는 대로 이념이든 개성이건 감정이건 심지어 미소까지도 얼마 짜리 웃음이냐는 것입니다. 돈으로 계산합니다. 책을 썼을 때에 그 책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주었느냐를 묻지 않습니다. 몇 권이나 팔렸는가, 그리고 그 책을 통해서 얼마를 벌었는가? 심지어는 출판사에서도 책을 가지고 가면 딱 보고는 “이것을 팔면 좀 팔릴 것 같습니까? 장사가 될 것 같습니까?” 이것을 묻고 있다는 말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제일 굴욕적인 것이 그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것이 상품화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무가치합니다. 또 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이 말했듯이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라.” ‘너희를 위해서라면 내가 이대로 죽어도 좋다’ 이런 확신이 있습니까?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여기에 운명을 다 바쳐도 좋다’ 그런 확신이 없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권태감과 기쁨이 없는 감동이 없는 생을 산다고 말합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현대인들 집은 좋은데 잠이 오지를 않습니다. 자, 일은 하고 있는데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가져도 소용없고 되도 소용이 없고 무언가 권태감에 시달립니다. 왜? 가치관과 목적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께 잡혔다, 그 다음 말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잡혔다’는 말은 노예입니다. ‘쫓아가노라’는 것은 자유인입니다. 잡히는 것은 피동적이요 쫓아가노라 라는 것은 능동적입니다. 여러분, 잡힌 바를 잡으려고 쫓아가는 바로 거기에 성공적 삶의 비결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잡혔습니까? 죄송하지만 아내에게 잡히셨습니까? 이젠 잡으려고 쫓아가십시오 끌려가지 마시고요. 여러분이 무슨 일에 잡혔든지 그 잡힌 바 속에 있는 뜻을 알고 이제는 자발적으로 자원적으로 잡으려고 쫓아가는 바로 그런 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노년기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인생을 많이 살았다. 그런데 내가 살면 살수록 분명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내 맘대로 한 일이 하나도 없더냐, 이거예요. 여러분, 발버둥 쳐봐야 아무 소용없습니다. 문제는 이미 붙들렸습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에게 붙들려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 깊은 뜻을 알고 자발적으로 자원해서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무엇인가에 끌려오는 것처럼 살았습니까? 이제는 잡으려고 쫓아가십시오. 운동선수가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처럼 잡으려고 쫓아가는 그런 자원적인 생을 사십시오. 바울은 그리스도에게 붙잡혔습니다. 그러나 끌려가지 않았습니다. 붙잡힌 바를 잡으려고 쫓아갔습니다. 그러한 성공적인 생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알게 모르게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심을 감사합니다. 많은 허물도 있었고 실수도 있었으나 주는 분명히 우리를 붙들고 오늘 인도하심을 믿고 있습니다. 원컨대 끌려끌려 매맞으면서 여기까지 왔지만 이제는 붙잡힌 바를 잡으려고 쫓아가는 그런 능동적인 생을 살아가고 생산적인 생을 살도록 은혜와 축복을 새롭게 더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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