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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이 말씀의 능력 :행 10장 44 ∼ 48

by 【고동엽】 2023.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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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이 말씀의 능력
본 문 :사도행전 10장 44절 ∼ 48절

어느 재판장의 준엄한 사형언도문을 읽어본 일이 있습니다. 사형수를 향해서 긴 논고를 통하여 그 죄상을 낱낱이 지적하고 나서 맨 마지막 말을 이렇게 맺고 있는 것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인간이기를 이미 포기하였기에 사형에 처한다. 인간이기를 이미 포기하였기에 사형에 처한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이 무엇입니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자세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몸이 건강하다고 인간입니까? 그가 지식을 많이 얻고 공부를 했다고 해서 그것이 인간입니까? 그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인간다운 인간이어야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몸, 그것만 가지고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를 지배하는 이성이 건강해야 합니다. 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또 그 뒤에 있는 도덕성이 아주 최소한의 일말의 양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성과 감성을 주도하는 영혼이 건강하게 살아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을 때에 우리가 인간이라고 합니다. 보십시오. 시편 49편 20절에 보면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 짐승, 무엇이 사람이며 무엇이 짐승입니까? 깨닫지 못하는 사람, 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기능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짐승과 같다 라고 말합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노아 홍수 이전의 인간을 이렇게 심판합니다. 노아 홍수의 큰 심판을 앞에 두고 하나님은 사람을 이렇게 심판하십니다. 사람이 육체가 되니라. 사람, 하나님의 형상은 다 없어졌고 육체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육체와 육체의 욕망만 남았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볼 때는 하나님께서 산 자를 죽인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쓸어버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는 오직 속사람, 그가 살아있어서 사람입니다. 외형적 육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기준이 아닙니다. 인간됨의 기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병든 양심, 타락한 이성, 바로 이러한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 그 사람 때문에 세상이 어지러운 것입니다. 어쩌면 그 몇사람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 속에서 고역을 치르게 되어있습니다. 영이 이성을 주도하고 이성이 인간의 본능을 지배할 때 그런 정상적 관계에서 균형을 유지할 때에 이것이 정상적 인간입니다. 그러나 양심도 없고 이성도 없고 도덕도 없고 그리고 진실도 없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벌써 정신적으로 죽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자살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리고 발악을 하면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 속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보는 구원론은 구원론을 통합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성령이 임했다는 말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것은 영적 치유의 창조적 역사를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6장 7절에 보면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내가 떠나가는 것이 유익하다. 그래야 보혜사가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떠나간다는 말은 곧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또 다른 보혜사를 주마’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바로 보혜사요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구원의 대전제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는 그 사건이 있고 그 구속사의 역사 다음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가 임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로마서 10장 1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매우 귀중한 말씀입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복음은 들음에서 난다. 이 듣는다는 관계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들음으로만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말씀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말씀과 말씀의 관계, 말씀을 말하고 듣고 이런 관계를 인격적 관계라고 합니다. 왜 동물은 매로 지배하지 않습니까. 매를 가지고 때려서, 당근을 주든지 채찍을 주든지 매를 가지고 다스립니다. 그것은 동물적 관계요. 그러나 사람은 말로 설득하고 감동하고 말과 말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요새 아이들은 똑똑해서 유치원도 못 가는 아이들까지 말을 잘합니다. 어머니가 때리겠다고 몽둥이를 가지고 따라오면 턱 서서 ‘말로 합니다’라고 합니다. 왜 나를 동물처럼 대하느냐, 말로 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의 관계가 이렇습니다. 그것이 인간적 관계라는 것입니다.
칼바르트는 그의 교회의 교회학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삼중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홀로고삭스에게네토, 이것이 유명한 말입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어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나타났다. 그것이 바로 계시의 말씀입니다. 계시적 말씀. 사람의 모습으로 인격으로 나타난 말씀의 본체입니다. 그 다음에 기록된 말씀, 그 예수에 대한 사건, 그 계시된 말씀이 다시 기록이 됩니다. 이것이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이라고 하는 그릇에 예수 사건이 담겼습니다. 그래서 기록된 말씀. 또 세 번째는 이 말씀을 읽으며 또 해설하며 설교하고 선포하고 증거하면서 들려지는 케뤼그마, 이것은 들려지는 말씀입니다. 이 세가지 말씀을 말하는데 그래서 플러스 알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말씀을 성경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여 세상에 오셨고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가 말씀이 되고 성령의 영감을 통하여 기록되어서 말씀이 되고 오늘도 말하는 자나 듣는 자가 함께 성령안에서 말씀을 들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직 성령으로만 말씀이 말씀되는 것입니다. 기록될 때도 그렇고 해설할 때도 그렇고 말하는 자도 듣는 자도 다 같이 성령안에서 비로소 말씀이 말씀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특별히 이 말을 들으니라. 이 말씀을 듣는 순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말씀, 그 말을 하고 그 말을 듣는 순간에 성령이 임했다. 여기서 중요한 사건은 말씀과 성령이 동시적으로 역사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없다면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령이 없다면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지 않습니다. 성령과 말씀이 함께 역사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신학적으로 말할 때 말씀의 역사를 ‘객관적 계시’라 하고 성령의 역사를 ‘주관적 계시’라고 합니다. 객관적 계시와 주관적 역사가 함께 동시적으로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 되는 순간, 이것을 듣는 사람 이것을 받는 사람 속에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역사를 흔히 말하기를 예루살렘교회의 오순절이라고합니다. 유대사람들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도행전 10장은 이방인의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 오순절 사건이 성령이 임하는 사건이고 사도행전 10장은 이방사람 고넬료라고 하는 사람, 로마 군인입니다. 그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입니다. 이방인의 오순절, 이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건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예수 십자가의 사건, 말씀이 먼저 있고 성령의 감동이 있고 그리고 베드로가 가서 전파하고, 이 전파한다고 하는 것은 전파하는 사람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함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서 천사를 보내서 이미 하나님을 믿는 고넬료에게 말씀하십니다. 저 피장이 시몬의 집에 가서 시몬 베드로를 청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물론 고넬료가 베드로를 알 리가 없고 만나본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천사의 명령입니다. 그러하라고. 예루살렘 성지에 가보면 욥바에 지금도 2000년 전에 지었다고 하는 베드로가 머물렀다는 집이 지금도 있습니다. 그 바람벽에다 누군가가 엉성하게 글로 써놓았습니다. 그래서 그 앞에 서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자, 이제 베드로가 또 성령의 특별한 계시를 받고 ‘묻지 말고 먹으라. 가라’ 하는 명령을 받아서 그는 고넬료의 집에 갑니다. 베드로는 유대사람입니다. 이방사람과 상종하지 않고 뿐만 아니라 그 집에 가서 머문다거나 음식을 같이 한다거나 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가서 유숙을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그 주도하심 속에서 두 사람이 만납니다. 그 만나는 역사가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고넬료는 로마의 백부장입니다. 군인입니다만은 베드로 갈릴리 어부 촌사람이 허름한 옷을 입고 들어 왔겠지요. 들어설 때에 고넬료가 온 집안과 더불어 나가서 맞이합니다. 맞이할 때에 얼마나 간절하게 엎드려서 절을 했던지간에 베드로가 너무 죄송해서 일으키면서 “나도 사람이요 이러지 마십시오” 그럽니다. 그만큼 경건하게 맞이합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얼굴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외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모셔오라고 한 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오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를 맞이하고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교역자로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요절이 거기에 있습니다. 고넬료가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그런 순간이 옵니다. 제가 왜 그 말씀을 좋아하는지 아십니까? 지금 이 시간도 보십시오. 우리가 지금 다 어디에 있습니까? 고넬료는 말합니다. 눈 앞에는 베드로가 있습니다. 베드로라는 사람이 있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그는 지금 베드로라는 사람을 보고 있지만 영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바로 그런 관계를 카리스마적 관계라고 합니다. 여기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가끔 대학교수 친구들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대학교 강의실에서 학생 몇십명 놓고 가르칠 때에도 참 열심히 듣지 않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어떤 학생은 열심히 듣고 어떤 학생은 장난하고 어떤 학생은 낙서나 하고 있고. 가르칠 때에 전체가 똑바로 들어주었으면 좋겠는데 잘 안듣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교회에 나와보니 이 교회는 수천명이 똑바로 쳐다보고 열심히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보고 이럽니다. 재주도 좋다고. 아니 대학생은 똑같은 연령이고 똑같은 지식층인데도 안되는데 여기는 박사로부터 초등학교도 못나온 사람, 80세로부터 20세까지 여러층의 남녀노소가 다 있는데 어떻게 전체가 다 듣도록 말하느냐, 재주가 좋다고 합니다. 재주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인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제 이야기를 듣고자 여기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지금 보기는 저를 쳐다보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여러분은 분명 하나님께 마음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듣고 그래서 말하고 그래서 이해가 되고 감동이 되고 말씀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카리스마적 관계, 하나님이 보냈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그런데 베드로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이 말을 들을 때에,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순절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에 신령한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성령이 마음을 열었다는 것이 사도행전의 주제입니다. 성령이 마음을 엽니다. 딱 한 번 만나서 설교를 했는데도 한 번 듣는 사람이 예수를 영접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집을 열어서 교회를 합니다. 루디아는 그렇게 주를 영접했습니다. 성령이 마음문을 열었습니다. 낯선 사람을 만났어도 단 한 번 만나서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서는 거기에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유명한 키에르케고르라고 하는 철학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비사로서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연애편지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재미있는 비사입니다. ‘연애편지다. 연애편지는 단순한 문자가 아니다. 연애편지는 읽으면서 그 애인의 얼굴을 바라보는 듯이 읽어야 한다.’ 옳은 말입니다. 제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한국 학생이 몇 없었습니다. 그 중에 한사람, 기숙사에서도 제 옆방에 있었는데 이 사람이 결혼을 한 지 6개월 만에 부인을 데려오지 못하고 혼자서 유학을 왔습니다. 신혼기간이니까 그리워서 못삽니다. 그런데 그 분이 조금 신경질적인지 일주일에 한번씩 편지를 꾸준히 해 주었으면 좋으련만 그 부인이 편지를 잘 안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속이 타서 편지를 안한다고 하더니 강의시간에 강의가 신통치 않으면 내 옆에 앉았는데 보니까 편지를 꺼내서 쓱 봅니다. 내가 보니 다 헤어졌습니다. 얼마나 편지를 여러번 보았는지 다 헤어졌더라구요. 내가 언제 한 번 뺏아서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글씨가 엉망입니다. 그래서 내용은 잘 모르겠고 글씨가 영 시원치 않구만, 그랬더니 도로 뺏으면서 하는 이야기가 “음악 전공하는 사람치고 글씨가 그만하면 괜찮지” 그러더라고요. 그래도 자신의 마누라 편을 들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뭘 그렇게 열심히 보느냐고 하니 그게 아니고 이 편지를 손에 들면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떠오른답니다. 연애편지는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연애편지 속에는 사랑이 있고 마음이 담겼습니다, 마음. 그 사랑을 느끼고 마음을 읽어야 편지지 왜 이것은 이렇게 썼나, 왜 맞춤법이 틀렸나, 글씨가 엉망이고… 그건 아닙니다. 그렇게 비판할 성격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격적으로 보고 통합적으로 읽어야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키에르케고르의 말에 의하면 이 편지를 읽을 때에 기쁨이 있고 용기가 있고 자신감에 넘치게 되고 결국은 행복에 취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연애편지를 읽는 사람은 행복에 취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는 말씀을 듣습니다. 이 말씀에 취해서 모든 고난을 이기고 살다가 이 말씀에 의지하여 요단강을 건너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까? 이 말씀에 충만해서 너무 감격한 나머지 죽음도 불사합니다. 환난과 핍박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웃으면서 가는 사람이 바로 순교자가 아닙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델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칼바르트는 말합니다. Word of God waits for us in the Bible,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안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참 좋은 말씀입니다. 성경 안에서 기다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만납니다.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리스도와 인격적 관계를 가집니다. 카리스마적 관계를 맺습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사도행전 18장 5절에 보면 말씀에 붙잡혀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잊지 말아야합니다. 내가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성경이 나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내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 약속이 있고 사랑의 증거가 있고 사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말씀이 능력으로 다가옵니다. 그 능력 안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 인입니다. 고넬료와 그 집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기도응답으로 베드로를 영접했고 베드로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의 감동을 받고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그는 말씀에 붙들려 로마로 가서 로마 교회를 세우는 기초가 됩니다. 엄청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오직 말씀으로 오직 말씀안에서. 말씀 안에서 태어나고 말씀 안에서 양육받고 말씀에 의지하여 승리하고 말씀을 붙들고 주님 앞에 갑니다. 여러분,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이 임하며 그 속에서 창조적 역사가 나타나더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 말씀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 말씀과 함께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기록된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 새롭게 말씀을 주시고 또 말씀을 일깨워 주시고 말씀의 생명력을 재확인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여, 말씀을 사랑합니다. 이제는 내가 말씀을 읽을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의 능력에 끌리어 사는 충만한 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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