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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δεδομένα 18,185편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사죄받은 자의 믿음:막 2: 1 ∼ 12

by 【고동엽】 2023.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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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사죄받은 자의 믿음
본 문 :마가복음 2장 1절 ∼ 12절

예전에 미국에서 있었던 사건이요 또 역사적인 실화입니다. 한 살인범이 재판정에서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그의 형이 되는 사람은 아주 유명한 명사요 고위 공직에 있으면서 나라를 위해서 공헌을 많이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형은 동생이 죄를 짓고 사형장으로 나가게 된 것이 너무 마음 아파서 체면 불구하고 견디다 못해 대통령을 찾아가게 됩니다. 가서 동생을 사면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대통령은 그 형의 나라를 위한 공훈을 생각해서 사면을 허락했습니다. 형은 사면장을 받아 주머니에 넣고 그리고 감옥을 찾아갔습니다. 동생에게 그는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만일 네가 이 어려운 가운데서 사면을 당해서 자유를 얻는다면 너는 앞으로 어떻게 살겠느냐, 무엇을 하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동생은 살기 등등한 목소리로 “내게 사형 언도를 한 판사를 먼저 죽이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내가 이렇게 사형을 받을 수 밖에 없도록 불리하게 증언해준 증인들을 모조리 죽일 것입니다.” 형은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무 말 없이 감옥을 나와서 사면장을 찢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사함받은 사람은 사함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사함 받을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또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다 죄인입니다. 다만 죄인인 줄을 아는 죄인이 있고 둘째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죄인이 있고 셋째는 자기의 죄를 알지만 그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그런 죄인이 있습니다. 자기의 불행이나 자기의 죄, 이 모든 것이 나 외에 다른 사람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사회의 책임이요 이웃의 책임이라고 원망 불평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국은 회개가 문제요 회개했으면 사죄가 문제요 사죄 받았으면 사죄 받은 자로서 어떻게 사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는 아주 침묵하는 한 사람의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지만 또 병고침도 받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한마디도 말이 없습니다. 사죄받은 말없는 믿음을 소개합니다. 말없는 이 사람의 마음 속에 중요한 사건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침묵이 있었고 또 회개가 있었고 그리고 엄청난 믿음이 있었습니다. 또 순종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환자로 나왔습니다만은 맥락을 보아서 그는 분명히 친구의 충고로 나온 것 같습니다. 친구가 좋았습니다. 영국 사람들의 격언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미리 말하지 않고도, 연락 없이도 아무 때나 방문할 수 있는 친구가 하나는 있어야 한다.” 전화를 걸 것도 없고 낮과 밤을 가릴 것도 없고 아무 때에라도 찾아갈 수 있는,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는 그런 친구가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사람은 친구를 잘 두었습니다. 예수의 소문이 좌악 퍼지는데 ‘예수님은 어떤 병이라도 고칠 수 있다’ 그래서 그 친구들이 달려와서 예수님께 가자고 졸랐던 것 같습니다. 부탁을 했지만 어떤 이유인지 오늘 본문에 보면 쉽게 갈 수가 없었습니다. 침상째 들고 왔다, 그 말은 예수님 앞에 갈 마음은 있는데 가기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중병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조금만 건드리면 더 아프고 당장 죽을 것 같이 느껴졌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언젠가 한 번 환자를 방문했는데 중환자 실에 가서 면회할 때 이 분이 너무 반가워서 고개를 내가 있는 쪽으로 돌리려 하고 조금 돌리니까 벌써 혈압이 뚝 떨어집니다. 그래서 의사가 달려와서 “안정이 되어야 됩니다.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말했던 생각이 납니다. 이 사람이 누가 업고 간다던가 이렇게 되면 벌써 더 병이 어려워졌는지도 모릅니다. 또 한가지는 이 사람이 좀 부자였고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그런 귀족에 속하는 사람이 아닌가, 라고도 생각이 됩니다. 어쨌든 침상째 들고 예수님 앞에 왔습니다. 이렇게 할 때에 친구들의 권유를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가자고 할 때에 따라왔습니다. 의심도 많고 생각도 복잡했지만 그래도 친구 잘 둔 덕에 친구들이 가자고 할 때에 여기까지 따라왔습니다. 못간다고 하다가 침상째로라도 가야된다 “아 그러지.” 그만큼 친구들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권면을 받아들일 만큼의 그는 인격도 있었고 믿음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앞에 가까이 가야 하겠는데 그 집에 사람이 가득하기 때문에 용신할 틈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붕을 뚫고, 그건 쉽습니다 유대사람의 집은, 뚫고 침상을 달아내렸다. 어차피 이것은 굉장한 장면입니다. 상상을 해보십시오. 사람들이 모여있는데 지붕이 열리면서 침상이 내려옵니다. 깜짝 놀랄만한 사건이 아닙니까? 모두가 이것이 왠일인가 하고 주시했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었습니다. 왜 그런가 하니 예수님께 가까이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더 가까이 가까이, 얼굴과 얼굴을 대할 만큼 가까이 가야 되겠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예수님께 자기 자신을 보이기 위해서 이러한 비상수단을 썼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했습니다.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 사람을 구원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은 그대로 읽으면 평범하게 들리지만 언중 언(言中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환자를 보는 순간, “네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말 중에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네가 병든 것은 네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죄를 지적하는 말씀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이 먼저입니다. 모름지기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귀족이라고 한다면 더더욱 놀랐을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 있는 바와 같이 서기관들이 깜짝 놀라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네 죄 때문에 네가 병들었다, 네 병의 원인은 네 죄다, 라고 진찰하셨습니다. 판단하십니다. 이것은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순간입니다. 제가 어느날 드릴 말씀이 있어서 장로님이시면서 한의사로 계시는 분의 병원을 방문했습니다. 환자들이 너무 많아서 진찰을 하면서 “옆에 좀 앉아계십시오. 환자들을 본 다음에 말씀을 합시다” 이렇게 했어요. 그래서 제가 바로 옆 방에 의자를 놓고 앉아있는데 환자와 의사와 이야기 하는 것을 엿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의사가 환자를 딱 보면서 “아주 신경이 예민하구만요. 소화가 잘 안되시죠? 너무 화를 내지 마십시오. 속에 화가 가득찼습니다. 부부싸움 좀 하지 마시고 그리고 근심 걱정을 하지 마셔야 됩니다. 이것은 약으로 고칠 병이 못됩니다. 우선 마음을 평안하게 하셔야 됩니다.” 이렇게 몇 마디 했더니 환자가 벌컥 화를 내면서 병이나 고치지 남의 부부싸움은 왜 말하느냐고 합니다. 그거 말이 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것이 신학적 문제였습니다. 보통 중요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당신의 병은 당신 죄 때문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벌컥화를 더 내는. 그것 참 옆에서 보기가 민망했습니다. 자, 오늘 이 본문에 나타난 이야기를 봅시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침상을 달아 내려서 깜짝 놀랐는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시나 보자 했는데 첫마디가 “네 죄 때문에 네가 병들었느니라.” 직선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깜짝 놀랍니다. 이제 이 환자가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보통 사람 같으면 “내가 죽으면 그만 아니야. 왜 남의 죄를 들추는 거요?” 안그렇습니까? 지금 이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예수님의 진단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수용합니다. 북한말로 하면 접수했습니다. 그대로 접수했습니다. 그 이스라엘 랍비들의 교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든 죄 사함 받기까지는 병고침을 받을 수 없다.” 그 랍비의 교훈도 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시간입니다. 참 귀한 회개요 믿음입니다. 사람들이 보통 심리학적으로 홀로 있을 때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내 잘못이지, 다 내 잘못이야. 이거 내가 죄를 지었고…’ 이렇게 혼자서 회개하고 혼자서 뉘우칩니다. 하지만 누가 나의 죄를 지적하면 변명을 합니다. 아니라고. 그뿐입니까? 이 죄로 인해서 고난을 당하게 되면 이제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죄인이 나뿐입니까?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이것이 일상적인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 뿐 아니라 공개적으로 누가 죄를 고발한다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수용하기 어려운 시간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이 사람은 침묵함으로 수용했습니다. 말이 없습니다. 말이 없이 마음 속에서부터 ‘그렇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라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니느웨 성 이야기를 아시지요? 니느웨 성이 죄가 많아서 40일 후에 망한다고 요나 선지자를 통해서 선포하게 됩니다. 왠 낯선 사람 하나가 와서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너희의 성이 40일 후에 망한다” 하고 소리 지를 때에 니느웨 사람들은 ‘그럼, 우리가 죄를 너무 많이 지었지. 이렇게 죄를 짓고는 안되지.’ 회개했습니다. 너희는 죄 때문에 망한다, 할 때에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수용이라는 그것이 바로 회개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수없이 한다고 하면서도 벌받는 것은 싫어합니다. 그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오늘 이 사람은 진정으로 회개하고 진정으로 믿고 침묵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다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죄 사함 받았느니라” 할 때에 이 사람은 예수님의 사죄권을 인정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 서기관도 말합니다. “하나님 외에 누가 죄를 사하겠느냐?” 일상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네 죄를 사함받았느니라 할 때에 처음 만난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당신이 누군데 내 죄를 사하니 마니 할 수 있느냐’고. 여러분, 예수님의 사죄권을 인정했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엄청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되심, 하나님 되심을 믿는 그런 순간입니다. 사실로 하나님 외에 죄를 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당신이 내 죄를 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나의 죄를 사했으니 사해진 것입니다. 이것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굉장한 믿음입니다. 사죄권을 인정하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폴 틸리히라고 하는 유명한 신학자가 쓴 Systematic Theology 제 Ⅱ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이란 자신이 용납된다는 것을 용납하는 것이다.”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것을 내가 용서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선 용서를 하셨는데 나는 자신을 용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Paradoxical Acceptance 라고 하는 유명한 말을 합니다. 폴틸리히의 신학에 다시 Ⅱ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죄란 무엇인가. 죄라는 것은 소외를 말한다. 소외는 불신앙으로서의 소외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믿지않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불신앙이 있습니다. 그래서 소외라고 하는 죄에 빠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교만으로서의 소외가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하시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 의로 내 선행으로 의로워지겠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그 교만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욕망으로서의 소외가 있다고 말합니다. 자기 집착에 빠져서 영영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그 죄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롤로 메이라고 하는 유명한 심리학자는 “사랑과 의지”라고 하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자기 삶의 방향을 찾아가는 데에는 세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가 소망입니다. 소망이 없는 자는 소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유명한 빅터 프랭클이라고 하는 의사가 계신데 이분은 아우슈비츠에서, 유명한 악명 높은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3년 동안 고생하고 살아남은 경험을 가진 분입니다. 그의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일이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라는 악명높은 표지판을 붙여놓고 그리고 하루에 300 의 빵과 1ℓ의 스프를 주고 하루종일 일을 시키고 어느 때에라도 쓰러지면 그대로 가스실로 보내서 죽여버렸다. 어떤 사람은 쓰러지고 어떤 사람은 살아남았는데 이상하게도 육체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이 많이 쓰러지고 비실비실 죽어갈 것 같은 허약한 사람들이 오히려 살아남더라. 결국은 살고 죽고는 어디에 있느냐 하면 그의 마음 속에 있는 소망과 믿음이었다”고 말합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소망이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죽습니다. 또 하나는 의지입니다. 신앙적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결단입니다. 신앙적 의지를 위하여 신앙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생명을 위하여 버려야 될 것이 많습니다. 믿음을 위하여 버려야 될 것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결단이 있어야 비로소 이 어려운 고통에서도 살아남을 수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용서 받은 자신을 자기가 사랑하며 그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수없이 용서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러면서도 용서받은 감격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영 밝은 생활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회개할 뿐만 아니라 “네 죄를 사함 받았느니라” 라는 말씀과 함께 용서받은 감격이 있어야 새로운 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용서받은 나를 알고 나를 사랑하고 용서받은 저를 알고 저를 사랑해야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스펄젼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은 계산적인 믿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계산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이 사람을 보십시오. 끝까지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진정한 회개가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만한 겸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용서받은 자신에 대한 감사가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성경에 보면 일어나라 할 때에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출발을 합니다. 일어나라는 말씀에 그는 순종하여 일어나서 새로운 생의 장을 열게 됩니다. 여러분, 침묵하는 이 사람에게 이같은 위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일어나라.” 벌떡 일어났습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항상 은혜 가운데 사나 은혜를 모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면서 용서받은 줄을 모르고 사는 저희들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가버나움에 있었던 한 중풍병 환자와 같이 말이 없으나 믿음이 있고, 아무 응답이 없는 것 같으나 그 속에 진실한 회개가 있었기에 그리고 참 순종이 있었기에 자리를 차고 벌떡 일어난 것 같은, 그런 위대한 생명력이 우리 가운데 있고 그 위대한 역사가 우리에게도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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