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5.24 주일 설교(사도행전 강해 24)
사람을 보는 눈이 거듭나야 한다
사도행전 10장 9~16절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
어제 우리 모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대통령의 자리에 있었던 분이 자살을 하는 현실이 너무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앞으로 우리나라 자살 문제가 매우 심각한 사회 문제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가 자살을 한 배경에 대하여 여러 견해가 있는 것 같지만, 저는 죄의 무서움을 다시 느꼈습니다. 그가 남겼다는 유서에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 다 드러날 때, 우리는 얼마나 두려워하게 될지 새삼 느꼈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 16절에 보면 마지막 심판 때 사람들이 얼마나 두려운지 “산들과 바위야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 우리를 가리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죄가 다 드러나는 순간이 그만큼 두렵다는 것입니다.
또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느꼈습니다.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롬 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죄를 파헤치고 정죄하고 죽이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것입니다.
저는 다시 한번 우리 사회에 십자가 복음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정죄하고 판단하고 미워하고 서로 죽이고 죽는 이 무서운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십자가 복음입니다.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본성 속에 기적은 십자가로 일어납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역사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안에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어그러진 것이 회복되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 모두에게도 또 이 말씀을 여러 매체를 통해서 듣는 모든 이들의 마음 중심에도 십자가를 통해서 사랑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진정한 평화와 행복은 십자가에서만 가능합니다. 십자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장벽을 무너뜨립니다. 서로 비난하고 정죄하던 관계가 사랑과 축복의 관계로 바뀝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를 믿었다, 우리 안에 주님의 십자가가 섰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사람을 보는 눈이 바뀐 사람이 됩니다. 전에는 판단하고 정죄하고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는 눈이었는데, 지금은 용서하고 사랑하는 눈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 마음에 십자가가 선 것이 분명합니다.
십자가 복음의 가장 놀라운 능력은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는 눈이 거듭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10장 오늘 본문은 복음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을 무너뜨렸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은 도무지 무너질 수 없는 장벽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으로 해결되었습니다.
로마 백부장인 고넬료와 그 가정에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베드로도 깜짝 놀랍니다.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하게 되는가? 이 사건을 계기로 복음은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넘어가게 됩니다. 사실 이방인이란 표현은 유대인의 입장에서 표현한 것입니다. 정확한 표현으로 말하자면, 이방인이란 세계 모든 족속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것입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세계 복음화의 계획이십니다. 그러나 기가 막히게도 하나님의 계획이 복음을 전해야 되는 제자들 마음 안에 갇혀있었습니다.
실제로 복음이 땅 끝까지 나아가려면 엄청난 장벽을 넘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있는 이방인에 대한 편견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은 구원 받을 수 없어.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대상이 아니야. 이방인들은 더러워 죄인이야.’ 그런 베드로 등 제자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막혀져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10장에서 완전히 깨어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진다. 이방인들도 성령을 받을 수 있는가? 그 사실을 믿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너무 힘들었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가기까지 상당한 갈등을 겪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는가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베드로가 욥바에서 기도하던 중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는데 온갖 짐승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동물들은 유대교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짐승들이었습니다. 먹지 말아야 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소리가 들리기를 “베드로야 그 짐승을 잡아 먹으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그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인 줄 알면서도 단호하게 안 먹겠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고집, 편견이 얼마나 완강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때 두 번째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한번만 이런 일이 있어도 깨달을만한데 세 번 씩이나 동일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런 대화가 세 번이나 된 후에 그 보자기가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베드로가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일인가 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 때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서 보낸 사람이 베드로를 모셔 가려고 온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명한 지시가 있었기에 유대인인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가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환상을 통해서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기 않았다면 베드로는 안 갔을 것입니다. 이방인들과 같이 식사하는 것은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죄라고, 자기가 더러워지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고,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으리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워낙 분명하게 싸인을 주셨기 때문에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가게 됩니다. 그리고 고넬료 가정에 성령이 임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고넬료는 하나님의 눈에 든 사람입니다. 그의 삶을 세 가지로 특징짓는데 로마 백부장이었는데도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자기가 지배하는 유대인 백성을 많이 구제했고, 그리고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방인이고 정복자로서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고넬료는 눈 밖에 난 사람이었습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 고넬료가 이방인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이방인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고넬료의 모든 아름다운 일들과 신앙은 아무 것도 아니게 여겨졌습니다. 베드로가 그에게 관심 가질 이유도 없고 하나님이 그에게 관심을 두실 까닭도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만합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수제자인 사도 베드로가 어떻게 이런 편견을 가질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은 베드로도 그런 편견을 가졌다고 증거합니다. 베드로가 나중에 깨닫습니다.
34절 “하나님은 참으로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 하시고 각 나라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그렇습니다. 세계 복음화를 위한 하나님의 엄청난 계획에 의외의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편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만을 사랑하신다. 이방인은 구원받을 수 없다. 이방인은 무조건 더럽다.’ 이런 생각으로 어떻게 세계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 일이 지금 우리에게도 그대로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의 편견이 얼마나 심한지 모릅니다.
사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엄청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셨고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생수의 강이 우리 주위의 가족, 일가친척, 교우들, 직장이나 사업체 나가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흘러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것이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어떤 사람이든지 상관 없습니다. 여러분 안에 예수님이 분명히 계시느냐 하는 것만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 안에 오셨다면 여러분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구원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으로 하나님은 계획을 두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려면 사람을 바라보는 우리 눈이 먼저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도 얼마나 편견이 강한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일도 못할 정도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으셨기 때문에 이제는 꼴보기 싫은 사람 다 없어졌습니까? 또 미운 사람 ‘정말 없었으면 좋겠어. 저 사람은.’ 다 없어지셨습니까? 완전히 해결 되셨습니까? 사람을 보는 눈이 거듭났습니까? 예수 믿기 전에는 누구나 마음에 드는 사람, 마음에 안 드는 사람, 정말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 멀리 하고 싶은 사람, 나쁜 사람 꼴보기 싫은 사람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았습니까? 사람을 보는 눈이 딱 갈라져 있었습니다. ‘저 사람은 괜찮은 사람이네, 저 사람은 상종할 사람이 못되네.’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그것이 확 바뀌어버립니다. 꼴보기 싫었던 사람이 내게 너무 고마운 사람으로 사랑이 그 사람에게 흘러가는 것, 이것은 기적입니다. 예수 믿는 가장 놀라운 증거, 마음에 정말 예수님을 믿었다 하는 분명한 증거가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져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되셨습니까? 그런데 우리 안에 내가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사람을 보는 눈이 편견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교인들끼리도 그럽니다.
사람들이 가진 대표적인 편견 중 하나가 지역 감정, 출신 학교를 따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여전히 그런 편견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지역감정, 교단 문제, 출신 학교로 인한 편견이 얼마나 완고하게 자리잡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난 2005년 4월 8일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목사님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목사님 한 분이 피를 토하는 공개 회개를 하였습니다.
"해방 직후 신사참배한 목사들을 두고 마귀당이라고 하고 밥도 같이 먹지 않았습니다. 처음의 뜻은 좋았지만 내가 잘났다는 교만심이 커지고 판단만 하고 사랑은 흐려졌습니다." "평생 나 자신이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았으면서도 가장 무서운 교만 죄를 가지고 함부로 입을 열어 정죄하고 저주했던 죄를 지었습니다. 하늘 나라는 회개한 자만 간다고 했습니다. 이 교만했던 죄와 부족한 종이 바로 죽을 수 있도록 축복해주길 바랍니다."하며 목이 메인 채 고백을 마쳤습니다.
제가 어릴 때 자랐던 부산은 신앙적으로 매우 완고한 곳이었습니다.
감리교회는 이단 취급을 받았습니다. 어떤 장로 교단에서는 감리교회 목사는 강단에 세우지 않는 것이 법처럼 정해져 있었습니다.
당시는 대부분 마루 바닥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서울에서 의자에 앉아 예배드리는 교회가 생겨날 때입니다. 그 때 예배드릴 때 바닥에 앉아서 예배드려야지 절대로 의자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면 안된다고 고집하는 목사님들도 있었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보면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고 편견이었는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 안에 말도 안되는 편견이, 하나님이 절대로 그런 것을 가르친 것도 없고 성경 말씀에 근거한 것도 아닌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입관 때문에 고집 때문에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구분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눈으로 보지 않고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보는 것이 교회 안에도 얼마나 뿌리 깊은지 모릅니다.
우리의 편견 중 하나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어느 해 일본 코스타에 갔을 때 저녁 집회에서 모두 너무나 은혜로운 말씀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불쾌한 냄새가 번졌습니다. 누군가가 소리없이 실례를 했습니다. 은혜로운 표정이던 사람들이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누구야?’하는 표정으로 서로를 흘겨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가장 혐의가 짙은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 사람이 남자인데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앞만 보고 있었습니다. 모두 다 그 사람이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집회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면서 번뜩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그 사람이 당사자였을까? 아니면 그만이 실례한 사람이 미안해 할까봐 모른 척 한 것은 아닐까? 그가 오히려 성숙한 인격자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실제로는 아무 근거도 없이 우리는 그를 판단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그 순간 마귀의 솜씨를 보았습니다. 단순한 생리 작용 하나만으로도 그 훌륭한 강사님들과 믿음 좋은 청년들의 마음을 순간적으로 지배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마은 속에 끊이 없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은혜는 한 순간에 다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을 보는 눈이 바뀌었습니까? 우리에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형성되지 못한 온갖 선입관, 지식, 판단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편견 중에 가장 무서운 편견은 유대인이 이방인을 죄인 취급한 것처럼 우리도 자신과 먼 사람, 자기와 다른 사람은 죄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술, 담배, 음란, 방탕, 자살은 큰 죄로 여깁니다. 그러나 더 큰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런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경멸하고 무시하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경고하신 것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눈에 들보와 피로 비유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하니까 잘못 했다고 보이는 것이지요. 술담배가 어떻게 괜찮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음란방탕한 일을 어찌 그냥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자살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그런 사람을 내가 판단하고 정죄하는 그 마음은 그보다 훨씬 더 큰 죄라는 것입니다. 그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더 심각한 죄냐 하는 것을.
유명한 부흥사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한번은 어느 교회 헌신 예배에 초빙을 받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나니 한 평신도 지도자가 손을 들고 말했습니다. “목사님, 질문이 있습니다.”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 교인들 가운데 자주 술에 취해서 덕을 세우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징계해야 하지 않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은 대답하기를 “에베소서 5장 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그랬으니 권면해서 듣지 아니하면 징계를 해야지요. 그러나 그 뒤에 보면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 했으니 성령 충만함을 받지 못한 사람도 징계를 해야 할 것입니다.” 라고 했답니다.
술 마시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정말 성령이 충만해서 사랑이 충만하고 내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가는 역사가 없는 것은 더 큰 죄라는 것입니다. 서로 죄를 따질 것이면 정확하게 따져야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어떤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나는 괜찮은데, 저 사람은 나쁘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모릅니다. 자기도 욕심이 있으면서 남이 욕심을 부리면 비난합니다. 자기도 거짓을 품고 살면서 누가 거짓말을 하면 막 화를 냅니다. 참지 못합니다. 자기도 이기적이면서 이기적인 사람을 보면 정죄합니다. 이기주의자라고 경멸합니다. 이것이 우리입니다.
그가 정말 예수님을 만났다면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 자신이 얼마만한 죄인인가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에 동의하십니까?
많은 성도들이 전적인 타락을 분명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적인 타락이란 우리가 너무나 타락하여 우리에게는 조금도 선한 것이란 없고 내가 하는 것은 다 죄고, 우리는 이 세상 가장 흉악하고 저질스런 자와 사실상 같은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동의하십니까? 아마 동의하기를 주저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목사님, 저는 그렇지는 않는데요. 제가 죄인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악질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어느 정도 악질인가 하는 것은 십자가가 말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때문에 예수님은 죽으셔야 했고 예수님이 죽어 보배같은 피를 흘려주셨기에 비로서 우리는 지옥에 갈 자가 천국에 가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눈이 보혈로 씻음 받아야 합니다. 십자가로 처리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인 장본인들입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 악질이냐 하면 남 이야기할 자격이 없는 악질입니다. 우리는 남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 받았다고 믿는다면 당연히 나는 남의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무슨 자격이 있어서 내가 남이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장본인인데. 이것이 십자가에서 눈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지 않는데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그 전에는 정죄했고 판단했던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달리셔서 피흘리신 것을 믿습니까? 우리가 그만큼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진정 믿는다면 누구도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지 않고, 남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뿐 만 아니라 죄인이라고 정죄했던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었고 이제 예수님이 내 생명이 되어 오셨으면 당연히 예수님의 마음이 내 안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지옥에 갈 자를 용서하고 사랑하신 것입니다. 대신 당신이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그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용서 못할 사람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1907년 평양에 강력한 성령이 임하는 역사가 일어났을 때, 미국 선교사 요나단고우포스가 그 당시 일들을 기록해 두었는데, 그 책을 읽어 보면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예증하면서 그 하나의 예로 성도들의 가정에서 ‘고부’간의 변화가 일어났음을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이 선교사가 한국의 고부간의 문제는 너무나도 심각해서 도무지 해결될 수 없는 문제로 보았던 것입니다. 시댁이 싫어서 시금치도 안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의 문제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복음이 전해지고 성령충만하니 이 문제가 해결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에 대하여 불 같이 화내고, 비난하고, 욕한 적이 없었습니까?
“사람이 그럴 수 있어? 그런 사람 가만 두면 안됩니다. 그 사람하고는 못 살아. 우리 동네에서 쫓아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내보내야 해요.” 하면서 비난하고 분노했던 적은 없었습니까?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본성은 그러니까요.
우리 눈에는 마음에 드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항상 문제 많은 사람들, 정말 상종하기 싫은 사람, 같이 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주변에 많습니다. 우리가 아직 거듭나기 전에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정말 예수님 안에서 거듭났다면 눈이 열려서 ‘하나님은 내가 정죄하고 싫어하고 판단하는 그 사람을 어떻게 보실까?’ 하는 눈이 뜨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보실까요? 하나님은 내가 싫어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도 싫어하실까요? 내가 판단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도 그렇게 보실까요?
여러분이 화를 내며 정죄하고 판단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은 어떤 눈으로 보실지 생각해야 합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이 말씀에 다 감격합니다. 내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은 나를 사랑의 눈으로 여전히 보시고 당신의 독생자까지 주셔서 우리가 구원 받았습니다. 그런데 나만 그럴까요?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그 사람도 똑같습니다. 내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그 사람도 하나님은 사랑하는 눈으로 보십니다. 사랑의 대상입니다. 미워할만한 일이 있으니까 미워하고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으니까 마음에 안 드는 것이지만 우리가 아직도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이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서 주셨다고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증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 말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네가 미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네가 판단하지 말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네가 무시하지 말라” 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의 눈에 안 드는 사람 정말 문제라고 생각되는 사람, 그 사람하고는 도무지 같이할 수는 없다고 생각되는 그 사람을 향하여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니 네가 판단하지 말라, 내가 사랑하는 자니 너 그를 무시하지 말라, 내가 사랑하는 자니 네가 그를 미워하지 마라. 오늘 성령님께서 그렇게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믿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이 공산당에 의해서 비참하게 총살 당했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끔찍한 원수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손양원 목사님 마음에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공산당 청년을 용서할 뿐만 아니고 그를 양자 삼을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단 말입니다. 십자가가 그렇게 하는 것이니까. 사람의 본성으로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예수님으로 사는 정말 십자가를 통과한 성도는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5장에서 심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영광 중에 모든 천사와 함께 다시 오실 때, 모든 민족을 양과 염소로 나누어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오른편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게 되고, 왼편에 있는 이들은 저주를 받아 영원한 지옥에 들어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오른편과 왼편으로 나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교회 열심히 다닌 것이 아닙니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냐 아니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른편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40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왼편 사람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45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심판의 기준이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사람 보는 눈이 거듭났느냐 아니냐에 따라 오른편 왼편으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그들이 누구입니까?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처럼 보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주님의 오른편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다스리는 자가 되고, 그 사람들이 보이지도 않고 가까이 오는 것도 싫고 그 사람들과 관계를 하고 싶지가 않은 사람들은 예수 믿은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시간에 주의 십자가 복음으로 여러분의 눈이 정말 뜨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축복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단지 우리 안에 계시기 위하여 오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오신 것은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정죄하고 판단하고 무시하고 가까이하기 싫은 사람들 일 수 있습니다. 좋은 사람들이라면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나를 그렇게 이끌지 않아도 다 찾아가지 않습니까? 여러분, 마음에 드는 사람하고는 만나고 싶고 차라도 마시고 싶고 베풀어주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내 안에 오셨기 때문에만 일어나는 역사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그토록 찾아가고 싶은 대상, 나라면 안 갔을 것입니다. 나라면 그 사람들하고 관계 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사람을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그 사람을 여전히 사랑하시니까 나를 통과해서 그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내 안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내 편견 때문에 내 취향 때문에 예수님이 내 안에 오셨지만 나를 통과해서 그 사람에게 다가가지 못했다면 이보다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문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과하여 다른 사람에게로 다가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처칠은 세계 2차 대전 중에 독일과 싸울 때 런던 시가지는 불바다가 된 채 방공호에서 18시간씩 근무하면서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런데 독일에서 날아 온 로케트가 독일군 포로수용소에 떨어져 많은 사상자가 났습니다. 처칠은 그것을 보고 국회에 포로수용소를 좀 더 안전한 지역을 옮길 수 있는 예산 배정을 청원하였습니다. 국회의원들은 완강히 반대하였습니다. 자정까지 회의를 거듭하다가 결국 자정에 가서야 통과되었습니다. 처칠 회고록에 처칠은 그 순간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국이 승리한 열쇠였음을 아십니까? 처칠 회고록으로 처칠은 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는데, 바로 이 대목을 보고 선정하였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 때문에 사람을 보는 눈이 바뀌었습니까?
십자가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가 우리 가정과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먼저 우리에게 사람을 보는 눈이 바뀌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0장 5절 말씀처럼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여야” 합니다
방법은 십자가의 능력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복음을 믿으면 우리 눈이 바뀝니다.
얼마나 무서운 세상입니까? 서로 죽이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싸우는 곳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족들에게 또 교우들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 안에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가고 사랑의 강이 흘러가는 역사가 우리 눈이 거듭나면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 젊은이교회에서 부모 위한 특별 기도회가 있었습니다. 매 시간 눈물 바다였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부모로 인한 상처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집회 후 모든 청년들의 부모가 다 좋은 부모가 되었습니다. 기도 응답으로 부모가 변화되었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부모는 똑같습니다. 기도를 한 청년들의 눈이 변화된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에게는 좋지 않은 부모가 없습니다. 상처를 준 부모도 주 안에서는 다 좋은 부모임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부모로 인해서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십자가의 능력으로 사람을 보는 눈이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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