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5.10 주일설교 (사도행전 강해 22)
사랑을 심었더니 기적이 일어났다
사도행전 9:26-31
“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
지난 주간에 딸의 졸업식이 있었습니다. 졸업식에 참석했다가 딸에게 감사하다는 특별한 마음이 그 시간에 들었습니다. 제 딸이 어릴 때 제가 성숙한 아버지가 아니었기에 미안함이 컸는데, 잘 자라주어서 대학을 졸업한 것을 특별히 감사했습니다. 제가 성숙한 아버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딸에게 좋은 아버지로서 잘 자라도록 도와주기 보다는, 오히려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는데 어려움을 주는 그런 아버지였습니다. 한동안 제 자신이 그런 줄 몰랐습니다. 딸이 힘들어하게 되면서부터 저를 돌아보게 되면서 제게 그런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딸에게 특히 미안했던 것은 저 나름대로 사랑은 했지만 딸 아이의 입장에서 사랑을 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딸에게 특별히 미안한 것은 딸이 무엇을 잘하거나 칭찬받을 일이 있을 때 그 아이에게 칭찬해 주고 격려해 주고 인정해 주는 것이 굉장히 부족했고, 뭔가 잘못할 때는 지나치게 반응하고 또 심각하게 그 문제를 다루는 바람에 딸 마음 속에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아마 우리 모두가 비슷한 문제를 가지게 되겠습니다만 부모가 갖고 있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자녀들의 가슴에 부모로 인한 상처들이 너무 많습니다.
청소년 수련회에 가면 기도 시간에 대성통곡을 하며 기도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그 아이들이 무슨 그렇게 울며 기도할 일이 있는가 하고 상담해 보면 부모와의 관계가 대부분입니다. 부모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 자기는 부모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는 기가막힌 말을 합니다. 세상에 그런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도 왜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요? 부모님에게 야단만 맞으며 자랐기 때문입니다. 아이에게 사랑하고 격려하는 말과 시간은 너무 적고, 그것은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고 건강하게 자라고 공부하고 옆에 있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문제가 생길 경우에는 아주 심각하게 그 문제를 다루니까 아이들 마음 속에 자가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무너지고 좌절감, 부모에 대한 상처가 생기는 것입니다. 칭찬과 사랑의 표현은 너무나 드물고 잘못할 때는 늘 야단을 맞다 보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아이들이 훌륭한 인물로 자라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이 교회는 수천 명이 모이는 큰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전통적인 교회여서 예배 참석자들이 복장이나 예배 태도에 신경을 많이 쓰는 교회였습니다.
어느 날 한 중년 신사가 캐주얼한 복장에 모자까지 쓰고 참석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복장은 둘째 치고 모자라도 벗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런데 이 신사는 막무가내였습니다. 그 다음 주도 그런 복장을 하고 왔기에 예배 후 목사님이 그 분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예배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다음부터는 모자라도 벗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때 이 신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목사님과 대화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사실 저는 3년 전부터 이 교회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누구도 제게 말을 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늘에서야 여러 사람들이 제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것도 순전히 이 모자 때문에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저도 마음이 찔렸습니다. 저도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평소에는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합니다. 새로 교회에 나올 때도, 교회 봉사를 잘 할 때도, 그렇구나! 하고 보는 정도입니다. ‘저 분이 요즘에 교회를 잘 섬겨주시는구나.’ 이런 마음이 있어도 선뜻 찾아가서 애쓴다, 고맙다는 말을 섣불리 하지도 못하고 마음으로 느끼고 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문제가 있는 행동을 할 때는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지나친 관심을 가집니다. 많은 교인들이 이것 때문에 교회 생활의 진정한 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를 책망할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칭찬에는 인색하고 잘못에는 예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사람이 되면 달라집니다. 자아가 십자가에 처리되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게 되면 제일 먼저 사람을 보는 눈과 태도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정은 천국같이 바뀌고 교회 성도들 사이에 관계는 말할 수 없이 놀라운 복을 받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그 대표적인 예를 보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제외하고 세계 역사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을 들라면 사도 바울을 꼽을 수 있습니다. 역사가들은 사도 바울이 유럽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세계 역사의 중심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넘어갔다고 평가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처럼 위대한 사도로 쓰임받은 것은 사실 기적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만약 십자가의 사람 바나바가 사도 바울을 사랑으로 돕지 않았다면 사울은 실족하여 교회를 떠났거나, 무명의 전도자로서 변방에서 사역을 하다가 일생을 마쳤을지도 모릅니다. 사도 바울이 이처럼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의 사람 바나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가 회심한 사울을 믿음 안에서 사랑으로 그를 섬기고 그의 인생이 기적과 같이 변화되게 만들어주는 일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핍박자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한 후 바로 전도자가 됩니다. 그는 대단히 강직한 성격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옳다고 민는 것에는 목숨을 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큰 곤경에 빠졌습니다. 그가 담대하게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함으로 유대인들의 미움을 사고 심지어 죽이려고 하는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환영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한때 무서운 핍박자였던 사울인지라 누구도 사울이 회심하였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주동자 역할을 했고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잡아서 옥에 가두고 죽이던 사울을 기독교인들이 좋게 여길 리도 없었고 예수 믿었다는 것을 믿을 수도 없었습니다.‘또 무슨 계략이 있는 것은 아닌가?’이런 생각을 하게 했으니 사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심각한 곤경에 빠졌습니다.
그 때, 사울을 믿어준 사람이 바나바였고 바나바의 사랑 때문에 사도 바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나바가 이처럼 사울을 사랑하고 도운 것은 정말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바나바가 성령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만나고 성령님이 사울에게 임하였음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바울에게 계시하셨고 이방인 선교를 위하여 택하셨음을 알았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바나바는 지난 과거는 덮어 버렸습니다. 다 잊어 버렸습니다. 오직 사울을 도와주려고 작정을 하고 사도들에게 교인들에게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사울과 함께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바나바가 사람이 좋았다는 문제가 아닙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돕는 것은 많은 비난과 오해받을 만한 일이었습니다. 바나바에게 아무 유익이 없는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남의 일같이 여겨지니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에 대해서 잘 실감이 안 나지만,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다.
스데반은 바나바에게는 너무나 귀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스데반을 돌로 쳐죽였던 일의 주동자였습니다. 바나바인들 스데반을 어찌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사울 때문에 옥에 끌려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였던 교인들도 많았습니다. 사울은 교회 전체의 원수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울이 회심했다고 했을 때, 그러냐고 받아들이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그를 예루살렘에 데리고 가서 많은 사도들에게 소개하고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는지, 어떻게 주님께서 사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는지, 그리고 지금까지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지 제자들에게 자세히 소개하며 사울을 적극적으로 변론해 주었습니다.
제가 처음 일본 선교를 갔을 때 교인들 중에는 솔직히 일본 선교에 대해서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일본 때문에 우리나라가 겪은 어려움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분들이 교인들 중이 있으셨습니다. 다른 일도 아니고 일본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이 마음에 안내킨다, 그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분이 한국 교회 안에 여전히 있습니다. 우리가 직접 겪은 일도 아니고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난 일인데도 우리가 그 일을 마음에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면, 예루살렘에 있었던 일은 얼마 되지 않은 일입니다.
바로 나와 같이 있었던 스데반이라고 하는 믿음 좋은 동역자가 비참하게 돌에 맞아 죽어가는 일을 그것도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이 주동해서 되어진 일을 겪었고, 지금도 그 사람 때문에 붙잡혀가서 옥에서 고생하는 가족이 있는 형편에서 그런 일을 했던 사울이 이제 예수 믿었다고 이제 전도자가 되었다고 그 사람을 교회에 데리고 온 바나바를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이 선뜻 좋아서 잘했다고 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사울은 사실 당시 교회에 골치 아픈 존재였습니다.
핍박자가 예수를 믿은 것은 좋은 일지만, 당시 사울은 초신자였습니다. 그는 성숙하지 못하였을 때입니다. 얼마 전까지도 무지막지한 고집쟁이에 핍박자였습니다. 언제 다시 마음이 뒤집어 질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사울이 회심 후 곧 바로 열심히 전도하였는데,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29절)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사울 때문에 초대 교회가 그렇지 않아도 교회 핍박에서 진정될까 싶었는데 또 문제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좌충우돌하는 사울을 제자 몇 명과 협력해서 사울의 고향 다소의 자기 집으로 피신시켰는데, 그런 사울을 예루살렘에 데려온 사람이 바나바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당시 교인들로부터“너무 지나치다! 생각이 없다. 너무 위험하다! 쓸데없는 일을 저질렀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바나바는 그런 사울에게 끝까지 사랑을 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사도 바울이 되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바나바가 성령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성령께서 바나바에게 사울을 섬기고 사랑하도록 역사하지 않았다면 그런 눈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바나바의 본명은 요셉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4장 36절에 보면 사도들이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인 바나바라고 불렀습니다. 왜 사도들이 이 사람을 바나바라고 불렀을까요? 사도들이 볼 때 이 사람은 교회 안에서 늘 위로하고 격려하고 세워주는 역할을 하는데 탁월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4장 37절에 보면 바나바는 자신의 소유 전부를 하나님께 드려 주의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이유는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일을 위해서 교회가 사용해 달라고 가져왔습니다. 사람이 좋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이 아니면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나바는 또 이방인을 향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고 이방인을 위한 사도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상황을 이해하면 정말 특별한 일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당시에도 이방인 선교에 눈이 뜨인 사람은 소수였습니다. 그래서 오해를 많이 받았습니다. 바나바는 그런 일에 항상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서 더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나바는 단순히 성격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나바가 철저히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울을 사랑으로 대할 수 있었고 결국 사울을 사도 바울이 되는 기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요즘에 우리 교인들 사이에 “저 사람도 안 죽었네, 저 사람도 안 죽었네.” 하는 이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솔직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그동안 설교를 잘한 것인가 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항상 교인들을 보면서 저 사람은 죽은 사람인가 아닌가 조사를 하고 다니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눌 때 “당신은 안 죽어서 그래.”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당신 죽어야 돼!” 하거나, ‘죽었나 안 죽었나’ 평가하는 사람이라면 그 자신이 사실은 예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교인들 사이에 “죽었나, 안 죽었나.” 판단하는 일이 있다는 것은 결국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을 설교한 제게 문제가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저는 ‘죽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미 죽었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죽음 조차 노력이 아니라 믿음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죽었음을 받아들이면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 사람이 진정 죽은 사람입니다. 그도 살고 남도 살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죽었나 안 죽었나 판단하고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로 사는 자임을 보여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도 역시 복음 안에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람입니다.
성자로 추앙받던 성프랜시스가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시장을 지나가는데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제자 한 사람이 몰래 죽을 먹다가 걸렸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이 비난하며 프랜시스에게 이럴 수가 있냐며 흥분했습니다. 그때 그 말을 들은 프랜시스는 얼른 죽 한 그릇을 들고 마셨습니다. “야, 이렇게 죽이 맛이 있다니...” 다른 제자들이 눈을 동그래졌습니다.
금식하면서 금식을 깨뜨린 사람을 정죄하고 내좇으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느니 차라리 우리가 다 금식을 깨뜨리고 서로 판단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스승이 죽을 먹는 제자를 나무랐다면 아마도 그는 왕따를 당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프랜시스는 곤경에 처한 제자를 위해 스스로 규율을 어긴 것입니다. 이것이 나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아무리 귀한 십자가 복음을 알았다 하더라도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복음 안에 서있지 못하면 이것도 또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삼게 됩니다. 죽었나 안 죽었나를 서로 판단하고 끊임없이 평가하는 분위기는 십자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다른 사람들을 자주 비판한다면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선 사람은 결코 그런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가 분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보는 것이지 절대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문제가 있는데 어떻게 판단의 눈으로 보지 않을 수 있습니까?”하는 분이 혹 있을 지 모르는데, 오늘 말씀을 한번 깊이 들어보십시오.
사울은 문제 덩어리였고 그 성품이 온전히 다스려지지 않은 초신자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주 포악한 핍박자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문제점으로 본다면 사울은 문제 투성이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에서 사울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바나바라고 안 그랬겠습니까? 바나바는 사울을 볼 때 그가 가지고 있는 많은 문제를 보지 않았습니다. 바나바는 오직 하나 사울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던 것 그것 하나만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다 덮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정말 조심해야 하는 것이 교회가 율법주의적인 교회로 변하는 것입니다.
나이 30에 일찍 장로가 되었던 분이 계셨습니다. 당시 그는 교회를 향한 열심이 대단하였습니다, 그는 장로가 된 후, 장로의 사명 중 하나가 교회 안에 잘못하는 사람을 찾아내어 징계하는 것인 줄 알았답니다. 그때 한국 교회에는 한창 방언 논쟁이 일어날 때였는데 그 교회 목사님은 방언하는 것은 마귀의 역사라고 가르쳤답니다. 그래서 이 장로님은 방언하는 사람을 색출하기 위해서 새벽 기도회 끝나고 불이 꺼지자 말자 교인들 곁에 살살 다가가서 방언하는 자를 색출하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문이 나서 손수건을 입에 물고 기도하는 사람도 있었을 정도랍니다. 나중에는 한 시간 먼저 와서 기도를 한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도 한 시간 먼저 나가서 뒤로 가 엿들었을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겠습니까? 정말 십자가를 모를 때의 열심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이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알아도 어설프게 아는 자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실족하게 만듭니다.
방언 논쟁으로 한국 교회는 쓸데없는 논쟁을 오래 했습니다.“방언하는 것은 마귀 역사야!”“방언 못하면 구원도 못받은 거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사울에게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마가라는 사람도 사랑으로 세웠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그 이유는 마가 때문입니다. 1차 전도 여행 때 마가는 도중하차를 했습니다. 아직 젊은 나이에 견디기 힘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선교 팀에 큰 타격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2차 전도 여행을 떠나려고 의논할 때, 마가가 문제가 된 것입니다.
바나바는 마가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자고 제안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반대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바나바의 격려와 사랑을 통하여 일어섰지만 마가를 데리고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마가는 아직 준비가 안된 사람이며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갈라졌습니다.
결국 바나바는 마가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 바울과 따로 전도 여행을 떠났습니다. 바울과 갈라서기까지 하면서 마가를 배려했습니다. 그 후 마가가 잘했습니다. 나중에 바울에게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을 쓸 정도로 큰 일꾼이 됐습니다. 그때 바나바가 마가를 포기했었더라면 아마 마가복음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을 심었더니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바나바는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바나바는 사람을 볼 때 오직 하나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이나 마가나 다 당시 교회에 골치 아픈 사람이었습니다. 수많은 인간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오직 그 사람 안에 있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충분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였다면 그를 믿어주었고 오직 사랑만 쏟아 부어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실까요? 인물입니까, 배경, 능력입니까?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일 다른 인간적인 조건을 보신다면 우리 중에 누가 하나님 앞에 담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다 골치 아픈 존재가 아닙니까? 문제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만 보십니다. 나 죽고 예수로 사는 복음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지 아무 것도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당신 자신보다 더 사랑하십니다. 아멘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소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고 바나바의 마음이었습니다.
여기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공원에서 운동을 하려고 걷고 있는데 앞에 가던 한 아주머님이 전화하는 소리를 들으셨답니다. “여기 어린이대공원이야! 그 웬수 밥 차려주고 운동하러 나왔어.” 그래서 한 번 더 쳐다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그 원수와 함께 살면서 밥까지 차려주는 분이니까 대단한 사람으로 보였답니다.
원수에게 밥 차려 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기 시작하면 사람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사랑을 심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어느 사모님의 간증을 듣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들이 장성해 가면서 아들의 배우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답니다. 잠언 31장에 나오는 하나님을 경건하게 섬기는 현숙한 여인이 며느리로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말하는데, 순간 가슴이 덜컥하더랍니다. “주여, 그 여자입니까?” 아들이 잘 선택하였을지 확신이 들지 않아서 간절히 기도하였답니다. “주여, 제가 기도하던 그 여자입니까?”
그 때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 아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이인데 내가 누구에게 보낼까 생각하다가 너의 가정에 보내야 하겠다고 결정하였다.’ 하나님의 응답을 듣고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 보다 그 아이를 더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답니다. 그리고 대답하였답니다. “예 주님, 제가 그 아이를 무조건 사랑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어려서 부모에게 마음의 상처가 있는 사람이라, 시어머니에게 엄마라고 말도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랑만 하기로 결심하였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이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결혼한 지 한해 두해 지나면서 며느리로부터 “엄마” 라는 말 한마디를 듣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는데, 기도 중에 “그마저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앞으로 영원히 엄마라는 말을 못 들어도 상관없어요.” 하고 고백하였답니다. 그런데 그 날 며느리가 출근하면서 불쑥 “Mammy!" 하고 부르더랍니다. 얼마나 감격하였는지 모른답니다.
제가 그 사모님의 며느리와의 관계를 듣게 된 계기도 그 주간에 결혼 5년 만에 처음 며느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화가 날만한 일인데도 그 사모님은 하루종일 꿈꾸는 것처럼 그렇게 행복해하셨습니다.
사랑을 심으니까 그 가정 안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그렇게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기적, 가정의 기적, 교회의 기적은 십자가를 통해서 옵니다. 십자가는 비로서 우리를 사랑할 수 있게 해줍니다. 아무 조건 없이 그 상대방을 진심으로 위하여 주님의 마음으로 섬기고 사랑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모든 기적이 다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도 또 우리 교회에도 십자가로 인한 사랑의 기적이 수도 없이 일어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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