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명, 주께 있습니다 요일5:6~13
◑생명이 풍성하기를 구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나는 영생을 얻었다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내 안에 있는 이 영원한 생명이, 풍성하기를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요10:10절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계획은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자 생명을 가지고는 있는데, 풍성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중환자실에 있는 사람도, 살아있는 사람이죠.
그러나 그는 생명이 풍성하지 않고, 겨우 생존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영생을 가진 사람도 똑같습니다. 비유적으로 말씀하면 영생은 가졌지만
그 사람이 진짜 영생을 가졌는지 안 가졌는지를, 어떤 때는 전혀 알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냥 보기만 해도, '아 이 사람에게는 생명이 충만하구나.'
말만 조금만 해보고 같이 무언가 조금 같이 일을 해보면
‘아 이 사람에게는 정말 영원한 생명이 영생이 그 능력이 충만하구나.’ 느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그 생명이 넘치는 삶을 우리가 살지 못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교리로 아는 것을 가지고는, 결코 생명이 풍성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영원한 생명이 우리의 삶속에 풍성해서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되는 데는
살아계신 주님과 살아있는 관계가 맺어져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 요한사도가 이 요한서신을 썼을 때
요한사도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아는 정도만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셨어요. 요한사도와 부활승천하시고 난 다음에
요한사도의 마음에 예수님은 성령으로 임하셔서
요한사도는 예수님이 자기와 같이 계신 것을 알았어요.
그랬기 때문에 이런 성경이 쓰여 진 겁니다.
▲요한사도는 그저 영생을 가진 사람정도가 아니고, 그 생명이 풍성한 사람이었어요.
나이는 많이 들었습니다.
밧모섬에서 말할 수 없는.. 정말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사도에게는 예수님의 생명이 풍성했습니다. 왜요?
주님이 같이 계셨으니까, 살아계신 주님이 함께 계셨으니까요!
요한사도가 고백했어요. 그가 요한일서 1장 3절에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입니다.’
요한사도는 예수님과 사귀고 있었어요.
마치 육신으로 계실 때와 똑같이, 그 보다 더 놀랍게 요한사도 안에 계셨으니까
요한사도는 우리에게도 그렇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도전하십니다.
요일2:28 ‘그러므로 자녀 된 이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세요. 예수님 안에 있으십시오.
오늘 본문말씀 요한일서 5장 12절
‘그 아들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생명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아들을 모시고 있지 않은 사람은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게 뭔지 아시잖아요. 부모님을 모시고 있어요.
우리가 지금 그게 뭔지 아시잖아요. 그와 똑같이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다고요.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어도, 예수님을 정말 마음에 모시고 산다는 것을
정말 아는 사람은, 그 생명이 풍성하다는 겁니다.
그저 예수님이 내 마음에 계시다.. 이것을 교리적으로 지식으로 아는 게 아니고
정말 예수님을 내가 마음에 모시고 살아요.
요한사도에게 있는 이 놀라운 생명의 역사는, 바로 그것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요한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자는 ‘마음에 영생을 가졌다’는 증언이 있다고 했어요.
본문 요일5:10절에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그 증언을 자기 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시는 여러분, 여러분 안에 증언이 있어요.
여러분 속에 바깥에서 들으려고 할 필요 없이,
지금 여러분 마음속에, 여러분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증언이 있다니까요.
여러분이 주님으로부터 그 증언을 들으세요.
예수님과 이렇게 <살아있는 관계> 속에 여러분이 사셔야
여러분 안에 생명은 엄청난 역사를 일으키게 됩니다.
저의 부친이 세상을 떠나시고, 어머님이 이제 혼자 사시는데
얼마 전에 큰 수술을 하셨어요.
어제 설날에 병원에 찾아뵙고 그렇게 병원에서 그냥 세배를 드리다시피 인사를 드렸는데
저희 어머님이 그런 말씀을 하세요.
‘나는 죽는 게 두렵지는 않아’ 그러시면서
‘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사는 재미가 없어’
너무 마음에 낙심을 하고 계신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뭐 항암치료도 안 받으시겠다 그러시더니 사는 재미가 없다는 것이에요.
혼자되시고 나니까, 병원을 나오면서 아들 된 제 마음이 힘들더라고요.
‘어머님 심정이 그러신 심정이시구나.’
여러분 우리도 언젠가는 혼자 있을 때가옵니다.
사랑하는 사람 다 떠나고, 나 혼자만 남을 때가옵니다.
그런 상황에 나 혼자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여러분은 무슨 재미로 사실 것이에요?
여러분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눈이 열리지 않으면
그 때는 여러분 어떻게 견디실 것이에요?
혼자 있는 정도가 아니고, 사방에서 나를 죽이려고 하고
사방에서 그럴 때는, 또 어떻게 견디실 것이에요.
여러분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 말로만 들은 게 아니고, 설교 때만 들은 게 아니고
진짜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알고, 그 주님과 교제하는 깊은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견디실 것이에요? 무엇부터 준비하고 사셔야 됩니까?
▲참 생명이신 주님, 그 주님과 깊은 교제, 인격적인 교제, 친밀한 교제부터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을 헛살지 않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기뻐하는 뜻대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주 예수님이 마음에 계시다는 것을, 들은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 그래서 주님과 깊이 교제하며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며,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게 생명이니까요. 예수님은 생명이세요. 영원한 생명! 가장 중요한 거잖아요.
우리가 왜 풍성한 삶을 못 삽니까?
생명을 소홀히 여기니까, 그리고 자꾸 세상을 바라보니까,
이것 저것 내 마음속에 자꾸 들어와요.
예수님 말고도 이렇게 사니까, 정작 예수님의 영원한 참 생명의 역사는
내 속에서 다 죽어버리는 겁니다.
‘아휴 목사님 너무 융통성이 없으시네. 어떻게 그렇게 숨 막히게 살아요?
오직 예수 오직 예수 어떻게 그렇게 살아요?’ 그렇게 말씀하실 분들이 계실 겁니다.
여러분 부부사이는 어떠신가요? 부부사이에 좀 융통성 있게 살아보겠습니까?
‘부부사이에 어떻게 당신만 바라보고 살라는 말이야? 세상에 이렇게 여자가 많이 널려 있는데?’
‘이렇게 남자가 많은데, 어떻게 당신만 바라보라는 것이에요?’ 한 번 그렇게 살아보실래요?
하물며 주님과의 관계는 어떻겠습니까.
오직 예수가 안 되니까 헤매고 사는 것이에요.
아무리 세상에서 기쁨을 얻어 보려고 해보세요.
진정한 생명의 풍성함이 없는 사람이, 무슨 세상에서 위로가 있겠으며, 승리가 있겠습니까?
문제는 갈망입니다. 오직 주님을 향한 갈망
내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 그 분을 향한 갈망!
그것이 있다면.. 그러면 다 얻은 것입니다.
▲백부장 선교사(가명)는 지금 아주 어려운 지역에서, 순교를 각오하고 그곳에 가 계십니다.
그는, 자기가 은혜에 눈이 열리게 된 과정을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자기 아버님이 장로님이셨고, 교회를 지으신 분입니다.
대단한 헌신적인 분이고, 자기 집안과 일가친척이 다 예수를 잘 믿고
자기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는, 이 세상에는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있는 줄 몰랐대요.
초등학교 들어 가보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도 많구나' 그랬을 정도로
어릴 때부터 믿는 집안에서 착하고 성실하게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고등학교 2학년 된 동생이 사람이 달라져버렸어요.
그 마음의 기쁨이 있는 것을 보았어요.
그렇게 말썽꾸러기이고, 그렇게 같이 싸웠는데, 동생이 한 순간에 달라져버렸어요.
성경보고 기도하는데.. 벌써 형제들 사이에는 느낌이 있잖아요. ‘얘가 달라졌구나’
어느 날 갑자기 동생이, 형인 자기(백선교사)에게 묻더래요.
‘형, 형에게는 진정한 기쁨이 있나요? 구원의 감격이 있나요?’
근데 순간 허세로, 동생한테 차마 ‘나 그런 거 없어’ 이렇게 말을 못하겠어요.
‘그럼 나도 있지’ 이렇게 말은 했지만, 마음속에는 '나는 그런 걸 모르는데.. 너는 아니?’
이런 질문이 있더라는 것이에요.
그리고 동생처럼, 자기도 그런 구원의 기쁨 넘치는 기쁨 감사 감격을 얻어 보려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어요.
근데 동생은 그렇게 성경을 많이 읽는데
자기는 조금만 읽어도, 읽기가 지루하고 힘들어서
읽은 말씀도 이해가 잘 안 되어서, 혼자서 끙끙 앓다가 결국 포기하고 동생에게 물었어요.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너 도대체 어떻게 그런 믿음을 가졌냐?’
그랬더니 동생이 '아 형 간단해' 그러면서 쭉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더래요.
근데 자기가 다 아는 내용이에요.
동생이 말해주는 복음은, 자기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에요.
그런데 그 똑같은 복음을, 동생은 생생하게 피부로 느껴서 알고 있는 것이에요.
똑같은 집안에서 자랐고, 그런데 어떻게 동생은 그렇게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가지고 살며
자기는 도무지 그것을 알 수가 없는가? .. 그때부터 이것은 그의 간절한 갈망이 되었습니다.
안다고 다 똑같은 게 아니고
똑같은 집안에서 자랐다고 믿음이 다 똑같은 게 아니구나.
그 때부터 '주님 저에게도 눈을 열어주세요. 도대체 동생이 누리고 있는 저 구원의 기쁨이 뭡니까?'
금식기도도 하고, 새벽기도도 나가고, 그렇게 사모한 후에..
어느 날, 주님이 백부장 선교사님에게 눈을 열어주기 시작하셨어요.
전에는, 자기가 십자가를 바라보아도, 구원의 감격이 없었는데
자기가 어떤 죄인인가를 보는 눈을 열어주시고
죄를 이기지 못하고 그렇게 몸부림쳤는데
요한복음 19장 30절에 ‘내가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을 읽을 때,
‘주님이 다 이루셨구나. 나는 감사합니다만 하면 되는 구나.’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놀라운 십자가의 비밀도 열어주시고
'죽었다고, 죽었다고 하는데 왜 나는 아직 안 죽었을까?'
생명이 있는 성도는, 갈등하게 되어 있습니다. 죽은 신자는.. 갈등이 아예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
‘그리스도의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하나님도 나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지만
나도 나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되는구나!
이렇게 하나, 하나 주의 성령님이 다 깨우치시고 가르치시고
그리고 지금은 그 놀라운 일(위험지역 선교)을 하고 있는 것이에요.
▲여러분,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의 생명은 엄청난 것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것이에요.
이런 충만한 생명으로 살지 못하는 것은, 억울한 일인 것입니다.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예수님으로 사는 게 얼마나 귀한지를, 아직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지금 이 시간에 솔직히 말해서, ‘나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한 적이 없었다.’
그동안 교회도 다녔어요. 부모님 때문에 친구 때문에 어떻게 하다보니까
집사도 되고, 권사도 되고, 장로가 되었어요. 근데 내 인생을 돌아보니까
언제 한 번 내가 예수님을 진짜 마음에 영접한 적이 없었습니다. 기억이 안나요.
기억이 안 난다는 이야기는, 혹시 그랬던 적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진심이 아니었어요.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신다. 내게 오세요. 내 주인이 되세요. 내 왕이 되세요.
그랬던 적이 기억이 안 나시는 분은
오늘 예수님을 진짜 여러분의 왕으로, 주님으로, 생명으로 영접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 안에 영원한 생명이 들어오십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님이 내 마음에 계신 것을 벌써 알고 있어요.
그런데 나는 풍성함이 없어요. 세상에 한 눈 팔고 살고 있는 겁니다.
세상이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겁니다. 오늘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만 붙잡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명의 풍성함을 내가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오직 주 예수님만 갈망하기로 마음을 정하시면
주님은 여러분에게 반드시 풍성하게 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성찬은 주님과 연합하는 놀라운 삶에 대한
계속 우리에게 주님 오실 때까지 반복해야 될 은혜의 시간입니다.
오늘 이 시간 성찬을 통하여
주님과 여러분이 생명의 풍성함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증거
본문은 요한일서 5:6절부터 13절까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면, 우리는 세상에 끌려가는 사람이 아니고,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은, 어떻게 믿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요?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분명한 겁니다.
‘예수는 나의 그리스도’ 이 고백이 분명한 것이 예수를 잘 믿는 것입니다.
요한사도가 오늘 6절 말씀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
‘그는 물과 피를 거쳐서 오신 분인데,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러분 ‘예수는 (나의) 그리스도’라는 고백에 대해서는 전혀 낯설지 않으실 겁니다.
너무나 많이 들으셨고, 여러분도 그렇게 고백도 하시잖아요.
그래서 여러분들의 지금 마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 주는 충격이, 거의 없으시기도 할 거에요.
그러나 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고백은 대단히 놀라운 고백이고
심지어는 아주 두려운 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려면 목숨을 내 놓아야 됩니다. 유대교 공동체에서 쫓겨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 더 이상 유대 공동체에서 살 수가 없이 쫓겨나야 됐습니다.
▲헬라 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하는 사람을 무시했습니다.
왜냐하면, 신을 믿어도, ‘신이 사람이 되었다’는 이런 종교는
그들의 철학에 의하면, 가장 낮은 수준의 종교에요.
아니 신이 도대체 어느 정도로 하찮은 신 이길래, 사람이 되어서 십자가에 죽었냐는 말이에요.
그래서 헬라 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사람들을 아주 무시했어요.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요.
로마정권은 무자비하게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왜요? 반란자들이니까요.
시저(카이사르) 외에 또 그리스도가 있다는 말이에요? 그들은 반역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 무자비하게 핍박을 했습니다.
마귀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많은 이단들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니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이건 엄청난 일입니다.
상상이 안 갈만한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아주 죽기를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이기는 겁니다.
세상이 감당을 못 하는 것이죠.
지금 우리들은 아주 쉽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지만
사실은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또는 그렇게 습관적으로 들었기 때문에 고백하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정말 그 말이 무엇인지를 알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역시 변함없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고, 세상을 이기는 사람입니다.
▲요일5:6~8, 성령과 물과 피의 증거 : 예수는 그리스도
6 ‘그는 물과 피를 거쳐서 오신 분인데,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다만 물로써 오신 것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셨습니다.
7 성령은 증언하시는 분입니다. 성령은 곧 진리입니다.
8 증언하시는 이가 셋인데, 곧 성령과 물과 피 입니다. 이 셋은 일치합니다. 5:6~8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의 핵심은,
그것은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시라고 하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참 사람이시라!
요한사도는 그것을 어떤 식으로 표현했냐하면
‘예수님은 물과 피로 거쳐서 오신 분이다.’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6절에 ‘그는 다만 물로써 오신 것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셨습니다.’
1) 자 ‘예수님이 물로 오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요한에게 예수님이 세례 받으셨죠,
하나님이 무슨 세례를 받습니까? 죄가 있는 사람이나 세례를 받는 것이지요.
그 말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완전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말 해주는 겁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다는 말은, 사람이 되셔야 되는 이유는,
그래야 우리 모두의 죄를 짊어지고, 죽을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은, 죽음이라는 게 없죠.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물로 나셨다’고 그렇게 표현한 것이죠.
2) 그러나 요한사도는 또 예수님이 ‘물로만 나신 것이 아니고, 피로 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실제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수많은 이단들이 일어났기 때문에
사도요한이 굳이 이 ‘피로 나셨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니다.
-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하나님의 성령이 그를 떠나셨다
하나님이 죽으실 수는 없는 일이니까.
뭐 그런 수많은 이단들이 나왔지만, 요한사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확하게 죽으셨다, 피 흘려 죽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모든 죄가 사함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에요.
그 말씀을 사도요한이 한 겁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는 사람인거죠.
3) 그러면서 요한 사도는 또 증거하나를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하나님의 증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증거가 셋 이라는 것이죠.
물과/ 피와/ 성령님이라는 겁니다. 이 셋은 일치합니다. :7~8
지금 무엇을 증거 하려고 하느냐 하면
그리스도라는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셨으며, 동시에 참 사람이시라고 하는 것을 이렇게 증거 한다는 겁니다.
성령 하나님이 증인이라고 하시는 것은, (성령) 하나님이 직접 증언하셨다는 것입니다.
▲5:9~10, 하나님의 증거 : 예수는 그리스도
9.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찐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9절에 ‘하나님이 자기 아들에 관해서 증언하셨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물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고 그 때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내 기뻐하는 아들이라.’
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십자가를 지러 가시기 전에
변화산상에서 모세와 함께 예수님이 고난당하실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실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고 했습니다.
‘이는 내 기뻐하는 아들이라.’
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5:11~13,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직접 말씀을 주셔서 증언하셨다는 거지요.
도대체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하시면서 증언하시고 싶으신 것이 뭘까요?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다. 내 기뻐하는 아들이다’ 이 말씀을 하시면서
우리에게 결국 하시고 싶은 말씀이 뭔가 하면, 그리스도께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겁니다.
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절대로 육신으로 사는 것으로.. 우리는 끝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나 소나 이런 동물과 다르단 말입니다.
사람은 육신으로 살다가 죽으면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싶으신 겁니다.
11절 말씀에 ‘그 증언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것과,
바로 이 생명은 그 아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고 싶으신 것은,
절대로 육신의 생명이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인 영생이 있다는 겁니다.
근데 이 영생은 예수님 안에 계시다는 겁니다.
그래서 12절에 누구든지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생명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아들을 모시고 있지 않은 사람은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지요.
그러면 영원한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옵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를 아셔야 합니다.
사도요한은 이것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시려고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너희 안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어
이 확신을 우리에게 심어주려고.. 이 요한서신을 쓴 것이에요.
13절에 ‘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인 여러분에게 이 글을 씁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 세상은 달리 보입니다.
더 이상 세상에 끌려가지 않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됩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그러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죽음이 두려운 겁니다.
여기서의 우리의 육신의 생명에 묶여서 평생 종노릇하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 이 시간에, 여러분이 살아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지요.
지금 내가 죽었나, 살았나 의심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지요.
다 여러분이 살아있다고 다 그렇게 알고 계시지요?
네 여러분이 지금 여러분이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을 그렇게 아는 것처럼
여러분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도 그렇게 아십니까?
여러분이 예수를 믿으시면서도, ‘내가 정말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을까?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죽음 이후에 영생이 있으며, 나는 그 영생을 소유했을까?
죽고 난 다음에 아는 것 아닌가?’ 이런 분들도 실제로 이 시간에 많으실 것이에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정확하게 믿고 있지 않는 겁니다.
말로 들어서 아는 것이고, 하도 많이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나도 그렇게 고백한 것이지
실제로는 아직도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정확하게 믿고 고백하고 있는 사람이 아닌 겁니다.
▲여기에 ‘안다.’ 라고 그랬어요.
‘나는 네게 영생이 있음을 안다’ 이건 ‘믿는다’ 라는 표현보다 더 강한 것입니다.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저는 제 아내가 저를 사랑하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하고
‘저는 제 아내가 저를 사랑한다고 믿습니다.’ 라는 것하고는 조금 뉘앙스가 달라요.
‘믿습니다’ 라고 표현을 할 때는 조금 갈등이 있는 겁니다.
‘믿는다’는.. 잘 안 믿어지는데
그래도 믿어야지 뭐 이런 식의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안다’는 것은 정말 확신하는 것이에요. 나는 압니다.
나는 영생이 제게 있음을 압니다. 이런 고백이 여러분에게 나옵니까?
예수를 정말 바로 믿어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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