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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을까요? 막4:1~9-그렉 로리

by 【고동엽】 2023.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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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누가 제게

‘목사님, 크리스천도 한 번 받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참고로, 칼빈주의 신학은, 성도가 한 번 받은 구원은, 결코 잃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가 받은 구원이, 진정한 구원인지 아닌지..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가 받은 구원이, 진정한 회심이라면..

그는, 자기가 받은 구원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자기 구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가 처음에 받은 구원이

‘값싼 은혜’로 통한 구원이거나,

‘자기 결단’에 의한 구원의 확신이라면..

그가 받은 구원은.. 중간에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애당초, 그가 받은 구원은,

진정한 구원이 아니었으니까요!

 

▲쉽게 예를 들어봅니다.

4복음서에 공통적으로 네 번 다 나오는 ‘씨 뿌리는 비유’에는,

모두 네 종류의 밭이 나옵니다. 각각 ‘길 가, 돌 밭, 가시 밭, 좋은 밭’입니다.

 

‘길 가’에 떨어진 씨는, 아예 싹도 나지 않았지만,

‘돌 밭, 가시 밭’은.. 싹이 나고 자랐습니다.

어느 정도, 복음의 씨앗에, 자기가 믿음으로 반응했다는 얘기입니다. 싹이 났다니까요!

 

그러나 ‘돌 밭’은.. 흙이 얇아서, 즉 믿음이 얕아서.. 더 이상 믿음이 성장을 못했고요!

‘가시 밭’은.. 세상의 핍박, 재물에 대한 염려 때문에.. 더 이상 믿음이 성장을 못했습니다.

 

이 ‘씨 뿌리는 비유’는

오늘날 우리 신자들 가운데, ‘돌 밭 신자’, ‘가시 밭 신자’가 있다는 얘기이고,

그들이 구원 받을 수 있으리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한 때는 ‘돌 밭’이었으나,

나중에 회개하고 ‘좋은 땅’으로 변할 수는 있겠지요.

 

그렇다면 ‘좋은 땅’은..

아예 예수를 믿을 때부터, 진정 회개하고, 회심한 신자의 마음 밭을 뜻합니다.

 

이런 신자는.. 중간에 자기가 한 번 받은 구원을 잃어버리기가.. 좀처럼 어렵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핍박도 이기고, 재물과 세상 염려도 이길 것입니다. 좋은 땅이니까요!

 

그러나 ‘돌 밭, 가시 밭 신자’는

자기는 구원 받았다고 생각(사실은 착각)하지만, 그 구원을 중간에 잃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들은 애당초 ‘좋은 밭’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쉽게 예수를 믿는 척 하다가.. 결국은 핍박이 올 때,

또는 세상 염려가 생기고, 재물에 대한 욕심이 생길 때.. 그는 믿음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나는 정말 구원 받은 신자인가?> 하는 문제를 한 번 짚어보려고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나는 ‘좋은 땅’인가?,

혹시 나는 ‘돌 밭, 가시 밭’은 아닌가? 하는 질문입니다.

 

‘길 가’는 고려할 필요 없습니다. 그는 아예 불신자이기 때문입니다.

 

 

◑진정 구원 받은 성도의 5가지 증거

 

진정 구원 받은 성도는, 즉 ‘좋은 땅’은

다음과 같은 5가지 증거가, 자기 삶에 골고루 나타납니다.

 

그럼 아래의 5가지 증거로,

‘내가 정말 회심하고, 예수를 믿는, 구원 받은 성도인가?’.. 한 번 각자 스스로 분변해 보십시다.

 

▲1. 구원 받은 성도는, 어디를 가든지, 예수님을 증거하며 삽니다.

 

요일4: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여기서 ‘시인’이라는 것은,

자기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공중 앞에서, 세상 속에서 ‘시인하고 증거하는’ 것을 뜻합니다. 쉽게 말하면 전도입니다.

 

그러나 꼭 전도하지 않더라도,

직장에서, 친구 사이에서,

자기가 ‘크리스천’임을 공개적으로 시인합니다. 숨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 회심하고, 구원 받은 성도의 첫 번째 증거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직장에서, 친구 사이에서, 이웃 집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크리스천입니다’ 라는 사실을, 내가 은근슬쩍 숨기고 있다면..

나는, 내가 받은 구원을 한 번 되짚어 보아야 합니다.

 

마10: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2. 진정 구원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계명을 기꺼이 지킵니다.

 

요일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로다.

그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완벽히 지킬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흠 없이 다 지킬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구원 받은 성도는.. 자원해서, 기꺼이, 계명을 지키면서, 세상을 이기며 삽니다.

 

그런데 일부 신자들, 즉 진정 구원 받았는지 여부가 불확실한 신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구절은, 그 계명을 지키지만,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구절은, 그 계명을 무시해 버립니다. 건너뛰어 버립니다.

 

어쨌거나,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에 무관심한 신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신자는..

자기가 진정 구원 받았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스스로 정밀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짐짝이나 멍에처럼, 내 어깨에 무겁게 여기는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 받은 신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결코 무겁게 여기지 않습니다. ↑

 

만약 여러분이, 성경가운데

아직도 어떤 구절이나, 어떤 분야의 말씀은,

내게 거부감이 들고, 순종해서 지키기가 꺼려진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바꾸려하지 말고, 그런 나의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뭐든지 ‘아멘,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3. 구원 받은 성도는, 죄를 지으면, 괴로워합니다.

 

요일3:9,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위 구절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죄를 (계속) 짓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가 (계속)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죄를 지으면, 그는 스스로 몹시 괴로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죄를 멀리하게 됩니다.

이런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죄를 계속 지으면서도,

괴로워할 줄도 모르고, 영혼이 아파할 줄도 모른다면,

그는 아직 구원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아니면, 구원 받았다 할지라도

잠시 타락해서, 마귀의 역사로, 자기 영안이 가리워졌기 때문에,

죄를 짓고도, 그게 죄인 줄 모르고,

그래서 아파하지도 않고, 계속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의 뚜렷한 특징은,

죄에 대해 민감해지고, 죄를 두려워하고,

혹시 실족해서 죄를 지어도.. 자기가 곧 회개함으로써.. 계속 죄를 짓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죄의 결과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이 30배, 60배, 100배입니다.

죄는 눈곱만큼만 지어도, 그 열매는, 30배로 거둘 수 있다는데서..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좋은 일에만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두기 바라지만,

내가 죄의 씨를 뿌릴 때에도,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둔다는 사실을

꼭 깨닫게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라도 진정 구원 받은 성도는,

죄를 두려워하고, 가급적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0배가 무서우니까요!

 

그래서 진정 <구원받은 성도, 즉 참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 죄로 인한, 주님의 징계도 달갑게 받습니다.

 

물론 징계가 괴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 징계를 통해, 자기가 더욱 연단되고, 죄에 면역성이 강한 성도가 될 것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징계를 달게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 받지 못한 성도는, 참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반발합니다. 원망으로 일관합니다.

심지어는 신앙을 버리기도 합니다. 원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4. 참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를, 마귀의 역사로부터 지킬 줄 압니다.

 

요일5: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위 구절에서, 하나님이 저를 지키신다고 했는데,

네, 하나님께서, 마귀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십니다.

그때 참 하나님의 자녀는, 그 주님의 역사에 기꺼이 순종합니다.

 

예를 들어, 마귀가 강력하게 역사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유흥업소, 하드코어 음란물 등입니다.

 

그러면, 참 하나님의 자녀는, 벌써 그런 지역을 가까이 가지도 않고,

몰라서 가까이 가게 되었을 때는, 성령의 신호에 민감하게 반응해서

스스로 속히 빠져 나옵니다. 하드코어 음란 영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돌 밭, 가시 밭’은,

성령님이 자기 속에서 계속 신호를 보내도,

그 신호를 느끼지 못하거나, 아예 마귀에게 자발적으로 순종합니다.

 

위 구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신다’고 할 때,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로봇이고, 하나님이 다 자동적으로 막아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물론 막아주시고, 우리에게 성령의 감화로 도와주시지만,

최종 결정과 선택은, 나의 순종에 달린 것입니다.

자기가 실족해 놓고,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위 말씀의 뜻은,

‘내가 성결하게 사는 것은, 내 힘으로 다 할 수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내가 마귀를 이기는 것도, 내가 마귀로부터 보호를 받는 것도,

내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나를, 보호해 주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에 다 맡겨버리면.. 극단적 칼빈주의가 됩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인간의 책임에 돌려버리면.. 극단적 알미니안이 됩니다.

 

위 구절, 요일5:18절도 보면, 완전히 칼빈주의적으로 말씀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이면에는, 인간의 책임이 약간 숨어 있음을, 우리는 고려해야 합니다.

 

▲5. 참 구원 받은 성도는, 이웃을 사랑합니다.

 

요일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참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 혼자 잘 믿는 것으로,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는 반드시, 자기 주변의 다른 형제 자매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을 돌아보고, 그들을 도와주려고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혼자만 천국에 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주위의 사람들과 함께 손잡고, 같이 가려고 하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의 공동체, 교회 공동체에 가입하게 되고,

그들과 함께 서로 격려하고, 서로 사랑하고 우애하면서.. 신앙생활을 해 나갑니다.

 

물론 자기 혼자 믿는 것은.. 쉬운데,

공동체에서 함께 예수 믿기는.. 쉽지 않고, 어렵지만,

 

참 하나님의 자녀는, 반드시 다른 성도와 ‘교제 관계’를 가집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신앙으로, 서로 격려하며 교제합니다.

 

▲위의 5가지 내용들이.. 어렵다고요?

 

빌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다시 칼빈주의적 관점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위에서,

저와 여러분이, 위 다섯 가지 길로 나아가도록,

 

하나님이, 자기 마음에 소원을 두시고, 그 목적을 두시고,

우리를 주권적으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순종하고 따라가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 계시니까요!

 

그 하나님이 이끄시는 방향으로, 내가 따라가는 것이 순리요, 물결 흐르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물결 흐르는 대로 사는 것이 쉽겠습니까,

아니면 물결을 거슬러 사는 것이 쉽겠습니까?

 

<아래 설교 듣고,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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