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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 존 뉴턴

by 【고동엽】 2023.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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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 존 뉴턴                           14.07.26. 스크랩,출처

 

     

John Newton, 1725-1807 Amazing Grace 작사자.

글 이승하 목사

 

 

▲18세기 중반부터 영국에 부흥 운동이 일어났을 때 조지 휫필드와 존 웨슬리가 중심인물이었다.

존 뉴턴은 웨슬리보다 휫필드의 영향이 더 컸다.

그 이유는 그가 칼빈과 휫필드의 복음주의 신앙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복음주의 신학자였다. 그래서 영국의 복음주의에 대한 글을 써서 크게 기여했다.

 

존 뉴턴은 1725년 지중해에 접해 있는 여러 나라들을 운항하며 장사하던 한 상선 선장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다. 6세 때 어머니가 폐병으로 죽었다.

그리고 학교에 다니는 것이 별로 재미없어서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10세에 아버지의 배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강제 징집되어 해군에 입대했다.

그는 훈련을 잘 받지 않았으며 군 생활 규칙을 지키지 않았고 탈영하다가 체포되었다.

장기 복역이라는 처벌을 면하기 위하여 노예의 노예가 된다는 조건으로 군에서 나왔다.

 

한 노예선의 흑인 선장에게 노예 아내가 있었는데 그는 그녀의 노예가 되었다.

그녀에게 말할 수 없는 학대와 고통을 겪었다.

 

뉴턴은 그 흑인 여자를 주인으로 섬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천시했다.

선원 생활이란 거칠고 방탕한 삶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타락한 자였고 방탕아였다.

그는 포악해졌고, 거칠어졌으며, 부도덕해졌다.

 

노예 상인은 인간을 매매했기 때문에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았다.

흑인들을 4-6개월씩 걸리는 항해 중 땅콩을 먹였다.

땅콩은 아프리카 세네갈 감비아 서부에 널려 있었다.

값이 싸고 열량이 높아 노예들의 허기를 해결하는데 적절했다.

 

영국의 노예 무역은 1807년 노예 거래 금지법이 만들어지면서 해결됐다.

그러나 노예 해방은 되지 못했다. 집에 팔린 노예들은 여전했다.

그 후 노예 해방은 1870년대에 와서 이루어졌다.

 

뉴턴에게 회개의 기회가 왔다. 노예선에서 일하고 노예를 팔 때

어쩌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게 되었다.

 

또 하나의 원인은 영국으로 가는 배에 올랐을 때 북대서양에서 극심한 폭풍을 만나게 되어

거의 침몰하게 되었다. 그것이 뉴턴에게는 계시의 순간이었으며, 그는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그 후 그의 마음에 폭풍우가 일기 시작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마음에 그리스도의 빛이 비췄다.

20여 년간 죄라고 하는 죄는 모두 지은 그 무섭고 캄캄한 삶이었지만

우연히 읽은 한 권의 책 속에서 그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밝은 빛이 비칠 때 그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는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그 후에도 몇 해 동안 노예 매매를 계속하다가 바다에서의 생활을 그만두었다.

 

 

▲뉴턴은 파란만장한 선원 생활을 끝내고 1750년 2월 어머니의 옛 친구의 딸인 메리 케틀릿과 결혼했다.

그리고 약 22,000명의 인구가 사는 노예 항구 리버풀에서 파도 조사원이 되었다. 그가 원했던 직업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많은 여가와 스스로의 방법대로 살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이때 뉴턴은 위대한 복음 전도자인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의 설교를 들었고,

윌리엄 그림쇼(William Grimshaw), 헨리 벤(Henry Venn) 같은 복음주의 부흥 운동의 지도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결심하고

이를 위한 노력으로 여러 가지 항목을 마련했다.

 

첫째로, 신약과 그리스어역 구약 성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스어를 충분히 배우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진행된 후 히브리어를 배웠고, 2년 후에는 시리아어 공부를 시작하여 성경을 깊이 연구하였다.

 

이 모든 연구와 더불어 라틴어, 영어, 그리고 배에서 혼자 배운 불어로

신학 부문의 최고 서적들을 계속 읽어 나갔다.

 

 

악몽에서 깨어난 그는 “많은 사람들이 죄의 근원에 대해 골치를 앓고 있다.

나는 죄가 있지만 그것을 피하는 길이 있는 것에 만족한다.

나는 그것으로 시작하여 그것으로 끝난다. 세상에는 실망하는 일이 많다.

 

그러나 믿음의 사전에는 그런 단어가 없다.

세상 사람에게 가는 실망이 신자들에게는 하나님에게로 가까이 가는 길이 된다”라고 했다.

 

 

과거에 그는 드디어 노예 매매상으로, 또한 아프리카에서 3년 동안 노예 같은 삶을 경험하기도 했었다.

이제는 구원 받은 사람으로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로 했다.

지난날의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삶이었다.

      

▲1764년 나이 39세에 버킹엄셔 올니(Olney)에서 부목사가 되면서 그의 여생을 완전히 하나님께 바쳤다.

15년간 올니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교회를 목회했고 많은 찬송가를 썼다.

 

 

그 후 그는 변호사이며 시인인 카우퍼(William Cowper)와 함께 ‘올니 찬송가’(Olney Hymns)를 편찬하여

영국 교회(Anglican Churches)에서 널리 사용하였다.

카우퍼의 작시로 한국 교회에 소개된 찬송은 <주 하나님 크신 능력>, <샘물과 같은 보혈은>이 있다.

그는 뉴턴 목사의 지도하에 빈민을 돕는 일을 열심히 했다.

 

올니 교회에는 뉴턴의 흔적이 많이 있다. 그는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하신 위대하신 구주라고 믿었다.

그의 과거와 관계있는 성구들을 올니

목사관 벽난로 위를 선반으로 만든 곳에 새겨 놓은 글귀가 있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사 43:4)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신 15:15)

      

옥스퍼드에서 케임브리지로 가노라면 올니(Olney)라는 촌이 있다.

작은 마을이지만 기독교사에 중요한 곳이다. 올니 광장을 지나면

아름다운 찬송을 많이 작사한 윌리엄 카우퍼의 집은 박물관이 되었고,

그의 개인 용품은 모두 귀중한 진열품이 되어 있다.

 

존 뉴턴의 생애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것이 그의 회개다.

왜냐하면 그는 젊어서 해군으로서 군법을 어겼으며,

인류 역사상 가장 악독한 죄악으로 인정하는 노예 상인이었다.

그러던 사람이 회개했다는 것은 큰 변화의 역사였다.

 

 

   1966년 어느 주일 케임브리지 집회에 가던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이곳 ‘올니’를 지나다가

   존 뉴턴 목사가 생각났다. 그가 목회하던 교회에 가서 묘지를 찾았다.

   고요하기만 한 그의 무덤은 풀들이 무성해서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었는데.

   그의 큰 묘비만이 우뚝 서서 그의 누워 있는 곳을 짐작하게 했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한때 이교도였고, 방탕했으며 아프리카 노예의 종이었던 존 뉴턴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하신 자비로 살아남게 되었고, 소생케 되었으며,

   용서를 받아 오랫동안 그가 멸하려고 수고했던 그 신앙을 전할 사명을 받았다.

   근 16년간 버킹엄셔 올니(Olney)에 있었고 27년간 교회에서 시무했다.”

 

 

뉴턴은 노예 상인으로 산 것을 회개했다. 회개의 동기는

노예 상인이면서도 배 안에서 책을 읽었는데

그중에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가 있었다. 거기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노예상의 삶을 접고 돌아오는 항해에서 큰 풍랑을 만나 죽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 있었다.

거기서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기도를 드렸다. 그는 풍랑에서 살아났다.

그때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믿었다.

 

이제 그는 잘못 보낸 과거의 삶을 뉘우쳤고, 하나님의 말씀에 가치를 두었으며,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방탕자는 아니었으나 그의 생활은 쉽게 변화되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나가는 말은 헛되고 어리석은 말이었으며, 자주 마음속에서 송사가 있었지만

급히 타락의 길로 떨어져 하나님을 모독하는 삶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변화된 존 뉴턴은 주님의 뜻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

그는 노예제도를 철폐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영국인들의 아프리카 노예 무역은 1562년 존 호킨스가 시작했다.

   시에라리온에 배 세 척을 끌고 가 잡아들인 흑인들을 카리브 해의 스페인 정착민들에게 팔아넘겼다.

   존 호킨스는 나중에 프랑스의 무적 함대를 물리친 공로로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기사 작위까지 받았다.

   이후 300여 년간 영국인들이 아프리카에서 미국과 남미로 끌고 간 흑인만 300만 명에 이르렀다.

      

▲존 뉴턴이 생전에 많은 일을 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한때 노예 상인이었던 그는 <Amazing Grace>를 비롯하여 주옥 같은 찬송들을 남겼고,

존경받는 목사로서 노예제도 폐지 운동에 투신했다.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였다.

그는 결코 이 점을 잊지 않았다.

 

목사로 임명되었을 무렵 뉴턴은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사 43:4)와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였음을 기억하라”(신 15:15)는 말씀을 기억하였다.

그리하여 윌리엄 윌버포스를 도와, 영국에서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온 힘을 다 쏟았다.

      

 

윌리엄 윌버포스를 도운 존 뉴턴

 

미국에서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을 위해 남북전쟁을 하기 반세기 전에

영국에서 노예제도가 먼저 폐지되었다.

이는 한 의로운 그리스도인 정치가의 평생 투쟁이었다. 그 정치가의 이름은 윌리엄 윌버포스이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으로 불과 21세에 국회의원이 되었다. 25세에 ‘거듭남’을 체험한 후

1787년부터 노예제도 폐지에 목숨을 걸었다. 그러나 당시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넬슨 제독도 노예무역에 대해서 찬성하고 있을 정도였고, 많은 정치가들,

귀족들이 노예제도로 직간접적인 이익을 취할 때였다.

그는 동료 정치가들의 무시와 조직적이고 물리적인 압력에도 불구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노예무역제도와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하였다.

 

그가 10년 동안 9차례나 발의한 노예무역 폐지 법안은 1807년에 통과되었으며,

1833년 윌버포스가 뜻을 세운 지 56년 만에 영국 의회는, 노예제도를 영원히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의회에 모인 상하원 의원들은 윌버포스에게 한없는 존경과 찬사를 보냈다.

그로부터 열흘 후에 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윌버포스는 사형제 제한, 아동 노동 폐지,

교도소 환경 개선을 위해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영국 내 노동자들의 권익 향상이나 노조 활동 문제에 대해서는 비교적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노예제도 폐지 운동은 런던에 운동본부를 두고 지방에 지부를 두는 식으로 전개됐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방식이었다. 이 운동 방식은 전 세계 민권 운동 조직의 원형이 되었다.

 

 

존 뉴턴은 윌버포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윌버포스는 당초 정계를 은퇴하고 성직자가 되려고 했다.

그런 윌버포스를 설득해서 노예제도 폐지를 위한 의정 활동에 매진하도록 독려한 게 바로 뉴턴이었다.

 

영국의 노예무역은 1807년 노예거래금지법이 의회를 통과하면서 불법이 됐다.

그러나 밀매매는 계속되었고, 1870년대가 되어서야 끝났다. 삶에 사명감이 결여되고

매일 반복되는 삶에 지쳐 있고, 한때의 열정과 헌신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거대한 사회악에 대항한 그리스도인, 영성과 실력을 겸비한 평신도,

총체적 구조악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으로 기억되는 윌버포스의 삶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윌버포스의 헌신적인 노력에 감동해 그를 ‘영국의 양심’이라고 불렀다.

그의 영향으로 영국의 젊은 국회의원 3분의 1이 복음주의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 당시 영국은 노예무역을 통해 국가 수입의 3분의 1을 얻고 세계 최고의 해군력으로

아프리카 흑인들을 잡아들였다. 그는 암살 위협, 중상모략과 비방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매진했다.

결국 의회에서 싸운 50여 년 만에 ‘노예무역 폐지’라는 쾌거를 이루었다.

 

 

윌버포스는, 한때는 정치가 너무 힘들고 험난해서 성직자가 되려고 했었다.

그러나 존 뉴턴 목사가 그에게 간곡히 권면했다.

“나는 주님이 국가를 위해 일하도록 당신을 세우셨다고 믿고 있으며, 또 그렇게 되기를 기대합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윌버포스는 많은 시간을 기도하고 뉴턴의 권면이 하나님의 음성임을 깨달았다.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이 두 가지 있었다고 일기에 기록했다.

먼저는 노예 해방이요, 다음은 영국인들의 인습 개혁이었다.

 

당시는 프랑스 시민혁명, 미국의 독립운동이 일어날 때였다.

그리고 국내적으로는 도덕적 퇴폐가 나라를 멸망시킬 정도로 내려앉아 있었다.

창녀들이 들끓고 아동 학대가 사회에 가득했으며, 범죄자로 인해서 감옥은 모자랐다.

 

이런 때에 윌리엄 윌버포스는 하나님이 보내신 일꾼이었다.

이때에 주일학교를 시작한 로버트 레익스도 맹렬한 사회 개혁자로 활동했다.

 

1787년 그의 노예 해방 투쟁은 하원의 노예 문제 개혁 운동의 지휘를 떠맡게 됨으로써 시작되었다.

 

1807년 3월 25일 영국령 서인도제도의 노예 무역 폐지안이 법률로 확정됨으로써 첫 번째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법률은 법률 확정 이전에 노예가 된 사람의 법적 지위를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윌버포스는 1821년부터 토머스 포얼 벅스턴 경과 함께 모든 노예의 즉각적인 해방을 주장했다.  

1823년 ‘영국령 전역의 노예 제도 완화와 점진적 폐지를 위한 협회’를 창설하고 부회장이 되었다.

 

그는 의회 내 노예제도 폐지 운동의 지도권을 벅스턴에게 넘기고 1825년 하원에서 은퇴했다.

드디어 1807년 영국 하원은 그에게 유례없는 영광과 존경을 보내면서 ‘노예 무역 폐지법’을 통과시켰다.

 

그는 박애주의적 개혁을 추구하는 복음주의자 그룹의 중심인물로서 해외 선교 운동에도 크게 활약하였다.

웨슬리가 뿌린 씨앗이 결실을 거두게 된 것이다. 대영제국의 식민지에서 교회의 문들이 모두 열렸고,

해방된 노예들이 몰려들어 대만원을 이루었다.

 

윌버포스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대영제국의 악법과 맞서 싸웠다.

그는 삶 속에서 매력과 재능 그리고 웅변의 능력을 사용하였다.

 

날카로운 푸른 눈과 오뚝한 콧날을 가진 이 아담한 사람은

대단히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진 훌륭한 의회 연설가였다.

그의 어조는 독특하고 음악적이어서 그의 정적들도 그의 연설에 기꺼이 귀를 기울였다.

 

윌버포스는 1833년 8월 6일 세상을 떠났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그는 오늘날 ‘영국의 양심’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생애는 깊은 영성과 실력을 구비한 평신도의 영향력이 얼마나 클 수 있는지 잘 보여 준다.

  

 

▲뉴턴의 생애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로, 그는 영국 교회의 복음주의자로 크게 기여했다.

18세기 초 영국은 종교적, 도덕적으로 쇠퇴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영국은 암흑과 이교주의 속에 침체해 있었다.

무절제와 부도덕, 범죄와 폭력이 점차 시대의 대명사처럼 되어 갔다.

 

국교회는 죽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소금이 되어 영국을 부패로부터 보존하기는커녕

인간의 욕망에 대하여 부과한 절제의 계명들을 약화시킴으로써

가뜩이나 비윤리적인 영국 사회를 더욱 혼란에 빠뜨렸다.

 

 

강단의 설교는 자연 신학과 냉랭한 윤리주의였다.

이것은 교회를 일깨우고 범죄를 막아내는 데는 너무나 무기력했다.

국가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교회가 먼저 부흥되어야 한다. 바로 그 일이 일어났다.

 

육체의 무기가 전능자의 무기를 이길 수 없다. 하나님께서 강력한 부흥 운동을 일으키시자

50년 만에 이 땅의 종교적, 윤리적 삶이 변화되었다.

 

뉴턴은 사도 바울과 같은 점이 많다.

찬송 <나 같은 죄인 살리신, Amazing Grace>은 그의 실제 회개 간증이며,

그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감격의 눈물이다.

 

이 찬송의 첫 절은 그의 다른 시 ‘그는 나를 위하여 돌아가셨다’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거저 주시는 것이라고 그는 정의했다. 존 뉴턴에게 내려 주신 은혜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가 자기를 사랑하셔서 자기 같은 죄인을 위하여

그 귀중한 목숨을 버리셨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며,

자기가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신 것이 더 없이 위대하고 놀라운 은혜임을 깨달았다.

 

또한 세상의 죄와 수치, 공포에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기에게

두려워하도록 마음에 가르쳐 주신 것이 큰 은혜이며

이 사실이 그 마음에 말할 수 없는 폭풍우를 일으키게 하였다.

 

그 많은 죄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용서 받았다는 확신이 그의 마음에 꽉 찼다.

그때 그가 감격하여 그 놀라운 은혜와 마음에서 두려움이 사라진 그 은혜에 대하여

눈물로 엮은 시가 이 찬송이다.

 

 

이 찬송은 그가 54세인 1779년에 작시한 것으로 그의 일생에 큰 감격의 삶을 살게 했다.

이 찬송을 작시할 때 그는 어느 저녁노을이 지는 시간에 주님을 명상하며 뜰에 앉아 있었다.

 

갑자기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감격이 있었다.

그것이 곧 주님의 놀라운 은혜였다. 멸망당할 수밖에 없던 죄인을

아무런 값도 치르지 않고 용서해 주셨다는 감격이 그의 마음을 감동케 했다.

 

그 아픔은 곧 감사로 변했다. 그래서 그는 펜을 들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그 곡은 ‘미국의 전통 멜로디’로 되어 있다.

 

 

이 찬송은 신앙인들이 가장 많이 부르는 찬송이다. 특히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부른다.

이 찬송을 부르는 사람들은 그 찬송을 잘 부르는 성악가를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이 찬송을 부르는 성악가와 흑인 영가 가수들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도 1947년 가스펠 가수인 마할리아 잭슨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Amazing Grace>를 불렀으며,

그녀의 노래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유명했다.

 

그녀는 체구가 매우 우람하고 아주 검은 흑인 여자이다. 검은 원피스를 입고 카네기홀과 큰 무대에서

눈물을 흘리며 부르는 <Amazing Grace>는 그녀의 신앙고백이었다.

 

 

한국 기독교인들도 이 찬송을 많이 부른다.

그것은 개인 구원의 신앙을 갖고 있는 복음주의적 신앙이기 때문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이 찬송을 많이 부르는 한 복음주의 신학이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진보주의나 자유주의 신학이 세계사조라고 할 때 이 찬송을 부르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가 죄를 회개하는 사람에게 용서와 구원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이 찬송은 미국 남북전쟁 때 남북 양군에 의해 많이 불려졌다.

그리고 전 세계 인권 운동가들이 애창하는 노래다.

  

구조적인 악, 노예무역이 활발하던 18세기 말, 세계 최고의 해군력과 상선을 갖고 있던 영국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잡아 북미 대륙으로 실어 나르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당시 노예무역은 영국 식민지 산업의 기둥이자 근간이었으며, 국가 안보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노예무역이 영국 선원들에게 탁월한 훈련을 제공하고, 영국 해군에게 있어야 할 신병 모집의 근거를 제공했다.

 

노예무역은 연간 5,500명 이상의 선원들을 고용했고, 그것의 고용 효과는

약 16만 톤의 선박과 그에 비례한 선원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국가 수입원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였다.

따라서 노예무역의 지지자들은 막강한 상인, 재벌, 넬슨 제독 같은 식민지 기득권 세력,

대부분의 왕족, 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 어떤 반대의 소리도 매국으로 치부해 버렸다. 노예무역은 그야말로 구조적인 악이었다.

 

 

암살 위험과 같은 중상모략과 비방에 시달리면서도 윌버포스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영국의 수많은 뜻있는 목사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외롭고 기나긴 싸움을 이어 나갔다.

 

1833년 7월 27일 윌버포스가 하나님 앞에서 뜻을 세운 지 56년 만에

드디어 영국 의회는 노예제도를 영원히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는 노예무역 폐지라는 큰 명제를 실천해 나가는 과정에서 타락한 영국 사회 곳곳을 개혁해 나갔다.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복권 제도를 20년에 걸친 의회에서의 공방 끝에 폐지시켰고,

가난한 이들이 병이 들었을 때 무상으로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을 정부 예산으로 설립하게 하였다.

 

가난의 근본적인 원인을 타개하기 위하여 무조건적인 구제보다는 직업 교육을 시키고

취업을 알선하는 제도를 정부가 구체적으로 실행하게 했고, 영국의 야만적인 형벌 제도를 대폭 개정했다.

 

또한 상류사회 남자들의 결투 제도 폐지에 앞장섰고,

호화 파티만 일삼던 귀부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 이들이 여가 시간을 사회봉사에 쏟도록 했다.

 

그는 50년 동안 거대한 의회의 반대와 폭력적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성취했다.

역사가 트레벨 얀이 ‘세계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사건 중 하나’라고 평가할 정도로

한 사람의 결심을 통해 영국과 유럽의 역사 전환을 이룰 수 있었다.

 

 

존 뉴턴이 살던 시대에 영국은 자연주의와 냉랭한 윤리주의가 팽배했었다.

특히 영국 국교인 성공회는 그야말로 형식주의였다.

 

그래서 부흥 운동이 일어났으며, 새로운 신앙이 불붙던 시대에 가장 크게 작용한 감격이

곧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룩하신 주님의 은혜였다.

 

그것을 뉴턴은 찬송으로 전달했다.

그가 지은 찬송시가 많이 있으나 한국교회에 소개된 것으로 <귀하신 주의 이름>이 있다.

       

존 뉴턴이 시에라리온의 노예선에서 일할 때 포르투갈 선주의 흑인 부인이 어찌나 학대했는지

“밤이 깊고 적막한데 하나밖에 없는 셔츠를 빨아서 자는 동안 마를까 하여

젖은 채로 입고 자는 것을 보았다면, 내 꼴이 너무나 처량해서

배가 섬에 닿을 때 처음 보는 사람한테 수치를 가리기 위해 숲 속에 숨어야 했던 나를 보았다면,

 

그러나 내 마음이나 행동은 이처럼 처량했던 내 꼴보다 더 어두웠다는 것을 아셨다면,

그토록 비참한 자를 살리신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와 사랑과 섭리가 얼마나 특별하시다는 것을 짐작하시리라.

그때의 다만 한 가지 희망이라면 영국으로 돌아가서 사랑하는 메리와 결혼하는 것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새사람이 되었다. 1748년 3월 10일이 그의 영적 탄생일이 되었다.

그 후 6년이 지난 1754년 뉴턴은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어

그가 죽던 1807년 12월 21일까지 은혜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의 마음에는 항상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도 감사하여 늘 찬송과 눈물의 생활이었다.

그는 “나는 까마귀가 우는 것처럼 주님께 울었고, 주님은 아직껏 그 울음을 듣기 싫다고 경멸하신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그토록 비웃고 조롱하던 바로 그 예수님이었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잘 기억하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사실 그는 주님의 이름을 욕할 때 더럽고 상스러운 욕으로 늘 사용했을 뿐

그토록 거룩하고 사랑스러우며 은혜 되는 이름인 줄은 예전에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

 

 

1779년에 이 찬송시를 쓰게 되었는데, 그가 노년에 28년을 봉직한 울노트 성 마리아 교구목사로 있을 때

그의 기억은 왔다 갔다 하며 눈이 침침해서 보이지 않았다.

그의 건강은 너무 쇠해서 지팡이에 의지하고 겨우 다녔다.

 

그러면서도 최후의 순간까지 주님이 주신 사명을 다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해인 1807년 울노트의 성 마리아 교회에서 주일날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설교 강단 옆에 돕는 이가

그가 준비한 설교를 한 줄 한 줄 읽어 주면 그것을 받아서 설교했는데, 그는 조용히 첫 줄을 읽어 주었다.

 

노인 뉴턴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는 매우 귀중한 이름입니다”라고 말한 후 멈추었다.

원고를 읽는 사람은 다음 줄을 읽었다.

 

그런데 뉴턴 목사는 역시 “예수 그리스도는 매우 귀중한 이름입니다”라고 찢어지는 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예, 예, 계속하십시오. 목사님, 그 말은 한 번 하셨습니다”라고 말하자,

“내가 두 번을 말했네. 그렇지만 한 번 더 말할 걸세. 예수 그리스도는 매우 귀중한 이름입니다”

라고 큰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779년 올니 교회에 있을 때 쓴 이 시를 발표하였다.

그 많은 회중은 모두 일어서서 뉴턴 목사와 같이 이 찬송을 불렀다.

 

이 찬송은 <거룩, 거룩, 거룩>을 작곡한 다이크스(John Bacchus Dykes)가 1866년에 작곡하였고,

레이나글(Alexander R. Reinagle, 1799-1877)이 곡을 붙였으며,

헤이스팅스(Thomas Hastings, 1784-1872)도 곡을 붙였는데, 이 곡은 <빛나고 높은 보좌>와 같은 곡이다.

그리고 <시온성과 같은 교회>가 있다. 이 찬송들은 모두 1779년에 작사된 것들이다.

 

 

그가 82세인 1807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천국을 그리며 눈을 감았다.

“내가 천국에 가면 세 가지 놀라운 일을 발견할 것입니다.

 

하나는 예상치 않았던 사람을 그곳에서 만나는 것과, 둘째는 예상했던 사람이 거기 없는 것,

그리고 셋째로 가장 큰 놀라움은 내 자신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많은 편지로 그리스도인들과 상담했으며

친절한 이웃 동네 아저씨처럼 친근한 사람으로 살았다.

 

올니에서 뉴턴은 자기의 재능을 발휘할 좋은 기회를 얻었다.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소박한 사람들이어서 자기들 마음속에 품었던 내용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의 책 《진정한 이야기》가 올니에서 지내던 첫해에 출판되었는데,

이 책은 그의 어린 시절, 회개, 목회 사역에 대한 부르심을 다루었다.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그의 명성은 널리 퍼지게 되었고, 사람들은 인근 각처에서 몰려와

그의 충고와 도움을 요청했다. 올니에 있는 따뜻하고 정겨운 그의 집은 후에 런던으로 옮겨졌으나

고통과 시험을 받는 자들이 찾아와 쉬었다.

 

그들은 그에게서 한때 자신들보다 더 악했던 한 죄인이 온유와 동정이 가득 찬 마음으로

자신들의 경험 속에 찾아 들어오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에게 직접 찾아올 수 없던 사람들은 편지로 그의 도움을 요청했다.

이 책은 뉴턴의 서간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들만을 모은 것이다.

 

마커스 론은 그를 “복음주의 부흥 운동의 가장 탁월한 문필가”라고 극찬했으며,

“문필을 통해서 부흥 운동에 기여했다”고 쓰고 있다. 그는 자기 재능이 무엇이며

이 분야에서 그가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매우 부지런했다. “내가 편지로 많은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은 주님의 뜻이다.”

 

 

▲뉴턴의 편지는 그의 내면을 표현한다.

그는 수신자들을 “여가만 있으면 나의 마음을 담아 보내고 싶은 자들”로 묘사했다.

 

그의 편지는 그 자신의 삶 속에 나타난 은총의 사역을 반영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 당시의 복음주의 신앙과 훈련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 책은 특히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교회의 영적 생활은 항상 동일한 수준의 능력과 순결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과 같이 참된 복음주의 본질을 망각하는 시대에 처할 때도 많기 때문이다.

 

그의 편지들을 편찬한 책이 있다. 그것은 《Letters of John Newton》(존 뉴턴 서한집)이다.

이 서한집을 번역한 총신대학원 이상원 교수는 여기서 되새겨볼 것으로 몇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진정한 복음주의는 강렬하게 개인적이다.

복음주의는 지난날의 기독교인들처럼 어떤 교리나 견해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며,

더욱이 어떤 파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더욱더 곤란하다. 오히려 인간의 영혼이 체험해야 할 그 무엇이다.

 

둘째, 진정한 복음주의는 열심 있는 영혼의 훈련을 일으켜야 한다.

하나님의 생명이 인간의 영혼 안에 심겨지면 선과 악, 새 성품과 옛 성품 사이에 전투가 시작된다.

 

뉴턴의 편지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특징을 한 가지 든다면,

그것은 아마도 영적인 애통과 기쁨이 놀랍도록 잘 조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셋째, 뉴턴은 진정한 복음주의는 실천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수신자들에게 전하려는 것은 뉴턴의 지혜로움을 칭찬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과 생활을 변화시키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교리들을 받아들이고 믿을 때 비로소 신앙적 실천이 가능하다.

알렉산더 화이트 박사가 존 뉴턴의 편지에 대하여 내린 평가는 적절하다.

“이 책은 가장 사도적이고 복음적인 진리를 담고 있으며,

강하고 명석하며 평이하고도 관용적인 영문으로 쓰여 있다”라고 했다.

 

 

존 뉴턴은 18세기에 가장 많은 죄를 범하며 살던 버려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회개하게 된 동기를 보면 그리 심각한 고통 속에서 되어진 것이 아니었다.

어떤 죽음의 병고를 겪은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감옥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었다.

극악무도한 죄악 가운데서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 그리고 항해 중 풍랑을 만났었다.

선원은 바다를 떠다니는 삶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풍랑과 폭풍을 자주 만났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겪은 폭풍우 속에서 회개를 결심했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였음이 확실하다.

 

 

공부를 많이 못했으나 찬송가 가사를 많이 썼고,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 상담의 편지를 보내는 것은

그의 삶에서 큰 부분이었다. 그의 문장은 훌륭했다.

그렇기 때문에 부흥 운동의 큰 부흥사는 아니었으나 문필로 큰 영향을 미쳤다고 기록되었다.

 

그가 주의 종이 되겠다고 생각한 동기가 무엇이었을까? 소명을 받은 것이다.

소명이란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어떤 계기로 그런 소명을 받았을까? 이는 목사가 된 사람들에게 매우 궁금하고 관심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소명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알고 싶기 때문이다.

소명의식이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경우를 말한다.

소명 받은 사람들은 주님의 뜻을 깨닫고 자신의 사명을 다했다.

 

 

소명을 받은 것은 초보 단계이다. 여기에 사명감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존 뉴턴은 소명뿐 아니라 사명으로 훌륭한 열매를 맺었다.

 

존 뉴턴은 무서운 죄인이었으나 무조건 구원을 받은 감격을 다른 사람들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그것이 설교로, 찬송시로 그리고 상담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존 뉴턴에게 주셨던 달란트였다.

그 달란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존 뉴턴 서한집》에서 찾은 ‘겸손’에 대한 어록

 

상하고 회개하는 영혼은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영혼에게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우리의 본성의 타락을 얼마나 겸비하게 깨닫고 있느냐에 비례하여

하나님의 은총이 크게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진정으로 겸손한 신자라면 쉽게 화를 내지 않을 것이며, 성급하게 앞에 나서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동료 죄인들의 허물에 대하여 동정적이고 관용적인 태도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 안에 죄 없는 완전성이 존재한다는 비성경적인 관점을 저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의 영적인 근거를 잘 파악하고 있는 신자들은 자기의 마음속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잘 알 뿐만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겸손과 자기 비하의 태도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기독교인의 성품 가운데 하나는 겸손입니다.

그같이 악한 죄인에게 주님께서 그토록 큰 구원을 베푸셨다는 사실에 그는 경탄을 금하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자신이 모든 성도들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보다도 더 작은 자라는 고백을

솔직하게 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거룩하고 깨어 있는 정신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향해 겸손한 태도를 가진 신앙인은 물론 모든 세상일에 대해서도 절제하는 태도를 취합니다.

 

그는 빈틈없는 사람도 아니지만 미신적인 사람도 아닙니다. 신앙인이 좀 더 겸손한 상태에 있다면

그는 자기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을 시기하기보다는 동정할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뜻을 존중할 때 그의 절제가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거만하지 않으며, 헐뜯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쉽게 반감을 갖거나 화해를 거절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발밑에서 온유를 배운 것입니다. 그는 겸손하고 늘 자신을 채찍질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 하고 있는 일이 사실상 보잘것없으며,

그가 최선을 다해 봉사하는 것조차도 결함투성이요, 오점이 많음을 발견하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을 무익한 종이라고 평가하며 부끄러워 눈을 들지 못합니다.

그의 모든 소망과 위로, 그리고 그의 힘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습니다.

 

 

우리의 인격이 끼치는 영향력과 그 무게에 비례하여

이 같은 자기부인에 대한 의무가 더 강화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린이처럼 겸손하고 혼자 발걸음을 옮겨 놓는 것을 두려워하며

우리 주위에 있는 함정과 위험을 의식하면서 안전하게 인도해 달라고

끊임없이 주님께 부르짖는 것은 주님과 동행하는 자의 확실하고도 틀림없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 겸손한 정신을 얻을 수 있을까요?

우리의 연약함과 사악함을 구체적이고도 실감 있게 확신할 때,

우리가 책이나 설교자를 통해서는 배울 수 없는 것들을 틀림없이 배울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성령과 동행하면서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해 줍니다.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죄를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한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주님이 이 방면에서 당신이 드리는 기도에 기꺼이 응답해 주신다면

그 응답은 물론 당신을 겸손하게 만들 것입니다만

그것이 곧 당신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인식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고 모든 일에 주님의 안내를 받고자 애써야 할 것입니다.

핍박을 받을 때 인간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앉아 있는지 알게 되고,

더욱 겸손하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됩니다.

 

주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겸손하게 만들 것이며,

마침내는 주님이 우리보다 더 현명하다는 고백을 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하고 영적인 존재가 되는 것, 하나님과의 연합을 추구하는 것,

복음을 전하는 직책을 귀중히 여기는 것, 주님의 처분에 순종하여 봉사를 하든지 고난을 받든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필연적인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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