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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대처하는 방법-팀켈러

by 【고동엽】 2023.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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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에 사과의 말씀을 드려야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활기 넘치는 예배에서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저희는 산 꼭대기에 있었습니다만

제가 여러분을 골짜기로

끌어 내리게 될겁니다

 

이제 저희는 시편 88 편을 읽을건데요 

이 본문은 그리스도인이

칠흙같은 고난의 시기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말해줍니다

 

1절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2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

 

6 주께서 나을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7 주의 파도가 나를 심히 누르시며

주의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셀라)

 

8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9 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10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셀라 )

 

11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까

 

12 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과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

 

13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를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14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15 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

 

16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나이다

 

17 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

 

18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어둠만이 나의 벗이 되었습니다 ; 공동번역 )

 

성경, 특히 시편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기도로 가득합니다

 

칠흙같은 인생을

통과하는 사람들 -

그러나 거의 모든 그런 이야기들은

희망을 암시하며 마칩니다

 

고난을 겪는 사람들이 기록한

거의 모든 시편의 기도들은

그 마지막 부분에 꼭

이런 말들이 붙습니다

 

'주를 뵈옵나이다'혹은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을 확실히 믿었도다'

 

혹은

주께서 함께하시나이다

이러한 말들이 붙습니다

 

그러나 2 개의 시편은

그 중 하나가 우리가 살펴볼 본문인데요

 

예외적인 시편이 2 개 있습니다

시편 39 편과 88 편입니다

 

희망에 대한 어떤 암시도

찾아볼 수도 없죠

 

실제로 보셨겠지만

이 시편에서는'흑암'이 3 번 언급됩니다

 

마지막 절에도 등장하는'흑암'은

분명 이 시편의 주제입니다

 

영어성경에서 마지막 절은

'어둠만이 나의 벗이 되었습니다'

로 번역이 되었지만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이 시편의 마지막 단어가'흑암'입니다

 

좀 더 문자 그대로 번역을 해보자면

'내 유일한 벗'

가장 가까운 벗 -'

'흑암'

이것이 기도의 끝입니다

 

이런 식으로 마치는 기도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

 

희망이 아니라 흑암으로만 끝나는

그런 기도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

성경 속에 이런 기도가 왜 있을까요 ?

 

그 이유는 - 우리를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4 가지로 말씀드리죠

이 시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1. 신앙의 그리스도인에게도

'흑암'이 오랜시간 지속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들 역시 상당 기간

흑암의 시간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2. 그러나 둘째로 우리가 알게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흑암의 시간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 좋은 때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3. 이와 더불어 셋째로 흑암의 시간보다

우리를 위대한 사람으로

빚어가는 때도 없습니다

 

4. 마지막으로 흑암은 상대화 될 수 없습니다

이 4 가지를 함께 살펴보죠

 

....................

 

 

◑1. 가장 먼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흑암은 신자들에게도

<상당 기간 지속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부분에서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당신은 나를 구원하신 여호와'라고요

그는 하나님을

구원주로 믿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구원주로 믿죠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가 주야로 당신께 기도합니다

내가 주야로 당신께 나아갑니다

내가 주야로 당신을 부릅니다

내가 당신을 구원주로 믿습니다

 

자, 두 가지 종류의

흑암이 존재합니다

 

외적인 흑암은 여러분의 삶의 환경과 관련됩니다

 

우리는 시편 기자의 상황을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는것은 시편 기자가

모든 친구를 잃었다는 것과

죽음에 직면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아주 임박한 죽음이거나 죽음의 가능성이죠

이런 질문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습니까?'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

 

분명 기자는 죽음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의 문제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 기록된

시편의 기도를 읽을 때마다

제가 언제나 발견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문제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사람의 내적인 고통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습니다

 

그 고통 속의 들어가

저의 경험과 연결시켜 볼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 기자가 처한 삶의 상황은 흑암입니다

그리고 그는 내적으로도 흑암을 경험하고 있죠 ,

 

여러분의 삶의 외적인 상황들이

매우 어렵게 돌아가지만

 

내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다면

그것은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죠

그는 배반감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느낍니다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고 있습니다

 

자 , 기자는외적인 흑암과

내적인 흑암 속에 있고

기도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구원주로 믿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흑암으로 끝마치고 있습니다

 

대체 뭘 말하려 하는 것일까요 ?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일 수 있습니다

 

구원주로서 하나님을 기도하실 수도 있습니다

해야할 일들을 모두 하시는 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주 오랜시간

고통 속에 머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아까 경고한 것처럼 설교 첫부분은

진짜 우울하네요'

 

'한편으로는 그게 은혜라면서요

어떻게 그럴수 있죠 ?

 

우선은 이 시편은 우리에게

성경의 현실성을 알게 합니다

 

위대한 작품에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프린세스 브라이드 -

네 그 프린세스 브라이드 영화 맞습니다

 

이 위대한 작품에

이런 위대한 대사가 있습니다

"전하 , 삶은 고통입니다 "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약을 파는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성경은 약을 팔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고민하시나요 ?

기독교에 대한 고민을 하고 계신다면

기독교는 현실적입니다

 

기독교는 어떤 약도 팔지 않습니다

 

성경은 여러분이 옳은 일을 해도

아주 오랜기간 흑암이 여러분을

떠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은혜가 있습니다

어떤 기대감 말입니다

 

수년 간 아내와 저는

이와는 완전히 다른 말을 전하는

사람들을 만나왔습니다

 

그들은 말하길

"자, 이제 나는 기독교인이 됐어 !

나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어 !"

"이제 어떤 끔찍한 일도 나에게 닥치지 않을거야 !"

 

자 만약

이러한 기대감이라면

'난 기독교인이야, 난 안전해,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아'

 

"난 기독교인야 난 좋은 사람이야

새 삶을 시작했다구'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거야'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군요

글쎄 너보다 더 나은 사람을

한 명 알아 훨씬 더 나은 사람!

 "예수 그리스도말이야 "

 

그리 신나는 인생을 살지는 못했지

그분은 거절당했고 고문 당하다가 돌아가셨지

 

그리고 요한복음 16 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로 이렇게 말했다고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심지어 또 예수님은

'주인보다 종이 크지 못하다'고도 했어 !

"세상이 나를 미워한 것처럼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

 

바로 여기에 은혜가 있습니다

기대감은 고통과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통은 아주 끔찍하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위에 기대감을 갖는 것은

여러분의 잘못입니다

고통은 여러분의 잘못이 아니지만요

 

이런 식의 잘못된 기대감 말이죠

"난 예수님을 믿으니

내게 나쁜 일은 안 일어날거야 "

 

'예수님에게는 일어나도 나한테는 안 일어나 !'

성경도 예수님도 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의 기대감이

현실에 잘 맞추어져 있다면

성경은 결코 약을 팔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말입니다

 

그런 기대감은 역경을

직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됩니다

종은 그 (녀 )의 주인보다 클 수 없습니다

 

자 여기까지가

여러분 기뻐하세요 여기까지가

4 가지 중에서 제일 안 좋은 부분이었어요

 

그러나 동시에 은혜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약을 팔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죠

 

기독교는 현실적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오랜 시간 고통 속에 있을 수 있습니다

기도도 하면서 말이죠

 

◑2. 두 번째로, 흑암의 시간은

흑암의 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배우기에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지금까지는 시편 기자를 좋게 말했습니다만

 

그가 어떤식으로 기도하고 있는 지 보시죠

그가 모든 면에서 그리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 이 기도문의 어떤 부분은

사실 기도가 아닙니다 추궁과 심문이죠

이 부분을 한번 보시죠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

 

'주의 인자와 사랑을 무덤에다 선포할까요 ?'

이는 비꼬는 식의 질문입니다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저는 당신의 증인이 되고 싶습니다 "

"하나님을 온 세상에 말하고 싶어요 !"

"그치만 제가 죽어버리면 어떻게 그럴수 있겠냐고요 !?"

 

"하나님을 위해 이런 일들을 하고 싶어요 !"

"아시잖아요?"

 

그런데 제게 아무것도 못하게 하시네요 "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

 

거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대답하세요 하나님 "

 

사람들은 이것을 도를 넘었다고 하거나

신성 모독이라고 할겁니다

 

아마 그 둘 사이 어딘가에 있겠죠 ,

물론 그는 자기 마음을

절제하지 않고

예의를 차리지도 않고

존경심도 찾아볼 수 없으며

'뜻이 이루어지이다'

같은 말 역시 안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기 쉬운 몇가지를

많은 주석가들이 지적 해줍니다

저 역시 그랬는데요

 

기자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

 

잠시 후에 살펴볼 것이지만

시편의 표제어는 이 기도가

누구의 것인지를 말해줍니다

 

때문에 이 표현들을

과장법입니다

진짜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평생 동안 죽음의

위험 속에 살았습니다 !"

 

"평생을 저를

내버려 두시다니요 !"

"한 번도 제 곁에

계신 적이 없잖아요 !"

"단 한번도!"

 

이것이 기자의 의도입니다

물론 과장법이죠

절망 속에 있을 때

우리도 그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성을 잃고 분오와 슬픔

두려움 절망 속에 있을 때 말입니다

그 순간을 가지고

인생 전체를 해석합니다

 

'전에 제게 이런 은혜를 베푸셨었죠'

라는 생각은 못하는 것이죠

다른 시편들에는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만

이 시편은 아닙니다

 

이 기도에는 그런 내용이 없죠

"단 한번도 제 곁에 없어잖아요 !"

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추궁하고 있습니다 !

신성 모독이 아니라면

엄청난 무례인 것이죠

 

그리곤 마지막 구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흑암만이 나의 가까운 친구입니다

여기에는 비난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차라리 흑암이

당신보다 더 나은 친구입니다 "

"당신과 함께하느니 흑암을 택하겠습니다 "

"당신보다 흑암이 훨씬 더 위로가 되는군요 "

 

기자는 도를 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질문하셔야합니다

‘성경 속에는 이런 기도가 있는 이유가 대채 뭘까 ?'

 

몇 해 전에 이 시편 88 편의 기도와

시편 39 편은 매우 비슷한데요

시편 39 편은 이렇게 끝마칩니다

"그 얼굴을 좀 치워주십시오 하나님 "

"그래야 제가 죽기전에

조금이라도 평안할것 같습니다 "

 

시편 39 편과

88 편은 모두

하나님을 향한 절망과 분노로

그냥 끝나버립니다

 

저는 대체 이 시편을

어떻게 봐야할지 몰랐습니다

못 본체 빨리 넘겨버리곤 했죠

 

이 본문으로 설교를 한다고는

상상해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데렉 키드너의 얇은 주석에서

두 문장을 읽게 되었습니다

 

데렉 키드너는 오랜 기간 케임브리지 대학

틴테일 하우스의 책임자였습니다

이런 기도에 대해

그가 한 말이 있습니다

 

그의 말은 화살이 되어 저를 꿰뚫었고

그리고 제 삶을 바꿨습니다

 

단지 이 본문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흑암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말이죠

 

인용하겠습니다

"성경 속에 이런 기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헤아라심'에 대한 증거이다

 

인간이 절망 속에서 어떤 말을 하는지

하나님은 이해하신다 "

 

자 어떤 의미인지 아시겠나요?

 

하나님께서 시편에

이런 기도를 두신 이유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남이 두셨기 때문에 거기 있는겁니다

 

여러분은 기도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부정합니다

'내 성경 속에 이런 기도가 있다니 참을 수 없군'

'맙소사 이런 엉텅리 기도도 괜찮다는 건 말도 안 돼!’

'나 역시 하나님께 그런 식으로 기도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건 결코 받아들일 수 없어 !'

 

그러나 성경에 ‘이 기도를

두신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종종 그렇게

기도하는 존재임을 이해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왠지 아십니까?

그분은 은혜의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헤아리십니다

 

절망 속에서 우리가

어떤 말을 하는지 아십니다

그런 분이십니다 !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사람의 몸이다'

'그가 옳지 못한 말을 할지라도'

'나는 은혜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여러분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이 시편을 통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란다

그건 네가 아침마다 밝은 얼굴로

나를 대하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란다

 

그건 네가 언제나 옳은 말을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건 네가 언제나 옳은 행동을 하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은혜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나는 너의 하나님이란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를 자유케 하는지 아십니까?

제가 여러분께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저 팀 켈러는 잘 나갈 때보다

절망의 시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열 배는 더 경험했습니다.

 

 

◑3. 세 번째로 흑암의 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에

최고의 시기일 뿐만 아니라

그 시간을 지나며 우리는

위대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자, 시편 기자가 부적절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죠.

절대 해서는 안 될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욥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앞에 사탄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내 종 욥을 보았느냐?

그와 같은 이가 이 땅에 없느니라'

 

그러자 사탄은 '욥이 아무 이유 없이 하나님을 섬기겠습니까?

욥이 그러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사탄은 의심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지

혹은 사랑하는지에 대해 의심합니다.

사탄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 당신과 거래하는 겁니다.

욥이 이런 저런 신실하게 보이는 행동을 하는 것은

단지 하나님이 이런 저런 혜택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죠.

 

욥이 기도하고, 제사도 드리고, 당신에게 순종하는 것은

당신이 욥에게 응답하시고, 축복과 평안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 자체로 

당신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저 주고 받는 거래로 지금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잘 되는데

하나님을 이용할 뿐인 거죠!

당신이 그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욥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니 한 번 욥의 모든 것을 다 빼엇아 보시지요

그리고 외적인 흑암과 내적인 흑암을 한 번 줘 보십시오

그러면 아마 당신을 저주하는 욥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욥의 순전함에 대한 사탄의 그럴 듯한 비난입니다.

욥뿐만 아니라 여기 계신 모든 분들께도 있음직한 일이죠

여러분도 어려움을 당할 때, 욥의 형편과 비슷하게 생각해 보신 적이 있나요?

 

또한 반대로,

누군가가가 날 정말 존경하고 좋아한다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자기 이익을 위해 나를 이용한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드는 거죠.

내가 이용당한 다는 느낌은 정말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그가 나를 선대하는 것이 진심인줄 알았는데, 딴 꿍꿍이가 있었던 거죠

 

사탄은, 하나님께,

그런 합리적 의심을 한 번 품어보시라는 겁니다.

 

욥기의 저자는, 지금 욥의 상황을 통해서

사실은 욥기를 읽는 우리 신자들 모두에게

이런 상황을 한 번 생각해 보라는 의도에서, 욥기를 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아무 조건 없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는가요?

오직 하나님 존재 자체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가요?

아니면, 뭔가 하나님이 나를 잘 해 주실 것 같아서, 그 분을 사랑하는가요?'

 

그런데 여러분이 조용할 때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그게 전부는 아닐지라도, 우리에게 어느 정도는

사실 사탄의 고소 내용에 부합하는 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이유 중에 일부는,

하나님이 우리를 잘 대해 주시니까.. 그 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부분적으로 그런 이유도.. 솔직히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대부분, 처음 신앙을 가지고 믿음생활을 출발할 때

그런 (기복적) 기대를 부분적이라도 품지 않았나요? (품었습니다.)

 

예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고 믿고 따르는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거짓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상당수 신자들은

처음에 자기 문제, 어떤 필요, 내적 공허함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하나님이 뭔가 해 주시기 원하기 때문에,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그런 상태에만 계속 머물러 있다면

환경과 여건에 따라 내 신앙도 오르락 내리락 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여전히

'자기 중심성 self-centeredness'이 작동하고 있는 거죠

이것이 우리가 항상 이리저리 방황하는 이유입니다.

 

무슨 일이 닥치기만 하면

'하나님, 왜 가만히 있습니까?' 하며 매우 분노하게 되죠

 

그러나 여러분 들어보세요

오래 전에 한 구약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제가 그 분을 통해 욥기를 이해하게 되었는데요

 

그 분은 "욥의 끔찍한 기도가.."

욥의 모든 기도는 다 이런 식입니다.

시88편과 유사합니다. 하나님께 막말하는 식입니다.

정말 하나님께 끔찍한 말을 내뱉습니다.

 

그러나 욥기의 마지막에 가면

하나님은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라고 하십니다. *욥42:8

 

그리고 욥의 친구들에겐 이렇게 말씀하시죠

'내가 너희에게 노하노라

너희는 욥에게 기도를 요청하거라

욥은 옳으나 너희는 아니다'

 

그 구약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 모든 끔찍한 기도 후에

내가 욥을 기쁘게 받겠다 accept 고 말씀하셨을까요?" 욥42:8

 

 

 

그 교수님의 대답은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욥은 하나님께 화를 내고 분노하고 있었지만

 

 

 

 

 

 

욥은 결코 하나님의 면전에서 박차고 떠나가지 않았습니다.

 

 

 

 

 

 

 

욥은, 자기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나님께 분노한다고 말하지만

결코 하나님을 배신하고 등돌리고 떠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극심한 고난 가운데도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고

이것은 결국 사탄의 패배를 의미하는 거죠

 

▲자 본문 시88편 상황에서

기자는 올바른 태도로 기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기도하는 중입니다.

 

그는 '흑암만이 나의 친구입니다' 라고 말하지만  시88:18

그것 조차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탄의 패배를 의미하죠

 

여러분이 흑암에 있을 때

하나님을 전혀 느낄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 자리에서 버티는 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리 고통 가운데 계속 지낸다 하더라도

여전히 계속 기도할 것입니다!

여전히 교회 가서 예배드릴 것입니다

계속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겠습니다'

 

이는 여러분의 존재를 변화시켜, 성숙시켜서

자기 중심적 존재도 아니요,

하나님과 gaive and take로 거래하는 신자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조변석개 하는 신자가 아니라

이런 성도가 되게 할 것입니다.

 

인내의 사람,

흔들리지 않는 사람,

견고한 사람

위대한 믿음의 조상!

 

▲도서 <반지의 제왕>의 마지막 부분에는

거기서 주인공 프로도가 '운명의 산'을 오릅니다.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고

완전히 진이 빠져버렸습니다.

 

그의 동생 쌤은 운명의 산 꼭대기를 올려다 보고는

문득 깨닫습니다.

'우린 죽을 거야, 어차피 죽게 될거야!'

 

그런 생각이 들자 쌤은

곧장 드러누워 몸을 움크리고 잠에 빠집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쌤에게 희망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그런 것처럼 보였을 때

그것은 새로운 힘으로 바뀌었다

 

쌤은 의지가 확고해지고

평범한 호빗(난장이) 족의 얼굴은

결연하고, 비장해지기 시작했다

 

쌤은 사지에 맴도는 전율을 느꼈다

그는 마치 바위와 강철과 같은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어떤 절망이나 피로감도

끝없는 황량한 길이라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었다'

 

그런 어떤 위대한 존재로 순간 변화되었습니다.

자, 흑암 속에 있을 때야 말로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속물적 속성을 벗어던질 수 있게 됩니다

 

나쁜 일이 닥쳐오는 것은 이런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이제, 네가 가진 신앙을 한 번 살펴보자꾸나

(지니처럼) 내가 너를 섬기고 있는지

아니면 네가 나를 섬기고 있는지, 정말 알아보자

 

네가 평탄할 때는 우리의 관계가 어떤 상태인지

내God 가 알 수 없지만

이제는 내가 곧 알게 될 것 같다

네가 나를 섬기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말이 진심인지!'

 

그런 욥과 같은 상황에서

우리 입술에서, 마음에서, 행동에서

나오는 고백과 섬김은

정녕 우리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고결한 신앙인으로!

욥같은 흔들지지 않는 성도로!

하나님과 give and take 거래하지 않는..

정말 주님을 사랑해서 섬기는 자녀로.. 업그레이드 되고

증명 되는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이게 진짜 질문인데요

시편기자는 흑암을 '객관적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게다가 그 흑암이 영원할 것이라고 말하죠

 

그는 '제 곁에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아요'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제 곁에 안 계십니다' 라고 대놓고 말하죠

 

또한 그는 이 흑암은 일시적이라고 말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라고 말하죠  88:1~4 

 

우리는 그가 틀렸음을 압니다

우리는, 시편 기자가 특별히 남보다 고난을 더 많이 당한 것 같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고난이 늘 있지만, 그렇다고 늘 죽을 때까지 고난만 당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이 시편을 쓴 저자는 헤만입니다

헤만은 역대상 6장에 나옵니다.

'고핫의 자손 중에 헤만은 찬송하는 자라'

 

헤만은 많은 시편을 기록했습니다.

시편 40편 부근과 80편 부근에 그의 시들이 나오는데요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시편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학작품 중 하나입니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인정하는 사실이죠

헤만이 쓴 시편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학이자 노래인데

이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의 도움을 받았음을 뜻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여러분, 얼마나 큰 압력이 있어야

석탄이 다이아문드가 되는지 아십니까?

 

이 석탄과 같이 눌리는 고통을 통해서

헤만은 위대한 예술가로, 신앙인으로 변하게 됩니다

 

헤만이 이 고통의 시간을 지나며 약2500년 후에

런던의 한 복판에서 수 천 명의 사람들이

자기의 위대한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설교)할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요?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고난의 현장에 헤만과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일을 섭리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이 탄생된 것이잖아요

 

그는 고통이 영구적이라 했지만, 그는 영구적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놀랍고 위대한 존재로 바꾸셨고

그의 시를 수백 년 동안 사용하셨습니다.

 

▲여러분 각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의 순간에, 여러분이 느끼지 못하더라도

그분은 당신 곁에 계십니다.

그 분은 당신을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 분은 그 속에서 여전히 역사하고 계십니다.

헤만처럼요! 욥처럼요!

 

시39편의 마지막 부분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려버리십니다.

 

본문 시88편의 마지막은 '흑암!'으로 끝나죠

 

이 두 상황이 혹시 여러분께도 익숙하신가요?

 

 

마27: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헤만은 자신이 절대적이고 총체적인 흑암을 겪고 있으며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을 받았다고 느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 절대적인 흑암을 겪으신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정말 완전히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졌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절규하셨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

하나님의 진노가 내려졌습니다.

 

그저 느낌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신 게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의 진노를, 온 몸으로 받아내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홀로 예수 그리스도만 남았습니다.

말그대로 흑암만이 예수님의 친구였던 것입니다.

 

제자들도 그분 곁을 떠났습니다.

흑암이 뒤덮이자 사람들도 뿔뿔이 다 떠났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아버지마저 떠나셨습니다. 얼굴을 돌리시고 외면하셨습니다.

흑만만이 친구였습니다.

 

그 이유를 아십니까?

우리의 구속을 위해서였습니다.

 

욥기에서 사탄은 옳은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마저 이용해 먹으려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러니 늘 쉽게 남을 이용해 먹으려고 합니다.

 

그런 우리는 하나님의 외면을 받아 마땅합니다.

우리는 그 흑암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흑암과 외면을 대신 다 취하셨습니다.

 

그분을 믿음으로 우리가 용서받기 위해서죠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친구는 흑암 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만약 캄캄한 흑암 속에 거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친구가 되어주십니다.

그 분은 흑암과 외면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다.

 

예수님은 진정 버림을 받으셨지만

우리는 고작 버림받았다는 느낌만 받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여러분과 함께 해 주십니다.

 

그분은 결코 여러분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에도,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도

우리의 죄과를 예수님이 다 담당해 주셨으므로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죄인으로 외면하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그 흑암 가운데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되는 기도 가운데서도

결코 우리를, 저와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묵묵히 꿋꿋이 십자가를 다 지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조금만 어려움을 겪어도

주님이 자기를 외면한다고 생각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 분이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는데 말입니다.

 

시편 88편에는 헤만이 던지는 냉소적인 질문이 많이 나옵니다.

'내가 죽고 나서야 주를 찬송하리이까?'

 

만일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자 구원자로 믿으신다면

'너는 혹시 죽어도 부활할 것이다!' 입니다.

 

저는 만성 질환으로 투병하는 한 여성을 압니다.

여러분은 그녀에게 물어봅니다 '요즘 좀 어떠세요? 많이 힘드시죠?'

그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부활이 치료하지 못할 질병은 없습니다!'

수 십 년 불치병을 앓지만,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는 거죠

 

그녀가 옳습니다.

여러분도 이 진리를 붙드십시오

 

마이클 월콕 이라는 시편 주석가는 시88편에 대해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이런 흑암은 모든 신자들에게 일어날 수 있다.

이 시편은, 흑암을 경험한다해서

버려진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아직 흑암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도 장차 흑암을 찾아온다

예수께서는 이런 흑암을 다 경험하셨으며

이는 당신이 결코 버려진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런 흑암은 세상이 존재하는 한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다

그렇기에 오직 다음 세상에서만 완전한 흑암의 끝이 올 것이다

흑음이 찾아 올 때는 그 이유조차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이유(하나님의 섭리)는 존재하고

그 목적은 분명하며 마침내 당신은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타자 YSS, JK

 

◑같은 설교의 다른 번역 //////////////////////////////////////////////////////

 

성경 특히 시편은 고난중인 사람들의 기도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통과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희망의 말들로 끝을 맺게 됩니다.

 

시편에서 읽는 거의 대부분의 기도들은 고난 가운데 어려운 통과하는 사람들의 기도들이고,

항상 ‘내가 주님을 여기서 봅니다’ 또는 ‘당신의 선하심을 볼 것입니다.’

또는 ‘당신이 나와 함께 있습니다’ 와 같은 말들로 끝을 맺게 됩니다.

 

하지만 2개의 시편은 다릅니다. 시편 39편과 88편은 희망의 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88편에서 어두움 이라는 단어가 3번 나오고

영어번역에서는 제일 마지막 문장이 어두움이 나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합니다.

 

히브리어에서도 마지막 단어가 어두움입니다.

히브리어의 정확한 번역은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는 어두움!;이라는 표현입니다.

 

시편 88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의 증인이 되길 원합니다.

나는 세상에 당신에 대해 말하길 원합니다.

내가 죽는다면 어떻게 이 일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하고자 하는 일들을 아무것도 못하게 하시는군요.

이게 도대체 이해가 되는 상황입니까. 나에게 대답하세요!

 

어떤 사람들은 기자가 무절제하다고 하고 어떤사람은 불경하다고 합니다.

시편기자는 마음을 다스리지도 못하고 있고 공손하지도 않고 예의바르지도 않고

하나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지도 않습니다.

 

시편88편 기자가 말하는 것은

내 평생에 나는 죽음과 가까이하고 있고 당신은 나를 버렸습니다.

나를 위해 좋은 일을 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이것이 시편기자가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장이지만 우리모두 이런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절망가운데 있어서 우리 마음이 화와 슬픔과 두려움과 절망으로 가득차 있을 때

우리 삶을 돌아보고 ’주님 예전에 우리에게 선한 일들을 많이 해주셨네요‘ 하지 않습니다.

 

어떤 시편은 그렇게 하지만, 시편88은 그렇게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한번도 선한일을 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반대심문하고 있습니다.

 

불경하진 않더라도 믿을수 없을 정도로 무례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어두움이 나의 친구!’라고 합니다.

 

하나님한테 어두움이 하나님보다 더 좋은 친구라고 얘기합니다.

하나님보다 차라리 어두움을 갖겠다고 합니다.

어두움이 하나님보다 더 편하다고 합니다.

 

물론 시편기자가 잘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왜 이런 기도가 성경에 있어야 합니까?

시편39편과 88편은 매우 비슷합니다.

 

저는 항상 이 기도들로 무엇을 해야할지 몰랐고, 그냥 넘겨버렸습니다.

이 시편들로 말씀을 전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본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데렉 키드너라는 분이 이 기도들에 대해 한 말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들은 저에게 충격으로 다가왔고 내 삶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내 삶에서 어떻게 어두움을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성경에 이 기도들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절망적일 때 어떻게 말하는지 알고 이해하신다는 증거이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성경에 넣으셨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때때로 이런 기도를 한다는 것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절망적일 때 어떻게 말하는지 하나님은 이해하십니다.

‘나는 이 사람의 하나님이다. 그가 제대로 행동하고 있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이 시편을 통해서 당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너가 나에게 아침에 행복한 얼굴을 보여서가 아니라,

너가 올바른 말을 해서가 아니라, 너가 올바르게 행동을 해서가 아니다.

나는 은혜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너의 하나님이다.’

 

시편기자가 올바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말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말조차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들을 하나님께 했습니다.

이것은 욥기와도 일맥상통합니다.

 

욥기 내내 욥은 지독한 기도들을 하였습니다.

욥의 기도들은 시편88편과 매우 비슷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하나님은 욥이 나에게 영광을 돌렸다고 하고,

욥의 친구들에게 욥이 너희를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요청하라고 합니다.

‘내가 너희들을 혼낼 것이다.

욥은 나를 공경했지만 너희는 그렇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욥이 한 이 모든 지독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는 욥이 나를 공경했다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그것들이 모두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욥은 화가나 있었고 불평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화가 나 있었고 하나님에게 불평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신에게 화가 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서 결코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는 사탄이 졌습니다.

 

이 시편기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두움이 내 가장친한 친구’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을 하나님께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이 패배합니다.

 

이 말은 여러분이 어두움을 통과할 때,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느낄 때..

어쨌든 하나님을 붙잡으셔야 합니다.

‘내가 그래도 기도합니다. 내가 그래도 교회에 가서 예배드립니다.

그래도 내 이웃을 사랑합니다. 그래도 내가 해야할 일을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여러분은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아닌 상황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람이 아닌.. 인내하는 능력있는 힘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시편88편기자는 헤만입니다.

에스더에 나오는 하만이 아니라, 헤만은 역대상6장33절에 나오는 그핫 자손으로

찬송하는 자로 헤만은 많은 시편을 쓴 사람입니다.

 

헤만이 쓴 시들은 시편 40편대나 80편대를 찾아보시면 됩니다.

시편은 역사상 가장 훌륭한 문학작품들 중 하나입니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인정할 것입니다.

이 말은 헤만이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음악작품을 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헤만에게 도움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가 겪었던 고난으로 석탄이 다이아몬드로 변화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고난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것이고 하나님이 그곳에 계십니다.

이 고난을 통하여 헤만은 위대한 예술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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