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가는 제자
막 14:50-52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오늘은 고난주일입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우리는 사순절 새벽기도회를 계속해 왔습니다. 이번 기도회에는 “우리는 사명을 위해서 태어났다”라는 주제가 있는 기도회를 해 왔습니다. 누구를 위한 사명인가 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갈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하고 할 일하고 드리고 수고하고 생명 바치는 삶을 살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실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보내셔서 그 아들을 철두철미하게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마침내 십자가에서 제물 되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말 그대로 처절하게 고난을 받으시다가 죽으셨습니다. 그때부터 이 세상에서는 가장 큰 고난을 말할 때 십자가의 고난을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렇게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께서 고난 받을 때 그 주어진 십자가의 고난도 힘들었지만 그를 더 고난스럽게 한 것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고난 받으시는 예수님의 주변에서 그 고난을 함께 해야 할 사람들이 한사람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 옆을 지켜야 할 제자들은 다 도망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혼자서 그 고난을 다 받으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참 고독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주간이 고난 주간입니다. 우리들이 고독하게 고난 받으신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기간입니다.
2천 년 전 오늘 주일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날 예수님은 아주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개선장군처럼 입성했습니다. 그리고 월요일은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십니다. 방문해 보니까 거룩해야할 성전이 시장바닥처럼 장사꾼들로 득실거리고 물건을 팔고 짐승 떼가 몰려다니고 야단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흥분하셔서 뒤집어엎으시고 호령하시고 모두 내쫒고 성전을 나오시다 그 분노를 무화과나무에게 쏟으십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화요일은 산위에 올라가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는 날입니다. 앞으로 40여년 후에는 멸망해버리고 말 이 도성을 미리 내다보시며 그것도 모르고 오늘 살아가는 저 우매한 백성을 돌아보시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리고 수요일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모처럼 제자들과 하루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시는 날입니다. 그날도 유다는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흥정을 하고 다녔습니다. 목요일은 고난 받기 전날입니다. 그날 저녁에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찬을 갖고 그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밤에 겟세마네 산으로 올라가 철야기도를 합니다. 금요일 새벽에 기도를 마치고 내려오다 예수님은 로마군인 들에 의해서 체포되고 끌려갑니다. 가서 심문을 받고 마침내 로마총독 빌라도 앞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군중의 손에 내 맡겨집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가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달리고 6시간 만인 오후 3시에 운명하시고 저녁시간에 무덤에 묻히게 됩니다. 창조주가 피조물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다 당하시고 땅에 묻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주간이 고난주간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예수님이 그렇게 고난 받는 과정에서 발생한 하나의 해프닝을 삽화처럼 소개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저는 36년째 목회하고 설교하고 있지만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 본문을 읽어보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읽고 나서 아멘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를 만큼 애매하고 웃음이 나오는 대목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잡혀서 끌려 다닐 때 어떤 청년이 신분을 숨기느라 홑이불을 뒤집어쓰고 멀찍이 좇아오면서 관망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갑자기 그를 붙잡으니까 황망하게 홑이불을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도망갔다고 했습니다. 그때 그 모습을 예수님이 보시고 어떤 심정이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참으로 황당하고 보기 민망한 제자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청년은 누구였을까요. 그것이 궁금합니다. 주석자들은 그 청년이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일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일 것이라고도 하고 예수님을 가장 사랑한다던 사도요한일 것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근접한 해석은 이 마가복음을 쓴 마가 자신일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더 많습니다.
그날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을 이 마가의 집 다락방에서 가졌습니다. 그곳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다 모여 마지막으로 만찬을 가집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그때 그곳에 마가도 참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찬을 마친 후에 예수님 일행은 겟세마네 산으로 기도하러 떠납니다. 그리고 마가는 집에 남아 잡을 잤습니다. 그때 가룟유다와 로마군인 들이 그 마가의 집에 들이닥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떠나버린 예수님 일행이 어디 갔느냐고 심하게 추궁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간 후 이 마가는 혹시 이 일이 어떻게 되나 보려고 급히 잡잘 때 덮고 자던 홑이불을 몸에 두르고 군인들 뒤를 따라가 예수님이 체포되는 것을 보고 계속 따라 다니다가 갑자기 누군가가 그를 잡으니까 너무 놀라 홑이불을 벗어던지고 알몸 인 채 도망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해프닝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 청년은 잠결에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미처 준비도 못하고 그냥 쫒아갔다가 이런 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이 부끄러운 모습을 마가는 왜 자기가 기록한 마가복음에 기록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한스럽고 부끄러워 회개하는 마음으로 복음서 가운데 유일하게 자신이 쓴 마가복음에서만 기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마가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 자신을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그런 상황이 오면 어떤 모습일까? 나 같으면 그때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진정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평상시야 무슨 말인들 못하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불완전하고 미성숙한 제자들에게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큰 사명을 부여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들이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몇 가지 먼저 전제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 이해
신앙생활에서 예수에 대해서 깊은 이해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깊은 이해나 공감이 없으면 이렇게 도망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신앙생활 하다가 어느 순간 기분만 나빠도 그만둘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위기 때에 도망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여기 이 청년이 방심하고 있다가 순간 위기가 오니까 다 벗어던지고 도망갔다고 했습니다. 잠결에 따라왔고 예수님에 대해서 깊은 이해도 없었으니까 그의 행동은 당연할 일일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부터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습니다. 모르면 삶의 깊이가 없고 열정이 없고 희생의 동기가 없습니다.
버트랜드 러셀이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는 책에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열매가 없다고 무화과나무를 말라 죽게 한 그 비인격적인 예수를 도저히 신뢰할 수가 없어서 그를 믿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나무가 열매가 없으면 가꾸는 주인의 책임이고 더구나 철도 아닌 무화과나무에서 열매가 없다고 저주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거부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깊이 모르면 이런 해석도 나올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필이면 그 많은 나무 중에서 무화과나무를 택해서 말라죽게 한 그 이유를 알 도무지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려면 먼저 예수를 깊이 이해하고 알고 공감하는 일이 우선입니다. 마가는 그날 깊이 알지도 모르고 따라나섰다가 당하고 말았습니다. 깊이 모르고 따라다니다 보면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2. 용기
예수님을 깊이 알고 이해하고 공감한다고 다가 아닙니다. 그 다음에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제자의 삶에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이 바로 이 용기입니다. 가끔 용기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참 부럽게 보입니다. 칼 힐티라는 분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용기는 참 좋은 것이다, 용기는 어느 순간에도 잃지 말아야 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용기를 잃게 되면 전 생애의 노력이 헛될 수밖에 없게 된다, 다만 용기를 버릴 때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이 분명할 때만 버려야 한다.” 너무나 지당하고 옳은 말입니다. 용기는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인의 길에는 언제나 이 용기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주일날 예배드리려 나오는 길에도 이 용기가 요구됩니다. 이 용기가 없으면 일어나 나오기가 주저됩니다. 살아가기도 빠듯한 월급에서 11조를 뚝 떼어 낸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헌신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주님은 우리에게 더 큰 수고를 요구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때 그 부름에 응답하고 순종하려면 거기에 절대적인 이 용기가 필요합니다. 신앙인에게는 이런 용기가 필요합니다. 내가 믿는 신앙의 대상에게 이런 용기를 표현하고 중심을 갖는 다는 것은 중요한 삶의 내용입니다. 신앙인에게는 이런 용기가 필요합니다. 특히 “나는 예수의 제자다” 하면 이런 희생의 용기와 순종의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나와 있는 이 젊은 청년을 보면 그런 용기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엉겁결에 따라 나오기는 했지만 누군가 그를 붙잡으니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도망갔습니다. 이 젊은이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3. 사고의 전환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알고 용기를 갖는 일 외에 사고의 전환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내 중심에서 타인 중심으로 사고와 생각과 중심이 전환”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자의 삶을 효과적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전도서 14:20을 보면 “너희는 어린아이가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린아이는 언제나 내 중심입니다. 내 입장과 내 입 밖에는 모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인 것입니다. 그 미성숙한 입장에서는 누구를 배려하고 섬기는 정신을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그런 정신으로 누구를 섬기는 제자가 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내 중심으로 살아가게 되면 용기나 목적이나 목표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졸렬해지고 인색하고 자기위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매사 내 중심, 내 위주, 내 안전만을 위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제자가 되어서 나의 안전만 생각한다면 그 제자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허울만 있는 제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가 되려면 먼저 타인중심으로 사고가 전환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도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입장에 충실한 그리스도인이 있고 또 하나는 넓은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자신의 입장에 충실한 그리스도인은 본문에 나오는 청년 같은 제자입니다. 예수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뒤를 따라갑니다. 그것을 신앙생활인줄 알고 살아갑니다. 그러다 위기가 오면 도망을 갑니다. 자기를 감춥니다, 부인합니다. 물론 그런 신앙인도 구원은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편안하게, 풍성하게, 형통하게 해 주실까를 생각하며 신앙생활 합니다. 오늘 신앙인 가운데 태반이 이런 신앙입니다. 여기서 오래 머물러 있으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은 귀에도 들리지 않습니다. 상상도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입장에 충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어린아이가 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입장에 충실하게 되면 생각의 폭이나 행동의 폭 그리고 역할의 폭이 좁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이것이 마침내 나를 자꾸만 축소시키고 고집이 생기고 언어로 생각으로 사고로 좁게 생각하고 판단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이 벽을 넘어야 합니다. 사고의 전환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우선 내 중심에서 타인중심으로 생각이과 마음과 사고와 언어가 열려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은 부실하지만 제자들에게 “너희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지금은 비록 미성숙해서 내 중심이지만 이제부터 마음도 생각도 사고도 활짝 열고 타인중심으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사고가 전환되면 “지역적 사고에서 세계를 품는 사고”를 갖게됩니다. 하나님은 어느 지역에 국한된 분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만의 하나님으로, 자기민족의 하나님으로 국한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예루살렘만을 고집했습니다. 그들의 생각 속에는 이방전도는 상상 속에도 없었습니다. 이방전도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면서 안주하려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똘똘 뭉쳐서 자기들만의 성을 쌓고 살아가는 예루살렘에 무서운 환란을 일으켜 타의에 의해서 세계로 더 넓은 지역으로 강제로 흩어지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마침내 세계적인 종교가 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렇게 자신을 열고 다가가지 않으면 전파되지 않습니다. 시 2:8을 보면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꿈이고 세계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입니다. 진정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은 먼저 넓은 세계를 품는 가슴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들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고의 변화를 이룰 때 가능합니다.
그런 면에서 사도바울은 참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는 체구는 왜소했지만 그 당시 세계로 인식되었던 대 로마를 마음에 품고 복음을 전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그 조그만 가슴속에 거대한 로마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의 의식 속에도 온통 로마에 대한 복음전도 계획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지역적 사고에서 세계를 품는 사고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자의 삶에는 “영원한 세계를 보는 눈을 가지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영원한 세계에 대한 꿈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지금 여기만 고집하지 말고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는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여기는 아주 유한한 곳이고 늘 변화무쌍한 곳이고 우리가 절대적으로 의지할 곳이 못됩니다. 오늘 땀을 흘리고 수고하는 일들은 일 년 후 이 년 후에는 별로 소용도 없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오늘 장수시대라고 해서 90을 살고 100세를 산다고 만족해 하지만 그것도 하나님의 시간에 비추어보면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만큼 현재의 일은 유한하고 제한적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너무 현재에 집착하거나 고집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한 시간에 관심을 갖게되고 그 세계를 소유하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영원의 시간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천국도 영원한 세계입니다. 구원받음도 영원을 상속받는 일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도 영원한 나라를 소유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일시적인 것들을 얻기 위해서 영원한 것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예수님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데 많은 방해물들이 있습니다. 그중 가장 큰 것이 바로 나 자신입니다. 이 나에 갇히면 예수가 보이지 않습니다. 천국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나만 크게 보입니다. 그러면 효과적으로 제자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또 하나는 현실입니다. 오늘 먹고 살아가는 현실의 문제, 경쟁의 문제, 직장의 문제, 이것들이 우리의 영적수준을 말살시켜 버립니다. 천국에 대한 관심을 무디게 만들어 버립니다. 또 하나는 취미생활입니다. 이 취미가 주일을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주일 날 들로 산으로 바다로 잠자리로 깊이 끌고 다닙니다. 이것들을 버려야 할 때 벗어버려야 하는데 이것이 잘 안됩니다. 그러니까 장애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의 제자이면 우리 마음 가득히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뜻을 존중하고 이루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예수를 우리의 삶에서 우선순위 1번으로 두고 살아야 합니다. 적어도 그래야 우리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이 청년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고 나 자신을 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고난을 마음 깊이 새기고 음미하고 생각하는 아침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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