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된 자녀를 만드는 길 (창세기 27장 15-29절) >< 복된 자녀를 만드는 길 >
부모의 가장 중요한 사명 중 하나는 자녀를 복된 자녀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 복된 자녀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헌신하는 삶을 가르치라
본문 앞부분의 4절을 보면 이삭은 자녀를 무작정 축복하지 않고 자신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자신에게로 가져다가 먹게 해서 그 별미를 받은 후 마음껏 축복하겠다고 했다. 자녀가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면 먼저 헌신을 가르치라는 암시다. 자녀를 우상처럼 키워서 받기만 하고 드리고 나누고 베풀 줄 모르게 키우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점차 멀어진다. 자녀에게 남을 배려하는 삶과 헌신하는 삶을 힘써 가르치라.
어떤 부모는 자녀에게 당부한다. “얘야! 어렵게 살거나 장애가 있거나 내면의 인격 문제가 아닌 외모나 외적인 문제로 따돌림 당하는 아이를 특별히 잘 살펴주고 그의 친구가 되어주라.” 그렇게 교육 받고 자란 자녀가 어떻게 복이 없겠는가? 하나님은 내적인 인격 문제가 아닌 외적인 문제나 편견으로 소외된 사람이나 장애인을 따돌리는 사람은 외면하지만 그런 소외된 사람이나 장애인을 힘써 살피려는 사람은 축복하신다.
요새는 선천적인 장애인보다 사고로 인한 후천적인 장애인이 더 많다. 나이가 많이 들면 누구나 장애인처럼 약해진다. 결국 모두가 예비 장애인인 셈이다. 그 사실을 생각하며 늘 장애인을 힘써 배려하라. 어떤 사람은 장애인을 ‘장애우’라고 표현하지만 그 표현이 억지로 친구가 되어주는 느낌을 주어 오히려 장애인을 2류 인간처럼 취급하는 뉘앙스가 있어서 요새는 ‘장애우’란 어휘보다 그냥 ‘장애인’이란 보통명사를 쓰는 것이 좋다고 권고한다. 그런 배려하는 표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선진국은 돈이 많아서 선진국이 아니다. 장애인을 위해 시설 마련에 힘쓰고 배려와 편견 없는 시선을 가진 것이 선진국의 지표다. 높은 교육열을 자랑하면서 장애인과의 통합교육을 반대하고 장애인 시설을 혐오 시설로 여기고 반대하면 선진국 자격이 없다. 자녀에게 따뜻한 마음과 시선을 전수하고 받기보다 주는 자녀로 사려 깊게 키우면 정말 복된 자녀가 된다. 드리고 나누고 베풀 줄 아는 삶은 실제적인 축복과 행복을 얻게 하는 제일 요소다.
2. 축복의 터치를 많이 해주라
이삭이 야곱을 축복할 때 어떻게 축복하는가? 본문 26절을 보라.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 맞추라.” 자녀와 입맞춤하고 자녀를 꼭 안아주고 자녀의 손을 잡아주는 것과 같은 접촉은 부모의 축복을 자녀들에게 전달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그런 축복의 터치는 자녀를 전적으로 인정하고 용납한다는 뜻도 있고 더 나아가 그 축복의 터치를 통해 자녀와 인격적인 깊은 만남과 교감도 가질 수 있다.
몸에 있는 약 5백만 개의 촉각 중 3분의 1 정도가 손에 집중되어 있기에 손의 터치는 의학적으로도 중요해서 손의 터치가 많으면 헤모글로빈 수치가 증가하고 머리가 맑아지고 노인성 치매를 예방하는 효과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자녀의 손을 잡아주는 것은 그런 의학적인 효과 이상의 효과와 의미를 가져다준다. 그러므로 자녀의 손도 많이 잡아주고 축복의 터치도 많이 해주라.
왜 사람이 이단에 잘 빠지는가? 사랑을 꾸며내는 계획적이고 거짓된 터치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터치에 속아 마음을 주면 점차 이단 교주가 물질도 빼앗고 심하면 몸도 빼앗는다. 그것이 처음에는 통하니까 이단 교주는 점차 상습적이 된다. 그런 교주의 행태를 시간이 지나면서 깨닫고 영혼의 혼돈에서 깨어난 누군가가 그 사실을 용기 있게 알려서 그 이단 교주가 나중에는 다 잃는 경우가 많다. 거짓된 터치에 처음부터 속지 않도록 자녀를 집회에만 보내려고 하지 말고 부모가 힘써 진실한 사랑의 터치를 많이 해주라.
마가복음 10장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올 때 제자들은 꾸짖었지만 예수님은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안수하고 축복하셨다. 자녀에게 그런 축복의 터치를 많이 해주라. 자녀가 커가면서 그런 터치에 부담을 가지면 그때는 축복의 터치를 위한 기회 포착을 사려 깊게 잘하라. 즉 놀이나 스포츠나 여행 등을 통해 자연스런 터치 기회와 시간을 만들고 자녀와의 만남과 대화 시간도 많이 가지라. 그런 터치와 만남이 사소한 것 같지만 자녀에게 축복의 문을 열어주는 가장 소중한 통로다.
3. 축복의 말을 많이 해주라
자녀에게 많은 명령과 요구를 통해 과부하를 걸면 자녀는 생각보다 더 나빠지고 축복의 말을 많이 해주면 자녀는 생각보다 더 좋아진다. 모든 원리가 그렇다. 배터리 충전도 오래 하면 좋을 것 같지만 100% 충전하고도 계속 충전지를 꼽으면 과부하로 충전지 수명이 단축된다. 자녀에게 너무 많은 것을 집어넣으면 좋을 것 같지만 오히려 자녀의 사명감을 위축시키고 자녀의 행복을 막는다. 자녀에게 축복의 말을 많이 해주라. 어떤 말을 해주는 것이 좋은가?
1) 가치를 인정해 주는 말
본문 27절 하반부를 보면 이삭은 야곱을 축복할 때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라고 했다. 그 말은 “너는 하나님 앞에 가치 있는 존재다.”라는 뜻이다. 축복한다는 말의 성경적인 뜻은 “당신은 잘됩니다.”는 뜻보다 “당신은 귀한 사람입니다.”라는 뜻이다. 성경에 많이 나오는 “주님을 송축한다.”는 말은 영어로 “Bless the Lord,” 즉 “주님을 축복한다.”는 말이다. 만약 ‘축복한다’는 말이 ‘잘된다’는 말이라면 어떻게 사람이 주님에게 “주님은 잘될 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가? 완전한 분에게 잘된다는 말은 모순이다.
결국 “주님을 송축한다(축복한다).”는 말은 결국 “하나님! 당신은 귀한 분입니다”라는 말이다. 자녀를 축복할 때도 “네가 잘되기를 바란다.”는 말보다 “너는 귀한 존재다.”라는 말을 많이 해주라. 자녀가 부족해 보여도 가치를 인정해주고 인격을 최대한 존중해서 내 감정의 희생양이 되지 않게 하라. 일이 안 풀리고 살기가 힘든 것이 표출되어 화내고 짜증내고 비난하고 매를 드는 것은 자녀에게 독을 먹이는 것이고 부모의 미성숙과 무능을 드러내는 부끄러운 태도다. 현재 모습은 부족해도 자녀의 가치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라. 그것을 일깨우는 것이 참된 축복이다.
2) 가능성을 격려하는 말
본문 28-29절의 축복을 한 마디로 말하면 “너는 앞으로 큰 인물이 된다.”는 말이다. 누구나 감춰진 대단한 잠재능력이 있다. 겉으로는 보기 싫은 애벌레도 그 안에는 아름다운 나비가 들어 있다. 자녀도 지금은 연약해 보이지만 그 안에 놀라운 가능성이 있다. 그 가능성을 격려해주고 잠재능력을 발휘하게 도와주라. 부모가 자녀를 낮게 평가하면 자녀는 그 부모의 평가를 넘어서기 힘들다. 반대로 부모가 자녀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격려해주면 자녀는 생각 이상으로 훌륭하게 자란다. 자녀를 키울 때 격려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아프리카 정글의 한 부족은 누가 죄를 범하면 그를 마을 광장에 세우고 모든 마을 사람이 그 주위에 큰 원을 이루어 서고 한 명씩 돌아가며 그의 장점이나 과거의 선행을 크게 말한다. 그때 과장이나 농담은 일체 금지되고 비난이나 욕이나 책망은 없이 칭찬만 해주는데 칭찬이 바닥날 때까지 며칠이라도 하다가 칭찬이 다 끝나면 그때부터 그가 새롭게 된 의미로 축제를 벌인다. 그러면 그가 정말 새 사람이 되면서 그 부족 사회는 범죄가 거의 없다고 한다. 참된 변화와 발전은 비판과 지탄보다 칭찬과 격려를 통해 더 많이 이뤄진다.
3) 영혼에 믿음을 주는 말
가끔 부모가 자녀가 듣는 데서 남의 잘못에 대해 진솔한 대화를 할 때가 있다. 자녀가 그렇게 살지 않기를 바라는 교육적인 목적으로 그런 대화를 들려주는 것은 필요하다. 교사보다 반면교사가 때로는 더 생생한 교육이 된다. 반면에 그런 교육적인 목적이 아닌 상태에서 습관적으로 불의하게 남의 흉을 보거나 남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하면 자녀의 마음과 영혼에 상처가 생기고 어른을 우습게 알고 똑같이 뒤에서 흉보는 자녀로 자라기 쉽다. 자녀 앞에서 잘못된 부정적인 말과 남 흉보는 말을 힘써 자제하라.
정치인이 나쁘다고 욕하는 것이나 어떤 나라가 나쁘다고 욕하는 것이나 무의식적으로 발설되는 편견적인 언행도 자제하라. 자녀가 자기 기대에 미치지 못해도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말라. 넓게 울타리를 치고 넉넉한 마음으로 기다려주라. 남이 내 자녀보다 한참 앞서도 실망하지 말라. 일찍 핀 꽃은 먼저 시든다. 사람은 늘 앞서는 법도 없고 늘 뒤쳐지는 법도 없다. 앞서는 날이 있으면 뒤쳐지는 날도 오고 뒤쳐지는 날이 있으면 앞서는 날도 온다. 뒤처진 상황에서도 믿음 잃지 않고 넉넉한 마음으로 자녀를 믿고 격려해주는 것이 부모의 할 일이다.
<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라 >
가끔 보면 피치 못할 사정으로 부모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자란 자녀도 있다. 그런 자녀는 다 끝난 인생인가? 그렇지 않다. 그 상황도 잘 극복하면 일찍부터 성숙해지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고 그런 부정적인 현실이 성취동기 및 종교심을 자극해 더욱 복된 존재가 되고 내 아픔과 상처가 힘들게 사는 사람에 대한 연민의 정과 이웃사랑으로 승화될 때도 많다. 역사를 보면 부모의 돌봄과 축복을 받지 못한 사람도 훌륭한 인물이 된 예가 많다.
우리나라도 과거에는 유교적 분위기로 부모의 축복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은 적었다. 과거 유교는 주로 힘 있는 자의 편에 섰다. 왕과 신하 관계에서는 왕의 편에 섰고 부모 자녀의 관계에서는 부모 편에 섰고 남편 아내 관계에서는 남편 편에 섰다. 과거 유교는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가르침을 많이 해도 자녀를 이해하고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상대적으로 적어서 예전의 한국인은 대부분 부모의 축복을 잘 받지 못하고 자랐다.
중요한 것은 축복을 잘 받지 못하고 자란 것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부모의 축복을 남보다 적게 받았다면 차선책으로 남으로부터 축복의 말을 많이 받으면 된다. 내 헌신과 충성과 진실과 정직을 통해 얼마든지 남의 축복을 많이 받으며 살 수 있다. 즉 내 믿음과 인격과 행실에 따라 형제의 축복, 좋은 동료의 축복, 좋은 멘토의 축복, 좋은 목회자의 축복을 넘치게 받아 누릴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축복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다. 부모의 축복을 받으면 좋지만 받지 못했어도 겸손히 하나님을 붙들고 나가면 축복의 문은 열린다.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지표로 삼고 나아가면 과거의 어떤 아픔도 아름답게 승화시킬 수 있다. 지금도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의 말이 수시로 들려지고 있다. 특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매일 그리고 매주 넘치게 축복의 말을 받는 셈이다. 그 축복의 말에 귀를 기울여 더 많이 축복받은 후 가족과 이웃에게 축복의 말을 많이 해줌으로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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