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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중한 심판을 면하는 길 (누가복음 20장 45-47절)

by 【고동엽】 2023. 1. 7.

엄중한 심판을 면하는 길 (누가복음 20장 45-47절) 1. 긴 옷을 입고 다니지 말라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약속을 지키는 실력이 진짜 능력이다. 못 지킬 말을 해도 안 되지만 안 지킬 말을 하면 더 안 된다. 말에 사람됨이 다 나타난다. 약속했으면 힘써 지키는 것이 인격의 기본이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했으면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자신은 종으로 살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 약속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삶의 증거가 있어야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도 면할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는 삶을 도전하면서 서기관의 예를 들어 가장 먼저 “긴 옷을 입고 다니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 말씀은 “겸손하라.”는 말씀이다. 당시 대부분 바리새인이었던 서기관들은 권위를 과시하려고 긴 옷을 입고 다녔다. 목사는 강단에서 긴 옷을 입고 판사는 재판정에서 긴 옷을 입는다. 그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긴 옷 속에 교만과 우월감이 감춰져 있으면 안 된다. 최근에 많은 목사들은 탈 권위의 상징으로 특별한 의식이 없으면 예배 때 그냥 양복을 입는다. 그런 권위도 없애겠다고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기도 하지만 지나침은 모자람만도 못할 수 있다.

 만약 목회자가 교회 밖에서 예복을 돌아다니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높은 마음을 가지고 정신적인 갑질을 하면 존경스럽게 보이기보다 오히려 경망스럽게 보인다. 요즘은 을을 무서워해야 하는 시대다. 옛날에는 갑의 갑질을 반격할 힘이 을에게 거의 없었지만 인터넷 세상에서는 을에게도 반격 무기가 꽤 많다. 갑의 위치에 있어도 겸손을 잃지 말라. 을의 반격도 무섭지만 더욱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반격이다.

2. 문안 받기를 좋아하지 말라

 이 말씀은 “섬겨주라.”는 말씀이다. 남의 시선을 받는 것만 좋아하지 말고 소외된 곳에 나의 시선을 주라는 말씀이다. 나는 다가가지 않고 남만 다가오기 원하는 ‘인간 동상’은 높은 자리는 얻어도 높은 존경은 얻지 못한다. 동상은 움직이지 않지만 대개 선을 위해 움직인 사람을 기념하려고 세워진 것이다. 대접받는 것이나 무대와 중심에 있는 것만 좋아하지 말고 남을 중심에 세워주기 위한 능동적인 소외를 겁내지 말라.

 누가 나에 대해 어떤 말을 하거나 나를 따돌리고 어떤 결정을 해도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 내 길을 바르게 뚜벅뚜벅 가면서 바른 성품을 가지고 내 언행과 믿음과 봉사 자리를 지키면 나중에는 저절로 중심에 선다. 공동체에서 나를 따돌리면 지구상에서 그 몇 명이 따돌리는 것이기에 속상해할 것이 없다. “몇 억분의 1도 안 되는 사람이 따돌린들 무슨 대수인가?”라고 편히 여기라. 오히려 나를 쏙 빼니까 내가 신경 쓸 일도 적고 내 일에 매진할 수 있으니까 “내게 시간과 여유를 주어 고맙네.”라고 생각하라.

 소외 상황을 즐기라. 소외될 때 속상하지 않고 더 소화가 잘되는 믿음을 가지라. 왜 소화가 잘되는가? 그때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로 들어갈 수 있고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 가족들이 필자를 쏙 빼고 자기들끼리 어울려 놀면서 잘 지내면 더 기쁘다. 가족들이 다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나를 쏙 빼고 잘 지내는 모습을 보면 더 기뻐지는 경지에 이르라. 소외 문제는 사랑 문제로 얼마든지 풀 수 있다.

3. 높은 자리를 좋아하지 말라

 이 말씀은 “낮아지라.”는 말씀이다. 자리를 탐하지 말고 내려놓을 줄도 알고 버릴 줄도 알라. 명예욕을 버리고 낮아지면 오히려 더 높아진다. 반면에 내려놓을 줄 모르고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높은 자리를 탐하면 점차 파당의식과 편견도 심해진다. 몇 번의 사례를 보고 남의 인격 전부를 매도하거나 그가 속한 공동체 전부를 매도하는 편견은 준비가 안 된 인격체가 부당하게 자기를 높이려는 자기중심주의의 산물이다.

 편견을 노골적으로 노출하면 남들이 나를 높고 의롭게 보기보다 오히려 낮고 불의하게 보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보통은 자기 성찰을 통해 편견을 없애려고 하고 편견의 노출은 더욱 꺼린다. 인터넷 댓글이나 소셜미디어에서 편견을 조장하는 사람을 보면 자기가 편견 대상자보다 더 안 좋은 언행을 보이고 있다는 현실조차 파악하지 못할 때가 많다. 사람됨은 남이 덧씌운 편견이 말해주기보다 평소의 내 말과 성품과 행실이 말해준다.

 내가 파당의식을 가지고 편견을 전파하려고 해도 인터넷 시대에는 그것이 뜻대로 잘 안 된다. 사람들이 다 눈과 생각과 판단력이 있고 많은 정보도 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별력을 잃지 않으려면 수시로 다짐하라. “더 경험을 쌓자. 무엇보다 나 자신을 더 많이 성찰하자.” 부모가 편견을 보이면 정신적인 큰 상처가 되지만 편견을 버리고 작은 것도 살피는 모습을 보이면 부모가 높은 자리를 탐하지 않는 존경스런 존재로 보이면서 정신적인 큰 위안을 얻는다. 높은 자리를 불의하게 탐하지 말고 높은 자리에 오를 준비를 힘써 하고 작은 것과 아래를 살피라.

4. 과부의 가산을 삼키지 말라

 이 말씀은 “헌신하라.”는 말씀이다. 어떤 서기관은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면서 과부의 남은 가산까지 다 빼앗았다. 그 모습을 보면 영혼의 때를 위해 드리라면서 교인들을 월세 단칸방에 살게 하고 그들을 쥐어짠 돈으로 화려한 초대형 교회를 건축하는 이단 교주의 모습이 그대로 오버랩 된다. 그런 이단 교주는 하나님이 엄중히 심판하지만 그 전에 자신도 멀리하고 그들의 거짓과 불의가 명백하면 반드시 당국과 언론에 알려서 추가 피해자를 막아야 한다.

 어려운 과부를 돕지는 못할망정 그녀의 남은 가산마저 삼키려는 사람이 어떻게 종교 리더인가? 성도의 기본적인 삶의 틀은 빼앗는 삶이 아닌 나누는 삶이어야 한다. 경제 활동을 할 때도 남에게 유익을 주면서 유익을 얻으려고 하라. 그런 헌신적인 삶의 구체적인 훈련 과목 중 하나가 순수한 헌금 행위다. 헌금은 이단 교주의 돈 빼앗는 수단에 이용만 안 되면 매우 복된 행위다. 교회를 책임적으로 사랑하는 행위이면서 자기 욕심을 극복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욕심을 잘 극복해야 하나님의 마음도 잃지 않는다.

 4가지 리더 유형이 있다. 똑똑하면서 부지런한 똑부 리더, 똑똑하지만 게으른 똑게 리더, 멍청하면서 부지런한 멍부 리더, 멍청하면서 게으른 멍게 리더다. 최고의 리더는 똑부 리더지만 최악의 리더는 멍게 리더가 아닌 멍부 리더다. 멍청하면서 부지런하니까 더 일을 만들면서 더 사고를 치기 때문이다. 멍부 리더 중에도 멍청하지만 사심 없이 부지런한 멍사부 리더는 그나마 낫지만 멍청하면서도 욕심이 많아 부지런한 멍욕부 리더는 정말 대책이 없다. 욕심은 만악과 만병의 근원이다. 욕심을 극복해야 하나님의 심판도 면할 수 있다.

5.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지 말라

 이 말씀은 “나를 감추라.”는 말씀이다. 당시 서기관들의 대표적인 위선 행위 중 하나가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영성이 깊은 표시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들으셔야 할 기도를 사람이 들으라고 신경 쓰면서 기도를 자랑하지 말라.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다. 신실한 부모는 자녀를 위해 간절히 천 번을 기도해도 한번도 “너를 위해 기도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진실한 기도를 하는 사람은 기도를 광고하지 않고 대충 한두 번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를 광고한다.

 자랑거리가 있어도 잘 감추고 특별한 교육과 도전 목적을 따라 그 중의 일부만 나타내라. 그러나 감추라는 말이 갖추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감추기에 힘쓰면서도 갖추기에 힘쓰라. 갖춘 사람이 감출 때 감동이 된다. 외식하지 말라는 말은 전혀 갖추지 말고 꾸미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자기만족을 위해서나 남에게 좋게 보일 목적으로만 꾸미면 바람직하지 않지만 남에게 조금이라도 더 기쁨을 줄 목적으로 꾸미면 그것도 일종의 섬김이고 헌신이다.

 집을 적절하게 꾸미는 것이 위선이 아니듯이 자기를 적절하게 꾸미는 것도 위선이 아니다. 꾸미지 않는 것을 무조건 자연스러워서 좋다고 하지는 않는다. 꾸미지 않는 것은 게으름과 남의 시선을 경시하는 자기중심적 성향의 표출로도 보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잘 꾸밀 줄 모르는 성향이지만 남을 기쁘게 하려고 꾸민다. 내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기쁘게 하려고 집과 환경을 관리하고 나를 관리하는 것은 위선에 가깝기보다는 헌신에 가깝다.

< 희생에는 손해가 없다 >

 필자도 가끔 가족과 외식할 때 얼굴과 복장을 한번이라도 더 살핀다. 조금이라도 더 단정하게 보임으로 나로 인해 가족의 자존감이 깎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교회에서 집으로 들어갈 때 가끔 초췌한 얼굴로 수염을 안 깎고 들어가기도 하지만 보통은 수염도 깎고 얼굴과 머리를 한번이라도 살피고 들어간다. 가족에게 잘 보이기 위한 목적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기쁨을 주기 위한 목적이다. ‘잘 보이려는 것’과 ‘기쁨을 주려는 것’은 다르다.

 적절하게 집을 꾸미거나 정원을 가꾸는 것은 외식이나 정죄거리가 아니다. 꾸밈을 얽매임으로 인식시켜 인생 증진과 관계 증진과 환경 증진을 포기하게 만들거나 약화시켜 사회와 공동체와 영혼을 망치는 수법은 인류와 가정을 파괴하려는 사탄의 전략이다. 외모에 너무 집착하면 안 되지만 적절한 꾸밈마저 외식으로 몰아서 ‘탈 꾸밈’이 마치 인권과 자유를 보장해주는 것처럼 주장하는 사탄의 인본주의에 속으면 안 된다.

 사랑과 헌신의 가치를 깎아 생육과 번성의 축복을 막으려는 사탄에게 속지 말라. 자유는 자기 맘대로 살면서 만족을 추구하는 방종이 아니다. 참된 영혼의 자유는 남에게 기쁨을 주려고 내 자유를 일정 부분 반납하고 희생하고 헌신할 때 주어진다. 희생과 헌신의 가치를 내동댕이치고 자기중심적인 자유를 즐기라는 사탄의 음성에 미혹되지 말라. 사탄의 자유는 잠깐 동안 하늘을 나는 해방감을 주지만 곧 이어 무서운 영혼의 추락을 낳는다.

 자기를 꾸미라는 말은 외모만 꾸미라는 말이 아니다. 인격과 성품도 잘 가꾸어야 한다. 꾸밈을 무조건 위선적인 것이나 외모에 대한 집착으로 여기지 말라. 자기가 꾸미지 않는다고 적절하게 꾸미는 사람에게 “생긴 대로 자유롭게 살아.”라고 하는 것은 무책임한 권고다. 이솝 우화에서 덫에 꼬리가 잘린 여우가 다른 여우에게 “꼬리가 없으니 정말 편해. 너도 꼬리를 잘라.”라고 하향평준화를 유도한다. 그런 유도에 넘어가지 말라. 소외된 것을 살피라는 기독교 정신은 자기중심적인 하향평준화를 꾀하라는 사상이 아니다.

 자기가 편할 생각만 하지 말고 때로는 자기중심적인 자유와 편리를 희생하고 헌신하라. 외식적인 꾸밈이 아닌 헌신적인 꾸밈은 가족과 교회와 사회를 지키는 핵심 요소다. 그 요소를 자꾸 내버리게 하는 사탄의 인본주의에 미혹되면 교회에 반감을 가지면서 믿음도 잃고 가족도 잃고 교회도 잃고 인생도 잃는다. 사탄이 얼마나 신나겠는가? 희생의 가치를 경시하다 못해 심지어 멸절시키려는 사탄의 인본주의를 극복하고 희생적인 삶을 포기하지 말라. 희생하면 자기만 죽는 줄 알지만 대개 그 이상의 것을 얻는다.

 어느 날 가족의 건강 유지에 도움이 되도록 “내가 소식의 모델이 되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그때부터 소식하면서 평소보다 3분의 1 정도만 밥을 먹고 반찬 위주로 식사했다. 함께 식사하는 사람이 보는 곳에서 소식하면 대개 같이 소식하게 된다. 가족을 위해 그렇게 했는데 나 자신부터 살이 빠져서 몸무게도 줄고 배의 더부룩함도 없어지면서 훨씬 몸이 상쾌해졌다. 가족을 위해 시작한 일이 나를 좋게 만든 것이다.

 남을 살리려고 하면 나도 산다. 희생하면 일시적인 손해는 있어도 최종적인 손해는 결코 없다. 희생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인류는 청동기를 만든 이후 각종 나무를 활용해 문명을 일으켰다. 나무의 희생 없는 인류 문명은 상상할 수 없다. 희생이 있는 곳에 문명도 꽃피고 믿음도 커진다. 심은 대로 거둔다. 희생의 길이 희락의 길이고 남을 위하는 길이 나를 위하는 길이다. 그런 희생적인 삶을 통해 심판도 면하고 내일의 축복과 보상도 예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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