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라 (이사야 56장 9-12절)

by 【고동엽】 2022. 12. 31.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라 (이사야 56장 9-12절) <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라 >

 수많은 미혹으로부터 자신의 영혼을 어떻게 지키는가? 일단 “치유의 종! 능력의 종! 새로운 사도!”라고 하면서 자신의 영성과 능력을 자랑하고 선전하는 사람을 주의하라. 또한 자기 공동체만이 특별히 선택받은 공동체라고 내세우는 사람도 주의하라. 특별한 것을 너무 좋아하면 특별하게 먼저 망할 때가 많다. 하나님의 계시나 하나님의 음성을 내세워 접근하는 사람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1992년에 필자는 한 선교 팀을 맡아 매주 성경공부를 인도했다. 그 팀 멤버 중 몇 명이 시한부 종말론에 빠져있었기에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함부로 계시를 남발하지 말고 금년 10월 28일에 휴거가 일어난다는 시한부 종말론은 절대 믿지 마십시오.” 그러나 시한부 종말론에 빠진 사람은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그해 10월 28일에 휴거는 없었다. 그래도 일부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영적으로 휴거했다. 주님이 공중에서 은밀하게 재림했다.”는 등의 주장으로 잘못된 길을 고집했다. 얼마나 불행한 모습인가?

 1992년 여름에 한 선교단체에서 수련회를 할 때 첫날밤에 필자는 아내와 함께 결혼 직전에 그곳을 들렸다. 저녁 집회 후 10시쯤 한 선교사가 대뜸 말했다. “전도사님! 하나님이 전도사님과 자매님이 오늘밤부터 이 수련회에 참석하라고 제게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순종하세요.” 갑자기 필자에게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져 수련회 장소에서 결혼 전에 아내와 함께 외박하게 생겼다. 그 선교사는 평소에도 그런 식으로 자주 말했다.

 필자가 대답했다. “선교사님! 아직 결혼하기 전입니다. 오늘 밤 집회만 참석하려고 왔는데 어떻게 함께 밤을 지냅니까?” 선교사가 막무가내로 말했다. “자매님 집으로 전화하면 되잖아요. 꼭 오늘밤 여기서 기도해야 한다고 하나님이 제게 음성을 주셨어요.” 그 선교사에게는 그런 음성을 주어졌을지라도 필자에게는 그런 음성을 주어지지 않았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그날 밤 아내를 아내의 집에 데려다 주고 귀가했다.

 “하나님이 내게 그런 음성을 주셨어요.”라고 말하면서 막무가내로 이상한 주장을 하고 심지어는 비도덕적인 주장까지 하는 사람의 음성을 무조건 따르면 인생도 피곤해지고 잘못된 곳으로 미혹될 수 있다. 정당한 권위는 존중하되 잘못된 방법으로 권위를 내세우면 지혜롭게 경계하라. 잘못된 권위 피력 방법 중에서 가장 애용되는 방법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우는 방법이다. 그런 잘못된 방법이 남발되지 않도록 엄중한 경고로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십계명의 3계명이다.

< 선한 목자와 거짓 목자 >

 목자는 짐승과 같은 악한 존재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삼키려고 할 때 하나님의 백성이 삼켜지지 않도록 파수를 잘 서야 한다. 그러나 거짓 목자는 맹인처럼 파수를 잘 서지 못하고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처럼 대적이 공격해도 짖을 줄을 모르면서 꿈꾸는 것과 누워 있는 것과 잠자는 것만 좋아한다(9-10절). 또한 거짓 목자는 개처럼 심한 탐욕을 가지고 만족할 줄 몰라서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길로만 가려고 하고 매일 술판을 벌이고 먹고 노는 것만 좋아한다(11-12절). 그런 거짓 목자를 지혜롭게 멀리하는 길이 영혼이 사는 길이다.

 비둘기 같은 순결함과 더불어 뱀 같은 지혜로움도 필요하다. 말씀을 잘 이해하고 영을 분별하는 지혜가 없으면 자기 영혼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 사람의 내면을 알 수 없는데 거짓 목자를 어떻게 잘 구분해 멀리하는가? 그 일이 어렵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자신부터 ‘사명이 없는 삶, 게으른 삶, 탐욕적인 삶, 유흥적인 삶’을 멀리하면 된다. 복된 성도는 복된 목자를 만나고 거짓 성도는 거짓 목자를 만난다. 이런 격언이 있다. “당신이 사귀는 친구를 보여 달라. 당신의 사람됨은 그를 통해 나타난다.”

 신앙생활에서도 이렇게 적용할 수 있다. “당신이 따르는 목자를 보여 달라. 당신의 성도됨은 그를 통해 나타난다.” 고통과 불행은 대개 거짓 목자와 거짓 양떼의 합작품이고 기복적인 목자와 기복적인 양떼의 합작품이다. 거짓된 양떼에게 참된 목자가 어울리겠는가? 서로가 불편하다. 기복적인 양떼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참된 목자의 가르침을 기꺼이 받겠는가? 그런 말씀에는 별로 감동하지 않기에 예수님은 말씀했다. “내가 내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않았다.”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에게 “얘야! 좋은 친구를 사귀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차별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부모의 절실한 소원이다. 좋은 목자를 분별해 추구하고 좋은 성도와 분별해 어울리려는 것도 차별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실한 소원이다. 선한 목자를 원하면 목사와의 관계를 우정관계로 맺지 말고 은혜관계로 맺고 자기상황(context)보다는 성경(text)에 더 관심을 두라. 또한 목회자의 미완성을 인정하고 그를 너무 의지하지 말라. 오직 하나님만 온전히 의지하고 무엇보다 성경을 가까이하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