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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친구 (잠언 17장 17절)

by 【고동엽】 2022. 12. 31.

참된 친구 (잠언 17장 17절) < 멀리하는 사랑도 필요하다 >

 어느 날 A 집사가 담임목사와 갈등이 생겼다. 갈등의 원인이 자신의 경솔한 행동에 있었기에 처음에는 쿨하게 나왔다. “목사님! 이 일로 목사님과의 관계가 나빠지지 않고 이전처럼 잘 지내고 싶습니다.” 그렇게 쿨하게 나와서 목회자는 고맙게 생각했다. “다시 보이네. 좋은 성도네.” 그런데 점점 A 집사의 행동이 이상해졌다. 담임목사를 은근히 피했고 심지어는 다른 교인들을 집에 초청해 대접하면서 담임목사만 뺐다. 그런 일이 계속되자 담임목사가 평소에 멘토로 삼던 목회자에게 조언을 구했다.

 멘토 목회자가 말했다. “목사님! A 집사를 미워하지 말고 축복하되 앞으로는 전략적으로 외면하십시오.” 담임목사가 염려했다. “다른 교인들이 사랑이 없다거나 속 좁게 여기면 어떡하죠?” 멘토 목사가 말했다. “진실은 반드시 승리해요. 양육할 때 전략적인 외면은 꼭 필요해요. 양육을 위해서는 때로는 단절과 고독도 감수하세요. 만약 고독해지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더 좋은 만남을 허락하실 겁니다.”

 그 조언대로 A 집사를 외면하자 그 집사는 더 자주 다른 교인들을 초청해 대접했다. 교인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 초청에 응했다. 그 초청에 응한 대상에는 담임목사가 생명 동지처럼 여기는 B 집사도 있었다. B 집사가 가끔 말했다. “목사님! 제가 A 집사와 어울려 다니는 것이 언짢으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생명 동지라면 알아서 처신해야지 그렇게 말하면 누가 언짢다고 하겠는가? 담임목사가 괜찮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언짢아서 또 멘토의 조언을 구했다.

 멘토가 말했다. “목사님! 참된 친구는 어려울 때 함께 해주는 존재입니다. B 집사가 목사님의 전략적인 외면을 알면서도 A 집사와 어울려 다니며 교육 효과를 떨어뜨리네요. 양쪽과 다 잘 지내고 싶겠지요. 그러나 전략적인 선택의 순간에 목사님 편에 과감히 서주지 않으면 목사님의 생명 동지는 아닙니다. B 집사를 더 이상 생명 동지가 아닌 여러 교인 중 한 명으로 여기세요.” 그 조언을 받아들이자 담임목사의 내면의 속상함이 단번에 사라졌다. 생명 동지가 아닌 사람의 태도로 인해 상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생명 동지가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생명 동지가 언제 판별되는가? 남들이 떠날 때 찾아오는 모습으로도 판별되지만 자신의 전략적인 외면을 신뢰하고 자기 곁에 확실히 서주는 모습으로도 판별된다. 전략적인 외면에 동조해주지 않으면 생명 동지가 아니기에 그에 대해 연연하지 말고 마음의 정리를 하라. 그래야 그에게 깨달음과 성숙의 기회도 줄 수 있고 자신의 소중한 시간과 인생 낭비도 줄일 수 있다. 또한 그런 상황을 미움과 상처 없이 잘 승화시켜야 하나님께서 더 좋은 생명 동지를 붙여주신다.

 얼마 전 평창 올림픽 만찬 때 미국의 펜스 부통령이 북한 대표단을 외면한 채 만찬장을 떠났다. 속 좁은 행동 같지만 뚜렷한 메시지가 담긴 그 행동을 속 좁게 보는 것이 오히려 속 좁은 시각이다. 그 행동은 누가 봐도 뻔한 전략적인 행동이다. 그렇게 나오는 미국을 지렛대로 삼으면 우리의 대북 협상력이 높아지기에 우리에게는 고마운 행동이 될 수도 있다.

 미국은 기존 동맹 친구다. 미국이 먼저 그 동맹을 깨뜨리거나 불의를 강요하지 않으면 미국의 전략적인 행동에 힘써 동조해주는 것이 바른 자세다. 그때 “미국이여! 속 좁게 행동하지 말고 북한과 교류하시오.”라고 하면서 가치중립적인 태도로 나오면 제3자에게는 화해의 중재자처럼 보여도 동맹 친구는 마음이 상하게 된다. 그러므로 북한과 화해를 모색할 때도 기존의 동맹 친구인 미국의 의사를 최대한 타진하고 존중하면서 해야 한다.

 북한과의 평화통일은 꼭 필요하다. 남북 간의 전쟁이 일어나 강 건너 불구경을 하고 싶어서 옆에서 전쟁을 은근히 부추기는 일본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역사적으로 일본은 한국 전란을 통해 어려운 경제를 살리고 힘을 키울 때가 많았다. 남북 간에 전쟁이 일어나면 지켜보는 재미도 있고 경쟁자로 성장한 한국 경제도 단번에 무너지고 어려운 자국 경제도 급속히 회복될 테니까 많은 극우 일본인들이 얼마나 한국 전쟁을 바라겠는가?

 시체를 뜯으려고 옆에서 기다리는 하이에나의 존재들을 인식하고 최대한 한반도의 전쟁을 막아야 한다. 그것을 위해 동맹 친구인 미국의 심정을 최대한 헤아려주면서 전쟁이 없도록 설득하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미국이 북한에게 불의한 요구가 아닌 당연한 요구를 하면 동맹 친구의 편에 확실히 서주어야 한다. 그런 분명한 선택도 없이 미국 편에도 서고 북한 편에도 서려는 모습은 동맹 친구를 속 터지게 만드는 줄타기가 될 수 있다.

 선택의 결단이 필요할 때 그런 줄타기는 결코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한다. 개인 관계에서도 그렇다. 의인과 악인을 억지로 화해시키려는 모습은 겉보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의인에게는 우유부단한 줄타기처럼 보일 수 있다. 만약 의인인 친구가 전략적인 의도로 누군가를 단호히 멀리하면 그 친구의 뜻을 분명히 따라주라. 그때 “의인이라면 넓은 품을 가지고 악인도 품어야지.”라고 하면서 친구의 조치를 불신하면 참된 친구가 아니다.

 더 나아가 “그의 외면에 실망했다. 주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했다. 나는 악인도 사랑할 거야.”라고 하면서 악인과 어울려 다니면 그것은 외면하기로 결심한 친구에게 배신이 된다. 그런 친구는 너무 가까이하지 말라. 사랑은 무조건 품기보다 진심으로 회개할 때 품어주고 의의 편에 설 때 품어주는 것이다. 악인은 품는 것보다 멀리하는 것이 진짜 사랑에 가깝다. 즉 악인의 영혼을 사랑하고 축복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에게 깨달음의 기회를 주고 회개와 변화를 도전하려는 전략적인 목적으로 멀리하는 것도 크게 보면 사랑이다.

< 이별을 무서워하지 말라 >

 7명의 친구가 있었다. 6명은 평신도였고 1명은 목회자였다. 어느 날 6명의 평신도 친구들이 5명과 1명으로 편이 갈렸다. 그때 목회자는 어느 편을 들어야 하는가? “어떻게 5명이 1명을 왕따시켜? 외로운 1명 편에 서자.”라고 해야 사랑이 많은 목회자인가? 그렇지 않다. 바른 사랑은 ‘외로운 자’의 편에 서기에 앞서 ‘의로운 자’의 편에 서는 것이다.

 5명이 의로운 편이라면 외로운 1명이 불쌍해보여도 5명의 편에 확실히 서야 그 1명이 깨닫고 자기를 성찰하면서 조금이나마 더 의롭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런 태도가 그 1명을 진짜 사랑하는 길이다. 그때 무작정 “나는 소수의 소외된 사람 편에 설 거야.”라고 하면 겉으로는 사랑이 많은 사람인 것 같지만 그런 태도가 그 1명의 사람 되게 함을 오히려 막는다. 잘못된 사랑은 참된 회개와 선한 변화를 막는다.

 반대로 1명이 의로운 편이라면 같이 따돌림 당하는 아픔과 상처가 예상되어도 그 1명 편에 확실히 서주는 것이 사랑이다. 그런 사랑의 길이 처음에는 소수의 길이지만 나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다수의 길이 된다. 심은 대로 거둔다. 선한 씨를 뿌리면 선한 열매를 거둔다. 결국 참된 사랑이란 다수의 편에 서는 것이나 소수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편에 서는 것이다. 그래서 참된 사랑에 대한 분별력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

 형제간에 큰 갈등이 생기면 어느 편에 서야 하는가? 전략적인 목적으로 한쪽 편에 서야 한다면 의로운 편에 확실히 서라. “불쌍해. 안 됐어.”라고 하면서 불의한 편에도 서주려고 하면 그런 줄타기가 불의한 형제의 깨달음과 성숙을 막는다. 사랑하고 축복하는 마음을 품고 외면하는 방법으로 사랑하면 그런 외면이 깨달음과 성숙과 발전을 가져다줄 때가 많다.

 어떤 자녀가 부모님께 불효하면 다른 형제들은 그를 전략적으로 외면할 필요도 있다. 그때 사랑을 빌미로 그도 품자고 하면서 계속 받아주면 불효가 계속된다. 의와 불의 사이에서 줄타기하기보다 의로운 편에 확실히 설 때 더 좋은 사람과 더 좋은 공동체가 될 가능성이 커진다. 한 장로가 불효자를 계속 품어도 부모에 대한 원망과 불효는 나아지지 않자 마침내 그의 잘못된 태도가 없어지길 기도하며 그 불효자를 외면했다. 그런 외면도 사랑의 행위다.

 의를 위해서라면 친밀했던 관계가 끊기는 것도 감수하라. 십자가는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다. 전략적인 단절을 사랑이 없는 행동으로 오해하지 말라. 누군가가 조금 더 사람이 되고 마음을 낮춰야 한다는 교훈을 주려면 그런 희생적인 외면과 단절도 감수하라. 그런 결단이 없으면 개인의 정신적인 오염의 불길이 점차 자신과 가족과 친구와 교회까지 태울 수 있다. 사랑은 공의가 수반되어야 한다.

 고뇌 끝에 인간관계의 단절을 결단하고 십자가를 각오한 사람한테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깊은 생각도 없이 “그 사람과 화해하세요.”라고 쉽게 말하지 말라. 그 말은 사랑을 아는 사람의 말처럼 들리지만 오히려 사랑을 오해할 때 내뱉기 쉬운 말이다. 미움 없이 축복하고 기도하면서 손해와 아픔을 감수하고 멀리하는 사랑이 오히려 참된 사랑에 가깝다.

 사랑의 실체를 오해하면 교회에서도 가끔 이런 말을 한다. “왜 목사님은 떠나는 사람을 안 잡습니까?” 목사가 사랑도 없이 너무 냉정한 것 같다는 말이지만 사실상 떠나려는 사람을 잡는 것이 참된 사랑이 아닐 때가 더 많다. 사랑은 의의 과시가 아니다. 사랑은 말없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손해와 고독도 감수하고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려는 몸부림이다. 때로는 전략적으로 냉정하게 외면해야 사람이 사람답게 되고 성도가 성도답게 된다.

 한 아들이 청소년 때 2번 가출했다. 처음 가출할 때는 아빠가 아들을 찾아 집에 가자고 부탁해서 4일 만에 귀가했다. 그 아빠의 부탁하는 사랑이 아들을 전혀 바꾸지 못했다. 마치 가정에서 부모를 상대로 개인 파업을 해서 아들의 입지만 올린 것처럼 되었다. 그러자 얼마 후 아들은 속상한 일이 있다고 또 가출했다. 그때는 아빠가 냉정하게 여길 정도로 외면하며 아들을 찾지 않았다. 엄마도 속으로는 간절히 아들의 귀가를 위해 기도했지만 역시 찾지 않았다. 가출이 버릇이 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 후 아들은 친구 자취방을 전전하며 죽도록 고생했다. 다시 부모가 찾아와 사랑의 부탁을 하면 못 이기는 척 하면서 귀가하고 싶은데 찾지 않았다. 그 외면이 아들의 높아진 마음을 철저히 낮췄다. 부모 마음을 아프게 하려고 가출했다가 자기 마음이 아파지고 형편이 비참해지면서 결국 완전히 낮은 자세로 고개를 푹 숙이고 스스로 귀가했다. 그때부터 아들은 가출을 더 이상 생각조차 안 했고 평생 어머님이 자기로 인해 눈물 흘리지 않게 하겠다고 결심하고 실천했다. 부모의 ‘부탁하는 사랑’보다 ‘외면하는 사랑’이 아들을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목회자가 떠나는 교인을 붙잡지 않는다고 사랑이 없다고 시험에 드는 것은 사랑의 의미를 거꾸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떠나겠다는 교인을 위해 “하나님! 그가 다른 교회에서는 더 성숙한 모습으로 교회를 잘 섬겨 복 받게 하소서.” 하고 속으로 기도해주고 떠나게 해주는 것은 욕심과 집착을 버린 가장 숭고한 사랑이 될 수 있다. 교회생활은 대개 몇 번 떠나는 아픔을 겪으면서 겸손과 섬김과 이해가 깊어진다. 초대교회 때나 중세시대처럼 ‘출교’의 징계가 무섭지도 않고 통하지도 않을 때는 스스로 출교하는 과정을 통해 성숙해질 때도 많다.

 ‘외면하는 사랑’을 통해 잘 배우면 성숙을 향한 고통 과정과 기간은 크게 단축된다. 사랑은 전략적으로 붙잡지 않는 것도 내포된 개념이다. 사랑은 “저를 제발 떠나지 말아주세요.”라고 간청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간청은 좋은 효과를 거의 낳지 못한다. 진짜 사랑은 “나를 얼마든지 떠나도 좋다. 그러나 늘 의의 편에 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길로 가라.”고 하는 것이다. 그때 사랑의 대상은 정신을 번쩍 차리게 된다.

 하나님은 이별의 아픔을 통해 자신을 낮추고 배울 때 더 좋은 만남을 허락하신다. 이별을 무서워하지 말라. 이별의 과정을 통해 성숙해지면서 이별을 창조적인 이별로 만들라. 심지어는 사랑하는 자식과의 이별도 두려워하지 말라. 이별은 잘 활용되면 기쁨의 재료가 된다. 부모에게 가장 기쁜 일 중의 하나는 자녀가 자신을 떠나 결혼하는 것이다.

 목회자가 이별을 무서워하지 않을 때 예의와 질서가 살아있는 교회가 되고 부모가 이별을 무서워하지 않을 때 예의와 질서가 살아있는 가정이 된다. 불의를 보고도 이별이 무섭다고 바르게 교육하지 않고 간정하면 콩가루 가정과 콩가루 교회가 된다. 그러면 그 공동체에서 인물이 나오기가 힘들어진다. 너무 율법적인 공동체가 되면 안 되지만 상식 수준에서의 의와 질서가 굳게 선 공동체가 되어야 거기서 인물도 나오고 생명 동지와 생명 친구도 나온다.
 
< 참된 친구 >

 인생에서 참된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복된 일은 없다. 누가 참된 친구인가? 사랑이 변함없는 친구가 참된 친구다. 참된 친구와 형제는 어렵고 위급한 때 사랑이 끊어지지 않고 더 가까이해준다. 고난은 참된 친구를 판가름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왜 어려운 때도 가끔 필요한가? 그때 진짜 친구를 얻기 때문이다. 교회의 어려움도 가끔 필요하다. 그때 생명 동지를 얻기 때문이다. 그때 새롭게 친구를 발견하면 이런 고백이 나온다. “내게 이런 친구가 곁에 있었구나.”

 하나님의 뜻과 거룩한 비전에 동참하는 진짜 친구가 되라. 교회와 사역자의 필요를 볼 수 있는 시야를 가지고 그 필요에 응답하려고 자신의 일부를 떼어내는 결단도 하고 거룩한 비전을 위해 자신의 안전을 희생하려는 마음도 가지라. 그런 희생적인 상황을 몇 번쯤은 겪고 넘어서야 비전을 이루는 꿈같은 때가 찾아온다. 매일 기도하라. “하나님! 제게 주신 비전에 몸과 마음과 정성으로 함께 해줄 숨은 친구를 붙여주세요.”

 교회생활을 잘하려면 교인 이상의 생명 동지가 되라. 예수님은 어려울 때 친구가 되어주는 사람을 친구로 삼아주시고 풍성한 축복을 내려주신다. 신앙생활을 할 때 너무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생각만 하지 말라. 하나님이 주시려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좋은 것’이다(마 7:9-10). 어떤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 그것을 주세요.”라고 했는데 주시지 않으면 아쉽지만 그때 믿음을 잃지 않으면 하나님은 조만간 더 좋은 것을 주신다.

 소원과 기적에 집착하지 말라. 하나님은 자신의 필요와 마음속의 소원을 잘 아신다. 예수님의 사랑 받는 친구가 되고 이웃의 사랑 받는 친구가 되면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을 그에게 허락하실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돈보다 친구가 중요하다. 돈은 내가 지켜야 하지만 친구는 나를 지켜주기 때문이다.” 서로 지켜주는 친구 관계나 생명 동지 관계를 만들라. 그 친구는 위급할 때 내게 찾아와줄 것이다. 또한 그런 친구 관계 속에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도 넘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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