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의 권위 살전5:12~16, 벧전5:2, 딤전5:17
'장로' 하면, 구약을 볼 때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는 어른으로 우리가 인정하게 됩니다.
장로의 히브리어 '자켄' 이라는 말의 원래 의미는 '턱수염을 기른 권위있는 어른'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장로는, 어느 마을에서 어른으로, 또 이스라엘 나라 전체에서도 어른으로
특별히 자리매김을 하고 존경과 신뢰를 받고
또 나라를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래를 위해서 엄청난 역할을 한 분들입니다.
이런 면에서 '장로' 라는 이름은
참 거룩한 이름이요, 소중한 이름이요, 존귀한 이름입니다.
교회 안에서, 다른 이름도 중요하지만
'장로'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꼭 기억하셔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너무나 소중하고 존귀한 이름이기 때문에
이 이름에 걸맞는 인격, 이 이름에 걸맞는 신앙생활, 이 이름에 걸맞는 헌신이 뒤따라야 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죠.
▲신약교회의 '장로'
신약 교회에 보면, 처음에 12사도들과 맞먹는 위치에서 '장로' 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루살렘 교회에 야고보 장로였습니다. 예수님의 동생이었죠.
성경에 보면, 다른 사도들과 야고보 장로는 (12 사도가 아니었지만)
12사도와 권위적으로 보나, 영향력 면에서나 별 차이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베드로도 자기가 '사도' 이면서, 동시에 자기를 '장로' 라고 불렀어요. 벧전5:1
그러니까 그때는 장로와 사도가 큰 차이가 없었던 것 같아요.
교회의 초창기에는 그만큼 장로직 이라는 것이 엄청난 영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바울이 선교를 통해서 지역교회들이 계속 개척되고
지역교회 안에서 이제 지도자가 필요하게 되니까
교회마다 장로들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디도서 1장 5절에 보면, 바울이 디도에게 명령을 하죠.
'각 성, 교회에서 장로들을 세우라'
그래서 그 교회를 책임지는 지도자로서 장로들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가 자꾸 발전하고 부흥 하면서
이제 장로 제도도 함께 발전했습니다.
나중에 성경을 보면,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가 구분이 되고
장로가 역할분담을 하는 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딤전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그래서 이때부터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가
기능상 구별이 되기 시작한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러다가 교회가 점점 이제 신약 서신서를 뛰어 넘어서
교회가 자꾸 부흥하고, 나중에 제도화 되고, 그 다음에 국교가 되는 와중에서
'가르치는 장로'의 전문성을 중요시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가르치는 장로는, 좀 전문적인 소양을 가져야 되겠다..
또 어떤 면에서는 여러가지 면에서 좀 다른 자격 여건을 가져야 된다.. 하는 인식에서
'가르치는 장로'를 특별히 좀 차별화 시키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세상 직업을 갖지 못하게 하고, 성직 개념을 도입한 거죠.
교회 안에서 전문적으로 사역하게 하고, 적절한 신학 교육을 받도록 하고
지역교회를 책임지게 하고...
이렇게 해서 가르치는 장로가, 이제 다스리는 장로와는 성격이 구별되는 단계로 접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가르치는 장로'를 목사 혹은 교사 라는 말을 붙이기 시작하고
'감독' 이라는 말도 붙이기 시작하고
이러면서 성직화 되어서, 지금까지 내려오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장로 라도
'가르치는 장로'는 성직에 해당하고
'다스리는 장로'는 평신도에 해당하는 개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직업을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신학도 하지 않고요) 이렇게 분리가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칼빈이 더 확고하게 정리를 했어요.
그래서 제네바에서 칼빈이 세운 교회안에는
목회자의 해당하는 '가르치는 장로' 와
'다스리는 장로'의 제도가 엄격하게 구별이 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오늘의 장로교가 가능하게 만든 기초를 칼빈이 닦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장로직에 대한 역사적인 흔적들을 더듬어보면 분명한 사실들이 있어요.
장로 직은 주님께서 자기 교회를 위해서 허락하신 거룩한 직분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은 교회의 생명, 교회의 건강을 좌지우지 할 수 있을만큼
막중한 책임을 진 직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장로 직을 잘 수행하는 사람은
'목자 장이 나타나실 때, 시들지 않는 영광의 관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벧전5:4
영광스러운 직분인 동시에, 책임이 대단히 무거운 직분입니다.
그러므로 잘 하는 자에게는 그 상급도 남다르다.. 하는 것을
성경이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벧전5:4
▲이런 의미에서 '가르치는 장로' 라고 할 수 있는 목사와
'다스리는 장로' 라고 할 수 있는 요즘의 장로,
이 두 직책을 가진 분들은 교회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합니다.
잘 되어도 전부 책임져야 되고, 교회가 잘못되어도 전부 책임져야 됩니다.
100% 책임을 져야 돼요. 그만큼 무거운 자리 입니다.
저는 사랑의 교회를 개척하고 지난 25년 동안 달려오면서
늘 마음속에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는 조건이 하나 있는데
그게 뭐냐면 '좋은 장로님들을 만나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게 참 뜻대로 안되잖아요.
어떻게 보면 '목사 복은 장로 복'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어떤 장로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목사의 운명이 좌우될 때도 있어요.
교회의 운명도 좌우되고요.
그런데 저에게 나는 하나님께서 너무 좋은 장로님들을 붙여 주셨어요.
제가 은퇴하고 나서 지난 4년 동안 돌이켜 보면서
제가 걸어온 길을 회상하면서 또한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참 나도 모르게 감사가 나오는 것은
'너무 좋은 장로님들 만나게 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저 자신이 성격적으로나, 또 인격적인 면에서
결함도 많고, 어떤 면에는 채워지지 아니한 부족한 부분도 많은데
그걸 누가 다 채워 주고 보완해주셨느냐 하면, 장로님들이었어요.
그래서 내가 그런 장로님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사랑의 교회도 존재하지 아니할 것이고, 오늘의 옥목사도 존재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저는 그만큼 장로직이 영광스러운 뿐만 아니라,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목회를 통해서 저는 지금까지 뼈저리게 체험해 왔습니다.
한국교회 안에 이런 장로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소문 없이, 소리 없이, 주님 앞에 신실하게 쓰임 받고 있는 장로,
그래서 그 장로 때문에 그 교회가 오늘까지도 영적으로 건강하게 서 있고,
많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그런 교회를 위해서
묵묵히 섬기고 있는 좋은 장로님들이 많이 계세요.
▲여기서 한 가지, 간단하게 여러분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목사나 장로나 다 장로 아닙니까. 성경적으로 보면 원래 뿌리가 다 장로거든요.
'가르치는 장로'나 '다스리는 장르'나
이 장로의 직분을 가진 모든 분들은
교회의 사이즈를 가지고 평가를 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크기를 가지고 훌륭한 목사, 훌륭한 장로 .. 이렇게 말하는 경향들이 좀 있는데
그것은 성경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 사이즈나 유명세를 가지고 장로 직을 평가할 수가 없어요.
목사직을 평가할 수가 없어요.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저는 영적으로 죄악이라고 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 종들은
장로든, 목사든 간에
얼마나 큰 교회를 섬기고 있느냐를 가지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이즈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 하지 않으세요.
한국교회 장로들이, 좀 더 제 역할을 자존감을 가지고 앞으로 감당하려고 하면
사이즈를 가지고 사람들을 평가하고, 가진 것을 가지고 평가하는 이 풍토에서
자유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이 있어야 돼요.
제가 원치도 않는데, 사랑의 교회가 대형 교회가 되버렸어요. *2007년 교갱협 강의
저는 사실 원치도 않았던 일입니다.
교회당을 교인들이 4~5백명 모였을 때 짓기 시작했는데
그 때만 해도 저는 교인들 하고 다투었어요.
교인들은 예배석을 2천석을 만들자 그러고
저는 '2천석은 너무 크다, 좀 줄이자'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당시 목회자인 제 입장에서는 2천석을 예배당을 만들어 놓고
그 자리를 채우는 것도 암담한 일이지만
'만약에 3번을 예배를 드린다면 6천명 인데
내가 무슨 재주로 6천 명을 끌어 모으냐?
내가 뭐 알을 낳냐, 알을 까냐?'
'아 좀 교회당을 조그만하게 만들어 놓고
거기서 북적북적 하는 것이 서로가 보기도 좋고
또 서로가 얼굴을 마주 보면서 참 행복한 신앙생활 할 수 있지
꼭 큼직하게 만들어서 뭐 해요?'
그런데 제가 우리 교인들에게 졌어요.
그래가지고 2천석을 만들었거든요.
저는 원래 생각이 그런 사람이에요.
뭐 제자훈련 하는 목사니까, 한 사람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저는 많은 무리를 선호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상하게 지금까지 교회를 계속 키워주셨어요.
자꾸 양적으로 늘어나게 만들어 주셨어요.
그래서 참 어떤 면에서는 어려움이 없잖아 있는데요.
▲하나님이 진짜 인정하시고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정말로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사람 눈에 잘 안 보이는 곳에 있어요. 목사도 그렇습니다. 장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에게 유명한 사람은, 사람에게는 유명하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저는 목사님들 중에서도 그런 분들을 많이 봅니다.
정말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은 숨어 있어요.
사람들이 몰라요. 알아주지도 않아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목사 장로를 평가합니다.
여러분 이러한 분위기에서 여러분이 초연하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장로직을 우리가 존귀한 직분으로 평가할 수 있고, 또 귀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미국의 빌 허리라고 하는 유명한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쓴 책을 보면,
'미국 교회가 한 30만 개 되는데, 그 중에서 5%에 해당하는 목사들 때문에
미국 미국 교회가 망하고 있다'는 소리를 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 중에 일부 목사들은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고
그 다음에 탁월한 경영 능력이 있어 가지고 대형 교회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인기를 끄는데,
그 사람들 때문에 나머지 95%의 목사들이 전부 다 일을 제대로 못 한다는 거에요.
그 사람들에게 주눅이 들어 가지고
'나도 저렇게 되어야 된다' 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까
조그마한 교회에서 사역하는 사람들이, 사역에 열정을 잃어버리고 열등감에 빠져 가지고
목회를 제대로 못 한다는 거예요.
한국교회도 그런 현상이 나타나거든요.
이런 면에서 (교갱현의) 여러분이 사이즈가 어떤 교회를 섬기고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성도 10명이 모여도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50명이 모여도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주님이 그 가운데 계세요.
계시록에 있는 7교회를 주님께서 칭찬하시고 나무라실 때
교회 사이즈를 가지고 말씀하신 부분은 한 부분도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아십시요.
'왜 교회가 그렇게 적으냐?
너 지금까지 목회를 몇 년 했는데, 교인이 그 밖에 안 보이느냐?'
7교회 중에 그런 책망받은 데가 있어요? 하나도 없어요.
교회 사이즈 하고는 주님과 거리가 멀어요.
이런 면에서 장로직의 존귀함을 여러분이 회복하려면
이런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교회의 성직을 함부로 평가하는 이 사고방식부터 뜯어고쳐야 돼요.
▲이 시간에 제가 특별히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다스리는 장로'라고 할 때 '다스린다'는 말의 의미를
성경적으로 검토를 했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좀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좋은 장로님들이 계셔서, 참 행복한 교회도 많이 있지만
오늘날 우리 (장로교 합동) 교단을 봐도, 장로님들이 좋지 못해서 정말 고통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장로때문에 그 교회는, 10년 동안 몸살을 앓고 있다' 하는 소리를 종종 듣거든요.
교인들도 고생하고 있어요.
저는 아주 어렸을 때, 제일 제가 교회 안에서 실망을 한 케이스가
그 교회 장로님 때문에 실망을 했어요.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은혜를 받아서
초등학교 때부터 정말로 어떻게 보면 구원의 기쁨에 붕 떠가지고 날아다니던 한 6~7년이 있었는데요.
그때 저의 그와 같은 행복한 기간에, 깊은 상처를 준 분이 있다면, 그 교회 장로님이었습니다.
초등학생이 뭘 압니까? 모르죠.
그러나 저는 어른예배를 꼬박꼬박 참석할 만큼, 어른들의 세계를 깊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장로님이 하시는 일을, 여러 가지로 보면서
제 마음이 얼마나 고통하고 괴로워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장로님에 대한 이미지가 처음에 제게 잘못 각인이 됐습니다.
자기 마음에 안 맞으면 교역자를 2년도 안 돼서 쫓아내고, 또 쫓아내고 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분이에요. 그러니까 온전히 교회가 자기 손 안에서 놀아야 되는 거예요.
이런 장로님들이 지금도 있어요.
우리 교단은 아닙니다만, 저와 아주 가까운 목사님이 한 분 계세요.
그분이 지방의 모 교회에 한 1년 전에 부임을 했는데,
그 목사님이 한 달 전에 사임을 하고... 사임을 한 게 아니라 쫓겨나왔지요.
원래 한 7~8백명이 모이는 교회였는데
전임 목사님이 한 3~4백명을 데리고 교회를 나가 버렸어요. 그 장로님 때문에.
그 교회는 그 지방에서는 꽤 큰 기업을 하시는 장로님이 세운 교회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아들이 장로가 돼서 그 교회를 섬기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까 자연히 그 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아니면 그 기업과 연관된 학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주로 많이 오고
그 가족들이 많이 오고 그래서, 그 교회 문화가 좀 독특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장로님 되시는 분이, 좀 책임도 무겁고, 발언권도 세고
또 여러가지 면에서 좀 힘을 가졌겠죠.
그런데 이 장로님이 은혜가 뭔지를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새로 목사님이 부임했어요. 이분은 외국에서도 공부하고
철학박사 학위도 갖고 있는 아주 탁월한 분입니다.
설교를 통해서 교인들이 은혜를 받기 시작하고, 그다음에 교회 분위기가 점점 목회자 중심으로 바뀌니까
이 장로님이 못 견디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교회 안에 사찰이라든지, 교회 안에서 일하는 직원을
전부 자기 말을 듣고 움직이는 사람들로 심어놓고,
그래서 목사의 모든 거동을 살피고, 보고하게 하는.. 첩자 비슷하게 다 사람들을 심어 놓고
심지어 전화까지 도청하도록 다 만들어놓고
인터넷 까지도 전부 검색하도록 만들어 놓고.. 목사를 옴싹달싹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한 일 년도 안 됐는데, 새로 부임한 목사를 나가라고 했어요.
제가 극단적인 예를 든 거예요.
가이오와 같은 훌륭한 장로가 있는가 하면
디오드레베와 같은 정말로 장로님이 되지 말았으면 하는 사람들이 장로가 되어서
주의 몸된 교회를 병들게 만드는 사례도, 오늘날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느냐?
성경의 '다스리는 장로'에서, '다스린다'는 말을 곡해한 데서 나오는 거예요.
이걸 장로되기 전에, 말씀을 통해서 바로 가르쳐서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을 장로로 세워야 되는데
오늘날 우리 장로교가 그런 제도가 없어요. 그런 검증 과정이 없어요.
장로 시켜 주겠다는데.. 장로 고시 준비 안 할 사람이 천하에 어디 있겠어요?
장로 시켜 주겠다는데.. 성경 읽으라는데 안 읽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렇게 할당제로 장로를 세우면 안 되는 거예요. *성도 30명에 장로 1명
교회 직분이라는 것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장로되기 전에,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은 사람,
교회 안에서의 질서가 무엇이고, 리더십이 무엇인가를 깊이 깨달은 사람 중에
하나님이 세우신다고 하는 확신이 서는 자를 장로로 세워야 되는데
오늘날 우리 교단만 해도, 그와 같이 검증을 할만한 제도적인 과정이 없어요.
그러니까 답답한 분들이 장로가 되어 가지고
자신부터가 평생 불행하게 살다가, 평생 불행하게 끝을 맺는다.. 말이에요.
제가 유년시절을 보낸 그 교회 장로님은, 말년이 너무너무 비참했어요.
그 가족들까지요. 제가 일일이 말하고 싶지도 않아요.
저는 교회 갱신을 위한 협의회를, 12년 전에 우리 귀한 후배목사님들과 같이 시작하고 나서
참 여러 가지 일들을 겪었습니다만
제가 특별히 우리 합동 교단을 놓고, 우리 교단의 장로직에 대한 인식들이
다시 거듭나는, 갱신되는 어떤 과정이 필요하고, 은혜가 필요하지...
이대로 가다가는 장로교의 한계에 부딪치겠다...는 생각을 해요.
물론 목사도 책임이 있는 거예요. 목사도 마찬가지예요.
목사가 바로 안 되면, 한국교회, 우리 교단도 굉장히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는 것도
저는 잘 알고 있어요. 목사도 마찬가지고, 장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다스린다'는 이 말을 곡해하고, 악용하는 분들이 교회 안에서 생길 때는
굉장히 어려움이 많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칼빈이 '다스리는 장로'라는 말을 썼을 때, 진짜 다스리는 장로였어요.
칼빈이 제네바에서 활동할 때 보면, 제네바에서 장로는 전부
세상적인 의미로서의 다스리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정치적인 힘을 가진 사람들을 장로로 세웠어요. 그리고 장로로 일했어요.
제네바에서는 '장로'하면 모두가 특정한 교육을 받은 정부 관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법을 집행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주일을 함부로 범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체형을 가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질 만큼, 장로들의 권리가 막강했어요.
세상 적으로 볼 때 법을 집행하는 권리까지 장로가 갖고 있었어요.
칼빈이 신정정치를 추구했던 제네바 시에서는 그랬어요.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인 것은 아니에요. 어떻게 보면 구약적이에요.
그러나 성경을 엄밀하게 보면, 칼빈의 이와 같은 다스린다고 하는 개념도 잘못된 것은 사실이에요.
왜냐하면 성경에는 다스리는 것을 그렇게 해석하지 않습니다.
살전5:12~1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여기에서 12절에 '다스린다'는 말이 나오죠.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다스림의 권위란 뭔가 하면,
그 다스림은 반드시 한 가지를 전제할 때, 성경이 말하는 다스림이 가능합니다.
그 전제가 뭐냐하면 '너희 가운데서 수고한다'는 말입니다.
12절에서 '수고한다. 다스린다. 권한다' 세 단어가 나란히 나오는데
이것은 장로 세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원문에 보면 정관사가 세 동사의 제일 앞에 하나 딱 붙어 있어요.
'그 수고하고 - 다스리고 - 권하는' 이렇게 딱 하나 딱 붙어 있어요. *투스(호)
이것은 1인 3역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다스릴 수 있는 자격을 가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먼저 남을 섬기는 수고, 교회를 위해서 몸을 바치는 헌신의 수고를 할 때
그 수고에서 다스리는 권위가 나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다스림은 어떤 것이냐?
섬김에서 나오는 권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에 가치관이요, 교회의 다스림의 개념이에요.
세상에 다스림은 위에서 누르는 것 아닙니까. 위에서 명령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주님이 가르쳐 주신 다스림은, 밑에서 받들어 섬기는 데서 나오는 권위에요.
그러므로 '수고한다'는 말은 *코피아오
죽을 힘을 다해서 땀방울을 비오듯이 흘리면서 애쓰는 그것을 가리키는 건데요.
그만큼 자기를 던져서 헌신적으로 교회를 위해 섬기고, 형제들을 위해서 섬길 때
그 사람이 비로소 다스릴 수 있는 자격을 갖는 거에요.
왜냐하면 그 섬김 자체가 다스림이 되기 때문에
거기서 다스림의 권위가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스리는 장로'는 어떤 사람이냐?
자기를 던져서 희생하는 사람이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낮아진 자리에서 남을 높이고 섬기는 데서
남에게 권위를 가지는 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고함이 먼저 있어야 되고, 수고할 줄 아는 자가 다스릴 수 있는 것이고
이와 같은 다스림의 권위를 가진 자가, 남을 권면하면서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치유할 수 있는
영적인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전5:12절의 핵심 가르침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죠.
제자들이 서로 파워게임을 하고 있을 때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눅22:26~27
성경이 이야기하는 다스림은 섬김을 가리킵니다.
이 사실을 제대로 모르고 '나는 치리하는 장로다' 하고 생각을 조금만 잘못해 버리면
그 직분이 자신에게 큰 화가 되고, 교회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인정해야 합니다.
이거는 목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예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오늘 장로님들이니까, 제가 특별히 장로님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성경적인 다스림은 섬기는 것이다.. 하는 것을 가장 극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교회의 기본 개념이 있는데요.
교회의 기본 개념인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을 놓고 보면
교회에서의 다스림은, 섬김의 권위라는 것을 우리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라는 말 대신에 쓸 수 있는 용어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은 엡1:23절에 나오는데요.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고전12:13절에 '(우리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그래서 예수 믿고 교회에 소속이 된 사람은, 모두가 '예수님의 몸'을 형성하는 지체들이 됩니다.
이것을 가만히 보면, 교회 안에서의 다스림은 섬김 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몸에는 수백 가지 지체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체는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는 지체는 하나도 없습니다.
지체는 모두가 몸을 섬기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여러분 그거 인정하십니까?
지체는 몸을 섬기기 위해 존재합니다.
손가락이 왜 존재합니까, 심장이 왜 존재합니까, 허파가 왜 존재합니까?
몸을 섬겨서, 몸이 제구실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를 던져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자기 교회를 '몸'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몸 가운데서 목사는 어느 지체에 해당됩니까, 장로는 어느 지체에 해당됩니까?
머리는 예수님이니까, 머리라고는 말을 못하지요.
제가 그렇게 물었더니 어떤 분은 '목' 이라고 대답하더라고요.
그 분의 논리는, 목사는 머리하고 몸하고 사이를 이어주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데요.
그런데 '목사가 지체 중에서 목이다' 라고 하는 성경적인 근거가 하나도 없어요.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죠. 중요한 지체 중의 하나는 되겠지요.
그러면 장로는 몸의 어느 지체에 해당합니까?
우리가 병원에 가서 제일 먼저 체크하는 게 뭐예요.
간 체크하고, 허파 체크하고, 심장 체크하고... 그렇죠.
그러면 그 중에 하나쯤은 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죠.
장로의 역할이 교회에서 중대하니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하찮은 지체가 더 중요하고, 아름답고, 귀하다'고 그랬어요.
저는 콩팥이 그렇게 소중한 줄 몰랐어요.
제가 어릴 때, 아버지가 닭 잡을 때, '이게 콩팥이다' 하고 보여줘서 내가 알았지요.
그리고 학교 생물 시간에, '내 몸에 콩팥이 두 개가 있다'는 것만 알지
그게 뭐 어떻게 생겼는지 알게 뭐예요?
그런데 콩팥이 그렇게 중요한 줄 몰랐어요.
소변 걸러내는 것이 뭐가 그렇게 대단한 거예요?
그러나 제가 미국 유학하면서 만난 어떤 의사를 보니까
그 의사가 삼십대 의사인데, 투석을 하고 있어요. 자기 집에서 스스로 투석을 하더라고요.
하나님이 만드신 콩밭은, 어른 주먹보다도 적어요.
그런데 사람이 만든 콩팥은 피아노 절반 정도 되더라고요. 30년 전 당시에 걸러내는 기계가 그럤어요.
거기서 네 시간을 걸러내더라고요. 일주일에 서너 번 걸러내지 아니하면
완전히 온 몸에 그냥 독소가 쌓여 가지고, 뭐 숨을 제대로 못 쉬고
나중에는 드러눕는 그런 참 어려운 일이 일어나는 걸 제가 보았습니다.
그걸 보고 '야 콩팥이 별거 아니고 하찮은 것은 줄 알았더니, 정말 중요하구나!' 제가 배웠어요.
그러면 목사, 장로는 지체 중에 어디에 해당합니까? 중요한 지체에 해당하죠.
그 중요한 지체가 뭡니까? 꼭 심장입니까? 아니에요.
심장이 아무리 펄펄 뛰어도, 콩팥이 고장나면 그 사람은 가버립니다.
그러니까 지체 중의 하나라는 것은 확실하잖아요.
그러면 모든 지체가 몸을 섬기기 위해 존재합니다. 다른 지체를 섬기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다스림'이라는 게 뭐냐?
억누르고 파워게임 하는 것이 다스림이냐? 아니라는 말이에요.
지체가 된 교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의 다스림은
다른 지체를 섬겨주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다스리는 권위를 가진 사람이다.. 그 말이에요.
이걸 제대로 알고서 목사가 되고, 장로가 돼야 되는데
오늘날 이런 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그냥 안수받는다고 해서
장로되고 목사되니까 ... 문제가 일어나는 거예요.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삼 년 동안은
우리와 똑같은 몸을 입고 복음 전하고 활동하셨어요.
그러니까 몸이 굉장히 중요하지요.
예수님이 삼 년 동안 계실 때, 몸에 병이 나서 앓아누었다는 기록은 하나도 없어요.
독감걸렸다는 기록도 하나도 없어요.
예수님이 건강하셔야 갈릴리에도 가시고, 유대 땅에도 다니시고
건강해야 온 사방을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할 거 아니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나중에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다음에는
지상에 있는 교회를 자기 몸으로 받아들이셨어요.
그래서 몸이 움직여야 일을 할 거 아니에요.
지상의 교회를 자기 몸으로 받아들여서, 자기 몸을 가지고 일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지상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몸은 건강해야 돼요.
그래야 주님이 마음대로 일하실 수가 있어요.
제가 이런 병, 저런 병을 가지고 20년 이상 씨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건강해야 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걸, 저는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이에요.
아무리 좋은 이상, 좋은 비전과 꿈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내 몸이 약해가지고 움직이지 못하면, 다 그건 헛소리에요.
예수님은 오늘날 이 세상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의 이름이 높임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기를 원하십니다. 아멘!
그러면 이 일을 누구를 통해서 할 거냐?
자기 몸된 교회를 통해서 이 일을 완수하시는 거예요. 이것이 주님의 목표예요.
그러면 지역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고 하면, 몸이 건강해야죠.
건강하기 위해서는, 몸의 지체된 사람들이, 주님의 몸을 적극적으로 섬겨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런데 좋지 못한 목사가 교회를 지도하든지
좋지 못한 장로가 교회 안에서 힘을 갖게 되면 몸이 병들어 버려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의 원칙대로 섬기지 않고, 누르고, 명령하고,
그냥 편가름 하고, 목사하고 파워 게임 하고, 장로하고 파워 게임 하면서 갈등을 일으키고 하니까
몸이 점점 없는 힘이 빠져버리는 거예요. 병이 드는 거예요.
그럼 그런 교회는, 아무리 주님이 일을 하고 싶어 하셔도, 일을 하실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제 생각에,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 누구냐면,
주님의 몸된 교회를 병들게 하는 목사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병들게 하는 장로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뭐가 할 짓이 없어서, 목사가 되어가지고 교회를 병들게 만드냐,
뭐가 할 짓이 없어서, 교회에서 장로가 되어서, 교회를 병들게 해서
주님이 움직이지 못하시게 만드냐? 주님의 일을 못 하게 만드냐?
만약 그런 일에 쓰임을 받는다면, 그것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지요....
▲벧전5:2절에 보면 참 이상한 말씀이 한마디 나옵니다.
장로를 놓고 권면하는 말씀인데요.
벧전5: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해서 일하지 말라'
여기서 '더러운' 이라는 말은, 좋은 말이 아닌데요.
이 말을 원문으로 보면 '부끄러운' 말과 같습니다.
'부끄러운 이득을 위해서' 라고도 할 수 있죠.
왜 이런 충고를 합니까? 목사든, 장로든 교회 지도자가 된 사람은
조금만 잘못하면 '더러운 자기 이득을 위해서' 영적 권위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뭐가 더러운 겁니까? 주님 앞에 내놓을 수 없는 것이 더러운 것이겠죠.
사람 앞에서도 내놓고 떳떳이 이야기할 수 없는 은근한 더러운 것이 있죠.
자기 명예를 위해서 교회를 이용해 먹는다... 더러운 이득이지요.
세상에서 채우지 못한 열등감을 교회 안에서 채워보려고 교인들 앞에서 힘을 씁니다.
'더러운 이득'이지요.
목사가 무슨 직위입니까?
작은 예수 되어서 성도를 섬기는 종의 위치에 있는 것이 목사 아닙니까.
그런데 교회 키워가지고, 자기의 자기의 야망을 드러내려고 하는..
자기의 야욕을 채우려고 하는 것...
겉으로는 소명이다, 비전이다.. 하고 떠들지만
은근히 자기야욕을 채우려는 일부 목사들이 있죠. 더러운 이득이지요.
목사가 마음 놓고 목회할 수 없도록, 자꾸 딴지를 걸고
자꾸 브레이크를 걸어가지고
교인들 앞에 '우리 교회에서는 어느 장로님이 제일 파워가 있어!' 하는 말을 은근히 듣는 것을
쾌감으로 느끼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더러운 이득'을 위해서 장로직을 수행하는 사람이죠.
이런 것을 주님 앞에서 철저히 처리하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다스리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왕 여러분이 장로가 되었습니다.
제가 이미 처음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 장로직은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직분입니다.
장로안에는 정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다 포함됩니다.
장로안에는 목사도 있습니다. 이 '장로'라는 이름의 얼마나 영광스러운 이름인지 몰라요.
이러한 직분을 내가 맡은 것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라고 맡은 것이고
내가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참 희생하고 섬김으로써
주님이 마음껏, 일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도록
나를 장로로 세웠다고 한다면
내가 장로로 있는 이상 교회가 건강하고 행복해야 됩니다.
내 때문에 교회가 행복하고 건강해야 됩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이 교회 목사이면
나 때문에 교회의 교인들이 정말 행복하게 신앙생활 하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이게 목사의 소원아닙니까.
세상 살이가 얼마나 힘들어요. 여러분.
안 믿는 사람들과 경쟁해서 예수 믿는 사람이 이길 수 있습니까?
여러분 지금 한번 생각해보세요.
세계와의 경쟁 속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길 자리가 있어요?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해 가지고, 여러분이 세상에서 진급 제대로 할 수 있습니까?
온갖 고통을 겪으면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위로받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교회 밖에 없어요.
가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데가, 교회 밖에 더 있어요?
남편이 잘못해 가지고 고통을 당하는 부인이라도
교회 와서 은혜받으면, 그 고통을 얼마든지 이기고 나갈 수 있는데
교회가 행복하지 못하면, 세상에서 받는 고통을
교회 안에서 더 무겁게 느끼게 되고... 이것은 정말 비참한 일이 아닙니까.
교회를 그렇게 만들면 안 되죠.
어떤 사람이 들어와도, 교회 안에서는 행복을 느껴야 하고, 보람을 느끼기도 느껴야 하고
주님께 헌신함으로써, 세상이 모르는 기쁨과 감격을 체험하면서 살도록 만들어야 되잖아요.
이렇게 좋은 교회, 건강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목사, 장로인데
저는 목사와 장로의 역할을 차별 두지 않습니다. 그만큼 장로가 중요합니다.
▲끝으로 제가 다섯 가지, 여러분에게 좀 건방지게 말이죠.
제가 조금 선배라고 하는 입장에서, 여러분에게 좀 부탁드리고 싶어요.
교회를 섬기면서 섬김을 통해 다스리는 장로의 권위를 가질 수 있는
정말 자랑스러운 장로님이 되시기 위해서, 다섯 가지를 여러분이 좀 실천해보시면 좋겠습니다.
1) 첫째, 담임목사와 은혜를 같이 나누고
담임목사의 목회 철학을 함께 공유하는 시간을 좀 가지십시오.
은혜를 함께 나누고, 담임목사님이 갖고 있는 목회 철학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시간을 좀 가지십시오.
장로님이 되고 나서 한 3년만 지나면, 전부 다 은혜가 말라 버립니다.
제가 보니까 그렇더라고요. 평생 그 은혜를 충족을 못 시켜요.
점점 점점 메말라가는 거를 봅니다.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당회에 들어가가지고 의논을 하다가 서로 의견이 부딪치면 감정이 상하죠.
또 교회 일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깊이 이야기하다가 보면
목사님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실망을 할 때도 많이 있잖아요.
그리고 '목사가 왜 저러나?'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점점 마음이 닫혀버리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설교를 들어도 은혜를 못 받아요.
그래서 나는 가까운 사람보고 '장로 되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정말 불행해집니다.
목사가 무슨 천사가 아닌 이상 완전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다 보니 가끔 자기 자신의 결점 때문에, 다른 사람을 실족시킬 때도 있거든요.
그런데 장로님이 그걸 다 소화할 수 있고, 품을 수 있으면 좋은데
장로님이 그렇지 못하고, 상처를 입는다든지 실족함을 당하면
그 다음부터 은혜를 받을 수가 없어요.
설교를 들어도 냉랭하고, 그래서 자꾸 은혜가 메말라가요.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가장 좋은 길이 뭔지 아세요?
담임목사와 함께 말씀을 공부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로 말하면 제자훈련 하는 거예요. 우리 교회는 2년 동안 합니다.
장로가 되기 전 2년이에요.
장로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하던 평신도 때에
적어도 2년 이상 목사와 함께 은혜받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리고 장로가 된 사람들은, 자주 자주 목사와 함께 시간을 갖고
말씀을 나누는 기회를 만듭니다.
그래가지고 그런 시간을 가지면, 목사가 일방적으로 설교하는 거 아니에요.
말씀앞에 똑같이 않아서 다 옷을 벗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 앞에서 함께 울고, 함께 웃는 거예요.
거기에서 목사의 짐, 마음 속에 있는 모든 내면이 다 드러나게 돼 있고
장로의 내면이 다 드러나게 돼 있어요.
그러다가 보면 어떤 때는 서로 붙들고 끌어안고. 같이 함께 통곡하고 자복할 때도 있어요.
마음에 있는 벽돌이 무너져요. 목사도 그런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거든요.
그러니까 목사가 같이 앉아서 말씀을 나누다 보면
목사는 장로때문에 살아나는 거예요.
장로는 목사때문에 살아나는 거예요.
하나님 말씀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벌거벗은 자와 같이 된다고 그랬잖아요. 히4:13
그 말씀 안에서 교훈과 책망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을 받아서 딤후3:16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자리까지, 점점 우리가 자꾸 변화되는 노력을 하면
(성령의 인도를 받은) 그 노력을 통해서
목사도 좋은 목사가 되고, 장로도 좋은 장로가 되고
그래서 교회는 점점 점점 은혜안에서 서 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기회를 톡 만들지를 않더라고요.
당회하기 위해서 모이고, 당회할 때 모여서 잠깐 기도는 하지만
정말 말씀 앞에서 자신을 오픈하는 그런 시간을.. 교회에서 못 가지더라고요.
이게 오늘날 한국 장로교의 비극이에요.
여러분들이 목사님을 보고 요청을 하세요.
'우리 함께 말씀을 통해서 은혜받는 시간을 좀 가지십시다.'
뭐 2년 제자 훈련을 못 하면, 한 두 달 이라도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서
'목사님 우리 같이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면,
그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통해서
목사가 무슨 목회 철학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도 다 듣게 되고
여러분이 서로가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한마음이 되는 거예요.
이거 없으면요. 목사 장로 사이에 있는 문제는 절대 해결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꼭 명심하세요!
2) 둘째는, 목사와 함께 계속 배우는 수고를 하세요.
한 번 은혜는 받았는데, 무식하면 그것도 탈이에요.
장로는 지도자입니다. 내 학력이 대학을 못 나왔다 해도 그건 상관없어요.
글은 읽을 줄 알잖아요. 얼마나 배우고 노력하고, 얼마나 자기가 성장하겠다고 몸부림치는데 따라서
사람은 달라지게 되어 있어요.
데이비드 웰스 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분의 글에 보면 이런 말을 했어요.
'오늘날 사회에서 신기술이 기존의 기술을 점차 빠른 속도로 대체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꾸 제품의 수명이 짧아지고 있어요.
전에는 10년 가던 제품이 지금은 2년을 못 견디고 다 폐기처분되는 것이 오늘날 현실입니다.
'이렇게 급속하게 모든 것이 바뀌다 보니까,
우리의 삶 속에서 영원함의 가치도 대부분이 사라지고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영원함, 오래가는 것, 변하지 않는 가치... 이런 것에 대한 의식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자꾸 변화되고 정신없이 새 것이 나오는데만 관심을 갖고 사람들이 좇아가다 보니까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런 의식들이 희미해지고
'만고불변의 진리를 꼭 붙들고 산다'는 이런 소명감도 약해지고요...
그래서 사람이 자꾸 이상해지는 거에요. 오늘날 현실이에요.
그래서 새로운 지식이 자꾸 나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지식, 새로운 변화에 대해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잘못 되지 않습니다. 그러려면 열심히 읽고 배워야 합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열심히 공부해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그리고 교회가 제대로 건강하게 세워지려면, 장로님들이 함께 배우면서 성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참 중요한 책 한 권, 한 권씩을 선택해 가지고
'목사님, 이번 한 달 동안 수요일 저녁예배 마치고 모이던지
아니면 새벽에 모이든지 해서, 이 책을 놓고 우리 같이 좀 이야기도 하고 의견도 나누고
좀 해보면 어떻습니까?' 장로님들이 한번 권해보세요.
그러면 책 하나 떼는 거에요. 책 하나 떼면서 그것을 놓고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내가 지금까지 몰랐던 것을 얼마나 많이 알게 되는 지요.
나도 모르게 내 자신이, 키가 갑자기 크는 것 같은 착각을 느낄 정도로 발전한다는 말이에요.
저는 우리 교회에서 그런 일을 몇번 했어요. 목사만 자꾸 자라서는 안 되죠.
옥목사는 계속 공부하는 사람이니까 절대 후퇴는 안 해요.
그러나 장로님들은 안 그러더라고요.
세상일이 너무 바쁘니까, 언제 책 볼 시간이 있습니까?
그래서 목사만 자꾸 성장하고, 장로들은 지적으로 성장을 안하면 이것도 문제다...
그래가지고 한번은 제가 '장로님들, 저하고 공부 좀 합시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공부하자는데 해야죠'
그래서 수요일날 예배 마치고, 당회실에 모여가지고 한 두 시간 공부하는 거예요.
그러면 공부도 재미가 있어야 되잖아요.
그때 한참 '새들백 교회의 이야기'가 막 시중에서 히트를 칠 때입니다.
그 책을 우리가 모두 사 가지고, 일주일에 한 장씩 읽고 와가지고는
막 자유스럽게 토론하는 거예요. 와~ 재미봤어요. 일 년 동안했어요.
그러니까 미국의 새들백 교회 이야기를 펼쳐놓고
그 교회 목회 철학, 그 교회 목회 방법 같은 것을 주제로 삼아 막 토론을 하니까
그동안에 장로님들이 마음에 갖고 있던 생각도 다 나오고요.
그리고 우리가 몰랐던 것을 그 교회를 통해서 배우고요.
우리 교회가 앞으로 좀 보완을 해야 될 부분은 이런 부분이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되고요.
무려 우리가 일 년 동안 그 책을 공부를 했다고요.
그래서 담임목사와 장로님들이 같이 공부하면서.. 서로 존경하게 됩니다.
3) 세 번째, 열린 리더십을 살려야 합니다. 열린 리더십을 살려나가야 돼요.
열릴 리더십이 있으면 닫힌 리더십이 있다는 말이죠.
닫힌 리더십이란 '내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을 갖는 게, 닫힌 리더십이에요.
목사들 중에도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왕왕 있습니다만
장로님들 중에도 많은 것 같아요. '우리 교회는 내 아니면 안 된다!'
꽉 닫아놓고.. 그리고 자기보다 좀 똑똑한 사람들이 보이면 밀어내고요...
심지어 어떤 교회는 가니까, 똑똑하고 공부도 좀 하고,
사회적으로도 어느 정도 좀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들어오니까
완전히 그냥 계획적으로 아주 발을 못 붙이게 만드는 그런 교회들도 있더라고요.
이게 닫힌 리더십 이거든요. 이거는 망조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갑자기 그냥 독감에 걸리도록 만드는 거나 것과 비슷해요.
그러면 안 되죠. 열어 놓아야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그래서 유능한 사람이 있으면 발탁하고
또 교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 주고
또 좀 유능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과 함께 손잡고 일함으로써
교회가 더 왕성해질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죠. 이게 '열린 리더십'입니다.
△사랑의 교회가 열린 리더십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거 여러분 아시죠?
우리가 '새들백 교회의 이야기'를 공부하다가, 그런 안건을 가지고 결정을 했는데
뭐 숫자가 별거 아닙니다만 아무튼 주일날 출석이 한 삼만 오천 되니까 *2007년
2년 동안 제자훈련을 받고, 평신도지도자로서 다락방(구역)을 인도하는
남자 순장만 해도 지금 1천5백명이 넘어요.
그 사람들도 사회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쟁쟁한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장로가 될 길이 좀 열려야 되잖아요.
그런데 저는 서울의 어느 교회처럼, 2백 명, 3백 명씩 장로 세우는 건 절대 반대예요.
그런 당회가 어떻게 효능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30명 이상은 절대 당회원 안 세운다' 그게 제 목표였어요.
교회도 커서 쉽지 않는데, 당회까지 커가지고 내가 어떻게 리더하겠어요?
'그러니까 공룡처럼 하자!'
공룡은 머리가 작어요. 그렇지만 몸은 거대하게 크죠.
교회가 크니까 당회이라도 머리가 요만하게 작아야지,
두 개 다 커가지고 어떻게 견뎌요...
그러니까 30명 이상은 장로 안 세운다..는게 제 마음인데,
한 번 장로 되면, 칠십 세까지 장로 일 하다보면...
다른 사람들이 장로회에 들어올 수가 없는거에요. 꽉 막혀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작업을 한 것이 '칠년만 시무장로하자. 그리고 사역장로로 넘어가서
젊은 집사들이 장로 될 수 있는 길을 좀 열어주자.
그 똑똑한 젊은 집사들이 지금 얼마나 많은데
그 사람들에게 길을 열어주자!'
이래가지고 지금 7년 (임기) 시무장로제를 지금 하고 있잖아요.
그렇게 결정을 해가지고 '전국 장로연합회'에서 들고 일어나가지고... 제가 혼 좀 낫죠.
'교단 헌법에서 칠십 세까지 장로하라는데
옥목사가 뭔데 지역 교회에서 뭐 63세로 자르고, 7년으로 제한하느냐?'
그렇게 다른 교회에서 반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거 결의했다가 취소해버렸어요.
왜냐하면 교회 헌법이 칠십 세인데
'법이요!' 하고 나오면 다 아무리 우리가 결정을 백번 해도 소용없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일단 교단 헌법을 따르기로 했죠. 한 발 후퇴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 장로님들 하고 의논을 했죠.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그랬더니 장로님들이 '우리 식대로 합시다' 그러더라고요.
우리 식이란, '칠년 되면 사표 쓰고 나가면 되는 거지 뭐!'
그래서 우리 교회는 사표 쓰고 다 나가요. 해마다.
그러니 해마다. 4~5 명씩 장로가 들어오는 거예요.
열린 리더십이지요.
꼭 그렇게 할 필요까지는 없어요.
작은 교회에서는 장로될 분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하다가는 정말 뿌리가 뽑히니까 큰일 나죠.
그러니까 교회 사정따라 하는거에요. 우리는 큰 교회니까 그렇게 하는 거고요...
그러나 교회가 작아도, 열린 리더십이 있고, 닫힌 리더십이 있어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노력을 하세요.
4) 네 번째로는 견문을 좀 넓히십시오.
견문을 좀 넓히려고 노력을 하십시오.
무슨 말인가 하면, 다른 교회를 좀 자주 가보시라는 말이에요.
어떤 장로님은 '나는 이 교회에서 35년 동안 한 주일도 빼먹지 않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뭐 큰 자랑인 것처럼 이야기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그 말을 듣고는 '정말 골통이네'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렇게 자기교회 밖에 모르고 살았으니까 얼마나 사람이 좁겠습니까.
그게 충성인 줄 아는 모양인데 충성이 아니에요.
여러분 담임목사가 요청을 해가지고 장로들이 당회에
'일년에 한번 정도는, 우리가 좀 가서 배울 만한 교회를 선정해 가지고
그 교회에 가서, 거기 가서 예배보고, 거기 가서 그 교회 모든 것을 좀 브리핑을 좀 듣고
좀 배우고 올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주십시오!'
이렇게 결의해 가지고 좀 다니십시오. 일 년에 한 차례만 나가도 돼요.
가서 그 교회 장로님들과 만나 이야기도 하고, 그 교회 모든 것을 브리핑을 듣고
그 교회 주일학교에 대한 연구를 좀 하고, 그래가지고 돌아와 가지고 같이 검토를 하고
'우리 교회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 하는 것을 여러분이 배우면요,
그게 얼마나 교회에 도움이 되는데요... 장로님들이 좀 나가야 돼요.
밖으로 나가야 돼요.
자기 교회, 그 안에 있다고 해서, 그 장로석에 앉아 있다고 해서 충성하는 거 아니에요.
정말 충성을 하고 싶으면, 다른 교회에 좀 나가 보세요.
앞서가는 교회, 잘한다는 소문난 교회,
또 심지어 사고가 일어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교회에 찾아가서
여러분이 보고, 듣고 오면, 그만큼 우리가 커집니다.
△전라남도의 녹동이라는 데가 있어요. 소록도 맞은 편에 있는 조그마한 어촌입니다.
거기서 제일 오래된 교회에 당의장 목사님이 은퇴하시고
이제 새로운 목사님이 청빙하게 되었는데,
새 목사님을 뽑을 때 조건이 하나 있었어요. 당회에서 이렇게 결정을 했어요.
'제자 훈련 잘하는 목사를 모신다'
이런 조건을 걸어서, 정말 제자 훈련 잘하는 목사를 청빙했습니다.
이 목사님이 참 지혜가 있는 분이에요. 제자훈련을 하자고 뭐 학수 고대하고 있으니까
당회부터 시작해서 제자 훈련 바로 시작하면 될 거 아니에요.
근데 이 목사님이 그러지 않았어요.
뜸을 들이다가 장로님들에게 제의를 했어요.
'장로님들이 전라남도 녹동에만 살았잖아요.
전국 교회에 다녀보시면 좋은 교회들, 참 우리가 본받고 따라가야 할 교회들이 여러 군데 있는데
이제부터 좀 그 교회에 가서 배우는 학습을 좀 합시다!'
'그 교회에 미리 연락해서 우리가 간다는 것을 이야기하고는
장로님들이 주일예배를 그 교회에 가서 보고
그 교회에 가서 브리핑을 듣고, 모든 것을 돌아보고
돌아와 가지고는 보고 온 것을 종합해 가지고 우리 같이 토론하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 교회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서로 결정해서.. 좋은 것을 우리가 시행하는 이런 방법을 한번 해봅시다!'
그래가지고 1년동안에 몇 차례를 나가서 전부 견학방문했어요.
주로 제자훈련을 통해서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는 교회들을 타겟으로 다녔어요.
부산의 호산나교회를 위시해서...
그래가지고 돌아와 가지고 장로님 들이
'목사님, 우리도 이거 이거 이거 합시다.
목사님, 제자훈련을 그 교회는 이렇게 했다는데, 우리도 좀 그렇게 하면 어떻습니까?' 하고
막 장로님 들이 마음이 들떠가지고 서로 의견들을 내놓으니까
그 의견들을 종합해 가지고 제일 좋은 방법으로 제자훈련을 시작했어요.
얼마나 지혜로운 방법인지 몰라요.
장로님들도 눈이 열리고 얼마나 좋아하는지요...
여러분, 앞으로 좀 그렇게 하시면, 교회를 섬기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5) 끝으로 다섯째, 비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시골에 있는 작은 교회라도 비전이 필요합니다.
시골에 있는 작은 교회, 할머니 할아버지들 밖에 없는 교회지만 비전을 가질 수가 있어요.
'저 모로코에 있는 무슨 선교사가 그 이슬람권에 있는 사람들을 전도하려고
지금 십 년째 씨름을 하는데도, 한 사람도 지금 구원을 못했다는데
우리가 해줘야 될 것이 뭐냐?
돈이 없으니까 돈으로는 지원을 할 수가 없지만 매일 새벽마다 그 선교사를 위해서 기도 하자!'
이런 비전이에요.
'그래서 모로코를 복음으로 정복하는 날까지 우리가 기도하자!'
이런 비전을 가지세요. 얼마든지 비전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 형편에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일할 수 있습니다.
꿈이 없으면 망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이 '다스리는 장로'로서, 정말 주 안에서 교회를 섬김으로써
여러분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되고
여러분의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크게 쓰임 받을 수 있을 것을 저는 믿습니다.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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