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은 물질과 돈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돈을 지나치게 추구하면 돈의 노예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돈의 노예가 된다는 것처럼 인생을 불쌍하게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돈의 노예가 되었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그 말은 사람이 돈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돈이 사람을 소유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돈에 욕심을 내는 사람들은 돈을 자기가 소유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상 돈이 그 사람들을 소유한 것입니다. 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인격을 팔고, 명예를 팔고, 심지어는 목숨을 내놓기까지 합니까? 마귀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을 지옥으로 끌어내리는데 가장 성능이 좋은 무기 중의 하나가 바로 돈일 것입니다. 돈으로 인간의 본성을 자극하기만 하면 보통 사람들은 돈에 슬슬 끌려가기 쉽습니다. 돈 때문에 망한 사람이 그렇게도 많을 것을 잘 알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인생은 '공수래 공수거'의 인생(딤전 6:7)임을 알고 지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마음은 성령을 마음에 모신 사람이 누리는 참으로 기막힌 은혜일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돈에 대한 욕심을 가져야 한다. 그 욕심을 거룩한 욕심이라고 한다면, 돈에 대한 거룩한 욕심이란 말이 성립되는 말일까요? 성립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돈 자체는 선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돈 자체가 절대적으로 악한 것이라면 돈에 대한 거룩한 욕심이란 개념은 성립이 되지 않겠지만, 돈이 선하게 쓰일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면 돈에 대한 거룩한 욕심을 가진다는 개념이 성립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실질적으로 돈은 곳곳에서 좋은 일을 하는 첨병으로 많이 활용되고 있습니다. 돈으로 인해서 수많은 악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으며, 돈은 수많은 분쟁과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돈 때문에 이웃과의 정이 생기기도 하고, 개인의 삶에도 발랄함과 활기를 주어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문제는 돈이 어떤 사람의 손에 있느냐 하는 것이며, 또한 돈을 어떻게 지혜롭고 아름답게 사용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돈은 나쁜 역할을 하는 사단의 도구도 될 수도 있지만 좋은 역할을 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돈에 대한 거룩한 욕심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마태복음 5장을 보면 주님께서 산상에서 여덟 가지의 복을 말씀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6절)." 이 말씀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란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의'가 빵이나 음료수처럼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의에 주리고 목마를 수가 있을까요? 여기서 '주리고 목마르다'라는 것은 인간의 가장 강한 본성 중의 하나인 '물질에 대한 생리적인 욕구'를 암시함으로 강렬한 욕구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빵과 물에 관한 생리적인 욕구는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그 욕구가 발동하면 인간은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그 욕구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육체가 시간이 되어 "배고프다"는 싸인을 보내면 사람은 허겁지겁 그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밥을 찾습니다. 목마름을 해결하려는 노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의의 문제에 관해서 '주리고 목마르다'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의에 대해서는 생리적인 욕구만큼 강한 욕구를 가지라!"는 뜻으로 이런 표현을 쓰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란 '의에 욕심을 가진 자'라는 뜻입니다. '욕심'이란 말은 '소망'이란 말보다 더 적극성을 내포하고 있고 '열심'이란 말보다도 더 적극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욕심을 단순히 나쁜 뜻으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좋은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으로도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런 욕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1장 23-24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죽는 것도 유익하고, 심지어는 일찍 하늘나라로 가서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은 간절한 욕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유익을 위해서 떠날 수가 없다는 사랑의 고백을 합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은 욕심이 결코 나쁜 욕심이 아니라면 욕심을 무조건 잘못된 것으로만 여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좋은 것에 욕심을 가지는 것은 오히려 필요합니다. 죄는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을 욕심을 내어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적극적인 의미에서 죄는 하나님이 하라고 명령하신 것에 대해서 욕심을 내지도 않고 팔짱만 끼고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욕심을 가져야 할 것을 욕심 내지 않는 것도 일종의 죄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의'와 같은 좋은 것에 욕심을 내는 것은 승리로운 천국 백성이 꼭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마찬가지로 돈을 선한 용도로 사용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다면 마땅히 돈에 대한 거룩한 욕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돈의 노예가 되지 않으면서도 돈을 화목의 도구로 사용하려고 하는 적극적인 소망을 가지고 돈에 거룩한 욕심을 가지는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지, 그저 가만히 손을 놓고 있으면서 청빈함을 자랑하는 삶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아닐 것입니다.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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