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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도적 신앙의 본질! (눅 13:6-9)

by 【고동엽】 2022.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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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도적 신앙의 본질! (눅 13:6-9)

 

여러분은 무화과나무를 본 일이 있습니까? 우리 나라에서 무화과나무는 서울, 경기 지방에
는 거의 없고 저 남쪽으로 여수, 순천, 제주도에 가면 이 무화과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무
화과나무는 아무리 생각해도 지지리 못 생긴 나무입니다. 그 나무잎도 그저 보통 가랑잎처
럼 그렇게 생기길 잘 못생겼구요, 또 그 나무도 곧게 자라서 뭐 재목으로 쓸 수 있는 그런
나무도 아닙니다. 그저 비틀비틀하면서 옆으로 퍼져서 그 목재는 아무짝에도 쓸 수가 없습
니다. 그런가 하면 이건 관상나무도 아닙니다. 보기 좋은 그런 나무도 아니고 동시에 꽃이
없습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기를 무화과라고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꽃 자체가 열매고
열매가 곧 꽃입니다. 꽃이 피는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나무는 이 벚꽃 같은
것은 활짝 피는 멋이, 그 멋이 있는데 이건 그것도 없는 지지리 못 생긴 나무입니다. 무화과
나무의 존재의 이유가 있다면 오로지 무화과 열매 때문입니다. 열매는 많이 열립니다. 그 뿐
만 아니라 이 열매는 대개 열매라는 것은 다 익어서 완전히 먹을 때가 될 때까지는 입에 댈
수가 없습니다. 떫고 쓰고 그렇습니다마는 무화과 열매는 다 익기 전에도 정말 배가 고플
때에는 따서 먹고 시장기를 끌 수가 있는 그런 열매입니다. 많이 열리기도 하고 또 이렇게
시장한 사람에게 요기할 수 있는 그런 열매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 옛날 당시에는 길
거리에 많이 심어놓고 가는 사람 오는 사람, 이제 배고픈 사람은 좀 따서 먹고 정말 급한
배고픈 사정을 면할 수도 있는 그런 나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성경 말씀대로 보면 이
무화과나무는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 심어 놓은 것입니다. 열매가 목적입니다. 그 목적이 존
재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오로지 열매를 위해서 무화과를 심었는데 그 열매가 없다면 존재
의 가치가 없는 것이올시다. 가만히 보세요. 모든 것은 좋은 목적을 가진 것은 좋은 것이요,
귀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그 어느 것이던지 다 귀한 것이 되는 겁니다. 저는 늘 이 강단에
설 때마다 참으로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주 귀중한 것, 그게 바로 이 마이
크입니다. 이 마이크라고 하는 기계가 나오기 전에는 목사님들이 아무리 설교를 크게 해도
삼백명에서 최고 오백명까지 밖에는 들을 수가 없습니다. 요새 같이 방음장치를 잘 한 건물
도 정확하게 천팔백명이 육성을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옛날의 우리 목사님들은
요, 여기 연세 높은 분들은 기억하겠지만 목소리가 다 커요. 꽥꽥 합니다. 소리 지른다구요.
그렇게 안 하면 듣질 못 하니깐요. 그런데 이 마이크라고 하는 것이 있어 가지고 오늘 이렇
게 수 만 명을 상대로 해서 일시에 설교할 수 있다니 이런 고마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
런데 꼭 같은 마이크지만 댄스 홀에 있는 마이크하고 교회에 있는 마이크하고는 천양지차입
니다.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게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마이크입니다 이게.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렇지 않아요? 그 목적이 그 가치를 결정해 주는 거예요.
창조에 목적이 있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단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데도 목적이 있습니
다. 길가에 마른풀도 발에 걷어차이는 돌 하나도 존재의 이유 있습니다. 우리가 미처 모르고
있을 뿐이지 다 나름의 목적과 이유와 가치가 있다하는 말씀이올시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1장에서 말합니다. "나는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함을 입었다." 소중한 간증을 합니다. "이방
인의 사도가 되기 위해서 나는 세상에 태어났다" 라고 말합니다. 바울만 그런 거 아닙니다.
바울이 그것을 깨달은 것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자기
를 위해서 자기로 인해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감격하고 '맞어, 맞어 내
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거죠. 여러분, 여러분은 어
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확실합니까? 이 순간을 위해서 내가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 해 보셨습니까? 거기에 삶의 목적이 있는 거고 내 삶의 가치가 있는 것
이에요. 뿐만 아니라 사건으로 보아도 우연한 사건은 없습니다. 사건 하나하나에 다 신중한
의미가 있어요. 심지어는 인간의 실수까지도. 그 속에 의미가 있구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 되는 일입니다. 재난이든 지진이든 전쟁이든 엄청난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도 하나님께는 분명히 목적이 있어서 있어지는 일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볼 거 같으면요 자,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어요. 없다고 해서 "당장 찍어버
리라" 그런 하나님이 아니었어요. 3년을 기다렸다는 얘기입니다. 너무너무 고마운 말씀이에
요. 열매 없는 것을 알고도 1년 2년 3년을 기다렸어요. 그 기다림이란 하나님의 기다림, 하
나님의 인내, 그 속에 긍휼과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기다림이란 것은 곧 인격적 관계를 말
하는 것이에요.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문제가 아니고 인격적으로 돌아오기를 열매맺기를 기
다리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 아름다운 관계가 있어요. 뭐 거저 기다린 게 아니죠. 계속해서
김을 매주고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가꾸어 주면서 기다리죠. 이것은 비유입니다. 이스라엘
을 향한 비유이올시다.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비유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다릴 때 거저 기다
리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시련을 통해서 역사 하시고 또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주의
종들을 통해서 계속 일깨우시면서 많은 수고를 하면서 기다리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없었다 이거예요.
이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3년을 지난 다음에 주인은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땅만 버
리느냐? 이 나무를 찍어라"하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에요.
오래 참아요. 그러나 끝까지 참는 거 아니에요. 어느 순간에 가서는 심판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에요. 인내의 한계를 말씀합니다. 구약성경을 자세히 읽어가노라면요 정말 하나님께서
말이죠 어떤 때는 참고 어떤 때는 못 참으신 것을 볼 수가 있어요.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을
섬기고 뭐 많이 잘못했지요. 부도덕하고 이렇게 되도 오래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
는데요. 가끔가끔 성경에 보면은요 참지 못하시고 그대로 꽝하고 내리치는 때가 있어요. 그
게 어느 때인가, 그 하나님의 눈치를 좀 봐야겠어요. 대표적인 예가 이런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가지고 광야에 머무는 동안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산
에 올라갔는데 고 40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깁니다. 그런데
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저들이 말하기를 "모세도 보이지 않고 하나님도 이제 우리가 볼
수 없고 하니 그저 이제는 우상이라도 섬기자" 뭐 그랬다면 모르겠는데 그게 아니요. 성경
을 자세히 보면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아론이 하는 말이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
해낸 여호와 하나님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라 불렀어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꽝'하
고 내려치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입니다. 어찌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큰 도전이요 모독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말할 때는 하나님을 우상화했다 그럽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게 아니라 하나님을 우상화했어요. 이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신 것을 볼 수가 있어요.
확실히 하나님의 인내에 한계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입니다. 예수님 비
유로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놓고 타국으로 갔고 그리고 종을 보내서
세를 받으려고 했더라. 종을 보냈는데 안주더라. 때려 죽였다. 또 다른 종을 보냈는데 말을
안 들었다. 마지막에는 아들을 보냈다. 아들의 말은 듣겠지, 하고 보냈더니 "상속자니 이 사
람만 죽이면 저 땅이 우리 것 될거다"하고 죽였다 이거 지금. 이제 주인이 와서 어떻게 하
겠느뇨?' 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인내의 한계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인
내의 한계입니다. 그 속에 사랑이 있고 그 속에 심판이 있습니다. 그 속에 무한한 주님의 사
랑이 있는가 하면 거기에 심판이라고 하는 무서운 선언이 그 속에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에 보니까 "자, 이 열매 없는 이 무화과나무 찍어버려!" 했더니 과원지기가
대신 나타납니다. 이 나무는 말을 못합니다. 할 말이 없어요. 그러나 과원지기가 하는 말이
여기서 주도적으로 신앙을 고백하게 됩니다. 스티븐 코비라고 하는 분이 쓴 책으로서 너무
나 오랫동안 많은 사람 온 세계 사람들이 읽고 많은 지혜를 얻은 책이 있습니다. "The 7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이라고 하는 책이죠. 이 책 속에서 일곱 가지 성공한 사
람들의 습관을 말하는데 그 중에 첫째가 프로액티비티(Proactivity)입니다. 알고 보면 일곱
가지도 전부 그것에 해당하는 겁니다. 이 책 전반적으로 프로액티비티를 말하고 있습니다.
주도성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니 '내가 책임진다' 그 말이에요. 저 사람
때문에 내가 화를 내면서 손해 볼 수 없어요. 그건 잘못이에요. 누구에게도 잘못의 책임을
탓할 필요가 없어요. 내 책임이니까요. 지금 내가 책임지고 환경에게 책임 돌릴 것 없어요.
그 책에서 강조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어요. "내가 하고싶어 한 일이다"하는 것이에요.
모든 일은 내가 하고 싶어서 내가 한 일이에요. 그럴 때에 주도성이 살아납니다. 만일에 "하
고 싶지 않은 일을 저 사람이 하라고 해서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내 존재가 없
어지는 거예요. 나는 뭐요? 난 아무 것도 아니요. 어떤 일이든지 내가 선택하고 내가 책임지
는 거예요. 그게 주도적 인격입니다. 여러분, 옛날에는 그랬어요. 그렇지 않은 분도 많습디다
마는 옛날에는 왜 그런지 사장님은 다 배가 나왔어요. 그래서 배 많이 나오면 '사장님 배'라
고 그랬어요. 이 사장님이 왜 배가 나오느냐, 그거 아십니까? 사장님이 기분 좋은 시간이 있
어요. 자 과장님들, 그 밑에 있는 분들이 결재 서류를 가져와서 '그저 돼야겠는데' 하고 쩔
쩔매면서 이렇게 부들부들 떨면서 결재안을 내놓으면 이러구 보다가 "음, 좋아" 도장을 꽉
찍어요.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내가 책임져. 가지고 가" 이렇게 됩니다. 그 때에 그 기분
이 좋은 거예요. 사장님이 그 때마다 배가 나오는 거예요 그게. "이거 내가 책임져." 그 무
슨 소리입니까? 내 영역이 커지는 거예요. 이걸 아셔야 됩니다. 내가 책임질 때 그만큼 내
존재가 커지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인간의 존재 의식이거든요. 그런 고로 핑계를 많이 하는
사람, 특별히 내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사람, 그거 존재가 아주 형편이 없는 거예요. 뭐
어떤 사람은 부부싸움을 하다가 막 화를 내고 그러니까 아내가 왜 당신은 이렇게 계속 화를
내느냐고. 대답이 뭔 줄 아세요? "나는 본래 그렇지 않았는데 너하고 살면서 이렇게 됐다."
저 못난 거 제가 못났지 누구 책임이요? 이런 인간이 바로 인간 가치가 떨어지는 거예요.
이걸 아셔야 되요. 게다가 원망을 해요. 원망하는 순간 내 존재가 증발한다는 것을 아십니
까? 원망할 것 없어요. 환경 탓 할 것도 없어요. 누구 잘못이고 할 것도 없어요. 내 책임 내
가 지는 거예요. 그 순간부터 인간의 존재가 살아나는 것이지요. 그건 분명히 알아야 합니
다.
자. 그런데 말입니다. 내 책임을 내가 질 뿐만 아니라 남의 책임까지도 내가 질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럴 때에 그 만큼 나의 인생의 영역이 커지는 것이에요. 세계적인 언론가 중에 한
사람인 월터 크론카이트라고 하는 분에게 누가 질문하기를 "당신의 성공 비결이 뭡니까?"
딱 한마디 대답하는데요 "방송이 나를 위해 있으니까요" 라고 말했어요. 그 한 마디 속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직장이 누구를 위해 있습니까?
나를 위해 직장이 있는 것이지 직장을 위해 내가 있는 게 아니오. 그 사람은 그런 마음으로
살아요. 남의 직장에 가서도 어디 가서 일을 하던지 '이것은 나를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러
니까 내가 주인이에요. 가정을 생각할 때도 가정을 위해 지금 내가 머슴살이하는 것이 아니
에요. 나를 위해 가정이 있는 거예요. 그런 마음으로 가정을 대하는 거예요. 무슨 일을 하던
지 이것은 나를 위해 있는 것이요. 그럼으로 주인의식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사는 거야. 그러
니까 내 책임 내가 지고 남의 책임도 내가지는 거죠. 그만큼 존재의 영역이 커지고 있는 것
이에요.
자,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은 무화과나무 과원지기가 책임을 지면서 하는 말속에 중요한
세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이 무화과나무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열매가 없어요 분명히. 3년 동안 없었어요. 그러나 주인 이 무화과 과원지기는 생각합니다.
이 속에 잠재적 가능성이 있고 잠재적 능력이 있다는 것이에요. 그리 생각하고 있어요. 이게
믿음입니다. 여러분 우리 사람의 병도요 병이라는 것이 있고 장애라는 것이 있습니다. 장애
를 디스오더(Disorder)라 그러고 병을 디지즈(Disease)라고 합니다. 장애와 병은 다른 겁니
다. 병은 지금 아프고 괴롭지마는 이건 더 나빠질 수도 있지만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가
능성이 있지요. 그러나 장애라는 것은 이젠 멎은 거예요. 이건 그래 장애자가 불쌍한 거예
요. 장애는 끝난 거예요. 이제 그게 낫는 게 아니에요. 없던 팔이 생기는 거 아니잖아요. 그
게 장애거든요. 그러나 병은 지금 괴롭지마는 나을 수도 있는 가능성이 거기 있는 거예요.
오늘 이 과원지기는 이 무화과를 보면서 이것은 하나의 병리적 관계로 보는 거예요. 생리적
으로 보지 않고 병리적으로 보았어요. 그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
어요. 여러분 혹 부부싸움을 할 때요 두 사람의 말속에 올웨이즈(Always), 항상 이라는 말
을 빼야 가정이 행복할 수 있다, 하는 말입니다. 저녁에 남편이 늦게 들어왔습니다. 매일처
럼 늦게 들어와도 문 밖에서 딱 요렇게 얘기를 해야 돼요. "당신은 그렇지 않은데 오늘 무
슨 바쁜 일이 있었습니까? 어쩌다 늦었습니까?" 요렇게 말해야 돼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뭐
라고 하느냐 하면 "당신은 왜 밤낮 그 모양이야?" 왜 항상 늦게 돌아오느냐 이거예요. 이럴
때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게다가 하나 더 떠서 "당신의 아버지도 그랬다는데 당신
도……" 이렇게 아예 유전인자 문제로 돌려놓으면 이건 장애의 문제가 되는 거예요. 여망이
없어요 그러면. 그러면 그 쪽에서 막 나가는 거예요. "그래 어때?" 이러고 나온다고요. 이게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매일같이 있는 것도 처음 있는 것처럼, 엑시던트처럼, 병리적으로
볼 줄 아는 시각이 필요해요. 이거는 본래가 그렇고, 족보가 그렇고, 그냥 근본적으로 못된,
이렇게 되면은 그럼 끝난 거지. 뭐 거기다 데고 같이 살 거 뭐 있나. 그냥 살든지 말든지 할
거지. 이제 대고 말 할 것도 없는 거 아닙니까? 믿음이에요. 그 속에 가능성이 있어요. 아직
도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어요. 그걸 볼 줄 아는 믿음, 이게 중요하단 말입니다. 자 그래서
예수님 말씀 보세요. 누가복음 13장에 처음부터 보면은 18년 된 귀신들린 여자가 있습니다.
이 18년이나 되고 귀신들린 사람이 있다면 그게 사람입니까 그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님은 딱 보는 순간 가능성을 보았어요. 그 사람이 귀신이 붙어서 그렇지 귀신만 나가면 되
는기라요. 그래서 아브라함의 딸이라 그랬어요. "저도 아브라함의 딸이다." 얼마나 참 귀한
말씀입니까?
또 뿐만 아니라 이 과원지기는 열매 없는 이유에 대해서 그것을 함께 할려고 했어요. "열매
없는 책임이 내게 있습니다. 내게도 있습니다" 하는 말이에요. 저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있습니다, 라고 책임을 지게 됩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이 범죄할 때에 내려칩니다. 크게 정죄하고 계십니다. 다 진멸하겠다고 말씀하실 때 모세가
말합니다. "하나님, 정히 그러시려거든 내 생명부터 먼저 취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주 귀중
한 말씀이에요. 이 백성의 죄 중에 내가 함께 하겠다는 거예요. 형벌을 함께 받겠다는 거예
요. 하나님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을 진멸하고 너와 네 후손을 번성케 해서 가나안에 들어가
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아니요. 나 그거 원치 않습니다. 이 백성과 함께 죽
겠습니다" 이것이 모세의 마음이에요. 오늘 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습니다. 바
로 이 순간 과원지기가 함께 하겠다는 마음이에요.
그 뿐 아니라 책임을 지고 다시 1년 동안 수고하겠다는 겁니다. '땅을 파고 거름을 주고 물
을 주고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도 열매가 없으면 그때 찍으세요. 한 번 더 기회를 주
세요. Last Chance, 종말론적 기회를 주세요' 이렇게 요청합니다. 이것은 무화과나무에게 기
회를 주기보다는 이 과원지기에게 기회를 준겁니다. "네가 다시 한 번 해봐라." 얼마나 소중
한 것입니까? 부자만을 연구해 가지고 유명해진 토마스 제이 스태니(Thomas J. Stanney)라
고 하는 분이 있는데 "백만장자 마인드"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거예요. 백만장
자들이 백만장자 된 이유에 대해서 깊은 심층분석 한 결과 여덟 가지 특성을 말하고 있습니
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것은 결코 교육도 아니고 환경도 아니고 운도 아니에요. 백만장자
가 되는 길은 성실함과 건전함과 원만한 가정과 종교적 신앙과 우정과 스포츠맨쉽, 낙천성,
그리고 자기 관리 능력이 있고 나아가서 남의 책임을 내가 지는 성격을 가졌어요. 이 사람
이 백만장자가 되는 거예요. 뭘 잘못했다고 다 남에게 떠맡기고 이리저리 변명하는 이 시시
한 인간은 성공할 수가 없어요. 요새 우리는 이 때문에 마음이 아픕니다. 왜 그렇게 책임질
줄을 모르는 사회입니까? 대체 누구 잘못인지 알 수가 없어요. 청문회를 해도 소용없어. 왜?
서로가 발뺌만 하니까요. 이런 시시한 인간들 때문에 세상이 복잡한 거예요. 지도자 자격이
없어요. 책임을 져야지요. 책임을 질 줄 아는 인간이 필요한 거예요.
자,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같이 허물이 많고 부족하지마는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어요. 왜? 죽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거예요. 소망이 있어요. 가능성이
있어요. 십자가의 희생을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우리를 믿어주신 거예요. 그리고 대신
죽으신 거예요. 그런 고로 이 주도적 신앙의 본질이란 바로 십자가의 마음이요. 열매 없는
무화과를 위해서 대신 책임을 져요. 왜? 그 가능성을 믿고 있기 때문에. 그런 고로 주도적
신앙이란 생산적인 거예요. 이렇게 책임지는 그 누군가가 있어서 이 나무는 다시 열매를 맺
게 되는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오늘도 그 놀라운 은혜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
니다. 주여 우리는 너무나도 비겁했고 책임질 줄 모르는 인간으로 살아왔습니다. 주도적 신
앙, 주도적 세계관, 그리고 이 나라, 이 사회에 대한 책임을 지는 그런 신실한 믿음으로 살
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더 이상 아무도 원망하지 않게 하시고 조용히 내 책임을 다시 생
각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는 심판 보면서 내가 대신 책임을 질 줄 아는 그러한
주도적인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 되게 하시고, 그래서 열매 없는 이 사회가 다시 열매를 맺
는 기적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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