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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은 바 은사의 확증! (롬 8:31-39)

by 【고동엽】 2022.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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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은 바 은사의 확증! (롬 8:31-39)

 

어떤 아버지가 사랑하는 그 아들과 함께 사막을 여행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막은 불같이
뜨거워졌으며 아무리 걷고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답니다. 두 사람의 목은 타는 듯 마르고
지쳐 버렸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원망하듯이 아버지를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에
게 남은 것은 죽음뿐입니다. 더 이상 걸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이 자리에 주저앉아서 편
하게 죽음을 맞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얘야, 조금만 더 가면 틀림없이 맑은
물과 마을이 나올 것이고 오아시스가 우리를 만나줄 것이다. 용기를 내라. 힘을 내렴" 하고
아들을 권면했습니다. 이렇게 조금 더 가는데 그 앞에 커다란 무덤하나가 나타났습니다. 이
것을 보는 아들은 더 절망에 부르짖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우리처럼 죽은 거예요. 우리도
이 사람들처럼 죽어서 여기에 묻히고 말 거예요. 이제는 절망입니다" 라고 할 때 그 아버지
는 생각이 전혀 달랐습니다.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얘야, 무덤은 희망의 징조다.
무덤은 마을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확증해 주는 것이다. 시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무덤이
있다는 것은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묻어주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심해
라. 용기를 내라"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그것이 무슨 징조이며 무엇을 확증해주고 계
시는 것입니까? 그 증거를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보고 계시는 것입니까? 어떠한 미래를 내
다보고 있는 것입니까?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소망입니다. 그 어느 시간에도 소망이
있어서 살고 소망이 있어서 용기를 얻고 소망이 있어서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소망이란 우
리의 욕망을 이룬다는 것도 아니고 유토피아의 세계에 도달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소망은
곧 사랑을 의미합니다. 사랑을 깨닫고 사랑을 느끼고 사랑의 확증을 얻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아무리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더라도 사랑을 모르면 소
용없습니다. 또 사랑의 깨달음이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받아들이게 될 때만이
사람이 능력으로 나타나고 생명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올시다.
데이비드 씨멘즈(David Simans)라고 하는 분이, 상담학을 담당하는 학자입니다. 일생동안
많은 사람들을 상담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의 문제를 듣고 같이 의논하고 해결하려고
애쓴 그런 분입니다. 그의 많은 경험에서 그는 이렇게 결론을 짓습니다. "크리스챠니티 투데
이(Christianity Today)" 라고 하는 잡지의 기고한 논문 중에서 말합니다. "나는 오랫동안
많은 복음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정서적 문제
의 주요원인은 첫째는 무조건적인 은혜와 용서를 그들이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않고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둘째는 그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를 베풀 줄 모르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을 베풀면서 참 사랑을 깨닫고 배우게 돼있는 것인데 말이에요. 베풀
지 않으니까 받은 사랑도 모르게 되더란 것이죠.
여러분, 사랑이란 본래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랑 아닌 것을 사랑으로 착각
하는 데 있습니다. 전혀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으로 오해하는 데서부터 불행을 사게 되는
것이올시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나는 그 동물의 세계를 이렇게 볼 때 제일 사랑스럽게
보이는 부분이 뭐냐하면 새입니다, 새. 그 새들 가운데 보면은 그 알을 몇 개 나아서 품고
고생하는 것, 그리고 그걸 깨워 가지고 새끼를 먹일 때, 아니 그거 보통으로는 젖도 먹이고
뭐 어떤 건 내버려두고 그럽디다만은 이 새는 그게 아니더라구요. 또 자기가 모이를 물어다
먹이는 것도 있지만은 어떤 새는 자기가 먹었어요. 먹었다가 그걸 토해 먹여요. 토해 먹일
때 새끼가 목구멍까지 주둥이를 넣어 가지고 꺼내먹더라구요. 그걸 몸을 비틀면서 먹이려고
애쓰고 받아먹는 그 관계는 기가 막힌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 하나 잊지 마세요. 그렇게 애
써서 정성껏 키웠다고 해서 어미 새가 새끼 새에게 효도하라고 안 한다구요. 효도를 바라지
도 않아요. 훨훨 날아가 버리고 말아요. 그런데 이게 사람들은 새만도 못해요. 변변치 않은
사랑을 베풀면서 대가를 요구하는 거예요. 이게 망조라니깐요. 사랑은 절대적인 거예요. 왜
요? 우리가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았잖아요. 엄청난 사랑을 받았어요. 그 받은 것이면 끝난
거예요. 이거 절대적 용서, 절대적 사랑을 받았고 이제 그 절대적인 사랑을 또 다음 세대 사
람에게 베푸는 거예요. 베풀었으면 된 거예요. 더 이상 바래서는 안되는 거예요. 이게 사랑
의 타락이라는 겁니다. 참사랑이란 절대적이고 완전한 것이올시다. 이게 원천적 진리인데 이
것을 떠나고 이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되 의롭다 하시면서 사랑
하십니다. 죄인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고 자기의 의를 덮어서 의롭다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사랑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고 오늘을 삽니다. 그 사랑 안에 우리가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그 사랑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에요. 또 믿지 못하니까 깨닫지도 못한다는 것
이지요. 거기에 깊은 문제가 있는 거입니다.
저는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탕자 비유를 가끔가끔 생각에 떠올리곤 합니다. 이 탕자가 집을
나갔을 때 어떻게 살았을까? 성경은 간단하게 그저 '허랑방탕하여' 라고 요렇게만 말했지만
그 많은 세월 허랑방탕만 했겠습니까? 사업도 해 봤지. 자기 딴에는 사업을 하고 돈을 벌고
그래가지고 부자가 되어서 아버지 앞에 나타나서 아버지 앞에서 한 번 아버지의 아들 됨을
자랑하고 싶었고 집에서 아버지를 시중들고 있는 형님 앞에 우쭐하고 싶었던 거 아니겠습니
까? 그런데 이게 뜻대로 안되더라구요. 계속 실패하고 실패하고 그 타락성에서 벗어나지 못
할 때, 자 그는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나는 집에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 다시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사람이다' 라고 생각하고 그냥 버텨보려고
생각했을 거예요. 마지막에 굶어 죽게 되니까 '아이고 이러다간 난 죽는가보다' 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와 봤더니 아버지는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이렇게
만족하게 기뻐합니다. 그리고 아들로 그를 영접합니다. 그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만은 그
때에 그 아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전 그걸 성경에 괄호하고 그걸 넣어봤으면 좋을 것 같
아요. 꼭 이렇게 생각했을 거 같아요. '이런 줄 알았으면 진작 올 걸. 너무 많은 세월동안
나는 밖으로 돌았다. 너무 많은 세월을 잘못 살았다' 라고 생각했을 거란 말입니다. 아니 그
렇겠습니까?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기에 믿지 못했기에 밖
으로 나돌았던 거에요. 사랑을 몰랐던 거예요. 이미 사랑을 받았고 사랑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지요. 여러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랑에 대한 수용성이 문제입
니다. 오직 겸손한 자 만이 사랑을 믿을 수 있고 사랑을 믿는 자만이 사랑을 깨닫고 받아들
일 수가 있는 것이에요. 생각하면 모든 것이 사랑이죠. 사랑 안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
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 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가 시카고 대학에서 강연을 했을
때 학생 하나가 딱 따라나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이 많은 책을 쓰시고 많은 연구를 한 평생
하시고 또 가르쳤는데 당신이 그 동안 연구하고 배운 심오한 진리가 무엇입니까?" 한 마디
로 그는 말하기를 어렸을 때 부르던 찬송을 불렀습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한 말일세."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한 말이라고, 바로 그것이 내가 생각한 진리라고. 그의 유명한 말이 있
습니다. 제가 책을 읽으면서 이 한 요절을 읽고 두고두고 외우는 말씀입니다. "God's love
does not find its object but creates it" 하나님의 사랑은 대상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대
상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사랑의 대상을 찾아 헤맵니다. 사랑 받겠다고. 사랑 받으려
고.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적 사랑입니다. 기다리는 사랑만이 아닙니다. 창조적 사랑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에 나타납니다. 왜 우리가 그 사랑을 모르겠습니까? 왜 그것을 은사로 깨닫지
못하겠습니까? 왜 우리는 그것을 믿지 못합니까? 이것은 자기 의에 집착되었기 때문이에요.
오늘도 자기 의를 생각하는 그 고집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깊이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과거에 하나님은 나도 모르게 벌써 나를 사랑하셨습니
다. 많은 사랑을 우리는 받았습니다. 또 그리고 현재 잡다한 사건들이 많이 있습니다만은 이
모든 사건들이 나에게 주신 사랑의 은사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빨리 깨달을수록 좋겠습니다. 이 모든 사건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서 내게 주시
는 일이라고요. 그리고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 앞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 약속
을 확증받게 됩니다. 틀림없이 앞으로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거니까 말입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에 경험한 그런 내용입니다. 방직공장에 다니는 아주머니가 있습니
다. 그 남편이 방직공장에서 일하다가 순직을 했기 때문에 그 부인이 대신 방직공장에 취직
이 되고 이렇게 살아가는데 유복자를 낳아 가지고 기숙사에 갖다 놓고, 일하고 나와서 젖먹
이고 일하고 나와서 젖먹이고 이렇게 키웠습니다. 어느 날 그 기숙사에 불이 났습니다. 불이
타오를 때 아무도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는데 소방서원들이 말렸지만은 그는 그대로 뛰어들
어가서 아이를 품에 안고 뛰쳐나왔는데 머리카락이 홀랑 타고 얼굴도 다 타서 얼굴이 얽었
습니다. 그런 분입니다. 그 어린아이가 잘 자랐는데 얘가 철없을 때 유치원 다니고 초등학교
다니고 요럴 때입니다. 아이들은 서로 다투다 보면은 상대방의 약점을 꼭 건드리거든. 그래
서 싸우게 되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 "너 어머니는 곰보다" 이런다 말이에요. 그러면 얘는
집에 돌아와가지고 엄마는 왜 남의 엄마처럼 예쁘지 않고 곰보냐고. 엄마는 왜 곰보냐고 그
리고 박박 우는 거예요. 이런 답답한 일이 있나. 이게 기막힌 일이요. 걔가 좀 얼마 컸을 때,
엄마는 얘를 놓고 옛날 결혼 사진을 보여주면서 "내가 이렇게 예뻤다. 그런데 이러한 일로
인하여 너를 살리기 위하여 내 얼굴이 이렇게 됐다. 자, 이래도 보기 싫으냐?" 철없는 아이
지만 그 엄마를 바라보면서 그는 울었습니다. 감격했습니다. 그 다음에 누가 "네 엄마는 곰
보다" 그러면 "어림도 없다. 우리 엄마는 천사다. 우리엄마는 세상에 가장 예쁜 분이다" 라
고 대답합니다. 이것을 확증 받고 보니까 이제는 엄마가 용돈을 주든 안주든, 책망을 하든
칭찬을 하든 어머니가 내게 대하는 모든 것이 사랑이라고 그렇게 받아들이게 됐어요. 사랑
의 확증을 얻었거든요. 이제 아무 문제도 없는 거예요. 그런 어린애를 보았습니다.
여러분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이 아
들을 주었다는 말은 사랑의 극치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이상의 사랑이 없습니다. 내 목숨
주는 것 보다 내 아들 주는 게 더 어려운 거예요. 자, 보세요.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
어주시는 그러한 사랑,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그럼 왜 안 주시겠
습니까? 무엇을 주시든, 안주시든 주시든 그건 전부 사랑이에요. 그건 전부가 사랑이요. 바
로 이것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믿으면 믿을수록 어쩌면 사랑의 사람, 용기의 사람, 창조적
인간이 될 수 있다 하는 말씀이올시다.
여러 해 전에, 제가 우리 소망교회에서, 이 사무실에서 겪은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내 일생 오래오래 기억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안양 교도소에서 공교롭게 제가 들어가서 세
례를 베풀 때 저로부터 세례를 받았어요. 여러 목사님들이 가서 일제히 세례를 주시는데 나
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겁니다. 그런 청년 하나가 출소되어 가지고 제 방에 들어왔습니다.
전과 7범입니다. 절더러 직장을 소개하라는 겁니다. 그러니 제가 누군 지도 모르고 전과 7
범, 어느 직장에 내가 쉽게 소개하겠습니까? 그래 망설이고 있으니까 이 청년 하는 말이 "
그럴 줄 알았다구요. 사랑을 외치고 사랑을 부르짖지만 사랑은 없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나
를 낳아서 고아원에 내버렸답니다. 어디에 가서 사는 지 모릅니다. 자기 자식을 내버리는 그
런 세상입니다. 내가 거기서 자랐고 열네살 때 담장을 넘어 도망을 해 가지고 오늘까지 이
렇게 방탕하며 방황하면서 전과 7범이요. 이렇게 살았는데 사랑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쓸
데없는 이야기하지 마세요. 사랑은 없습니다" 하고 몸부림을 치는데 아 이거 참 큰 일 났더
라구요. 제가 다시 그 청년을 붙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잘 생각해 보자. 다른 사람
들은 자기자식이기 때문에 먹이기도 하고 입히기도 한다. 그러나 너는 너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 너에게 젖을 먹였어. 네 기저귀를 갈아 채웠다. 네가 모르는 사이에 너는 너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네가 살아난 것이고 건강하게 자랐고 네가 한번 농
사한 일 없지만은 오늘까지 먹고 살았어. 이래도 사랑이 없다는 거냐? 너는 다른 사람이 받
지 못한 특별한 사랑을 받은 거다." 이 청년이 마음을 돌립니다. 고아원 원장을 생각하고 자
기를 사랑해 주던 아주머니들을 생각하더라구요. 그러더니 목을 놓고 울어요. "내가 잘못 생
각했습니다. 정말 저는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일어서더라니 "그 직장은 어떻게
하냐?" 그랬더니 "상관없습니다. 이 세상에 사랑이 있다는 것만 알았으면, 나를 사랑하는 분
이 있다는 것만 알았으니까 이제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그리고 얼굴이 환하게 돼서 인사
하면서 나가는 모습을 보고 나 자신도 크게 감격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든 문제의 근본은 사랑을 모르기 때문이에요. 내가 받은 사랑, 지금도 내가 그 사
랑 안에 있음을 몰랐어요.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아들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이가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우리 앞에 있는 것 전부가 은사적
의미가 있어요.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은혜적 선물이요. 카리스마요. 기프트(Gift)요. 그걸 잊
지 말아야합니다. "은혜로 주지 아니하겠느뇨."
그런고로 생각해야합니다. 나의 고독의 원인은 나의 고집 때문입니다. 내가 절망하고 있는
것은 내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못 받아서 그런 게 아닙니다. 사랑을 깨닫지 못
해서 그런 겁니다. 과거에 이미 사랑을 받았고, 앞에 사랑의 약속이 있고, 오늘 내가 처한
처지 모든 현실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다
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 안에 무궁무진한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향한 구체적인 사랑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 사랑 안에 내가 있고 그 사랑 안에 나의 삶의 의미가 있고 내 미래
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이 사랑하시는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넉넉히 이기느니라. 여기에 사랑의 승리가 있는 것이올시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그렇게도 많은 은혜가운데 살면서도 무지몽매하고 또 교만해서 하나님의 사
랑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나만이 버려진 자인 것처럼 그렇게 고집부
리면서 살아가는 저희들, 그리고 절망하는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십자가로
확증하신 주님의 사랑을 깊이 간직하면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의롭다하신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모든 것을 은사로 받고 그 은사 안에서 감격하고 그 은사를 누리고 기뻐하며 승리할
수 있는 주님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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