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평강이 지키시리라! (빌 4:4-7)
정신과적인 용어 가운데 '불안장애' 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앵자이어티 디스오더스(Anxiety Disorders) 라고 하는 것입니다. '장애'라는 말과 '병'이라는 말은 다릅니다. Disorders, Disease 그건 개념이 다릅니다. 다같은 병이지만은 병은 지금 진행 중에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더 나빠질 수도 있고 혹 호전되서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 소망을 걸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병이라는 것이고요. 장애라고 하면 이 병이 멈춘 겁니다. 진행을 멈추어서 이제는 더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장애자들을 특별히 사랑해야 하는 것이올시다. 자, 이제 팔에 장애가 왔다. 그 팔이, 없던 팔이 생기는 게 아니에요. 시각에 장애가 왔다. 다시 시력이 회복될 가능성이 없어요. 이게 바로 장애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금 말하는 것은 불안장애 증상이올시다. '불안' 이라고 하는 것은 정상적인 사람에게도 있습니다. 걱정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하고. 이 많은 정신적 고통과 우리는 정면대결하면서 싸워나가는 것이 한평생 사는 생활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에 그만 이 상황이 뒤집히면서 불안에 압도되고 맙니다. 그러면 이 불안을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이 다 소실되어 버린 상태입니다. 이러면 헤어나지 못합니다. 불안의 노예가 되고, 불안에 완전히 사로잡힌 그런 존재로 살아갑니다. 이것을 불안장애, Anxiety Disorders, 현대인의 중후군이올시다.
이제 다시 한 번, 두 번째 장애가 있습니다. 그것은 공포장애입니다. 위험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생각으로 볼 때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괜찮아요. 그것을 알면서도 억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생각과 마음이 따로따로 노는 거예요. 이성과 감성이 서로 분리되는 시간입니다. 누가 물으면, 또 생각을 하면 아, 거 아무 일도 없는 거예요. 그러나 불안합니다. 그래서 불안을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이라고 합니다. 그렇잖아요. 이게 도대체 생각으로 보면은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그러나 생각은 생각대로고 가슴은 가슴대로 불안에 떨게 됩니다. 이게 공포장애입니다.
또 하나는 공황장애라는 게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죽을까 하는 걱정입니다. 모든 상황을 분리한 쪽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면은 이것은 살길이 없습니다. 세상에 제일 미련한 사람이 죽을까 걱정하는 사람입니다. 이제 오늘 저녁에 제가 미국에 갔다가 토요일날 돌아옵니다. Fuller 신학에 강의가 있어서 해마다 이때쯤 가야 되는데 이걸 가겠다고 어떻게들 소문을 듣고요 가지 말라고 전화가 많이 와요. "왜요?" 그랬더니 "죽을까봐요." "아, 그래요? 나는 죽을까 걱정은 해본 일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안할 것입니다. 왜요? 죽을 것이니까. 아니 죽을까 걱정해서 안죽는다면야 뭐 까짓 거 해봅시다 까짓 거. 하지만 다 죽을 것인데 문제는 시간 문제인데 그것 뭐 그렇게 그럴 게 뭐 있느냐?"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농담 겸 진담으로 말했습니다. "저는 장로교 목사입니다. 왜요? 저는 예정론을 믿거든요. 그런고로 'No problem'." 그랬습니다. 미국에서까지 전화가 왔어요. 정말로 올거냐고. "가고 말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이런 얘기가 있어요. 젊었을 때 제가 수필에서 읽은 얘기인데 너무나도 제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어서 기억합니다. 어느 어촌에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이 좀 심하게 일어서 어부들이 죽었어요. 그 아버지의 장례식을 모시고 다음날 그 아들이 그 배를 타고 또 바다로 나갑니다. 그러니까 그 동네 사람들이 "이 사람아, 아버지가 그 배를 타고 나갔다가 죽었는데 그 배를 또 타고 나가나?"하고 물었어요. 그러니까 이 청년이 하는 말이 "나 한가지 물읍시다. 당신네 아버지는 어디서 죽었소?" "침대에서 죽었지" "그럼 당신 오늘도 침대에서 자우?" "그럼, 자지." 그런 겁니다 생각하면 말이에요. 여러분, 적어도 우리 믿는 사람이라면 죽을까 하는 걱정은 날려버리세요. 그건 없이 살아야 됩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말이에요.
여러분 아시는 대로 제가 지금도 차를 직접 운전을 해서 경주도 가고, 광주도 가고, 다 다닙니다. 어떤 분들은 깜짝 놀라서 "목사님, 아직도 운전을 하십니까?" "그러면, 그럼 누구를 시켜야 되나? 운전기사를 시켜야 되지." 그럼 하나만 묻자고. "운전기사를 시키면 사고가 나지 않나? 내 편에서는 오히려 그쪽이 더 불안하고만.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낫지. 안그러나?" 여러분, 이 불안이라는 것은 그건 끝도 없는 것입니다. 공항 장애, 뚝 떼어버려야 됩니다.
또 하나, 강박 장애라는 것이 있어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기 자신을 못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에다 가스불 잠갔나 안잠갔나? 여기 앉아서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가지고 나가서 전화걸고, 별짓 다해요. 또 그런가 하면 '열쇠를 잠갔나 안 잠갔나?' 내려왔다가 '가만있자, 잠갔나?' 올라가서 만져보고 왔어요. 또 내려와서는 '가만있자, 잠갔던걸 내가 열고 내려오지 않았나?' 또 올라가요. 오르락내리락 해요. 제가 그런 사람을 직접 만나봤어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까짓 거 도적 맞고 맙시다. 그래야 헤어날 수 있지 내가 나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어요. 하루종일 오르락내리락 해보세요, 되나. '까짓 거 가져갈테면 가져가라' 그러고 말아야지. 그렇지 않고는 이건 절대로 자유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이거 웃는 사람들 다 전과자예요. 한번씩 다 해봤다고요 지금. 장애, 이건 못고치는 병이에요. 이건 병입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평강의 길로 인도하신다.' 평강의 하나님,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결론부터 말씀하면 우리 마음은 우리 마음대로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강을 주셔야 평안할 수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다스려 주셔야 됩니다. 그가 우리를 다스리실 때 내가 평안할 수 있는 것이지 내 스스로 평안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평강은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벌 수 있어도 평안을 벌 수는 없습니다. 출세를 얻어낼 수도 있지만은 평안한 잠을 잘 수 있는 것은 이건 은사올시다. 여러분, 평강이라는 것은 탈취하던가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싸워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전쟁을 가르쳐서 불가항적 사항이라고 합니다. 누구나 전쟁은 싫어요. 전쟁해서는 안되요. 다 죽으니까. 그래도 할 수밖에 없어요.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습니다. 학자들은 말합니다. 전쟁은 Passion에서 시작된다고. 욕망, 끝없는 욕망이 전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P' 자로 시작되는 몇 단어를 나열합니다. Passion for Pagentry, 과시입니다. 자기 과시, 자기 능력. '우리는 큰 나라다, 우리는 힘이 있다.' 우리는 그레이트 소사이어티(great society)다. 자기를 특별히 생각하는 것, 교만한 마음이 전쟁을 일으키고요. Passion for Possession, 끝없는 소유. 남이야 굶던 말던 나는 더 가져야겠다. 가지고, 또가지고, 또 가지고……. 바로 이 소유욕이 전쟁의 요인이 되고. 또 Passion for Protection, 이제는 빼앗기지 않으려고 보호하려고, 보호하려고. 생명도 보호하고 재산도 보호하려고 싸웁니다. Passion for Profit, 보다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서, 이익을 위한 존재. Passion for Patriotism, 애국심입니다. 애국심 위에 인도주의가 있고 인도주의 위에 신앙이 있는 것이에요. 애국심이 전능이 아니요 지존도 아닙니다. 이 집단적 이기주의가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진정한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Passion for Peace' 정말 평화를 위해서, 다시 물어봐야 되요. 정말로 평화를 위해서 싸우느냐? 그 진실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발견하기까지는 그 어디서도 참평안을 얻을 수 없었노라. 하나님을 만나기까지는 절대로 평안은 없습니다. 불안이 환경과 물질과 관계없는 것처럼 평안도 무조건적입니다. 환경이 나쁘다고 평안하던가요? 환경이 좋다고 평안해지던가요? 돈이 있다고 평안하고 없다고 불안하던가요? 그러면 돈이 없으면 다 괴롭던가요? 이 모든 것들이 관계있는 것 같이 보이는데 관계가 없어요. 그런고로 평안도 관계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그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데 풍랑이 일어나가지고 배가 하늘에 올라갔다가 땅에 떨어집니다. 제자들이 본래 어부 출신들이지만은 '아이고,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라고 이렇게 소란을 떨지만 예수님은 고물에 누워서 평안하게 주무셨습니다. 풍랑속의 고요함. 죽겠다고 떠드는 데도 예수님은 편안했습니다. 이 평안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앞에 놓고도, 십자가를 앞에 놓고 말씀하십니다. "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주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 세상 것과 달라요. 주님의 마음에는 바로 십자가를 몇시간 앞에 놓고도 평안함이 있었어요. 이 절대적 평강,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죽을는지 모릅니다. 로마에 가면 사도바울이 순교당한 그 자리에 조그만 예배당을 지어놓고 그 유적을 모아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은 바울은 로마 시민권이 있기 때문에 법적으로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목을 쳐서 죽였는데 도마 위에다가 목을 이렇게 놓고 도끼로 내려 찍었더라고요. 사도바울은 이렇게 순교합니다. 그런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이 편지를 씁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기뻐하라, 그리하면 주의 평강이 너희를 지킬 것이다. 여러분, 기쁨이 우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보지 마세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주께서 내 죄를 사하신 것과 내게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를 보며, 구속받은 자기 자신에 대한 축제의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이 절대적 기쁨. 세상이 어디로 가느냐고, 그거 너무 심각하게 묻지 마세요. 갈 데로 갈것이니까요. 내 영혼, 구원받은 내 영혼에 대한 축제. 주안에서 기뻐합니다. 그런고로 그는 감옥에 있어서도 그의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러할 때 주의 평강이 함께 합니다. 여러분, 때로 손자, 손녀 사랑합니까? 손자, 손녀들 다 예쁘지요.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 사랑을 많이 받고 지냅니다만은 가끔 섭섭할 때가 있는 거 아세요? 얘들이 아프면은요 꼭 엄마만 찾아요. 다른 때는 할아버지, 할머니 최고라고 하다가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오로지 엄마, 그래요. 우리 영혼은 오로지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리스도와 만나고, 그리스도와 화평하고, 하나님과 화목된 그 관계, 그 기쁨 속에 만이 진정한 평안이 있어요.
나아가서는 '관용하라' 그랬습니다. 이 관용의 덕이라는 것은 이것은 일방적인 것입니다. 이해와 인내와 용서를 넘어서서 상대방이 어떻게 하던 말던 상관이 없습니다. 내 기쁨으로 저를 덮는 것입니다. 내 만족함으로 저를 덮는 것입니다. 내 충만함으로 저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게 관용이올시다. 관용은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즐거우니까 잘해줄 수 밖에요. 그래 내가 농담 겸 진담으로 말씀합니다만은 '주일날은 집에 돌아가서 절대 아이들 나무라지 말라'고. 왜요? 내가 오늘 은혜 받았으니까. 좀 꾸중할만한 일이 있어도 '오늘은 주일이다. 내 마음이 이렇게 기쁜고로 너희들을 다 용서하노라.' 관용입니다. 그리스도 인은 절대적 은혜에 살기 때문에 상대방과 관계가 없습니다. 관용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원수도 사랑하는 겁니다. 내 만족으로 저들을 다 덮어버리고 마는 겁니다.
그리고 세 번째, 바울이 주장하는 평강의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감사하라는 겁니다. 감사함으로 아뢰라. 기도하되, 감사함으로 기도하라. 제 목회생활에서 얻은 경험입니다만은 어떤 아주머니가 참 결혼생활 10년 동안에 고생을 많이 했어요. 남편이 술을 너무 좋아해서 하루도 맑은 정신으로 돌아오는 날이 없어요. 그리고 와서 또 가끔 행패도 해요. 때로 얻어맞기도 해요. 그러면서 이걸 참고 사는데 얼마나 힘들겠어요? 교회에 잘 나와서 봉사하는 그런 여집사님이예요. 그가 하는 간증입니다. 어느날 또 술을 먹고 들어와서 토하고 어지러운데, 다 정리하고 남편을 깨끗한 자리에 누이고, 자기도 자기 위해서 옆에서 잠자리 기도를 하는데 기가 막히더랍니다. '어쩌다가 내 신세가 이 모양이 되었나? 내가 이런 짓하려고 결혼했나? 어찌 내 팔자가 이 모양이냐?' 그리고 "주여, 어찌하여 나는 이 모양 입니까?" 한참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했는데, 이건 푸념이죠. 기도라기 보다는 푸념을 했는데, 성령이 감동하시면서 지난 주일날 목사님의 설교가 생각나더랍니다. '감사함으로 아뢰라.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아뢰라.' "옳지, 오늘은 내가 감사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감사할 일이 없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할 일은 없습니다만은 좌우지간 감사합니다." 일단 감사합니다 라고 말을 했는데 이제 감동이 되는데 들려옵니다. '그래도 과부보다야 낫지 않냐?' 저런 거라도 하나 있는 게 낫지 없는 것보다야. 언제 사람될지 알겠어요? '그래서 감사합니다. 저렇게 술을 많이 먹고 다니는데도 제집 찾아 돌아오는 게 신통하고, 저렇게 허구헌날 술을 마시는데 건강하니 감사하고, 나 예수 믿는 거 방해하지 않으니 감사하고.' 한가지, 두가지 생각하니 감사할 일이 많더랍니다. 이렇게 감사하고 기도하고 있는 동안에 얼굴이 환하게 피었습니다. 남편이 목이 말라서 눈을 떠보니까 히죽히죽 웃고 있잖아요. "술주정뱅이하고 살면서 무엇이 좋아서 웃나?" 그러더랍니다. "아니요. 나는 너무 행복하고 너무 감사해서 웃습니다." "이것 보세요. 이래 감사하고, 이래 감사하고, 이래 감사하고……." 죽 나열해서 설명을 하니까 남편이 가만히 있더니 "걱정하지마, 예수 믿어줄게" 그러더랍니다. 여러분, 감사함으로 아뢰라. 우리가 답답하고 괴로운 거 많아요. 잠깐 멈추세요. 그리고 감사할 것을 찾아보세요. 이리 뒤지고, 저리 뒤져서 감사할 여건을 찾아서 감사함으로 아뢰세요. 감사와 더불어 기도하세요. 평강의 하나님이 그를 지켜주실 겁니다. 마음과 생각, 감성과 지식 지켜주실 거예요. 생각할 수 없는 벅찬 감격으로 평강의 생활을 살아갈 것이에요. 평강은 환경의존적인 것이 아닙니다.
유명한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람을 둘로 나눕니다. 'The Heart of Man'이라고 하는 책에서 말합니다.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 그리고 Biophilia(바이오필리아). Necrophilia는 죽음을 사랑하는 죽음지향적 인간, 또 하나는 Biophilia입니다. 생명을 사랑하는 생명 지향적 인간입니다. 여러분, 모든 것은 죽음으로 지향합니다. 죽음지향으로 생각하면 끝도 없습니다. 이걸 넘어서서 생명지향적으로 살 때, 보세요. 환경이란 역설적입니다. 어려울수록 더 사랑합니다. 환경이 어려울수록 더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환경을 거슬러서 파라독시칼(paradoxical), 역설적으로, 그게 생명이에요.성도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근심과 불안은 내 병일 뿐입니다. 그건 장애입니다. 이제 중생함으로 이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환경을 묻지 마세요. 세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내 마음, 내 영혼 상태의 문제입니다. 평강은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있고, 그리고 그가 내게 주시는 겁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때 그는 어떤 형편에서도 그 평강으로 충만한 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무서운 세상에 삽니다. 깜짝깜짝 놀라는 그런 일들만 보고 듣고 살아갑니다만은 주여 우리의 영혼의 상태를 주님께서 지켜주셔서 오늘도 주의 평강으로 인도하심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모든 일련의 사건을 통하여 주께서 가까워 오심을 알고, 믿고, 문밖에서 두드리는 것을 의식하면서 주의 평강의 평강의 길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주의 사람들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자료 18,185편 ◑ > K자료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계 2:8-11) (0) | 2024.03.28 |
---|---|
첫 사랑을 잃은 인간상! (계 2:1-7) (0) | 2024.03.28 |
향기로운 제물! (빌 4:14-20) (0) | 2024.03.28 |
예배와 설교 (살전 2:9-13) (0) | 2024.03.28 |
말씀은 자유하다! (딤후 2:8-13) (0) | 2024.03.2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