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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예배와 설교 (살전 2:9-13)

by 【고동엽】 2024.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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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와 설교 (살전 2:9-13)


우리는 각각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하여 애쓰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힘쓰고 있습니다만 그 모든 것 중에 결정적인 요소 즉 가장 핵심적인 것이 무엇일까를 저는 늘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바로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다. 그 말씀이 오늘도 너희 안에 역사한다”라고 했습니다. 아주 핵심적인 말입니다. 교회가 뭡니까? 교회는 결코 친교 단체가 아닙니다. 여기는 entertainment 장소도 아닙니다. 또 구제 기관도 아닙니다. 봉사 기관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야 합니다. 흔히 신학적으로 말할 때 이를 카리스마적 관계라고 말합니다. 카리스마적 관계가 성립이 되면 그 교회는 부흥됩니다. 그런데 설교가 여전히 사람의 말로 들리면 그것은 안 됩니다.

제가 어느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더니 장로님 한 분이 만나기를 원해서 시간을 내어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이 조용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목사님, 저희 교회 목사님의 설교가 형편없거든요. 수준 이하입니다. 이러이러해서 마음에 안들어요. 그래서 제가 책을 사다 드렸습니다. 두 번이나 책을 몇 권씩 사다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제가 사다 준 책을 읽었나 안 읽었나 설교를 들으면서 보니까 제가 사다 준 책을 안 읽었습니다. 그러니 우리 목사님 어떻게 하면 좋죠?”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 장로님에게 긴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이분이 너무 멀리 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소감만 말했습니다. “장로님, 큰 병 들었습니다. 이 큰 병 고치지 못하면 장로님 구원까지 문제가 됩니다.”

누구든 하나님 앞에 나가서 예배드릴 때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못하고, 또 들려지지 않으면 끝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공화당입니다. 손뼉이나 몇 번 치다가 돌아오면 뭐 하겠습니까?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과 내가 만나는 예배 관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아시는 대로 우리가 모든 일에 수고하겠지만 수고가 어디로 향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냐” 하는 바른 자세가 필요합니다.

제가 격언 한 마디 알려 드리겠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소신껏 사는 것처럼 무서운 일이 없다.” 어리석은 자가 열심히 하면 뭐합니까? 어리석은 자의 열심은 겁나는 것입니다. 게다가 죽도록 충성하겠다고 하면 더 곤란합니다. 어리석은 자가 열심을 내면 많은 사람을 괴롭힙니다. 제자 훈련 받지 못하고, 바로 깨닫지 못하고 열심내는 것은 반갑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구장이라든가, 권사님이라든가, 집사님들이 심방하는 것을 반가워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심방하려면 훈련을 받고 그 다음에 해야 합니다. 그냥 찾아가서 남의 흉이나 보고 다니는 것은 겁나는 일입니다. 게다가 돌아다니면서 안수기도 하겠다고 그럽니다. 그리고 충성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반갑지 않은 충성입니다. 어리석은 충성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오늘까지 교회 부흥시키느라고 애쓰고, 노력하고, 수고했는데 도대체 내가 무엇을 위해서 수고했느냐는 것입니다. 어느 방향으로 수고했느냐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스운 얘기 하나 하겠습니다. 혹시 운동을 좋아하십니까? 운동을 할 때 열심히 한다고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운동을 하려면 열심히 해야 되고, 훈련을 많이 받아야 되고, 절제해야 합니다. 절제하지 않으면 운동선수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또 인내해야 합니다. 참아야 합니다. 몇 년이고 참고 참고 훈련하고 노력해서 선수가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알아야 될 것은 어리석은 노력은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델을 잘 선택해야 합니다. 좋은 표본을 잡아야 합니다.

저는 운동으로 볼링을 합니다. 제가 목사 볼링으로는 대부입니다. 목사들 볼링대회를 하면 저 보고 “대부님, 돈 좀 주십시오.” 그럽니다. 그러면 제가 돈을 줍니다. 제가 왜 대부가 되었느냐면 목사로는 가장 먼저 볼링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주위에서 말이 많아서 핍박을 받으면서 시작했습니다. 목사들이 볼링하도록 내가 만들어 놓았으니까 대부입니다.

볼링책을 사서 읽으면 첫 페이지에 총론이 나오는데 “이것은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가 만들었다.”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교 목사는 반드시 볼링을 해야 합니다. 스님은 요가를 하고 목사는 볼링을 해야 합니다.

저는 볼링을 한지 11년이 되었습니다. 이 볼링이라는 운동이 좋은 것이 25세 된 사람과 해도 제가 이깁니다. 다른 것은 다 안됩니다. 그런데 볼링에 관한 한 그렇지 않습니다. 나이와 관계가 없습니다. 25세와 함께 해서 이길 수 있는 운동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 교회 부목사들이 아무리 열심히 쳐도 저를 못 이깁니다. 이 분들이 열심히 하면서 나더러 “목사님, 제가 아무리 해도 목사님을 이길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묻습니다. 이분들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저들 못 이기는 것은 기초를 잘못 배웠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잘 배워야 합니다.

요즘 또 우리 부목사들이 볼링 때문에 쇼크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몇 달 전에 미국에서 새로 온 목사가 있는데 새로 와가지고 우리 교회 부목사를 해야 하는데 안수를 못 받았습니다. 박사 학위는 받았는데 안수를 못 받아가지고 목사가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안수를 받아가지고 와야지 아무리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해도 전도사로 오면 되냐?”고 해서 이 사람이 3개월 동안 놀았습니다. 그 동안에 이 사람이 볼링을 배웠습니다. 정식으로 돈을 내고 교수한테 배웠습니다. 그리고 부임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 7, 8년 된 사람보다 이 사람이 월등하게 잘 합니다. 그러니까 부목사들이 충격을 받아가지고 “이것 어떻게 된 것이냐? 온지 며칠 되지 않은 사람도 이렇게 잘 하는데 우리는 몇 년이나 했는데 왜 이 모양이냐?” 그래서 제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회개하라”라고 했습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가를 알아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구잡이로 했기 때문입니다. 뭐든지 기본부터 배워야 합니다. 첫째, 교과서부터 읽어야 됩니다. 책을 사서 읽고, 교수한테 훈련을 받고, 더 잘 하려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하는 것을 봐야 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 중에 오지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퍼펙트 게임을 26번이나 했습니다. 그는 제일 잘 하는 사람의 비디오를 구해가지고 그 사람이 경기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을 자꾸 보고 그 사람을 모방합니다. 이것을 모델라이징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목사님들이 지금까지 목회하느라고 애썼는데 잘 안 됩니다. 그러면 모델을 바꾸어야 됩니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회개하고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냥 열심만 낼 생각하지 말고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목회가 뭐냐, 교회가 뭐냐, 설교가 뭐냐를 다시 물어야 합니다.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타당성에 젖어 있어서 고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지금 부목사들 몇 명이 정말로 교수를 받습니다. 그런데 잘 안됩니다. 전혀 볼링을 안 치던 사람이 훈련받으면 잘 되는데 이미 몇 년을 한 사람이 이제 훈련받으려고 하니까 잘 안 됩니다. 그러니까 이미 많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회개하려면 왕복 거리가 필요합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아니면 안 됩니다.

모델라이징이라는 것은 남이 다 해놓은 것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쉽습니까? 그 사람은 저거 하나 익히는데 30년이 걸렸습니다. 나는 그 시간을 그대로 배워나가니까 50일만 배워도 30년을 단축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남이 성공한 것, 잘 해놓은 것을 내가 그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 모델라이징에는 행동 촉진 효과가 있습니다. 남이 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은 쉽습니다.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그냥 따라서 흉내만 내면 됩니다. 좋은 표본을 따라가면 됩니다.

또 결과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거 이렇게 하면 될까 안 될까”를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남이 해서 되었으니까 걱정할 것 없습니다. 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방법으로 되었으니까 그대로 믿고 따라가면 됩니다. 이것이 모델라이징의 비결입니다.

그러면 이 표본을 따라갈 때 첫째, 좋은 모델을 택해야 됩니다. 둘째, 내가 목회하는 지역과 사회적 여건, 문화적 여건, 모든 것이 비슷해야 합니다. 유사성이 있는 모델을 택해야 합니다.

이제는 골프를 치는 사람이라고 가정을 합시다. 골프를 치는데 키가 큰 사람이 국제적인 선수입니다. 이 사람을 키가 작은 내가 모델로 삼으면 안 됩니다. 키 큰 사람은 키 큰 사람에게 맡기고 키 작은 사람의 것을 내가 배워야 합니다. 나와 거리가 가까운, 문화적으로, 체질적으로 비슷한 것을 따라가야 합니다.

셋째는 모델을 자주 바꾸면 안 됩니다. 오늘은 이 사람 따라 가다가 내일은 저 사람 따라가다가 나중에는 마구 섞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잘 연구하고, 평가를 해서 ‘아, 나는 이 모델이 좋겠다. 내 마음에 들고, 여러 가지로 이 모델이 맞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한 번 딱 정한 다음에는 그 목회 모델을 열심히 따라가야 합니다. 모든 것을 그 쪽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성공합니다.

영화를 보십시오. 저는 서부극을 좋아합니다. 서부극을 보면 총을 쏘고, 말에서 떨어지고,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집니다. 제가 서부극을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무리 총을 쏘아도 주연 배우는 안 죽습니다. 각본에 안 죽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나쁜 사람이 죽고 착한 사람이 이깁니다. 그래서 좋아합니다. 마지막 오메가 포인트는 결정되어 있습니다. 그런 고로 안심하고 좋은 모델을 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설교를 하는데 예배와 설교의 관계는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예배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을 예배라고 합니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서 그 영이 이성을 지배하고 이 이성이 몸을 지배합니다. 이렇게 될 때 건강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격적 구원이요, 사람이 죽었을 때 하나님 앞으로 가면 종말적 구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구원받은 사람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영이 새로워졌습니다. 창세기 6장 3절에 보면 “그들이 육체가 되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떠나고 고깃덩어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홍수를 통해서 다 쓸어버리는데 알고 보면 산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는 죽은 사람을 쓸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육체가 꿈틀거리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동물입니다. 더구나 사람들이 얼마나 타락했습니까? 너무 너무 타락해서 동물만도 못 합니다.

요즘 에이즈라는 후천성 면역 결핍증은 아주 더러운 병입니다. 이것은 정상적 관계로부터 생긴 병이 아닙니다. 동물과의 관계, 그것도 동성끼리 소위 호모 타입이라고 해서 동물도 하지 않는 더러운 행동을 하는 데서 생기는 병입니다. 우리가 나쁜 사람들을 지칭할 때 “개 같은 놈”하는데 개가 그 말을 들으면 “말 조심하오”할 것입니다. “우리는 깨끗하오. 당신들이 한심하지”하면서 저희들끼리 “야, 사람 같은 놈아”할 것입니다. 사람이 형편없이 더러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해서 썩어 문드러져 나가는 것입니다. 지금 살려보겠다고 열심히 연구하지만 에이즈 환자가 죽어가는 것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온몸이 뚝뚝 떨어져 나갑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 맺으며 사는 영적 존재입니다. 이것이 영혼입니다. 그 다음에 이 영과 우리의 이성이 만납니다. 영은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영적 작용이 우리 이성에 전해질 때 이성이 구원을 받습니다. 깨끗해집니다.

이성이라는 말을 할 때 우리는 종종 잘못 생각을 합니다. 옛날에 파스칼은 “이성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여기서 이성은 더러워진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맑은 이성이 되면 그 이성에 지배를 받는 육체가 건강해집니다.

사람은 먹고 삽니다. 먹어야 한다는 것은 동물성입니다. 여기 음식이 하나 있는데 이것을 먹을까 말까 망설입니다. 먹어서 해가 되는 음식입니다. 그런데 입맛이 당깁니다. 이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먹어서 좋은 음식만 좋아합니다. 그저 먹고 싶은 대로 먹으면 됩니다. 신 것이 먹고 싶으면 신 것을 먹고, 단 것이 먹고 싶으면 단 것을 먹고, 그냥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면 됩니다. 그런데 병든 사람은 먹어서 나쁜 것만 좋아합니다. 그쪽으로만 입맛이 당기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완전히 구원받은 깨끗한 이성의 지배를 받고 있는 육체요, 본능이라고 하면 여자를 보아도 아무 여자한테나 발동이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기 부인은 예쁘지 않고 남의 부인만 자꾸 예쁘게 보입니다. 이것도 회개해야 합니다. 이것은 뭐가 잘못 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보면 아무렇지 않고 그냥 감상만 합니다. “예쁘다. 아름답다. 하나님이 참 묘하게 만들었다.” 그것까지만 생각하고 그 이상은 생각이 안 나야 합니다. 그런데 예쁜 여자들을 많이 보고 집에 돌아와서 아내에게 “왜 하필이면 저렇게 생겼나”하면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식욕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나 보십시오. 내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나 보십시오. 자기 아내가 예쁘게 보여야 합니다.

우리 교인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이 예수 믿은 지는 오래 되었지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너무 예뻐서 제가 그 얘기를 가끔 인용합니다. “목사님, 제가 얼마 전부터 은혜를 받았거든요. 그랬더니 참 이상하게 남편의 얼굴이 예뻐지기 시작하는데 정신이 없습니다.”

결혼 생활 20년이나 되었는데 뭐가 예쁘겠습니까? 그런데 전에는 그렇게 밉고, 술 냄새도 나고, 가끔 가다가 늦게 들어오면 짜증도 나고 그랬는데 지금은 무작정 예뻐지기 시작하는데 말도 못 한답니다.

이분이 하나님께 이런 불평을 했습니다. “하나님, 왜 잠을 잘 때 눈을 감고 자게 만들었습니까? 보이는 저 예쁜 얼굴 보면서 자게 만들지.”

남편이 정말 예쁘게 보이는 것입니다. 아이들도 예쁘고 먹는 것도 맛있고, 꽃도 예쁘고 모든 것이 아름다운데 견딜 수가 없답니다. 남편에게 “난 행복해요. 나는 당신 때문에 행복해요. 아이들 때문에 행복해요”하니까 남편도 예수를 믿습니다.

사랑한답시고 한다는 얘기가 “하필이면 이런 것이 걸려가지고 말썽이냐.”하면서 십자가를 진다고 불평합니다. 결혼 생활을 십자가 진다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이 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구원받게 될 때 이성이 맑아집니다. 그리고 맑은 이성이 육체를 다스리게 될 때 그 육체가 아주 원활합니다. 요사이 말로 엔돌핀이 무궁무진하게 생깁니다.

목사는 이성이 구원받은 자라야 합니다. 이 말은 영이 구원을 받고 이성이 구원받았을 때 하나님의 세계가 합리적으로 이해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성경에 나오는 얘기 하나 하나가 “아, 맞다. 과학적이다. 너무너무 예술적이다. 기가 막히다. 진선미가 여기 극치를 이루고 있다”라고 느껴지고 아멘 하게 되거든 구원받은 줄 알고, 그렇지 않고 성경을 읽다가 “죽은 자가 살아? 말도 안돼. 홍해를 어떻게 건너가? 이것이 도대체 무슨 소리야. 그냥 믿어 두어야지. 믿자, 그냥.” 이렇게 되면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증거입니다. 창조론도 있고 진화론도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 받은 심령으로 볼 때는 창조론이 100% 믿어지는 것입니다.

어느 구약학 교수가 이스라엘에서 오래 생활한 장로님을 데리고 홍해를 구경하러 갔습니다. 홍해는 전설에 전해지는 대로 건너가는 방법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바다고 하나는 갈대밭입니다. 두 학설이 있다고 설명하니까 구약학 교수가 하는 말이 “맞다. 맞다. 갈대밭으로 건너갔지 어떻게 바다로 건너갔겠나?”라고 했습니다. 그때 장로님이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당신 한국에 가서도 그렇게 가르칩니까?” “그렇게 가르치면 쫓겨나죠.” “그러면 당신은 위선자요. 이제부터는 내가 당신을 목사라고 부르지 않겠소.”

이런 학설을 믿는 사람이 아이들을 앞에 놓고 “홍해를 건너갔다고 하지만 넘실거리는 바다를 건너간 것이 아니고 갈대밭으로 건너갔다더라”하고 말하니까 어린아이가 하는 말이 “오. 하나님 놀랍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물에 애굽 군대가 빠져 죽었나요? 기적입니다”하더랍니다.

성경을 전적으로 믿어야 이것이 전부 맞아 들어가는 것이지 이것 저것 하나씩 쓸데 없는 소리만 늘어놓으면 앞뒤가 맞아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목사쯤 되었으면 성경이나 자연, 모든 세계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합리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은 아무리 읽어도 과학 서적이요. 진선미가 꽉 찼고 참으로 완전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다시 운동얘기를 하겠습니다. 사람이 기름을 먹으면 이것을 소화시키는 기관은 근육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근육을 내버려두면 안 됩니다. 근육이 풀어지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운동을 자꾸 해서 근육이 풀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저는 평생 아령을 했습니다. 아령을 가지고 하든, 기계 체조를 하든, 국민체조를 하든 아침, 저녁으로 운동을 해서 근육을 튼튼하게 해야 합니다. 근육이 움직이면서 기름을 태워 힘을 내게 합니다. 근육이 없으면 콜레스테롤 수치라 올라갑니다. 쉽게 말하면 피가 걸죽해지는 것입니다. 피가 시궁창 물처럼 걸죽해지니까 잘 흐르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까 운동을 해야 기름을 다 태워버려서 피가 맑아집니다. 맑은 피가 흘러야 눈도 밝고, 정신도 깨끗해집니다.

이렇게 근육이 기름을 태우니까 근육이 많은 사람은 기름덩어리를 먹어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가만히 누워 있는 사람, 근육이 하나도 없이 다 풀어져서 말랑말랑해진 사람은 흰죽만 먹어도 콜레스테롤 수치가 올라갑니다. 그러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근육은 분명히 운동을 많이 해서 보존되어야겠는데 근육을 하나 만드는 데는 40일이 걸립니다.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시간 운동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40일 동안 운동을 해야 근육이 형성됩니다. 그런데 이 근육을 계속 보존하려면 끊임없이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근육이 가지는 기억력이 72시간입니다. 72시간 전에 또 해야지 한 주일에 한 번 하고 되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한 주일에 세 번 이상 해야 합니다. 적어도 일 주일에 세 번씩 한 시간 이상은 운동을 해야 이를 보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근육이 풀어지는 데는 얼마나 걸리냐 하면 두 주일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외과 의사가 증명합니다. 단단한 살이 부러져서 깁스를 해놓고 보름 있다가 열어보면 말랑말랑한 살이 된다고 합니다.

이제 예배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충만해서 영이 이성을 지배하고 이성이 몸을 지배하고 이렇게 연결된 온전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인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공급받지 않으면 영이 쇠약해집니다. 영이 희미해집니다. 그래서 통계적으로 보면 누구든지 넉 달만 교회에 안 나오면 그 사람의 의식 속에 신앙이 다 없어집니다. 안 믿는 사람이 되버리고 맙니다. 그러니까 계속적으로 말씀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누가 설교를 하든 말든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일 주일에 한 번은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과 만나는 예배를 드려야만 하나님의 형상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예배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배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저는 결혼식에 가서 주례를 할 때 다른 말도 많이 하지만 이런 말을 합니다. “주일을 지켜라. 부부싸움을 한 날도 교회에 나와라. 그래서 예배하는 동안에 누가 잘 했느냐 못 했느냐 할 것 없다. 다 삭아지고 다시 시작하는 거다. 이것이 가정생활이다. 너 사랑하고 나 사랑하고, I love you, you love me. 아무리 해봐야 소용없다. 사람의 마음 돌아서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 마음을 제 마음대로 하는 자가 누가 있더냐. 그러므로 예배하라. 주일날이면 꼭 교회에 나와서 둘이 앉아서 예배드려라. 그러면 너희 가정은 꼭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확실한 진리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가지고 광야에 살게 하지 않았습니까? 광야에 살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의무가 무엇입니까?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철두철미하게 성막 중심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천막을 많이 쳐놓고 가운데에 성막을 쳐놓고 그곳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두 번째는 율법 중심입니다. 하나님이 계속 율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안식일을 지키고 모든 율법을 지켜나가도록 했습니다. 그것을 안식일마다 가르쳤습니다. 그래야 이것을 지켜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모세 중심입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뢰와 같이 들려주니까 “안 되겠습니다. 이러다가는 다 죽겠습니다. 모세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는 모세를 통해서 듣겠습니다”하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칭찬을 하시는데 “너희가 이 같은 경건을 지속하면 영원히 복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요즘은 기도 좀 한다는 사람들이 직접 듣겠다고 하다가 이상한 말을 합니다. 직통한다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듣겠습니다”하는 경건, 그 경건을 하나님께서 칭찬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배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예배는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신학적으로 말하면 문화적 언어와 병행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가진 문화적 상황과 양상은 항상 같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양과 소를 잡아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이 예배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모여서 성경 말씀을 듣는 것을 통해 예배드렸습니다. 제사를 통해 예배하고, 말씀을 듣는 것을 통해 예배하고, 하나님과 만나서 기도하면서 예배하고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예배하는 관계를 이루어 갔습니다.

특별히 예배는 설교와 함께 이루어지고 설교가 예배화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로서의 설교가 되어야 합니다.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 신교의 특징입니다. 가톨릭은 상을 통해서 예배합니다. 상 앞에 가서 절을 하고, 엎드려서 기도하고, 만지기도 하면서 예배합니다. 그리스 정교회에는 그림이 많습니다. 많은 그림들, 성자의 그림, 예수님의 그림, 역사적으로 몇 백 년씩 된 그림을 놓고 그 그림 앞에 가서 예배를 드립니다.

세계 실천 신학자 대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각 나라에서 90명의 목회자들이 저희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저희 교회를 보고 어떤 목사님이 저한테 1시간만 인터뷰하자고 해서 인터뷰했는데 좋은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교회 보니까 참 부럽습니다. 전부 젊은이요, 남자가 많고 예배당에 사람들이 꽉 찼습니다. 나 이런 교회에서 한 번 설교해보고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미국 교회는 노인들만 나와서 할머니 30명, 할아버지 2명, 요단강 훤히 바라보는 사람들이 나와서 꾸벅꾸벅 졸고 앉아 있는데 여기에 대고 무슨 설교할 말이 없고 설교를 준비할 마음도 없답니다. 그리고 준비할 것도 없답니다. “며칠 후 며칠 후” 찬송만 부르면 된답니다. 이러니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설교할 맛이 없어서 못하겠답니다. 한국 목사들은 목사중에서는 최고로 행복한 목사들입니다. 세계적으로 보면 한국 목사는 가장 특별한 권위를 누리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설교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설교를 해보면 고등학교 정도는 나와야 얘기가 됩니다. 초등학교 나온 사람 가지고는 설교하기가 힘듭니다.

제가 초등학교도 못 나온 권사님을 한 분 아는데 인천에서 목회 할 때 하루도 안 빼놓고 같이 심방을 다니던 분이었습니다. 이 분은 한글을 모릅니다. 이분은 한평생을 믿고 권사 노릇을 했는데도 제가 없을 때 저희 집에 왔다가는 점심을 대접하면 먹고 가면서 “나 기도할란다”하시면서 뭐라고 기도하는 줄 아세요? “예수님은 만민을 위해서 죽으시고 나는 인천 사람을 위해 죽을 겁니다”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저희 집사람이 그럽니다. “한평생 예수 믿고 저게 무슨 소리입니까?”

그러니까 성경을 얼마나 읽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만 읽는다고 성경을 압니까? 일반 상식이 있어야 성경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만 읽어봐야 무슨 소용 있습니까? 일반 상식이 많아야 성경도 알아보는 것입니다.

이북에서 있었던 일인데 어떤 할머니가 교회에 왔다가 집에 가서 자기 며느리를 보고 하는 말이 “얘 아가, 떡 좀 해다가 목사님 좀 가져다 드려라.”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며느리가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까 “오늘 목사님이 떡 소리를 많이 하더라.” 그러더랍니다. “무슨 적 무슨 적”하고 설교를 하니까 “적” 소리를 다 “떡” 소리로 알아들은 것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예수를 안 믿고 아들이 먼저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아버지를 교회로 인도해서 아버지가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한 번은 식사를 하기 전에 아버지가 하는 말이 “야, 이제 나도 예수 믿으니까 내가 좀 기도하자꾸나”하고 말하니까 아들이 “그러시죠”라고 했습니다. 이 아버지가 기도하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 형님이시여”그러더랍니다. 그래서 아들이 기가 막혀서 “하나님 형님이 뭡니까?”하고 물으니까 “야 이놈아, 너는 족보도 모르냐? 네게 아버지면 내게는 형님이지.” 그러더랍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목회하던 분들은 참 힘들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이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교를 했으니까요. 그래서 설교의 역사를 보면 오늘은 오늘대로 문제가 있지만 옛날에는 더 힘들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목회하면서도 설명이 잘 안 먹히고 해석이 문제가 되는데 하물며 옛날에는 오죽했겠습니까?

저희 교회에 가면 친교실에 5백 년 전에 있던 그림을 복사해서 가져다 놓은 것이 있는데 예수님의 생애를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 그림은 5백 년 전의 그림입니다. 추상화로 그린 그림인데 뭐냐하면 옛날에는 교인들을 데려다놓고 그림을 놓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구유에 태어나는 것입니다”하고 다음 그림으로 옮겨서 “예수님이 세례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산상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병자를 고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는 것입니다. 부활하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시고 성령이 임하셨습니다”하고 설명합니다.

그림 중에 노랗게 광채가 나는 커다란 사람이 있고 그 옆에 그것보다 조그마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같이 손목을 잡고 걸어갑니다. 그 그림을 설명할 때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하고 설명합니다. “아멘”하고 예배가 끝납니다. 주기도하고 돌아가면 됩니다. 옛날에는 그렇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 때 한 것입니다. 종교개혁 이후에도 이렇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성지순례할 때 애굽에 들릅니다. 애굽은 아랍 모슬렘이 점령하고 있었지만 본래 애굽은 기독교가 크게 많이 왕성했던 곳입니다. 거기가 다 점령당하고 기독교는 1/10만이 남았습니다. 한 쪽에 모여 삽니다. 거기에 가서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면 우리처럼 주일날 11시에 예배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2천년 동안 종교개혁하지 아니한 교회입니다. 이것은 가톨릭도 아닙니다. 2천 년 동안 그냥 서 있는 기독교회인데 거기에 가면 사람들이 와서 엎드려서 기도 한참 하다가 성자 유물 앞에 가서 유물을 만지는데 한 번 만지고 입 맞추고 한 번 만지고 입 맞추고 “아멘”하고 돌아갑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예배는 말을 통해서 설명을 듣지만 옛날에는 그 말이 통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징으로 예배드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다가 종교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보면 그 동안 그렇게 내려온 데에도 상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종교개혁과 문예부흥 이후에는 모든 사람들의 지성이 발달하면서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시대에 도래하였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방편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런데 신교에서는 은혜의 방편을 설교, 성례, 봉사 이렇게 세 가지로 말합니다.

그러면 설교가 가지는 예배의 성격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설교는 절대로 강의가 아닙니다. 이것이 강의화될 때 교회는 죽습니다. 이것은 어떤 것을 설명하는 윤리 강연도 아니고 정치 강연도 아닙니다. 이것을 강연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설교는 곧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한 방편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에게 소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배의 모든 주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을 설명하고 그 안에서 내 영이 새로워지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1. 이야기식 설교

 


역사적으로 설교의 방법을 더듬어 올라가보면 옛날에는 이야기식 설교가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 중에 대표적인 것이 탈무드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건을 놓고 그 진리를 설명할 때 이야기를 통해서 설명합니다.

텔레비전 광고 중에 이런 광고가 있습니다. 어떤 아이가 “나는 할아버지에게 좋은 것을 배웠어요. 할아버지가 말씀하시는데 할아버지와 나는 일촌이래요. 그런데 아버지와 엄마는 무촌이래요. 너무 사이가 가까워서 촌수가 없대요. 그리고 노사도 무촌입니다.”하고 말합니다. 이것은 노사 관계를 말하려는 의도입니다. 노사를 말하려고 하는데 할아버지와 만나서 족보 얘기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설교입니다. 중요한 설교 방법입니다.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의 사실을 통해서, 역사를 통해서 설명을 해갑니다. 설명을 해가면서 마지막으로 나에게 해당되는 얘기를 합니다. 탈무드라는 것은 전부가 이야기입니다.

요사이 미국 교회가 부흥이 안 되는 것 같아도 아직도 부흥되는 교회가 많습니다. 제 아들이 훌러 신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언젠가 저에게 “아버지, 요새 교수님들이 그러는데 세계적으로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는 목사님들의 특징이 몇 가지가 있대요”라고 하기에 “야, 그것 좀 배우자”했더니 제 아들이 교수님들이 한 얘기를 저한테 해 주었습니다.

첫째는 ‘story teller’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매력적으로 이야기를 잘 해야 됩니다. 이야기 공부를 하십시오. 이야기를 창작도 해야 되고 이야기 하는 화법을 알아야 됩니다. 이야기를 잘 해야 됩니다. 이야기를 잘 해서 이야기를 통해서 매혹적으로 사람을 끌고 나가야 됩니다. 예수님도 비유로 말씀 하셨습니다. 그 비유가 이야기입니다.

둘째는 음악을 잘 한답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감성 시대니까요. 지금은 IQ 시대에서 EQ 시대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감성이 중요합니다. 판단하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감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감성을 이끌고 나가려면 노래를 잘 해야 합니다.

셋째는 모두 미남이랍니다. 비디오시대이기 때문입니다. 필름으로 찍어가지고 볼 때 소 도둑놈처럼 보이면 은혜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쳐다볼 수 있을 만큼은 되어야 됩니다. 인상이 혐오감이 느껴질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강대상에서 소리를 질러서는 안 됩니다. 화평하게, 쳐다볼 재미가 있게 하십시오. 그래야 그것이 은혜가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설교자는 이야기를 잘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저는 신학생들이 우리 교회 파트 타임 전도사로 오면 초등학교 3, 4학년을 맡깁니다. 이 아이들한테 설교를 못 하면 끝나는 줄 알아야 합니다.

샌프랜시스코에 있는 라지오라는 신학 교수는 세계적인 조직 신학자인데도 교회 봉사할 때는 초등학교 3, 4학년을 가르칩니다. 왜 그러냐 했더니 “아이들이 못 알아듣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아이들이 알아듣게 복음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는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고 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거창하게 써가지고 어려운 말로 실존적으로, 철학적으로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쉽게 설교해야 합니다. 아주 쉽게 풀어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전국에서 제일 지식이 높은 사람들을 놓고 시무하고 있지만 어렵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아주 쉽게 얘기합니다. 쉽게 얘기해서 마음속에 쏙 들어가게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story teller’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탈무드 얘기하듯이 매혹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는, 마치 어린아이들이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꼼짝도 안 하고 듣는 것처럼 성도들에게 얘기해야 합니다.

옛날 안성진 목사 같은 분은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신학생 때 이 분을 무척 부러워했습니다. 이분은 얼마나 설교를 잘하는지 유년 주일학생들 5백 명을 앉혀놓고 1시간 반 동안 설교를 하는데 아이들이 꼼짝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분 흉내를 한번 내보려고 다른 교회에 가서 해 봤는데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습니다.

옛날에는 이렇게 탈무드를 비롯해서 모든 것이 이야기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야기에 담아서 설명을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어가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감성적이면서도 지성적이고 그 속에 무궁무진한 지혜가 담겨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머리가 좋아야 가능합니다.

 


2. 철학으로서의 설교

 


추상적 우주 원리와 이치로 설명합니다. 변증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교부시대로부터 중세기로 오면서 이루어졌습니다만 실제로는 큰 열매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 동안에 기독교가 방황하게 됩니다. 암흑시대로 치닫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이 방법은 사용되고 있습니다. 지성인 사회에 있어서는 논리적, 철학적, 추상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사람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3. 계율적 설교

 


이것은 증명적이요,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증명적입니다. 이것은 설명이 없습니다.

새 번역 성경에서는 신명기를 신명기라고 하지 않고 ‘모세의 설교’라고 합니다. 신명기는 모세의 마지막 설교입니다. 모세가 세상 떠나기 전에 백성들을 앞에 놓고 설교한 것입니다. “너희는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렇게 하라”하며 결론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모세오경의 결론이 신명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사람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설교 중에도 반드시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말은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을 설명하되 하나님의 권세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명해야 합니다.

 


4. 선포적 설교

 


초대교회에 와서 있었던 선포적 설교입니다. 초대교회 설교는 베드로, 요한, 바울 할 것 없이 성경을 인용합니다. “구약에 말하기를, 요엘서에 말하기를,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해서 전부 인용을 합니다. 그리고 선포합니다. 설교 중에는 다른 이야기도 많지만 반드시 선포적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대표적인 선포의 설교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의 설교입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 설교의 시작을 보십시오. 언제든지 세상 얘기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성경이 말합니다”하고 결론을 내립니다.

 


5. 강해 설교

 


이미 설교된 성경을 강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 안에 있는 이미 설교된 내용을 가지고 설명하는데 무슨 설명을 하느냐하면 옛날에 이 성경이 기록될 때 무슨 뜻이었나는 것을 밝힙니다. 그 원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본래의 의미가 뭐냐를 놓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할 때 뜻이 뭡니까?” 그 말입니다. 저는 늘 얘기합니다만 설교를 잘 하고 못 하고는 목사가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느냐 못 듣느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오늘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들어야 합니다. 듣고 전해야 하는데 들은 바가 없으면 할 말도 없습니다. 이래서 설교가 어려워집니다.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강해가 왜 필요합니까? 문화적인 의상을 벗고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렸다. 왜 하필이면 양이냐, 또 잡을 때는 어떻게 잡느냐, 왜 잡았느냐, 제사는 어떤 모양으로 드리느냐” 그러면 “그것은 이러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라고 대답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그 당시에 있었던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 문화를 설명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이 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열 처녀 비유만 하더라도 무슨 결혼식에 처녀가 열 명이나 됩니까? 우리 문화와는 다릅니다. 그 당시에 있었던 풍속을 잘 알아가지고 “그 당시에 결혼식은 이렇게 이렇게 이루어 졌습니다. 그런데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그런고로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이것입니다.” 이런 설명이 있어야 합니다. 설명이 없이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교인들이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은 고맙지만 설명 없이 읽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러다 보면 엉뚱한 얘기가 될 때가 많습니다.

옛날에 어떤 장로님이 “예수님께서 개고기를 참 좋아했던가봐.” 그랬답니다. 여기에서는 ‘개’라고 그러지만 북한에서는 ‘가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가이사랴 빌립보’를 “가이 서러 빌립보까지 갔다”는 말로 해석을 했습니다. 이런 설교를 장로님이 했습니다. 또 “빌라도의 성이 ‘오’가인가 봐.” 그랬답니다. ‘본디오 빌라도’니까요. 해석을 바로 하지 않으면 본뜻이 도망가 버립니다. 목사는 그것 제대로 해석해 주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 자신이 성경을 읽으면서 히브리 문화, 헬라 문화, 로마 문화에 덮여 있는 것을 거둬버리면서 속에 있는 알맹이, 즉 진수를 만나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먼저 들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이것을 다시 가지고 나와서 오늘 우리의 문화와 언어로 표현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어졌다”는 말을 요새말로 말하면 “믿음이 부도났다”라고 그러면 잘 알아듣습니다. 또 ‘구원’이라는 말을 ‘자유’라는 말로 풀이합니다. “죄로부터 구원받아야 됩니다.” 그러면 ‘구원’은 우리 교회에서만 쓰이는 말이거든요. 일반적으로는 모릅니다. ‘구속’이라는 말은 듣도 보지도 못한 말입니다. 어려운 말입니다. 해석이 필요합니다.

얼마 전에 지식이 많은 분인데 나이가 60이 넘어서 예수를 믿어 가지고 자기 말로 급하게 성적을 좀 올려야 되겠기에 영어 성경, 독일어 성경, 우리 성경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이분이 한 번은 만났더니 그래요. “목사님, 한 가지 물어봅시다. 구약 성경에 보니까 긍휼이라는 말이 참 많은데 영어 성경에는 ‘Love’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사랑’이라고 하지 ‘긍휼’이라고 해가지고 복잡하게 만듭니까?” 그래서 제가 앉아서 설명을 했습니다. “사랑도 사랑 나름인데 할아버지가 손자를 사랑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 간에 하는 사랑과 같습니까?” “같지 않지요. 다르지요.”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긍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적인 표현은 동양적이라서 구분했습니다. 위에서 밑으로 내려오는 사랑을 긍휼이라고 하고 대등하게 서로 사랑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긍휼이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아, 그 뜻이 참으로 깊고 오묘하군요.”

이래서 설명이 꼭 필요합니다. 설명해야 본뜻에 도달하기 때문입니다. 설명 없이는 본뜻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하나 예를 들어봅시다. 히브리 사람들은 가정교육에 있어서 아버지는 엄하고, 율법의 상징이요, 어머니는 자애로워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자녀를 때렸습니다. 그러면 때린 자는 더 설명하면 안 됩니다. 때리고 설명해 봤자 들어가지 않습니다. 맞아서 기분 나쁜데 무슨 설명이 들어갑니까? “미안하니까 사과하나보다.” 그러지 안 됩니다. 때리고 나가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설명을 합니다. 자녀를 붙들고 “너희 아버지가 너를 때릴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픈 줄 아느냐? 네가 잠잘 때 아버지가 네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울더라. 아버지는 너를 사랑하는 거야. 그러나 안 때릴 수가 없어서 때리는 것이다.” 이 설명이 있어야 “맞다 맞다”하는 소리가 나옵니다.

우리 아버지는 저를 그렇게 많이 때렸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설명도 없습니다. 때리고는 나가버립니다. 그러면 우리 어머니가 이것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특별히 이 말은 기가 막힌 말입니다. “네 상처난 것을 아버지가 어루만지면서 울더라.” 이 말을 듣고 아버지를 보면 아버지가 훌륭하게 보입니다. 이것이 목사입니다. 이것이 설교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이야기, 이것을 우리가 충분히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사랑이고, 저것도 하나님의 사랑이고, 여기에도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저기에도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이것을 우리가 잘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강해입니다. 이것을 잘 설명하면 그 본래의 뜻이 내게 쏙 들어옵니다. 이것이 목사의 책임입니다. 그러니까 목사의 설명을 잘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서 교인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고 못 만날 수도 있고 예배할 수도 있고 예배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 예배가 없으면 그 영혼은 죽습니다. 얼마나 중요합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의 책임입니다.

 


6. 예배로서의 설교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강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학술적으로 말하면 “It's not institute.”입니다. 제가 여기 저기 다니면서 강의할 때 이 이야기를 제일 많이 강조합니다. 설교는 절대로 ‘institute’화 하면 안 됩니다.

옛날에 외국에서 그런 일이 많았습니다. 저는 유럽 교회에 대해서 할 말이 많습니다. 요새는 한국 교회가 이만큼 부흥되고 건전하다고 해서 외국에서 많이 찾아옵니다. 심지어 외국에서 여기까지 전화를 걸고 시간 약속을 하고 찾아와서 인터뷰를 하고 갑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왜 답답해 합니까? “교회가 자꾸 줄어드는데, 회생할 길이 없는데 어떻게 하면 되느냐?” 그럽니다. “그 동안은 무엇을 생각했는고 하니 한국 교회는 한국 사람들이 가난하니까 그런다. 저러다가 GNP 1만 달러만 넘어가면 교회가 부흥이 안 될 것이다. 저들도 우리와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그랬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저희 교회로 말하면 GNP가 3만 달러가 넘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부흥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에 공부하러 많이들 옵니다. 그때마다 제가 꼭 핵심적으로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배당을 강의실로 만들지 말고 설교를 ‘institute’화하지 말아라. 당신들이 ‘institutional church’라고 하면서부터 교회를 망친 것이다.” ‘institutional church’ 이것은 ‘강해’하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것입니다.

제가 가끔 신학대학교 졸업생들한테서 그런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목사님, 저는 졸업한 다음에 성경공부를 잘 해서 교회를 부흥시키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악수하면서 “조금 더 공부해라.”그럽니다. 자꾸 공부시키면 머리만 커져서 점점 어려워집니다. 성경공부 하니까 하는 것이지 자꾸만 봐가지고 와서 질문하면 대답하겠습니까? 큰일입니다. 성경공부 많이 한 사람일수록 잘못하면 교회에 말썽을 일으킵니다. 공부도 조심해야 됩니다. 예배 없는 공부는 반갑지 않습니다. 지적으로만 발달하기 때문에 비판 능력만 높아집니다. 그래서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이 교회에서는 말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만남의 예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이런 강의나 지적 방법을 떠나서 영적으로 이루어져야 되는데 여기에서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한다고 하면 ‘영’이라는 말을 잘못 해석해가지고 감성적으로 해버립니다. 그래서 예배가 어느 사이에 “entertainment”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슬프게 생각합니다. 예배는 오락이 아닙니다. 노래방이 아닙니다. 교회를 노래방처럼 만들지 마십시오. 그러는 동안에 어느 사이에 벌써 영적으로 떠났습니다. 공허해졌습니다. 그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는 바른 체험을 하지 못합니다. 예배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훌륭한 예배가 되지 않습니다. 가슴만 들떠가지고 손뼉 몇 번 치다가 돌아가 버립니다. 열매가 맺히지를 않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느니라 그 말씀이 오늘도 역사하느니라”하는데 말씀이 역사하지를 않습니다. 사람이 달라지고, 성격이 달라지고, 성품이 달라지고, 생활이 달라져야 되는데 그런 열매가 맺히지를 않습니다. 열매가 있나 없나 그것을 자세히 살펴 보십시오.

예배를 오락화해서는 안 됩니다. 감정으로 치달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적으로 기울어져도 안 되고 감정으로 치달아서도 안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만나는 영적 교제가 아주 바르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몇 가지 생각할 것은 카리스마적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설교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하는 사람 스스로가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라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시간 자신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고 있다는 인식을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고넬료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 천사를 통해 말씀하셔서 베드로를 불러옵니다. 베드로는 어디까지나 갈릴리 어부였는데 그 베드로 앞에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가 그 친구들과 엎드려 절을 합니다. 절을 할 때 누구로 알고 절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으로 알고 절한 것이지 갈릴리 어부를 보고 절한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절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너무 죄송해서 일으키면서 “나도 사람이오.” 그럽니다. 그 다음에 고넬료가 무슨 말을 합니까? “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저는 이 장면을 너무 좋아합니다. 우리 교인들이 다 예배드릴 때 이런 마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늘 생각합니다. “다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당신을 통해 주시는 말씀을 오늘 내가 듣고자 합니다. 말씀하십시오.” 이렇게 쳐다보면 이것이야말로 기가막힌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이 관계가 중요합니다. 이 관계를 카리스마적 관계라고 합니다. 그가 누구냐고 묻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낸 교인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지금 나타나는 시간입니다. 조용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쳐다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할 때 비로소 이것이 가능합니다. 그런고로 이런 목사가 되려면 행동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의 외모도 중요합니다. 목사는 잠을 자도 넥타이를 매고 자야 합니다. 언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에게 잠바 바람으로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이지 마십시오. 그러면 설교는 끝났습니다. 거드름을 피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의 체통을 지켜야 합니다. 요즘은 이것이 다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늘 조심해야 합니다. 함부로 놀고, 함부로 농담하고, 함부로 행동하면 그 다음에 교인들이 목사님 설교할 때 설교로 들리지 않고 농담으로 들린답니다. 저들이 너무 답답해서 웁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되겠는데 들리지 않으니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것은 큰 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심방을 가도 기도하고 할 말 다 했으면 벌떡 일어서십시오. “목사님, 쉬었다 가세요” 그러면 아무 데나 누워있다가 오고 그러면 안 됩니다.

우스운 얘기입니다만 제가 설교를 하고 집에 돌아갑니다. 그러면 제 아내가 저더러 “오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그럽니다. 그러면 제가 “당신도 은혜 받소?” 그럽니다. 제 아내가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을 통해 은혜를 못 받으면 나는 어디에서 은혜 받는단 말이오.”

사모들도 조심해야 됩니다. 남편을 통해서 은혜 못 받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지옥 가는 것입니다. 은혜 못 받으면 누구든 다 끝나는 것입니다. 예배가 없기 때문에 말썽입니다. 앉아서 예배드리는 사람은 문제가 없습니다. 말썽꾸러기는 아예 앉지도 않고 뒤에서 왔다 갔다 합니다. 그리고 앉아서 교인들 예배 잘 보나, 설교 잘 하나 이런 구경이나 하고 앉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문제입니다. 누구든 가만히 보십시오. 예배가 있는 사람은 영혼이 자랍니다. 건강하게 자랍니다. 그런데 예배가 없어지기 시작하면 어느 사이에 당장 악마로 둔갑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저들에게 얼마나 카리스마적 권위를 가지고 설교하고 있습니까? “내가 40일 금식기도를 했느니, 남달리 계시를 받았느니” 그런 소리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의 체통은 가져야 합니다. 그들이 가진 잘못된 인상으로 말미암아 두고 두고 은혜를 못 받는다면, 이렇게 남에게 걸림돌이 되면 되겠습니까? 거룩하게 말하면 목사는 제사장이고, 선지자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신분인데 함부로 해서 되겠습니까? 예배로서의 설교를 할 때 예배를 인도하는 우리가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라는 인격, 바로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한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우리 스스로도 우리 신분을 소중히 여기고 경건에 힘써야 되겠습니다.

새벽기도도 적어도 30분 전에 목사가 나가야지 5분 전에 넥타이도 못 매고 나가가지고서는 “찬송 부릅시다.” 그러면 교인들이 “늦잠 자다 왔구나!”하고 압니다. 이래서 무슨 은혜가 되겠습니까? 우리의 거동 하나하나를 참으로 조심해야 합니다.

카리스마적 권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병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의 위상, “하나님이 나를 이곳으로 보내셨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 교인들이 볼 때는 “하나님이 저분을 통해서 내게 말씀하신다”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카리스마적 권위입니다. 이것이 필요합니다.

 


7. 대화로서의 설교

 


이것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하나 문제를 취급해 줍니다. 마치 어린아이와 대화하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문제의 해결자가 되어 주고, 치유 능력으로서의 설교,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말씀에 부딪친 사람들의 영혼이 치유됩니다. 영혼이 치유될 때 이성이 치유되고 이성이 치유될 때 육체의 질병도 치유가 됩니다.

예를 들어서 남을 미워하던 사람이 사랑하게 되니까 병이 낫습니다. 불안에 떨던 사람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되니까 병이 낫습니다.

저희 교회 새벽기도에는 매일 2천 명이 참석합니다. 저는 목사 된 지 36년인데 36년 새벽기도 개근입니다. 꼭 제가 인도합니다. 이것이 권위입니다. 간단하게 성경공부하고 돌아갑니다만 효험이 있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거기에 나가서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다 보면 병도 낫고, 남편도 돌아오고, 사업도 잘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치유입니다. “일어나라”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역사가 있을 때 조용하게, 은근하게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8. 연출로서의 설교

 


이제는 온몸으로 설교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말로만 해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비디오를 봅니다. 연출자가 되어야 합니다. 온몸으로 교인들을 만나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거울을 보면서 얼굴 표정도 공부해야 됩니다. 온몸으로, 온 인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때입니다만 가장 효과적인 때라는 생각도 듭니다. 옛날에는 아무리 교회가 커도 5백 명밖에 모이지 못했습니다. 마이크 없이 설교하니 옛날 목사님들은 목소리 큰 것이 제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새는 마이크가 있어가지고 조용히 말해도 됩니다. 마이크 사용하는데 있어서도 기술자가 되어야 합니다. 몸은 움직여도 입은 그대로 있어야 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시점에 서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설교가 예배가 되고, 예배가 설교가 되는 그런 순간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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