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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잠 4:1-9)

by 【고동엽】 2024.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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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선희목사/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잠 4:1-9)

 

엄마의 마지막 산 K2"라고 하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고산 전문 등반가인 스코틀랜드의 여성산악인 알리스 하그브리스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세계 제일의 고봉 에베레스트산을 올라가서 점령을 하고 다시 3개월 뒤에 두 번째로 높은 고봉 K2 정상을 정복하게 됩니다. 이러한 여성산악인으로서 큰 성공을 거두고 하산 길에 시속 160Km 되는 돌풍을 맞아서 그는 실종되게 됩니다. 아버지는 이 사고 소식을 듣고 아버지로서 아이들에게 그들의 어머니, 자기 아내의 사고 소식에 대하여 어렵사리 엄마의 이야기를 꺼내게 됩니다. 아이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이 소식을 듣게 됐고 아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엄마의 마지막 산에 가 볼 수 없을까요?" 주위 사람들의 만류를 물리치고 이 아버지는 아이들을 데리고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올랐던 K2라고 하는 산에 등산을 하게 됩니다. 파키스탄 북부에 있는 K2봉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이 때에 영국 BBC 텔레비 방송에서 다큐멘터리를 방영하기 위해서 촬영진이 이 뒤를 따르게 됩니다. "알리스의 마지막 산"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텔레비 방송을 하게 계약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엄마를 찾아 나선 겁니다. K2봉을 향해서 갑니다. 엄마의 삶을 되짚어 가는 길이기도 하고 엄마의 죽음을 이해하게 되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긴 여행 끝에 얼마의 등산을 했을 때 아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 아름답고요 이해할 수 있어요. 이제는 뭔가 엄마의 마음을 알 거 같애요." 엄마의 삶과 엄마의 죽음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철없는 아이들이지만 산에 올라가면서 내려오면서 엄마가 왜 이렇게 이것을 좋아했나, 왜 엄마는 여기서 죽었나, 알 것 같앴다고 합니다. 집에 돌아온 다음에 유치원 다니는 아이가 오늘 돌아와 가지고 당장 유치원에 가겠다는 거예요. 그 동안 수고도 했고 시차도 있어서 며칠은 유치원에 가지 말고 쉬었다가 좀 건강을 회복해 가지고 가면 어떠냐, 하고 아버지가 만류했는데 이 어린아이는 이렇게 말했다는 겁니다. "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어요.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깜짝 놀라서 아빠는 물었습니다. "누가 네게 그렇게 가르쳐주었냐?" "엄마가요"하고 방글 웃는 것이올시다. 엄마의 강한 강인한 삶의 의지가 벌써 아이들의 마음에 전달이 됐어요. 알게 모르게 어머니가 준 교훈, 소중한 마음, 소중한 말씀들이 이 어린아이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것을 보고 아버지는 크게 감격했다고 합니다.
열왕기상 3장에 보면 솔로몬이 스물한살에 왕이 됩니다. 왕으로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힘들어서 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일천번제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응답하셨습니다. "너는 내게 구하라. 내가 네게 무엇을 줄까?" 그럴 때에 솔로몬은 유명한 단한마디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여 나에게 지혜로운 마음을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지혜로운 마음이란 원어 그대로 보면은 "레브 쉐미트"라고 하는 말인데요. "레브"란 말은 마음이란 말이고 "쉐미트"는 듣는다는 뜻입니다. 직역을 하면은 "듣는 마음"이란 뜻입니다. 그래 옛날 영어 성경에는 "히어링 하트(Hearing Heart)"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듣는 마음, 아주 중요합니다. 그 듣는 마음이 지혜의 근본이요. 듣는 마음이 바로 지혜라는 것이에요. 여러분, 들어야 됩니다. 듣는 마음이 있어야만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누굽니까? 부모란 성서적으로 보면 적어도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대표한 분입니다. 내 생명 내 정신 내 도덕성 때로는 내 믿음의 뿌리가 그 부모에게 있습니다. 그로부터 물려받고 살아가는 것이올시다. 그래서 부모를 거역하는 죄가 가장 큰 죄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가장 큰 의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말입니다 인간에게 향한 계명 중에 첫째가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것이요 두 번째가 살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살인죄보다 더 큰 죄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가르치고 배워서 인간입니다. 본능대로만 살면 동물입니다. 본능의 충격에 따라서 살면 그건 짐승입니다. 오직 사람은 가르치고 배우고 가르치고 배워서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 숟가락으로 밥 먹는 것도 배워서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두 발로 걸어다니는 것도 배워서 된답니다. 그런 연구 결과가 있고 실화가 있습니다. 어떤 아이가 있었는데 그 집이 홀랑 불나면서 다죽었어요. 산 속에 있는 집인데. 이 아이를 늑대가 키웠어요. 얘는 상당히 커 가지고도 두 발로 걷지를 못하더랍니다. 네 발로 기어다니며 짐승 소리를 하더랍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배운, 사는 모든 것이 다 가르치고 배우고 가르치고 배웠어요. 거기에 따라 인간이 되는 것이에요. 보다 더 많이 보다 더 바르게 배워서 살아갈 때 그를 인격자라고 하고 지성인이라고 합니다. 배우지 않고 배운 바 없이 인간의 욕망과 충동에 끌려 살 때 불한당이라고 하는 겁니다. 몹쓸 사람이라고요. 짐승같은 사람이라고요. 보세요. 결국은 사람은 가르치고 배우는데서 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길들인다는 것과 배운다는 것은 다릅니다. 짐승은 때려가며 길을 들이지만 사람은 가르칩니다. 그런고로 배우는 자의 입장에서 볼 때 선택권이 있습니다. 배울 수도 있고 안 배울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고 안 들을 수도 있습니다. 이 계속적인 선택 속에 책임적 인간으로 키워지는 길이 있는 겁니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배우고 내가 책임지는 것이올시다. 책임적 인간이란 바로 이렇게 스스로 선택해 가면서 꾸준히 배우고 자기 인격을 키워가면서 사람이 되고 인격을 이루는 것이올시다. 사람은 두 가지 사람이 있어요. 언제나 자기 경험을 앞세우는 사람이 있고, 지식을 앞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뭐든지 경험이 제일인 줄 알고 남의 말을 듣지 않아요. 내가 경험해야 되고 내가 먹어 봐야 되고 내가 행동해야 되요. 이런 고집통이가 있습니다 이거. 성경에도 한 사람 있다구요. 다른 사람 다 예수, 부활하신 예수 만나보았다는데 도마 같은 고집스러운 사람은 내가 보고 내가 손을 넣어 보고 내가 만져보기 전엔 안 믿는다. 이런 못된 인간이 예나 오늘이나 있습니다. 어찌 다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인생은 원 웨이 트립(One-way Trip), 일방도로의 길을 갑니다. 되돌아오지 못합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모든 경험은 단회적입니다. 같은 경험을 두 번 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런고로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제 내가 경험해서 얻는다. 벌써 경험하는 동안 되돌아오지 못 하는 거예요. 이런 고집스러울 때 그는 멸망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고 지혜로운 사람은 지식이 먼저요 생각이 먼저입니다. 그 다음에 경험합니다. 이거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런 얘기를 어느 글에서 읽었습니다. 누가 바둑을 잘 둔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뭐 한 15년 뒀대요. 몇 단이 되고 자기가 제일이라고. 늘 그렇게 교만했는데 그 친구 되는 사람이 나도 좀 바둑을 배워야겠다니까 그래가지고 1년밖에 안됐는데 15년 된 사람하고 1년 된 사람하고 만났는데 15년 된 사람이 졌어요. 왜냐하면 이 1년 된 사람은 바둑을 시작하면서 바둑에 대한 책을 세 권을 통독을 했답니다. 먼저 공부부터 한 겁니다. 책을 보고 공부를 하고 바둑을 둡니다. 공부없이 한 거 하곤 얘기가 다릅니다. 모든 일에서 공부가 먼저입니다. 이것은 먼저 간 사람들의 지식을 내가 얻고 그 다음에 신중하게 행동해 들어가기 때문이죠.
현대 사회학에 있어서 거두로 알려져 있는 "안토니 기드슨"이라고 하는 박사님이 계십니다. 그는 캠브리지대학의 교수인데 그의 책가운데 "Modernity and Self-Identity"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서 현대의 특징을 네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탈 전통 시대"라 그러죠. 전통적인, 오래 내려온 지식의 전통, 경험의 전통을 무시하는 "탈 전통의 시대." 그런고로 이 세상은 지금 정처 없이 표류하게 된 것이다. 그래 절망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요. 또 생활의 다원화로 인해서 기준을 잃어버렸다는 거죠. 여러분 혹 부모님들로서 아이들에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 뭐 그런 얘기하십니까? 거 다 이젠 지나간 얘기입니다. 요새는 밤에 일하고 낮에 자는 사람도 있고 낮에 일하고 밤에 자는 사람도 있어요. 생활 방법이 아주 뒤바뀌고 말았어요. 그래서 편의점에 보면은 "24시간" 이렇게 써 붙인 것이 그 때문입니다. 낮과 밤이 없어요. 그러니까 옛날 기준대로 몇 시에 일어나고 몇 시에 깨고, 그건 얘기가 안 되는 거죠. 이런 생활 규범이 모든 일에 관계가 됩니다. 전부 엉망이 되어 버렸어요 그만. 질서를 잃어버리게 되었어요. 그런가하면 권위 부재의 시대입니다. 도대체 어떤 권위든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거기서 기초가 흔들립니다. 또 한가지는 인터넷과 텔레비를 통해서 간접 경험이 직접 경험보다 위에 있는 시대라는 것이죠. 그래요. 결혼하지 않고도 영화구경 몇 번하고 나면 결혼한 사람보다 더 잘 알아요. 요 젊은 사람들 지금 정보 소화능력도 가지기 이전에 정보 처리능력도 없는데 엄청난 걸 다 봐버렸어요. 간접 경험으로 다 해 버렸어요. 이제 감각이 둔해집니다요. 벌써 결혼도 하기 전에 권태증부터 왔어요. 인생을 허무하게 보기 시작했어요. 절망으로 치닫고 있어요. 이게 바로 문제라구요. 자 이런 시대에 우리가 삽니다. 그런고로 더더욱 우리는 깊이 진실하게 공부하는 자세를 가져야합니다.
부모가 누굽니까? 부모란 내게 생명을 물려준 분입니다. 인생에 선배입니다. 많은 시련 많은 고통을 통해서 많은 인생을 겪고 많은 경험을 가졌습니다. 그 얼마나 소중한 노하우입니까? 그리고 그 경험은 이제 와서 지식으로 정리된 상태입니다. 그걸 알아야합니다. 적어도 오십이 넘으면 이제쯤은 철이 났어요. 무엇이 잘했고 무엇을 못 했고 무엇이 옳았고 무엇이 잘못됐다, 이제 알 것 같습니다. 다시 인생을 되돌려 살지는 못하지만 인생이 이렇게 살았어야 했다는 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그 뼈아픈 느낌, 뼈아픈 경험, 그 정리된 지혜, 이거는 값비싼 것이에요. "진주보다 귀하다" 그랬어요. 그걸 잊지 말아야지요. 게다가 종말론적 인식이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이제 생을 정리하면서 생각합니다. "아. 이렇게 살았어야 했는데……." 이 한마디, 이 교훈, 엄청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어느 때 목사이기 때문에 임종을 많이 보게 되는데요. 답답하고 괴로운 임종을 본 일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직도 나이가 많지 않은데 그만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아들 삼형제가 지켜 앉았는데 이제 마지막으로 무슨 말씀을 하실려나.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들이 알다시피 인생 실패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너희들의 할아버지, 내 아버지의 유언 마지막 유언 한 마디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랬어요. 그 유언이 뭐냐구요? "술 먹지 마라" 그랬어요. 그 할아버지가 술 먹으면서 망하면서 죽기 전에 딱 한마디, 아들에게 "술 먹지 마라" 그랬는데 그 아들이 그 유언을 안 지켰어요. 그 사람은 뭐랬는지 아세요? "피는 못 속여." 부전자전, 그리고 또 술 먹었어요. 이제 죽어가면서 "나도 같은 유언을 하는데 너희들은 이 내 마지막 유언을 지켜다오." 딱 "술 먹지 마라" 그러고 죽었어요. 아주 평범한 얘기입니다. 상식적인 얘기입니다마는 이 한마디가 얼마나 값비싼 겁니까? 얼마나 비싼 교훈입니까? 이제 내가 경험해 봐야겠다고 말하겠습니까? 나도 한 번 경험해 봐야겠다고 하겠습니까? 아니에요. 경험과는 관계없어요. 벌써 아버지 할아버지가 경험했어요. 그리고 내게 주는 마지막 교훈이요.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유언 하나만은 지켰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란 한마디 한마디가 소중한 것이에요. 그저 지나가는 말처럼 "공부해라" 하지만 그게 보통 교훈인줄 아십니까? 공부 못한 탓에 너무 억울한 생을 많이 살았거든. 너는 공부해라 이거죠. 논리적으로 설명은 못 하나 그 가슴에 맺힌 이야기예요. 그런데 우리가 이 한마디 말을 지키지 못하는 거기엔 지혜가 없는 거죠. 그리고 자녀를 사랑합니다. 나는 잘못 살았지만 너는 바로 살아다오. 나는 후회가 많은 생을 살았다. 너는 행복하게 살아다오. 나는 분명히 곁길로 갔다. 너희들은 바른 길로 가다오. 이것이 바른 길이다. 이것이 옳았느니라. 이 귀중한 교훈 한 마디를 소홀히 여기면 어리석은 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런고로 부모의 교훈은 곧 지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부모님의 말씀과 지혜를 동격시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로부터 들었다. 너희들은 내 말을 들어라. 이것은 곧 지혜니라. 이것을 들을 때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느니라"하고 말합니다. 지혜를 버리지 마라. 어기지 마라. 그리하면 지혜로운 자가 될 것이니라.
공자가 말해준 "논어"속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배움을 소중히 여기라" 하는 교훈인데요 인덕을 좋아하면서 배움을 좋아하지 않으면 폐단이 있는데 바로 우롱당하게 되느니라, 그랬어요. 지혜를 좋아하고 배움을 좋아하지 않으면 방탕하게 되느니라. 성실을 좋아하고 배움을 좋아하지 않으면 이용당하게 되느니라. 솔직함을 좋아하고 배움을 좋아하지 않으면 날카로워져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느니라. 용감함을 좋아하고 배우지 아니하면 난을 일으켜서 화를 당하게 되느니라. 강함을 좋아하고 배움을 좋아하지 않으면 망령되게 행동하게 되느니라. 여러분, 성실, 솔직, 정직, 충성 다 좋아요. 그러나 배우지 않는 사람은 그것으로 인하여 멸망으로 가게 되요. 지혜가 없어요. 지혜는 곧 배움이요. 배움은 겸손에서 오는 것이지요. 특별히 나를 사랑하고 내 운명을 사랑하고 나를 가장 아껴주시는 부모님, 그의 교훈을 가슴을 열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지혜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 오늘 성경 말씀은 "지혜를 소중히 여기라" 말씀하시고 다시 "지혜를 사랑하라. 내가 하는 말을 사랑하라. 기쁜 마음으로 받으라. 억지로 받는 것이 아니요 사랑하는 마음으로 받으라. 그리하면 지혜가 너를 지켜 줄 것이다. 지혜를 높이라. 너를 높여 줄 것이다." 그를 높이기 위하여 나를 낮춥니다. 그리할 때에 지혜가 나를 높여 줄 것이라구요. "지혜가 제일이니 절대로 팔고 살지 말 것이니라. 또한 지혜를 품으라." 가슴으로 품어요. "아주 사랑하고 지혜를 가슴으로 품게 되면 영화롭게 하리라" 말씀해 주십니다. 지혜의 길은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효도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십니까? 효는 살아 계신 부모님을 잘 모셔야겠죠. 그러나 이미 돌아가셨더라도 우리는 깊이 그 마음을 헤아리고 그의 말씀들을 우리 마음에 둘 것입니다. 저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종종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이상하게도 아버님께서 혹은 할아버지께서 내게 가르쳐 주신 그저 뭘 앉혀놓고 공부하듯이 가르친 것도 아니고 지나가는 말처럼 한 마디씩 하신 그 말씀들이 생각이 나서 그것이 지혜가 되고 용기가 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요새는 그걸, 아버지가 하신 말씀을 이렇게 다 수첩에다 써 봤습니다. 하나씩 생각날 때마다 써 보니까 참 소중한 말씀들이 많더라구요. 많은 경험에서 하신 교훈의 말씀들이었어요.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그것이 지혜니라"그랬어요. 이건 약속 있는 첫 계명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효도의 길을 가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로 형통케 하고 장수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에 복 된 길이 있습니다. 복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이 길을 통하여 복을 받으라고. 여러분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우리가 자녀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죠. 그렇다면 부모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먼저 두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효자가 효자를 낳습니다. 내 부모님의 말씀 내 가슴에 둘 때에 또 내가 일평생 소중히 얻은 지혜의 말을 하게 될 때 자녀들이 저들의 마음에 두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지혜의 유산 믿음의 유산이 이어지면서 대대로 주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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