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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사랑 (고린도전서 13장 1-7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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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사랑 (고린도전서 13장 1-7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현대 사회의 오염과 더불어 사랑 또한 변질되어 가고 있음은 숨길 수 없는 현실인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마음을 가다듬고 성경적인 진리에 비추어서 오늘 내가 바른 사랑을 하고 있는가를 진단하며 정화(淨化)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 이유를 나약함에 돌리려고 합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했다"고 하는 편리한 말로 간단히 대변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실천 못한 이유는 참사랑의 뜻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사랑의 신비와 사랑의 행복, 사랑의 능력과 그 영광을 알았다면 사랑할 수 있음은 물론 그 사랑을 끝까지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랑이란 명목으로 나도 괴롭고 다른 사람도 괴롭히고 있으니 그것을 두고 어찌 사랑이라 하겠습니까? 사랑이 이처럼 피곤한 이유는 참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땅 위의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의 오묘함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씀의 깊은 뜻을 알고 더 알도록 끊임없이 배우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할 것입니다.

성자 앤드루 머리(Andrew Murray)는 평생토록 매일 아침 고린도전서 13장을 무릎을 꿇고 한번씩 읽었다고 합니다.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고나서 하루를 생각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살고자 애쓰는 가운데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타날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는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투기한다의 헬라 원문은 '제로이'인데, '시기' '질투'라는 뜻입니다. 즉 사랑은 질투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입니다.

사랑에는 세 가지 차원의 사랑이 있습니다. 위로 향해서 존경하며 높이는 존경적 사랑, 나보다 못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동정적 사랑, 그리고 나와 동등한 위치에서 친애하는 수평적인 사랑입니다.

먼저 우리는 수직적 관계,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지 못하면 수평적인 관계가 무너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 좋은 예는 아니지만 구체적인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미국으로 이민간 지 1년도 채 못되는 교포들을 만나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하고 인사를 하게 되면 "아, 괜찮아요" 합니다. 서양사람들이 친절하여 직장에서도 부족한 점을 잘 도와주고, 여러 가지 불편을 덜어주며, 사랑해주기 때문에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3년 후에 같은 사람을 만나 "요즈음은 어떻게 지내십니까?"하고 물었더니 이번에는 한마디로 서양사람들 못쓰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곧잘 사랑한답니다. 그래서 직업도 얻어주고 물질로도 잘 도와주지만, 일단 자기와 비슷해지게 되면 그때에는 여지없이 내려친다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높아지려고 하면 용서하지 않는 사랑! 이것을 그때에 가서야 깨닫고 아차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이란 과연 어떤 것입니까? 어쩌다 불쌍한 사람에게 돈 몇푼 쥐어주고 먹을 것 입을 것을 챙겨주었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이려니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감상적인 그런 정도에서 사랑을 평가해서는 아니됩니다.

사랑이란 상대를 사랑하며 나아가서는 사도 바울의 권고처럼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빌 2:3)" 것입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사랑이라 할 수 있으며, 거기에 사랑의 완전함이 있는 것입니다. 질투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어떤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 하는 고통스러운 감정입니다. 빼앗기지 아니하려는 독점의 욕망, 그러다가 자기의 힘이 미치지 못하여 빼앗기게 되면 마침내 미워하게 되고, 질투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질투를 사랑의 한 표현으로 생각하는 것은 완전한 착각입니다. 질투란 어디까지나 질투일 뿐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의 반대가 질투입니다. 사랑이 질투로 변하는 순간, 그와 동시에 곧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므로 질투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소립니다. 어디까지나 질투에 불타면서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자기도 죽이고 남도 죽이는 참으로 피곤하고 불편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입술에서는 늘상 '사랑'이라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마는 그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직 모르는 사람입니다. 질투를 사랑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은 질투는 곧 미움이기 때문입니다. 질투는 자기 나약성에서 오는 것입니다. 빼앗기지 않아야 하고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데 이것을 빼앗기게 되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자신이 높고 크고 강할 때면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 대하여 베푸는 일은 참으로 잘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낮아진 자리에서, 자기보다 높고 강한 사람을 사랑해야 할 경우에 가서는 사랑하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나약성에 문제가 있어서, 그 나약성과 열등의식이 질투와 증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기의 위치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바뀌는 날에는 작은사랑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사랑이라 불리었던 전자의 일도 결국은 자기갈등의 발로였을 뿐 그 자체에 사랑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충족, 자기사랑에 불과한 것입니다.

질투는 자기사랑의 표출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자기사랑에 매여 있는 어느 순간에 바로 사단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신학자 니그렌(Nygren)은「아가페와 에로스(Agape and Eros)」라는 유명한 저서를 통하여 모든 사랑, 모든 철학을 아가페와 에로스의 둘로 나누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가페는 성서가 말하는 사랑인 반면에 에로스는 이성간의 사랑을 의미하며 이것은 전적인 소유를 원하는 사랑입니다. 에로스적인 사랑은 결국 자기사랑이므로 질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저 마음 깊은 곳에서 자신을 조종하고 있는 강력한 소유욕이 어느 사이에 자신으로 하여금 질투의 화신이 되게 합니다.

그러나 마음에 있는 것이라 하여 전부를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대로 물질을 소유할 수도 있고 몸도 소유할 수 있겠지만 마음까지도 내 마음대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같이 살수도 있고 한 침대에서 잠을 잘 수도 있지만 똑같은 꿈을 꿀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재주로 옆사람이 다른 사람의 꿈을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마음은 꿈까지도 나의 꿈만 꾸었으면 하고 바라니 그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이것이 질투로 변하는 것입니다. 꿈꾼 이야기라도 조심해서 해야지 만약에 잘못했다가는 날벼락이 떨어집니다.

이러한 질투는 다름 아닌 강렬한 소유욕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물질도 몸도 마음도 기분까지도 자기 속에, 자기만의 것으로 다 붙들려고 합니다마는 그런다고 잡아질 것이 아니요 내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인격이란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나요, 그는 역시 그일 뿐입니다. 인격적 관계에 있어서 소유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질투로 변합니다.

그러나 참사랑인 아가페의 사랑에는 질투가 없습니다. 질투는 곧 사랑의 시금석이 됩니다. 우리 마음에 질투심이 있는가 없는가를 확인해보아서, 질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참사랑이겠으나 그렇지 않고 질투가 살살 올라오면 지체없이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므로 조금만 지나치면 어느 사이에 마귀가 시험을 걸어 넘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자신도 괴롭고 다른 사람도 괴롭힘을 당합니다.

질투한다는 것과 부러워한다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 심리적 배경을 엄연히 달리하고 있습니다. 그 좋은 예로서 공부하는 학생이 선생님의 지식을 부러워는 하지만 질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친구가 자기보다 실력이 나은 것 같으면 그때에는 질투를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질투와 부러움은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질투는 완전히 자기사랑, 자기의 욕구충족을 위한 욕망의 발로이기에 이는 타락된 사랑의 현상입니다.

질투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면 그 분별없는 치솟음의 불꽃을 끌 재간이 없어 어느 사이에 그대로 악마가 되어버립니다. 어느 수도사의 경우를 생각해봅니다.

한 수도사가 리비아의 어느 사막에서 수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 수도사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경건한 생활을 하기 위하여 사막에서 금식을 하며 극기와 고행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다가와서 이 수도사를 시험합니다. 육체적인 욕망을 비롯하여, 물질로, 의심으로, 공포로, 아무튼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여 시험을 해봅니다만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 때에 지나가던 친구 마귀가 "내가 한번 해볼께"하더니 그 수도사에게 다가가서 "당신 동생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답니다"라고 했습니다. 수도사의 낯빛이 대번에 변하더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잘 이겨나가다가 끝내는 질투에서 넘어지고 만 것입니다.

이는 특별히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경우입니다. 선하게, 의롭게, 깨끗하게, 진실하게 잘 나가다가 마지막에는 질투에서 넘어지고 맙니다.

마귀의 최고의 수단이 질투입니다. 우리는 그 예를 성서 속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 역사의 시작인 에덴동산에서부터 질투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뱀이 하와를 시험하여 꾑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이 뱀은 하와로 하여금 시험에 빠지게 합니다.

그러고 보면 질투는 실로 뿌리깊은 죄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류 최초의 살인극인 저 유명한 가인과 아벨의 사건은 어떠합니까? 두 형제가 각각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으나 하나님께서는 동생의 제사는 받으시고 형인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자 하나님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형인 가인이 동생 아벨을 질투하여 죽이고 맙니다.

이와같이 최초의 살인극, 그것도 동생을 죽이는 살인극이 바로 이 질투에서 나왔고, 더구나 인간적인 평범한 일이 아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문제에서 비롯되었음을 볼 때, 질투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흔히들 시기, 질투쯤이야 범인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 상례이고 보면 이 정도야 하고 쉽게 생각하기 쉽습니다마는, 이것이 바로 죄의 뿌리가 됩니다.

질투로 인하여 요셉의 형제들은 마땅히 사랑하여야 할 동생을 멀리 애굽으로 팔아버리게 되었고, 그 결과 훗날 그 앞에 눈물로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제사장을 질투한 레위 족속들은 벌을 받았으며, 아론과 미리암은 모세를 질투하여 비방하다가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리는 무서운 징벌을 받았던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도 보면, 바울이 여러 곳에서 특별히 유대 사람들에게 많은 핍박을 받게 됩니다. 매를 맞기도 하고 쫓겨도 다니며 감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성서가 규명하는 그 원인에는 유대인들이 시기하였다는 것이 전제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름 아닌 질투가 사도 바울을 핍박했던 것입니다.

더욱 두렵고 놀라운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한 대제사장 가야바와 바리새인들의 행위도 예수님에 대한 시기와 질투에서 나온 것임을 빌라도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옥합을 깨뜨려 귀한 값진 향유로 예수님의 머리에 붓고 발을 씻기는 장면들에서도 보면 그 넘치는 향기와 예수님의 만족해하시는 마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마귀의 시험을 받아서 가룟 유다 같은 경우는 마치 자기 자신이 위대한 자선가이기라도 한 것처럼 "이 항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며 역정을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질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받는 영광까지를 질투하며, 하나님의 의를 질투했고 하나님의 사역을 시기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마침내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 넘기게 됩니다. 질투는 눈을 어둡게 합니다. 그 때문에 영적인 장님이 되어서는 성경은 물론 하나님도 보이지 않고 믿음에도 상관없는 자가 되고 맙니다. 이제는 자기 자신도, 사랑도,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주신 바 하나님의 은사도 보지를 못합니다. 보아야 할 것 대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들어야 할 것 대신 듣지 말아야 할 것에만 기울이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현상이 질투하는 마음에 있는 시험인 것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꾀꼬리와 아름다운 깃털을 가진 공작새가 서로 질투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 동기인 즉은, 목소리는 아름답지만 생김새는 별로인 꾀꼬리가 공작새를 볼 때, 자기에게 없는 저 공작새의 깃털이 부럽기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부러워하고 시기하다보니 공작새가 미워지고 마침내는 자기가 가진 아름다운 목소리의 소중함마저도 잊어버린 채 원망만 하더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공작새 역시 자기에게 없는 고운 목소리를 부러워하고 질투하다가 그 아름답고 위풍당당한 깃털의 고마움을 잊어버리고는 원망만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질투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모든 은사를 저버리게 되고 원망과 저주 속에 스스로 빠져들고 맙니다. 질투 그 자체는 죄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도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출 20:5)"이라고 친히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질투는 우리의 멸망을 방지하고자 하시는 질투요 축복으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질투입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상을 섬길 때에 질투하시는 것이며, 물질사랑, 자기사랑에 빠질 때에 질투하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기쁨으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복되게 사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아가페의 사랑은 질투를 극복합니다. 질투를 극복하지 못하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질투를 담은 사랑은 무서운 죄를 낳게 마련입니다. 이와 같은 질투는 에로스에서 생기게 됩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가페의 가슴으로 이것을 극복해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혈연 관계의 사랑에서도 형제간에는 질투를 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식을 질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게 될 때에는 물질과 명예와 자존심, 마음과 기분까지도 상대방에게 다 바치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는 내 소원이나 욕망이 남아 있을 것이 없습니다. 그 사람의 기쁨, 그 사람의 소원만이 소중해질 뿐입니다. 완전한 자기 소멸을 통하여 저의 기쁨을 채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가 만족해할 때 더 바랄 것이 없으며 그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 되어집니다.

우리는 때때로 어려운 일을 당한 형제들을 보게 되면 내 자신이 당한 것처럼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이는 물론 잘하는 일이요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내 형제가 잘 되고 성공하여 영광스러워졌을 때에는 기도하지 못합니다. 그를 위하여 진정으로 함께 기뻐하며, 내가 받은 축복인 것처럼 마음으로부터 감사할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질투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 아가페는 질투하는 마음을 극복합니다. 고난 당하는 자와 함께 슬퍼함은 물론,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며 다른 사람의 축복을 나의 것인 양 감사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사랑인 것입니다. 그때에 영광이 나타나며, 거룩한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내 마음에 벅찬 감격과 기쁨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3절 말씀에 보면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두고 왜 하필이면 친구를 위해서냐며 오래 전 젊었을 때부터 생각해봅니다. 나라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의를 위하여, 진리를 위하여 죽을 수도 있겠거늘 그것은 왜 큰사랑으로 칭찬하지 않으시고 한 개인에 불과한 친구라 했느냐는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라를 위하여 죽는다는 것은 결국 공명스러운 일이 되기 때문에 그런 대로 명예를 위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친구를 위하여 죽는다는 것은 그런 것도 아닌데다가 오히려 질투의 대상이기 때문에 가장 위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를 위하여 죽기까지 한다면 그것은 진정 가장 큰사랑이요 가장 위대한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숙명과도 같은 질투의 대상으로부터 질투를 극복하고 사랑으로 자기를 주는 거기에 가장 큰 사랑됨이 있음을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사랑은 어떠합니까? 그가 잘됨을 위하여 내가 죽고, 그가 명예롭게 됨을 위하여 내가 굴욕을 당하며, 그가 의롭게 됨을 위하여 내가 죄인이 되고 그를 살리기 위하여 내가 죽을 수가 있다면 주님께서 친히 인정하시는 바의 최고의 사랑을 이룬 것입니다. 이는 질투의 대상을 두고도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룰 수 있기에 더 바랄 것이 없는 최고의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십니다. 그의 죽음은 우리를 살리기 위함이요, 그의 굴욕은 우리의 명예를 위함입니다. 여기에 아가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그 은혜에 감격하여 그도 역시 아가페의 참사랑으로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투기하지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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