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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긍휼의 뜻(마태복음 9:9-13)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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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긍휼의 뜻(마태복음 9:9-13)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스스로 누구보다도 똑똑하다고 믿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재주를 믿고, 자신의 지식을 믿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판단력에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혼생활도 당연히 훌륭하게 해나갈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생활은 그리 평탄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세 번이나 결혼해야 했으며, 그 마지막 결혼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생을 돌이켜보며 말합니다. "사람됨이 그렇게 중요한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돈이 있는 사람과 결혼해보았습니다. 지식이 있는 사람과도 결혼해보았습니다. 인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많은 사람으로부터 추앙 받는 사람과도 결혼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됨됨이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었습니다."여러분, 돈이 있다고 인격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요, 지식이 있다고 사람이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때로 나이가 들면 철이 나겠거니 생각하지만, 보세요. 나이 들어봐도 별재주 없습니다. 나이도 역시 사람됨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는 것이 이렇듯 어렵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중생의 역사요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지, 사람들의 교양이나 지식 따위로 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 절실하게 느낍니다. 사람됨이 중요합니다.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합니까? 어떤 인간성을 지녀야 합니까? 여러분이 생각하는 이상적 인간성이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11:29)." 여기서 "내게 배우라"라는 말씀은 헬라 원문대로 보자면 "내 제자가 되라"라는 이야기입니다. 내 말만 듣고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와 함께 자고, 나와 함께 먹고, 나와 함께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하십니다. 자유하리라 말씀하심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5 : 48)"하십니다.

엄청난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본받기도 어려운데, 어찌 하늘 아버지처럼 온전하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이상의 기준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 높은 차원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뜻은 이렇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라는 것이 아니요,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뵐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어느 부분에서 하나님을 닳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악한 자의 밭에도 비를 내리시고 선한 자의 밭에도 비를 내리신다. 그러므로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바로 그 마음, 그 아버지의 마음을 닮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인간성-----humanity를 지닌 사람을 일컬어 동양에서는 덕있는 사람, 즉 군자(君子)라고 합니다. 도대체 군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휴머니티를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람됨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서 세금을 받고 있는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세리는 유대사람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해서 로마사람들에게 가져다 바치는 사람입니다. 유대사람으로서 같은 유대사람에게서 세금을 강제징수 하고 있는 터라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반민족주의자라는 지탄을 받아왔습니다. 때문에 저들은 자기네들끼리 똘똘 뭉쳐서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유대사람들은 세리와 죄인을 같은 급으로 취급하고, 한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이렇듯 세리는 공개된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세리를 예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것도 세리가 성전에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있을 때에, 그런 장소에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세관에서 세금을 받고 있는 때에, 바로 그 현장에서 "나를 좇으라" 하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인간성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마태의 무엇을 보신 것입니까? 속된 것 중에 속된 것이 있고, 거룩한 것 중에 거룩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거룩한 것 중에 속된 것이 있습니다. 가장 거룩한 옷을 입고, 가장 거룩한 장소에서, 가장 거룩한 직업으로 봉사하는 바리새인 제사장은 거룩한 것 같으나, 그실 내면적으로는 가장 속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속된 것 중에 거룩한 것이 있습니다. 이 세리 마태는 비록 죄인의 얼굴로 가장 속된 직업과, 그 환경에 살아가고 있습니다마는, 그 인간됨은, 그 중심은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속된 생활의 현장으로부터 마태를 끌어내신 것입니다. 단지 크리스찬으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많지도 않은 열두 제자의 한 사람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굉장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사건으로 예수님께서는 비난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저런 사람을 제자로 삼았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비난을 퍼붓습니다. 반면에 주님께 부르심을 입어 주님의 제자가 된 마태는 너무나 감격하여 자기 집에서 잔치를 엽니다. 많은 손님들을 초대했습니다. 그 손님들 역시 세리들입니다. 세리이니 세리밖에 친구가 더 있겠어요? 많은 세리를 불러 잔치를 열고는 예수님을 주빈으로 모십니다. 마태는 큰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의 마음에서 이 같은 시간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신 자, 예수님의 사랑을 가상 많이 받은 자는 누구입니까? 창녀 출신의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세상이 다 아는 더러운 여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녀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그 거룩한 몸을 맨 먼저 보이신 자가 바로 막달라 마리아 아닙니까? 부활의 첫 증인이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인간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중심을 보십니다. 외형이나 신분을 보시지 않습니다. 그 과거를 물으시지도 않습니다. 깨끗한 진실과 믿음, 그 하나만을 보십니다. 때문에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태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에 긍휼히 여기심과 크신 사랑을 받은 마태가 어찌 잔치를 벌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감격해서 잔치를 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초대를 받으시고 흔쾌히 응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느 환자를 고쳐주셨다든가, 어느 사람을 구제하셨다든가 하는 이야기와는 다릅니다. 초대를 받아서 그 집에 가시어 잔치에 참여하신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에게 명예를 주는 것이요 의를 주는 것입니다. 신분을 주는 것이요 의를 주는 거룩한 역사인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죄인의 친구'라고 하는 좋지 않은 이름을 평생토록 달고 살아가시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를 아주 멸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리의 집은 방문하지도 않고, 어떤 사정이 있어도 그들에게 도움을 구하지도 않고, 함께 음식을 먹지도 않고, 선물을 주어도 받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곤궁한 처지에 있더라도 자녀들을 세리에게 맡기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요 그렇게 해야 의롭다고 저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리인 마태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함께 나누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입니다.

우리는 본문말씀을 통하여 긍휼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이 '긍휼'이 예수님의 휴머니티를 단적으로 증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긍휼'은 성경에서 보더라도 퍽이나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 어휘의 하나입니다. 먼저, 구약성경을 살펴보면 '긍휼'이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라하밈'이 가장 빈번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불쌍히 여긴다'라는 이 말의 뜻이 재미있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라하밈'의 어원은 '레헴'으로 '모태(母胎)'를 뜻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나오기 전에 다 어머니의 자궁 속을 거쳐야 합니다. 어머니의 태 속의 물에서 일정기간을 보내야 합니다. 이렇듯 우리의 생명은 물 속에 떠 있으며 모태가 공급해주는 적당한 환경과 영양분으로 살아갑니다.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보호와 사랑---이것이 긍휼입니다. 이 밖에도 '긍휼'을 뜻하는 단어로는 '하난' '하말' '후스'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 '하말'은 주로 욥기에 사용되었으며, 긍휼과 영광을 의미합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긍휼'은 이렇습니다. 먼저 '스플랑크논'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환자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다 할 때에 쓰입니다. 이 말의 어원은 '창자'입니다. 창자를 우리 옛말에서는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애끊다' '애끊는'이라고 하면 '마음이 몹시 슬퍼서 창자가 끊어질 듯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스플랑크논'은 이러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 밖에도 '오이크티르모스' '엘레오스' '쉼파테오'가 모두 '측은히 여기다'라는 뜻으로, '스플랑크논'과 함께 '긍휼'을 의미합니다.

이 가운데 제일 많이 사용되는 말이 '엘레오스'입니다. 옛 기도문에 반복되어 나오는 '엘레이 에메, 엘레이 에메'라고 하는 구절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상대가 너무 불쌍하기에 강한 자가 오히려 그 앞에서 약해집니다. 내 고집이 없어집니다. 굳은 마음이 녹아집니다. 상대방을 사랑해서 내가 약해지는 것----이것이 긍휼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신학적으로 다시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긍휼'은 수직적인 사랑입니다. 위에서 밑으로 사랑하는 것, 내리사랑입니다. 할아버지가 손자를 사랑하고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사랑이 바로 '긍휼'입니다.

영어에서 '긍휼'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먼저, 긍휼은 not if--가정법이 없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사랑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조건이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어떤 미래적 조건도 없는 사랑이 바로 '긍휼'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식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면 사랑하고 그렇지 않으면 내버리겠다고 하는 부모를 보셨습니까?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할 뿐입니다.

또한 긍휼은 not because----어떤 이유도 있을 수 없습니다.

과거에 어쨌다는 이야기는 통하지 않습니다. 간혹 이런 일이 있습니다. 부부간에도 보면 사랑하지는 않지만 지금껏 이렇게 살아왔으니 어쩌겠는가, 자식들도 낳고 했으니 사랑해야지 하며 과거가 이유가 되어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랑을 긍휼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지난 역사의 어떠한 일도 이유가 될 수 없는, 이유가 되지 않는 사랑이 바로 긍휼입니다. 뿐만 아니라 긍휼은 not give and take----어떤 보상도 주고받지 않습니다. 보상을 바라지 않는 창조적인 사랑이 긍휼입니다.

여러분, '긍휼'이 무엇입니까? 이상에서 보듯이 아버지의 마음을 총괄해서 긍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있을 때에 권능이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속에 긍휼이 있을 때에 이적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환자나 가난한 사람, 죄인이나 세리 마태만을 불쌍히 여기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한 사람들,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을 향하여 조롱하며 고함을 지른 사람들까지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 : 34)"------이것이 긍휼입니다.

예수님에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베드로가 당신을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는 자책감에 빠져 다시 갈릴리로 돌아갑니다.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로 제자들을 찾아가시어 베드로를 붙들고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에 걸쳐 물으십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하는 베드로의 마지막 대답을 들으시고 말씀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21:17)"-----이것이 긍휼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배반하는 자, 당신을 부인하는 자, 당신을 저주하는 자들까지도 사랑하십니다.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이 긍휼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긍휼하심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일평생을 바칠 뿐더러 마지막에 가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순교하기까지 역사를 이룹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향하는 사울까지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9:4)"하시며 그를 붙드셨습니다. 마침내 사울은 일평생을 그리스도께 바치는 사도 바울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긍휼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다시 본문말씀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12)." 병든 자의 구하는 마음을 설명하십니다. 여기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죽을병에 걸려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아주 비참한 마음, 간절한 마음으로 의사를 쳐다봅니다. 의사들은 이럴 때가 제일 괴롭다고 합니다. '내가 살리는 것도 아닌데, 수술한다고 다 낫는 것도 아닌데, 그저 나를 살려주세요, 살려주기만 하면 전재산이라도 바치겠습니다' 하고 간절히 매달릴 때에 의사는 참으로 괴롭다고 합니다. 여러분, 바로 이런 마음입니다. 환자가 되어 의사에게 생명을 부탁하는 마음이 바로 긍휼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물론 의사 역시 도와주고 싶습니다. 있는 재주를 다해서 이 사람을 살려주고 싶습니다. 바로 이 마음이 긍휼입니다. 그러나 환자나 의사 두 사람 다 자기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 구하는 사람이나 베푸는 사람이나 최선을 다하여 수고한 뒤에는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 불쌍히 여겨주세요'-----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듭 긍휼을 가르치시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병자입니다. 의사도 병자입니다. 병자가 병자를 치료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기다립니다. 어느 의사가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제가 수술을 하고 바늘로 꿰매는 놓지만, 이 살을 자연스레 붙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할일은 다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긍휼만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로 그런 자세로 당신 앞에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긍휼을 가르치시며, 우리로 긍휼을 아는 인간으로 만들려 하십니다.

가끔 긍휼이 없는 사람을 봅니다. 혼사문제를 놓고 "그 사람이 감히 우리 집안하고 어떻게 상대가 되느냐"라고 자만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섬뜩합니다.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되게 교만합니다. 재산 몇 푼 있다고, 공부 좀 더 했다고 해서 사람을 그렇게 멸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히 우리하고 어떻게 상대하겠느냐는 이야기를 서슴지 않고 하는 사람들, 앞으로 보십시오, 어떻게 되나. 여러분, 모름지기 긍휼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다같은 죄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긍휼로 살아갈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뿐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인간----여기에 바른 인간성이 있는 것입니다.

모세에 얽힌 전설이 있습니다. 어느 날엔가 식구가 다 외출하고 모세 혼자 점심을 먹고 있었습니다. 부엌에 나가서 음식을 차려다가 식탁에 앉아서 먹고 있느라니 누군가가 문을 두드립니다.

문을 열어보니 남루한 차림의 거지가 서 있습니다. 모세를 보더니 대뜸 "배가 고픈데 먹을 것 좀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모세는 '옳지, 이 때에 선한 일 좀 해둬야겠다. 음식을 한상 차려서 같이 앉아 먹어야겠다' 생각하고는 거지에게 집안으로 들어 오라 합니다. "여기서 좀 기다리게, 내가 부엌에 나가서 한상 차려다줄 터이니 같이 앉아서 이야기나 나누며 먹세." 이렇게 말해놓고 모세는 부엌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음식을 만들고 있는 동안에 너무 배가 고픈 이 거지는 모세가 먹다 남긴 음식을 다 먹어버렸습니다. 음식을 가지고 들어온 모세는 이를 보고 화가 났습니다. "한상 차려서 좀 근사하게 대접하려고 했더니 사람이 이렇게 예의가 없소? 당신은 어쩔 수 없이 평생 거지로 살아야겠소"하고는 그 거지를 쫓아내 버렸습니다. 그 때에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모세야, 네가 나를 얼마나 형편없이 대접했는지 알겠느냐?"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시비를 해야 하고, 얼마나 쟁론을 해야 하고, 얼마나 남을 비평해야 합니까? 아무 말씀도 하지 마십시오. 어떤 말도 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오직 긍휼이 있을 뿐입니다. 긍휼을 구하는 마음. 긍휼을 베푸는 마음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사람의 비유를 보십시오. 강도를 만나 옷을 뺏기고 매를 맞아 죽어 가는 어떤 사람이 길에 쓰러져 있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았지만, 모른 체 피하여 지나갑니다.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갑니다. 이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고 계십니까? 이 제사장과 레위인이 살인을 했습니까, 간음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정의는 이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긍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도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것은 살인입니다. 칼을 들어야만 살인이 아닙니다. 긍휼이 없는 것, 그 자체가 엄청난 살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탕자비유를 보면, 형은 돌아온 탕자를 불쌍히 여길 줄을 몰랐습니다. 그 동생이 죽었다가 살아 돌아왔는데 이것을 기뻐할 줄 몰랐습니다.

긍휼 없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팔순의 어느 목사님이 임종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 목사님의 아들도 목사입니다. 삼십 세의 아들 목사가 세상을 떠날 아버지의 옆에 앉아서 위로하며 말합니다. "아버님은 목사로서 오십 년 동안 봉직하셨습니다. 그 동안에 교회도 많이 세우시고, 하나님의 말씀도 많이 전하시고, 선한 일도 많이 하셨습니다. 아버님은 참으로 훌륭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전혀 들은 체도 아니하고 "나에게 보혈을 말해다오. 내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예수님의 보혈뿐이다. 예수님의 긍휼, 그것만을 말해다오"라고 부탁하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에 마지막으로 들어야 할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것 외에 우리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5:7)"---그렇습니다. 우리는 긍휼을 알아야 하고, 긍휼을 배워야 하고,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길이요, 참인간으로 사는 길입니다. 다시 한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봅시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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