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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영광에 이르는 병 (요한복음 11장 1~10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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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에 이르는 병 (요한복음 11110)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예수님의 이적 가운데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단연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이적입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이적을 총괄하는 결론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최대의 이적이라는 데에 그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이적을 큰 이적이라 하겠습니까? 가장 어려운 상황 하에서 나타난 이적입니다. 건강할 때에는 그 건강이 대수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병들었다가 건강하게 되면 이적인 것입니다.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다면 더더욱 이적입니다. 살아난 것만으로도 이적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적의 의미는 매우 중요합니다.

최대의 이적이 무엇입니까? 오늘의 본문에서 그 해답을 구해보십시다.

사도 요한은 보충적 의미에서 요한복음을 쓰고 있습니다. 네 복음서 중에서 가장 나중에 기록된 것이 요한복음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복음서에 없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같은 사건을 놓고도 특별히 계시적, 표적적인 관점에서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건 자체를 단순하게 기록하기보다는 그 사건에 내재되어 있는 깊은 뜻을 말하고자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씌어진 것입니다. 단지 일곱 가지의 이적만을 기록한 것도 그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십자가를 겨냥하면서 이루어진 이적이기에 더욱 큰 의미가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납니다. 죽은 지 나흘만에 살아납니다. 사건 자체에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마는 신학적으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며칠 뒤에 스스로 죽으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하여 죽은 자를 무덤에서 걸어나오게 하시는 큰 능력을 가지고 계셨지만 정작 당신 자신은 아무 말 없이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설명하는 데에 나사로를 살리신 이적이 신학적으로 계시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이적입니다. 병자가 낫게 된 것도 아니요, 장님이 보게 된 것도 아니요, 앉은뱅이가 걷게 된 것도 아닙니다.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사람을 주검으로부터 살리십니다.

그 하나가 야이로의 딸입니다. 방금 죽은 야이로의 딸을 다시 일으키십니다. 야이로가 나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청하고 있을 때에 죽었다는 기별이 왔습니다. 이어 예수님께서 그 집으로 가시어 다시 일으키셨으니 아마도 죽은 지 한두 시간쯤이 지났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다음으로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죽은 지 하루만에 일으키십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다음날로 장례를 치릅니다. 더운 지방이어서 금방 냄새가 나고 썩기 때문입니다. 오래 집안에 둘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이 당시에는 없었습니다. 장례 행렬을 만나 멈추게 하시고 일으키셨으니 하루만에 살리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나사로입니다. 죽은 지 나흘만에, 이미 무덤에 장례까지 치렀음에도 그 무덤까지 찾아가시어 일으키십니다. 장소로 따져보아도 재미있습니다. 야이로의 딸은 집에서,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은 장례 행렬이 가는 노상에서, 나사로는 무덤에서 각각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사로를 살리신 이적은 그 어떤 이적보다 큰 이적이라고 하겠습니다.

큰 이적은 그 이적을 통하여 나타나는 계시적 의미가 커야 합니다. 뜻이 커야지 사건만 크다고 모두가 아닙니다. 그러면 뜻이 왜 커야 하겠습니까? 이제 보십시오. 풍랑을 잠잠하게 하실 때에는 대자연을 지배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병을 고치실 때에는 병을 물리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귀신을 내어쫓으실 때에는 귀신의 능력을 제어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또한 죄로 말미암아 깊이 빠져드는 사람에게는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죄를 사하는 권세를 계시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러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나사로의 사건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 친히 말씀하신 대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부활의 능력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부활케 하시는 능력의 예수님이십니다. 부활 생명을 계시하는 사건입니다. 부활 생명의 계시니 이적 가운데 가장 큰 이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중요한 내용이 몇 가지 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어 5절에서도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라고 합니다. 사랑하시더니,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왜 병들어야 합니까? 우리 생각대로라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는 병도 없고 실패도 없고 공부도 잘하고 돈도 잘 벌고,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척척 잘될 것만 같습니다. 사랑하시는 자가 왜 병들고, 사랑하시는 자가 왜 실패해야 합니까? 왜 인간적인 불행을 겪어야만 합니까?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우리의 마음깊이 중요한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피상적으로 보면 이해하기 힘든 내용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마십시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자도 병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내가 병들었다고 하여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보다, 내가 벌받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지 않으셨다 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 것입니다. 적어도 오늘 이후로는, 또 성경을 읽은 이후로는 그런 망상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습니다. 사랑도 보통 사랑이 아니요 특별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그의 가족을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그 가족 또한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예수님 사랑하기가 쉽습니다마는 그 당시는 예수님이 많은 핍박을 받고 있던 터라 순교적 정신이 아니고는 그토록 극진하게 사랑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겠다는 결심이 없으면 사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사로와 그 가족은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합니다. 예수님도 저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습니다. 이 문제를 한번 단계적으로 생각해보십시다. 먼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도 병든다는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이기에 병들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특별히 병든 것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병을 긍정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보십시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을 두고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4)"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병이 나면 혹시라도 죽을까봐 지레 걱정합니다. 감기만 걸려도 '내가 죽으려나' 싶고 가슴이 두근두근 뛰면 심장이 멎으려나 걱정합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깊은 곳에는 두 가지의 고민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죽을까봐 고민하는 것이고 또하나는 죽은 다음에 지옥 갈까봐 고민하는 것입니다.

천국 간다는 확신만 있다면 그토록은 고민하지 않을 것입니다. 일찍 가는 게 오히려 낫습니다. 별 대수로운 문제가 아닌데도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죽을 병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잠깐동안의 일이긴 하지만 저도 625전쟁에 참전했었습니다. 총도 쏘고 육박전도 했습니다. 한번은 총알이 제 어깨 쪽으로 ''하고 날아 왔습니다. 어깨가 뒤로 쑥 밀려들어가는 느낌이 왔습니다. '아이쿠, 팔이 떨어져나가나 보다!' 생각하고 돌아보니 그대로 팔이 붙어 있었습니다.

옷만 찢어졌습니다. '흐유!'하고 안도의 숨을 내쉰 경험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간혹 나도 한번 겪어봤으면 좋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 이것저것 복잡하게 따지지만 않는다면, 또 죽지만 않는다면 해볼만한 경험입니다. 그러다 죽을 뻔하였기에 재미나는 것이지 죽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으면 재미없는 것입니다. 일본사람들은 복어를 즐겨 먹습니다. 복어는 잘못 먹게 되면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일본사람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당신네들은 복이 위험한 줄 알면서 왜 먹습니까?" "아슬아슬해서 좋아합니다. 죽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대답이 참으로 걸작입니다. 목숨을 걸고 먹습니다. 전쟁이란 것도 생명의 보장만 있다면 굉장한 이득이 있습니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며 엄청난 발전도 이룰 수 있습니다.

병이란 것도 한번 긍정적인 눈으로 보아 보십시다.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습니다. 병들었을망정 사랑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분명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전제하에서 병을 이해해 봅시다. 한마디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병을 주신 것입니다. 내게만 특별한 질병을 주신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나서 나에게 무엇이 이로운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질병은 우리에게 엄청난 것을 줍니다. 먼저. 우리를 쉬게 합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늘 정신없이 바쁩니다. 지방출장이다 해외출장이다 하여 집에는 절반도 못 들어오다가 그만 덜컥 드러눕고 맙니다. 병원에 드러누워 그제야 좀 쉽니다. 나 아니면, 내가 일하지 않으면 회사가 돌아가지 않을 것처럼 뛰었습니다마는 병들 고나니 모든 것을 멈추고 편히 쉬게 되었습니다.

바쁠 것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질병은 우리로 하여금 쉴 수 있도록 해줍니다.

또한, 생각하게 합니다. 그 동안 정신없이 뛰었습니다. 사는 게 무엇인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이제 병들고 보니 깊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사랑하는 친구가 맹장수술로 열흘간 입원해 있다가 퇴원을 했습니다. 병원으로 문안을 못 가서 미안한 김에 집으로 찾아가 제가 한마디 물어보았습니다. "그래, 병원에 있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가?" "내 인생을 어떻게 끝낼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했네." "자네, 이제야 철이 드는구만." 생각해보십시오. 철들었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내 인생을 어떻게 끝낼 것인가, 어디에서 마감해야 하는가-인생의 결론을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하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바로 질병입니다. 무엇이 가치가 있고 무엇이 무가치한가를, 무엇이 영원한 것이고 무엇이 임시적인 것인가를,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치 않은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건강할 때에는 생각이 넓지만 얕습니다. 그러나 병들었을 때에는 좁고 깊어집니다. 보다 깊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병듦으로써 겸손해집니다. 건강할 때에는 내 마음대로 할 것 다 했습니다. 얼마나 교만하고 오만불손했습니까? 얼마나 기고만장했습니까? 이제 병들어 누웠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박사학위도 재산도 소용없습니다. 심지어 아내도 자식도 다 소용없습니다. 옆에서 울고 있어보았댔자 나에게 아무런 위로도 안됩니다. 아무도 나를 위로할 수 없습니다. '나는 혼자이다'-비로소 실존적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만듭니다. 그런가하면 병들고도 교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심방가서 보면 내가 병든 것을 보고 남을 원망하고 욕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십니까? '좀더 아파야 되겠구나' '매가 좀 설은 것 같으니 더 호되게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목사인 제게 그런 생각이 드니 병 낫게 해달라고 기도해봐야 소용 있겠습니까? 더 눌려야 됩니다. 그래야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사실이 그러합니다. 병세가 위중해지면 겸손해집니다. 원망할 것이 무엇이며 불평할 것이 무엇입니까? 겸손하게 진실하게 됩니다.

병은 또한 화목하게 만듭니다. 나보다 남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비로소 화목하게 됩니다. 제가 이런 사람을 하나 보았습니다. 평소 아내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습니다. 맑은 정신으로 집에 들어오는 날이 없었습니다. 술에 취해 들어와서는 "죽어라, 죽어라"하면서 발길질을 합니다. 아주 못된 사람이었습니다. 여집사님은 고생고생하며 살다가 정말 병에 걸렸습니다. 중앙의료원에 입원해 있는 것을 제가 찾아갔습니다.

마침 남편이 와 있었습니다. 그 남편, 생각해보니 큰일났습니다. 아이가 다섯이나 되는데 죽으면 큰일 아닙니까? 저 자신도 그 동안 '죽어라, 죽어라'하고 구박해왔지만 막상 정말 죽는다고 생각하니 아찔합니다. 그래서 뭐라는지 아십니까? 이런 때에 보면 한국남자들 말할 줄 모릅디다.

"여보, 미안하오.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오. 당신은 내게 필요한 사람이오"-이렇게 말했으면 좋으련만 어디 그런 말을 해보았어야지요. 기껏 한다는 소리가 ", 죽지 마. 너 죽으면 큰일 나!"입니다.

저런 인간과 평생을 살았구나 싶어 한심한 생각이 듭디다. 정말 재미없는 남자입니다. 그런 소리를 듣고도 그 부인은 기뻐서 웁니다. '죽어라, 죽어라'하다가 '죽지 말라'고 하니 그것이 기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남편이 병원에는 자주 옵니까?" "말도 마세요. 일이 바쁘다고 하면서도 하루에 세 번씩 옵니다." 병이 화목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병드는 것을 무조건 나쁘다고 보아서는 안됩니다.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그래서 병을 주시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병이 기도케 합니다. 저는 환자를 문병할 때마다 늘 함께 기도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 이 병석에서 하나님과 가장 가깝고 신비로운 교제를 하도록 해주소서." 사실이 그러합니다. 건강할 때에는 깊이 교제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병들면 비로소 기도도 간절해지며, 하나님을 더 가까이서 느끼게 되며, 하나님의 사랑도 더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신비로운 기쁨은 오히려 병석에서 체험하게 됩니다.

신비로운 기쁨-물질에서 오는 것이 아니요 건강이나 세상 명예로부터 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깊이 사귀는 데에서 신비로운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병드는 목적, 하나님께서 병을 주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병듦으로써, 잃어버리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얻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 말고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게 병을 주셨다고 받아들이면 질병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받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한치라도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병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은사입니다.

나사로의 집은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으면서 유일하게 예수님을 대접한 예수님의 '하숙집'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여행하실 때마다 그 집에 가서 유하셨습니다. 나사로의 집은 그래서 소중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며칠 뒤면 세상을 떠나시게 됩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렇게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내가 이 집에 신세를 많이 졌구나. 가기 전에 선물을 하나 주어야 할 텐데 무엇을 주면 좋을까?' 예수님은 뒤적뒤적 찾아보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선물 중의 제일 큰 선물이 무엇입니까? 이것저것 잘도 주워섬깁니다 마는 막상 주려고 생각해보면 마땅한 선물이 없습니다. 돈 가지고도 마땅한 것을 찾기란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상대방을 기쁘게 해주고 싶은데 무슨 선물을 주어야 하겠습니까? 덮어놓고 돈 보따리를 준다고 선물이 됩니까? 오히려 멸시하는 것이 됩니다. 선물 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선물 중의 가장 큰 선물-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선물은 명예였습니다. 돈도 아니요 건강도 아니요 물질도 아니었습니다. 세속적인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이름을 주려 하셨습니다. 죽었다가 나흘만에 다시 살아난 사람-굉장합니다. 이런 선물 하나 받으면 참으로 괜찮습니다. 아마 지금도 이러한 일이 생긴다면 온 세계의 기자들이 다 몰려들 것입니다. 당시도 그랬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를 만나기 위하여 온 마을 사람들이 찾아들었습니다. 예수님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 죽었다 산 나사로를 만나러 온 사람들이 오히려 많았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집에 선물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큰 감격과 큰 은혜, 특별히 다시 찾은 생명에 대한 감격을 선물로 주시려고 하십니다.

선물을 주시는 것은 좋은데 그 받는 과정이 다소 복잡합니다. 받는 과정이 좀 어렵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나사로가 병들었음을 기별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오라비 나사로가 죽어가고 있는데 고작 전하는 말이 병들었다는 내용뿐입니다. 빨리 오셔서 살려달라는 그 말이 없습니다. 그 말 한마디가 없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사실 그대로를 알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처분을 기다릴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무릇 인간 관계에서도 그러합니다. '사실이 이러이러하다'라고 알렸으면 다음 일은 그 쪽에 맡겨야 합니다. 전적으로 맡겨야 합니다.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달라고 요구해서는 안됩니다. 안주면 미워하겠다, 죽이겠다고 협박해도 안됩니다. 생각이 좁고 고집스럽습니다.

보십시오.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했으면 그만입니다. 예수님께서 다 알아보십니다. 어느 안전이라고 기별하고 나서 오라 마라 합니까? 오고 안 오고는 예수님이 알아서 하실 일입니다. '꼭 오셔야 합니다' '안 오시면 날 미워하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안 오시면 죽겠습니다'-못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 사랑하시는 자가 지금 병들었습니다-그 다음은 주님께서 알아서 하십니다. 더 아파야 할 것이면 아프게 하시고 죽어야 할 것이면 죽게 하십니다. 살리든 죽이든 주님 마음대로 하십니다.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란 여기까지입니다. 그러면 왜 여기까지입니까? 요한복음 1031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 합니다. 그래서 유대로부터 멀리 갈릴리로 피신해 계신 것입니다. 그들과 대결하다가 돌에 맞아 무모하게 죽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때에 다시 '유대로 와주십시오'라고 조를 수 없는 일입니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또한 사랑에 대한 신뢰요 능력에 대한 신뢰에서입니다. 기별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나머지는 주님의 뜻과 지혜에 위탁하려는 것입니다.

주님, 아직도 사랑하십니까? 그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습니다-알리기만 했습니다. 사랑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러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병이 낫고 더 하고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성공하고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인할 뿐입니다. 모든 기도의 응답은 사랑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끝나야 합니다. 다음 일은 하나님께 맡길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영광에 이르는 병'을 말씀하십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4)."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죽을병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마는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병의 개념에 대하여 따져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잠깐 죽은 것을 병으로 보십니다. 야이로의 딸이 죽었습니다. 모두들 모여서 소리치며 통곡합니다. 그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그들은 분명히 죽은 것을 보았기에 잔다고 하시는 예수님을 비웃습니다. 그러나 '아이야, 일어나라'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아이의 영이 돌아와 일어나지 않습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분명 죽었습니다마는 예수님께는 '잠깐 죽은' 병입니다. 죽었다고 하는 병-예수님이 생각하시는 병은 우리가 생각하는 병보다 조금 깊은 데까지 들어갑니다. 우리에게는 숨넘어가면 죽은 것이지만 예수님께는 장례식을 치렀다 해도 죽지 않은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병에 대한 개념, 그 한계가 우리보다 훨씬 깊은 데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까지 생각하고 예수님은 저 다음까지 생각하십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다-예수님은 다시 찾을 수 있는 생명, 그 가능성을 전제하시고 죽을병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죽을병이 아니라 영광을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하나님의 영광, 아들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즘으로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 사역자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의 영광을 위하여 이 사건이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많은 고통을 당합니다마는 궁극에는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갈 것입니다. 또한 이 일에 가담한 사람들과 이 일을 위하여 수고한 사람들에게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요즘 우리 교역자들 가운데도 그러한 분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은혜 있는 분들이 그러합니다. 누구라고 짚어서 말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얼마 전 미국에서 오셨던 2백여 명 가운데 그런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한국에 있을 때에는 다분히 자유신학적인 목사님이었습니다. 신학대학을 다닐 때에는 시위 잘하기로 유명했습니다. 학우회 회장까지 하면서 감옥을 들락날락했습니다. 그러더니 미국에 들어가서 목회를 합니다. 목회도 그런 식으로 했으니 될 리가 있습니까? 채 이삼십 명도 모이기가 어렵습니다. 몇 년을 고생 고생하다가 덜커덕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미국에서는 찾아보기도 힘든 폐결핵입니다. 3기가 넘어 별도리 없이 죽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진정 살아 계시는 분이십니까? 그렇다면 제게 기적을 보여주십시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온몸이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전율이 느껴지면서 뜨거워집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불덩이가 되어, 땀이 비오듯합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그의 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이제 그는 아주 화끈한 목사가 되었습니다. 순복음교회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지난번 제가 미국에 가서 연합부흥회에 참석하고 있을 때에 하루는 그 교회 성가대가 와서 성가를 했습니다. 성가대까지 그 식입니다. 성가를 부르면서 박수를 칩디다.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목사가 화끈하니 그 성가대까지 화끈하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이 사람이 왜 병들었습니까?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요 그도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로 하여금 병들게 한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꼭 같은 사건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에 우리 교회의 여전도회에 오셨던 주안교회 나목사님도 그런 경우입니다. 아예 죽은 사람으로 치고 사모님조차 살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간암으로 얼굴이 새까맣게 되어 죽은 것과 다름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몸부림을 치고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열심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영광이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그 다음으로 그 일을 위하여 사역하는 자에게 영광이 돌아갑니다. 또한 그를 통하여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영광이 돌아갑니다.

영광을 위하여 병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과정은 참으로 괴롭습니다마는 앞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며 극복해나가야 합니다. 죽음도 그러합니다. 잘 죽으면 영광이 됩니다. 본인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도 큰 영광이 됩니다. 순교가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진실한 믿음과 순종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도 영광을 더 크게 나타내시기 위하여 그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십니다. 병들어 죽어간다는 기별을 받으셨으면 빨리 가보아야 할 터인데 이틀을 지연시키십니다. "어서 가자"하고 서두르셨으면 좋았을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다 아시면 서도 태연히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그 사이에 병은 깊어져 마침내 죽고 장사지낼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병이 깊어지고 고통이 심할수록 영광은 더 크게 드러납니다. 주위를 가만히 보아도 그러합니다. 조금 앓다가 나은 사람은 병원을 퇴원하면서 감사헌금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 사람은 병원비용을 많이 썼음에도 불구하고 퇴원하면서 감사헌금을 합니다. 퇴원을 할 때도 집으로 바로 가지 못하고 교회부터 들러 기도하고야 집으로 갑니다. 생명을 되찾았는데 어찌 집에부터 가겠느냐는 생각에서입니다. 병이 깊을수록 은혜가 더 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틀을 더 유하신 것도 같은 맥락에서입니다. 병을 더 깊게 하기 위하여, 고통을 더 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영광이 커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틀을 유하고 천천히 올라가니 이미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났습니다. 죽은 지 나흘된 나사로를 살리십니다. 이렇게 해서 영광이 커진 것입니다. 만일 죽기 전에 부지런히 달려가서 고쳤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작은 이적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영광이 조금밖에 안 돌아갔을 것입니다. 죽자마자 살려내셨더라면 영광은커녕 '잠깐 가사 상태에 있다가 깨어난 것이겠지'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장례까지 치른 다음에 살리셨기에 더는 할말이 없습니다. 굉장한 이적으로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고통은 깊을수록, 잘 감당할수록 더 많은, 더 큰 영광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지연시키시는 그 섭리를 기다리기가 어렵습니다. 당장 주셨으면 좋으련만 반드시 기다리게 하십니다. 여기서 끝냈으면 좋으련만 더 내버려두십니다. 우리는 현재를 구하나 주님은 영원을 주십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것을 구하나 하나님은 신령한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것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방심하게 됩니다. 기도하자마자 당장에 응답을 주셨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이틀을 더 유하십니다. 더구나 15절에 보면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제 생각해보십시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내 기도에 바로 응답하시지 않고 지연하시겠습니까? 영광을 더 크게 하기 위하여, 더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지연하시는 것입니다. 이 섭리를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큰 영광을 주님께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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