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로 돌아가기 | 목차로 돌아가기 |
오직 긍휼로(롬11:25~36)
오늘의 본문 가운데에는 이스라엘 구원에 대한 결론 부분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제 다음 시간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다 깨닫고 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신앙고백과 찬양의 노래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교리적으로는 실질상 오늘의 본문에서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로마서 9장, 10장, 11장, 이 세 장의 신학적 논리에 대한 결론이 오늘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계속적으로 유대사람의 문제를 취급하고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유대사람들을 보면서 바울의 마음 가운데에는 많은 고통이 있습니다. 근심도 있습니다. 아마도 상당기간 동안 이 문제로 큰 고민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소망적으로 저 미래를 내다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바로 그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유대사람들, 핍박하는 유대사람들과 자기와의 관계, 혹은 자기가 복음을 전할 때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지마는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또 자기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박해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나와 저들과의 관계에서, 혹은 내가 입은 피해, 내가 매를 맞았다든가, 내가 손해를 봤다든가, 내가 고통을 당했다고 하는 그런 억울함, 이러한 것에 집착해서 이스라엘의 문제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주관적인 견해에서 이스라엘의 문제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인간적인 견해로, 과거와 현재를 통해서 논리적으로 미래를 보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시각에서 역사를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루셨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어떻게 역사하셨는가, 이방에 대해서는 어떻게 역사하셨는가, 하는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시각에서 역사를 보고 이스라엘을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보더라도 나 중심에서 볼 것이 아니고, 또 인간적 차원에서 볼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혹은 성경적 맥락에 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고 계시는지, 하나님의 속성은 어떠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가 어떠한지, 그 거룩한 빛 안에 비추어서 나를 보고 세계를 보고 역사를 보는, 그러한 역사관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25절)"-여기에 '이 비밀을'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비밀, 헬라어로 '무스테리온'이라고 하는 이 말을 영어로 그대로 옮겨 놓으면 'mystery'입니다. 비밀스럽고 신비롭다하는 뜻입니다. 바울의 서신에는 특별히 이 '비밀'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무려 22번이나 나오지요.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신비롭다는 뜻인데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바로 사건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엄연한 사실이요, 엄연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신비롭습니다. 또 장차에 이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다 드러나고 보면 별것이 아니예요.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에 내가 볼 때에는 알 수가 없어요.
미처 다 깨달을 수가 없어요. 그럴 때에 '비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좀더 철학적인 의미로 소화하면 이렇습니다. 우리의 이해의 능력, 소위 인식의 한계가 이것을 다 소화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득불 이것을 '비밀'이라는 말로 사용하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쪽에서 보면 이것이 옳아요. 저쪽에서 보면 저것이 옳아요. 그런데 정반대로 이해하고 있거든요. 따라서 유명한 해밀턴이라는 신학자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마치 여덟 개의 문을 여섯 개의 문짝으로 막는 것과 같다"-여덟 개의 문이 있어요. 동서남북으로 각각 두 개씩 있어요. 그런데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여섯 개의 문짝으로 막으면 뒤에는 두 군데의 문이 남아요. 한쪽에서만 바람이 불어오면 그런대로 아늑하고 괜찮지요. 그러나 바람이 되돌아서 반대쪽에서 불기 시작하면 이 문짝은 있으나마나예요. 그래, 문짝을 뜯어서 다시 이쪽에 가져다가 막아놓아요. 그러면 또 아늑해지지요. 하지만 또 바람이 되돌아 불면 마찬가지예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세계는 크고 우리의 인식능력의 한계는 작아서, 시야가 작아서 그것을 다 종합적으로 소화할 수 없다는 말이에요. 특별히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속성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 세계는 신비로울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세계는 신비롭다-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에 있어서는, 하나님께 있어서는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뭐 어려운 일도 아니예요. 당연한 이야기예요. 그러나 사람에게 있어서는 놀랍고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이러한 사건을 우리가 믿음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다 납득되지는 않아요. 그러나 믿어야 돼요.
믿음으로 이해가 되는 것이지요. 다 만져본 것도 아니고, 다 본 것도 아니고, 다 경험한 것도 아니예요. 그러나 믿어야 돼요. 믿는 순간, 우리는 믿음의 세계로 인식의 능력을 옮기게 됩니다. 비로소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바로 신비라는 것이요,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비밀을 순간순간 깨달아가면서 더 깊이 이해하고 더 크게 기뻐하는 것-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때에는 이런 것이 사랑이 아닌 줄 알았어요.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도 해보았고 불평도 해보았어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그것이 사랑이었어요. 기막힌 하나님의 사랑이었어요. 이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 동안 성질부린 것 참 죄송합니다. 그 동안 억지쓴 것 참 죄송합니다'-바로 이런 마음이 생겨요. 때때로 우리가 병들기도 하고 사업에 실패하기도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도 사업에 굉장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기에 저는 일부러 전화를 걸고, 물어보고,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기도하면서 '그 분이 고생을 많이 하는가보다'하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근자에 일이 잘 풀렸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래 어제 만나서 "그 동안 어려움이 많았다는데 다행히도 잘 수습됐다면서요?"라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 동안에 정말 어려움 많이 겪었습니다마는 오히려 그 일이 저한테는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모릅니다. 그 일로 인해서 금년에 사업이 아주 잘됐으니까요. 이제 앞으로도 잘될 것입니다." 저는 그 얘기를 듣고 참 감사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 몇 달 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몰라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으로 주시는 시련을 미처 깨닫지 못해요. 그 순간순간 우리는 고통을 치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일이 다 지난 다음에 생각해보면 너무너무 감사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동안에 하나님 원망한 것을 회개해야지요.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바로 이런 마음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이라, 이 말이에요.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신비로운 세계를 깨닫고 감사하고, 또 깨닫고 또 감사하고-이런 것 아니겠어요? 우리는 미처 몰라요.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내 믿음이 좀더 자라게 되면 일이 잘 안될 때에도 '오히려 잘되는 일일 것이다'하고, 길이 꽉 막혀도 '이것을 막으셨다며 저쪽으로 열어주실 것이다'하고 생각합니다. 믿음의 수준이 높아지면 이제는 원망하지 않게 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도 감사하게 돼요.
그래서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는 나이 많아서 세상 떠나기 전에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이 기도를 우리는 그의 책에서 읽을 수 있지요. "하나님이여 내 평생 나와 함께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내가 기도하는 대로, 내 뜻대로 안된 것을 감사드립니다"-내가 원하는 대로 됐더라면 나는 형편없는 인간이 될 뻔했습니다, 내 뜻대로 안됐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습니다, 이것을 감사드립니다 함입니다.
자, 우리가 이런 기도를 임종 때에만 할 것이 아닙니다. 항상 이런 믿음으로 살아가야 됩니다. 신비, 하나님의 신비를 조금씩조금씩 헤쳐가며 조금 더 깨닫고, 조금 더 깨닫고…… 지금껏 여러분이 많이 깨달았겠지만 아직도 멀었어요. 아직도 무궁무진한 신비가 우리 앞에 있어요. 그것을 깨달아 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특별히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생각해보세요. 나 자신이 구원 얻은 것, 또 구원의 일을 하는 것, 이것이 신비예요. 또 십자가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신비예요. 뭐니뭐니해도 십자가와 사랑, 이것 참 놀라운 신비입니다. 세 번째로 큰 신비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비예요. 하나님의 dispensation, 하나님의 그 섭리가 놀라운 것이에요. 이것은 미처 깨달을 수가 없어요.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어요. 무궁무진한 비밀이 이 속에 있습니다. 그런고로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 비밀을 너희가 알기를 바란다'하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25, 26절)"라고 말씀합니다. 놀라운 얘기입니다. 자세히 보면 첫째로 '더러는……'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다는 아니요 더러는, 얼마의 수는 예수를 배척한다 이 말이에요. 바울은 놀랍게 생각했어요. 유대사람들이 예수를 배척해요. 그러나 그것은 다가 아니예요. 더러는, 얼마는 배척한다, 그리고 비밀한 가운데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고 바울은 생각했어요. '더러는 그리스도께 대하여 배척을 한다'-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어요. 전체가 아니고 얼마나, 더러만 그러하다 하는 것이 그가 생각한 깊은 세계 이해요, 비밀에 대한 이해입니다.
또하나, 바울은 하나님의 섭리를 말씀합니다. 이제 유대사람들의 일부가 기독교를 배척함으로 인해서 기독교가 이방으로 갑니다. 참 놀라운 일이에요.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당장에 알 수 있지 않아요? 아마도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사람들이 먼저 예수를 믿었더라면 다 예수를 믿고 거기에 가만히 앉아서 '빨리 주님 오십시오'하고 기다렸을 거예요. 그러나 핍박이 있었어요. 엄청난 핍박이 있었어요. 야고보가 죽고, 스데반이 죽고…… 이렇게 핍박이 계속되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도망을 했어요. 그래, 이방에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이것이 얼마나 오묘한 이치인지, 결국은 유대사람들의 세계에서 핍박이 있었기에 저들이 이방으로 가게 된 것이에요. 우리는 이런 오묘한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얼마의 유대사람들이 기독교를 배척함으로써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방으로 갑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방으로 가게 되고, 이방에 가서 지내는 동안에 이방사람들이 많이 예수를 믿어요. 심지어는 유럽에 가서 보면 각 민족마다 기독교를 자기네 민족적 종교로 생각해요. 우리 민족의 종교로, 우리 하나님으로, 우리 그리스도로.
여러분, 세계 여러 나라의 국기(國旗)를 한번 보세요. 십자가가 국기에 들어 있는 나라가 일곱이에요. 스위스 같은 경우는 숫제 십자가 하나만 그려놓았어요. 영국은 깃발이 온통 십자가입니다. 예수를 상징했어요.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요, 예수는 우리 그리스도요, 기독교는 우리 종교다-이렇게 주장하는 민족들, 나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대체로 이 사람들이 복지국가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계의 돈 가운데 기존이 되는 돈이 여러분이 다 아시는 대로 달러(dollar) 아닙니까? 작은 돈이든 큰돈이든 dollar를 자세히 보세요. 뒷면에 조그마하게 'In God we trust'-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라고 씌어 있어요. 저는 그런 생각도 해요. 혹 이 글 때문에 dollar가 효력이 있나 하고요. 'In God we trust'-이 얼마나 굉장한 얘기입니까? 뒷면에 불상을 그리겠다는 사람과는 얘기가 다르지요. 얼마나 놀랍습니까? 돈을 쓰지만 돈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합니다---이런 신앙고백이 거기에 들어 있어요. 그렇게 만든 사람들의 뜻이 얼마나 경건했고, 그들이 얼마나 철저한 믿음의 사람이었는가를 알 수 있지 않아요?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이 비밀이'-다 비밀이거든요. 그렇다면 해서 이스라엘사람이 하나님을 배척한 것이 무죄라는 말은 아니예요. 그것은 저들의 책임이에요. 그러나 그 위에 하나님의 높은 섭리가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이방사람들이 예수를 다 믿고, 그 숫자가 하나님이 생각하신만큼 차는 그 때까지 비밀입니다.
그 다음에 본문을 보세요.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26절)"-이스라엘이 배척하고 이방사람들이 예수 믿고, 그 다음에 다시 유대사람들이 믿게 될 것이다 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벌써 이천 년 전에 이렇게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은 이스라엘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사람들이 얼마간 있는데 이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영구한 것이 아니라 잠시의 일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25절에서 '~까지'라고 말씀하고 26절에서 '그리하여'라고 말씀합니다.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함이지요. 이렇게 바울은 믿음으로 멀리 내다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는 이유에 대해서 그는 다시 설명을 합니다. 그 다음에는 신학적으로 설명을 합니다. 그는 본래성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믿음의 뿌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그런고로 오늘의 본문에 보면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로 인하여 원수된 자요(28절)"-지금으로 말하면 복음에 대하여 이스라엘은 원수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다시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28절)"-으로 놀라운 생각이에요.
"복음으로 하면" "택하심으로 하면"-지금 복음으로 하면 복음에 대하여 이스라엘은 원수다, 그러나 본래적으로 생각하면 선택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백성이요, 그 후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사도 바울은 마지막으로 귀한 고백을 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요절입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29절)"---참 놀랍고 고마운 말씀입니다. 그의 은사, 그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다 함입니다. '후회'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 메타 멜래타'라고 하는데 이 말은 회개가 없다는 말입니다. 뉘우침이 없다, 다시 말해 틀림이 없다는 말이에요.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부르심'이라는 것은 단순히 '들려지는' 소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능력입니다. 또 하나님의 은사라는 것은 그저 우리 마음 가운데 주어지는 감격이 아닙니다. 그 은사는 곧 사건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은사는 환경적으로 역사하고, 부르심은 구체적으로 역사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사와 부르심은 후회하심이 없다, 반드시 그대로 된다 하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보세요. 우리 인간의 사랑은 무능할 때가 많아요. 사랑을 하니까 잘해주고 싶지만 능력이 있어야지요. 또 지혜가 있어야지요. 때로는 돈이 있어야 해요. 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어쩔 수 없을 때가 있잖아요?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것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면 반드시 주십니다. 없어서 못 주시겠습니까? 그런고로 하나님의 사랑은 그 자체가 능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이런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저의 어머니가 떠오릅니다. 어머니가 저를 참 사랑하셨어요.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몰라요. 자기 생명보다 더 사랑해요. 그러나 능력이 없더군요. 제가 북에서 피난 나올 때에 그저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하마'하시며 저를 앞에 앉혀놓고 기도한 다음에 '잘 갔다오너라'하고 보내주셨어요. 달리 도리가 없었지요. 마음은 간절하지만 어떻게 하겠어요? 이렇듯 우리의 사랑이라는 것은 별능력이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랑 자체가 능력이 있어요.
또 성경을 자세히 보세요. 예수님께서 친히 역사 하시는 모습을 보면 꼭 그렇습니다.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실 때마다 성경은 꼭 이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불쌍히 여기시고' '장님을 볼 때에 불쌍히 여기시고'-불쌍히 여기시는 순간에 능력이 나타나요. 우리는 누구를 불쌍히 여길 때에 '참 안됐다' 하면 그만이에요. 돌아서면 그만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면 그것이 바로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바로 이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모든 것을 경험하셨고 우리 세계에 들어오셔서 그 아픔을 다 겪으셨습니다. 하지만 딱 한 가지는 예수님께서도 경험하지 못하셨어요. 그게 뭔지 아세요? 바로 장례식을 못해보셨어요. 예수님께서는 장례식에 가서 죽은 사람을 살려내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장례식도, 입관식도 못해보셨지요.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장례식 하면서 마음이 참 아파요.
어떤 사람은 좀 살려냈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우리가 어찌할 도리가 있습니까? '갖다 묻어버립시다'할 수 밖에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아요. 과부가 우는 것을 보시고 멈추라 하시고는 '청년아, 일어나라'하시지 않았습니까? 장례식 끝났지요. 예수님의 마음 속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때, 그대로가 능력으로 나타났어요. 이것이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사, 여기에 어떻게 후회하심이 있겠어요? 그 은사가 그대로 능력으로 나타나는데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본문을 보세요. 당장은 문제가 되는 것 같아요. 이스라엘이 아직도 하나님 앞에 안 돌아오고 있고, 누구누구가 안 믿고 있고… 이런 문제들이 있어요. 사실 이게 무엇이겠습니까? 다 하나님의 지혜 속에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경륜 속에 있는 거예요. 지금 안 돌아오고 있을 뿐이지, 장차는 돌아오게 될 거예요. 이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저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일생을 책으로 보면서 참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에 아주 방탕한 생활을 했어요. 그의 어머니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로마로 갑니다. 그때에 그 어머니가 그를 얼마나 붙들고 울었는지 몰라요. '지금 내 앞에서도 이렇게 방탕한데 타향살이를 하게 되면 얼마나 더 못된 사람이 될까? 어디서 어떻게 맞아죽을는지도 모르는데……' 하며 너무도 비통해합니다. 그러나 그는 집을 떠납니다. 로마로 갑니다. 가서 제멋대로 돌아다니다가 어느 날, 암브로시우스 감독을 만나 가지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습니다. 정말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성자가 됩니다. 방탕하기 시작한 지 무려 13년 후에 예수님을 믿고 성자가 되어 다시 돌아옵니다. 그래, 그 어머니하고 바닷가에서 만나서는 얼싸안고 웁니다.
참 기막힌 장면이지요.
가끔 어떤 분들이 저를 찾아와서 얘기합니다. "우리 아들이 집을 나갔어요. 공부도 시원치 않았어요……" 그럴 때마다 제가 꼭 이렇게 물어봅니다. "아들이 집을 나간 지 몇 년 됐습니까?" "3년 됐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아직 멀었어요." 여러분, 아우구스티누스의 그 13년이 잃어버린 13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속에 다 경륜이 있고, 이를 통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비로소 아우구스티누스가 되는 거예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방탕한 13년이 없었다면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될 수 없었지요. 그냥 보통 아우구스티누스는 될 수 있어도 말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하고 말씀합니다. 반드시 그러면 그렇지, 하게 될 거예요. 확실하게 그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확실함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는 높은 지혜 속에 있는 것이에요. 그런고로 지금 우리가 됐다 안됐다, 틀렸다 망했다… 하는 얘기를 해서는 안됩니다. 저는 인천에서 목회할 때에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어떤 젊은 장로님이 양복점을 하고 있었어요. 양복을 아주 잘만드는 분이에요. 본래는 남의 양복점 직원으로 남의 집일만 해주고 있었지요. 그런데 양복 만드는 재주가 참 좋거든요. 그래서 나이 많은 장로님 몇 분이 모여서 이런 의논을 했어요. "저 재주 가지고 혼자 하면 돈을 많이 벌 텐데…"하고 말입니다. 그래, 좀 여유가 있는 장로님이 돈을 대서 양복점을 하나 차려주었어요. 그래서 이제는 돈을 많이 벌겠구나 싶었지요.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오히려 자꾸 손해를 보는 거예요. 그러면 나이 많은 장로님이 돈을 또 대줘요. 그런데 이 일이 자꾸 반복되니까 모든 사람이 걱정을 해요. "저 장로님이 아무래도 돈버는 재주는 없는가보다. 돈도 많이 손해보았는데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은가"하고요.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나이 많은 장로님한테 "장로님, 돈 더 대주지 마십시오. 이제 다 망했으니 그만두세요"하고 충고합니다. 그런데도 그 장로님은 돈을 또 대줘요. 언젠가 제가 한번 이런 말을 했어요. "젊은 장로님이 자꾸 실패를 하는데, 그간에 대준 것도 많거늘 또 돈을 투자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만하시지요." 그랬더니 그 연세 높은 분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 투자한 것을 찾으려면 계속 대줘야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 그 동안 투자한 것, 본전 찾으려면 기어이 성공시켜야 되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돈을 또 대주는 거예요.
여기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댄 밑천이 너무 많아요. 실패했다고 해서 이제 물릴 수는 없어요, 그런고로 또 투자할 수밖에요. 이는 놀라운 경륜이에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이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이요, 하나님이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작도 긍휼이요, 그 과정도 지혜요, 그 종말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고로 그 속에서 역사는 이루어진다 하는 말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라고, 옛날에 프리스턴 신학교에 교장으로 계셨던 분이 있습니다. 그 분에게 예쁜 외동딸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 딸의 성격이 아주 못돼먹고 괴팍해요. 아버지 보기에도 딱할 정도예요. '저것이 과연 제대로 시집을 갈 수 있을까, 가서 무사히 살 수 있으려나?' 하고 늘 걱정을 했어요. 그런데 교장선생님의 딸이니까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어떤 잘생긴 학생 하나가 이 딸과 며칠 만나보고는 교장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딸을 제게 주십시오"하고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교장선생님이 "안되네"하고 대답했어요.
"왜 안됩니까?" "자네와 내 딸은 서로 어울리지 않아." 그러니까 이 학생, "제가 어때서요?"하고 되물었습니다. 그만하면 사실 잘났거든요. 남들 보기에도 그러니까요. 그러나 교장선생님은 이렇게 거절했어요. "서로 격이 잘 맞지 않아서 그러네." 그러자 이 학생이 화를 내는 거예요. "제가 어째서 격이 안 맞는다는 것입니까? 제가 뭐가 모자란다는 말입니까?" 교장선생님은 살살 빌다시피 말을 했어요. "내 말은 그게 아닐세. 자네는 훌륭하네만 내 딸이 못나서 그러네. 결혼했다가 며칠 못살고 말 것 같아서 말이야. 내 딸이 어떤지 자네가 몰라서 그러나?" 그랬더니 이 청년, "걱정 마십시오. 제가 다 책임질 테니까. 그저 결혼만 하게 해주십시오"합니다. 그 때에 교장선생님이 이런 유명한 말을 했다고 합니다. "자네가 하나님이 아닌 이상 내 딸을 줄 수 없네." 신학적으로 대답했어요. 자네는 내 딸을 아직 몰라, 오래 사귀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르는 터이라 지금은 사랑한다고 하지만 말일세, 하나님께서는 아시고도 사랑하시네, 우리 잘못을 다 아시고도 사랑하시네, 그러나 사람이란 모르고 사랑했다가 알면 물러서는 법이야, 자네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기에 내 딸을 줄 수 없네, 라는 것이지요. 참 중요한 얘기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점을 아십니다. 우리의 허물을 다 아십니다. 그리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여기에는 실수가 없는 거예요. 이 위대한 사랑이 우리를 붙들고 있는 거예요.
오늘의 본문 32절을 보세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정말 신비로운 말씀입니다. 때때로 불순종할 때가 있어요.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책임입니다마는 거기에 또 높은 차원의 경륜이 있어요.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그런고로 여기에 신비함이 있어요.
여기에 비밀이 있는 거예요. 이 비밀의 베일을 하나하나 벗겨가면서 우리는 깊은 간증을 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속에서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순종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순종케 해서 구원받는 거예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순종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게 아니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순종하게 만드십니다. 겸손하도록 만드십니다. 열심을 내도록 만드십니다. 순수해지도록 만드십니다. 강한 믿음을 갖도록 창조적으로 역사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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