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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다(사도행전 3장 11절~16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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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다(사도행전 31116)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생사(生死) 문제에 임하는 자세로 볼 때,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죽음을 부인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나는 죽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필경에는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기 싫고 입에 담기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좀더 오래 살아보려고, 죽지 않으려고, 늙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이를테면 인사할 때에도 얼굴이 좀 상했다고 하면 기분이 나쁘고 젊어졌다고 해주면 기분 좋아합니다. 어느 책에 보니 얼굴이 젊다고 몸까지 젊은것은 아니라고 합디다. 얼굴빛이 좀 나아지면 어떻고 좀 상했으면 대수입니까? 한심한 일입니다. 아무튼 늙지 않아 보려고 무척들 기를 쓰는 것 같습니다. 몸에 좋다고만 하면 지렁이까지도 서슴없이 찾아 먹는 것을 보면 처절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습니다. 결국은 늙을 대로 늙고, 때가 되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래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서울대학교 모 단과대학의 학장님으로 계시는 분이 위암으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참 유능하고 지성적인 분인데, 유감스럽게도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아마도 좀 교만해서 믿지 않는 것 같았어요. 그 부인은 교회의 집사입니다. 임종의 시간은 다가오는데, 남편이 벌여놓은 일들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죽어 가는 남편에게 어떻게 대하여야 할지 난처한 지경에 빠졌습니다. 제게 찾아와 유서를 쓰고 유언을 하게 좀 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래서 제가 단독으로 만나 한번 권면해 보았습니다. "아무래도 당신은 의학적으로 며칠 못살 것 같습니다. 이제 유언을 하셔야 되겠습니다." 나 나름으로는 정중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는데 그분은 "내가 왜 죽어?"하고 버럭 화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말을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저로서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무튼 '내가 왜 죽느냐'고 발악하던 그 사람, 몇 시간 후에 죽었습니다. 그때 받은 인상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높은 지성을 가졌다는 대학 학장님이 자기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추태를 부리다니…… 그 사람의 지식과 지성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입니까? 죽는 것을 시인하기가 그렇게 어려웠을까요? 정말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여러분, 안 죽으리라 생각하지 말고 안 늙으리라 착각하지 맙시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것은 별수 없이 시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유형의 사람은 죽음을 향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죽음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삽니다. 여기에는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한 부류의 사람은, 어차피 죽을 인생이니 마음껏 즐기다가 죽자는 사람입니다. 그 주제가가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노나니'입니다. 죽는다는 것이요, 늙어진다는 것입니다. 맞는 이야기올시다. 젊어서 놀아야지요. 늙어서 허리, 다리 다 삐걱거리는데 어떻게 놀아요? 몸뚱이 펄펄할 때 돌아다니고 구경 다녀야지요. 구경도 구경 나름이지 다 늙어서 효도관광이라고 가봤자 별 재미 없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죽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먹고, 마시고, 방탕하고, 절망하고, 향락하는 - 이런 삶의 모습들은 죽음을 의식하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허무주의의 결론입니다. 다른 한 부류의 사람은 늘 죽음을 의식하면서 좀더 겸손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을 일상생활 속에서 되새긴다면 좀 숙연해지고 진실해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항상 인생의 무상함을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 기쁨과 보람이 없는 삶이 되고 맙니다.

세 번째 유형의 사람은 생명을 향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죽음 다음의 생명을 믿는 것입니다. 죽는 것도 사실이요, 죽음 다음에 있는 생명도 사실이기에 모든 가치관이며 철학이며 의미를 거기에 두고 삽니다. 연후에 현재를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5:3)," "핍박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5:10)." 순교자에게 최고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바로 천국 때문입니다. 모든 의미를 거기에 두고 모든 자랑의 근거도 거기에 두고서 살아가는 세계관입니다. 사선(死線)을 넘어 죽음의 요단강을 건너 저 멀리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영생을 향하여 살아나갑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을 기독교인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죽음 없는 생을 바라는 사람입니다. 어느 나이 많으신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나는 예수님 오실 때까지 죽지 않고 있다가 예수님 맞이할 거야요." 나이가 들어 저런 소리를 하는가보다 생각했지만, 정말이지 나도 나이 들면 저런 소리를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앞섰습니다. 죽음 없는 생을 바라고 그것이 축복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안 늙고 안 죽게 해달라는 식의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썩 잘못되었습니다. 기독교인 가운데에 죽음을 잘못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죽음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이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죽음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누가 죽으면 성도의 아름다운 죽음이라고 생각해야 될 터인데, 그러지를 못합니다. '어떻게 죽었지요? 안됐군요'라고 말을 합니다. 무엇이 안됐다는 말입니까? 생의 결론을 맺은 것인데요. 죽는다는 것을 근본적으로 불행하게 여기는 그러한 생각은 우리 믿는 사람으로서는 잘못된 관념입니다.

목회자로서 가끔 고민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중한 병에 걸려 임종이 가까운 사람에게 목사가 해주고 싶은 기도는 이런 기도입니다. "하나님, 이 사람이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도록 해주세요.

주님의 얼굴을 반가운 얼굴로 대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너무 고통스럽지 않게 해주세요. 어서 숨을 거두게 해주세요." 그런데, 이렇게 기도했다가는 유가족들에게 뭇매를 맞습니다. 지금 분명히 육신의 고통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해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위선입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엄숙한 시간입니다. 진실한 기도를 드려야지요. 얼마 전 우리 교회 장로님 댁에 갔었는데 그 장로님의 부친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참으로 안됐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고통스러워합니다. "하나님, 어서 이 사람을 거두어주세요. 그리고, 아름답게 생을 마치도록 해주세요." 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를 듣더니 그 장로님 하는 말씀이 "목사님, 그렇게 기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러십디다. 역시 장로님답다고 생각했습니다. 몇 시간 후 장로님의 부친은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것이 옳지요. 고통으로 죽어 가는 사람이 좀더 살면 뭘합니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아픈데요. 본인이건 남이건 냉정하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이 고통을 어서 거두어주세요. 이 육신의 장막에서 어서 벗어나게 해주세요'---이것이 참된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기도를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것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참신앙 안에서, 죽음이란 또 하나의 은사(恩賜)입니다.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인생의 종말을 짓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죽음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죽음을 피하자는 것도, 죽음을 면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죽음 다음에 있는 영생---그것이 부활신앙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의 문제요, 가장 긴급한 것은 죽음의 문제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반 부렌이라는 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활 이전에 크리스찬은 없었다." 사랑, 윤리, 정의, 사회, 평화…… 이런 것들이 기독교를 뜻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예수의 부활로 시작됩니다. 부활을 믿으면서부터 기독교가 시작됩니다. 부활의 생명, 부활의 능력 그 후에 기독교가 있는 것입니다. 그 후에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죽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복음서를 읽어 보느라면 부활사건에 촛점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씌어진 책들이거든요. 그런데 부활을 이야기하면서 또한 십자가의 고난과 그 죽음에 대해서도 역시 강조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진짜 죽음이었습니다. 그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왔다고 생생히 죽음을 묘사합니다. 완전한 죽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다고 증거 합니다. 죽음 없는 부활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고 어떤 자세로 사셨는지, 부활 신앙을 가지고서 당신에게 닥친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셨는지를 성경은 말씀해줍니다. 부활은 옛 몸의 회복이 아니요, 옛 생명의 회생(回生)도 아닙니다. 옛사람의 완전한 죽음으로 시작되는 새로운 창조입니다. 이것을 잊지 맙시다. 옛사람의 죽음에서부터 새 생명이 시작됩니다. 완전한 죽음---그 죽음에서부터 부활하는 또 다른 창조적 생명을 의미합니다. 국어사전에서는 부활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라 풀이하고 있으며, 웹스터사전에서는 'Rising from the death'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부활사건,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 그 사건과 내용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부활의 개념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건이며 동시에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부활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역사적인 부활입니다. 과거의 사건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례 되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 사건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현재적 성도의 부활 체험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생명에 접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 그 사람에게 또 다른 부활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부활 생명을 그의 인격, 그의 영혼의 지성소(至聖所)에서 만나게 될 때, 전혀 생각지 못한 생명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람이 달라집니다. 변화합니다. 옛사람의 완전한 죽음과 함께 그리스도적인 새로운 생명이 나타납니다.

목회하다보면 가끔 재미있는 일이 있습니다. 두 젊은이가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해외에서 유학하던 중에 만나 결혼을 하였는데 두 사람 다 개성이 너무 강하고 자존심이 강하여 몇 년이나 같이 살아왔지만, 티격태격 싸움이 잦았나봅니다. 어린아이가 둘이나 있는데 더는 살 수가 없어서 이혼하기로 결정을 보았습니다. 이제 합의서에 도장을 찍고 구청에 제출하면 이혼이 성립되는데, 마침 그때 남편이 장기간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어쩔수없이 남편이 돌아온 다음에 이혼합의서를 구청에 제출하기로 하였습니다. 남편이 출장을 떠나자 부인의 입장에서는 이런 것 저런 것 걱정이 많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남편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에는 '좋다 그래!'하면서 장군멍군했지만, 정신이 들고 보니 난감하거든요. 정말로 이혼을 해버리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것부터 걱정입니다. 이렇게 침울해 있는데 친구들이 "교회에나 가자"며 데리고 나갔답니다. 특별한 신앙이나 많은 성경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갑갑한 마음에 교회를 낮, 저녁, 새벽 가리지 않고 몇 달 동안 열심히 들락날락했나봐요. 이제 시간이 흘러 남편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김포비행장에 차를 몰고 나갑니다. 곧 헤어질 사람들이 반가이 인사할 리가 없습니다. 남편을 차에 태우고 그야말로 원수진 사람들처럼 입을 내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아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당신 많이 달라졌소"하더랍니다. "달라지긴 뭐가 달라져요?" "그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소?" "있긴 뭐가 있어요? 속이 상하니까 교회에 좀 나갔지요." "그래요?…… 교회가 뭔지는 모르지만 당신 얼굴이 많이 달라진 건 사실이오. 좌우간 놀랍소. 그렇다면 나도 교회 한번 나가봐야겠소. 그런 다음에 이혼합시다." 일이 이렇게 되어 그 두 사람은 마침내 예수를 잘 믿게 되었습니다. 지금 미국에서 살고 있는데 두 사람 다 집사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봅시다. 이것은 지식의 문제도, 의지의 문제도, 수양의 문제도 아닙니다. 윤리나 도덕의 문제도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에는 반드시 그 인격에 변화가 옵니다. 세계관에 변화가 오고 가치관에 변화가 오고 그의 인생이 변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현재적, 실존적 부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미래적이고 완성된 부활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는 이미 죽은 자, 산 자가 다같이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하는 영광된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 종말론적인 부활---이것은 예언적인 것이며 부활의 완성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그 몸, 그 신령한 몸으로 우리 모두가 부활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은 성경이 증거 하는 바요, 이천 년 동안 우리 신앙인들이 믿어온 유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속에 있는 부활---이것이 현존하며 또한 종말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건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 역사적인 사건을 보고도 변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식사도 하고 함께 다녔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도 변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활절과 오순절이 매우 중요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할 때에 부활사건이 신앙사건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역사적 사건이 신앙사건으로 변화합니다. 여기서 생명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건도 내가 믿지 않으면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어쨌다는 것입니까?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 사건이 나의 부활이요, 나를 위한 부활의 첫 열매가 될 때에 나와 관계가 생기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 관계를 연결해주십니다. 그때에 저들은 용기의 사람이 되고 능력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증인'이라 합니다. 원래 증인이란 헬라어로 '마르투스'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마터(martyr)'라고 합니다. 순교자입니다. 증인은 순교적 자세로 증거를 하게 됩니다.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순교자만이 진실한 의미에서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목격자입니다. 진실해야 하고 정확해야 하고 용기가 있어야 하고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플러스 알파, 즉 성령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그리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려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고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성령이 임할 때에 증인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의 자격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초대 증인들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형편없는 사람들이었어요.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한 막달라 마리아----끝까지 주를 따라가 예수님의 첫 증인이 됩니다. 배신자,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 역시 증인이 됩니다. 너무나 의심이 많아서 손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만져보고야 믿었던 회의론자 도마 역시 증인이 됩니다. 이 비겁했던 사람들이 성령이 충만 하자 자기의 경험과 지식과 생명을 다하여 증인이 됩니다. 제가 로마를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집사님 한 분이 개인적으로 저를 안내해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원래 기독교인이 아니었고, 로마에 가서 관광학을 전공한 뒤에 전적으로 돈을 벌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저를 반가이 맞이해 준 것은 매주 저희 교회에서 보내는 설교 테이프를 받아보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소망교회 교인과 다름없습니다"하며 정성을 다해 영접해주었습니다. 지금도 참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분이 바티칸궁전, 박물관, 영화쿼바디스촬영 장소며,벤허촬영 장소 같은 곳들을 다 안내해주었는데, 별 감동이 없었습니다.

제가 놀란 곳은 카타콤(Catacomb)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산 속에 있는 굴인 줄 알았는데, 시내 한복판의 땅을 인공적으로 파서 만든 굴이었어요. 엄청나게 긴 굴입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죽은 사람의 뼈가 많이 있고, 여기저기 벽에 성경구절도 씌어있습니다. 안내하던 집사님이 말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어요. 다른 관광지라면 제가 갖은 말로 잘 설명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아무런 말을 못하겠습니다. 부활을 믿고 여기서 죽어간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더군요. 굴속에서 나오면 삽니다. 그런데,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굴속에서 죽어갔습니다. 왜 그래야 했을까요? 그 집사님은 신앙인이 아니었지만, 진실한 신앙, 부활신앙 하나를 지키기 위하여 그 속에서 죽어간 수많은 순교자의 이야기가 그를 감동케 하여 마침내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카타콤의 사건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부활신앙을 가졌습니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믿었고 앞으로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내 몸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처럼 부활할 것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에 일생을 거기서 살다가 죽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전 15:32)"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그렇습니다. 부활이 있다면, 정말로 부활을 믿는다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낙심할 것도 없어요. 주저할 것도 없어요. 누구를 미워할 것도 없어요. 그야말로 자유합니다. 넉넉히 이깁니다. 무엇이 무섭겠습니까?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순교하는 스데반을 보십시오. 그 얼굴이 천사와 같이 되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부활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복음의 과업을 위임받고 이것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위대한 순교입니다.

여러분, 부활사건을 재확인합시다. 부활신앙을 새롭게 하십시다. 이 신앙이 나를 인도할 것이며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입니다. , 사단, 율법, 사망---이 모든 것들이 두렵지 않습니다. 부활신앙으로 승리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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