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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초청 비유(누가복음 14 : 12 - 14)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앞장에서는 초대받은 손님으로서 잔치석상에 이르렀을 때에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를 비유로 그리스도인의 생활 태도를 말씀한바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는 초대 받은 입장이 아닌 청하는 자의 입장에서 그잔치를 배설하고 초청하는 동기를 비유로 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먼저 한가지 생각하고 싶은 것은 지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시간이 음식을 잡수신 다음인지 아니면 전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초청을 받은 손님의 입장에서 자기를 초청한 자에게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말씀하실 수 있을까 할 때 실로 그 용기가 너무도 놀랍습니다. "자기를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지금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청해준 그 본인에게직접대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조경들을 청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분명히 자신이 청함을 받아 대접을 받고 있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불순하고 잘못된 동기로 사람을 초청하며 잔치를 배설할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보자 하니 대접받는 사람도 불쾌하고 대접하는 사람도 그렇게 마음 좋은것 같지가 않는 이런 잔치란 무의미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주 직설적으로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를 청한 자에게 잔치의 현장에서 그 청한 동기를 비판하시고 이것을 비유로 그리스도인이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제 12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면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즉 이유는 "그 사람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청한 자의 동기를 말씀하고자 하심입니다. 따라서 이는 곧 그리스도인의 행위의 동기, 혹은 선행의 동기가 어떠해야 됨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잘못하는 일도 많지만 때대로 선한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고 태어났기에 선한 일을 해야하고 또한 좋아합니다. 그래서 다소간에 선행을 베풀기 마련인데 문제는 그 선행을 할 때에 그 동기가 어디에 있고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동기를 두고 다시 한번 진단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내용은 지금 이 일은 무엇 때문에, 왜 내가 하고 있는가? 그 근본 동기가 어디에 있는가를 묻고 항상 순수한 동기와 깨끗한 마음으로 시작하여 끝도 또한 그렇게 되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오늘날과 같은 사회에서는 통하지 않을 만큼, 어쩌면 이렇게 하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을 것만 같은 너무나도 깨끗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이 순수하고 깨끗한 동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잔치를 베풀 때에든지 아니면 선행을 행할 때엔 먼저 그 동기를 물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반적으로 보여지는 선행의 동기를 이야기하자면 첫째 생각되는 것이 의무감에서 비롯되는 동기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어떤 의무를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지난날에 내가 많은 신세를 졌으니 이제는 갚아야 되겠으며, 과거에 내가 초청을 받았으니 오늘은 내가 초청을 해야 되는 이러한 입장은 모두가 다 의무적인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을 하고 선행을 한다고는 하지만 자녀가 혹은 친구를 위해서 베푸는 선행은 사실상에 있어서 선행의 의미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밀착된 관계에 있어서는 하고 싶지 않더라도 도리가 없는 것이기에 거기에는 강한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낳았으니 키워야 하고 혈연으로 맺어져 있으니 그냥 보고 지나칠 수만은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부모랍시고 자녀들에게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 아느냐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아이들이 겉으로 말은 안 하지만 속으로 하는 말이 "누가 낳으랬나? 자기 자식 자기가 키우면서 무슨 말이 많지! 이게 어디 나만 위한 건가 나도 공부하느라고 죽을 지경인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답니다. 이와 같이 막상 동기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를 묻게되면 순수한 동기를 찾기가 매우 힘든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위한 것이든 그 누구를 위한 선행이든 간에 다시 한번 그 동기의 순수함을 물어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 과거에 대한 부담 때문에 할 수 없이 해야하는 의무 같은 것이라면 그것처럼 괴로운 일이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직업을 의무로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제 와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다는 부득이한 동기에서 하는 일이라면 그 얼마나 무거운 짐이 되고 피곤한 일이겠습니까? 이와 같이 여러 가지로 불가피한 동기들이 많이 있겠습니다마는 그 중에서도 이미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갚아야 한다는 마음과 게다가 체면을 생각하는데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언젠가 한번은 사무실에서 어떤 장로님과 함께 자리를 하고 있는 중 그 장로님이 이제는 결혼식에 가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그런가 보다하고 있는데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더니 뒤적거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빨리 일어나 가시지 않고 수첩은 무엇 하러 뒤지십니까?" 하였더니 그 장로님의 말씀인 즉 지난번우리 딸의 결혼식 때에 부조를 얼마를 했는지를 보느라고 그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의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선행이 아닙니다. 결혼식 주례를 하면서 보면 축하하는 마음으로 안에까지 들어오지도 않고 그저 문전에서 봉투하나 내고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행이 아님은 물론, 그런 동기에서 나온 행위란 하나 같이 피곤한 것들입니다. 안 할 수가 없고, 안 하면 말 듣는 것! 그래서 나는 자기 결혼식에 가주었는데 우리 아들 장가가는 데에는 왜 안 왔느냐고 하고 나올 것이란 말입니다. 마치 품앗이를 하는 것처럼 오고 가는 체면치레! 이러한 체면이란 굉장히 무거운 밧줄이며 여기에 끌려 다닌다는 것은 대단히 괴로운 일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자원하 바의 자율성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행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되면 형식에 치우치게 되고, 피곤하며, 대체로 마지막에는 불평으로 끝나게 됩니다. 아무튼 의무를 앞세운 경우의 선행이란 선행이라는 어떤 형식은 있을지 모르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결코 선행이 아닌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동기로서는 도덕적 향락주의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자기사랑이요, 자기의 쾌락을 뜻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봉사를 하고 어떤 선한 일을 할 때이면 내 마음이 기쁘고 즐거우니 다른 사람 아닌 내 마음이 좋아지기 위해 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 사람을 돕자는 것도 아니요 의나 진리를 위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받는것 보다는 주는 것이 내 마음에 좋으며, 주면서 갖게 되는 다소간의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나보다 나은 사람들하고 보다는 나보다 못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 편한 이유도 바로 이런데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때때로 남을 봉사한다는 자위적 심리까지 작용하기 때문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나아가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언젠가 남에게 잘못한 일 때문에 마음이 늘 괴로운 터인데 이제 나보다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과 살면서 어떤 도움을 줌으로 지난날의 과오와 현재의 괴로움을 씻고자하는 일종의 보상심리가 있기도 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과거에 남의 물건을 도둑질했다면 오늘은 내가 사서라도 남에게 주면서 그것을 보상하고 싶은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진정한 선행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와 같이 선행 자체에 목적과 동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의 평안과 즐거움을 위해 베푸는 선행이 있습니다. 또한 선행을 마치 훈장이나 악세서리처럼 생각하여 나는 최소한 이렇게 다른 사람을 돕는 사람임을 나타내 보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에 성경에도 보면(막 12 : 41-44) 연보를 하면서도 자기 재산의 전부인 두 렙돈, 즉 엽전 두닢을 넣고는 몸둘 바를 모르는 과부가 있는가 하면 부자들은 풍족한 중에 내면서도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많이 낸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모습이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부자와 같은 경우 이것은 하나님 앞에 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사람 앞에서 자기를 자랑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두고 자주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합니다마는 거기에서도 나오는 이야기가 그 강도 만난 사람이 쓰러져 있는 장소가 멀리 외진 여리고 골짜기가 아닌 예루살렘 한 복판이었다면 레위인이나 제사장이 결코 그냥 지나가 버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리고 골짜기는 보아주는 사람도 없거니와 강도 만난 사람은 다 죽어가고 보자 하니 도와 더라도 제대로 인사를 치를 것 같지도 않고 하여 그냥 버려 두고 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선행이란 여러 가지 동기에서 행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선한 일을 행함에 있어서 그 동기를 묻고 또 물어 참으로 순수한 동기에서 나온 진정한 선행을 할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다음 세 번째로 생각하는 동기로서는 받고자하는 마음이 먼저 있음으로 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계산이 앞서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되돌아올 댓가를 바라는 마음에서 행하는 선행으로 마치장사꾼과 같은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부자를 청하지 말라는 것인데 이는 저가 부함으로 또 다시 나를 청하게 될 것이며, 그렇지 않더라도 어떤 방법으로든 내가 되돌려 받게 될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물론 우리가 선행을 함으로 먼 훗날 그 명목으로 받을 수도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선한 일을 할 때에 받고자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받고자하는 마음에서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어느 선교사에게 있었던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중국에서 복음을 전하던 선교사가 어느 날 홍수에 휘말려 떠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본 어떤 사람이 이 서양 선교사를 죽을 처지에서 건져내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 선교사는 너무도 고마와서 내 평생 이 은혜를 갚겠다며 선생님의 존함이 어떻게 되시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끝까지 자기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하는 말이 "성경에 어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름이 있습니까?" 하고서는 그대로 훌훌 떠나더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멋있는 이야기입니까? 여러분! 성경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름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혹시 요즈음 유행하는 말 중엔 '선금십일조'라는 말을 들어보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본래 십일조란 내가 하나님 앞에서 받은 바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창고가 넘치도록 복을 주시마고 하셨습니다(말 3:10). 여기에서 명심할 것은 바치는 것은 순수하게 바쳐져야 하고 축복은 그런 다음에 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림으로 복을 받는다하여 바칠 때에 받고자하는 마음으로 바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내가 선행을 함으로 칭찬을 받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칭찬을 받기 위해 선행을 하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선행을 함으로 복을 받을 수도 있겠으나 처음부터 복 받고자하는 마음에서 선행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이는 같은 것 같으면서도 실상에 있어서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선금 십일조'란 어떤 것이냐 하면 예를 들어 지금 내가 100만원의 수입이 있었다면 당연히 10만원의 십일조를 바쳐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금 십일조'는 그 순서를 바꾸어 내가 100만원을 벌고 싶으면 미리 꾸어서라도 그 십일조의 몫으로 10만원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 네가 100만원을 벌고 싶으냐? 그렇다면 미리 10만원을 바치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받고자 하는 마음이 먼저 있어서 하는 선행은 결코 선행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받고자 하는 마음을 앞세워 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하나님께 장사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손님을 청할 때에 나타난 받고자하는 마음이 어떤 것이냐 할 때 우선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중에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일단 손님을 초대함으로써 돌아오는 이득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는 한마디로 말하여 매우 정치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귀한 분을 모셨고 또한 많은 사람들과 친해짐으로 언젠가는 나를 도와줄 수도 있을 것이며 더욱이 그토록 귀한 손님이 우리 집을 다녀감으로 많은 사람들이 나를 높이보고 신임해 줄 수도 있을 것이란 말입니다. 그 때문에 아마 예수님을 이 자리에 청한 의도도 예수님께서 무엇을 주리라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 같은 귀한 분을 우리 집에 한번 청했다는 사실로 인하여 자기의 인격을 높이려는 데에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하여 어느 때이고 예수님께서 출세를 하게되면 "우리 집은 예수님께서 다녀간 집"이라며 한 마디 하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아무튼 예수님께로부터 무엇인가 바라는 바가 분명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돌아오는 이득을 먼저 생각하는 지극히 정치적이고 상업적인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비단 그런 이득이 아니라 하더라도 도로 청하여 갚음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오늘은 내가 이렇게 청했으니 이 다음에는 나를 청해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매우 직설적이고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내게 갚음이 될까 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도로 청할 것을 미리 생각하면서 사람을 청한다는 것 역시 좋은 동기가 되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가장 정신적이면서도 사회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 칭찬과 존경과 그리고 명예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사람도 청하고 선행을 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아무개가 참 훌륭한 일을 한다는 칭찬을 들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명예를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이것은 돈을 내고 명예를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선행이 분명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조그마한 선한 일을 하면서 신문에 내는가 하면 아예 기자부터 불러놓고 일을 치르는데 아무래도 아름답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언젠가 한번 홍수가 나서 여러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어 수해 의연금을 모금할 때입니다. 그 때문에 방송국에서는 연일 누가, 혹은 어디에서 몇 백만원, 몇 천만원을 내었다며 보도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저희 교회에서도 헌금을 하여 어떻게 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는데 방송국에서는 소망교회에서도 모금을 좀 해달라며 자꾸만 전화가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는 안 할 것이며 방송에는 무엇 하러 나오느냐 하고서는 현지 답사를 해 보았더니 나라에서 쌀과 라면은 주는데 반찬이 없어서 무척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필요한 반찬거리를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 고추장을 비롯하여 깡통으로 처리된 천만원어치의 반찬을 트럭에 싣고 직접 현장으로 갖다 주었습니다. 그후 그 분들이 하는 이야기가 소망교회가 진짜 소망교회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기네들이 당장에 필요한 것을 갖다주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방송국으로 갖다 준 것은 9개월 후에까지도 그 사람들 손에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수재를 당한 지가 언제인데 이러고 있느냔 말입니다. 가지고 오는 것 기다리며 모아서는 조사하고 무엇하고 하는 동안에 다 끝나고 말았으니 이런 것이 문제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 대로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정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하는 마음이 앞서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시험이 있으니 그것이 다름 아닌 비난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오늘이라도 구제를 하겠다고 나서게 되면 당장에 들려오는 말이 "제가 돈이 얼마나 있다고 그렇게 뿌리고 다니냐?" 혹은 "국회의원 출마라도 할려나?"는 등 별별 소리가 다 나올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러한 비난을 들음으로 마음이 상하거나 혹은 대항하며 변명을 하게 되면 그 선행의 동기는 또 다시 잘못된 것이 된다는점입니다. 처음은 좋은 동기에서 시작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잘못된다면 그처음 동기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결과가 첫 동기를 다시 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때에 가서 비난을 감당하지 못하면 결국은 동기가 흐려지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순수하지 못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사람들이 선한 일을 하고 나서도 꼭 비난을 듣는다하여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이 시험을 잘 감당해냄으로 그 선행이 하나님 앞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그 비난에 대항하여 다른 말이 나오게 되면 모처럼의 고운 뜻과 수고한 바가 다 무위로 돌아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일에는 칭찬보다는 비난이, 그리고 명예보다는 시비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음은 물론, 그로 인해 그 선행에 대한 의미를 재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해야 할 순수한 동기란 어떤 것인가 할 때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 향하는 마음뿐입니다. 그러자면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야 무엇이라고 하든 나 같은 죄인을 구속해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그것만이 선행의 순수한 동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감사하는 마음이 바탕이 되어 뜨거운 사랑이 발동할 때 그 사랑이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직감적인 긍휼이 선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 때문에 선행이란한번 마음에 꼭 집히는 즉시에 행해야지 하룻밤만 자고 나도 마음이 달라지고 두 번만 다시 생각을 하여도 마음이 변하게 됩니다. 여러분께서 남을 도와주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어떤 때에 누가 와서 도움을 청할 경우 단번에 아무 말 없이 도와주면 간단한데 이것을 도와줄까 말까하고 두 번만 생각하게 되면 "이렇게 자꾸 도와줘 버릇하면 버릇이 되어 이 사람 못쓰게 되는데" 하고 방향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돈으로 찬거리를 사면 얼마나 되는데 하고 나오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를 하면서 대심방을 하던 어느 날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서 환자가 누워있는 한 가정을 심방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만 하더라도 대심방이라면 장로, 권사, 집사하여 7-10명의 수행원이 함께 다니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미처 모르는 중에 지금 이 환자가 이렇게 어려운 처지에 누워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 어느 장로님 한 분이 환자가 누워있는 아랫목에 손을 넣어 보고는 싸늘하자 "아이구 연탄불이 꺼졌는가 보구먼"하고서는 당장에 부엌으로 나가 보더니 정말 연탄불이 꺼졌다며 들어와서는 이리 저리 둘러보면서 병원에는 가보았느냐고 물어 봅니다. 그러자 "병원에 갈 돈이 있어야지요?"하고 환자는 힘없는 대답을 합니다. 이 장로님은 생활이 그렇게 넉넉한 분이 아닙니다. 그저 구멍가게 같은 데서 장사를 하며 지내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 장로님께서 자기주머니에 들어있는 장사 밑천 그대로를 모두 꺼내어 가만히 이불 밑에 넣어놓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제가 "장로님 얼마나 드린겁니까?"하고 물어 보았더니 자기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사는 무엇으로 하시렵니까?" 하였더니 "아! 장사야 내일 또 벌면 되지요 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새삼 그 장로님이 참 귀한 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첫 동기, 첫 마음, 처음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맨 처음에 생각되어진 그 직감적인 긍휼에서 선행이 이루어지게 할 것이란 말입니다. 만약 그러지 않고 두번 세번 생각하다보면 그러는 동안 벌써 그 선행은 행하지 못할 것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두고 보아도 현대인이라면 아마 이렇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가만히 보자 하니 다 죽어 가는 지경이고, 도와주기 시작했다가는 끝이 없을 것이란 말이야! 뿐만 아니라 나아도 병신이 되겠으니 그대로 죽는게 낫겠어"라고 말입니다. 무슨 일이든 생각을 하기로 들면 별별 생각을 다하게 되는 것이며 그러다 보면 도와주게 되어 있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다음 일은 생각할 것 없이 처음에 가지는 그 뜨거운 사랑과그 긍휼 그대로를 가지고 행할 때 그것이 선행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 세번째로 생각하는 것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마음입니다. 따라서 이 마음이 있는 한 어떠한 비난과 오해가 있어도 개의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며, 혹은 잘못이 있다손치더라도 내 마음의 동기는 그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후회 없는, 그리고 일관성 있는 순수한 동기로 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랍비의 교훈에 보면 "최고의 선행은 주는 자가 누구에게 주는가를 모를 때에만 선행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무엇을 줄 때에 누구에게 준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좋으며, 또한 받는 자 편에서도 누가 내게 주었다는 것을 모를 때에 그것이 순수한 선행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헌금을 하는 일도 그렇습니다. 간혹 어떤 분들이 "우리 교회는 넉넉한데 내 십일조 내는 것으로 시골 교회를 도와주면 안됩니까?"하고 질문을 해올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십일조는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안됩니다. 어디까지나 내가 썼으며 내 돈인 것이지 어떻게 그것이 하나님의 돈이겠으며 게다가 갖다준 사람으로 인사까지 받았다면 나에게서 끝난 것이지 어떻게 하나님께 바친 것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꼭 어떤 교회를 돕고 싶을 경우에는 헌금을 내면서 "이 헌금은 ○○ 교회로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전제를 붙이면 그 교회로 보낼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교회에서는 소망교회에서 보냈다는 것 외에 끝까지 누가 보냈다는 것을 모르고 지낼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진정한 선행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보내고 내가 인사 받으며, 감사장, 감사패 다 받고 나서 무슨 선행을 이야기한단 말입니까? 선행이란 결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랍비의 교훈처럼 정말 누가 바쳤는지 누가 보냈는지, 누가 받았는지도 모르게 이루어지는 것이 진정한 선행인 것입니다. 만약 그와는 달리 대상을 알게 되면 훗날 그 사람이 자칫 잘못 되기라도 하는 경우 "내가 모처럼 도와주었더니 저 사람이 저렇게 되었구나"하는 섭섭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데 이 또한 잘못된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 전혀 아는바가 없어야 진정한 선행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격언에는 "선행의 최대 보수는 한번 더 선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선행을 함으로 얻어지는 결과, 그 최대의 보수는 또 다시 선행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보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결론으로 돌아가 보면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잔치를 베풀든 남을 돕든 간에 혹시 내게 갚음으로 다시 돌아오면 어떻게 하나하는 두려운 마음으로 차라리 아무 것으로도 갚을 것이 없는 자들을 도우라는 말씀입니다. 그러자면 13절에 기록된 대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전혀 갚을 길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이 갚을 길이 없는 사람! 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고맙다는 인사도 못할 그런 사람을 도우라는 것이며 그것이 순수한 선행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이렇게 하면 의의 부활시에 하나님께서 직접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늘 나라에 쌓는 것이며 결과적으로는 하나님께 꾸이는 것이 됩니다. 또한 참된 선행은 결코 무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와 그 후손에게 돌아가며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선행을 놓고 새로운 진단을 하면서 아무쪼록 어떠한 경우에도 위선적인 선행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신앙적인 가장 순수한 동기에서 선행을 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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