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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역사(요 16:1-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 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니라.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요한복음을 13장부터 14장, 15장, 16장까지가 계속적으로 마지막 성찬예식을 하시며 예수님께서 남기신 긴 설교의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앞에 놓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유언과 같은 말씀이며,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위로와 경고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선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당시의 분위기를 잠깐 참고할까 합니다. 첫째,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당장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계십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과 9시간 후에는 십자가酎를 지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아시면서 지금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이고, 둘째는 혼돈과 암흑의 시간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누가 생각해도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는 것은 모순입니다. 의로운 자는 복을 받고 악한 자가 벌을 받아야 하는데,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은 악한 자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으며,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시는 등 어디를 보아도 죽어야 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죄인으로 몰려 십자가를 지시므로 암흑과 권세의 승리를 보는 것 같아, 만약 십자가 후에 부활이 없었다면 이 세상은 의도, 진리도 소망도 없는 깜깜한 세상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지금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모순과 부조리, 비합리와 어두움, 그리고 혼돈이 목전에 닿아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의 신앙이 흔들리게 되고 미혹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핍박이 가해지며 또한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만이 아니라 부활하셨을 때에도 제자들은 핍박을 당하게 됩니다.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기도 하고 목 베임을 당하여 세상적으로 볼 때는 말할 수 없는 고난과 환난이 잇달아 일어났습니다. 이상과 같은 모든 일들을 예견하시면서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째로, 출회당하리라고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요16:1-2상반절)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대적인 독특한 공동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회당입니다. 이들은 이 공동체에서 벗어나면 사람의 구실을 할 수 없는 것으로 대단히 중요한 단체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열 집만 모여도 반드시 회당을 짓고 명부를 만들어 공동체를 만듭니다.(오늘날 우리 교회로 말하면 등록 교인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야만 이스라엘 사람으로서의 모든 권리와 의무를 행사할 수 있고, 뿐만 아니라 서로 돕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필자가 이스라엘 회당에 가서 설교를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마침 그 날의 말씀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네 이웃이 누구냐 할 때 이스라엘인만이 이웃이며, 그 외는 이스라엘을 돕는 극히 제한적인 몇 사람만 이웃이라고 설교를 했습니다. 이렇게, 원수와 이웃을 갈라 놓고 자기들끼리만, 즉 이스라엘 공동체 일원만이 돕고 사랑하는 그런 이웃 사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공동체에서 출교를 당하면 그 순간부터는 이방 사람으로서, 축복받지 못한 사람으로 취급하여 심지어는 돌로 쳐 죽여도 살인죄가 되지 않습니다. 출교의 대표적인 인물이 스데반으로 그는 회당에서 쫓겨나면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도,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이 출교당할 것을 두려워함을 공부했습니다. 출교를 당하면 이웃과 교제가 끊어지는 것은 물론, 이스라엘과는 완전히 관계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스데반과 같이 돌로 쳐 죽여도 무방한, 전혀 보호받지 못하는 외톨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출교당하게 되고, 핍박을 받고 어렵게 순교하게 될 것을 미리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신다는 점입니다. "죄인과 함께 융성함을 지내는 것보다 차라리 예수와 함께 고독한 것이 낫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와 함께 고독한 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로부터 쫓겨나도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이므로 상관이 없습니다.
둘째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출교를 할 때, 그들의 생각입니다.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요 16:2 하반절) 예수믿는 사람들을 죽이면서 저들의 생각은,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을 죽일 때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죽였습니다. 예수님을 못박을 때도 율법을 빙자해서 죽였습니다. 여기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못하면 진리가 흔들리게 됩니다. 신앙이 든든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종인 제사장이 죄인이라고 규정했으니 죄인일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죽일 때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그들이 말할 것을 예수님은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이토록 잘못된 이유는, 모르기 때문이라고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요 16 : 3) 사도 바울도 몰랐기 때문에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멀리까지 따라가며 핍박을 했습니다.
소위, 신앙이라고 하는 무지가 이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는 말은 일반 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혼돈의 시대가 온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신적 핍박의 시대가 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예가 여기에 있다 하는데, 도대체 무엇이 옳은지 혼돈하게 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아니다. 저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워도 그것은 잘못이다"라고 확실하게 판단하고 자기 신앙을 고수하려면 얼마나 정확하게 잘 알아야 되겠습니까? 어쨌든 신학적 혼돈, 신앙적인 방황이 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적으로는 신앙의 혼돈이 있고, 외적으로는 핍박이 오는 이 어려운 때에 어떻게 해야 바른 신앙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성령뿐입니다. 성령이 너로 하여금 핍박을 이기게도 하고, 혼돈에서 바른 신앙을 찾도록 해준다는 말씀이 이 본문의 주요 내용입니다. 핍박이 있어도 보혜사 성령이 너와 함께 하시고, 혼돈이 와도 네가 믿는 신앙이 바른 신앙임을 성령이 증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이런 결정적인 시간에 바른 신앙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성령만이 용기를 주고 지혜를 주는 것입니다. 대체로 신약에서는 성령론을 셋으로 나누어 생각하는데, 그것은 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바울 서신에 나타난 성령론입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성령론은 대체로 구원론적이고, 사도행전에는 선교적이며 교회론적으로써 복음이 어떻게 만방에 전파되고 여기에 성령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 서신은 성령이 실제 우리 개인 생활에 어떻게 적용되며 이단 사상과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나고 있는 성령은 구원론적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그 중 요한복음에 나타난 성령은 극히 개인적인 것입니다. 특별히 이 본문에서는 핍박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요한복음의 성령론 중에서 아주 중요한 부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성령론을 두 곳에서 취급하고 있는데 3장에서는 중생의 교리가 있고, 14장, 16장에서는 사도들의 고난과 핍박 속에서 성령이 보혜사로 어떻게 역사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무엇을 어떻게 하는가에 대해 알고 싶을 때는 구약이나 바울 서신에서도 볼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핵심은 복음서에 기록된 말씀들입니다. 예수께서 성령을 어떻게 말씀하셨는가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16 : 4에서부터는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시는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요16:4) 첫째로, 기억나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끔 나이 많으신 성도들 중에서 좋은 설교 말씀을 듣고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데 다 잊어버릴 것 같아 미리 걱정이 된다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필자는 그 때마다 대답하기를, "염려하지 마세요. 성령은 필요한 시간에 필요한 말씀을 기억나게 도와주십니다" 하고 위로해 드립니다. 만약 필요하지 않는 시간에 너무 많은 말씀들이 생각나면 그것도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필요한 시간에 필요한 것만 기억이 나야 합니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기억이 난다고 하는 말은 창작이 아닙니다. 이미 들었던 말이 나보고 깨닫고 감격한 일들이 일단 잊어버렸다가 어느 결정적인 순간에 생각이 난다는 말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빌려서 말하면, 성령은 창작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역사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성령은 우리들의 마음 문을 열어서 말씀을 받아들이게 하고, 지혜를 주어 깨닫게도 하고, 순종하게도 하고, 때로는 조용히 잠자는 것같이 가만히 있다가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이미 듣고 본 말씀들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이기고 핍박을 견디며 사랑하게 하여 말씀의 효과가 드러나며 말씀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농사하는 이론으로 생각하면 보다 쉽게 이해될 것 같습니다. 종자를 심었는데, 심었다고 다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적절한 여건에서 일정한 때가 되어야만 싹이 납니다. 언젠가 잔디만 연구해서 잔디 박사가 된 분을 만났습니다. 그는 잔디씨를 뿌렸는데 싹이 나오지 않다가 한해 겨울에 눈 속에서 약간 얼었다가 다시 녹았을 때 싹이 나는 것을 보고 잔디씨 중에는 동면하는 것이 있음을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잔디씨를 냉장고에 넣어 적절한 온도에 유지했다가 뿌렸더니 싹이 나는 것을 연구해 박사가 된 것입니다. 씨앗을 뿌려도 적당한 여건이 되지 않으면 싹이 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의 씨앗이 우리 마음 속에 뿌려졌습니다. 뿌려졌다고 다 싹이 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말씀들이 싹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지런히 듣고 배워서 결정적인 순간에 필요한 말씀들이 생각나게 해서 열매를 맺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성령이 기억나게 하실 것입니다.
둘째로, 성령이 오시는 것이 너희에게 더 유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시는 사건과 성령이 임하는 사건을 직선적으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가시지 아니하시면 성령이 임하지 않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는 성령이 임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이것은 성령의 특별한 기능으로 성령론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말씀입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이전에는 성령의 역사가 없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세례 받으실 때도 비둘기와 같은 성령이 임하셨고, 거슬러 올라가면 잉태하실 때도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셨으며,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할 때에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것은 네가 알고 말하는 것이나 혈육이 알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게 했다. 즉 성령이 알게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성령은 옛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왜 오순절의 성령만 강조하며, 예수께서 가셔야만 성령이 온다고 말씀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성령이 아니라, 성령의 기능의 차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창조시에도 성령의 역사가 있었고 선지자들에게도 성령은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 성령의 역사는 복음적 기능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한 사람이 구원을 받는 복음의 역사로 나타나는 성령의 기능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에라야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은혜 받는 성령의 역사는 십자가 사건과 절대적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다음에야 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내가 떠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 없이 특별히 신비적으로 개인에게 역사하므로 효과적입니다. 어느 장소에서나 누구에게나 일시적으로 역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이 떠나가고 성령이 임하는 것이 더 유익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8 : 29에 보면,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고 그리스도의 영이, 즉 성령이 항상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여기서 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환난에 들어가는 제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말씀하십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나를 다시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 16 : 8-11) "죄라 함은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는 말씀의 뜻은 성령이 죄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죄를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헬라 원문대로는 '엘레그케이'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을 우리 성경에서는 책망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어쨌든, 성령께서는 죄에 대하여 무엇이 바른 것인지 판단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죄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은 율법이지만 죄를 심판하는 것, 즉 판정하는 분은 그리스도입니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저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못 박을 당시에는 그것이 죄인줄 알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죄인줄 알았던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예수님이 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강림을 하고 보니, 의인을 죽였고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못박은 것을 알았습니다. 사도행전 2장, 3장에 보면 베드로가 설교하면서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부활시켰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이 때 많은 사람들이 "선생들아, 어찌할꼬. 우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3천 명이 다같이 회개를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못박은 사람들은 로마 군인입니다. 그러나, 3천 명은 "우리" 라고 자신들을 정죄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내가 예수를 못박았다고 내 마음에 판정을 하는 그것이 성령입니다. 오늘 우리도 십자가가 2천 년 전의 사건이 아니고 바로 지금 내가 못박았고, 나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고 나와 십자가의 관계를 말하고 나를 심판하시는 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2천 년 전의 사건이 오늘 나를 위한 사건이라고 누구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나에게 역사하셔야만 받아들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은혜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의에 대하여 성령이 판정을 해주신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아버지께로 간다는 말은 곧 십자가를 진다는 말인데,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면, 의(義)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모든 사람은 예수께서 죄인으로 저주받아서 죽는 줄 알았지만, 그러나 성령의 눈으로 볼 때에는 의인인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신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십자가 위에 나타났습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진노가 바로 십자가 위에 나타났다"고, 즉 하나님의 의가 십자가 위에 계시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바울의 신학입니다. 의가 무엇인가를 성령이 가르쳐 줍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적 의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말하고 판정해 주시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다음은,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죄인으로 몰아 십자가에 못박았고 제사장들은 여기에 동조했습니다. 관원들도 그렇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역사의 심판은 그 위에 있습니다. 빌라도가 결코 의의 기준이 아닙니다.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는 말은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즉, 빌라도가 아무리 판정을 했어도 그것으로 의와 불의가 판정되는 것이 아니라, 참 심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의인을 죄인이라고 판정했다는 것은 판정한 사람이 죄인이라는 말이 됩니다. 재판하는 순간을 성령으로 보면, 재판장인 빌라도가 죄인입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에는 예수님이 피고요 빌라도가 재판장이며 원고는 제사장입니다. 그러나, 성령 받은 자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이 재판장이시고 빌라도가 오히려 피고로서 지금 재판 받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심판이 보이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임금들을 심판하시고 역사를 심판하십니다. 성령이 심판하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람은 무한히 자유롭습니다. 누구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영이 그 안에서 바른 판정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오늘 우리에게도 함께 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중심적 의가 무엇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고, 심판이 어디에 있는가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핍박 중이든, 환난 중이든, 혼미한 중이든 절대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죄가 무엇이며, 의가 무엇이며, 심판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귀한 성령의 본질적인 역사입니다.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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