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생명을 사랑하는 자(요 12:20-26)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쫘온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토록 보존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지금까지 계속 공부하고 있는 내용은 유월절 중에 되어진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었고 그 중에 예수님도 계시면서 일어난 사건들임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모인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높이 존경하고 흠모하여, 그들의 최고의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다투어 오늘이나 내일이나 예수님께서 유대 나라의 왕이 되실 것인가 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앞장에서 보았듯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호산나하며 만세를 부르고 뒤따르는 장면은 예수님의 인기가 절정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 행렬과 외침은 왕에게 드리는 치하요 영광으로써 굉장한 퍼레이드였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 이 행진은 예수를 죽이려고 예루살렘 성전에 본거지를 정하고 있는 제사장들을 향해 나팔소리는 없지만 진군해서 쳐들어가는 행렬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상은 외적으로 나타난 모습이었고 내적으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의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나사로가 살아난지 불과 며칠 후였기에 유월절에 온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유월절에는 무엇인가 큰 것을 기다리는 바람이 있었고, 동시에 한 편으로는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하고 있음을 알았으므로 아슬아슬한 위기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원하는 바는 예수께서 천지개벽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큰 능력을 나타내시어 로마 사람들을 다 쳐부수고 헤롯의 보좌를 둘러엎어 그들이 원하는 종말적 메시야로 나타난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몹시 불안하고 아슬아슬한 느낌입니다.
바로 이때, 헬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합니다. 이들은 원래 헬라 사람이었지만 유대 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헬라 문화에 정통하면서 유대주의에 속한 사람들로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가 예수님을 만나고자 청하게 된 것입니다. 헬라 사람들 역시 예수께서 세상 인기가 절정에 달한 바로 그 순산에 무엇인가 크게 기대하는 마음과 또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찾아온 것입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요 12 : 20-22) 헬라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직접 예수님을 만나려 하지 않고, 먼저 빌립을 만나 조용히 청을 넣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이 안드레아와 의논하여 예수님께 말씀드리는 대단히 지혜롭고 정중하게 처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간략하게 그저 헬라 사람들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어, 그들이 몇 사람이고, 이름이 무엇이며, 또한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단지, 그들이 예수님의 높은 인기와 영적 권위를 존경하여 제자에게 먼저 교섭하는 신중한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가지 그들이 조용히 만나려고 했던 이유는 제사장들과 종교지도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면, 열 두 제자 중에 하필이면 빌립에게 먼저 청을 넣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 그래도 베드로가 먼저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헬라 사람들이 빌립을 부른 이유는, 빌립의 이름이 헬라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빌립은 소위 헬라파 유대인으로서 헬라 문화에 익숙한 사람이었으리라고 짐작을 합니다. 그러므로, 헬라말을 잘 했기 때문에 먼저 빌립을 만나서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빌립은 다시 안드레와 의논하고, 그리고 예수님께 헬라 사람들이 뵙기를 원한다고 전하게 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이유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신빙성이 부족하지만 다음과 같이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헬라에 있는 조그만 도시국가 에뎃사 왕국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온 이유는 에뎃사 왕의 아들이 지금 문둥병에 걸려서 근심 중에 있는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문둥병은 물론 죽은 사람까지도 살린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에뎃사 왕은 이스라엘 나라에 대해 잘 아는 몇 사람의 사신에게 예물을 갖추어서 예수님께 보낸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뵙고 전할 내용은, 우선 왕의 아들의 병을 고쳐 주십사 하는 것과 동시에 왕의 고문으로 모시겠다는 것입니다. 헬라 사람들도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기회만 엿본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서둘러서 예수님을 만나며 여기 계시다가는 아무래도 무사하기가 어려울 것 같으니 자기 나라로 피신하여 왕의 고문관으로서 여생을 편안하게 지내시라는 교섭입니다. 만약 이 전설이 사실이라면, 이 교섭을 받은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하고 궁금하게 생각됩니다.
본문 23절에 보면, 얼핏 생각하기에는 위의 질문에 동문서답하는 예수님의 말씀 같지만, 깊이 생각하면 직접적인 대답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과 안드레가 예수님께 가서 헬라 사람들이 찾아온 용건을 전하자 대답하시기를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12:23)라고 얼른 이해하기가 힘든 말씀을 하십니다. 자, 헤라의 에뎃사 왕국에서는 세상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헬라 사람들이 보장하고 있는 세상적인 영광을 바라보면서 그것은 영광이 아니고, 이제 참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하시며 그 시간에 십자가를 생각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인자'라는 말을 쓰셨는데, 매우 중요한 용어입니다. 인자란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이나, 여기서도 사람의 아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결론만 말씀드리며 말세에 나타날 하나님 자신, 즉 종말적 계시자로서 인자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가리킬 때 언제나 인자라고 성경에서 90회 이상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한번도 인자라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단지, 스테반이 순교하면서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는 한 마디가 있을 뿐입니다. 제자들의 입을 통해서 인자라고 부르지 못한 것은 답답한 일입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 여기서 영광이라고 하는 것과 얻을 때라고 하는 것의 두 가지를 동시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광이 무엇이냐 하는 것과 그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하는 것, 즉 구체적인 상황 인식은 매우 중요한 생의 원리입니다.
먼저, 영광을 생각해 보면, 에뎃사 왕이 보장하고 있는 그런 영광은 참 영광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의미하는 영광은 십자가 뒤의 영광입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거짓이요 허깨비로서 잡은 듯하지만 잡힌 것이 아닙니다. 고통이 없는 명예는 명예가 아니며 수고하지 않고 생긴 돈은 돈이 아닙니다. 땀과 희생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 참 소유요 명예로서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을 생각할 때 그에 합당한 고난을 생각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이 살기 어렵고 괴로운 이유 중의 하나가 공짜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공짜를 너무 좋아해 기도 몇 마디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소위 기복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전혀 생각도 말아야 합니다. 고난이 없는 영광은 마술적 영광으로써, 그것은 영광이 아닙니다.
다음, "얻을 때가 왔다"는 말은 바로 지금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많은 사람들이 "때"를 생각할 때, 언제나 미루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 바로 지금의 고난을 생각하지 않고, 오늘까지는 이렇게 지내고 내일부터 다시 하겠다고 연기한단 말입니다. 예를 들면, 새벽기도를 작정할 때도 내일부터라고 항상 내일에다 기준을 두므로 실패합니다. 우리에게 요구하는 희생에 대해서는 바로 지금으로, 단 한 시간이라도 뒤로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지금 이 사건 속에 여기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십자가는 나 외에 다른 사람이 질 것이다, 또는 굉장한 큰 사건으로만 십자가가 이루어지는 줄 알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내가 당면하는 조그마한 일 하나하나에 다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느 신문사에서 필자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내용인즉, 요새 교회를 비방하는 글들이 많은데, 이에 대해 변명하는 글을 써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저는 쓰지 않겠다고 거절하자 기자는 굳이 그 이유를 말해 달라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한 번 쓰면, 교회를 헐뜯기 위해서 글을 쓴 사람은 두 번 쓸 것입니다. 그러면, 지면에서 서로 싸우는 것밖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억울한 말을 듣고도 가만히 참는 것이 십자가를 아는 사람입니다. 변명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당하는 조그마한 사건, 억울함 속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here and now to me), 내가 사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 내가져야 할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축복을 원한다면 그것은 미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영광을 말씀하시는 바로 그 순간에 십자가를 생각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의 마음이 얼마나 들뜨고 좋았겠습니까? 바로 이때, 주님은 마음을 바꾸어 인자가 제사장들에게 팔려서 십자가를 지실 것이다라고 말씀을 합니다. 베드로는 당장 반응하기를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속단합니다. 이때, 주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도다"(마16:21-23)라고 십자가 없는 영광을 생각하는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가차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을 바라는 그런 얄팍한 사람은 사탄의 마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래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첫째, 땅에 떨어져서 묻혀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공중에서 저절로 열매 맺는 것이 아닙니다. 땅에 묻히고 밟혀져야, 싹이 나고 꽃이 피며, 드디어 열매가 맺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개를 내젓고 위로만 올라가는데, 무슨 열매가 있겠습니까? 진정으로 사랑의 열매를 맺고 싶다면, 땅 속에 들어가 묻혀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죽어지내야 한단 말입니다. 요즈음은 죽어지내는 사람보다 산 사람이 더 많습니다. 죽어지내는 자는 말이 없고 소원이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생의 원리에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고, 여기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 맺는 것은 하나님의 하실 일입니다. 유명한 빅스터의 설교처럼 하나님이 하실 일과 우리가 해야 할 일(His part and our part)을 혼돈하면 안 됩니다. 열매 맺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닙니다. 나는 땅에 떨어져 죽는 것까지만 나의 할 일로서 이것만이 목적입니다. 열매에 관한 일은 하나님의 일로,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흔히 땅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를 좀 알아달라고 야단입니다. 아니,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무슨 사랑의 보답이 없느냐고 떠들어 얄팍하게 나가고 있습니다. 좀더 깊숙이 무게 있게 누구도 모르게 땅에 묻힐 수가 없겠습니까? 사랑이란 땅에 떨어져 밟히어 썩어 없어지는 것입니다. 당장 보상을 바라는 마음은 열매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의 생명이 죽어야만 열매를 맺는다는 것 얼마나 중요한 생의 원리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인내를 의미하며 이 죽음은 곧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죽음과 삶은 언제나 함께 있습니다. 생을 바치는 헌신 속에서만 살아가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원죄라는 것이 있기에 누군가가 희생을 해야 합니다. 희생 없이 되는 일이 없습니다. 내가 희생을 지불하지 않으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지불해야 합니다. 누군가의 땀과 피의 봉사가 있고서야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 : 25) 희생을 구체적으로 해설해 주는 말씀입니다. 얼핏보면 자기 생명을 미워한다는 말이 자기 학대나 자살적인 의미로써 염세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하고 잘못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사랑은 현세적인 것으로 현세적인 자기 사랑에 빠지면 미래적인 생명을 잃게 된다는 뜻입니다. 현재보다 미래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현재 순간적으로 좋은 일을 취하다가 미래를 망치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공부하는 것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공부할 때에 누구나 좋아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내가 이 고생을 하지 않으면 미래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희생, 오늘의 수고, 오늘의 죽음은 미래를 윤택하게 하고 미래를 영화롭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자기 안일, 자기 사랑에 빠지면 미래는 암담한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현재적으로 자기 육체를 사랑하면 영적으로는 죽어 버립니다. 너무나도 많이 경험하는 일입니다. 육체가 지금 원하는 대로 다 해 주면 피곤해지고 건강도 잃게 되며 정신까지도 혼미해집니다. 자고 싶다고 자꾸 자게 되면 24시간을 다 자도 잠은 모자랍니다. 이상하게도 육체는 조금 팽팽하고 긴장되게 스케줄이 짜여 있어야 좋습니다. 먹고 싶은 대로 다 먹고 자고 싶은 대로 다 자면 제 명대로 살지 못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육체적인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영적인 손해가 많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쉬운 예로, 주일날 몸이 피곤하여 오늘은 좀 쉬어야겠다고 하고 육체를 위하다 보면 좋은 말씀을 놓치게 되고, 영적인 차원에서 손해를 본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나만을 위하는 자기 중심적인 사랑은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이는 일입니다. 언제나 큰 의미에서 대아를 생각해야지, 나 하나만을 위하는 자기애는 파멸의 길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본문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한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위하고, 진리를 위하고,, 남을 위하고, 또는 영적 생명을 위한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높은 차원의 영적인 생명을 얻게 됩니다. '미워한다'는 말이 히브리말로는 '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덜 시랑 하는 것이 미워한다는 것임은, 문자대로 사실일 때가 많습니다. 더 이상 해설할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어느 순간에 나를 미워함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순간 나를 미워함이 없이는 남을 사랑할 수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완전히 손해를 보는 일이 없이는 결코 진리를 세울 수 없는 때가 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서는 이 말씀이 문자대로 사실입니다. 나를 미워하라. 현재를 미워하라. 자기 영광을 미워하라. 그리고서야 그리스도를 정말 사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내게 순교를 요구하는 순간에 육체를 사랑하면 순교할 수가 없습니다. 의를 위하여 희생해야 할 순간에 자신을 사랑하면 희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에게 자기 생명을 미워하여 영생을 보존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요구하시는 것은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다"(요 12 : 26)는 말씀입니다. 나는 지금 세상적인 영광을 버리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십자가를 지려 하는데, 나를 섬기려거든 이러한 나를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나 있는 곳에 너도 있어야 한다는, 즉 주님의 고난에 동참을 요구하십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지 못하여 일생동안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당한 자만이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얻을 수 있고, 그리스도적 고난을 당한 사람만이 그리스도적인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말씀으로만 하신 게 아니라, 그대로 실천에 옮기시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철학이나 이념이 아닙니다. 말씀하시고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 생명의 진리와 삶의 원리를 터득하고 그대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자기만 살려고 하거나, 현재적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죽이는 결과가 됩니다. 자신을 깨끗이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의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면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어 있음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의 목적(요 20:30-31) (0) | 2024.03.19 |
---|---|
생명의 약속(요 14:1-6) (0) | 2024.03.19 |
새 계명(요 13:31-38) (0) | 2024.03.19 |
사명자의 기본 조건(요 21:15-17) (0) | 2024.03.19 |
사랑의 낭비(요 12:1-8) (0) | 2024.03.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