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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하나님4(에베소서 2 : 11 ~ 18)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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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하나님4(에베소서 2 : 11 18)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죄를 사하여주시는 것과

 

예수님께서 전도사업을 시작하시고 얼마 안되어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입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나중에 온 사람은 예수님 가까이로 다가갈 수가 없었습니다. 네 사람이 한 중풍병자를 침상째로 들고 왔으나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는수없이 지붕을 뚫고 환자를 달아내립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집은 지붕이 편편하여 대충 뚫고 흙만 치우면 내려갈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더라도 큰 공사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먼지가 얼마나 일었겠습니까? 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얼마나들 소란을 피웠겠습니까? 그러나 아랑곳없이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가 누워 있는 침상을 달아내립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가고 싶은 소원이 이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보셨습니다. 환자도 말이 없고 달아내린 사람도 말이 없습니다. 말이 없어도 예수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왜 데려왔는지, 왜 지붕을 뚫고 달아내릴 수밖에 없었는지, 예수님께서는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환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2:5)"----충격적입니다. 주위 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이 일로 인하여 핍박을 받으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죄권을 행사하셨습니다. 이 사실에 사람들은 의문을 가집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신학적인 비난을 합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2:7)."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들 말합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2:9)." 어느 쪽이 더 길고 어느 쪽이 더 짧으냐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둘 다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는 그 환자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사죄의 은총이었던 것입니다.

병을 낫게 해주는 것보다 죄를 사하여주는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환자를 보시는 순간에 그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환자는 당연히 병 고침 받는 것이 소원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병 고쳐 주시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의 문제로 돌리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병 걸린 것이 죄 때문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건강한 사람은 죄가 없는 것이냐 라는 문제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말도 안됩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중풍에 걸린 이 사람에게 죄에 대한 깊은 가책이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결정적인 죄로 말미암아 중풍 걸리게 되었는지 어떤지는 모를 일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근본적인 문제로 죄를 거론하셨습니다. 여러분, 환자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병을 고치러 갔는데 병 고쳐줄 생각은 하지 않고 "당신은 죄인이오. 그 죄를 회개해야 하겠소"라고 한다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병이나 고칠 것이지 웬 딴소리요? 그것이 병하고 무슨 상관이오?" 이렇게 화를 내면서 대들 일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든 안 지었든 몹시 기분이 나쁠 것입니다.

환자의 관심은 병 고침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죄 사함에 있습니다.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은 다음에 당연히 병 고침을 받을 것이지만 근본적인 관심은 이렇게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그 같은 문제를 겪는 것 같습니다. 병 고침 받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나오는 목적도 소원성취에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교회에 나와 보신대로 교회에 나오니 소원성취 할 것이라고 합디까? 오히려 죄를 지적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언젠가 우리 교인 한 분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교회에 갈 때마다 자꾸 지성인이 잘못됐다고 때리는데, 그 얻어맞는 재미로 다닙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목적이 있다면 그 하나가 죄에 대하여 책망 받기 위함입니다. 미처 모르고 있던 죄를 새롭게 깨닫고, 죄의 그 깊은 원인을 생각하면서 가능하면 '네 죄를 사하였느니라'하시는 음성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최고의 관심사는 죄의 문제입니다. 좀더 실제적으로 말하자면 병에 걸렸느냐 병 고침을 받았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병에 걸려도 좋습니다. 문제는 죄입니다. 내가 앓고 있는 이 병이 꼭 죄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죄 때문에 생긴 병도 있습니다. 먹지 못할 것을 많이 먹었고, 못 갈 데에 많이 갔고, 못할 일을 많이 해서 건강을 잃어버리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병에 걸리고 나서도 자신의 죄가 생각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참으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언젠가 어느 교인 댁에 심방을 갔는데, 교회에 나오지 않는 그 댁 남편이 감기로 앓아 누워 있습니다. 마침 잘됐다는 생각이 들어서 전도를 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부인께서는 십 년 동안 교회에 나오시는데 남편 되시는 분이 안나오시면 되겠습니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남편 하는 말이 "누워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후회되는 일 뿐이요, 죄뿐입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립디다. 그래서 제가 농담을 했습니다. ", 남자가 확실하게 아플 때에나 눈물을 흘리더라도 흘릴 것이지 감기쯤으로 뭘 그러십니까?" "본디 제가 죄가 많습니다." 이렇듯 사람이란 조금이라도 삐꺽하면 '어이쿠, 내 죄 때문이구나' 합니다. 조금만 실수를 해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습니다.

영국의 어느 짓궂은 기자가 유명한 정치가 몇 사람을 골라서 같은 시각에 전보를 쳤습니다. '당신의 일이 탄로 났으니 어서 피하시오.' 그랬더니 다음날 아침에 확인해본즉 아니나다를까 죄다 도망가고 없더라는 것입니다. 누구 할 것 없이 다 시원찮거든요. 그렇습니다. 죄 문제가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목적, 그 최고의 관심사가 죄 문제입니다. 사죄의 문제입니다. 죄 사함을 받는 일입니다. 의로움으로 고난 당할 수만 있다면 그 고난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의로운 가난을 택할 수만 있다면 그 가난은 조금도 문제될 바가 아닙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에게 가난과 질병과 실패가 문제된다면 그것이 내 죄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으로 생각해서이지 질병이나 가난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고난관은 마땅히 그러해야 합니다. 이렇듯 첫째 문제가 죄의 문제입니다. 곧 의의 문제입니다. 어떻게 해야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가? 또한 의인의 고난이 문제입니다. 의인이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죄인의 고난과 의인의 고난, 그 긴장관계 속에 그리스도인의 고뇌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받는 고난이 의인의 고난이라면, 그것만 확실하다면 무엇이든 마다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 가운데 가장 중요한 교리는 죄 사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죄의 실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감상적으로, 가책의식으로 받아들이려 합니다. 심지어 지금까지 살아온 세계관에 위배될 때, 혹은 잠재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생활규범에 위배될 때에 오는 가책으로, 다시 말해서 죄를 심리적 문제로 풀이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지금 내가 죄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고 합시다. '그 정도의 죄를 가지고 뭘 그러느냐? 나보다 더 큰 죄인이 얼마든지 많다. 걱정할 것 없다'----조금이라도 정당화하여 죄에 대한 가책의식을 덜어보려고 할 것입니다. 스스로에 대해서도 그렇고 남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죄를 단순히 심리적 현상으로 취급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심리적 현상으로 변명을 해보아도 죄는 여전히 죄 그대로 있습니다. 벗어나지 못합니다. 죄의 실제성을 성경은 누누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을까? 심리적 현상이나 망각, 혹은 자기발견이나 자기극복으로 죄 사함을 받으려고도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한, 죄의식 때문에 해보는 보상 행위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남이 알거나 모르거나 스스로 도둑질한 일이 있으면 고아원을 세웁니다. 악을 범한 적이 있으면 고행을 하려고 합니다. 적선이나 고행으로 보상을 해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보통 '속죄' 한다는 말을 씁니다만 그 '속죄'는 교회적인 '속죄'가 아닌 것입니다. 내가 백만 원을 도둑질했으니 천만 원으로 갚겠다느니 내가 나쁜 짓을 했으니 지금부터는 좋은 일만 하겠다느니 못된 일을 해서 번 돈이니 사회로 돌리겠다느니 선한 사업에 기증하겠다느니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심리적으로는 죄의식을 얼마쯤 자위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으나 그런 보상행위가 결코 죄를 근본적으로 사해주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보상행위'가 속죄를 가능케 한다는 개념이 교회에 들어와 신학화해버린 것이 이른바 '공로설'입니다. 성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나, 일찍이 중세기에도 이 공로설이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선한 일을 하면 그로 인하여 죄 사함을 받는다 하여 심지어 베드로성당을 지을 때에는 건축기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속죄표'를 판매하기까지 했습니다. 선한 일을 해야 죄 사함을 받는다, 선한 일 가운데 가장 큰 일은 교회를 위하여 헌금하는 것이다, 헌금함 속으로 돈이 떨어질 때에 그 소리와 함께 망령이 발맞추어 하늘로 올라간다----속죄표를 팔면서 나온 말들입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도 말한 바와 같이 죄인은 선한 일을 해도 죄인인 것입니다. 죄책으로 공로를 세운다고 해도 또 하나의 이중적인 죄를 범하는 것일 뿐입니다. 스스로 죄를 사할 수도 없고 죄로부터 벗어날 길도 전혀 없는 것입니다.

때로 화해하면 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화해하면 되지 않느냐? 용서하고 사랑해주면 되지 않느냐?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날의 죄가 이렇게 한다고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젊었을 때에 한 것을 이제 와서 후회한댔자 과거는 지나가고 없습니다.

이를테면 과거에 언젠가 내가 십만 원을 도둑질했습니다. 돈을 잃은 그 사람은 상심하여 이미 자살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혹은 사업에 실패하여 가정에 큰 우환이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십 년이 지난 지금 천만 원을 가지고 찾아가서 보상한다고 해보십시다. 십 년 전의 그 죄가 사해질 수 있습니까? 다 지나간 일입니다. 인간적인 사죄는 없다는 것을 시인하십시다. 중요한 사실입니다. 화해도 하고 용서도 하고 선한 일도 하고 고행도 합니다. 별의별 일을 다 해보아도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죄 사함 받을 수 없다는 것이 기본입니다. 이 기본적인 신앙, 이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 사해 주심을 믿습니다. 인간으로서는 전혀 죄 사함 받을 수가 없습니다. 성서적 입장에서 보면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사해주실 수 있고, 하나님께서 풀어주셔야만 풀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두 가지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십계명을 비롯한 도덕적 율법이요, 하나는 제사법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신 까닭에 우리를 잘 아시는 것 같습니다. 율법을 주시고 죄의 삯은 사망이다 하셨으면 끝이지 왜 제사법은 만드신 것입니까? 잘못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한편에는 시퍼런 칼날 같은 율법을 만들어놓으시고, 한편에는 이 율법을 어겨서 죄인된 사람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릴 수 있는 제사법을 만들어놓으셨습니다. 율법과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의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과 제사법은 일찍이 우리에게 사죄의 길을 열어놓으심입니다. 예표요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말씀합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9:22)." 죄의 문제는 손해의 문제도 아니요, 소유의 문제도 아닙니다. 생명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죄 값은 사망입니다. 죄는 생명으로만 보상할 수 있고 죽어야만 사함 받을 수 있습니다. 피 흘림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피 흘림이 있어서 그 피로 사함 받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증거로 피 흘림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사람들은 양을 잡아 하나님 앞에 바쳤습니다.

많은 수의 양을 바칠수록 죄가 많이 사해지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입니다. 이사야 1장에서 말씀하는 바입니다.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12, 13)." 제물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제물은 하나님께 '뇌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그 희생의 계시, 그 죄 사함의 증거로 제사법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제사는 죄 사함 받은 바에 대한 하나의 표지요 계시일 뿐, 제사로 죄 사함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과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제물을 보시고 죄 사함을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시고 죄 사함 받은 표지로 양을 잡아드리는 제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제물을 많이 드리는 것으로 죄 사함 받겠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스스로 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표지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이 제사법의 맥락에 의해서 대신 죽고 대속 하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고야 사함이 있습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습니다. 요한일서 17절은 말씀합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십자가를 하나의 속죄제로 풀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 사죄권을 가지십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되시는 증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죄권을 행사하셨습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누구도 죄사 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그 사죄권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십자가가 산 표지입니다. '내가 네 죄를 사했다'라고 하는 사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필로 사인해주신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면 둘만의 표지를 지녔습니다. 흔적이란 이렇듯 중요합니다. 예나 오늘이나 사랑처럼 믿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까? 나를 사랑하는 증거를 대라고 합니다. 사랑의 증거, 참 어려운 것입니다. 주는 것도 어렵고 받아들이는 것도 어렵습니다. 사랑의 증거가 필요합니다.

용서는 감상이 아닙니다. 증거가 없이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용서에는 증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심에 십자가의 증거를 내세우셨습니다. 용서가 본디 소극적인 의미로 쓰이는 용어이기는 하지만, 적극적으로는 의롭다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받은 우리를 의인으로 대하시는 것입니다.

죄인을 의인으로 대하시는 것이 사죄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여러 가지 상징적인 표현을 썼습니다. 시편 519절에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죄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죄를 보시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입니다. 자꾸 들여다보시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의 죄를 용서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죄를 용서했다면 이제 그의 허물은 보지 말아야 합니다. 어 느날 다시금 죄를 상기시키는 일이 있다면 용서가 아닙니다. 시편 321절에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잘못된 것을 덮어주고 싸 매준다는 말씀입니다. 잘못했다고 조목조목 따지고 대드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척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야 죄 사하는 것입니다. 또 가장 많이 나타나는 표현은 시편 257절에도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라고 했듯이 죄를 기억하지 않는 것, 이것이 죄 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용서했다가도 다시 그와 비슷한 일이 생기면 "전에도 그랬었지" 합니다.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건망증이 은사입니다. 깨끗이 잊어버려야 하는데 좀처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기억하지 아니하노라." 나아가 탕감해주신다고 하십니다. 시편 2511절로부터 용서라는 말이 220회나 나옵니다. 이것은 행동이나 사건이라기보다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용서입니다. 집을 나갔던 아들이 돌아오면 다시 아들로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헤어졌던 사람이라면 다시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옛날로 돌아가서 관계가 정상화하고 회복될 때, 그것이 용서입니다. 여기에 하나의 조건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보는 대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의 중풍병 환자를 보시고,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핵심인 것입니다.

옛 제사법으로 다시 돌아가 속죄제 드리는 법을 보십시다.

하나님 앞에 양을 잡아다놓고 양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합니다. 인간의 죄를 양에게 전가시키는 의식입니다. 그리고 양의 목을 쳐서 제물을 불사를 때에 죄인은 무릎을 꿇고 엎드리어 있습니다. 여기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양이 불타 죽어 가는 것은 바로 내가 죽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저 양과 함께 죽는다는 것입니다. 양이 다 타고나면 고개를 듭니다. 이제 새사람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제물과 나를 동일시(identify)하는,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저 십자가에 내가 못 박혔다,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못 박혔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었다'라고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내 교만과 내 욕심과 내 운명을 모두 못박아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내가 완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의식과 체험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는 것입니다. 율법 앞에 죽고 십자가 앞에 살고, 세상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에 대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성령께서 주십니다. 내 마음대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안 믿어지는 것처럼 답답한 노릇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령을 믿사오며…… 죄 사함을 믿습니다.' 성령론에 들어있는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믿음을 주십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와 나를 동일시하는 체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 볼 때마다 내 죄 위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사죄의 윤리에 대하여 생각해보십시다.

첫째,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시므로 내가 나를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셨는데 내가 나를 용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만히 보면 잘한다고 하면서 불 신앙적으로 할 때가 있습니다. 잘 믿는다고 하면서 스스로를 학대합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보십시오. '내가 너를 용서했다'하셔 죄 사함을 받았으면 밝은 웃음을 머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꾸 우기려듭니다. '아닙니다. 나는 용서받을 사람이 못됩니다.' 이러니 답답한 노릇이지요. 이런 사람들 때문에 십자가까지 지셨는데도 아직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회개하는 것도 중요합니다마는, '네 죄를 사했느니라' 하실 때에 떨쳐 일어나는 믿음도 중요한 것입니다. 가버나움의 중풍병자를 보십시다. 예수님께서 죄를 거론하셨을 때 "죄는 왜 들추는 거요?"라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 사죄권이 있음을 믿는 순간, 그는 침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살고 진실하게 살겠다는 마음에서 자기학대를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마는, 불 신앙입니다. 내가 나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나는 이미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용서받은 자는 곧 의롭다 함을 얻은 죄인이요, 의롭다 함을 얻은 의인입니다. 마르틴 루터의 표현대로 동시에 죄인이요, 동시에 의인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둘째, 하나님께 용서받은 사람으로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636절에 보면 주님께서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 달란트 탕감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을 탕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만 달란트 탕감 받은 것까지 취소 당하지 않았습니까? 중요한 비유입니다. 주인은 만 달란트를 탕감해주기에 앞서 백 데나리온을 탕감해줄 것을 조건으로 제시하지는 않았습니다. 조건 없이 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하고 나오다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났는데 그 빚을 탕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만 달란트를 탕감해준 주인은 '너는 안되겠다. 도로 내놔라' 한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엄청난 죄를 탕감 받았습니다. 내가 남을 용서함으로 내가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해석하면 큰 잘못입니다. 내가 용서받았습니다.

받았으면 그 받은 바대로 행해야 할 윤리가 있습니다. 나 같은 큰 죄인이 용서를 받았으니, 내가 이제 남이 내게 잘못한 것을 나무랄 수 없는 것입니다. 다 용서하시니 다 용서해야 합니다.

저는 결혼주례 할 때마다 부탁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얼마나 기쁜 날입니까? 모두가 기쁨을 나눌 수 있도록 교회에서 청소하시는 분들을 위해서도 조금씩이나마 사례를 해주십시오." 내게 좋은 날이면 다른 사람도 좋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나 좋다고 남에게 공으로 일만 시킨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용서받아서 기쁘다면 내게 서운하게 한 것쯤은 모두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의무가 아니라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당위(當爲)입니다. 모름지기 이웃을 용서할 줄 아는 윤리를 지닐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받은 세계관을 가져야 합니다. 죄인의 세계관이 아니라 의인의 세계관입니다. 저주받는 세상이 아니라 사랑 받는 세상입니다. 가정에서건 이웃에서건 형제간에서건 죄인으로 저주받고 사는 고행의 세상이 아닙니다. 용서받은 의인, 하나님의 아들딸로 살아갑니다. 용서받은 자된 세계관, 용서받은 자된 우주관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비록 우리가 고생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죄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주시는 시련입니다. 나로 성장케 하기 위하여 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믿습니다. 죄 사함 받은 나임을 믿습니다. 죄 사함 받은 나로 살아갑니다. 죄 사함 받은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합니다.

이웃을 용서합니다. 죄사함 받은 의인, 의롭다 함을 얻은 의인으로, 그 감격으로 세상을 봅니다. "죄를 사하여주시는 것을 믿사옵나이다"----이것이 우리의 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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