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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자유성(갈2장 1~5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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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자유성(갈215)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이방인의 사도된 철저한 자기 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자기 신학을 구성하는 데에 '아라비아 3 '이라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성서적인 맥락을 찾아 선교 전략까지 함께 세웠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선교 전략은 단순히 지정학적인 스케줄을 짠다든가 일정을 잡는다든가 하는 물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또는 선교비 조달이라든가 누구를 만난다든가 어디에 교회를 세운다든가 하는 문제도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성서적이요 신학적이자 복음적인 근본 문제 앞에서 선교 전략을 세워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이방인을 향한 복음을 신학화한 개척자로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인물이 됩니다. 선교 신학적 정책을 세워나가면서 그는 남다른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원래 히브리 문화권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마는 그 내용상으로는 방법론이나 모든 문제가 철저하게 히브리적입니다. 그리고 동양적입니다. 이 문제를 놓고 신학자들 간에도 많은 논란이 있어왔으나 결론은 성경이 철저하게 히브리적인 맥락 속에서 기록되었다는 점입니다.

어떤 진리가 선포될 때나 무슨 내용이 전해질 때에는 부득이 언어를 빌려야 됩니다. 말을 통해서 전해지는 것입니다. 말은 개념을 가졌고, 말을 받는 자의 경험과 말을 전하는 자의 인격적인 문제까지 결부됩니다. 통틀어서 말하자면 문화적인 문제가 함께 따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인격을 통하여 오실 때에, 베들레헴에 오셨고, 유대 문화권에 오셨고, 유대주의자들 속에 오셨습니다. 율법의 체제 안에 오신 것입니다. 율법권(律法圈)에 오심은 철저하게 히브리 문화권에 오심입니다. 그리고 히브리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영원 불멸의 복음이지만 그 복음이 처음 전해질 때에는 히브리적인 문화의 그릇에 담겨서 전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히브리적인 것을 충분히 이해하면서 그 속에 담긴 내용을 알아내자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깨닫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가리켜 성경 강해(講解)라고도 하고, 성경 해석 또는 성경 주석(註釋)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사람에게 전해질 때에는 그 복음을 듣게 되는 사람의 언어를 빌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신약성경을 연구할 때에는 헬라어 성경을 읽습니다. 헬라어 성경에서 본뜻을 찾아 그 개념을 전부 소화한 다음에 그 내용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때에는 부득이 우리말로 이야기해야 됩니다. 그것도 그대로 말씀드리면 이해가 쉽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의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찾아 예로 들어 이야기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설교이며 성경 강해입니다. 선교(宣敎)라는 것이 한마디로 말해 이런 것입니다. 어려운 말로는 성육신(成肉身)-인카네이션(incarnation)입니다. 신학의 성육신적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 사도된 사명이 있었습니다. 엄청난 사명이었습니다. 이 사명과 역할은 오늘날까지 매우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지만 이방에 전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히브리 문화권 안에서 계시된 복음을 깊이 이해하고, 이것을 다시 당시의 문화인 헬라 문화라는 그릇에 담아서 전하는 사명이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근본적인 신학방법론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전해지는 과정에서 조심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얼마전 우리 교회에 서양사람들과 중국사람들이 와서 설교할 때에 통역을 세우지 않았습니까? 통역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통역을 하려면 우선 그분들이 하는 말을 똑바로 알아들어야 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알아들었으면 정확히 우리말로 옮겨야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말부터 잘 알아야 됩니다.

우리말을 제대로 구사할 줄 모른다면 제아무리 외국어 실력이 좋다 해도 통역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단어나 개념을 정리하여 내 것으로 완전히 소화한 다음에 말로 전해야 되는데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촉박하기 때문에 그만큼 실수가 많은 것이 통역입니다. 오래 전 여의도 광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백만 가까이 운집한 신도들 앞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레이엄 목사님은 단위에 오르자 운집한 신도들을 보고 'thousands of people'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을 뜻하는 이 말을 통역자는 그만 수천 명이라고 옮겨버렸습니다. 1백만 명이 수천 명으로 격하된 것입니다. 실수였습니다. 이렇듯 뜻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부터 쉽지 않은 것이 통역입니다. 그리고 뜻을 제대로 전달한다 하더라도 통역으로는 극복하기 힘든 어려움이 또하나 있습니다. 느낌이 전달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뜻이 전달된다 해도 뉘앙스나 느낌은 어쩔 수 없이 감소되고 맙니다. 그래서 저는 통역하는 것도 달갑지 않고 외국사람들 앞에서 설교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귀한 말씀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이래저래 가감되고 마니 얼마나 안타까운 노릇입니까? 의미나 느낌이 감소되는가 하면 살이 붙어 엉뚱한 소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선교 사역에서 통역은 그 자체가 신학적 노력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민이 이방에 대한 선교였습니다. 철저하게 히브리적인 종교문화에서 계시된 복음을 이방철학적인 방법으로 설명하여야 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히브리적입니다마는 설명에 쓰이는 단어와 철학적 개념은 철저하게 헬라적인 것입니다.

그래야 전달이 되니까요. 그러나 그 전달되는 과정에서 잘못하면 말씀을 가감할 수 있습니다. 변질시킬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중요한 내용과 영감(靈感)이 전달되지 않을 수 있다, 가감될 수 있다-만만찮은 고민거리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부딪히는 고민을 족히 읽을 수 있습니다.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데 비난이 많습니다. 더구나 유대사람들이 볼 때에는 못마땅한 것입니다. 히브리적인 종교를 어찌하여 저렇게 만들었느냐-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변명을 해야 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공의회에서까지 질문을 받게 됩니다. 또한 거기서 공적인 대답을 얻어서 나오게 됩니다. 아무튼 담는 그릇과 담기는 내용이 따로였다는 말입니다. 그릇과 내용-사람으로 말하자면 겉모양과 인격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인격은 같은데 겉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내용은 같은데 그것을 담는 그릇이 다를 수 있습니다. 복음은 변하지 않는데 그것을 담을 그릇, 곧 문화는 늘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는 이방적인 겉모습, 이방적인 문화, 이방적인 언어를 동원해야 했다는 말입니다.

그처럼 다른 모습을 가리켜 흔히 신앙의 스타일이라고 합니다. 스타일이 서로 다른 것입니다. 문화나 종교적 배경, 혹은 이미 가진 지식이나 선입견, 그리고 사회적 신분…… 이런 요인들에 따라 신앙의 스타일이 달라집니다. 이런 요인들이 신앙의 스타일을 좌우하는 배경이 됩니다.

쉽게 생각해보십시다. 여러분들은 저마다 스타일이 각각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우리 소망교회는 소망교회 나름의 스타일이 있습니다.

다른 교회와 스타일이 같지 않습니다. 소망교회 교인이 어쩌다 다른 교회에 나가보면 그 점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어딘지 다른 것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복음은 똑같습니다. 예수도 같습니다. 신앙고백도 같습니다. 그러나 스타일이 다릅니다. 몇 가지 예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무당을 섬기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면 좀 시끄럽습니다. 평소의 가락이 남아 있어서입니다. 더구나 무당기가 덜 빠진 사람일수록 더 시끄럽습니다. 조용하면 정신이 나가고 시끄러우면 정신이 듭니다. 시끄러워야 뭐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스타일의 사람들은 조용한 교회를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손뼉도 쳐야 하고 몸을 뒤틀며 소리도 질러봐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유교적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은 늘 권위의식에 치우쳐 있습니다. 선민사상을 강조합니다. 신앙을 계급의식으로 접합니다. 주어진 직분을 봉사한다는 차원에서 받아들이지 않고 양반 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한편, 불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은 기독교를 명상종교로 바꾸려 듭니다. 조금만 시끄러워도 왜 이리 시끄러우냐고 불평합니다. 그들은 조용한 것을 좋아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란 저마다 스타일이 다릅니다. 다른 교회에 있다가 우리 교회로 오신 분들은 쉽게 발견됩니다. 지난번 케직사경회 때에 보니 찬송을 부르는데 한 사람이 혼자서 박수를 칩디다. 여러 교회 신도들이 모여서 그런지 자못 시끄러울 뿐더러 스타일이 저마다 다르니 통일시키기가 어려웠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전의 카톨릭 교회에서는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기도했습니다. 반면 루터교는 손가락을 깍지끼고 기도했습니다. 이만큼 스타일이 다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다른가? 카톨릭에서 합장을 하니까 루터교에서는 그것이 싫어서 깍지를 꼈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을 디시밀레이션(dissimilation)이라고 합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하는 것은 일부러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유불문하고 피하려 듭니다. 이래저래 스타일이 가지각색입니다.

이와 같이 나라마다 동네마다 사람마다 나름의 스타일이 있고 언어마저 다르고보니 복잡한 문제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방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해야 했던 사도 바울의 고민이 어떠했겠는지는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인정해야 될 것은 스타일이 달라도 복음이라는 내용은 같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사람들도 그들 나름의 특수한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 나름의 뿌리깊은 종교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방사람들의 그것과는 너무도 다른 그들 나름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릇이 다르다는 것이지 거기에 담길 내용이 다른 것은 아닙니다. 복음은 똑같은 것입니다. 유대라는 그릇에 담길 복음과 이방이라는 그릇에 담길 복음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인정할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유대의 스타일과 이방의 스타일이 부딪쳐 충돌을 일으키고 맙니다. 말하자면 '교파싸움'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나 오늘이나 그래서 싸웁니다. 싸우고는 분열됩니다. 교회사에서 제일 큰 분열은 동서 로마의 분열이었습니다. 바로 헬라와 라틴의 분열, 가톨릭과 희랍정교의 분열입니다. 한쪽은 헬라사람이었고 다른 한쪽은 로마사람이었습니다. 스타일이 달랐지요. 그래서 분열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큰 문제이지만 이해하고 보면 스타일이 다르다는 것은 심각하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우월감입니다. 복음에 대해서는 우월감이 있을 수 없지만 스타일에 대해서 문화에 대해서 서로가 우월감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득권을 내세웁니다. 우월감과 기득권-사도 바울은 이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가만히 보면 교회에서도 사람들은 저마다 이전에 해오던 나름의 신앙생활 스타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젊은 새 신자들이나 새로운 스타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생기면 이를 용납하지 못합니다. "교회 전통을 무시하다니, 안되지." 이렇게 나옵니다. 전통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적인 전통만이 전통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고민했던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형식일 뿐입니다. 신앙 스타일의 전통은 아예 도외시해서도 안되지만 지나치게 고집하면 더욱 안될 일입니다. 그 교회가 가진 스타일--형식적인 전통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교회는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두 사람만 모여도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득권, 우월감-교회에는 절대적으로 암적인 존재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복음 자체와 문화를 별개시할 줄 모르는 데 기인합니다. 문화 자체를 기독교로 잘못 이해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경우를 봅시다. 처음 서양사람들이 우리 나라에 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그 서양사람들이 전해준 것 자체만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복음의 내용은 생각하지 않고 예배 의식이라든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같은 그들의 신앙고백을 잔뜩 고집하려고 했습니다. 성경이 중요하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로 인하여 결국은 교회가 어지러워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형체, 그 스타일을 고집하느라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기득권을 내세우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우월감에 사로잡힐 때에 엄청난 과오가 나타나게 됩니다.

바울은 이방인으로서 예수 믿는 사람 나름대로의 스타일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사람들에게 이런 신학적인 문제를 설명해야 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제출했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방사람들은 이런 스타일로 예수 믿습니다' '예수는 같고 신앙고백도 같고 하나님을 믿는 마음도 똑같지만 예배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찬송이 좀 다릅니다. 형식이 다릅니다' '이방사람들의 방법이 유대사람인 여러분의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이해할 줄 알아야 합니다'라고 설득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잘못되는 날이면 자칫 복음의 내용을 잘못되게 만들 것이며 유대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사람들이 믿는 것은 바른 것이고 이방사람들이 믿는 것은 잘못된 것인 양 인식될 수도 있습니다. 이같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에 본문은 강조합니다.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2)"-내가 달음질한 것, 즉 옛날에 전파한 것이나 지금 전파하고 있는 이 수고가 절대로 헛되지 않게 하려 한다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1절의 '14 년 후에'라고 하는 것은 사도행전 15 장에 나오는 바 예루살렘 공의회가 있기 전인지 후인지 정확히 알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합니다. 그는 회심(回心) 3 년 동안 아라비아에가 있다가 예루살렘에 올라갑니다. 베드로와 야고보를 방문하여 이야기를 나눕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요? 기록이 없지만 아마도 스타일의 문제에 관하여 이야기했을 법합니다. 이방사람들은 이렇게 예수를 믿습니다, 그들은 예배를 이렇게 해야 되겠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런 것이 요구됩니다, 이런 문제에는 자유를 허용해야 되겠습니다-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 같습니다. 바로 신학적인 문제였습니다.

14년 후에 바울은 그 동안의 전도여행을 마치고 나서 다시 문제를 가지고 예루살렘 공의회에 나타납니다. 그리하여 공식적인 해답을 얻습니다.

해답은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 목매어 죽인 짐승이나 혹은 피를 먹지 말라, 음행을 하지 말라-이 세 가지만 금하고 나머지 문제에는 자유가 허용된 것입니다. 이것이 제1차 세계교회대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수락한 것입니다. 세 가지 모두 우상 섬기는 일과 관계되는 것들입니다. 우상 섬기는 일로 인하여 제물을 먹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제물을 먹다보면 우상 섬기는 일에 가담한 것이 됩니다.

떡이라 하더라도 우상의 제물로 바쳐진 것이라면 그것을 먹음으로 해서 우상의 제사 의식에 참여한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먹지 말라고 합니다. 피도 마찬가지로 제물입니다. 음행도 역시 제사 의식의 하나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문제를 놓고 안되겠다 하여 금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없는 말을 찾아내어야 합니다. 할례 문제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안식일 문제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밖에도 언급되지 않은 문제는 많은데 이 점이 중요합니다. 유대사람으로서는 목숨처럼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들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방사람은 할례 받지 않아도 된다, 안식일을 구태여 지킬 필요 없고 주일을 지켜도 된다-이런 이야기가 됩니다. 그렇게 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유대사람들은 지금도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에는 지금 약 1 만여 명의 기독교인이 있으나 이것은 적은 편이고, 미국에 있는 유대사람 가운데는 예수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유대인들은 교회를 세워 놓고도 교회라 하지 않고 '기독교회당'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예수를 믿습니다. 좀처럼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므로 선교학적으로 연구한 결과 새로운 정책을 세워서 유대사람은 할례 받고 믿어라, 주일은 굳이 지키지 않아도 좋다(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면 지켜라)-두 가지를 허용했더니 믿기 시작하더랍니다.

결과적으로 그 완고한 유대사람들로 예수를 믿게 하는 데 성공한 선교정책이었습니다. 구태여 주일날 나올 것 없이 본래 수천 년 동안 해온 대로 안식일을 지켜라, 할례 그것도 당신들의 문화인데 굳이 안 할 것도 없다, 그래놓고 '예수 믿어라'-이것이 유대 스타일의 신앙입니다. 그들로서 예수 믿기가 한결 쉬워진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사람이 아닌 사람은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유대사람들의 풍속을 따라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할례 받을 것도 없고 안식일을 지킬 필요도 없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그처럼 공식적인 허락을 받아냈는데,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문제가 거기에 해당합니다. 테스트 케이스(test case)가 됩니다. 하나의 시험대에 올라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서 디도를 동반합니다. 그는 원래 이스라엘사람입니다. 할례 받은 사람이요, 철저하게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이요, 바리새인입니다. 과거가 그러한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 믿으며 예루살렘을 드나드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디도가 문제입니다. 디도는 사도 바울의 조수로 믿음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는 헬라사람이므로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 디도를 데리고 올라갑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디도라고 하는 전도자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똑같이 영접하느냐 아니하느냐를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디도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완전히 영접하면 세계 교회는 하나가 되어 잘 나갈 수 있겠지만 시비가 벌어지면 예루살렘교회도 이방교회도 공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디모데는 할례를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헬라사람이지만 어머니가 히브리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디도는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헬라사람이므로 할례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본문에서는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억지로 할례를 베풀지 않았다, 할례받지 않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디도는 할례 받지 못한 상태로 예루살렘교회에 가담하게 됩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니나다를까, 예루살렘교회에 시비가 벌어졌습니다. '왜 이방사람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왔느냐'하고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다음 시간에 다시 언급하겠습니다마는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한치도 양보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란 유대주의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멀쩡하게 교회에 들어온 교인입니다마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예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구원의 그 절대적인 은혜에 대한 신앙이 없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면 이들은 왜 교회에 들어왔는가? 기독교인들을 혼란시키려는 것입니다. "예수만 믿으면 되나, 할례를 받아야지" "이방사람들 예수 믿으려면 할례부터 받아야 돼"-어찌 생각하면 그리 나쁠 것도 없는데 하고 양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다음부터는 유대사람들이 그 동안 지켜온 종교 문화적인 전승에 따른 규례들을 모두 지켜야 됩니다. 안식일도 지켜야 되고 성전에 제사도 드려야 하며 그 엄한 율법을 다 지켜야 됩니다. 또 스스로의 공로를 세워야 하고 행함을 강조해야 합니다. 그 결과, 마지막에 가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그 예수님의 공로와 의로움이 흐지부지 의미가 없어지고 맙니다. 감언이설(甘言利設)에 넘어가 조금만 양보를 하기 시작하면 어느 결에 기독교인이 비() 기독교인으로 된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율법주의자는 은혜를 자유로 생각하고 자유를 방종이라고 몰아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만 믿으면 되느냐, 죄사함을 받았다고 다 되느냐, 행함이 있어야 한다, 율법을 지켜야 한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귀아프게 강조합니다. 마침내는 정말 행함에 취하게 되고 그 행함으로 인하여 교만해지고 다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합니다. 가령 새벽기도에 안 나오는 사람을 보면 '저렇게 믿어도 될까'하고 비판하고 자신은 나왔다고 하여 교만해집니다. 봉사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예수 믿으면 봉사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봉사한다고 해서 교만해지고 봉사 못하는 사람을 보면 멸시합니다. 기도다, 봉사다, 선행이다 하며 열심이다 보면 마지막에는 예수를 잊어버리고 맙니다. 다 내 공로요, 내 선행이요, 내 의요-율법주의자로 전형적인 인물이 됩니다. 예수는 없습니다. 은혜도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쉽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얼굴 표정이 몹시 피곤해 보입니다. 열심히 믿는다고 하는데 은혜가 없습니다. 얼굴이 밝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한번 보십시다. 새벽기도 해야지요, 철야 기도해야지요, 금식 기도해야지요, 산기도 해야지요-갈수록 태산입니다. 그러고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선행도 베풉니다. 구제를 합니다. 그래도 되지 않습니다. 끝내 그 사람은 아주 벌벌 떨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감기라도 걸리면 '아이쿠, 내가 십일조 안 바쳤더니 걸렸구나' '주일날 교회에 안 나갔더니 이렇게 되었구나'하고 두려워합니다. 이렇게 되어버립니다. 사도 바울이 걱정하는 것도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이 우리의 자유를 엿보고 올가미를 씌워서 그렇게 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자유입니다. 죄로부터의 자유, 사망과 사단과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방종은 아닙니다. 여러분, 정말 은혜로 살아보십시다. 은혜가 율법을 초월합니다. 은혜에 감격하며 사는 동안 오히려 더 선하게, 더 의롭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적으로 죄를 안 지으려고, 또 선을 행하려고 바둥바둥 인간적으로 애를 쓰면 쓸수록 오히려 뒷걸음질치다가 죄를 더 많이 짓게 됩니다. 거기에 플러스 알파(Plus α), 교만죄까지 추가됩니다. 율법주의자의 견해로 볼 때에 은혜만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영 몹쓸 사람처럼 보입니다. 방종하고 무질서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로 사는 세계가 훨씬 더 의롭고 선합니다. 은혜 속에 있는 자유의 질서가 있습니다. 이것이 때때로 문제가 되는 것이올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십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진리를 찾아 열심히 익히고 나면 그 진리가 나를 지배해서 나는 그 진리가 주는 자유를 누려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곧 자유요, 구원은 자유라고 풀이합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가 볼 때에는 그것이 못마땅합니다. 안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아우구스티누스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다음에 네 마음대로 해라." 네 마음대로 해라-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간다면 무엇에든지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법도 그를 속박하지 못합니다. 누가 그를 제재(制裁) 하겠습니까? 그 자유를 억압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거짓 형제들이 들어와 가장 잘 믿는 것처럼, 가장 바른 길을 설명하는 것처럼 행세하며 그리스도인이 가진 그 고귀한 자유를 엿보고 다시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노예가 되게 하려 하니 조심하라-율법주의자에게 양보하지 말라고 합니다. 5절에서도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한치도 양보해서는 안된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어느 날 낙타를 타고 사막을 여행하던 한 사람이 그만 길을 잃었습니다. 밤이 깊어지고 모래바람도 심하여 그는 하는 수 없이 조그마한 개인용 천막을 치고 그 속에 들어가서 하룻밤을 지새워야 했습니다. 몸을 잔뜩 구부리고 누워서 자다보니 낙타의 머리가 보이더랍니다.

밖이 추우니까 머리를 천막 안으로 들여놓은 것입니다. '너도 밖이 추울 테니 머리라도 따뜻하게 하고 지내라'하고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조금 있으려니까 목이 다 들어와 있습니다. 그 정도도 괜찮으려니 하고 그냥 내버려둔 채 잠이 들었습니다. 한참을 자다보니 가슴이 답답해옵니다.

깨어보니 자기의 몸이 낙타의 배밑에 깔려 있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화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한치 양보하고 두치 양보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고 두 걸음 양보하면 끝내 모든 것을 양보하고 말 수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한가지 사건이라도 율법주의자들에게 양보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에게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한 복음주의자로서 비타협적입니다.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이것이 사도 바울의 신앙이었습니다. 진리 가운데에 항상 있게 하려 한다-철저하게 진리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이 복음의 자유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복음은 언제나 깨끗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복음을 담고 있는 형식, 즉 그릇은 때로 변할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습니다. 유대사람이든 이방사람이든 그 어느 나라 사람이든 간에 복음의 진리, 그 자유성에 대해서는 일시라도 양보함이 없이 타협함이 없이 완전히 자기의 절대적 진리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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