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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문지기 비유(마가복음 13 : 34 - 37)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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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기 비유(마가복음 13 : 34 - 37)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여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엘는지, 밤중엘는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저 나름대로 이름하여 문지기 비유라고 해 본 이 비유는 종말론적인 메시지를 주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맥락을 보다 상세히 알기 위해서 131절부터 계속 읽어 내려오노라면 여기에는 세상 끝의 징조와 함께 예수님의 재림을 가까이한 우리의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자세히 말씀해 주는 내용들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생각하면 예수님의 메시지는 거의 전부가 종말론적인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의 나라는 그 개념 자체가 종말론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종말론을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지 않고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깊은 진리를 바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흔히들 기독교를 단순한 윤리적 차원에서 생활철학이나 도덕적 종교로 이해하려는 것은 근본적으로 크게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은 전부가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비록 윤리적인 말씀을 하신다 할찌라도 그것은 종말론적인 의미에서의 윤리이며 사랑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가치관 역시 철두철미 종말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근거한 가치관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깨끗한 마음으로 대하고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가 종말론에 중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 중에 나타나고 있는 이 문지기 비유는 그 형식상으로 보아 마태복음 25장에 있는 열 처녀의 비유나 달란트 비유와 유사한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열처녀 비유에서는 신랑이 오는 종말적인 순간을 중심으로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와 그렇지 못한 다섯 처녀의 운명이 판가름 납니다. 그런가하면 달란트 비유 역시 어떤 주인이 타국에 가면서 종들에게 각각 달란트를 맡기고 갔다가 오랜 후에 돌아와서는 그 동안 그것을 어떻게 했는지를 회계하고 거기에 상당하는 상과 벌로서 처우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비해 오늘 본문의 내용은 짧은 가운데서도 비슷한 것 같지만 좀더 발전적이고도 깊은 데가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보다 선명하게 종말적인 말씀을 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말씀을 보면 그 시작이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하면서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가령"이라고 한 이것은 이 말씀이 곧 비유임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집을 떠나서 타국으로 가는 사람, 그리고 또한 조만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그 사람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주신 말씀을 그대로 깨끗하게 직선적으로 이해를 한다면 그 "사람" 이란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요 그리스도와 인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호칭을 태반 "인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자의 개념에서 오늘 본문을 생각해 본다면 "가령 사람이" 할 때의 그 "사람"은 곧 인자를 가리킴이요 "타국으로 갈 때에"하는 것은 외국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것으로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시는, 그리하여 타국으로 가시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여기에서 오늘 본문 말씀이 주고자 하는 것은 이 사람이 타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동안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가 재림주로 오실 그 기간 동안에 되어져야할 일과 우리의 사명이 무엇이며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해주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보면 여기에는 두 가지의 대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라고 하였으니 일단 종이라는 대상이 있고, 그리고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 기록된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고 하신 모든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은 종들이 하고 있으나 그 말씀의 내용과 그 뜻은 모든 사람에게 관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다시 한번 깊은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먼저 생각하고 싶은 것은 '타국으로 갔다가 돌아온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타국에 갔다가 돌아오기까지의 기간을 두고 신학에서는 중간기라는 뜻에서 인터림(interim)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런데 이 승천에서 재림까지의 기간이 선교하는 기간이요, 교회론적인 기간이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현재라고 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간이 회개할 시간이요, 하나님의 일을 해야하는 사명적 기간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향하여 "땅 끝가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바로 그 기간입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이 기간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어느 순간에는 끝이 납니다. 타국으로 갔다가,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실 것이란 말입니다. 다만 그 주어진 그 기간 내에 교회가 있고 선교가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보면 "그 종들"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종들이란 가깝게는 열두 제자인 사도들을 말하는 것이며 넓게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사명을 받은 모든 신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대문에 이 본문 말씀의 주제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깨어있으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깨어있고, 도덕적으로, 선교적으로, 신앙적으로 깨어있으라는 말입니다. 만약 깨어있지 못한 상태라면 이것은 혼돈과 무의식의 상태에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헛된 시간을 보내며, 성경이 가르쳐 주는 바와 같이 방탕하고 술취한 생활을 하는 이것은 바로 깨어있지 못한 상태인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깨어 있는 것 같으나 눈을 뜨고도 자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눈은 졸지도, 감지도 않았는데 영은 잠들었더란 말입니다. 그 때문에 로마서 13:12-14 말씀에 보면"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깨어있으라는 말은 앞을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현재에서 현재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앞일을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가까이에 불이 타고있다면 아직은 내 몸에 불길이 닿지는 않았지만 그 불이 내게 올 것을 알아 대피를 하고, 옆집에서 도둑을 맞았으면 내 집도 단속을 할 줄을 아는 그것이 깨어있는 상태이며 그러한 의식이 앞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도 바울의 말씀은 매우 구체적인 말씀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지금 여기에서는 깊은 밤중에 아침을 생각하고 낮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현재는 밤이요 아직도 밤입니다. 그러나 시간은 흐르는 것, 이미 밤은 깊었으니 이는 아침이 가깝다는 뜻이기도 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도 어두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앞에 있는 빛을 미리 보고 준비하는 그것이 깨어있는 상태입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을 두고 이야기한다면 시험 때가 되어서야 걱정을 하고 밤을 새우는 것이 아니라 아예 1, 2년 후에 볼 시험을 위해서 지금부터 미리 공부한다는 자세로 하는 그것이 깨어있는 것입니다.

또한 깨어있으라는 말은 대망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무 생각 없이 지나다가 꽝하고 터진 다음에 아이구 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생각하고 준비하여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만약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엄청난 사건을 만난다면 그 얼마나 난감한 일입니까? 그러나 미리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기다립니다. 그 쉬운 예로서 죽음이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께서는 죽음의 문제를 놓고 얼마나 깊이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리고 죄송하지만 나에게 이러한 죽음을 주십시오 하고 하나님께 기도해 보셨습니까? 만약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해 보시지 않았다면 오늘부터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이것은 누구에게나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너나 할 것 없이 반드시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자신은 안 죽을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몽롱한 사람인 것입니다. 반드시 죽을 죽음! 그렇다면 죽음을 당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준비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깨어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의죽음 앞에서는 그렇게 괴로워하거나 놀랄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구가 죽더라도 지나치게 야단스레 울고 불고 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답지가 않습니다. 죽음 앞에서의 우리네 풍속이 그렇기도 하고 물론 효도 못한 후회함도 있기는 하겠지만 죽음에 관한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자기의 죽음에 대해서는 대망 하는 마음으로 준비하고 맞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있으라는 말은 준비함을 말합니다. 눈은 뜨고 그냥 앉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행동하면서 준비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달란트 비유입니다. 그러므로 충성을 다하며 기다려야합니다. 여기에는 결산의 의미가 있습니다. 장차 주님을 뵙게될 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 것인가? 어떤 낮으로 대할 것인가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고 못살고 하는 것은 잠깐 접어 두고 내가 지금 이대로 주님앞에 간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인가하는 이것이 바로 깨어 있는 자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종말론적이면서 동시에 대망적인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저 어쩔 수 없이 맞겠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올 줄로 알고 반갑게 맞기 위해 기쁨으로 기다린다는 그런 의미에서 깨어있으라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더욱 깊은 의미의 말씀은 종들에게 권한을 주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상당한 권한을 주면서 깨어있으라고 한 것입니다. 권한이란 하나의 권세이며 동시에 책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책임과 그에 따르는 자유와 자율성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곧 달란트 비유에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하고 맡겨진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 다섯 달란트가 권한이요 자유이며 책임입니다. 또한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 두 달란트가 권한인 동시에 자유요 책임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 말씀 역시 권한을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알아야할 것은 반드시 주어진 권한만큼의 책임이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건강하면 건강한 만큼, 병이 들어 병원의 침상에 누워 있다면 병원 안의 그 만큼 밖에는 권한도 자유함도 없는 것입니다. 또한 나의 처지가 가난하다면 가지고 있는 그 가난한 재산만큼의 권한과 책임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인 경우에는 그 권한이나 책임도 많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장이 2천명의 종업원을 두고 경영을 하고 있다면 그 사장은 그 2천명에 대한 권한과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교사라면 내가 맡은 학급의 70명 학생이 나의 권한이요 여기에 대한 크나큰 책임 이있는 것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나의 선교지요 나의 사명이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각각 사무를 맡기며"라고 한 것은 각자에게는 주어진 책임의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자는 남자로서, 여자는 여자로서,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혹은 선생은 선생으로서. 제자는 제자로서 각각 그 재능과 정도에 맞는 책임이 맡겨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 사람을 비유하여 문지기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여러 가지의 문지기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몇 곳을 찾아본다면 먼저 요한복음 10 : 3에 기록된 문지기입니다.

거기에 보면 목자와 문지기 그리고 양이라고 하는 세 등장 인물이 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서 알아야 하는 것은 목자는 예수님을 뜻하고 양은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지기는 누구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사명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앞에서는 열두 제자요 오늘 우리로 말하면 집사, 장로, 권사, 교사 등 먼저 믿고 주님께로부터 무엇인가 일하도록 맡겨진 바 된 그런 사람이 문지기인 것입니다. 말씀에 의하면 문지기는 목자가 올 때까지 문을 지키고 있다가 목자가 들어오면 그 목자를 위해 문을 열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16:19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신 이 천국 열쇠가 다름 아닌 문지기인 것입니다. 이는 실로 대단한 권한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또한 그 만큼의 책임이 있습니다. 감히 천국문을 열고 닫는 막중한 책임이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를 두고 꼭 베드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누구이든 예수 믿는 사람이면 다 그런 것이랍니다. 그리하여 어떤 이는 진실 되게 믿음으로 천국문을 열어서 "저 아무개 같으면 나도 믿어야지"하고 문이 활짝 열려지게 되어 수십 수백명이 몰려 들어오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못된 사람이 있어서 천국문을 고장을 내고 막아버려서 "저사람 때문에 나는 예수 안 믿어"하고서는 아예 닫아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얼마나 책임이 막중한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문지기인 것입니다. 여러분! 며느리 노릇을 하십니까? 성실하게 기독교인으로 잘 신앙생활을 하면 비록 믿지 않는 시어머니라 하더라도 다니면서 하는 말이 "나는 교회에는 나가지 않지만 예수는 믿는 게 훨씬 좋더구먼"하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오래전 이야기입니다마는 한번은 방송 설교를 들은 다른 교회의 어떤 부인이 찾아와서는 가정에서, 특별히 시어머니의 핍박이 심하여 교회를 그만 두든지 아니면 이혼을 하고 나가든지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 믿은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3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에 와서 핍박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제가 "알만 합니다"하고서는 "그 이유가 있지요. 핍박을 할려면 처음예수 믿기 시작할 때 할 것이지 왜 하필이면 이제 와서 시작 되었습니까? 어쩌면 안 믿는 시어머니라도 벌써 3년이 되었으면 예수 믿는 며느리가 좋다고 할 때가 되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반대가 되었습니까?" 하자 잠시 가만히 있더니 "그러고 보니 조금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요"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천국문을 닫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나로 인하여 천국문이 열리고 있는지 닫히고 있는지를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한 순간도 천국문의 문지기라는 신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에스겔 3:17 말씀에 보면 "파숫군"이라는 말로 이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17절 이하에서 다음과 같은 참으로 엄청난 파숫군의 책임을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또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 찌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라 그가 그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이것은 곧 문지기의 책임이 그만큼 큰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전쟁을 하는 최일선에서 보면 파숫군인 보초병의 사명이 참으로 막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초병으로서 졸았다면 그것은 당장에 총살감이 됩니다. 제가 군대에 있던 시절입니다. 하루는 일직사령을 하면서 주위를 돌아보는 중인데 한 보초병이 총을 거꾸로 메고서는 졸고 앉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숫제 가만히 총을 빼앗아 들고 한 바퀴 돌아와 보니 아직도 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발길로 툭차서 깨웠더니 정신을 차리면서 내가 자기의 총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서는 엎드려 엉엉 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것을 그대로 보고하면 그 보초병은 죽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려줄 터이니 다시는 이러지 말라며 총을 돌려주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이후 그분하고 저하고 얼마나 친해졌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 보초병 한 사람이 졸면 여기에 있는 수백명이 하루 아침 하루 저녁에 죽임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깨어있지 못함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문지기의 책임이 참으로 막중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 말씀은 문지기인 너는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설령 다른 사람들은 졸거나 잠을 잔다 하더라도 문지기 너만은 똑똑히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인이 언제 올런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깨우치라는 말입니다. 문지기라면 문을 지키고 있으면서 누가 오고 가는지를 잘 살펴서 깨우칠 책임이 있음이니 이는 곧 복음을 전하라는 말입니다. 듣든지 안 듣든지 열심히 전하라! 그리하여 그 누구도 "나는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라는 말이 나오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가르치고 또 가르치고, 인도하고 또 인도 해야 합니다.

어떤 국민학교에도 못 가본 분의 가정에서 그 자녀들은 그야말로 모두일류 대학에 보내면서 훌륭하게 키워 박사도 배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자기 이름 석자도 못쓰는 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번은 제가 직접 물어본 일이 있습니다. "보자 하니 집사님께서는 별로 공부를 하신 것 같지가 않는데 자녀들은 어떻게 이렇게 홀륭하게 키우셨습니까?"라고 하였더니 그 집사님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저 아이들 공부할 때 너무 대견하고 귀엽고 고마와서 옆에 앉아서 깨어 있었지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하며 있었습니까?"라고 하였더니 "그저 뜨게질을 하며 풀었다 떴다 했지요"하는 그것뿐입니다. 자기는 텔레비전 보면서 아이들보고는 공부하라 하고, 자기는 놀러가면서 너 정신 차리고 공부해라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함께, 친히 깨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깨어 있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 깨어 있기가 쉽습니다. 반면에 꾸벅꾸벅 조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나까지 졸리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집사님은 자기가 깨어 있었다고 하는 이것 하나만 가지고 훌륭한 어머니가 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자녀들의 공부 문제도 똑똑히 바로 생각해야 됩니다. 아이스크림이나 커피를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 그것은 깨어 있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충분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말로 되는 것입니까? 교훈으로 됩니까? 문제는 내가 먼저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노라면 저도 깨어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말해 하품은 전염이 된다고도 합니다마는 어떤 때에 졸리는 사람이 앞에 앉아 계속 하품을 해대면 그 하품이 나에게도 전달이 되어 어느 사이에 나도 하게되는 것을 봅니다. 식사도 그렇습니다. 앞에 있는 사람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면 나도 입맛이 동하는데 그렇지 않고 그저 껄껄하게 앉아 있으면 내 입맛까지 떨어지게 된단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그렇습니다. 정말 말씀을 사모하며 열심히 듣는 은혜로운 분이 옆에 앉으면 나까지도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옆에 앉은 사람이 부스럭거리며 딴청을 피우고 있으면 어느 사이에 나까지 시험에 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너는 문지기다! 너로 인하여 네 영역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이 얼마나 두렵고 막중한 책임의 말씀입니까?

현대인에게는 세 가지의 죄가 있는데 그것은, 배우지 않는 죄, 행하지 않는 죄, 가르치지 않는 죄라고 합니다. 참으로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문지기로서 나 자신이 먼저 정신 차리고 깨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나의 영역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도록 가르치고 경고하며 힘써 일깨워야 할 것입니다.

35절 말씀을 보게되면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 엘는지, 밤중엘는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아주 정확하게 로마 야경인들의 교대 시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인들은 저녁 6시부터 아침 6시까지를4경으로 나누며 야경인은 그 4경을 따라 교대를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 말하면 저물 때엘는지는 저녁 9시쯤 되고, 밤중엘는지는 저녁 12, 닭이 울때엘는지는 새벽 3시 그리고 새벽엘는지는 6시가 됩니다. 이와 같이 교대로 야경을 하며 보초를 서는데 문제는 어느 사람이 어느 경점에 있을 때에 올런지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은 괜찮겠지 하고 졸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북에서 생지옥과 같은 광산촌으로 끌려갔다가 탈출에 성공한 비결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지독한 곳이었는지 그저 아침저녁으로 두 번 수수밥을 주고는 새벽에 일어나서 어두울 때까지 일만하게 하는 곳입니다. 잠잘 이부자리가 주어지거나 옷을 벗고 입는 일도 없습니다.

 

그냥 누웠다가 일어나면 되는 것이고 물론 세수 같은 것은 할 필요도 없습니다. 심지어 사람이 죽어도 장례식이 따로 없이 그저 발로 차서 묻어버리면 됩니다. 그런가하면 매일같이 도망치다 붙들려온 사람들이 매를 맞으며 발길로 채인 다음에는 그대로 생매장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있다가는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도망갈 궁리를 하며 머리를 짜내는 데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습니다. 주위를 가만히 살펴보니 삼중 보초를 서긴 했으나 총 가진 사람은 몇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625때라 이미 총은 남쪽으로 다 왔기 때문에 총이 별로 없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보초라 할찌라도 총을 들지 않은 상태에서 둘씩 둘씩 돌아가면서 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다섯 여섯명 떼를 지어 가면 들키더라도 때려 하면서 가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따라서 혼자 도망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다섯 사람을 데리고 함께 도망을 하여 살았습니다.

또한 두번째 지혜는 모두들 밤중에 도망을 하다가 잡혀 오는데 이것은 밤중에는 보초가 엄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새벽이 되면서 훤할 때쯤이면 이제는 벌써 다 되었다 하고서는 보초병들까지도 꾸벅 꾸벅 졸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때는 새벽이다 하고서 아침 새벽 날이 훤히 밝아 올 때 남쪽으로 뛰어 살았습니다. 여러분, 이제 주신말씀도 그렇습니다. 모든 시간이 다 중요하지만 대개가 새벽쯤이면 이제는 다 되었다 하고 허술해지기가 쉬운데 문지기는 그때에도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새벽이라고 날이 밟았다고 방심하지 말란 말입니다. 9시든, 12시든, 3시든, 6시든, 어느 시간이든 한 순간도 절대로 방심하지 말고 깨어 있으라 너는 문지기다! 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말씀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어느 권사님 한 분이 완전히 죽는다고 할 정도로 무의식 상태에까지 갔다가 1주일만에 소생을 하고서는 심방간 저에게 그 동안에 천당 갔던 이야기를 숨이 차면서도 장황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에 하는 이야기가 중요합니다. 그 권사님의 말이 전에는 전도할 때에 "교회에 나갑시다. 교회에 나가서는 손해나는 것 없습니다. 배울 것도 많고요"하고 꼭 이렇게 말했는데 그것이 잘못한 것이라면서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고"예수 믿고 천당 갑시다"라고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그 후로 이 권사님은 누구나 붙들고 "예수 믿고 천당 갑시다"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메시지는 종말론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초점을 두고 계속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인자는 다시 올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인자가 올 때에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너희는 문지기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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