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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익한 종의 고백(누가복음 17장 5절~10절)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버더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어느 날 작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습니다. 제 앞에 낯선 두 사람이 앉아 있는데 그중 한 사람이 좀 까다로운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종업원이 상을 차려놓으니 꼬치꼬치 묻습니다. 부엌이 깨끗하냐, 도마가 청결하냐, 행주는 잘 삶아서 쓰느냐, 이 음식이 상하지는 않았느냐…… 듣고 있던 종업원이 견디다못해 자리를 피해버립니다. 앞에 앉은 친구도 보기에 딱했던지 그 까다로운 사람을 가만히 나무랍니다. "그다지 못 미더우면 먹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그러니까 의심 많은 친구가 머리를 긁적이면서 대답합니다. "그렇다고 안 먹을 수도 없고……"
얼마나 어리석은 노릇입니까? 어차피 먹어야 할 음식을 앞에 놓고 이리 의심 저리 의심한들 무엇이 더 나아지겠습니까? 먹는 사람 속만 상할 뿐입니다. 물건을 사면서 돈까지 다 치르고 나서 "이거 진짜요?" 하고 가게 주인한테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장사하는 사람한테 진짜냐고 묻다니, 무슨 대답을 바라는 것입니까? 믿을 수 없는 세상인 것은 사실입니다. 불확실한 세대요 불신의 세대입니다. 우리는 이런 세대를 살아갑니다. 그러나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식사 때마다 음식에 딴것이 들었을새라 은수저로 휘저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요, 주방마다 찾아다니며 감시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먹고살겠으면 믿어야지 어떻게 하겠습니까. 믿고 더불어 살아가야 합니다. 지나친 의심은 병입니다. 그럴 만한 객관적인 이유도 없이 지니치게 의심이 많은 사람은 자신의 마음부터 한번 점검해볼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된 동기는 처음부터 그리 순수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우리들 가운데에도 순수하게 예수님의 피로 구속받고 영생을 얻기 위하여 교회에 나오게 된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개중에는 그저 친구 따라 나온 사람도 있고, 지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혹은 답답한 마음을 위로 받아볼까 해서 나온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만도 그런 분이 있었습니다 전도 받은지 8년만에 부인을 따라 교회에 나왔다는 분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처음으로 교회에 나온 그분도 그렇거니와 8년을 두고 끈기 있게 전도해서 마침내 남편과 나란히 앉아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그 부인의 감격은 오죽했겠습니까? 피차에 서로 고마워하며 인사를 나눈 후에 저는 그분들한테 말했습니다. "오늘은 참으로 역사적인 날입니다."
생전처음 교회에 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그 동기가 순수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본인에게 구원받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어서라기보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주는데 산 사람 소원 못 들어주랴' 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좋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니 그것으로도 다행입니다.
이제 교회에 나오고 예수님을 믿어 가느라면 소원도 달라지고, 동기도 차츰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을 봅시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들의 소원이 다양했습니다. 그 동기가 여러 가지였습니다. 순수하지 못했습니다. 정치적인 동기도 있고, 사회적인 동기, 경제적인 동기, 종교적인 동기도 있었습니다.
그렇고 보니 예수님을 따르면서 보고 듣고 배우는 동안에 어느덧 예수님과 자신들 사이의 간격이 점점 벌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은 더욱더 높고 귀한 분으로, 자신들은 더욱더 낮고 천한 존재로 자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으십니다. 하시고자 하면 언제나 그 일을 완벽하게 수행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어떤 때에는 저들도 귀신을 내쫓고 병자를 고칠 수 있었으나, 어떤 때에는 도무지 귀신이 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능력이 나타날 때도 있고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 때도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바다에 큰 광풍이 일어난 때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조용히 주무십니다. 그런데 어부 출신으로 바다 경험이 많은 제자들은 오히려 죽게 되었다고 야단입니다. 곤히 주무시는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면서 안달입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말씀 한마디로 바다를 고요하게 하시지 않습니까? 제자들은 부끄러워집니다. 예수님의 위엄찬 태도를 바라보고 자신들의 조급했던 모습을 생각하니 부끄러움과 함께 하나의 깨달음이 옵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믿음은 완전하고, 저들의 믿음은 너무나도 초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동서고금에 예외없이 우리에게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믿음입니다. 일본의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內村D쵹TXT킆鑑三)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일본에 큰 가뭄이 들었습니다. 몇몇 달을 두고 비가 오지 않자 이대로 가다가는 농사를 다 망치겠다고 사람들은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기우제(祈雨祭)를 지낸다 굿을 한다 하고 난리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우치무라 간조는 아이들과 함께 식사 기도를 올리는데 "하나님, 비를 주십시오. 오늘 꼭 비를 주실 줄로 굳게 믿습니다"하고 기도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이 학교 갈 채비를 합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6학년인 큰아이는 아무 소리 없는데 3학년인 작은아이가 난데없이 우산을 찾습니다.
"아버지, 우산!" "맑은 하늘에 우산은 왜 찾느냐?" 우치무라 간조가 어리둥절해집니다. 그런데 이 작은아이 하는 소리 좀 보십시오. "아버지, 아까 기도하실 때에 오늘 비 주실 것으로 믿는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우산을 가지고 가야지요!" 우치무라 간조는 속으로 아차 하고 크게 회개했다고 합니다. '나의 믿음은 전부 거짓이다. 저 아이의 믿음이야말로 참믿음이다.' 그 아이 보기가 부끄러울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믿음은 완전하고 위대합니다. 그래서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제자들의 믿음은 시원치 않습니다. 금방 나약해지고 비겁해집니다. 실망하고 절망합니다. 남을 사랑도 못하고 용서도 못하는 그 허약한 신앙생활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제 믿음의 절대 필요, 믿음의 위대함을 깨닫고 예수님 앞에 간구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믿음을 크게 해달라고, 믿음을 완전하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결국 문제는 믿음입니다. 이따금 어려운 문제를 안고 제게 찾아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을 대할 때마다 저는 언제나 두 가지를 물어봅니다. "오늘 당신이 고민하고 있는 이 문제가 처음 당한 문제입니까, 아니면 오래 전부터 있어온 문제입니까?" 오래 전부터 있었던 문제라고 하는 대답이 대부분입니다. 제가 또 묻습니다. "이와 같은 문제가 당신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당신은 하필 이제 와서야 그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여야 합니까?"
여러분도 각자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내가 왜 이처럼 나약해졌는가,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문제를 가지고 왜 이처럼 속을 끓이고 있는가…… 믿음의 문제입니다. 객관적 여건의 문제가 아니요, 내 마음의 병이 문제입니다. 믿음이 시원치 않은 까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민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마 17:20)"-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하십니다.
마가복음 11장 23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오늘의 본문에서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움직이지 않을 것도 움직이고, 상식적으로는 전혀 풀릴 수 없는 문제도 풀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이토록 위대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는 믿음 없는 자의 믿음 없는 이유,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과 믿음을 자라게 하는 비결이 무엇이냐, 어떻게 하여야 믿음이 완전하게 자랄 수 있느냐에 대한 해답이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종의 비유는 어디까지나 당시의 사회제도의 테두리에서 든 비유입니다. 그러므로 노예 제도 자체에 대해서는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자기 정체에 대한 각성입니다. 먼저는 내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느냐-이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나의 나됨과 내 믿음의 성장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자기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고민도 많습니다.
심리학자 프로이트의 주장에 따르면 참자아(true ego)와 초자아(super ego)의 갭(gap)이 클수록 고민이 많다고 합니다. 일리 있는 말입니다. 사실, 자기를 너무 높이 평가하고 있는 사람은 고민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문제는 내가 나를 바로 알고 바로 평가하는 데에 있습니다. 진실된 나의 실체를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 : 24)."
제 개인에 관계된 이야기라 쑥스럽습니다마는 저는 젊었을 때에 여드름이라는 것이 나본 적이 없습니다. 그 대신 이것들이 뭉쳐져서 등판에 하나씩 크게 생기곤 했습니다. 이것이 지나쳐서 수술을 받기도 했는데 한 세 번쯤 수술 받은 기억이 납니다. 대단치 않은 수술이지만 어쨌든 수술은 수술이니까 칼을 대기 전에 먼저 국부 마취를 합니다. 환부 주위를 돌아가면서 마취주사를 놓고는 의사 선생님이 제게 묻습니다. "아픕니까, 안 아픕니까?" 그리고 조금 기다렸다가 환부를 꾹꾹 누르면서 또 묻습니다. "아픕니까?" 아프다고 하면 한 번 더 마취를 하고 칼을 대기 전에 다시 묻습니다. "아픕니까?" 여전히 환부에 감각이 남아 있어서 아프다고 하면 다시 바늘을 찔러 마취를 시킵니다. 그렇게 해서 완전히 마취가 되어 아픈 것을 느끼지 못할 때에 수술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주사를 여러 번 놓았는데도 쉬 마취되지 않고 통증이 있었습니다. 그때 의사 선생님이 한마디합니다. "아직 덜 죽었구먼."
왜 그렇게 아픈 것이 많습니까? 덜 죽어서 그렇습니다. 죽어야 할만큼 죽지 못해서, 완전히 죽지 못해서 고민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십자가, 십자가, 말만 했지 언제 십자가 져보기나 했습니까? 가까이도 못 가보았습니다. 그러니 고민 그칠 날이 없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완전히 죽었다면 아픔이 없습니다. 덜 죽어서 고통을 겪습니다. 덜 죽어서 믿음이 아니자랍니다.
나를 십자가에 완전히 못박아보십시오. 아픔도 슬픔도 고민도 없을 것입니다. 나를 십자가에 완전히 못박아버려야 비로소 겨자씨 만한 믿음,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내가 도대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입니까?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자기를 가리켜 가장 작은 자, 죄인의 괴수, 핍박자, 폭행자, 그리고 만물의 찌꺼기만도 못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을 그처럼 평가하고 있었기에 어떠한 어려움, 어떠한 오해를 받아도 그는 변명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여전히 감사하고, 여전히 주님을 찬양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쓴 편지, 특히 로마서를 봅시다. 맨 처음에 나오는 말이 무엇입니까? "파울로스 둘로스 크리스투 예수"-"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나는 노예다'라고 시작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인사요, 명함입니다. 종된 자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종한테는 소유권이 없습니다. 내 것이 없습니다. 죽을 자유도 없습니다. 절대순종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의 능력도 지혜도 순종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순종함으로 지혜로워지고, 순종함으로 능력이 있을 뿐이지 내 신념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신념이 아닙니다. 선물입니다. 어느 대통령을 위한 기도문 중에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이여, 이 대통령으로 하여금 자기 신념대로 살지 않게 하시고, 당신의 진리에 겸손히 순종하는 믿음과 용기로 살아가게 해주시옵소서!"
내 신념 가지고 사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오직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버리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온전히 순종할 때, 비로소 믿음의 성장이 있습니다.
내가 수고했으나 영광은 주인께로 돌립니다. 주인만을 기뻐합니다. 주인만을 자랑합니다. 이것이 종된 자의 생활이 아닙니까? 이처럼 자기를 종으로 생각할 때에, 나는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할 때에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종한테는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이 있을 뿐입니다. 마땅히 하여야 할 일, 당연히 하여야 할 일을 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때에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게 됩니다. 말이 많다는 것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됩니다.
번민이 많다는 것은 말만 하기 때문입니다. 행동으로 옮겨질 때에 마음이 단순해지고 생각이 정리되는 것입니다. 행동이 문제를 풉니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이 있습니다. '죄의 반대는 믿음이고, 그 믿음은 순종이다.'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있는 길은 자기 의를 내세우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선행을 쌓는 데에 있지도 않습니다.
오직 믿음, 오직 순종-여기에 죄를 이길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성도이기에 성도의 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이기에 제자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일이 있습니다. 속죄 받은 사람이기에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일이 있습니다. 사랑 받았기에 사랑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선택받았기에 복음 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다-바로 이것이 기독교 윤리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당연히 하나님의 자녀다운 생을 살아간다-이것이 기독교 윤리의 기본 교리입니다.
여기, 여러분이 익히 잘 알고 있는 한 가지 비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 이하를 보십시오. 주인한테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빚을 갚지 못해서 통사정을 하니, 주인은 관대하게도 그 빚을 깨끗이 탕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자기한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同官) 하나를 만나서 어찌하는가 보십시오. 동관의 멱살을 잡고 빚을 독촉합니다. 그 동관이 조금 더 기다려달라고 엎드려 빌지만 인정 사정없이 굴며 옥에 처넣고 맙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해준 주인이 이를 섭섭히 여기고 꾸짖습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우리의 주인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데, 우리는 이웃을 용서치 아니하고 사랑하지 아니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보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내가 사랑, 진리, 은혜를 운위하면서도 마음은 왜 이처럼 답답합니까? 왜 사죄의 은총이 내 마음에 없습니까? 마땅히 용서해야 할 사람을 내가 용서치 않은 까닭입니다. 그 때문에 내 죄의 용서받은 기억이 내 마음에 살아 오르지를 않는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모름지기 우리는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값없이 받았으니 값없이 주고, 용서받았으니 용서한다는 것-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때, 여기에서 믿음이 자랍니다.
종은 보상(補償)을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가 명색이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한다면 결코 바라는 마음이 없어야 됩니다.
모든 원망은 보상을 바라는 마음에서 생깁니다. 보상을 바라는 마음은 우리들의 수고를 모두 헛수고로 만들어버립니다. 어떤 때에는 물질로, 어떤 때에는 명예로, 또 어떤 때에는 말로, 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 인사라도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러한 마음 때문에 모처럼의 선행도 그 의미를 읽고 맙니다.
여러분, 받는 자는 노예입니다. 주어야 합니다. 주되 무엇인가를 되돌려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 또한 노예입니다. 주되 거저 주는 사람이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순결한 마음으로 주어야 합니다.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보상을 바라지 않고 봉사할 때에 우리는 참 행복을 맛봅니다.
사랑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가정과 사회, 우리의 교회에 원망이 있는 것은 왜입니까? 섭섭한 마음, 어두운 마음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입니까? 보상심리 때문입니다. 어차피 줄 것은 깨끗하게 줄 것입니다. 어차피 섬김으로 시작한 일은 섬김으로 끝내면 그만입니다. 희생으로 뿌렸으니 희생으로 맺을 것입니다.
시시한 칭찬, 작은 인정(認定)에 미련을 두어 못난 인격으로 전락할 것입니까? 깨끗하게, 순전하게 주자-왜입니까? 이미 받은 것으로 족하니까요. 벌써 많이 받았으니까요. 이미 받은 사랑으로, 이미 받은 은혜로 너무 벅차고 넘치기 때문에 이제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순전하게 봉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자라고, 여기에 은혜가 있습니다.
그리고 끝에 가서 고백합니다. "나는 무익한 종이라"-참된 봉사자의 고백입니다. 있는 대로 수고하고 희생했으나 끝에 가서 "나는 무자격합니다. 나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마치 친정 어머니가 시집간 딸한테 된장 고추장 다 퍼주면서도 아까워하지 않고 오히려 더 줄 것이 없나 살피며 안쓰러워 하는 마음과도 같습니다.
어떤 가정을 보면 아이들을 키우면서 꼭 남의 집 아이들과 비교를 합니다. 아무개는 이번에 몇 등 해서 장학금 받는다던데 너 누구를 닮아서 그렇게 공부를 못하느냐, 아무개는 얼마를 가지고 저축까지 하는데 너는 용돈 쓰는 것이 왜 그렇게 헤프냐…… 아이들이 잠깐동안은 그런 잔소리를 아무 소리 없이 들어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그들도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개는 이번에 아버지한테서 무슨 선물을 받았고, 아무개는 한 달 용돈이 내 용돈의 두 배인데…… 저희 부모네와 남의 집 부모네를 천칭에 올려놓고 비교할 것입니다. 참으로 큰일이지요.
비교 의식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교육적인 효과를 보더라도 0점입니다. 자녀를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로 키울 수 있는 비결은 진실에 있습니다. 아비 어미는 이 만큼밖에 못해주는구나, 미안하다, 좀더 넉넉하게 해주었으면 좋으련만-마음으로부터 타이를 때에 참사랑을 느끼는 것이 자녀입니다. 부모가 자녀한테서 보상을 바라겠습니까? 아무리 주고 또 주어도 부족하게만 느낍니다.
이 부족한 것, 이 안쓰러움을 감추려고 해서 궁색하게도 "나 자랄 때에는……" 하는 식으로 큰소리치거나 남과 비교하거나 하면 자녀들은 비뚤어지기 쉽습니다.
진실이 없는 곳에는 감동도 없고 고마움도 없습니다. 주고도 미안한 마음, 희생하고도 부족한 마음, 더 주고 싶은데 없어서 안타까운 마음-이런 진솔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주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늘 아쉽고 부족하여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럴 때에 믿음이 자라고,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나의 부족함을 고백하는 마음, 절대적 겸손, 절대적 감사-여기에 믿음의 성장이 있습니다. 비로소 하나님 나라가 그 마음에, 그 가정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주님, 우리에게 그 믿음을 더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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